공수처 당론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고 재심을 청구한 지 5개월이 지났습니다. 당 지도부가 바뀐 지도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간 윤리위 회의도 여러 차례 열렸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고 않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토론도 없었습니다. 결정이 늦어지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의 판단이 미래에 미칠 영향을 성실히 분석하고 고민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어떻게 해야 가장 욕을 덜 먹고 손해가 적을까 계산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제가 떠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징계 재심 뭉개기’가 탈당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민주당은 예전의 유연함과 겸손함, 소통의 문화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을 서슴지 않는 것은 김대중이 이끌던 민주당, 노무현이 이끌던 민주당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편 가르기로 국민들을 대립시키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범법자, 친일파로 몰아붙이며 윽박지르는 오만한 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우리 편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상대방에게는 가혹한 ‘내로남불’, 이전에 했던 주장을 아무런 해명이나 설명 없이 뻔뻔스럽게 바꾸는 ‘말 뒤집기’의 행태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항상 옳고, 우리는 항상 이겨야’하기 때문에 원칙을 저버리고 일관성을 지키지 않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런 모습에 대한 건강한 비판이나 자기반성은 ‘내부 총질’로 몰리고, 입을 막기 위한 문자폭탄과 악플의 좌표가 찍힙니다. 여야 대치의 와중에 격해지는 지지자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당의 지도적 위치에 계신 분들마저 양념이니 에너지니 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눈치를 보고 정치적 유불리만을 계산하는 모습에는 절망했습니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저의 책임도 큽니다. 정치적 불리함과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비난을 감수하고 해야 할 말을 하면서 무던히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당이 나아가는 방향을 승인하고 동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항의의 뜻으로 충정과 진심을 담아 탈당계를 냅니다.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얼핏 보기에 영리한 말을 했지만, 그런 영리한 생각이 결국 약자에 대한 극단적 탄압인 홀로코스트와 다수의 횡포인 파시즘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까지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집권여당이 비판적인 국민들을 ‘토착왜구’로 취급한다면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이 훼손되고 정치에 대한 냉소가 더욱더 판을 칠 것입니다. 탄핵을 거치면서 보수, 진보를 넘어 상식적인 세력들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정치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과거에만 집착하고 편을 나누면서 변화의 중대한 계기를 놓친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정치는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 편이 20년 집권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도 없습니다. 공공선을 추구하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씩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한 일이라도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스스로 잘못한 것은 반성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나갈 때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게 됩니다. 특히 집권여당은 반대하는 사람도 설득하고 기다려서 함께 간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1987년 대선 때 생애 첫 선거를 맞아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한 이래 계속 지지해왔고, 6년 전 당원으로 가입해서 대변인, 전략기획위원장 등 당직을 맡으며 나름 기여하려고 노력했던 당을 이렇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에 있는 동안 고마운 분들도 많이 만났고 개인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일한 분들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민주당이 예전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활기를 되찾고 상식과 이성이 살아 숨 쉬는 좋은 정당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나라의 재정은 그 끝이 정해져 있소. 누군가가 공짜로 밥을 얻어먹는다면 누군가는 곡식을 털어 나라에 바쳐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의 아들딸들이 갚아내야 할 것이외다. 빼앗는 자가 있는데 어찌 빼앗기는 자가 없겠소이까. 여기 자신이 빼앗기지 않고 공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손을 들어 보시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백성이 제 손을 번쩍 들어
치켜세웠고, 서생은 “과연 사람을 홀리는 것은 공짜 밥과
공짜 술뿐이로다. 듣던 대로 그는 뱀처럼 교활한 자로구나.” 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자리를 떴다. 조정의 구휼미는 동이 났고 역병 아래의 소상공인과 노약자, 취약계층의 아동들은 결국 관아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그날 밤, 만백성이 배를 두드리는 태평성대의 날이 도래했다며 취객들은 고성방가했다. 민촌의 개들이 컹컹 짖으며 응수했고 밤새 소란스러워 백성들은 잠을 설쳤다.
토사물 3법은 결국 어느 대신이 예언했던 대로 전세 시세를
바짝 추켜올렸다.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백성들은 폭등한 전세 시세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토사물 3법을 입안했던 호조판서가 가장 먼저 토사물에 갇혀 허우적댔는데 백성들은 이를 두고 자승자박이라며 조롱했다. 진정한 지옥 불은 갱신계약권이 소멸한 이후에 펼쳐질 요량으로 낮게 도사려 화기를 억눌렀다. 도성의 밤은 음산했고 깊이 시려 아리었다.
인내하는 목격자, 린지 아다리오. 세계의 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기록한 여성 사진기자. 수단 반란군으로 가득찬 다르푸르의 트럭에 있든, 위험천만하기로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코렌갈계곡의 도랑에 있든, 우리는 연민이 담긴 그녀의 사진을 통해 아다리오가 목격한 것들의 힘을 마주하게 된다.
_오프라 윈프리('2010 오프라 윈프리가 선정한 여성 20인' 추천사)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회고록. 리비아, 다르푸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취재해온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 그녀의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요동칠 것이다.
_리즈 위더스푼(배우, 영화제작자)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진기자인 아다리오의 사진만큼이나 훌륭하다. 전 세계 가장 위험한 곳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녀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포착해왔다. 그녀는 기적 그 자체다. 이 책 또한 기적이다.
_팀 와이너(<뉴욕 타임스> 기자, 퓰리처상 수상 저널리스트)
린지 아다리오 Lynsey Addario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비는 여성 종군사진기자. 1973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태어났다. 1995년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19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를 시작으로 〈AP통신〉 〈뉴욕 타임스〉 〈내셔널 지오그래픽〉 〈타임〉 등 여러 매체와 일했다.
전쟁지역의 여성 인권에 대해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아다리오는 200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며 탈레반 치하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다. 9ㆍ11테러 이후에도 이라크, 수단, 리비아, 시리아, 소말리아, 콩고 등에서 동시대의 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현장을 취재했다. 2009년에는 〈뉴욕 타임스〉 취재팀과 함께 작업한 〈탈레바니스탄〉 시리즈로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맥아더 펠로십’에 선정되어 50만 달러를 지원받아 미국의 명실상부한 종군사진기자로 자리하게 된다. 2010년에는 ‘오프라 윈프리가 선정한 여성 20인’에 이름을 올렸고, 2015년에는 엘 문도El Mundo 저널리즘상과 미국국제언론인센터ICFJ에서 수여하는 국제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6년에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의 전쟁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세 어린이들의 기록을 담은 〈난민The Displaced〉 시리즈로, 2018년에는 시리아 난민문제를 다룬 〈집을 찾아서Finding Home〉 시리즈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종군사진기자가 된 이래로 그녀는 수많은 나라에서 사고를 당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고, 함께 일하던 동료와 군인, 민간인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계속해나갔고, 이 기록을 묶어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와 사진집 『전쟁과 사랑에 대하여Of Love & War』를 출간했다. 종군사진기자의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아다리오는 이후로도 영아사망, 청소년범죄, 미성년자 성폭행, 영양실조, 아프리카의 교육 등 여러 인권문제를 카메라에 담아내며, 사진으로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힘쓰고 있다.
옮긴이 구계원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도쿄일본어학교 일본어 고급코스를 졸업했다. 미국 몬테레이 국제대학원에서 통 번역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충돌하는 세계』 『생리의 힘』 『열두 가지 레시피』 『제가 투명인간인가요?』 『영국 육아의 비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 『난센스』 『술취한 식물학자』 『사랑할 때 우리가 속삭이는 말들』 『화성 이주 프로젝트』 『옆집의 나르시시스트』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1부
세계를 누비며
코네티컷, 뉴욕, 아르헨티나, 쿠바, 인도, 아프가니스탄
뉴욕에서는 아무도 두번째 기회를 주지 않아 아이는 몇 명이에요? 이제 전쟁이 시작된 거야
2부
9ㆍ11테러 이후의 몇 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당신 같은 미국인은 더이상 여기서 환영받지 못해 총알은 두렵지 않아 저 여자에게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해
3부
내 삶의 균형을 찾아
수단, 콩고, 이스탄불,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프랑스, 리비아
여성은 출생지의 피해자 당신 일을 해, 그리고 다 끝나면 돌아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 코렌갈계곡 운전사는 끝났어
4부
삶과 죽음
리비아, 뉴욕, 인도, 런던
너는 오늘밤 죽을 거야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여행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나의 아이, 루카스
에필로그 추천의 말
반란군이 기관총 폭격을 하는 카다피군 헬기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다. 반란군은 카다피군에게서 라스라누프를 재탈환했지만, 다음날 빈 자와드에서 밀려나 다시 동쪽에 있는 라스누프로 향했다. 리비아 동부, 2011년 3월 6일.
반란군이 벵가지에서 싸울 지원군을 모집하고 있다. 2011년 3월 1일.
반란군 병사가 라스라누프의 한 병원 바깥쪽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위로하고 있다. 2011년 3월 9일.
반란군 병사와 운전병이 폭탄과 전투기를 예상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2011년 3월 10일.
반란군 병사들은 라스라누프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날 최전선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2011년 3월 11일.
우리가 포박되었던 곳에 떨어진 끈 풀린 내 운동화.
아버지 필립과 어머니 카밀.
수영하는 어린 시절의 린지.
가족사진. 1975년경.
아버지 필립과 브루스
집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는 쿠바의 한 부부. 1997년.
뉴욕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트랜스젠더. 1999년.
동틀 무렵 콜카타 거리에서 목욕하고 있는 인도 남자들. 2000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2000년 5~7월.
카불의 여성병원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2000년 5월.
페샤와르의 반미 시위. 2001년 10월.
파키스탄의 폐샤와르에서 코란을 배우고 암송하는 여성과 소녀들. 2001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지하드 여설 시리즈, 2001년 11월.
탈레반의 핵심거점인 칸다하르가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2001년 12월
탈레반이 몰락한 후의 칸다하르. 아프가니스탄 남성들이 스스로를 주지사로 선출한 셰르자이의 맨션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2001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청년들이 탈레반 몰락 이후 최초로 공공장소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2001년 12월.
미국이 쿠르드족 군인들과 연합하여 알 카에다와 연계되었다고 알려진 원리주의자 단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가운데, 쿠르드족의 페시메르가 군대가 안사르 알 이슬람의 영토에서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이라크 북부 할랍자 근처. 2003년 3월 30일.
이라크 북부 할랍자 근처의 검문소에서 안사르 알 이슬람 테러단체가 감행한 차량폭탄테러 직후, 민간인과 쿠르드의 페시메르가 군인들이 중상을 입은 동료 군인을 차에 옮기고 있다. 2003년 3월 22일.
<뉴욕 타임스> 이장욱 기자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며칠 후에 키르쿠크의 미국-페시메르가 합동 군사기지의 의료시설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아버지와 다친 아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내 모습을 찍었다. 2003년 4월.
키르쿠크가 이라크 중앙 정부의 통치에서 해방된 후 페시메르가 병사들이 키르쿠크 정부 건물에 붙어 있는 전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의 포스터를 훼손하고 있다. 2003년 4월 10일.
모술에 있는 이라크 전 지도자 후세인의 궁전 주변에 조성된 인공호수에서 수영하는 아이들. 2003년 4월 29일.
이라크 도시 티크리트가 공화국 수비대의 통치에서 해방된 날, 후세인의 궁전 앞에서 면도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국 해군들. 2003년 4월 14일.
바그다드 남쪽의 집단 매장지에서 수습된 수많은 유해 사이를 걸어가던 이라크 남성이 벽에 기대 서 있다.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후 이라크 전역의 집단 매장지에서 수습된 수천 구의 유해는 과거 독재정권이 저지른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003년 5월 29일.
이른아침에 미군이 발라드 근처의 건물에서 발견된 이라크인을 억류하고 있다. 미군 정보부는 이 남자를 후세인을 지지하던 바스당 소속으로 지목했다. 제4보병사단의 미군들은 군사력을 과시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이라크측의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실시하는 대대적인 야간 공습과 순찰에 참여했다. 공습은 티그리스강을 따라 바스당의 근거지이자 후세인의 뿌리깊은 지지기반으로 추정되는 바그다드 북쪽의 티크리트까지 이어졌다. 2003년 6월 29일.
제4보병사단 제3여단 제68기갑연대의 제1대대. 소속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 북쪽 발라드 공군기지 근처를 야간 순찰하던 도중 이라크인들을 일시적으로 억류 및 수색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직후, 한 이라크 민간인이 미군을 노리고 도로에 설치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원격조정 폭탄을 밟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발사고로 해당 이라크 민간인은 크게 다쳤다. 2003년 6월 27일.
스무 살 카힌도가 콩고 동부 북키부의 카냐바용가라는 마을에서 강간으로 태어난 두 아이와 함께 집에 앉아 있다. 카힌도는 본인이 르완다 병사들이라고 주장하는 여섯 명의 인테라함웨에게 납치되어 거의 3년간 갇혀 있었다. 납치범들은 지속적으로 카힌도를 강간했으며, 카힌도는 첫아이를 숲속에서 낳았고 탈출했을 때쯤에는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2008년 4월 12일.
비비안(28세, 남키부 거주)
● 비비안
비비안은 아이 셋을 낳았으나 아이들 중 한 명을 영양실조 또는 에이즈,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의 이유로 막 잃은 상태였다. 비비안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다가 겪은 어려움과 최근에 딸을 잃은 고통을 털어놓았다. 어떤 여성이 비비안에게 산길을 따라 카사바cassava(탄수화물이 풍부한 열대지방의 구황작물) 가루를 운반하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비비안은 바로 그 산 속에서 남자 세 명을 만났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자들은 3일 동안 비비안을 잡아놓고 여러 차례 강간햇다.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온 남편은 비비안이 납치되어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녀를 버렸다. 그후 비비안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으며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비비안은 임신 8개월이었는데 당장 다음날 배 속의 아이를 출산한다고 해도 산파 비용조차 지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설탕조차 없었다. 비비안이 가진 것이라고는 남자들이 남겨놓은 질병뿐이었다. 나는 비비안에게 에이즈 치료약을 먹고 있느냐고 물었고, 비비안은 짙은 자주색 가방을 열어 알약 몇 개와 점심으로 먹을 감자 한 알을 보여주었다. 비비안은 이제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잇었으며, 자신이 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밝혔다.
뷰밀라(38세, 카니올라 거주)
● 뷰밀라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뷰밀라는 자고 있었다. 르완다 공용어인 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는 남자들 아홉 명이 현관문을 발로 차서 연 다음 집으로 들어와서 옷과 밧줄로 뷰밀라와 아이들의 손을 묶고 도둑질을 했다. 뷰밀라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침입자들은 뷰밀라의 손을 풀어준 다음, 훔친 물건들을 그녀의 등에 지워 산속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뷰밀라가 일주일 동안 언덕을 오르내리고 산속을 헤맨 끝에 탈진하여 쓰러지자 남자들은 그녀를 발로 찼다. 일행이 첫번째 반란군 검문소에 도착하자 일부는 군복, 일부는 운동복을 입은 남자들이 뷰밀라가 등에 지고 있던 짐을 풀어놓은 다음 거듭해서 강간했고, 몇몇 남자들이 그녀의 물건들을 가져갔다. 적어도 아홉 명이 넘는 남자들이 뷰밀라, 그리고 같은 시기에 끌려온 다른 여성들을 탁 트인 커다란 방에서 강간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반란군 지휘관은 뷰밀라를 자신의 '아내'로 점찍었고, 뷰밀라는 하루종일 강제로 지휘관의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수없이 강간을 당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뷰밀라의 몸에 동물처럼 끈을 묶은 뒤 강까지 따라갔다.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은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다른 포로들에게 시체를 보여주었다. 결국 납치범들은 포로 한 명과 소 세 마리를 교환하기 위해 뷰밀라와 함께 억류되어 있던 남자 중 한 명을 다시 마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한 명당 소 두 마리씩밖에 받지 못했고 납치범들은 뷰밀라를 비롯한 포로들에게 매질과 채찍질을 한 후 발로 타고 옷을 빼앗았다. 마침내 꺼져버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포로들은 옷도 입지 못한 채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마을로 돌아왔다. 그 시점에 뷰밀라의 남편은 마을로 돌아와 있었고, 뷰밀라는 지휘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남편은 르완다 후투족 무장단체인 인테라함웨의 아이를 임신한 뷰밀라레게 분노하여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제 뷰밀라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했다.
"제가 바라는 바는 그저 학교에서 제 아이들을 받아주는 것뿐입니다. 예전에는 가축을 길러서 학비를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정부는 모든 아이들의 학비 지원과 무료 교육을 약속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채 집으로 보내고 있어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콩고는 어떤 나라가 되겠어요?"
마펜도(22세, 버할레 거주)
● 마펜도
마펜도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마펜도가 집단강간을 당했고 그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 갈 돈과 교통수단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전에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간 우리는 어머니, 자매들과 함께 오두막 밖에 앉아 있는 마펜도를 발견했다. 그녀는 온몸에 발진이 돋은 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한때는 아름답고 윤기가 돌았던 검은 피부는 발진으로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쇠약하고 뼈밖에 남지 않은 그녀는 나와 악수할 힘조차 짜내기 힘들어했다. 마펜도 역시 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는 다섯 명의 군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해서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지 이제 5개월이 되던 때였다. 그 사건 이전에는 평생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남자들이 돌아가며 여러 차례 자신을 강간한 다음 병을 옮기고 몸 전체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다는 것뿐이었다. 마펜도는 매트리스로 사용하는 나무판자에 누웠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터키 해안에서 나와 폴. 2007년 7월.
제173공수여단 배틀컴퍼니의 병사들이 코렌갈 전초기지의 대피소 근처에서 박격포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
아발란체 작전, 코렌갈계곡, 2007년 10월 18~23일.
아발란체 사태 작전. 커렌갈계곡. 2007년 10월 18~23일.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탈레바니스탄 시리즈. 2008년 7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탈레바니스탄 시리즈. 2008년 7월.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주의 산비탈에서 분만을 준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누르 니사. 2009년 11월.
한 미국 해병대원의 죽음. 아프가니스탄 남부. 2010년
바그다드에서 3D 영화를 보는 이라크 사람들. 2010년
시에라리온에서 사망한 산모. 2010년.
리비아 동부에서 민중봉기가 세력을 얻는 가운데 벵가지의 주거지역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둘러싸고 노는 아이들. 2011년 2월 28일.
튀니지로 인도되기 전, 트리폴리 주재 터키 대사관에서. 왼쪽부터 스티븐 패럴, 타일러 힉스, 터키 대사 레벤트 사힌카야, 나, 앤서니 샤디드.
소말리아 아이들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여성에게 비스킷을 먹이려 하고 있다. 이 여성은 소말리아의 오랜 가뭄을 피하여 케냐 국경을 넘은 후 이날 아침에 소말리아와 인접한 케냐 다다브의 난민캠프다. 그 당시 이미 수용인원을 크게 초과해 물, 위생용품, 식량, 주거지와 같은 필수 자원이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유입되는 새로운 난민들과도 배급품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이곳 난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2011년 8월 20일.
소말리아의 의사가 모가디슈의 바나디르병원에서 심각한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18개월 된 아기 아바스의 심장 박동을 확인하고 있다. 이 병원의 대다수 병동은 바닥에 누워서 자는 환자들로 포화상태였다. 2011년 8월 25일.
아들 루카스 사이먼 데 벤데른, 2011년 12월 28일.
이 책에는 아다리오의 인생이 담겨 있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유일무이하다. 전 세계를 배경으로, 아다리오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는 매우 특별한 모험에 착수한다.
_덱스터 필킨스(<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타고난 재능으로 동시대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아다리오는, 9 · 11테러라는 잔인한 사건 이후에 성장한 젊은 사진기자들의 선두에 서 있다. 그녀는 독보적인 추진력과 용기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인도적이며 풍부한 유머를 구사한다.
_존 리 앤더슨(<뉴요커> 소속 종군기자)
놀라울 정도로 영화적이다. 낯설고, 생각을 환기시켜주는 생생한 사진과 아름다운 기록이 담긴 책. 독자들이 좀더 렌즈를 가까이 대고 이 글을 읽는다면, 아다리오가 인간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웅대한 생각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바라보는 공감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_<보스턴 글로브>
회고록의 첫 장면은 단단한 주먹으로 날리는 강력한 펀치 같다. 아디리오는 여성의 성역할이 한정된 남성중심 국가에서 겪은 경험뿐 아니라 남성 동료들과 미군들에게서 존중받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만 했던 여성으로서의 좌절감을 조명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적군의 영토에서든, 정치를 논할 때든, 이것 저것 재지 않고 늘 앞장선다.
_<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풍부한 삽화가 담긴 회고록이자,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직업적 소명으로 삼은 사진기자의 일기. 아다리오는 자신과 비슷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한 시각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로써 사람들이 안락한 영역에서 벗어나 주변을 볼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전달한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다리오가 경험한 모험과 투쟁의 순간들. 발빠르게 세계의 갈등을 포착하는 종군기자가 살아낸 인생과 도전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_<워싱턴 포스트>
아다리오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주제를 찾아내고 포착했기 때문이다.
_<AP통신>
평범한 미용사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진기자로 성장한 아다리오의 매혹적인 이야기. 아다리오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동시에 힘든 일인지 철학적으로 보여준다.
_<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 수상자인 아다리오는 세계의 전쟁과 분쟁을 경험했던 여성 사진기자의 삶을 솔직히 묘사하며 저널리즘 분야에서 큰 업적을 달성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세계의 모든 전장에서 인간성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선사한다. 특히 아다리오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직업의 영역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잘 전달하고 있다. 광신도를 다루든, 무척 까다로운 편집자를 다루든, 카메라를 지니고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고, 그 어떤 고난에도 멈추지 않은 아다리오의 생생한 회고.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영감을 고무시킨다.
_<커커스 리뷰>
사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아다리오의 글은 고통과 불의를 기록함으로써, 정치와 여론 형성에 잠재적 영향을 주는 종군사진기자의 역할을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아다리오는 자신이 왜 이토록 위험한 일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짜릿하지만 무서운 이 '특별한 직업'에서 '약속' '책임감' '소명'이라는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지금까지 얼마나 훌륭하게 일해왔는지 보여주는 아다리오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책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벚꽃 사이에 켜진 일루미네이션 아래에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든 모던걸, 모던보이, 도포를 입은 노인이 동시에 보이며, 다른 만문 만화에서도 어린아이, 아버지, 룸펜까지 밤벚꽃놀이를 위해 창경원으로 모여들었다.
벚꽃 터널을 빠르게 휘돌아 나온 조선인 구경꾼들은 춘당지 앞 잔디에 설치된 공연장 바닥에 앉아서 '값싼 레뷰'를 하는 '레뷰걸'의 종아리 곡선에 황홀해하고 '흔한 요술, 기술'에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전통 무용 · 가부키 같은 일본의 전통 연행, 서양 음악과 춤, 마술 · 곡예 등 서로 이질적인 내용의 연행이 이어지는 방식인 레뷰는 근대를 설명하는 수사의 하나이다.
지은이 김해경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사회적 구성으로 본 서울의 역사문화경관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간에 구현되는 실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조경기사, 건축기사 그리고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를 취득했다. (사)한국전통조경학회 사무국장,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건국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경기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통 조경을 전공으로 하였으나 전통 사상과 공간의 상관관계보다 당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증적인 도상 자료에 관심이 많았다. 조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실제적인 공간 변화를 근대공원과 근대도시문화 관련 논문으로 발표했다. 공저로 『오늘, 옛 경관을 다시 읽다』, 『1930~40년대 경성의 도시체험과 도시문제』가 있고, 번역서로 『조경 설계 키워드 52: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이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근대공원 태어나다
1. 외국에서 보고 온 이상 공간, 공원 2. 한국의 최초 공원, 각국공원 3. 민중의 첫 공원, 독립공원 4. 경성의 최초 공원, 파고다공원
2부 근대공원의 성장통
1. 조선의 흔적 지우기 2. 그들의 종교, 근대공원이 되다 3. 궁궐의 개방과 테마파크화 4. 일제가 새롭게 제시하다
3부 도시문화를 느끼다
1. 인공 자연의 대중 향유 장소 2. 공공과 상업, 소외와 집중의 장소 3. 끽다점에서 맥주를 마시다 4. 근대 교양과 아동이 등장하다
4부 공원은 나이테가 없다
1. 사라진 원형, 원형과 복원의 충돌 2. 공공장소의 이념 동상과 기억을 강요하는 기념비 3. 갈 곳 잃은 노년의 공원 이야기
나가는 글
박물관에 가다. 관내에는 초목 · 조수 · 어별 · 곤충 · 고금의 진귀한 것 등 없는 것이 없다. 학과 공작, 원앙새(중략) 모두 살아 있는데 이것들을 기르고 있다. 가히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수신사일기』)
나라 안의 큰 도시마다 도서관, 식물원, 박물관, 공원 등을 개설하는데, 이는 국민의 지식을 실제적으로 돕는 큰 기틀이 되므로 정부가 크게 힘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다. (중략) 나라 안에 이러한 장소가 많으면 자연히 인습을 교도하여 바른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잇고 방탕한 행실이나 사특한 습속을 잘라버리게 되어 악한 일에 빠지는 지가 적어진다. (『서유견문』 2부 6편)
누가 도시에 있는 언덕의 위쪽으로 올라간다면, 유럽인들의 거주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공 정원(public garden)은 아름다우며 여행자로 하여금 유럽의 과학과 예술이 헐벗은 섬을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어놓은 방식을 알게 한다. (중략) 유럽인이 자부심을 가져도 당연한 일이리라. (『윤치호 일기』 1896년 12월 24일)
오늘 오후에 서대문 밖 모화관에 공원(public park)을 만들기 위한 타당성을 논의할 목적으로 중추원의 사무실에서 조선 관리들의 큰 모임이 있을 예정이다. 이 공원은 '독립공원지' 혹은 'Independence Park'로 불리게 될 것인데, 이곳에는 조선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이 세워질 것이다. 이 공원은 시민들의 개별적인 기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조선인 관리들의 머리 속에 주입된 진보적 정신의 표식이라 여긴다. 우리는 이 운동이 조선에서 공공정신의 발전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그중에서도 공원을 여기저기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간에 (중략) 정신이 피곤하고 기력이 나태해졌을 때에 공원에 들어가 한가한 걸음 걸이로 소요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수목이 우거진 그늘 밑에서 청명한 공기를 호흡하고 아름답고 고운 경치를 감상하면 가슴이 맑아지고 심신이 상쾌하여 고달픈 모습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재산을 들여 공중을 위한 즐거움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실상 부유한 분위기를 가난한 자와 함께 이바지한다는 뜻이므로. (『서유견문』 2부 6편)
중식 후 공원에 가다. 녹음이 짙고 (중략) 경치가 새롭다. 청국사람들, 상하 귀천할 것 없이 공원 밖에서 주저하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 (중략) 굉장한 규모의 이 공원은 잘 정돈된 형태로 유지되어 있다. 내가 러시아 공원들에서 좋아하는 점이란 미국에서처럼 촌스럽게 번지르르한 꽃 화단이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로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멋진 도로, 아름다운 산책로, 자연스러운 잔디, 웅장한 나무, 이것들이 러시아의 공원을 구성하고 있다. (『윤치오 일기』 1896년 6월 14일)
「대동여지도」에서의 인천과 제물포
「화도진도(花島鎭圖)」에서의 부내면과 제물포(국립중앙박물관)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의 상세(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인천거류지지도」. 『신찬인천사정』. 1898
도면에 검은 점으로 표기된 부분이 한국인 거주지
『인천-경성 간 도로시찰보고서』. 1894
인천 거류지(위) / 인천 외국공원(아래)
『조선실업시찰단 기념사진첩』. 민우사, 1912
인천부, 「대경성부대관」, 1936
일제강점기 도상 자료에 등장하는 공원 명칭
발행연도
제목
명칭
형태
축적
1893년
「제물포각국조계지도」
Public Garden
지도
non-scale
1912년
「조선실업시찰단」
인천 외국공원
엽서
-
1914년~1918년 (추정)
「인천」
산수공원
측량지도
1:10000
1916년(측량) 1929년(수정)
「인천」
산수공원
군사기밀지도
1:10000
1920년대 후반
「인천명소」
서공원
관광지도
-
1929년
「인천부관내도」
서공원
측량지도
1:10000
1932년
「인천」
산수공원
지도
1:10000
1936년
「대경성부대관」부분
각국공원, 서공원
조감도
-
1930년대 후반
「경승인천」
서공원
관광지도
일제강점기
엽서
각국공원, 서공원
1910년대 각국공원
존스턴 별장 주변
「인천지도」 요시다 하츠사브로, 1930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조선시대 간선도로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도로고(道路考)』에서 육대로로 구분했는데, 경성서북저의주로제일(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 경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 경성동저평해로제삼(京城東抵平海路第三), 경성동남저동래로제사(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 경성서남제주로제오(京城西南濟州路第五), 경성서저강화로제육(京城西抵江華路第六)인데 그중 첫 번째로 거론되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는 십대로로 구분했고, 서남지의주일대로(西南至義州一大路), 동북지경흥이대로(東北至慶興二大路), 동남지평해삼대로(東南至平海三大路),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동남지봉화오대로(東南至奉化五大路), 서지강화육대로(西至江華六大路), 남지수원칠대로(南至水原七大路), 남지해남팔대로(南至海南八大路), 서남지충청수영구대로(西南至忠淸水營九大路), 남지통영별로십대로(南至統營別路十大路) 중 첫 번째이다.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이용되었기때문에 다른 도로처럼 정치적 · 군사적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도 그 의미가 컸다.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행은 조선 전기에는정기사행으로만 1년에 4회를 보냈으며,수시로 임시 사행이 파견되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사절을 조선에 보내왔었다." 김지현, 「18세기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반송방」. 『서울학연구』 제67호, 2016
의주대로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의주대로 일대. 「도성도」. 1788
영은문 주변 경관. 「경기감영도」. 19세기
의주로에 위치한 영은문과 모화관
영은문 상세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독립문). We do'nt know as its inscription will be writen in on-mun but we wish tin might. This arch means independence not from china alone but from Japan from Russia and From all European powers. Not that she could stand against them in the brent of war but that she is so situated that the interests of peace, of progress demand for the and will seeura to her the enjoyment of an integral position among the powers of the East(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구지(舊址)에 새롭게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의 건립 결정한 사실을 기뻐한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새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과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중요하여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享有)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독립관에서 찍은 독립문 기공식 사진(왼쪽) / 확대한 사진에서 보이는 녹문 형태(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개울은 말끔한 석축으로 정비되고 그 위로 띄엄띄엄 다리가 놓인다. 개울 양쪽 호안을 따라서 버드나무가 일렬로 늘어서고, 그 아래로는 잘 만든 도로가 있으며, 그곳으로 마차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개울 양편의 담은 점차 언덕 쪽으로 높아져서는 부드럽게 언덕으로 이어지고, 이곳저곳에는 낙엽수와 관복들이 식재되며, 산책로와 도로가 구불구불 들락날락한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들은 틀림없이 명실상부한 근사한 공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주된 관심을 끄는 것은 1894년에 헐어버린 영은문 자리에 세워질 독립문일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7월 2일)
독립관과 독립문 주변 경관
독립관과 국민연설대
『한국풍속풍경사진첩』. 경성일한서방, 1910
'동광사' 광고
「매일신보」 1911. 11. 27
독립관은 처음에 모화루라고 불렀으나 이조 성종 12년 루(樓)를 고쳐 관(館)으로 하였고, 더욱이 무과의 등용시험소로 삼아 무이소(武二所)라고도 불렀다. 관은 지금의 건물을 고치고 또한 증축을 더하여 일진회의 의장으로 충용함으로써 한때는 황황악악(遑遑諤諤)하던 논전(論戰)이 관의 내외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뒤에 명치 43년(즉 1910년)의 4월 1일 통감부중학교가 설립되자마자 일시 가교사(假校舍)로 충당되어 졌으나, 지금은 송병준 자작이 경영하는 동광사가 되어 한창 권련초를 만들고 있다. (『별건곤』제23호,1929년9월27일)
독립문에 대한 조선총독부 보물고적지정대장(국립중앙박물관)
오랜 역사를 가진 조선 문화의 자랑거리인 고대 건물과 불상 같은 조각품과 탑, 부도, 도자기, 석비 같은 귀중한 고적 명소와 기념물 같은 보물이 수없이 남아 있으나 산일에 방임하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멸하여 가는 상황이므로 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에서 이산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법령을 세우리라고 함은 누보한바어니와 그간 종교과장 이창근씨가 오로지 이 법령을 총나하여 심의실에 넘기어 심의케 하였던 것이 수일 전에 종료되었으므로 일간 법제국에 넘길 터인데 법제국의 심의가 마치는대로 조선고적명소천연물보존령과 보물보존령의 두 가지의 이름으로 제령으로 발포될 터이라 한다. (중략) 이밖에 보존하여야 할 것은 사찰 100개소, 고분 320여 총, 사찰 외의 건물 129개소, 기타가 195점인데 고건물과 탑비, 부도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원구단은 보물로 되고, 독립문은 고적으로, 경성성벽과 사직단도 이축에, 보물고적으로 122점 지정되었다.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는 9월 중순경에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로 지정물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고적으로선 대방군태수(帶方郡太守) 장무이(張撫夷)의 고분으로 비롯하야 경성의 성벽, 독립문, 노인정, 사직단, 신라무렬왕릉, 부여의 청마산성 등 49건이 선정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9일)
독립문 주변 정비 공사 사진
「탑동연첩(塔洞宴帖)」. (서울역사박물관)
1896년 이전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 경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896년 대원각사비(위) / 1897년 대원각사비(아래)(경성부)
탑골공원 주변 담장
『꼬레아 에 꼬레아니, 사진 해설판』. 2009
짓고 있는 과정의 팔각정
『꼬레아 1903년 가을 러시아 학자 세로세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2006
팔각정 조성 전 사진
(세키노 다다시, 1904)
탑골공원 조성 초기 모습
일제강점기 엽서
「파고다공원문기타신설설계구연와병모양체공사평면도」
「파고다공원석탑신설배치도」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세키노 타다시, 『조선고적도보』 6권)
탑골공원에 세운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동상
「매일신보」 1929. 10. 17
1930년대 탑골공원 전경
(이순우, 2005))
파고다공원 뒷문박 비인터에다 조선물산장려회관을 방금 공사중인데 그 공사를 맛흔 동경토지건물회사에서 기초공사를 하다가 23척 두께 3척되는 초석 한 개를 발견하고 동회사경성지점장 서촌복송(西村福松) 씨는 즉동 학무과(學務課) 가등(加藤) 씨가 3일 오전에 현장에서가 검사한 결과 그 초석은 거금 464년 전 그 터에다 건축하엿든 대원각사 금당의 대초석으로 판명되었다. (중략) 지금 유명한 탑동 공원의 석탑이 초석을 맨들때에 가티 맨든 것이다. 벌서 수백 년이 되야 알지 못하게 된 대원각사의 대웅전 자리가 바로 그것이 든것도. 이 초석으로 말이암아 소개되게 도엇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경성부사적연구의 재료로 보관하기도 하얏다. (1931년 원각사와 관련된 금당 초석이 발굴될 당시 신문기사)
'발견된 대원각사 초석'
「매일신보」 1931. 6. 4
「남소영도」. 김홍도
남소영터, 「도성도」, 1860
「박문사 평면도」 조선건축회. 1932
박문사 전경
이전되는 경희궁 흥화문(「매일신보」 1932. 10. 14)
경복궁 선원전을 이축한 박문사 후면 고리
정선, 「사직노송도」
1894~1904년의 사직단
(이자벨라 비숍)
유휴지화된 사직단
『조선고적도보』 11권
「사직단공원평면도」 1937
「사직단공원관유림내고손목조사도」, 1937(국가기록원)
「사직단공원광장이전공사설계도」, 1940(국가기록원)
「경조오부도」, 1861
의빈성씨의 묘는 효창원 동남쪽의 작은 언덕 위에 있으며, 효창원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중략) 숙의박씨의 묘는 청엽정 2정목 11번지 효창원의 경내에 있다. 일부는 효창공립보통학교의 후면에 있다. (중략) 영온옹주의 묘는 생모인 숙의박씨 묘의 서쪽에서 99m 떨어진 곳의 작은 언덕에 있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효창공원계획도」
「매일신보」 1938. 2. 19
효창원 골프장 사진에 등장하는 최초의 캐디(1920년대), 『한국골프 일백년사』, 한국골프협회, 2000
효창원 골프장 평면도
효창원 골프장 각 홀에 대한 설명
홀
YDS
별명
설명
1
188
불명(unknown)
180야드 오르막 경사 티 전방 30야드에 깊은 계곡이 있어 어려움.
2
195
낙원(paradise)
오르막이 심하고 그린 옆에 고분이 있음. 플래토 그린(plateau green), 포대(elevated) 그린으로 쉬운 코스가 아님.
3
200
알프스(Alps)
효창원 코스 중 가장 높은 도그래그(doglag)홀. 새와 시냇물 소리가 무성한 나무 사이로 들림. 나무 사이에 남산 성곽도 보임.
4
385
펀치볼(Punch Bowl)
거친 롱 홀. 5타로 홀 아웃(hole out)하면 다행이라는 평.
5
260
고개(Toge)
중간에 높은 봉우리가 잇어 고개라는 별명.
6
263
푸른잎(Green Leaves)
숲이 깊어 롱 드라이브가 아니면 어프로치 때도 핀이 전혀 안 보임.
7
250
레슬링선수(Wresler)
티는 높은 곳에 있고, 핀은 내리막길에 있어 호쾌한 샷 요구함.
8
220
북한산(Pukhan)
9번 홀과 나란히 있으며 북한산이 잘 보인다 하여 별명이 북한산임.
9
361
F.D.A(free for all)
양쪽에 깊은 솔숲이 있고 그린 주변에 계곡이 흘러 물소리가 낭랑함. 이 소리는 흥에 겨워 모두들 한잔 마시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림.
T
2,322
삼열사 국민장 행렬
「동아일보」 1946. 7. 7
훈련원 마당의 YMCA 야구단과 청사
1919년 고종 황제 장례식에 등장하는 훈련원 청사
1900년경 「한성부지도」
훈련원은 지면이 평탄하고 또 면적이 넓어서 시민의 운동장으로 장래에 크게 필요한 지점임으로 당국에서도 역시 운동장으로 필요한 설비를 할 터라는데, 장차 훈련원에 큰 연못을 파서 스켓트 경기장도 설비할 터이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8일)
3군데의 공원은 착수할 터이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금년에도 다소간 공사를 하얏으나 아직까지도 공원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얏기 때문에 내년도에는 공사를 시작하야 부근에 수목도 많이 심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1921년 12월 26일)
훈련원공원 구성요소, 스케이트 타는 모습, 「동아일보」 1921. 12.26
훈련원공원의 위치 「대경성지도」, 1936
경성부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대정 12년, 13년, 14년도의 계속사업으로 15만 5천 원이라는 많은 돈을 들여 훈련원에 만들려던 부립 그라운드는 경비상 관계로 12년도에 착수치 못하고 이제부터 설계에 착수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에서 돈이 없다는 핑계로 계획하였던 모든 사업을 축소하여 혹은 중지한 때에 한갓 그라운드에만 전력을 다하는 데 대하여 그 내막을 알아보면 역시 정실에 관계되어 正大치 못한 사실이 잠재하였다는데 부청 당국자의 말에는 황태자 전하 어성혼(御成婚) 기념 사업으로 다른 것보다 먼저 한다고 하며 장소를 훈련원으로 택한 것은 교통의 편리와 이미 넓은 마당이 있는 관계라고 하나 다 발림소리에 불과하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경성도시개조 계획이 완정되지 못하여 그 부근은 장래 경성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인즉 위치상으로 보아 합당치 못하여 또 지금과 같이 재정이 궁핍한 때에 한 평에 10원씩이나 주고 5천여 평을 더 사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중략) 경성부에서 부득 부득 훈련원을 취한 까닭은 새로 사들여야만 할 5천여 평 땅은 고아(古我)라는 일본 사람이 사장인 조선산업무역주식회사의 소유 토지로 (중략) 처음 교섭에는 엉터리도 없는 매평에 15원이라는 비싼 값을 불렀던 것을 10원에 우물주물 하여 버릴 모양이라는데 아직 계약은 성립되지 않앗으나 만일 성립된다면 경성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리라더라. (「동아일보」 1924년 10월 26일)
「경성부공원계획지도」, 1920년대 후반
훈련원공원의 운동 시설
순서대로 정구장 / 경성운동장 / 경성풀장
왜성대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거류민회가 주도한 신사 창건과 관련이 있다. 경성에 일본인이 거류하기 시작한 이후 유지들 사이에서는 황대신궁(皇大神宮) 봉안건이 제창되었으며(1892년) (중략) 결국 신사는 왜성대공원 일대에 조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중략) 본래 일본거리(日本街)는 남산 북면 산기슭에서 시작되었다. 그 지세의 이로움이나 과거 역사 속의 감회를 살펴보더라도, 왜성대 일대는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유락(遊樂)을 즐길 수 있는 영지(靈地)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일본인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최적지로 떠올랐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1900년의 일본 공사관(후 통감 관저)
왜성대공원의 구성 요소와 조망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 입지
한양공원 개원식
현재 한양공원 석비
경성신사 주변 변화 1911년 이후
달성공원 내 요배전
이토 공작(이등박문)이 궁중의 숙청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궁전의 조영(造營)과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을 신설할 것을 진언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진언을 들은 이왕 전하는 크게 만족하시며 이를 허락하셨다. (중략)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909년 봄 마침내 준공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동양 건축물의 정수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정전과 경성 40만 시민이 꽃구경인 단풍놀이와 같이 봄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설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창경원과 조선 2000년 예술을 볼 수 있는 박물관 및 경성에 단 하나뿐인 민중의 오락장이라 할 수 있는 식물원이다. 살풍경하던 경성에 이와 같은 문화적 정취를 만들어주신 것은 모두 왕 전하의 은혜로 시민들은 이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창덕궁을 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담긴 물체에서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외의 손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하며 궁전이든 후원이든 그 희망에 따라 관람할 수 있게 개방하여 왕가의 근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면서 이왕가의 현재를 알리려 힘을 기울였다. 이로써 이왕가에 대해 우리나라(일본)가 얼마나 후하게 예우하고 있으며, 이왕가가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오해를 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이왕직에서 어떻게 하면 두 분 전하를 위로해드릴 수 있을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당히 고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식물원에 있는 연못 옆에 일본식 정취가 흐르는 정자를 지어 달맞이 연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후략) (『이왕궁비사』,1926)
박물관(博物館), 동물원(動物園), 식물원(植物園)을 지금부터 창경원(昌慶苑)으로 통칭한다. 그것은 창경궁(昌慶宮)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달 11일에는 원(苑)의 명칭을 동원(東苑)이라 하였다가 이번에 또 개정한 것이다. (『순종실록』1911년4월26일)
「창경궁급비원평면도」, 1908
순서대로 식물본관과 수정 / 춘당지와 수정 / 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경운궁과 상림원
『서울지도』, 2006(서울역사박물관)
돈덕전과 경운궁 동선
『덕수궁사』, 1938
일제강점기 엽서의 덕수궁
이왕가미술관과 석조전 정원 전경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조선시대 용산 일대
일제강점기 용산역
만철운동장의 류학생야구단 선수
「동아일보」 1930. 4. 13
수목 식재 전과 후의 경성부청 앞 '수원1'
순서대로 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18세기 중엽 /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花)」, 1786 /
정선, 「장동춘색(壯洞春色)」, 1751
30만 경성 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든 밤의 환락장 창경원의 금년 야행대회는 오는 20일 밤부터 개방하고자 하였으나, 따뜻한 봄빛에 예정보다 꽃이 일찍 피어 벚꽃(사쿠라)은 벌써 반이나 웃게 되었음으로 창경원 당국에서는 예정보다 앞서 금 18일 밤부터 개방(입장권 십전)하게 되었는데, 시간은 매일 야 오후 7시부터 10시 반까지요, 기간은 18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간이라는 바, 창경원에는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휘황찬란한 전등 조명 장치를 한 이외에 박물관 앞 광장에는 음악당을 설치하야 여흥으로 이왕가의 조선아악과 양악을 연주할 터이며 또 동물원 앞 광장에는 여러 가지 활동사진을 영사도 하고 휴식소에는 '라디오'의 설비까지 하는데, 금년에도 역시 밤마다 만경 인파로 대혼잡을 이룰 것이 지금부터 예상된다. (「조선일보」 1926년 4월 25일)
밤벚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창경원 인파, 「매일신보」 1933. 4. 26
만문만화 '일일일화(一日一畵)'
순서대로 꽃구경이 사람구경, 「조선일보」 1930. 4. 12 /
야앵 기간 레뷰쇼, 「조선일보」 1930. 4. 15
서울 풍경, 이마동(李馬銅). 공원을 말하는 것은 한 개의 우울이다. 왜그러냐 하면 이것은 숨이 막힐 듯이 헐덕거리는 근대 도회 생활자의 궁여지책으로 산출된 것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근대 도회인의 심정에 무슨 량미(凉味)를 주랴고 하다가 도리어 울적한 기분을 더해줄 뿐이다. 보라, 우리의 이 유서 깊은 탑동공원을. 오붓한 듯, 아담한 듯, 가끔 우리 발길이 돌아서는 이곳은 서울의 별천지를 그려내고 있다. 점쟁이, 관상쟁이, 천양만양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군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는 곳이다. 말막음으로 뚜엄뚜엄 울긋붉읏 피어 있는 화초도 초라하거니와 뭉그러지고 일그러져가는 창연한 팔각정의 석대도 이 더운 여름을 몸부림하는 듯, 육중한 철문을 들어서서 녹음을 넘어 바라보이는 북악만이 홀로 시원한 숨을 내뿜게 할 뿐이다. 공원, 그곳은 위조된 자연이 심오로부터 인간의 '소세공(小細工)'을 모멸하는 곳이다. 몬지를 뒤집어쓰고 실증에 떠는 그 가엾은 녹음을 보라. 우리의 이 탑골공원에서 우리의 루소의 '루비앙 · 아 · 라 · 나룸(자연으로 도라가라)' 이 얼마나 욕을 먹고 잇나 보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의 잊지 못할 곳이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
성벽을 격한 별세계, 장충단공원관 신당리 화장장. 장충단의 츈흥, 봄의 설움, 봄의 기쁨. 볏 잘드는 남산마루에 긔여올을 듯이 발도듬하는 장충단 노리터에도 새봄을 실은 신풍의 멍에가 이른지 오래였다. 그리하야 생명의 갑주로 알맛게 취한 진달레는 바야흐로 붉엇다. 벌일 듯이 담은 '벗지'의 입솔에 도움키면 잡힐 듯한 신춘의 미소가 흘럿다. 찰찰 넘쳐 졸졸 흐르는 개천가에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 구름다리의 그늘밋헤서 조으는 듯이 지저괴는 오리떼의 합창 비단물결에 꼬리치는 금붕어와 푸른 잔듸에 나물 캐는 어린처녀가 한테 어우르는 활화(活畵)의 한폭은 한 조각봄이라 하려니와 굽이진 언덕마다 만발한 개나리의 요염한 우슴가 가벼운 바람에 휘늘어진 버들이 애교 많은 춤에 소리 없는 노래와 냄새 없는 향긔를 탐하야 모아드는 수천명 인생의 질탕한 놀음노리는 진실로 천년만년의 봄을 한곳에 모힌 듯 하얏다. 송림 사이로 들리는 청춘의 속살거림이나 주점과 다점에 랑자한 술상은 모다 봄을 마지한 청춘의 자랑이니 방금 죽은 고기를 태어버리는 화장터와 성벽의 사이로 한 장충단 노리터는 실로 구십춘광의 독무대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
이 효창원은 순조황제 형님 문효세자의 원소입니다. 홍살문 밧게 잔디밧 넓고 또 솔나무 그늘이 조키때문에 이맘때는 놀러오는 사람이 만슴니다. 원소인 효창원을 가르침이 아니라 효창원 해자 안에 사람 만히 모혀드는 솔아래 잔디밧을 명물이라 한 것이겠지요. 내동리명물이란 말입니다. 한동리에서 명몰 노릇하는 명물이 알뜰은 하지요마는 세상이 다 아는 명물을 가진 동리라야 참 기운잇게 명물자랑을 할 것 아닙니까. 빨래하는 녀인데, 작란하는 아이들까지 효창원이라면 누가 몰으겟습니까. 여그와 노느 이들이 갓금 소낙비에 경겁을 하면서도 그래도 또 모혀드는 이 효창원이랍니다. 달밤에 솔밧속 경치는 참으로 형용할 수 업시 좃습니다. 그런데 으슥한 곳이 엿마는 자살하는 사람은 하나도 아니오고, 죽으랴다가도 오장까지 서늘한 솔바람에 잡렴이 사러진답니다. 한강철교가튼 사위스러운 명물과는 항여나 비교하지 마십시오. (「동아일보」 1924년 7월 20일)
온양온천, 소요산, 관악산, 우이동, 모도가 머럿습니다. (중략) 온양온천에를 간대도 토요일에는 왕복 려비가 반액이 되고 소요산을 가도 경원선 동두천에서 나리면 구비구비 선경가튼 산곡을 뜰코 드러가는 긔이한 풍경을 대하게 됩니다. (중략) 아츰에 일즉 가면 종일 놀고 저녁에 도라오게 됩니다. 절에는 술 과자의 준비까지 잇고 오십전만 내면 진수성찬을 배설하야 내놋습니다. 관악산도 경부선 안양정거장에서 나려 산길노 십리입니다. (중략) 우이동은 벗꼿의 명승이요 련도 교주 고손 의암 선생의 별장이 잇습니다. 꼿그늘 사히로 삼각산이 놉히 소사 잇고 산곡간에 흐르는 물결 우에는 꼿닙이 수를 노화 하로동안 놀기는 너모나 과만한 승지입니다. 경원선 창동까지 긔차 우이동까지 자동차 십원 돈 가지고는 넉넉히 놀너 갈 곳입니다. (『별건곤』 제51호 1932년 5월 1일)
1929년 「경성전차안내도」
탑동 까페, 근일에 신지(新池)가 조성하야 (중략) 원변(園邊)에 적당한 음식점이 무(無)하야 가경(佳景)을 견(見)하고, 청량(淸凉)을 취하고 다과를 즐길 수 없었어라 (중략) 일편 희소식이 들리는데, 원내에 적절한 '끽다점'이 명일 8일부터 개업한다더라. 끽다점은 다년 양요리의 경험이 있는 구보타(久保田) 군이 '청목당'을 봄에 건축을 시행하여 일전에 공사를 마치었다. 일명 '탑다원(까페-파고다)'라 명하였다. (「매일신보」 1914년 6월 7일)
'무시당한 삼십만 경성시민',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삼십만 시민의 유일한 놀이터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어라, 이 곳은 공원이 아니라 술집의 정원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그전부터 '청목당'이라 하는 술집이 있었거니와, 근일에 이르러 다시 청목당의 별명인지 '승리'라는 요리집을 또 새로히 지었다. 돈짝만한 터전에 술집만 지어놓고, 일반의 불평이 있는 뒷문은 닫아두면서도 따로 담을 트고 문을 내는 꼴은 정말 화가 나서 볼 수가 없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3일)
종래 경성의 공원은 억더한 경우던지 사용료 또는 차대료를 내이지 아니하면 사용할 수가 업는 고로 부자유한 일이 적지안턴 바 미리전부터 부청에서 신청하이던 공원사용료 조례 제3조의 개정이 지난 익월 20일로부터 허가되는고로 금후로는 교육 또는 체육상여 기타의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한것과 영리에 이비자하고할 경우는 물론이오. 개님비와 동자 등을 건설하는 경우라도 무료도 사용할 수가 잇게 되엿는데. 요컨대 부의 공원을 공공덕으로 개방된 것이다. 제3조의 개정은 '영리의 목적에 이바지 하지안는 경우와 또 공로 또는 위적(偉蹟)을 적하여 바라지 안이하고. 전해나러 가고자 하는 목적으로써 기념비 등을 세우는 경우에는 사용료를 면제할 수가 있다고 하얏는고로 새로히 설치되는 두 공원도 활용하게 된 것은 시민을 위하서도 가장 깃거워할만 할일이겟더라. (「매일신보」 1920년 2월 6일)
일본 맥주 광고 「매일신보」 1915. 5. 4
한참동안 이곳에서 즐겁게 노다가 샘물을 다시 한박아치식 마신 뒤에 길을 서편을 택하야 녯 성을 끼고 나리면 장충단 송림 사히에 도달합니다. 여긔까지의 로정이면이야 그리 왼만한 자근 아씨이면 대개 다리병은 나지 안을 것이올시다. 길도 매우 순탄하고 길찾기도 쉬운 덤에 잇서 아모라도 갈 수 잇습니다. 장충단까지 나려스면 아해들이 치룽에 사이다, 라무네, 껍삐루 등을 지고 사랑의 청춘들을 차자 다닙니다. 다리 압흔 김에 십전 주고 돗자리를 사서 깔고 안습니다. 아해는 짓굿게 엽해서 물건을 사라고 조름니다. 사지를 안으면 어느 때까지든지 서서 졸느니 단 두 사람의 세게를 찻는 청춘들노 엇지 견대어 참습니까. 하는 수 업시 남은 돈 삼십전에서 이십전을 분발하야 라무네 두 병을 사서 목을 춥입니다. 여긔서는 배가 곱흘 때까지 놀아도 좃습니다. 십전이 아즉도 남앗스니까 장충단 압헤만 나려스면 던차가 기다리고 잇지 안습니까. (『별건곤』 1932년 51호)
장충단공원 연못 주변의 상업 시설(일제강점기 엽서)
거긔에는 근 이백이나 되는 무리가 움주거리고 잇다. 원내의 기분은 몹시도 침체하고 혼란하야서 맛치 5, 6월 똥물에 구덱이가 논는 것 갓흐다. 갓쓰고 흔옷입은 노인, 색옷 입은 애들, 중학생, 노동자, 걸인, 지게꾼, '못지' 장수 양복쟁이 왜 친구 각종각층의 인간들이 구석구석이 안자서 또는 서서 몃달이라도 조타는 듯이 줄큿하니 어물어물한다. (중략) 정문 갓가운데는 분바른 중년게집 두엇이 담배를 픠고 안저서 출입하는 사람을 뜻잇시 흘터보는 품이 심상치 안흔 눈치엿다. 시골서 갓올나 온듯한 여학생이 대원각사비를 구경하는데 '도리우찌'를 눌러 쓴 부랑자가태 뵈는 청년이 흘금흘금 눈짓을 하는 것도 탈날 징조가 안일가. 요리점 '승리'에 '죠쥬'와 하인은 자미잇게 갈감질을 한다. ('기자 대출동 1시간 탐방 대경성 백주 암행기, 3월 29일 오후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별건곤』 제20호, 1929년 4월)
봄날 신세한탄 하는 룸펜, 「조선일보」 1934. 4. 23
덕수궁 동물원 원숭이 신입원(新入苑), 덕수궁 석조전 수풀에 소동물원을 신설중이든바 거의 준비가 완성되었으므로 동경에서 새로 사들여다가 창경원 동물공실에서 기르든 일본산원숭이, 대만종 레사스 백공작, 진공작, 봉황공작 외에 2백사십여종의 동물이 일요일까지는 덕수궁 수풀로 옮겨진다고 함. (「동아일보」 1935년 5월 16일)
'시련의 독립문. 72년 전 오늘 기공, 이젠 고가차도 밑 신세, 치욕의 영은문을 누르고, 세웠던 독립 의지, 옮길 것인가, 말 건인가 확정 없이 엉거주춤'. 독립문은 그 자리에 그냥 놓아두어도 좋을 것인가. (중략) 독립문의 장한 모습도 이젠 팽창하는 서울의 도시계획에 따라 고가차도가 머리 위에 새로 생겨나면서 '다리 밑에 웅크린 몰골이 되어간다'는 서울 시민들의 걱정들이다. 독립문이 이같은 시련을 겪게 된 것은 지난해 4월 서울시가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남가좌동-성산대교-시흥으로 이어지는 성산대로 개설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직터널과 금화터널 중간 지점에 위치, 도로계획선에 들어가게 된 독립문을 놓고 서울시 측은 현 위치에서 북쪽인 옛 영은문 쪽으로 옮겨 앉히자고 제의한데 반해 문화재 위원들은 소중한 문화재를 옮길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 팽팽하게 맞섰다. (중략) 비록 3m의 거리를 둔다고는 하지만 오는 연말이면 폭 15m 길이 528m의 고가차도가 독립문 1m 위를 동서로 가로질러 나게 돼 있다. (「동아일보」 1978년 11월 2일)
독립문지 동판 알리지 않고 묻힐 뻔. 서울시가 15일 유서 깊은 독립문 옛자리를 먼 후세까지 알리기 위한 동판을 묻으면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보도진에도 일체 알리지 않아 서울시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를 천하에 과시. 서울시는 이날 하오 5시 건설국 산하 직원들만을 입회시킨 가운데 노면으로부터 40cm 깊이에 독립문지라고 새겨진 동판을 묻고 16일 새벽 5시 그 위에 1t 무게의 원형 무쇠 뚜껑을 엎어버렸던 것.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사진기자들이 현장에 몰려들자 뚜껑을 다시 여는 등 법석을 떨어 생각 않는 서울시 공무원의 진면목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평. 이에 대해 문화재 관리 및 보존의 주무국인 서울시공보 관계자는 "우리도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이날 보신각 중건과 성산대로 개통 등 큰 행사가 겹쳐 미처 신경쓸 뜸이 없었다"고 옹색하게 변명했다. (「동아일보」 1979년 8월 17일)
순서대로
1979년 도로 밑에 묻힌 독립문지 동판 /
1979년 독립문 이전 공사 현장(서울사진아카이브)
성산대로와 독립문
한자로 쓰인 독립관 현판
협동 측량조합소 제2회 졸업 기념사진
(1909년 또는 1910년 추정)
1897년 독립관 후면
독립관 현재 모습
순서대로 2007년 서대문독립공원 재조성 사업 조감도 / 현재 독립공원 안내판
미군 공병에 의해서 올려지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의 상륜부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미군의 진주로 옛 모습으로 다시 쌓아올리기는 하였지만, 왜정 말기의 전화로 쇠창살 등이 철거되고 벽이 파손되는 등 우리의 국보를 보존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상태에 있어 보는 사람들의 한숨거리였다. 그것이 다행히 이중화 씨라는 독지가의 정성으로 자재를 던져 탑 근방을 수리하고 쇠창살을 재건하여 보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다. (「독립신문」 1946년 11월 16일)
1953년 탑골공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2년에서 1953년에 사용된 한국은행 신 천원 권의 탑골공원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967년 9월 20일
1969년 3월 26일
1983년 5월 17일
1983년 아케이드 철거 후
탑골공원 경계부의 변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정문이 된 탑골공원 정문
2001년 독립후손에 의해서
떼어진 삼일문 현판
'문화재 깔고 가는 도시계획'. 서울시 도시계획과 문화재 보존의 마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5 · 16 직후 덕수궁 담을 헐면서 후퇴시켜 투시 철책으로 대신한 데서 표면화한 말썽은 도로 확장을 위한 경복궁 담의 일부를 철거 후퇴, 사직단 정문의 도로변 노출, 고가도로 건설에 따른 수구문 철거 시비, 파고다공원 주변의 상가화, 효자동-세검정 간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한 칠궁의 일부 철거 이전, 종묘담의 철거 후퇴에 의한 도로 신설 등의 큰 문제를 제기해왔었다. (중략) '이국에서는 문화재가 있으면 길도 피해 건설한다'고 각국의 문화재 보호 의욕을 밝히는 손보기 교수(연세대)는 '근대화가 결코 과거의 문화 전통이나 유산을 없애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시당국의 성급한 의욕을 나무란다. (「동아일보」 1968년 2월 1일)
제목을 ‘코리안 미스터리’라고 붙였는데,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영국 프랑스 같은 유럽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뇌물 수수, 독직(瀆職) 사건이 터지면, 돈을 줬다는 사람은 있는데, 돈을 받았다는 사람은 없다. 흔히 노름판에서는 돈을 잃은 사람은 있어도 돈을 땄다는 사람은 없는 경우가 있다. 노름판을 벌인 조폭이나 큰손이 이미 상당한 돈을 뜯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뇌물 수수 사건은 노름판하고는 다르다. 분명 준 사람이 있으면 받은 사람도 있을 텐데, 받았다고 지목된 사람은 끝까지 안 받았다고 부인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두 사람 사이에 현찰로 돈이 오가기 때문이다.
‘옵티머스’라는 자산 운용사가 있다. 옵티머스는 원래 라틴어인데, “가장 좋은”, 그런 뜻이다. 이런 회사는 일반 투자자들에게 몇 백, 몇 천, 혹은 몇 억 규모의 돈을 모아서, 그 돈이 수천 억 규모로 커지면, 자산 운용사의 투자 전문가들이 수익률 좋고 안정적인 곳에 굵직굵직하게 투자를 한다. 그렇게 해서 6개월이든 1년이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일반 투자자에게 수익 배당금을 나눠주는 것이다. 이때 일반 투자자가 ‘나는 이제 당신네에게 내 돈을 그만 맡길 테니 내 돈을 돌려다오’ 하면 두말없이 그 돈은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투자 자금을 자산 운용사로부터 돌려받는 것을 ‘환매’라고 한다.
그렇다면 ‘옵티머스 사태’란 무엇인가. 바로 앞에 말한 ‘환매’, 즉 일반 투자자에게 원금을 돌려줘야 하는 ‘환매’가 불가능해진 상황, 회사에 있어야 할 수천 억 투자 자금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일반 투자자에게 원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을 말한다. 옵티머스사는 올해 6월17일 ‘환매 중단’을 선언했고, 회사는 사실상 공중분해 됐으며, 개인 928명을 포함해서 투자자 1166명이 투자 원금 5151억원을 대부분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언론에서 ’5000억 규모의 환매 중단 사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렇다. 자산운용사인 옵티머스를 책임진 사람들이 ‘나쁜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사기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좋은 뜻’을 갖고 운용했으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슨 천재지변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져 큰돈을 날린 게 아니다. 이들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투자자를 속이고, 거짓투성이에, 서류조작에 온갖 사기행위를 벌였다고 봐야한다. 예를 들어 ‘부산시 매출 채권’처럼 “부산시가 망하지 않는 한” 절대 돈을 떼일 일이 없는 공공기관에 투자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비상장기업의 사모 사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코스닥 상장사 인수합병 같은 위험 자산에 돈을 넣었다는 게 드러났다.
한마디로 “그러다 망한 것”이다. 그 결과 아까 말한 것처럼 올 6월17일 환매 중단 선언이 있었고, 일주일 뒤인 6월25일 검찰이 압수수색을 했으며, 다시 일주일 뒤인 6월30일 옵티머스사의 영업 정지가 결정됐고, 다시 일주일 뒤 7월7일 김재현 대표, 이동열 대표이사, 윤석호 감사 같은 관계자들이 전격 구속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은 이런 사기꾼들이 활개 치도록 마냥 허술하기만 한 것일까.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들의 자산 운용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기관들이 버젓이 있다. 이들이 네댓 개의 유령회사를 차렸고, 100장이 넘는 위조 서류를 만들었다고는 해도, 그런 사기 행각을 사전에 들여다보고 감시·감독하라고 국민세금으로 봉급을 주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예탁결제원 같은 기관이 있다. 이런 곳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산 운용사를 감시해서 선량한 투자자들의 원금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가장 커다란 궁금증이 남는다. 이런 사기꾼들은 자신들의 사기 행각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일이 터졌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일종의 구명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했을 것이다. 특히 핵심 권력기관인 청와대, 집권 여당, 금융위원회, 검찰, 이런 곳에 갖은 인맥을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종의 보험금처럼 뇌물을 상납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옵티머스 김재현 대표가 작성했다는 ‘대책 문건’이라는 게 이미 검찰에 확보돼 있다. 이 문건에는 청와대 실장급·비서관급 5명, 민주당 인사 7~8명을 포함해서 정·관계 기업인 등 20여 명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검찰에서는 부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또 옵티머스의 감사역을 맡고 있는 윤석호 변호사가 ‘펀드 하자(瑕疵) 치유 관련’이란 문건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혁진 전 옵티머스 대표이사가 민주당과의 과거 인연을 매개로 국회의원, 민주당 유력 인사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거짓으로 탄원,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주당 및 정부 관계자들이 당사(옵티머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 더 나아가 권력 실세들이 더 직접적으로 개입돼 있다는 정황도 나와 있다. 문건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 ‘이혁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줬던 정부 및 여당 관계자들이 프로젝트 수익자로 일부 참여돼 있고, 펀드 설정·운용 과정에서도 관여가 돼 있다." 정부 여당 사람들이 옵티머스의 ‘수익자’였으며, 그러니까 돈을 받아갔으며, 펀드 운용에도 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늘 아침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옵티머스의 감사역 윤석호 변호사의 처 이 모 행정관(36)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하기 전부터 옵티머스의 지분 9.8%를 소유한 대주주였다는 게 드러났다. 또 이 모 행정관이 청와대에 근무할 때 추미애 법무장관은 서울남부지검에 있는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해체했으며, 이 모 행정관은 자신이 보유한 9.8%의 주식을 김재현 대표의 비서가 소유한 것처럼 거짓으로 차명 전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행정관은 지난 6월 청와대를 사직했는데, 그녀가 청와대에 남아 있으려 한 이유는 “옵티머스에 대해 예상되는 금융당국의 조사와 검찰 수사를 저지·지연시키기 위해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또 이와 별도로 서울남부지법 법정에서는 검찰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폭로가 나왔다. ‘옵티머스 사태’와 아주 흡사한 사건으로 무려 1조6000억원의 피해를 낸 ‘라임 사태’라는 것이 있다. 이 역시 ‘라임(Lime)’이라는 자산운용사가 좀비 기업에 투자하는 등 편법 거래를 일삼고 부정하게 수익률을 관리하다가 ‘환매 중단’ 사태가 벌어진 사건, 즉 파산해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후 구속된 그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라임 자산운용사의 실소유주인 김봉현이라는 사람이 ‘당시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현금 5000만원을 전달했다’고 법정 증언을 한 것이다. 광주MBC 사장을 지낸 이강세라는 사람을 통해서 줬다는 것이다. 그 돈으로 청와대 정무수석을 움직이고, 그가 다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을 움직이면, 김상조 실장이 금감원의 조사를 무마시켜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증언이 아주 구체적이다. 이렇게 돼 있다. “작년(2019년) 7월27일 이강세 대표가 강기정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나러 간다고 하길래 집에 있던 돈 5만원권, 5000만원을 쇼핑백에 담아 넘겨줬다.”“이강세 대표가 전화를 해서 내일 강기정 정무수석을 만나기로 했는데 비용이 5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큰 거 1개는 1억원, 5개는 5000만원이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강기정 전 정무수석은 펄쩍 뛰고 있다. “완전 허위다. 민·형사를 비롯해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대응을 강력히 취하겠다”고 반박했다. ‘돈 전달’의 근거로 볼 수 있는 정황은 있다. 김봉현 씨가 이강세 씨에게 돈을 전달하는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이 있다. 호텔 이름까지 나와 있다. 그러나 강기정 전 수석은 한사코 부인하고 있다. 그는 이강세 씨를 만난 것까지는 인정하고 있는데, 돈 받은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배달 사고’가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뇌물사건에서 돈을 받은 사람이 자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돈을 준 사람은 위증일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법정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봉현 씨는 돈 받은 쪽에 대한 검찰 조사가 흐지부지될 기미를 보이자 법정에서 폭로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강기정 전 정무수석은 언론사 제소, 그리고 관련자 고발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은 원하고 있다. 이왕 제소를 한다면 끝까지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돈을 받은 사람은 없는, 코리안 미스터리가 마치 무슨 진실게임처럼 벌어지고 있는데,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권력형 게이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했다. 옵티머스 수사 과정에 드러난 정관계 실세 명단 20명, 그 내용을 밝혀야 할 것이고, ‘강기정 뇌물 수수 의혹’도 끝까지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