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04 고전필사

 

 

박수밀

2016, 토트

 

손으로 생각하기 6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옛사람의 지혜 71

 

인생의 리더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오래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 한마디

 

인생은 작은 배를 타고 긴 강을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큰 파랑이 일고 비바람이 불면 삶은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그럴 때 주저앉을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내 의지의 문제입니다. 환경은 바꿀 수 없으되 내 마음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큰 비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빠르게 전진할 수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_본문 중에서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강한 사람이다.

_노자

 

옛것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라.

이 말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 자신을 버린 것이다.

_김휴

 

박수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예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지성사를 중심으로 한 실학의 인문 정신과 글쓰기, 고전의 생태 정신, 동아시아 교류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옛사람들의 문학에 나타난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음미하고, 인문학적 관점으로 재사유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에 나타난 창의적 생각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고전 시대 지성사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를 탐구하고 있다.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새기고 싶은 명문장』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연암 산문집』 등의 책을 썼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좋은 글 따라 쓰는 '손으로 생각하기' 시리즈

 

필사는 잊고 있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손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쓰는 과정에서 한층 더 성숙해진 나를 만나게 된다. 맛의 장인에게 레시피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특유의 손맛이 있듯이, 오감을 동원해 사각사각 써내려가는 육필의 질감에서 우리는 깊이 있는 글의 참맛과 오래된 사색의 숙성미를 함께 체득할 수 있다.

 

목차

 

1 ----- 내 자신에게서 구할 뿐이다

         말과 행동

 

도끼와 칼 - 명심보감明心寶鑑
비난과 칭찬을 대하는 자세 - 명심보감明心寶鑑
남의 잘못 - 김충선, 「가훈家訓」
감춤에 담긴 뜻 - 이덕무, 「회잠晦箴」
마음의 평화를 찾는 지름길 - 이이, 「자경문自警文」
잘못을 했다면 - 윤형로, 「가훈家訓」
내가 먼저 솔선해야 하는 이유 - 홍대용, 「자경설自警說」 · 장유, 「의리지변義利之辨」 
선한 일을 하는 자, 악한 일을 하는 자 - 명심보감明心寶鑑
세 번 생각해야 하는 이유 - 이규보, 「사잠思箴」
과감히 행동해야 할 때 - 사마천, 「이사열전李斯列傳」
큰일을 하고 싶다면 - 도덕경道德經 
높은 곳을 오르는 방법 - 기준, 「육십명六十銘:승계升階」
보이지 않는 눈 1 - 권필, 「자경잠自警箴」
보이지 않는 눈 2 - 장유, 「신독잠愼獨箴」
나의 생각과 남의 말 -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사마천, 「역생 육고열전 生 陸賈列傳」 

2 -----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라

         관계의 기술

 

원한을 사지 않으려면 - 전국책戰國策, 「중산책中山策」
사람을 품는 사람 - 사마천, 「이사열전李斯列傳」
사람을 아는 방법 - 제갈량, 「지인성知人性」
배신하지 않는 자 - 정약용, 「이전육조吏典六條:용인用人」
남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 신거운, 서암췌어西岩贅語
아랫사람을 대하는 법 - 대학, 「전십장傳十章」
남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 정도전, 「금남야인錦南野人」
지적하는 사람의 자세 -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힘과 덕 - 맹자孟子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진짜 걱정해야 할 것 - 논어論語』 · 이원익, 「좌우명座右銘」

3 ----- 힘 있는 자보다 강한 자가 되라

         도전과 의지

 

두려워할 만한 것 - 권근, 「주옹설舟翁說」
당신이 괴로움을 당하는 이유 - 맹자孟子
힘 있는 자와 강한 자 - 왕양명, 「양사덕설상성서楊仕德薛尙誠書」 ·  노자老子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 이순신, 난중일기亂中日記
노력할 뿐 - 이익, 「중용질서서中庸疾書序」
백척간두에 서서 - 정조, 「추서춘기鄒書春記」
내 발걸음의 무게 - 김구, 「좌우명座右銘」 · 이양연, 「야설野雪」
편안함의 독 - 권근, 「주옹설舟翁說」
뜻이 커야지 - 이이, 「자경문自警文」
미친 자만이 이룰 수 있다 - 박제가, 「백화보서百花譜序」
나를 망치지 않으려면 - 김휴, 「자경잠自警箴」
백 번 천 번 - 중용中庸

4 -----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배움의 즐거움


책을 읽지 않으면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위험한 생각 - 논어論語
가난한 자의 배움 - 명심보감明心寶鑑
배움의 때 1 - 주자, 「권학문勸學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배움의 때 2 - 추구推句
단 한 가지 방법 - 박지원, 「북학의서北學議序」
크게 의심하라 - 홍대용, 「미상기문渼上記聞」
삼근계의 가르침 - 황상, 「임술기壬戌記」
스승의 조건 - 한유, 「사설師說」
물이 오래 흐르면 - 하륜, 「명자설名子說」

5 ----- 인생의 단 한 사람을 얻는다면

          벗과 함께 가는 길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딴소리만 하는 친구의 속뜻 - 김성탄, 쾌설快雪
한 가지 마음 - 회남자淮南子
가난한 날의 사귐 - 박제가, 「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
지극한 즐거움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 명심보감明心寶鑑
오래된 벗의 소중함 - 진계유, 암서유사岩栖幽事
제2의 나 - 마테오리치, 교우론交友論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면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나의 벗, 나 - 이덕무,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6 ----- 용은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네

         고독과 자족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네 - 도연명, 「잡시雜詩」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 - 이지, 「상서傷逝」
다시, 눈을 감아라 - 박지원, 「답창애答蒼厓」
나의 열 가지 즐거움 - 김창흡, 「예원십취藝園十趣」
꼭 지켜야 하는 한 가지 - 정약용, 「수오재기守吾齋記」
나는 혼자다 - 유몽인, 「증이성징영공부경서贈李聖徵令公赴京序」
미워해야 하는 것 - 여곤, 신음어呻吟語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하리니 - 김상용, 「좌우명座右銘」
일생에 쉴 수 있는 날 - 강희맹, 「만휴정기萬休亭記」
멈춤의 지혜 - 홍길주, 「지지당설止止堂說」
그저 웃을 뿐 -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그뿐이다 - 장혼, 「평생지平生志」
말똥구슬과 여의주 -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이 책에 실린 인용문의 원전

 

 

입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도끼이고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다.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어느 곳에 있어도 몸이 편안하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명심보감明心寶鑑

 

 

상처를 주는 말은 5초에 불과하지만,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는 평생 걸린다. 무심결에 던진 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도끼보다 더 큰 흉기가 되어 상대의 가슴을 찌른다. 말이 많으면 실패도 많다. 한마디 말로써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면 차라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남이 비난하는 것을 들어도 화내지 말며 남이 칭찬하는 것을 들어도 기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악한 것을 듣더라도 맞장구를 치지 말며, 다른 사람의 착한 것을 들으면 나아가 그와 어울리고 또 그를 좇아 기뻐하라.

 

聞人之謗未嘗怒, 聞人之譽未嘗喜, 聞人言人之惡未嘗和, 聞人言人之善, 則就而和之, 又從而喜之

 

명심보감明心寶鑑

 

 

남이 잘하는 점이 있으면 드러내 주고 남이 잘못하거든 덮어 주어라. 남이 내게 대들어도 맞서지 않고 남이 나를 비방해도 말없이 참는다면 대들던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비방하던 자도 스스로 그만둘 것이다.

 

仁有善而揚之 人不善而掩之 人犯我而不較 人謗我而默默 則犯者自愧 謗者自息矣

 

김충선, 「가훈家訓」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인격이 성숙한 자는 스펀지와 같아서

자신에게 향한 비난을 안으로 흡수한다.

근거 없는 비난에 맞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면 비난하는 자가 스스로 민망해하며

그칠 것이다.

 

 

말은 황금처럼 아끼고 자취는 옥같이 감추어라. 깊이 침묵하고 고요히 가라앉혀 꾸밈이나 속임과는 접촉하지 말라. 빛남을 가슴속에 감추어 두라. 오래되면 밖으로 빛나리라.

 

惜言如金 韜跡如玉 淵黙沈靜 矯詐莫觸 斂華于裏 久而外燭

 

이덕무, 「회잠晦箴」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가 이십대 초반에

쓴 잠언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재능이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떼가 찾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말을 아끼고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재능을

환하게 비출 때가 온다.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데서 시작한다. 때가 된 뒤에 말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心定者言寡 定心 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이이, 「자경문自警文」

 

율곡 이이가 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담아 쓴 경계의 글이다.

거짓을 감추거나 잘못을 변명할 때 말은

자꾸 보태진다. 말이 많아지면 군소리가

나오고 실언(失言)이 나온다. 그러니 말은

아낄수록 좋다. 때로 과언(寡言)은 백 마디

말보다 깊은 울림이 있다.

 

 

 

생각지 못한 비난에 걱정할 것 없고, 과분한 칭찬에 좋아할 것 없다. 내게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이 있으면 반성하여 고치면 된다. 내게 본래 잘못이 없다면, 저들의 괜한 비방을 무엇 하러 따지겠는가? 내게 칭찬받을 만한 선한 행동이 있으면, 저들이 칭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게 본래 착한 행실이 없다면, 남들의 괜한 칭찬은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사람이 행실을 닦는 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之毀不足卹 過實之譽不足喜 我有可毁之行 則反省改之 而我本無過 則彼之虛謗 何足較哉 我有可譽之善 則彼言當矣 而我本無善 則人之虛譽 反爲羞恥 士之修行 不必動於毁譽也

 

윤형로, 「가훈家訓」

 

칭찬이나 비난을 들으면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러나 뒷말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을 고치면 된다. 잘못한 것이 없다면 신경을 끄면 된다. 남들의 이러쿵저러쿵 뒷말에 흔들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져라.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남들의 평가 따위가 뭐가 중요하랴!

 

 

대개 나 자신부터 선해야 마땅히 좋은 사람은 좋아하게 되고 악한 자는 싫어하게 되어 선한 자는 자연히 가깝게 되고 악한 자는 절로 멀어진다.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는가. 말하자면 돌이켜 내 자신에게서 구할 따름이다.

 

大抵吾身旣善 當好者好之 當惡者惡之 善者自近而惡者自遠 豈有他哉 亦曰反求諸己而已矣

 

홍대용, 「자경설自警說」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다스린 뒤에야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고, 스스로 선 뒤에야 남에게 빌붙지 않을 수 있으며, 스스로 지킨 뒤에야 남을 따라다니지 않을 수 있다.

 

人必自治而後 可以不待物矣 自立而後 可以不附物矣 有守而後 可以不隨物矣

 

장유, 「의리지변義利之辨」 

 

잘되면 내 덕, 안되면 네 탓이라고들 한다. 오해와 불신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이른바 반구저기(反求諸己)! 다른 사람을 이기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을 알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하루에 선한 일을 하면 복은 비록 이르지 않더라도 화는 저절로 멀어진다. 하루에 악한 일을 하면 화는 비록 이르지 않더라도 복은 저절로 멀어진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날마다 더해지는 바가 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닳아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나 날로 이지러지는 바가 있다.

 

一日行善 福雖未至 禍自遠矣 一日行惡 禍雖未至 福自遠矣 行善之人 如春園之草 不見基長 日有所增 行惡之人 如磨刀支石 不見基損 日有所虧

 

명심보감明心寶鑑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라. 섣부르게 생각하면 그르치기 쉽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너무 깊이 생각하면 의심이 많아진다. 헤아리고 절충해보니 세 번 생각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思之勿遽 遽則多違 思之勿深 深則多疑 商酌折衷 三思最宜


이규보, 「사잠思箴」

 

가볍게 생각하고 섣불리 판단했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잇다. 반대로 너무

깊이 생각하면 생각이 망상을 낳아 의심만

키운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마음으로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자.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일도 너무 신중하다가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세 번만 생각하자.

 

 

 

작은 것에 연연해하다 큰 것을 잊으면 나중에 반드시 손해가 있고, 의심하고 망설이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결단하면 과감히 행동해야 귀신도 피하고 나중에 성공한다.

 

小而忘大 後必有害 狐疑猶豫 後必有悔 斷而敢行 鬼神避之 後有成功

 

사마천, 「이사열전李斯列傳」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더 좋은

것을 놓친다. 결정한 일을 망설이는 사이에

좋은 시기를 놓친다. 큰 것을 얻기 위해

당장은 손해를 볼 줄도 알아야 하며 결정은

신중하되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

 

 

 

쉬운 것에서 어려운 일을 도모하고 작은 곳에서 큰일을 하라.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 일어나고, 세상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인은 끝내 크게 되려고 하지 않으므로 큰일을 이루는 것이다.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도덕경道德經 

 

쉽게 풀리지 않는 갈등도 사소한 데서

시작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미미한

데서 출발한다. 돌이킬 수 없는 갈등도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고, 최첨단

우주선의 폭발은 사소한 부품 하나의 결함

때문에 생긴다. 쉬울 때 미리 준비해야

큰일을 해내며 작은 일에 성실한 자가 큰

사람이 된다.

 

 

 

지위가 높더라도 올라감에는 단계가 있다. 넘어지지 않도록 삼가며 단계를 뛰어넘지 말라. 차근차근 올라가며 넘어질까 두려워하라.

 

位雖懸 進有級 愼躓蹶 毋陵躐 循循而升 慄慄其崩

 

기준, 「육십명六十銘:승계升階」

 

엽등(躐等)은 자기 역량이나 정해진 과정을 무시하고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다. 얼핏 엽등은 큰 능력처럼 보이지만 다치기 쉽고 부실하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넘어지지 않는다. 실력이 그렇고 학문도 그렇다.

 

 

 

아는 이 없다 말라, 귀신이 여기에 있다. 듣는 이 없다 말라, 귀가 담장에 붙어 있다. 잠깐의 화가 평생의 허물이 되면 한 터럭의 이익이 평생의 누가 된다. 남과 서로 간섭하면 다툴 일만 일으킬 뿐. 내 마음 평안히 하면 저절로 아무 일 없다.

 

勿謂無知 神鬼在茲 勿謂無聞 耳屬于垣 一朝之忿 平生成釁 一毫之利 平生爲累 與物相干 徒起爭端 平吾心地 自然無事

 

권필, 「자경잠自警箴」

 

 

 

어두운 밤, 침묵의 공간이 있다. 사람은 듣고 보지 못해도 신은 너와 함께 있다. 네 게으른 몸을 경계하고 나쁜 마음 갖지 말라. 처음에 막지 못하면 하늘까지 넘친다. 위로는 둥근 하늘을 이고 아래로는 네모난 땅을 밟나니, 날 모른다 말하며 장차 누굴 속일 텐가? 사람과 짐승의 갈림이고 행복과 불행의 씨앗이니 어두운 저 구석을, 나는 스승으로 삼겠다.

 

有幽其室 有默其處 人莫聞睹 神其臨汝 警爾惰體 遏爾邪思 濫觴不壅 滔天自是 仰戴圓穹 俯履方輿 謂莫我知 將誰欺乎 人獸之分 吉凶之幾 屋漏在彼 吾以爲師

 

장유, 「신독잠愼獨箴」

 

신독(愼獨)은 홀로 있는 데서 삼가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욕망을

누르고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다. 저 어두운 곳, 남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이 스승의 자리이다.

 

 

 

많은 사람이 의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견해를 굽혀서는 안 된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여 남의 말을 물리쳐서도 안 된다. 작은 은혜에 사사로이 매달려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공론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감정을 풀어서도 안 된다.

 

毋因群疑而阻獨見 毋任己意而廢人言 毋私小惠而傷大體 毋借公論而快私情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큰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돌아보지 않는다.

 

擧大事不細謹 盛德不辭讓

 

사마천, 「역생 육고열전 生 陸賈列傳」

 

 

 

베풂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당함에 달렸고, 원한은 깊고 얕음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상하게 했느냐에 달렸다.

 

與不期衆少 其於當危 怨不期深淺 其於傷心

 

『전국책戰國策』, 「중산책中山策」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서운할 때가 있고

큰 도움을 받고서도 고마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다. 처지에 따라 고마운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도울 수 있어야 하며, 상심에 젖은

이에겐 작은 위로도 큰 힘이 된다.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는 자가 그 마음을

얻는다.

 

 

 

태산은 조그마한 흙덩이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될 수 있었고, 황하와 바다는 가느다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깊어질 수 있었다.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사마천, 「이사열전李斯列傳」

 

작은 흙덩이가 모여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작은 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 만든다.

이것저것 가려내고 물리치면 큰 산, 큰

강물은 생길 수가 없다.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된다면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훌륭한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두루 감싸 안을 줄 안다.

 

 

 

1.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물어 보아 시비를 가르는 능력을 본다.

2. 궁지에 몰아 임기응변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3. 책략 따위를 물어 식견을 본다.

4. 위기 상황을 알려 난관에 맞설 용기가 있는지 본다.

5. 술에 취하게 하여 본성을 본다.

6. 이익을 제시해 청렴 여부를 살핀다.

7. 일을 맡겨 신용이 어떤지를 본다.

 

一曰 問之以是非而觀其志 二曰 窮之以辭辯而觀其變 三曰 咨之以計謨而觀其識 四曰 告之以難而觀其勇 五曰 醉之以酒而觀其性 六曰 臨之以利而觀其廉 七曰 期之以事而觀其信

 

제갈량, 「지인성知人性」

 

 

 

아첨을 잘 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하기를 잘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이것을 관찰하면 실수가 거의 없다.

 

善諛者不忠 好諫者不偝 察乎此 則鮮有失矣

 

정약용, 「이전육조吏典六條:용인用人」

 

달콤한 맛일수록 건강을 해치듯이

달콤한 말일수록 위험하다. 비위 맞추는

말을 늘어놓는 자는 다른 데 가면

딴소리를 한다. 반면 쓴소리는 당장에는

귀에 거슬리나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손해 볼 줄 알면서도 말하는

것이므로 믿어도 좋은 사람이다. 아첨꾼을

멀리하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둔다면 인생에서 실수하는 일은 적다.

 

 

 

오직 나를 바르게 해야 남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오직 나의 정성을 다 쏟아야 남을 감복시킬 수 있다.

 

惟正己可以化人 惟盡己可以服人

 

신거운, 서암췌어西岩贅語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시키기만 하면 반감만 일으킨다. 앞에서는

굽히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비웃는다.

진정한 복종은 힘으로 눌러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먼저 나서고 내가 진심을

다해 도울 때 상대방도 깊이 감동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을 먼저 하도록 말며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을 따르게 하지 말라.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대학, 「전십장傳十章」

 

본전 생각을 하면 받은 대로 돌려주려는

마음이 생긴다. 윗사람에게 호되게 당하면

아랫사람에게 그대로 분풀이를 하고,

아랫사람이 못마땅했던 행동을 윗사람에게

그대로 한다. 그리하여 악순환의 고리는

돌고 돈다. 윗사람의 행위가 불합리했다면

아랫사람에겐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의 행동이 언짢았다면 윗사람에겐

반대로 해 보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며 남을 대하면 남이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남에게 자랑하면 남이 도와주지 않는다.

 

以賢臨人 則人不與 以智矜人 則人不助

 

정도전, 「금남야인錦南野人」

 

스스로 똑똑한 척 지나치게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멀리한다.

반면 실력이 뛰어난데도 스스로를 낮추면

남들이 인정하고 높여 준다. 스스로

모자란다고 여기고 도움을 청하면 남이

먼저 다가와 도움을 준다. 자신을 높이면

남들이 낮추지만 자신을 낮추면 남들이

높여 준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너무 엄격하게 하지 말라. 그가 감당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선을 가르칠 때는 너무 높게 말하지 말라. 그가 따를 수 있을 만큼 해야 한다.

 

攻人之惡 毋太嚴 要思其堪受 敎人以善 毋過高 當使其可從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너무 가혹하게 지적하면 상대방은 기가

죽고 오히려 반발심만 생긴다.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잇도록 이야기를 해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좋다. 아무리 선한 일도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면 아예 포기한다.

상대방이 행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부족해서일 뿐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서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以德服人者 中心悅 以誠服也

 

맹자孟子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단지 힘이

모자라니까 고개를 숙일 뿐이다. 덕으로

복종시키는 사람은 남을 누르려고 생각하지

않지만 상대방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따른다.

 

 

 

남의 작은 허물을 꾸짖기 말고 남의 은밀한 비밀을 발설하지 말며 남의 지난 잘못을 마음에 두지 말라. 이 세 가지면 덕을 기르고 해를 멀리할 수 있다.

 

不責人小過 不發人陰私 不念人舊惡 三者可以養德 亦可以遠害

 

홍자성, 채근담菜根譚

 

사소한 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 남의 소소한 잘못까지

지적하는 사람은 쪼잔한 사람이다. 남의

감추고 싶은 속사정을 함부로 떠벌리는

사람은 신뢰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남의

지나간 소소한 허물을 마음에 쌓아 두는

사람은 속 좁은 사람이다. 덕이 큰 사람은

소소한 일,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설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걱정하라.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바탕을 갖추어라.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논어論語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에게 나쁜 점이 없도록 하라. 뜻과 행동은 위와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아래와 견주라.

 

無怨於人 無惡於己 志行上方 分福下比

 

이원익, 「좌우명座右銘」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나보다 더 훌륭한 이를 비교하며 나 자신을 담금질한다. 내가 누리는 것들을, 나보다 낮고 작은 것과 견주어 자족을 배운다. 행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있다.

 

 

 

인간 세상은 거대한 물결과 같고,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큰 바람과 같다네. 우리 작은 몸이 그 속에서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은 마치 한 조각의 배가 만 리의 드넓은 물결을 떠다니는 것과 같다네. 내가 배에서 지내면서 세상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편안한 생활만 믿고 닥쳐올 어려움을 생각지를 못하고서 제멋대로 마음대로 살면서 불행의 끝을 생각지 못하다가 함께 물속에 빠져 가라앉아 죽게되는 자가 많네.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것은 두려워 않고 오히려 나를 위태롭다고 하는가?

 

且夫人世 一巨浸也 人心 一大風也 而吾一身之微 渺然漂溺於其中 猶一葉之扁舟 泛萬里之空濛 盖自吾之居于舟也 祗見一世之人 恃其安而不思其患 肆其欲而不圖其終 以至胥淪而覆沒者多矣 客何不是之爲懼 而反以危吾也耶

 

권근, 「주옹설舟翁說」

 

한 어부가 강물 한가운데에서 조각배를 띄우며 지냈다. 한 길손이 그 까닭을 묻자, 어부가 대답한 말이다. 가장 위험한 때는 가장 편안할 때이다. 편안함만 믿고 닥쳐올 위험을 방심하다가는 조그만 파도에도 금세 휩쓸려 버린다. 인생은 거대한 물결을 떠다니는 한 조각의 배와 같다. 다가올 파도를 대비하여 조심조심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지혜이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육체를 굶주리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는 바를 어긋나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게 하고자 함이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為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맹자孟子

 

도자기는 수천 도의 고온을 견딜 때 고운

그릇이 된다. 반복되는 풀무질과 두드림을

견딜 때 강한 칼이 완성된다. 편안한 삶에

큰 인물은 없다. 시련과 인내의 과정을

견디어 낼 때 인간은 더욱 풍부하고 단단한

인생으로 빚어진다. 고통에는 깊은 뜻이

있다.

 

 

 

산 속의 적을 물리치기는 쉬우나, 마음속의 적을 없애기는 어렵다.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왕양명, 「양사덕설상성서楊仕德薛尙誠書」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다. 산의 도둑들은 더 강한 군사를 동원하면 물리칠 수 잇지만 마음속의 욕망은 없애기가 어렵다. 내 것인데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내 안의 감정을 조절하고,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자가 진짜로 강한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강한 사람이다.

 

勝人者力 自勝者強

 

노자老子

 

 

 

"병법에 말하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다. 이는 지금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 각 장수는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少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이순신,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하루 앞둔 날, 부하 장수들을 불러 놓고 훈계한 말이다. 삶에는 누구나 절망의 순간이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손잡아 줄 이웃은 보이지 않고 절벽 끝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주저앉자니 두렵고 앞뒤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매우 위험하고 고통스런,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선 상황이다. 그럴 때 이순신은 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죽기를 각오하자 그의 앞에는 죽음이 아닌 승리가 잇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노력하여 올라가도 미치지 못하는 자가 잇다. 그러나 나는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능히 미치는 자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행하느냐 행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능력이고, 끝까지 도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운명이다. 운명에 대해서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다만 노력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노력할 뿐이다.

 

世固有企而不及者 吾未見不企而能及也 是以行不行力也 至不至命也 將於命何哉 就其所勉而勉焉而已也

 

이익, 「중용질서서中庸疾書序」

 

아무리 아등바등 애써도 이룰 수 없는 일이 잇다. 바라는 바를 성취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각자에게 주어진 복이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힘써 노력하느냐 그냥 포기하느냐는 내 의지에 달렸다. 성취하느냐 아니냐는 운명이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잇는 일에 대해서는 힘써 노력할 뿐이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후에도 오히려 스스로 자만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또 한 걸음 나아가고 태산(太山)의 정상에서 다시 태산을 찾아, 바라고 또 바라기를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힘껏 노력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盈科之後 猶有不自滿假之心 百尺竿頭 又進一步 太山頂上 更尋太山 望之又望 若未之見焉 矻矻斃而後己以是爲期

 

정조, 「추서춘기鄒書春記」

 

백척간두는 백 척 되는 장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추락하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꼼짝 않고 있을 것인가. 그러나 모든

두려움을 내던지고 한발 내딛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안주하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 한발

앞으로 내딛어야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눈 밟고 들길 갈 때 함부로 걷지 말자.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김구, 「좌우명座右銘」

 

 

 

눈발을 뚫고 들판 길 걸어가노니          穿雪野中去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자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今朝我行迹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                遂作後人程

 

이양연, 「야설野雪」

 

루쉰은 말한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이가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다. 덤불을 헤치고 통로를 내면 뒤의 사람이 따라가고, 많은 사람이 뒤따르다 보면 어느새 길이 된다. 내가 걸어간 길 위의 발자국, 내 지인과 가족들은 자랑스러워할까, 부끄러워할까.

 

 

 

이보게! 그대는 이 점을 생각해 보게. 대체로 인간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고 변덕스러워서 평탄한 길만 걸으면 나태해져 제멋대로 되고, 위험한 처지에 놓이면 두려워 쩔쩔맨다네. 두려워 쩔쩔매면 조심하게 되어 마음을 굳게 지키지. 그러나 나태해져 제멋대로 살면 반드시 방탕해져 몸을 망치게 되네. 나는 차라리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늘 조심할지언정 나태하게 지내며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으려네.

 

噫噫 客不之思耶 夫人之心 操舍無常 履平陸 則泰以肆 處險境 則慄以惶 慄以惶 可儆而固存也 泰以肆 必蕩而危亡也 吾寧蹈險而常儆 不欲居泰以自荒

 

권근, 「주옹설舟翁說」

 

삶이 편안하면 방심하고, 방심하면 게을러진다. 그러나 시련이나 위기가 닥치면 스스로 조심하는 가운데 강한 사람으로 빚어진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보다 위험이 도사리는 야생에서 자란 화초가 더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긴 법이다. 편안하면서 방심하기보다 위태로우면서 스스로 지키는 것이 낫다.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라.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서 털끝만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내 일은 끝마치지 못한 것이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이이, 「자경문自警文」

 

율곡 이이가 스스로를 경계하며 지은

「자경문」 가운데 첫 번째 조목이다. 세상엔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자가 많다. 하지만

그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한계를 미리 지을

필요는 없다. 미리 한계를 긋게 되면 발전도

없고 성취도 없다. 뛰어난 성인을 목표로

삼아 그 수준을 따라가려고 분발할 때

일정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이다. 벽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자는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人無癖焉 棄人也已 夫癖之爲字 從疾從辟 病之偏也 雖然 具獨往之神 習專門之藝者 往往惟癖者能之

 

박제가, 「백화보서百花譜序」

 

벽(癖) 자는 병질 엄(疒)과

치우칠 벽(辟)으로 이루어졌다.

벽은 오늘날의 마니아와 비슷한 말이다.

벽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거기에만 매달린다. 이들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사회와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오로지 매달린 결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적당히 즐기는 자는 아무것도 창조해

내지 못한다.

 

 

 

옛것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라. 이 말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 자신을 버린 것이다.

 

革舊自新 不踐斯語 汝棄汝身

 

김휴, 「자경잠自警箴」

 

구태(舊態)와 구습(舊習)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묵은 때는 깊숙이

스며들어 씻기가 어렵다. 인간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바꾸어갈 때 성장한다. 고인 것을

흘려버려야 새것을 맞이할 수 있다. 예전의

게으른 습관, 방탕한 태도, 선입견은 성취를

가로막는 큰 적이다. 새롭지 않으면 내

자신을 버린 것이다.

 

 

 

남이 한 번에 능숙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숙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해낼 수 있다면 아무리 멍청해도 반드시 똑똑해질 것이고, 아무리 나약해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虽愚 必明 雖柔 必强

 

중용中庸

 

 

 

선비가 한가로이 지내며 일이 없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지 않게 되면 작게는 쿨쿨 잠자거나 바둑 장기를 두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재물과 여색에 힘 쏟게 된다. 아아! 나는 무엇을 할까? 책을 읽을 뿐이다.

 

士君子閑居無事 不讀書復何爲 不然 小則昏睡博奕 大則誚謗人物經營財色 嗚呼 吾何爲哉 讀書而已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 즉 간서치(看書癡)라고 불렀다.

그는 책 보는 것만 좋아해서 춥든지 덥든지,

굶든지 병들든지 오로지 책만 읽었다.

글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

벌떡 일어나 왔다 갔다 하며 깍깍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활력소이자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논어論語

 

맹자는 '책을 완전히 믿는 것은 책이

없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생각 없이 달달달

외우기만 하면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하다.

반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앞선 사람의

경험이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

고집만 늘어난다. 배운 것을 스스로 깊이

생각할 때 참된 배움에 이른다.

 

 

 

집이 가난하더라도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집이 부유해도 부자임을 믿고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면서 부지런히 배우면 출세할 수 있고 부유하면서 부지런히 배우면 이름이 더욱 빛날 것이다.

 

家若貧 不可因貧而廢學 家若富 不可恃富而怠學 貧若勤學 可以立身 富而勤學 名乃光榮

 

명심보감明心寶鑑

 

 

 

오늘 배우지 않고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올해 배우지 않고서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해와 달은 지나가고 세월은 나를 위해 천천히 가지 않는다. 아,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잠시라도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日月逝矣 歲不我延 鳴呼老矣 是誰之愆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주자, 「권학문勸學文」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고, 봄에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으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하루를 다스릴 수가 없다.

 

一生之計 在於幼 一年之計 在於春 一日之計 在於寅 幼而不學 老無所知 春若不耕 秋無所望 寅若不起 日無所辨

 

명심보감明心寶鑑

 

 

 

꽃은 다시 피는 날이 있지만                            花有重開日

사람은 다시 젊어질 수 없다                            人無少年

밝은 날 헛되이 보내지 말라                            白日莫虛送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靑春不再來

 

추구推句

 

 

이덕무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정신은 쉬 소모되고 세월은 빨리 지나가 버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애석한 일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꽃은 져도 봄이면 다시 피지만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오지 않는다. 후회함이 적도록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자.

 

 

 

배움의 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라도 물어 보아야 한다. 어린아이 종일지라도 나보다 한 글자라도 많이 알면 잠시라도 배워야 한다. 자신이 남만 못하다고 부끄럽게 여겨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평생토록 스스로를 고루한 데에 가두는 것이다.

 

學問之道無也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僮僕多識我一字姑學 汝恥己之不若人 而不問勝己 則是終身自錮於固陋

 

박지원, 「북학의서北學議序」

 

공자는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현자보다 나은 점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했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다. 의심을 품고 말을 얼버무리기보다는 자세히 묻고 분별을 구하는 것이 좋다. 낯빛을 따라 구차스레 비위를 맞추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다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이 낫다.

 

無大疑者無大覺 與其蓄疑而含糊 何如審問而求辨 與其面從而苟合 無寧盡言而同歸乎

 

홍대용, 「미상기문渼上記聞」

 

오류는 쉽게 드러나지만 진리는 깊이

감추어져 있다. 손쉽게 얻은 진리는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나의 진리는 내 경험의

틀로 바라본 나만의 진실일 뿐이다. 내가

굳게 믿는 정보와 지식을 의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진실이 열린다. 항상 "왜?"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가벼운 데 있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둔한 데도 뚫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힌 것을 트게 하는 자는 그 흐름이 성대해진다.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一敏於記誦 其弊也忽 二銳於述作 其弊也浮 三捷於悟解 其弊也荒 夫鈍而鑿之者 其孔也濶 滯而疏之者 其流也沛 戛而磨之者 其光也澤 曰鑿之奈何 曰勤 曰疏之奈何 曰勤 磨之奈何 曰勤 曰若之何其勤也 曰秉心確

 

황상, 「임술기壬戌記」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가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소년 황상이 있었다. 그에게 학문을 권하자, 황상은 머뭇머뭇하며 자신은 둔하고 막혔으며, 답답한 단점이 있다고 고백한다. 이에 다산은 '세 번 부지런하라는 가르침'인 삼근계(三勤戒)의 교훈을 들려주었다. 머리는 결코 노력을 이기지 못한다.

 

 

 

옛날의 배우는 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으니, 스승은 진리를 전해 주고 학업을 전수하며 의혹을 풀어 주는 사람이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닐진대 누가 의혹됨이 없겠는가? 의혹이 있어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됨은 끝내 풀리지 않게 된다. 내 앞에 태어나 그 진리를 들음이 진실로 나보다 앞서면 나는 좇아서 그를 스승 삼고 내 뒤에 태어났더라도 그 진리를 들음이 또한 나보다 앞서면 나는 좇아서 그를 스승 삼겠다. 나는 진리를 스승 삼을 것이니 무릇 어찌 그 나이가 나보다 앞뒤로 태어나는 것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귀함도 천함도 따질 것 없고, 나이의 많고 적음도 따질 것 없다.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古之學者 必有師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 生乎吾前 其聞道也 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 亦先乎吾 吾從而師之吾師道也 夫庸知其年之先後生於吾乎 是故 無貴無賤 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한유, 「사설師說」

 

 

 

나무가 오래 자라면 반드시 바위 골짜기에 우뚝 서고 물이 오래 흐르면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 사람의 배움도 이와 같다. 오래 힘쓰고 중도에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성취에 이른다.

 

木之生久 則必聳乎巖壑 水之流久 則必達乎溟渤 人之於學亦然 久而不已 則必至于有成

 

하륜, 「명자설名子說」

 

하륜은 자식에게 구(久)라는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시련이나 고난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쉼 없이 노력하라는 당부를 담았다. 인생은 이름대로 흘러가므로 이름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내가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이렇게 하겟다.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직접 오색실을 물들인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완성한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완성하게 된다. 이를 따뜻한 봄날의 햇볕에 말려서 아내로 하여금 단련한 바늘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한 다음 특별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옥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우뚝 높은 산과 드넓게 흐르는 강물의 사이에 걸어 놓고 말없이 바라보다가 해질 무렵에 돌아오겠다.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가까이 두고 오래 사귄 사람, 친구(親舊).

친구란 인디언말로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다. 그런 친구 한 사람만

얻을 수 있다면 친구의 얼굴을 새겨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와서 좀체 입을 열지 못하고서 묻는 말에 끄덕끄덕 답하며 딴소리만 한다. 내가 가만히 그 난처한 뜻을 헤아리고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 얼마나 필요한지 묻고 급히 방으로 들어가 필요한 돈을 주었다. 그런 뒤에 그 일이 반드시 지금 당장 급히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인가, 혹 조금 더 머물면서 함께 술을 마실 수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寒士來借銀 謂不可啓齒 干是唯唯 亦說他事 我窺見其苦意 拉向無人處 問所需多少 急趨入內 如數給與 然後問其必當速歸料理是事耶 為尚得少 留飲酒耶 不亦快哉

 

김성탄, 쾌설快雪

 

술잔을 기울이며 손을 맞잡는다고 천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사정을

말하려 하니 지레 먼저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벗과 차마 말하지 못해도 먼저

사정을 헤아려 물어 보는 벗, 두 종류의

벗에서 사귐의 깊고 얕음이 드러난다.

 

 

 

두 가지 마음이면 한 사람도 얻을 수 없지만, 한 가지 마음이면 백 사람을 얻을 수 있다.

 

兩心不可得一人 一心可得百人

 

회남자淮南子

 

배경이나 조건에 따라 다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있던 친구마저 잃는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한다면 많은 친구가 따를 것이다.

 

 

 

가난한 날의 사귐을 이른바 가장 좋은 벗이라고 합니다.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관계라서 그런 것인가요? 또 필경 우연히 행운으로 얻은 관계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요? 처한 사정이 같다보니 직업이나 지위를 따져 볼 필요가 없고, 걱정거리가 같다보니 어렵고 힘든 상황을 잘 알기에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손을 꽉 잡고 괴로움을 위로해 줄 땐 반드시 밥을 잘 챙겨 먹는지, 추위에 고생하지는 않은지를 먼저 묻고 나서 집안의 사는 형편을 묻습니다. 그러면 말하지 않으려 했어도 저절로 말하게 되니 친구의 처지를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마음에 감격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예전엔 남에겐 꺼내기 너무나 힘들었던 사정도 지금은 줄줄줄 입에서 곧바로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말문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일까요? 때로는 친구 집 문을 휙 열고 들어가 안부를 묻고 나서 하루 종일 한마디도 없이 베개를 청해 한잠 푹 자고 가 버리기도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십 년간 사귀며 나눈 대화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사귐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말을 나누어도 말하지 않은 것과 똑같습니다. 벗을 사귐에 벽이 없다면 비록 서로가 묵묵히 서로 할 말을 잊더라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런 격언이 있지요.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귄 친구라도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잠깐 말을 나눈 사람이라도 오랜 친구 같다.'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夫窮交之所謂至友者 豈其𤨏細鄙屑而然乎 亦豈必僥倖可得而言哉 所處同 故無形迹之顧 所患同 故識艱難之狀而已 握手勞苦 必先其飢飽寒煖 問訊其家人生産 不欲言而自言者 眞情之惻怛而感激之使然也 何昔之至難言者 今之信口直出而沛然 莫之能禦也 有時乎入門長揖 竟日無言 索枕一睡而去 不猶愈於他人十年之言乎 此無他 交之不合 則言之而與不言同 其交之無間 則雖黙然兩相忘言 可也 云 白頭而新 傾蓋而故 其是之謂乎

 

박제가, 「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

 

박제가가 이덕무의 처남이자 친구인

백동수를 위해 쓴 편지이다. 친구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강원도 산골짝으로 이사를

떠나자 그를 송별하며 써 준 글이다.

어려움을 함께 나눈 사이일수록 끈끈하고

돈독한 정이 생긴다. 처한 사정을 잘 알기에

서로를 공감한다. 공감(sympathie)의

어원은 '함께 고통을 겪다'는 뜻이다.

 

 

 

마음에 꼭 드는 시절을 맞아 마음에 꼭 맞는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꼭 드는 글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인데 그런 일이 어찌도 적은가. 일생 동안 몇 번쯤이나 될까.

 

値會心時節 逢會心友生 作會心言語 讀會心詩文 此至樂 而何其至稀也 一生凡幾許番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천금(千金)은 얻기 쉽지만 지기(知己)는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술친구는

많을지언정 마음에 꼭 맞는 친구를 얻기란

쉽지가 않다. 자라 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좋아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지음(知音)이 있다면 인생은 훨씬 덜

외로우리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은 안개 속을 가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이 젖지는 않지만 촉촉하게 된다. 무식한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은 뒷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은 더럽히지 않지만 때때로 악취가 난다.

 

與好學人同行 如霧露中行 雖不濕衣 時時有潤 與無識人同行 如厠中坐 雖不汚衣 時時聞臭

 

명심보감明心寶鑑

 

 

 

새로운 친구와 교제하기보다 옛 벗과 우정을 돈독히 함이 좋다. 새로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느니 묵은 빛을 갚는 것이 낫다.

 

與其結新知 不若敦舊好 與其施新恩 不若還舊債

 

진계유, 암서유사岩栖幽事

 

사랑은 새로울수록 강렬하지만 우정은

오랠수록 친밀해지고 깊어진다. 친구는

오랜 시간을 견뎌냄으로써 만들어지는

묵은 관계이다. 꼭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친구와 은혜는 오랠수록 좋다.

 

 

 

나의 친구는 남이 아니라 나의 절반이자 제2의 나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친구를 나처럼 여겨야 한다. 친구와 나는 비록 두 몸이지만, 두 몸 안에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吾友非卽我之半 乃第二我也 故當視友如己焉 友之與我 雖有二身 二身之內 其心一而已

 

마테오리치, 교우론交友論

 

예전엔 친구를 붕우(朋友)라고 했다.

붕(朋)은 날개 우(羽)에서 유래했고

우(友)는 사람의 양손을 뜻한다. 곧 붕우는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이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친구는 제2의 나이다. 이 구절은

마테오리치의 교우론』에 나오는 첫 번째

구절이다. 교우론』은 중국어로 번역된 뒤

조선 사회에 유입되어 조선의 선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친구가 없다고 탄식할 것 없이 책과 함께 노닐면 된다. 책이 없으면 구름과 놀이 내 친구고, 구름과 놀이 없으면 하늘을 나는 갈매기에 내 마음을 붙이면 된다. 나는 갈매기가 없으면 남쪽 마을의 홰나무를 바라보며 친구 삼아도 되고 잎 사이의 귀뚜라미도 구경하며 즐길 수 있다. 무릇 내가 사랑해도 그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은 모두 나의 좋은 친구이다.

 

不須歎無友 書帙堪輿遊 無書帙 雲霞吾友也 無雲霞 空外飛鷗可托吾心 無飛鷗 南里槐樹 可望而親也 萱葉間促織 可玩而悅也 凡吾所愛之 而渠不猜疑者 皆吾佳朋也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교감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존재가 내

친구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별, 아양 떠는

고양이, 느림보 달팽이, 무서운 악어, 뒤뜰의

진잘래, 모든 것이 나의 친구이다. 사람은

의심하고 시기하지만 사물은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눈 온 날 새벽, 비 내리는 저녁에 좋은 벗이 오질 않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까나?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노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雪之晨  雨之夕 佳朋不来 誰與晤言 試以我口讀之 而聽之者我耳也 我腕書之 而玩之者我眼也 以吾友我 復何怨乎

 

이덕무,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고독하지 않다면 어찌 삶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 무언가를 절실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 자존의식을 붙들고

홀로 인생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내게

속했고 나는 나를 벗 삼는다.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이                                    人生無根蔕

길 위의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                                飄如陌上塵

나뉘어 흩어져 바람 따라 굴러다니니                        分散逐風轉

이는 변함없는 몸이 아니라네                                  此已非常身

태어나면 모두 형제 되는 것                                    落地爲兄弟

어찌 꼭 한 핏줄이어야 하리                                    何必骨肉親

기쁠 때는 응당 즐겨야 하니                                    得歡當作樂

한 말 술로 이웃과 어울려 보네                                斗酒聚比鄰

젊은 날은 다시 오지 않고                                      盛年不重來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네                                一日難再晨

젊을 때 마땅히 힘쓰라                                          及時當勉勵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느니                              歲月不待人

 

도연명, 「잡시雜詩」

 

세월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간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다음 문구가 쓰여 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삶에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는 것과 같다. 한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는 것은 가 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끝내 오래 살게 할 수는 없고, 가 버리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끝내 가지 않도록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오래 살게 할 수 없다면 삶을 원하지 않아도 된다. 가 버리지 않게 할 수 없다면 가 버리는 것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이 꼭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련다. 오직 삶이 슬플 뿐이다. 가 버리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원컨대 삶을 슬퍼하라.

 

生之必有死也 猶晝之必有夜也 一死之不可復生 猶逝之不可復還也 人莫不欲生 然卒不能使之久生 人莫不傷逝 然卒不能止之使勿逝 既不能使止久生 則生可以不欲矣 既不能使之勿逝 則逝可以無傷矣 故吾直谓死不必傷 唯有生乃可傷耳 勿傷逝 願傷生也

 

이지, 「상서傷逝」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어찌 문장뿐이겠습니까? 일체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화담 선생이 외출했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잇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왜 우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다섯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였습니다. 기뻐서 돌아가려는데 골목길은 갈림이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하였습니다. 선생이 말했습니다. "내가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뒤바뀌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을 일으켜 망상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증명이 됩니다.

 

還他本分 豈惟文章 一切種種萬事摠然 花潭出 遇失家而泣於塗者曰 爾奚泣 對曰 我五歲而瞽 今二十年矣 朝日出往 忽見天地萬物淸明 喜而欲歸 阡陌多歧 門戶相同 不辨我家 是以泣耳 先生曰 我誨若歸 還閉汝眼 卽便爾家 於是 閉眼扣相 信步卽到 此無他 色相顚倒 悲喜爲用 是爲妄想 扣相信步 乃爲吾輩守分之詮諦 歸家之證印

 

박지원, 「답창애答蒼厓」

 

눈은 세계의 진실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연암 박지원은 인간의 감각 기관이 오히려 진실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눈을 뜨자 세상은 혼돈되고 뒤죽박죽이 되었다. 따라서 집(진리)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선 도로 눈을 감아야 한다.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세상이 규정해 놓은 질서, 제도, 관습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찾아가라는 뜻이다.

 

 

 

깊은 절 한 해가 저무는 날, 눈보라는 골짝에 흩뿌리고 차가운 밤기운에 스님은 잠들어 있을 때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일, 봄과 가을 한가로운 날에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몸과 마음은 가뿐하고 시상이 솟아오르는 일. 굳게 닫힌 문에 꽃은 떨어지고 주렴 밖에선 새가 우는데, 술동이를 갓 열자 읊고 있던 시구와 딱맞아떨어지는 일.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어른과 젊은이 한자리에 모여 한 잔 마시면 한번 읊는데 어느새 시 한 권이 만들어지는 일. 아름다운 밤 고요하고 맑은데, 밝은 달빛이 마루로 새어들고 부채 소리에 맞춰 글을 읽으니 소리 기운이 씩씩하고 힘 있는 일. 산과 시내를 돌아다녀 말도 고달프고 하인도 지치는데 안장 위에서 쉬엄쉬엄 읊은 구절이 작품이 되어 호주머니 가득하게 되는 일, 산속에 들어가 책을 읽어, 목표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가득 기쁘고 기운이 넘쳐나 붓놀림이 신들린 듯하는 일. 멀리 살던 좋은 친구를 뜻하지 않게 만나 그간의 공부를 자세히 묻고 새로 지은 작품을 외워 보라고 권하는 일. 좋은 글과 구하기 힘든 책을 친구가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빌려와 허겁지겁 포장을 풀어 여는 일. 숲과 시내 건너편에 친한 친구가 살고 있는데 새로 빚은 술이 익었다고 알려 오며 시를 부쳐 화답하기를 요청하는 일.

 

崖寺歲暮 風霰交山 夜寒僧眠 孤坐讀書

春秋暇日 登高遠眺 形神散朗 詩思湧發

掩門花落 卷簾鳥啼 酒瓮乍開 詩句初圓

曲水流觴 冠童畢會 一飮一詠 不覺聯篇

良夜肅淸 朗月入軒 擊扇誦文 聲氣遒暢

經歷山川 馬頓僕怠 據鞍行吟 有作成囊

入山讀書 課滿歸家 心充氣溢 下筆如神

良友遠阻 忽然相値 細問所業 勤誦新作

奇文僻書 聞在交友 送奴乞來 急解包裹

分林隔川 佳友對居 釀酒報熟 寄詩佇和

 

김창흡, 「예원십취藝園十趣」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만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이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다. 내 책을 훔쳐 없앨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에 있는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있는 곡식이 모두 내가 먹을 곡식이니,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겠는가.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오직 나라는 것만은 그 본성이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함이 없다. 아주 가깝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면 떠나간다.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으면 떠나가면, 눈썹이 새까맣고 이가 하얀 미인의 아리따운 미색을 보면 떠나간다. 가고 나면 돌아올 줄 몰라서, 붙잡아 머물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大凡天下之物 皆不足守 而唯吾之宜守也 有能負吾田而逃者乎 田不足守也 有能戴吾宅而走者乎 宅不足守也 有能拔吾之園林花果諸木乎 其根著地深矣 有能攘吾之書籍而滅之乎 聖經賢傳之布于世 如水火然 孰能滅之 有能竊吾之衣與吾之糧而使吾窘乎 今夫天下之絲皆吾衣也 天下之粟皆吾食也 彼雖竊其一二 能兼天下而竭之乎 則凡天下之物 皆不足守也 獨所謂吾者 其性善走 出入無常 雖密切親附 若不能相背 而須臾不察 無所不適 利祿誘之則往 威禍怵之則往 聽流商刻羽靡曼之聲則往 見靑蛾皓齒妖豔之色則往 往則不知反 執之不能挽 故天下之易失者 莫如吾也 顧不當縶之維之扃之鐍之以固守之邪

 

정약용, 「수오재기守吾齋記」

 

사람의 마음은 붙들어 두기가 참 어렵다. 조금만 방심하면 밖으로 치달리고 옆으로 내달리려 한다. 욕망과 이익과 권력을 향해 마음은 끝없이 치닫는다. 맹자는 구방심(求妨心)하라고 했다. 구방심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깊이 사색하고 돌아보아 욕망에 휘둘리는 나를 도로 찾으라.

 

 

 

 

나는 홀로이다. 지금의 선비를 보면 나처럼 홀로인 사람이 있는가? 홀로 세상을 살아가나니 벗의 도리에 어찌 한편만 고집하겠는가? 한편만 고집하지 않으니 다른 넷, 다섯이 모두 나의 벗이다. 그렇다면 나의 무리가 또한 넓지 않은가? 그 차가움이 얼음을 엉겨 붙게 하더라도 나는 떨지 않을 것이며, 그 뜨거움이 흙을 태우더라도 나는 애태우지 않겠다. 될 것도 없이 오직 내 마음을 따를 것이다. 내 마음이 돌아가는 곳은 오직 나 한 개인에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거취가 느긋하고 여유롭지 않겠는가?

 

余獨也 視今之士 其有若余獨乎 以獨而行于世 交之道豈泥于一乎 一之不泥 於四於五 皆吾友也 則吾之倫 不亦博乎 其寒凝冰而吾不慄 其熱焦土而吾不灼 無可無不可 惟吾心之從 而吾心之所歸 惟一人而已 則其去就豈不綽有裕乎

 

유몽인, 「증이성징영공부경서贈李聖徵令公赴京序」

 

『어우야담』의 작가인 유몽인이 친구인 성징 이정구(李廷龜)가 북경으로 사신 갈 때 써 준 글이다. 세상은 내 편에 속하지 않으면 적이라고 위협한다. 특정한 당파와 집단을 편들지 않으면 혼자가 된다. 홀로 가는 길은 외롭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얽매일 필요 없으니 푸른 것은 푸르다고 하고 붉은 것은 붉다고 말한다. 내 양심의 소리를 따른다는 자존감이 세상을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한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가난하면서도 뜻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천한 것은 미워할 것이 아니다. 미워할 것은 천하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늙음은 탄식할 것이 못 된다. 탄식할 만한 것은 늙도록 헛사는 것이다. 죽는 것은 슬퍼할 것이 못 된다. 슬픈 것은 죽기까지 명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貧不足羞  可羞是貧而無志 賤不足惡  可惡是賤而無能 老不足嘆  可嘆是老而虛生 死不足悲  可悲是死而無聞

 

여곤, 신음어呻吟語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꿈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직업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투철한

직업정신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늙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늙어 죽기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낭비한

인생이 슬픈 것이다.

 

 

 

 

달은 둥글면 이지러지고 그릇은 가득 차면 엎어진다.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으니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 권세를 믿어서는 안 되며 욕망을 지나치게 누려도 안 된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깊은 못에 임한 듯이 살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月盈則缺 器滿則覆 亢龍有悔 知足不辱 勢不可恃 慾不可極 夙夜戒懼 臨深履薄

 

김상용, 「좌우명座右銘」

 

끝까지 오른 용을 항룡(亢龍)이라고

한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으니 내려올 일만 남았다.

극히 부귀한 자리에 올라간 자는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무너져 후회하게 된다.

 

 

 

 

사람의 병은 쉬지 못해서인데, 세상은 쉬지 않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왜일까? 사람의 수명은 길지가 않아서 백 년의 수명을 누리는 자는 만 명에 하나둘 뿐이다. 백세를 산 사람이라도 어릴 때와 늙고 병든 햇수를 제외하면 건강하게 산 날은 불과 사오십 년이다. 그사이에 성공과 실패, 영화로움과 욕됨, 즐거움과 슬픔, 이로움과 해로움이 내게 병이 되어 정신을 해친 경우를 제외하면 웃으며 즐겁고 쾌활하게 쉬었던 날 역시 수십 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백년을 살지 못하면서 끝없는 근심과 걱정을 감당해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에 얽매여 끝내 쉴 날을 기약하지 못한다.

 

人病不休耳 世以不休爲樂 何哉 夫人壽無幾 得百年之齊者 萬無一二焉 設使有之 除其幼蒙老疾之年 强剛莅事之時 不過四五十年 其間復除其昇沈榮辱 哀樂利害 爲吾病而害吾眞者 得逌然而樂 快然以休之日 亦不過數旬焉 況以非百之年 應無窮之憂患者哉 此世人所以役於憂患 而終無休息之期也

 

강희맹, 「만휴정기萬休亭記」

 

인간은 오래 살아야 고작 백년을 못 산다. 그사이에 병들고, 다투고 질투하고 괴로워하며 아등바등 살았던 날들을 제외하면 웃으며 행복했던 날은 고작 수십 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얼마 되지 않은 인생에 근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위험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순탄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할 수 잇다. 그대는 위험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아니면 순탄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뜻을 잃고 멈추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뜻을 얻고 멈추는 것은 군자만이 할 수 있다. 그대는 뜻을 얻고 멈췄는가? 아니면 뜻을 잃은 후에 멈췄는가?

 

遇險而止 凡夫能之 遇順而止 非智者不能 子其遇險而止歟 抑能遇順而止歟 失意而止 衆人能之 得意而止 唯君子能焉 子其得意而止歟 抑亦失意而後止歟

 

홍길주, 「지지당설止止堂說」

 

노자는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갈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불행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끝없이 오르려는 데서 생긴다. 조금만 더,

하는 욕심이 이미 얻은 것조차 잃어버리게

한다. 자족(自足)할 수 있다면 위태롭지

않으려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問余何事栖碧山

웃으며 대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계곡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桃花流水杳然去

여기가 별천지요 인간 세상 아니라네                    別有天地非人間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자연이 주는 행복은 세속의 사람에겐

설명해 준들 이해시킬 수 없다. 그러니

대답 않고 빙그레 웃을 수밖에. 아등바등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 인간 세상서 벗어나

산새의 지저귐, 풀벌레의 울음, 반짝이는

개똥벌레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홀로 있을 때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오래된 책을 펼쳐보며 한가롭게 드러누우면 그뿐이다. 잡생각이 떠오르면 집 밖을 나가 산길을 걸으면 그뿐이고 손님이 찾아오면 술을 내와 시를 읊으면 그뿐이다. 흥이 오르면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먹으면 그뿐이다. 춥거나 더우면 내 옷을 입으면 그뿐이고 해가 저물면 내 집에서 쉬면 그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 눈 오는 한낮, 저물녘의 노을, 새벽의 달빛은 이 그윽한 집의 신비로운 운치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다. 말해 준다 한들 사람들은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가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의 소망이다. 이와 같이 살다가 마치면 그뿐이리라.

 

獨居則撫破琴閱古書 而偃仰乎其間而已 意到則出步山樊而已 賓至則命酒焉諷詩焉而已 興劇則歗也歌也而已 飢則飯吾飯而已 渴則飮吾井而已 隨寒暑而衣吾衣而已 日入則息吾廬而已 其雨朝雪晝 夕景曉月 幽居神趣 難可爲外人道也 道之而人亦不解焉耳 日以自樂 餘以遺子孫 則平生志願 如斯則畢而已

 

장혼, 「평생지平生志」

 

적게 가지고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없을까? 그뿐이면 족한 삶을 살면 된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긍정하며 사는 것을 자족(自足)이라고 한다. 그뿐이면 되는 삶인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욕망하며 사는구나.

 

 

 

 

망똥구리는 스스로 말똥구슬을 사랑하여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역시 여의주를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구슬을 비웃지 않는다.

 

螗琅自愛滚丸 不羡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공생의 비결은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데

있다. 말똥구리에겐 말똥구슬이 필요할 뿐,

용의 여의주는 쓸모가 없다. 용은 자신에게

여의주가 있다고 해서 말똥구리를 더럽다고

비웃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쓸모를

갖고 태어났으니, 쓸모없는 꿈도, 쓸모없는

인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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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美哀歌靜晨竝
(추미애가정신병)  
                   詩 김삿갓

秋美哀歌靜晨竝
(추미애가정신병)
雅霧來到迷親然
(아무래도미친연)
凱發小發皆雙然
(개발소발개쌍연)
愛悲哀美竹一然
(애비애미죽일연)

 

 

 

 

 

 

 

 

Posted by 드무1
,

2020-003 미술에게 말을 걸다

 

 

이소영 지음

2019, 카시오페아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2946

신천역스마트도서관

 

601

이55ㅁ

 

난해한 미술이

쉽고 친근해지는

5가지 키워드

 

사람들은 왜 이 그림을 명화라고 부를까요?

 

 

유명 전시회와 미술관 관람을 좋아하지만,

작품 감상에는 서툰 미알못을 위한 쉽고 재밌는 교양 미술

 

이소영

(빅쏘)

 

미술이 삶의 전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람. 한강을 좋아해 한강 근처에서 산다. 다양한 SNS 채널에서 빅쏘라는 필명으로 5만여 명에 달하는 구독자들과 소통한다. 삶에 위로와 힘이 되는 그림을 소개하는 데 특히 관심이 많다. 매일 미술 관련 자료를 탐닉하며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을 떠난다. 미술 교육, 미술사를 전공했지만 학문적 이야기보다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에 시간을 소비한다. 예술가의 사적인 이야기와 숨겨진 작품들에 관한 미술 에세이를 즐겨 쓴다.
소통하는 그림연구소 빅피쉬 아트, 신나는 미술관 대표이자 미술 교육자로서 '삶을 위한 미술'을 나누며 산다. 다양한 기업과 기관에서 미술사, 현대미술, 아트 컬렉팅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출근길 명화 한 점》 《그림은 위로다》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림》 《명화 보기 좋은 날》 등이 있다.

 

포스트       post.naver.com/bbigsso

블로그       blog.naver.com/bbigsso

인스타그램 @artsoyounh

유튜브       아트메신저 이소영

 

차례

 

시작하기 전에 미술과 친해지고 싶은 당신에게
프롤로그 가볍게 미술을 즐기자, 음악을 말하듯이

Part 1. 저만 미술이 어려운가요?

우리가 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
미술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미술관 밖에도 작품은 많다
멋진 오류는 훌륭한 정답
하지만 현대 미술은 난해하던데요?
호기심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
# 미술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책

Part 2. 미술과 친해지는 5가지 방법

1장. 작품은 미술관에서 봐야 할까요?

 

#일상 : 알고 보면 일상의 곳곳이 작품이다

나체로 초콜릿 껍질에 들어간 그녀
카페 로고에도 명화가 있다고요?
예술가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독한 술
테트리스 게임 속 그 성당!
포레스트 검프의 운동화에 여신이 있었다니
천천히 벗겨서 보시오

2장. 그림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해요

 

#작가 : 시작은 단순하게, 좋아하는 작가 한 명으로

좋아하는 그림이 있나요?
당대엔 존경받지 못한 예술가들
사생아로 태어나 화가들의 뮤즈가 된 화가
누구보다 여자들을 아름답게 그린 화가
어떤 화가에게 거장이라는 이름이 붙을까요?
당신은 마음속에 무엇을 축척하며 살고 싶나요?

3장. 사람들은 왜 그 그림을 명화라고 부를까요?

 

#스토리 : 명작은 다양한 시각 속에서 빛난다

위대한 명화는 명화를 남긴다
달빛을 수집한 남자, 조금 달랐던 밤 풍경
그의 작품 곳곳엔 금빛이 흘러넘친다
같은 풍경, 다른 시선, 만 가지 얼굴
동양과 서양, 책으로 연결되다
지금 보아도 새롭고 미래에 보아도 새롭다
가지각색의 시선, 문화를 엿보는 재미

4장. 그래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시선 : 멀리 보고, 겹쳐 보아야만 보이는 것

우리가 본 것들은 모두 진짜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컬렉터에게 보낸 아스파라거스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했던 방법
새로운 풍경보다는 새로운 눈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 만세
해골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5장. 취향은 어떻게 찾나요?

 

#취향 : 취향은 결국 무수한 실패의 결과다

사랑하면 알고 알면 보이나니
수많은 수집이 예술작품이 된 이야기
그림 속 그림 찾기
시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삶의 리듬을 그린다면
시작은 한 예술가의 삶을 사랑한 데서부터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시선을 낳는다
화가였던 그녀, 의상 디자이너가 되다

참고도서

 

 

조셉 뒤크레, 하품하는 자화상, 1783, 미국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뮤지엄

 

프랑스 화가 조셉 뒤크레(Joseph Baron Ducreux, 1735~1802)의 자화상입니다. 당시에는 얌전하고 권위적인 초상화가 주로 그려졌는데, 조셉 뒤크레는 자신의 얼굴을 활용해 다양한 표정을 연구했고, 기존 초상화와는 다소 다른 재밌는 초상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하품하는 자화상>은 화가 본인이 화면 밖 우리를 향해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서 좀 쉬고 싶다는 표정입니다. 당당한 그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흥미로운 건 그가 루이16세의 초상화가로 살면서, 루이 16세가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그의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였다는 점입니다. 이 화가의 인생도 궁금해지지 않으세요? 한번 구글 검색 창을 켜고 그가 그린 또 다른 재미난 초상화들을 찾아보세요!

 

오뚜기 진라면 × 호안 미로 아트 콜라보레이션

 

 

파울 클레, 트위터링 머신, 1922,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미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뮤즈게임의 질문 유형 (Davis, 1993)

 

1단계, 아주 사소한 것도 말해보기

Q. 작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뇨?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해 보세요)

Q. 작가가 작품에 담고자 한 생각이나 감정은 무엇일까요?

 

                              ↓

 

2단계. 작가의 감정에 공감해보기

Q. 이 작품을 제작했을 때 작가의 감정이 어땠는지 이해할 수 있나요?

 

                              ↓

 

3단계.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기

Q. 한 작품을 주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세요. 비슷해 보이나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요?

 

                             ↓

 

4단계. 달라진 생각 찾기

Q. 당신은 이 작품이 좋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자 미상, 법순과 푼수의 수표(手票), 1910, LH 토지주택 박물관

 

"이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 이유는 본인이 귀 댁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김푼수와 정약한 바가 있어서인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중병이 있었고 또한 귀 댁의 하인으로 팔려간 뒤로 약치료를 세 차례나 받아 약값이 300냥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가 그녀를 데리고 가려는 지금에서 그 약값을 대신 내어 드리려 합니다. 그래서 300냥 전액을 정확히 그 액수대로 지불하면서 차후에 만일 옛 질병이 재발하거나 혹 기타의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도로 물리거나 후회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 문서를 작성하고 본인이 김푼수와 함께 손바닥을 사인으로 그려넣음으로서 이 사실을 증빙하고자 합니다."(융희 4년(1910년) 음력 7월 30일, 표주 청도에 사는 김법순)

 

 

 

ⓒ 이소영

 

 

 

미술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책

 

미술 에세이

이주은, 《당신도, 그림처럼》, 아트북스, 2018

최혜진, 《명화가 내게 묻다》, 북라이프, 2016

문소영, 《명화 독서》, 은행나무, 2018

시리 허스트 베트, 《사각형의 신비》, 뮤진트리, 2012

 

화가와 화상의 삶

데이비드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2012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7

앙브루아즈 볼라르, 《파리의 화상 볼라르》, 김용채 옮김, 바다출판사, 2005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교양 미술

김형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아시아, 2014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최민 옮김, 열화당, 2012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5

유경희, 《가만히 가까이》, 아트북스, 2016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민음사, 2015

매튜 키이란, 《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옮김, 북코리아, 2010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큐레이팅의 역사》, 송미숙 옮김, 미진사, 2013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 1898.

영국 허버트 아트 갤러리 앤 뮤지엄(Herbert Art Gallert & Museum)

"당신이 벗은 몸으로 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내가 세금을 낮춰 걷을 수 있도록 해보겠소!"

 

 

 

에드윈 랜시어, 고다이바, 1865, 영국 허버트 아트 갤러리 앤 뮤지엄(Herbert Art Gallert & Museum)

 

 

 

페트릭 머피, 고다이바, 2014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의 심벌 ⓒ 고디바

 

 

그리스의 세이렌 테라코타, BC 300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891,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프레드릭 레이튼, 어부와 세이렌, 1857,

영국 브리스틀 뮤지엄 앤 아트 갤러리(Bristol City Museum and Art Gallery)

 

 

귀스타브 모로, The Sirens, 1872, 미국 메사추세츠 하버드 아트 뮤지엄

 

 

(위) Jacques Patin, 왕비의 발레 코미크의 세이렌, 1581

(아래) 스타벅스 로고의 변천사 ⓒ 스타벅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압생트를 마시는 반 고흐, 1887,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위(胃)라는 위는 모두가 (Comme bercée en un hamac)
넘쳐흐르는 압생트 속에서 갈피를 잡지 (La pensée oscille et tournoie,)
못하는 이 시간, 해먹에 몸이 흔들리듯 (A cette heure où tout estomacdnl)

생각도 흔들리며 맴돈다. (Dans un flot d'absinthe se noie.)

온통 에메랄드빞인 이 시간, (Et l'absinthe pénètre l'air,)
압생트는 대기로 스며들어 (Car cette heure est toute émeraude.)
배회하듯 기웃거리는 (L'appétit aiguise le flair)
코들의 후각을 자극한다. (De plus d'un nez rose qui rôde.)

강렬한 감색 커다란 눈의 (Promenant le regard savant)
숙련된 시선으로 두루 살피며, (De ses grands yeux d'aigues-marines,)
자신의 콧구멍 어루만지는 바람 (Circé cherche d'où vient le vent)
어디서 불어오는지 살피는 키르케. (Qui lui caresse les narines.)

저녁을 먹고 있는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Et, vers des dîners inconnus,)
저녁 안개의 오팔빛을 가로 질러 (Elle court à travers l'opale)
달려간다, 그녀. 샛별은 연초록 (De la brume du soir. Vénus)
하늘에서 빛나고 있고. (S'allume dans le ciel vert-pâle.)

- 녹색 시간 (L'heure verte), 샤를 크로

 

 

장 베로, 압생트 마시는 사람, 1908

 

 

파블로 피카소가 만든 압생트 전용 도자기 잔, 1914 ⓒ 2019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빅토르 올리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1, Cafe Slavia

 

 

알베르 메냥,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6

 

 

압생트

[ ABSINTHE ]

 

아니스 향이 아주 강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 중세부터 원기를 돋우고 해열작용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알칼로이드 성분이 함유된 향초 식물(향쑥)을 주 원료로 하여 만든다.

18세기에 한 프랑스 의사는 이 식물과 아니스, 회향, 히솝을 사용해 녹색의 독한 리큐어(알코올 농도 60 ~ 70% Vol.)를 만들어냈고, 그 제조법을 앙리 루이 페르노(Henri Louis Pernod)에게 팔아 넘겼다. 페르노는 1797년 이 술을 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한다.

시인들이 ‘녹색 요정’이라 칭했던 이 술은 19세기 말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 우선 잔에 압생트 일정량(1 dose)을 넣고 구멍이 뚫린 납작한 스푼을 잔 위에 걸쳐 놓은 다음 각설탕 한 개를 올린다. 그 설탕 위로 차가운 물(3 ~ 5배)을 아주 천천히 부어 희석한다. 이 술은 신경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실제 향정신성 물질로 분류되어, 1915년 3월 16일 법령에 의해 프랑스에서 그 제조와 판매가 금지되었다. 오늘날 이 술은 ‘압생트 추출물을 넣은 스피릿 주류(알코올 도수 45 ~ 70% Vol.)’라는 이름으로 다시 판매되고 있다. 1915년 금지 사태를 불러왔던 해당 유해성분은 현재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압생트 [ABSINTHE] (그랑 라루스 요리백과, 강현정, 김미선, 라루스)

 

 

(위) 성 바실리 대성당

(아래) 테트리스 게임 속 성 바실리 대성당

 

"여봐라. 이 건축가들이 다시는 똑같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눈을 파서 장님을 만들어라!"

 

 

바실리 수리코프, 수비대 처형 날의 아침, 1881,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아리스타크 렌트로푸, 성 바실리 대성당, 1913,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위) 콘스탄틴 유온, 붉은 광장의 성지주일(종려주일), 1916,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아래) 페도르 알렉세프, 붉은 광장, 1801,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나이키 로고 ⓒ 나이키

 

 

사모트라케의 니케, BC 190년경

 

 

 

(위) 필리프 드 샹파뉴, 승리의 여신으로부터 면류관을 받는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 1628 ~ 1635,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아래) 에르떼, 니케의 날개, 1919, ⓒ Sevenarts Ltd/DACS - SACK, 2019

 

 

 

(위, 가운데) 앤디 워홀이 프로듀싱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니코의 앨범 표지 커버

(아래)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앤디 워홀

 

 

 

줄리안 오피가 그린 2000년 블러의 데뷔 10주년 베스트 앨범

<더 베스트 오브(The Best Of)> 커버

 

ⓒ 2019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SACK, Seoul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노상호, HYUKOH 20, 2014

노상호, HYUKOH 22, 2015

노상호, HYUKOH 24 : 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 2018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압생트와 카페 테이블, 1887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압생트는 고흐 이외에도 당시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술입니다. 마네나 드가 역시 압생트를 먹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고흐의 작품 속 압생트는 투명한 흰색이지만, 실제 압생트는 초록색이고, 설탕을 넣어 희석시키면 하얗게 변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 영국 런던 코톨트 갤러리

 

"나중에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빈센트 반 고흐, 꽃병에 꽂힌 세 송이 해바라기, 1888, 개인소장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0, 개인소장, 런던 내셔널 갤러리

빈센트 반 고흐, 꽃병에 꽂힌 열두 송이 해바라기, 1888~1889, 독일 뮌헨 바이에른 주 회화 컬렉션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길, 1887

 

 

 

빈센트 반 고흐, 양귀비가 꽂힌 꽃병, 1886, 네덜란드 크롤러 뮐러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그 애를 위해 침실에 걸 수 잇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랍니다."

 

 

 

(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수잔 발라동의 초상, 1887 ~ 1888, 프랑스 알비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아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수잔 발라동의 초상, 1888, 미국 메사추세츠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

 

 

 

쿠사마 야요이 개인전(2018년 10월, 영국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위) 피에르 퓌비 드 샤반, 희망, 1871 ~ 1872,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래) 피에르 퓌비 드 샤반, 희망, 1872, 미국 볼티모어 윌터 아트 뮤지엄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지발의 춤, 1883, 미국 보스턴 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수잔 발라동의 초상, 1885,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미술관

 

 

 

장 외젠 클라리, 20살의 수잔 발라동, 1856,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예술은 우리들이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만든다."

 

 

 

(왼쪽)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98,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오른쪽) 수잔 발라동, 부케와 고양이, 1919, 개인소장

 

 

 

모리스 위트릴로, 눈 아래 몽마르트, 1930

 

 

 

에드가 드가, 제임스 티소의 초상화, 1867 ~ 1868,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위) 제임스 티소, 공원 벤치, 1882, 개인소장

(아래) 제임스 티소, 보트 위의 숙녀, 1870, 개인소장

 

 

 

(위) 앙리 마티스, 프랑스 파리의 생트 샤펠 성당의 장미 창, 13세기

(아래) 마티스가 그린 모니크 부르주아, 1942

 

 

"이 작품은 저에게 4년을 요구했습니다. 그 시간은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없는 시간, 집중적으로 끈기 있게 작업해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전 생애에 걸친 결과물입니다. 비록 작품은 부족하지만, 저는 이 경당을 저의 걸작으로 여깁니다."

- 앙리 마티스, 로사리오 성당 프로젝트에 대해

 

 

 

앙리 마티스, 로사리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

 

 

앙리 마티스, 레지나 호텔에서 작업을 구상중인 마티스, 1949

 

"실레의 작품은 우리의 감각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린다. (···) 그의 회화는 관능성을 향한 활력 넘치는 감각, 감성으로 충만한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언제나 충동과 내적 욕망을 드러낸다.

- 아르투어 뢰슬러,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잡지에서 실레를 두고

 

 

에곤 실레, 아르투어 뢰슬러의 초상, 1910, 오스트리아 빈 역사박물관

 

 

 

에곤 실레, 오스트리아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

 

 

 

에곤 실레, 크루마우의 풍경, 1916, 오스트리아 린츠 볼프강 구를리트 미술관

 

 

에곤 실레, 시내 근교의 집과 빨래, 1917, 개인소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 ~ 1506,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페르낭 레제, 열쇠가 있는 모나리자, 1930, 프랑스 페르낭 레제 국립미술관

 

 

 

마르셀 뒤샹, L.H.O.O.Q, 1919,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위) 닉 워커, 모나리자, 2006

(아래) 닉 워커, 모나 심슨, 2013

ⓒ Nick Walker / DACS, London - SACK, Seoul, 2019

 

 

 

존 앳킨슨 그림쇼, 히스 거리의 밤 풍경, 1882,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위) 존 앳킨슨 그림쇼, 죽은 홍방울새, 1862

(아래) 존 앳킨슨 그림쇼, 눈과 안개, 1892 ~ 1893, 영국 리즈 시티 갤러리

 

 

 

존 앳킨슨 그림쇼, 레이디 살럿, 1875

 

 

 

존 앳킨슨 그림쇼, 달빛

 

 

존 앳킨슨 그림쇼, Grennock Harbour at Night, 1893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12, 개인소장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07, 미국 노이에 갤러리

 

"사람들의 눈에는 오스트리아 최고 화가의 명화로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숙모가 보입니다.

 

 

 

아이들이 그린 아델레 바우어의 미국행, 2015, ⓒ 이소영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사람들의 눈에는 오스트리아 최고 화가의 명화로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숙모가 보입니다. 제게 인생을 가르쳐 주던··· 빼앗긴 걸 되찾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요?"

- 마리아 알트만, 영화 <우먼 인 골드>에서

 

 

 

앙리 루소, 해 질 녘 센 강과 에펠탑, 1910

 

 

 

조르주 가랑, 만국박람회 당시 조명을 밝힌 에펠탑, 1889,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마르크 샤갈, 창문 너머의 파리, 1913,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마르크 샤갈,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1913,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나는 러시아에서 나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 빛을 비춰 주었다."

 

 

 

(위) 장한종, 책가문방도 8곡병, 19세기 전반

(가운데) 장한종, 책가문방도 8곡병(세부), 19세기 전반

(아래) 장한종, 책가문방도 8곡병(세부), 19세기 전반

 

 

 

(위) 낭세녕, 다보각경(多寶閣景)도, 18세기

(아래) 도메니코 램프스, 호기심의 캐비닛, 1690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

- 데카르트

 

가우디는 아르누보에 의해 탄생된 천재였다. (니콜라스 페브스너)

가우디는 내게 영감을 주는 유일한 건축가다. (필립 존슨)

한 시기가 지난 지금도 가우디의 방식들은 여전히 혁신적이다. (노먼 포스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위) 카사밀라

(아래) 카사밀라의 옥상

 

 

 

 

(위)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아래) 로메로 브리토의 다스 베이더

 

 

 

(위) 우타가와 쿠니요시, 스미다 강변의 풍경, 1831 ~ 1832

(아래) 빈센트 반 고흐, 비가 내리는 풍경, 1890, 영국 웨일스 국립박물관

 

 

 

모리스 프랜더개스트, 비 오는 날의 우산들, 1898 ~ 1899

 

 

 

작자 미상, 호피장막도, 19세기

 

 

 

작자 미상, 호피도 병풍

 

 

 

(위) 사무엘 반 호흐스트라텐, 눈속임 그림(트롱프뢰유), 1664, 네덜란드 도르드레히트 미술관

(아래) 코르넬리우스 N 헤이스브레흐트, 그림의 뒷면, 17세기 중반,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코르넬리우스 N 헤이스브레히트, 눈속임 그림, 17세기 중반

 

 

 

알베르토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 1960,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야 한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 알베르토 자코메티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화상, 1921

 

 

 

파블로 피카소의 원라인 드로잉들

 

 

"보잘것없는 아스파라거스 줄기의 미묘한 개체성, 특유의 빛깔과 색조의 변화에서 소박한 채소를 구원했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고 남부럽지 않은 삶의 한 이상을 보여 준다."

-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에서

 

 

 

(위)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5,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래)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다발, 1880, 독일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19세기 경,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브리엘 뮌터가 그린 바실리 칸딘스키, 1912

 

 

 

바실리 칸딘스키가 그린 가브리엘 뮌터, 1902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1923,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바실리 칸딘스키, 말을 탄 연인, 1906

 

 

 

가브리엘 뮌터, 자화상, 1909년경

 

 

 

(위) 칸딘스키가 그린 무르나우, 1909

(아래) 칸딘스키가 그린 무지개가 있는 무르나우, 1909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프랑스 소설가

 

 

"일본인들은 이곳의 모든 건축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들을 포로로 끌고 가 예술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파스텔과 수채 물감으로 그린 옛 대한제국의 그림을 능가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 저는 황제로부터 받은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픈 예감을 안고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 휴버트 보스,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위) 휴버트 보스, 민상호의 초상, 1898 ~ 1899년 사이

(아래) 휴버트 보스, 고종황제의 초상, 개인소장

 

 

 

휴버트 보스, 서울 풍경, 1899, 한국 국립 현대미술관

 

 

 

(위) 에밀 놀데, 선교사, 1912

(아래) 에밀 놀데, 한국 노인의 초상, 1913

 

 

 

엘리자베스 키스, 해 뜰 무렵의 동대문, 1920

 

 

 

엘리자베스 키스, 모자 가게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 엘리자베스 키스

 

 

 

엘리자베스 키스, 원산, 1919

 

 

 

(위)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 멕시코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아래) 프리다 칼로,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위) 프리다 칼로, Viva la Vida, Watermelons, 1947, 멕시코 프리다 칼로 뮤지엄

(아래) 디에고 리베라, 수박, 1957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에르메네힐도 부스토스, 과일, 전갈, 개구리 정물화, 1874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

 

 

(위) 필리프 드 샹파뉴, 바니타스, 1646

(아래) 폴 세잔, Three Skulls, 1902 ~ 1906, 미국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 1885,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Count Weihorski

(아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론느, 1919

 

 

 

(위) 조각상의 두상, 1910 ~ 1911

(아래) 여인의 두상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느, 1917 ~ 1918, 개인소장

 

 

 

조셉 코넬, A Parrot for Juan Gris, 1953

ⓒ The Joseph and Robert Cornell Memorial Foundation - SACK, Seoul, 2019

 

 

 

(위) 조셉 코넬, Tilly Losch, 1935

(아래) 조셉 코넬, 로렌 바콜의 초상화, 1945 ~ 1948

ⓒ The Joseph and Robert Cornell Memorial Foundation - SACK, Seoul, 2019

 

 

 

노먼 록웰, 삼중 자화상, 1960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동안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탓에 빨리 늙어버린 것 같다. 주름살, 거친 턱수염, 몇 개의 의치 등을 가진 노인이 되어버렸지. 그러나 이런 게 무슨 문제가 되겠니? 내 직업이란 게 더럽고 힘든, 그림 그리는 일 아니냐.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즐겁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비록 내 젊음은 놓쳐버렸지만 언젠가는 젊음과 신선함을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불확실하나마 미래를 상상하며 지낸다. (···) 예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터트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불행했을 테니까."

-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여름 ~ 가을,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

 

 

 

빈센트 반 고흐, 화가의 자화상, 1888, 네덜란드 반 고흐 뮤지엄

 

 

 

(위) 렘브란트의 자화상, 1652

(아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신이 난 피카소의 자화상

ⓒ 2019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위) 기욤 아폴리네르, Il Pleut (It's Raining, 1916)

(아래) 기욤 아폴리네르, 에펠탑

 

 

 

"나는 모든 것을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은 나의 최소의 봉사다."

- 기욤 아폴리네르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 새기리라.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면

우리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살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위) 모리스 드 블라맹크, 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 1904 ~ 1905

(아래) 마리 로랑생, 초대받은 예술가들, 1908

 

 

 

"화가들은 바다의 분위기 속에서만 탄생되는 것을 아십니까?"

- 라울 뒤피

 

 

 

(위) 라울 뒤피, 르아브르 수상축제, 1925, 빌드파리 현대미술관

(아래) 라울 뒤피, 드뷔시에 대한 경의, 1952

 

 

 

(위) 라울 뒤피, 예술가의 스튜디오, 1947

(아래) 라울 뒤피, 검은 화물선, 1952, 프랑스 리옹 예술 박물관

 

 

 

(위)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래) 라울 뒤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939 ~ 1943

 

 

 

라울 뒤피, 파리(병풍), 1930 ~ 1931, 프랑스 국립 가구 컬렉션

 

 

'내가 끌렸던 것은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들의 삶이었다.'

- 피에르 보나르, 프랑스 출신 나비파 화가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 프랑스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클로드 모네, 선상 스튜디오, 1876,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위) 외젠 부댕, 르아부르의 썰물, 1884

(아래) 외젠 부댕, 도빌의 썰물, 1863

 

 

"외젠 부댕과 함께 루엘(르아브르 북동쪽)까지 갔다. 부댕은 이젤을 세우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제야 베일이 걷힌 듯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어떤 건지 말이다. 이제 진정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외젠 부댕 덕분이다. 부댕은 내게 너무 자상하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고 나는 서서히 눈을 떴고, 자연을 이해하게 된 한편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

- 클로드 모네, 부댕을 만나고 나서

 

 

 

에두아르 마네, 아틀리에의 클로드 모네, 1874, 독일 뮌헨 노이에 시립미술관

 

 

 

에드가 드가, 발레 시험, 1874

 

 

 

(위) 에드가 드가, 노숙 여인, 1857

(아래) 에드가 드가, 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 1879

 

 

 

(위) 우타가와 도요쿠니의 우끼요에

(아래) 에드가 드가, 머리 빗겨 주는 여인, 1896 ~ 1900

 

 

 

"나는 유명하면서도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 에드가 드가

 

 

 

"인생이 재미있어지는 방법은 매일 자신이 입는 옷에 조금 더 신경을 써 보는 거예요. 비싼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섬세하게 나와 어울리는 멋을 부려보라는 거죠."

- 가수 유희열, 삶이 무료하고 재미없다는 한 청년에게

 

 

 

소니아 들로네, 이불 퀼트, 1911, 프랑스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

 

 

"말이 아닌 색으로 시를 쓰는 시인을 만났다."

-소니아 들로네, 남편 로베르를 두고

 

 

 

소니아 들로네, 일렉트릭 프리즘, 1914, 프랑스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

 

 

 

(위) 소니아 들로네, 동시성 부티크, 1925

(아래)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소니아 들로네의 패션 일러스트

 

 

 

참고 도서

 

Part 1. 저만 미술이 어려운가요?

 

우리가 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

버나드 덴버 외, 《가까이에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 시공사, 2002

진중권, <미술세계> '소통을 거부하는 미술', 2013년 7월호

이정모,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바틀비, 2018

미술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레오 리오니, 《프레드릭》,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 1999

홍대순, 《아트 경영》, 아카넷, 2018

멋진 오류는 훌륭한 정답

프레데릭 프랑크, 《연필 명상》, 김태훈 옮김, 위너스북, 2014

하워드 가드너, Gardner, H. (2000). Project Zero : Nelson Goodman's legacy in arts education.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58(3), 245-249

하지만 현대 미술은 난해하던데요?

윌 곰퍼츠, 《발칙한 현대 미술사》, 김세진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제임스 엘킨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 정지인 옮김, 아트북스, 2005

호기심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

이동진, 《이동진 독서법》, 위즈덤하우스, 2017

 

Part 2. 미술과 친해지는 5가지 방법

 

1장. 작품은 미술관에서 봐야 할까요?

 

나체로 초콜릿 껍질에 들어간 그녀

조창근, <빅토리안 그림의 이해 : 벌거벗어 존경받은 여인 고다이바(Godiva)>, 콘크리트학회지 29(2), 2017

박신영, 《이 언니를 보라》, 한빛비즈, 2014

카페 로고에도 명화가 있다고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명화가 말하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박찬영 옮김, 리베르, 2019

조셉 미첼리, 《스타벅스 웨이》, 강유리 옮김, 현대지성, 2019

김요한, <괴물열전 : 그리스 신화의 여성 괴물>,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35집, 2016

피에르 그리말,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최애리 외 옮김, 열린책들, 2003

이명옥, 《팜므 파탈》, 시공사, 2008

예술가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독한 술

탕지엔광, 《일상의 유혹, 기호품의 역사》, 홍민경 옮김, 시그마북스, 2015

클레어 버더, 《술 잡학사전》, 정미나 옮김, 문예출판사, 2018

테트리스 게임 속 그 성당

댄 애커먼, 《테트리스 이펙트》, 권혜정 옮김, 한빛미디어, 2018

이창주, 《러시아 문화 탐방》, 이창주, 우리시대, 2014

포레스트 검프의 운동화에 여신이 있었다니

한호림, 《뉴욕에 헤르메스가 산다》, 웅진지식하우스, 2010

론 판 데르 플루흐트, 《로고 라이프》, 이희수 옮김, 아트인북, 2015

김요한, 미디어로서의 로고 : 신화를 기반으로 한 상업적 로고를 중심으로, 한국브레히트학회,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37권 0호>, 2017년 08월

천천히 벗겨서 보시오

김광우, 《워홀과 친구들》, 미술문화, 1997

심상용, 《돈과 헤게모니의 화수분》, 옐로우헌팅독, 2018

이진원, 엔디 워홀 사후 그의 팝아트 작품을 활용한 앨범 커버 아트 검토, 한국 음반학, 2018

 

2장. 그림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해요

 

좋아하는 그림이 있나요?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편역, 위즈덤하우스, 2017

류승희, 《빈센트와 함께 걷다》, 아트북스, 2016

이택광,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아트북스, 2014

최내경,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청어람, 2011

프랑수아 베른르 미셀, 《고흐의 인간적 얼굴》, 김남주 옮김, 이끌리오, 2001

편집부, 《반 고흐 마지막 3년》, 책생각, 2012

사생아로 태어나 화가들의 뮤즈가 된 화가

엔리카 크리스피노 지음, 《로트레크》, 김효정 옮김, 마로니에 북스, 2009

크리스티라 하베를리크 외, 《여성 예술가》, 정미희 옮김, 해냄, 2003

프랜시스 보르젤로,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아트북스, 2017

누구보다 여자들을 아름답게 그린 화가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버나드 덴버, 《가까이에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 김숙 옮김, 시공아트, 2005

어떤 화가에게 거장이라는 이름이 붙을까요?

가비노 김, 《앙리 마티스, 신의 집을 짓다》, 미진사, 2019

Volkmar Essers, 《Matisse》, Taschen, 2016

당신은 마음속에 무엇을 축척하며 살고 싶나요?

구로이 센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다빈치, 2003

김해선, 《에곤 실레를 사랑한다면, 한번쯤은 체스키크룸로프》, 이담북스, 2019

 

3장. 사람들은 왜 그 그림을 명화라고 부를까요?

 

위대한 명화는 명화를 남긴다

존 패트릭 루이스, 《모나리자 도난사건》, 천미나 옮김, 키다리, 2011

박수현, 《세상이 반한 미소 모나리자》, 국민서관, 2012

월터 아이작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신봉아 옮김, 아르테, 2019

권용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돌베게, 2011

달빛을 수집한 남자, 조금 달랐던 밤 풍경

Atkinson Grimshaw, 《John Atkinson Grimshaw》, Richard Green, 2003

Dirk Stursberg, 《John Atkinson Grimshaw》, Createspace Independent Pub, 2014

Robertson, Alexander, 《Atkinson Grimshaw》, Phaidon Press, London, 1988

그의 작품 곳곳엔 금빛이 흘러넘친다

전원경, 《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아르테, 2018

이주헌, 《클림트 : 에로티시즘의 횃불로 밝힌 시대정신》, 재원, 1988

박홍규,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 가산출판사, 2009

조성관, 《빈이 사랑한 천재들》, 열대림, 2007

같은 풍경, 다른 시선, 만 가지 얼굴

정대인, 《논란의 건축 낭만의 건축》, 문학동네, 2015

마르틴 뱅상, 《에펠 스타일》, 배영란 옮김, 미메시스, 2014

동양과 서양, 책으로 연결되다

정병모, <강좌 미술사> 7호 (1995), 민화와 민간 연화, pp.101~141 & 이원복, 책거리 소고

임두빈, 《한국의 민화 4》, 서문당, 1993

정병모, 김성림, 《책거리》, 다할미디어, 2017

지금 보아도 새롭고 미래에 보아도 새롭다

김용대,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가우디》, 미진사, 2012

주셉 프란세스크 라폴스, 프란세스크 폴게라, 《가우디 1928》, 이병기 옮김, 아키트윈스, 2015

가지각색의 시선, 문화를 엿보는 재미

임명순,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미래엔아이세움, 2001

최상운, 《고흐 그림 여행》, 샘터, 2012

민길호,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학고재, 2014

 

4장. 그래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본 것들은 모두 진짜였을까요?

진중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세트》, 휴머니스트, 2013

이연식, 《눈속임 그림》, 아트북스, 2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예출판사, 2013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열화당, 2007

프랑크 모베르, 《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함유선 옮김, 뮤전트리, 2014

제임스 로드, 《작업실의 자코메티》, 오귀원 옮김, 을유문화사, 2008

컬렉터에게 보낸 아스파라거스

전준엽, 《익숙한 화가의 낯선 그림 읽기》, 중앙북스, 2011

유경희, 《교양 그림》, 디자인하우스, 2016

알랭드 보통,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18

조흐주 뒤비, 미셸 페로, 《사생활의 역사 4》, 전수연 옮김, 새물결, 2002

버나드 덴버, 《가까이에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 김숙 옮김, 시공사, 2005

홍석기, 《인상주의》, 생각의나무, 2010

김광우,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미술문화, 2007

홍진경,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예경, 2007

휘트니 채드윅, 《여성, 미술, 사회》, 시공사, 2006

새로운 풍경보다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이구열, 《우리 근대미술 뒷 이야기》, 돌베게, 2005

이보람 <휴버트 보스의 생애와 회화연구 : 중국인과 한국인 초상화를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석사 논문

김혜련, 《에밀 놀데》, 열화당, 2002

박정혜, 황정연, 윤진영, 강민기, 《왕의 화가들》, 돌베게, 2012

엘리자베스 키스,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 ~ 1940》, 책과함께, 2006

엘리자베스 키스,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 책과함께, 2012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 만세

유화열, 《예술에서 위안받은 그녀들》, 미술문화, 2011

유화열, <프리다 칼로 작품에 나타난 아르떼 뽀뽈라르>, 중남미 연구 제 23권 2호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남궁 문 옮김, 시공아트, 1999

해골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문소영, 《그림 속 경제학》, 이다미디어, 2014

정수경, <바니타스 정물화의 전통을 잇는 동시대 미술>, 한국연구재단 지원 과제, 2014

이유리, 《검은 미술관》, 아트북스, 2011

 

5장 취향은 어디서 찾나요?

 

사랑하면 알고 알면 보이나니

조성관,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 : 예술인편》, 열대림, 2016

앙드레 살몽,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강경 옮김, 다빈치, 2009

장소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열화당, 2000

수많은 수집이 예술작품이 된 이야기

Jason Edwards, 《Joseph Cornell : Opening the Box》, Peter Lang Pub Inc, 2007

김정운, 《남자의 물건》, 21세기북스, 2012

그림 속 그림 찾기

론 쉬크, 《노먼 록웰, 사진과 회화 사이에서》, 공지은 옮김, 인간희극, 2011

수잔나 파르취, 로즈마리 차허, 《렘브란트 : 자화상에 숨겨진 비밀》, 노성두 옮김, 다림, 2016

에르빈 파노프스키, 《인문주의 예술가 뒤러 1》, 임산 옮김, 한길아트, 2006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예담, 1999

실비 지라르데, 클레르 메를로 퐁티, 네스토르 살라, 《피카소 :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최윤정 옮김, 길벗어린이, 2010

프란체스코 갈루치, 《피카소 : 무한한 창조의 샘》, 김소라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7

시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송재영 옮김, 민음사, 1999

기욤 아폴리네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예술시대, 2001

윤민희, <기욤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에 나타난 글과 그림의 동시성 미학>, 프랑스문화예술연구, 2011

히로히사 요시자와, 정금희, 《마리 로랑생》, 지에이북스, 2017

삶의 리듬을 그린다면

도라 페레스 티비, 장 포르느리, 《뒤피》, 윤미연 옮김, 창해(새우와 고래), 2001

안 디스텔, 《르누아르 : 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송은경 옮김, 시공사, 1997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르누아르》, 최병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시작은 한 예술가의 삶을 사랑한 데서부터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정영목 옮김, 청미래, 2011

김광우, 《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미술문화, 2017

피오렐라 니코시아, 《모네》, 조재룡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7

수 로우, 《마네와 모네 그들이 만난 순간》, 신윤하 옮김, 마로니에북스, 2011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시선을 낳는다

폴 발레리, 《드가, 춤. 데생》, 김현 옮김, 열화당, 1977

자클린 루메, 《드가》, 성우, 2000

제임스 H. 루빈, 《인상주의》, 김석희 옮김, 한길아트, 2001

나카노 교코,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이연식 옮김, 이봄, 2015

화가였던 그녀, 의상 디자이너가 되다

한상우, 《베르그송 읽기》, 세창미디어, 2015

카라 메인즈, 《소니아 들로네》, 문주선 옮김, 주니어RHK, 2017

이브 펭길리, 《들로네》, 김미선 옮김, 성우, 2000

자크 다마스, 《소냐 들로네 : 패션과 직물(Sonia Delaunay : fashion and fabrics)》,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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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0-002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이한용, 2020

채륜서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2790

정왕역스마트도서관

 

471.2

이92ㅇ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거 그냥 짱돌 아니에요"

                                      "석기는 과학입니다."

 

"왜 쟤만 털이 없어요?"

                                     "쟤가 아니라 우리 조상님이에요."

 

"외계인이 지구에 남긴 표식입니다."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입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쏟아지는 질문에 구석기시대 유물의 과학성을 쉽고 논리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선사박물관장이 있다. 고고학은 벽돌 하나만 밀면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는 낭만이 아니라 하나의 증거라도 살뜰하게 채집하려는 집요함과 치밀함이라 말하면서도 인류 진화의 퍼즐을 맞추는 상상은 늘 짜릿하다며 웃는 고고학자다.

이 책은 그가 박물관장의 경험을 곁들여 인류 진화의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 설명부터 최신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즐겁고 유쾌하게 풀어냇다. 다양한 고고학 이야기로 70만 년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부 인류의 도구

▨ 동아시아 최초로 발견되어 세계구석기연구의 흐름을 바꿔놓은 유물이 한국에 있다?

▨ 일본에서는 구석기연대를 7만 년에서 70만 년으로 뻥튀기한 날조사건이 있었다.

 

2부 인류의 기원

▨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은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튼튼한 두 다리다?

▨ 고고학 발굴현장에 호빗이 나타났다?

▨ 현생인류 중에도 전설의 난쟁이족이 있다?

 

3부 인류의 예술

▨ 물을 마시다가 사레에 들리는 것은 인류 진화의 부작용이다?

▨ 해시태그(#)의 기원은 7만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최초의 악기가 낸 소리는 애잔한 단조 음악이다?

 

지은이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으로 매년 한국에서 세계구석기심포지엄을 열고 주먹도끼를 직접 만들어 분석하는 실험연구를 한다. 고고학 유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며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에는 아낌없는 찬사와 격려를 보내지만 직접 발로 뛰는 전문가로서 쓴소리를 할 때도 있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구석기고고학을 전공하였다. 1990년부터 전곡리발굴조사의 현장 실무를 맡았고 1993년부터 시작된 전곡리 구석기 축제의 기획과 운영에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연구원으로 전곡리유적의 학술연구에 힘썼다. 전곡선사박물관의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2008년 경기문화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실무를 책임졌다. 2011년 박물관 개관 후부터 학예팀장의 역할을 맡아 2015년 4월부터 지금까지 전곡선사박물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에는 박물관 미술관 발전유공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30년째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인연을 이어오며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문화의 이해를 통한 인류보편적 가치의 구현’이라는 전곡선사박물관의 설립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실험고고학과 대중고고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고학과 시민의 다리역할을 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이 책을 썼다.

 

차례

 

1부 인류의 도구


석기는 과학입니다
흑요석 루트
아슐리안 in 전곡
주먹도끼의 비밀
석기 연대기
돌은 아름답다
족대의 추억
나는 바늘이로소이다
삼겹살은 내가 최고야
돌과 나무의 시대
무기여 잘 있거라
모닥불 피워놓고
구석기통신 난 오른손잡이야

2부 인류의 기원


사냥꾼? 사냥감?
두 발 걷기가 우리 몸에 남긴 변화
명석한 두뇌보다 튼튼한 두 다리
구워야 제맛
고기라도 먹자
알고 있나 루씨
왜 쟤만 털이 없나요?
오빠만 믿어
누가 네안데르탈인을 죽였는가?
호빗의 나라
왜 우리만 홀로 남게 되었을까?
화산재에 묻힌 진실
구석기통신 출생의 비밀

3부 인류의 예술


호모 뮤지시언시스
###의 시대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
91억 9,263만 1,770번
반인반수, 사자인간
동굴 속 미술관
구석기 비너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Music is Life
구석기시대 백남준
구석기통신 병 주고 약 주고

에필로그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는 일본의 고고학자로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후 197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최고(最古)인 4만 수천년전의 석기를 발굴하고 이 후에도 그가 발굴하는 곳에서 항상 유물이 나와 '석기의 신' '신의 손'으로 불렸고 그가 발굴한 유적을 통해 일본의 인류역사가 7만-5만년 전에서 약 70만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갔었다.

그러나 2000년 10월 그가 구석기 유적지에 석기를 파뭍는 모습이 몰래카메라에 포착돼 그 모습이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유적날조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일본 고고학협회는 2000년 11월 긴급위원회를 열고 후지무라 신이치를 협회의 명예를 손상한 이유로 제명했다. 그리고 유적 조작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2001년 5월 유적 재검증 조사단을 구성, 후지무라가 관여한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간토(關東)지방에 이르는 180여 곳의 유적들의 진위여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그가 발굴한 총 180여곳의 유적 가운데 162개 구석기 전 · 중기 유적이 모두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일본의 인류 역사는 다시 비교적 확실한 유적이 존재하는 7만-5만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후지무라가 부이사장으로 있었던 일본의 도호쿠(東北) 구석기 문화 연구소는 후지무라가 관여한 74년 이후의 발굴 조사 내용을 재검증하고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내놓아 그가 발굴에 참여한 70년대부터 30여년간 유적을 날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일본의 중고교에서 후지무라씨가 발굴에 참여했던 미야기(宮城)현의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 등에 대한 기술이 삭제됐고 국가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다. 또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관련 유적을 잇따라 등록 취소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후지무라 신이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반월형석도

 

 

국적 > 시대 : 한국 > 청동기(靑銅器)
재질 : 석 > 화강암(花崗岩), 석 > 기타(其他)
크기 : 현재길이 6.4 너비 5.7 현재길이 7.8 너비 5.4
용도 · 기능 : 산업/생업 > 농업 > 수확탈곡 >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출토지 : 전라남도 고흥군
소장처 :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
유물번호 : 순천대(순천대) 100043-000

<정의>

곡물의 이삭을 따기위해 사용된 반달처럼 생긴 돌칼. 반월형돌칼. 반달돌칼.

<발달과정/역사>

신석기시대 말기에 들어와 청동기시대에 다량 출토되고 있다. 반월형석도의 기원은 중국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용산문화(龍山文化)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한반도에는 장방형석도로 대표되는 앙소계석도와 즐형(櫛形)을 기본으로 하는 용산계석도가 시기를 달리하여 파급되었다고 보고 있다. 반월형석도의 전파는 중국 화북농경문화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처음에는 잡곡농사와 관련된 수확이고 벼농사와 본격적으로 결부된 것은 단주형석도와 삼각형석도가 성행한 시기 이후부터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수확구의 일종으로 반도 전역에 걸쳐 출토되고 있다. 주로 점판암계통의 석재를 이용하여 타원형이나 반월형 등의 편편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앙부에 한두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용하였다. 반월형석도는 전체적인 형태와 인, 배부의 형태에 따라 구분되나 크게 장방형 및 삼각형석도가 있다. 장방형석도는 다른 형식의 석도와는 달리 양날이 지배적이고 구멍도 2개가 아니라 1인 경우가 많으며, 동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삼각형석도는 두 개의 엇갈린 인부를 가진 점이 특징이고,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 남해안지역을 거쳐 일본 구주지방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 반월형석도는 2점 모두 편으로 정확한 형태는 파악할 수 없다. 두 점 모두 날은 한쪽방향으로 서 있으며, 구멍은 양방향에서 뚫었다. 구멍의 크기는 직경 0.6cm정도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반월형석도 (e뮤지엄)

 

마제석검

 

 

국적 > 시대 : 한국 > 청동기(靑銅器)
재질 : 석 > 기타(其他)
크기 : 길이 32.3 너비 5.4 두께 0.9
용도 · 기능 : 사회생활 > 의례생활 > 상장 >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출토지 ; 전라남도 여수시
소장처 :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
유물번호 : 순천대(순천대) 100281-000

<정의>

갈아서 만든 돌칼.

<발달과정/역사>

마제석검은 주로 점판암이나 혈암으로 만든 검으로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된 것으로 청동기시대 집터 및 분묘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석검은 마제석촉, 반월형석도, 유구석부 등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석기유물이다. 한반도 지역이 그 중심 출토지역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비파형동검, 우리나라에서는 마제석검이 출토되고 있다. 석검은 오르도스식 동검, 요령식 동검, 또는 중국식 동검 등에서 복합적 힌트를 얻어 우선 실용검으로 출발하여 차츰 부장용의기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기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본 석검은 신분의 상징적인 기능과 칼의 기능, 장의적인 기능 등 용도에 따라 다양화되고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석검은 버들잎모양의 검신 양 측면에 날이 세워져 있으며, 검신의 횡단면은 마름모꼴 또는 볼록렌즈형인 석기이다. 그 종류는 손잡이부분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손에 쥘수 있는 자루가 달린 유병식(有柄式)과 자루를 꽂을 수 있는 슴베가 붙은 유경식(有莖式)이 있다. 이는 다시 검신의 피홈, 자루의 단이나 마디, 슴베 끝의 홈과 같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세분되고 있다.

이 석검은 1호 지석묘 하부 동장벽 벽석 밖에서 봉부가 땅을 향하여 45도 정도 기운 상태에서 출토되었다. 완형의 일단병식 석검이다. 검신과 병부의 단이 뚜렷하다. 심부가 돌출되어 있고, 양 끝을 마연시켰으며, 병부와는 호를 그리며 연결되고 있다. 병두부 끝도 마연하였다. 심부의 폭은 8.8cm이고, 병두부의 폭은 10.1cm이다. 전체적으로 석결에 따라 무늬가 나타나 있다. 검신의 단면은 마름모형이고, 병부의 단면은 마름모꼴에 가까운 렌즈형이다. 이 석검은 남해안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유형으로 신부에 비해 심부나 병두부가 심하게 돌출되어 의기화된 석검으로 판단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마제석검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주먹도끼

인류 진화의 비밀

 

주먹도끼(handaxe)는 구석기 시대의 많은 석기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인류 진화에 관해서 그 어느 석기보다도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하나의 석기로써 여러 가지 기능을 하도록 고안되어 있어, 주먹도끼는 마치 현대의 ‘맥가이버 칼’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리고 거의 100만 년 이상 사용된, 구석기 시대 최고 히트 상품 중 하나이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주먹도끼의 제작자는 인류의 직계 조상인 곧선사람(Homo erectus)이다. 곧선사람 이전까지의 인류 조상들은 아프리카에서만 살았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60만 년 전쯤에 출현한 곧선사람들은 불을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비로소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로까지 삶의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곧선사람의 화석 출토 범위와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지역의 범위는 대체로 일치한다. ‘곧선사람’이라는 학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완벽하게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자유로워진 그들의 두 손은 더욱 정교하게 진화되었고, 그로 인해 석기 제작 기술도 그 이전의 어떤 인류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났다. 주먹도끼는 이러한 인류의 진화를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도구인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 - 인류 진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국립중앙박물관, 김상태)

 

어떻게 만들었나?

 

연천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 구석기시대, 길이 23.6cm

 

주먹도끼는 인간이 만들어 낸 최초의 규격화된 도구다. 대부분의 주먹도끼는 크든 작든 형태상으로 좌우와 앞 뒷면이 대칭을 이루며,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이다. 주먹도끼의 이와 같은 형태적 정형성(定型性)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주먹도끼를 만들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석재의 선택 과정과 2단계의 제작 과정-성형과 잔손질-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일한 모양의 석기를 반복적으로 복제해 내기 위해서는 만들고자 하는 대상을 미리 상정하고, 이를 머릿속에서 설계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곧선사람은 앞일을 미리 계획하고, 계획에 따라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준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먹도끼인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 - 인류 진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국립중앙박물관, 김상태)

 

주먹도끼는 단순히 도구인가?

 

주먹도끼의 모양은 균형 잡힌 대칭형이다. 주먹도끼의 제작에는 초보자로서는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난이도가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격지를 전면적으로 떼어내 납작하게 만들고, 가장자리를 따라 날카로운 날과 뾰족한 선단부를 형성하는데, 이는 강인한 느낌을 준다.

주먹도끼는 하나의 도구로 찢고, 자르고, 찍고, 땅을 파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러나 일부 주먹도끼는 기능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것 이상으로 세련되고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거의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루며, 마치 갈아낸 듯 고르게 정리되어 있는 주먹도끼는 도구라기보다는 흡사 한 점의 예술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주먹도끼가 보여주는 평범한 도구 이상의 면모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주먹도끼의 제작에는 두 종류의 망치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먼저 1차 가공은 돌과 같은 단단한 망치로 전체적인 형태를 다듬고, 2차 가공으로 나무나 뼈와 같은 무른 망치로 정교하게 날 부분을 가공하는 것이다. 곧선사람들은 단단한 망치는 짧고 두터운 조각을, 무른 망치는 길고 얇은 조각을 떼어내는데 유효하다는 것을 경험적 지식으로 터득하였으며, 이러한 기초적인 역학적 지식을 석기 제작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주 금파리유적 출토 주먹도끼, 구석기시대, 길이 17.8cm

 

주먹도끼의 특질은 제작 기술보다는 그 완성된 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크기가 다른 주먹도끼들이라 할지라도 길이/너비의 비율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선사람들이 기하학적 비율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연하게 좌우를 대칭으로 만든 것과 길이/너비의 비율이 보여주는 일정한 기하학적 요소는 인간의 역사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예술성의 맹아(萌芽)일뿐만 아니라, 유클리드 의 ‘기하학원론’에서 다루어진 기본 원리를 최초로 보여 준 예로 평가되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 - 인류 진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국립중앙박물관, 김상태)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주먹도끼는 우리나라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발견된다. 다만 수량 면에서 중부지방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에 특히 연천 전곡리유적을 중심으로 한 임진 · 한탄강유역의 구석기유적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다.

주먹도끼의 석재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주로 규암이나 응회암, 화강암 등이 사용되었다. 이들 석재는 균질하지 못하여 정교한 가공이 쉽지 않고, 그로 인해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플린트(flint)로 만든 주먹도끼들에 비해 외형상 거칠고 투박한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선사람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지질학적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성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적 조각품들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대 그리이스의 섬세한 대리석제 조각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예술성의 수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1940년대,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모비우스(H.L.Movius)는 동아시아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으며, 그 대신 찍개가 중심을 이루는 석기문화를 갖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지역이 주먹도끼가 빈번히 발견되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지역에 비해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열등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서 상당량의 주먹도끼가 발견되었고, 중국에서도 최근 들어 많은 양의 주먹도끼가 출토됨으로써 모비우스의 학설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연천 전곡리유적 출토 주먹도끼, 구석기시대, 길이 16.9cm

 

임진 · 한탄강유역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 - 인류 진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국립중앙박물관, 김상태)

 

 

호모 에렉투스

[ 古人 , Homo erectus ]

호모 에렉투스 골격

 

인류 진화 상에서 호모 하빌리스호모 사피엔스의 중간 단계에 위치한 고인류 화석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구대륙에서 19세기 경부터 발견된다.

호모 에렉투스의 공식명칭은 쟈바원인의 발견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들의 활동영역은 최근의 화석발견으로 인하여 계속 확대되고 있는데, 약 150만년 전에는 아프리카, 유럽일대와 중국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올두바이와 동부 투르카나 지역에서는 화석과 초기의 올도완 전통에서 직접 발전한 찍개중심의 석기군이 같이 발견되고 있으며, 약 150만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쟈바에서 발견된 일부 화석도 그 시기의 것으로 보이나 몇몇 화석은 약 70만년을 넘지 않는 중기 홍적세의 것이다. 단선진화론자인 브레이스는 이를 바탕으로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로부터 확산되어 동쪽으로는 빠르게, 북쪽과 서북쪽(유럽) 그리고 동북쪽(중국)으로는 서서히 확산되었을 것으로 본다.

1950~1960년대에 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의 터니파인, 올두바이 협곡의 Bed 2에서 호모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 모로코의 살레, 동아프리카의 쿠비포라에서 완전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서 160만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KNM ER-3733 머리뼈 화석은 커다란 머리통과 가냘픈 머리선 및 옆니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모습은 중국 주구점(周口店)에서 출토된 화석과 유사하다.

영국과 프랑스의 연구자들은 화석의 연대 측정을 위해 전자스핀공명법과 열발광연대측정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측정법을 적용하였다. 이 새로운 2가지 방법은 많은 암석에서 공통적인 특정 방사성동위원소의 붕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에서 발견된 호미니드 화석 중에 초기 플라이스토세인 160만년 전부터 중기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하는 화석의 분류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미니드는 시간의 선후에 따라 호모 에렉투스와 옛 호모 사피엔스로 구분하였으며, 유럽에서 발견된 중기 플라이스토세의 호미니드는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또는 옛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하였다. 아시아의 경우, 전기 · 중기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하는 호미니드의 진화상 위치 선정과 분류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화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발견된 호미니드는 모두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경우 〈종의 단위〉에서 볼 때 생물학상 차이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인도네시아 학자들은 100만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자바에서는 시기에 따라 호모 에렉투스를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호미니드가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의 아프리카의 하다와 라에톨리에서 발견된 호미니드 화석의 연구에 따르면, 이른 시기의 호미니드 화석은 그 크기가 다양하며 성별에 의한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호미니드 화석은 모두가 단일종인 호모에렉투스로 분류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발견된 대표적인 화석으로는 자바인, 하이델베르그인, 북경원인,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의 Bed Ⅱ의 중간에서 발견된 두개골 OH9 · OH33, 올두바이 협곡 Bed Ⅳ, 케냐의 바링고(Baringo)호수, 모로코의 토마스 채석장(Thoman Quarry), 알제리의 테르니피네(Ternifine), 쾨니히스발트의 모죠케르토(Mojokerto) 어린이 등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인 독일 마우어(Mauer)와 헝가리 베르테스죌뢰스의 화석은 플라이스토세 중기 중엽 경으로 보고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두뇌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뇌용량보다 큰 평균 775~1,300㏄에 해당한다.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두뇌용량은 남성은 대개 700~800㏄ 내외, 여성은 500~600㏄ 내외로서, 평균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비하여 약간 증가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플라이스토세 전기와 중기의 호모 에렉투스 화석을 비교할 때, 두뇌용량의 평균치는 843㏄에서 1,067㏄로 증가한다. 이는 현대 인간의 다양한 뇌용량의 하한선에 속한다. 한편 북경원인의 두뇌용량은 915~1,225㏄이고, 베르테스죌뢰스의 두뇌용량은 1,300㏄정도이다.

이 두뇌용량의 증가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학적 능력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두뇌용량의 증가가 과연 두뇌실질부의 증가, 즉 두뇌능력의 증가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신체규모가 커지면 두부도 커지게 되는 것이지 이것을 지능의 향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후두부의 하단과 전두엽 부위가 현저히 증가하는 것은, 신체상 어떤 변화보다도 두뇌용량의 증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이 부위의 발달은 감각과 균형기관의 관장 및 관찰 · 명령 · 분류작업의 관장능력의 발달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문화행위를 위한 복잡하고 복합적인 정신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해부학상으로는 현대 인간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인류속 안에서는 현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들은 존재하지 않으나 이들의 후손인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의 유전인자 안에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해부학상 특징은 호모 사피엔스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의 해부학상 특징 중 두개골 용량은 평균적으로 1,000㎖보다 적고 뇌를 에워싸며 낮은 외형이다.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뇌는 그 선조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는 컸지만, 현생인류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은 더 두꺼워졌고 이마부분은 작다. 턱은 조금 튀어나오고, 눈 위쪽에 두드러진 두덩이 있다. 앞이마는 낮고 평평하며 뒷머리에는 옹이점이 두텁게 발달해 있다. 위에서 볼 때 호모 에렉투스의 머리뼈는 넓적하며, 머리뼈 최대너비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머리 위쪽에 최대너비가 있는데 비해, 호모에렉투스는 귓구멍 높이에 최대너비가 위치한다.

정수리뼈 또는 두개골의 벽은 다른 것에 비하여 얇다. 그 표면에 있는 주름무늬는 머리 근육 위쪽의 경계에 뒤를 향하여 아래쪽으로 굽은 모양이다. 두개골은 비교적 폭이 넓으며, 후두골의 뼈나 두개골 뒤의 구조는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다. 목 근육은 결부되어 있다. 이 근육결부 부분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에렉투스가 광범위하다. 호모 에렉투스를 구별하는 다른 특징은 두개골의 아래쪽에서 명백히 관찰된다. 특히 아래턱 관절의 범위 안에서 그러하다. 낮은턱 그 자체는 깊고, 매우 튼튼하다. 그리고 턱언덕에 두드러진 발달이 부족하다.

이빨은 호모 하빌리스의 이빨만큼 크지는 않으나 호모 사피엔스의 것보다는 매우 크다. 투르카나 호수가에서 발견된 소년의 골격은 약 160만년 전의 초기 인류이며 해부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초기의 호모 에렉투스의 개체가 키가 크고 강건하며 억센 근육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사지뼈는 호모 사피엔스와 비슷하며, 루시같은 A.아파렌시스나 호모 하빌리스처럼 팔이 길지 않다. 전체 몸 크기로 볼 때,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하빌리스보다 크며 거의 현대인류와 비슷한 크기이다.

골반과 대퇴골의 상단부분은 현대인간의 형태와는 다소 다르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단계부터는 거의 완성된 직립보행의 특징이 나타난다.

성별차(性別差)로 인한 동종이형(同種異型)은 피테칸트로푸스군 단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이전에 비해 크게 축소된다. 그것은 여성의 크기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화석에서 뇌껍질과 사지의 긴뼈가 전보다 두꺼워지고, 관절부분은 보다 확장 · 강화되었으며, 근육이 붙어 있던 흔적이 자주 관찰된다. 따라서 보다 많은 힘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안면 치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것보다 다소 크지만, 피테칸트로푸스의 대구치는 오히려 현대인의 다양한 변이의 하한선에 해당될 정도로 줄어들며 턱도 작아진다. 이러한 변화는 바로 음식물 섭취의 과정에서 구강부가 받게 되는 스트레스 양의 감소, 즉 턱 및 치아 운동량의 현격한 감소를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식물성보다는 씹기 쉬운 동물성 단백질을 더 섭취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로빈슨은 텔란트로푸스(Telanthropus)라 명명했던 스와트크란스 화석도 악골과 치아로 보아 이 범주에 넣고 있다. 이 화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이는 최초의 증거였다.

이들은 주로 수렵생활을 하였으며 체계적으로 사냥을 하였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냥이 가능했던 것은 뇌용량의 증가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변화, 뼈와 근육의 발달에서, 이들이 이전보다 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동물을 사냥하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화석과 함께 발견되는 도구, 즉 잘 다듬어진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석기문화는 주먹도끼 전통의 아슐리안문화, 올도완문화 및 주구점(周口店) 유적을 중심한 자갈돌찍개 전통의 석기문화 등이다.

결국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에서는 도구제작의 본격화, 즉 석기의 다양화, 정제화, 그리고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 양상이 보인다. 더불어 자연계에서 보다 능동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집단적 · 반복적 사냥이라는 새로운 생계기술로 가능하였다. 본격적인 야생동물의 사냥이라는 새로운 생계수단이 중요하게 되었음은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는 집단적 수렵행위와 관계되는 증거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 연구를 통해, 호모 에렉투스가 직접떼기와 간접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졌다.

집단사냥의 확산은 언어의 발달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효과적인 사냥을 위해서 사냥에 나선 성원들 사이의 협동작업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현대적 의미에서 진정한 언어였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으나 어떠한 형태이건 최소한 집단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기호언어(sign language)나 극히 간략한 소수의 어휘로 구성된 원시언어를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화석인류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주구점(周口店) 유적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헝가리, 남부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밝혀진 ‘불의 사용’이라는 것이다. 불을 직접 피울 줄 아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불의 사용은 음식조리, 도구제작, 활동시간 및 영역의 확대, 방어능력의 향상 등 그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그들의 체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는 그들의 체질적인 특징이나 경제활동으로 보아 인류진화단계에서 중요한 한 단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호모 속(屬)에 해당하는 인류형태의 조상으로 본다. 호모 에렉투스는 인골화석만으로도 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흔적, 즉 그들이 살면서 남겨놓은 고고학적 유물은 구대륙의 거의 전 지역에 확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의 증가와 점유지역의 확대에 따라 종내 집단의 수도 많아졌는데, 집단들이 시 ·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호모 에렉투스 종내 집단 사이에는 유전자 표이와 선택으로 인하여 형질적 특징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럽발견 호모 에렉투스와 중국발견 호모 에렉투스 사이에는 두개골과 안면부의 형태에서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적 형태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에렉투스 집단의 기술수준과 적응양식은 기본적으로 동질적이었다고 추측된다. 집단사냥과 인구증가는 또한 이웃집단 사이에 상호 경쟁관계를 유발하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에 따라 각 집단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적 범위(territoriality)에 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 에렉투스 [古人, Homo erectus] (고고학사전, 2001. 12.)

 

주먹도끼문화

[ 兩面核石器文化(양면핵석기문화) ]

 

요약 : 전기구석기인 아슐리안형(Acheulian形) 주먹도끼를 대표적인 특징유물로 하는 문화.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전기구석기의 가장 특징적인 석기이다. 구석기인들은 처음에는 냇돌이나 돌덩이의 한쪽면을 때려 떼어서 날을 세운 찍개(chopper)와 양쪽면을 떼어서 날을 세운 찍개(chopping tool)를 썼지만, 이어서 손에 쥐기 좋도록 형태를 다듬은 주먹도끼로 발전시켰다. 주먹도끼는 전형적인 것과 비전형적인 것을 합하여 약 20종류가 있으며, 시대에 따라 각각 특징적인 것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형태로는 아베빌리안형(Abbevillian形) · 창끌형 · 타원형 · 행인형(杏仁形) · 넙치형 · 미코키안형(Micoquian形) 등이 있고, 석기 제작기술로는 아베빌리안과 아슐리안의 두 기(期)로 나뉜다. 이러한 주먹도끼는 짐승을 사냥하는 데는 물론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했고, 또한 땅을 파서 나무뿌리 등을 캐는 다목적용 석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H.모비우스 교수는 주먹도끼가 주로 사용되는 전기구석기시대를 주먹도끼 문화권과 자갈돌석기 문화권으로 구분하였다. 즉, 주먹도끼문화는 주로 아프리카 · 유럽 · 중근동 · 인도 · 자바 등 구대륙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 · 한국 · 일본 등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찍개로 대표되는 자갈돌석기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8년 5월 경기 연천 전곡리(全谷里)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로,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중국도 주먹도끼의 형태가 일부 보이고 있으나, 주먹도끼문화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한국에서는 1979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연천 전곡리유적 제2지점의 지표 및 퇴적층에서 나온 석기가 주먹도끼(hand axe, biface) · 클리버 도끼 · 다각 원구(圓球)망치(Polyhedron) · 찍개 · 긁개 등으로 형태학적 · 통계학적 분석에 의해 유럽의 아슐리안 후기 석기문화를 크게 닮고 있어 동아시아에서는 최초의 확실한 손도끼 기술전통의 구석기문화로 주목받게 되었다. 전곡리 출토의 주먹도끼는 창끌형 · 행인형 · 타원형 · 넙치형 · 미코키안형 등 다양하고 전형적인 주먹도끼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클라크 교수는 전곡리의 주먹도끼문화와 아프리카의 아슐리안 후기의 생고(Sango)문화 석기와의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주먹도끼문화가 존속하던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제4기(期) 지질시대인 홍적세와 충적세로, 약 50만년 전부터 10만년 전 사이이며, 아프리카에서는 이보다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어 약 100만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문화 [兩面核石器文化(양면핵석기문화)] (두산백과)

 

네안데르탈인

[ Neanderthal man ]

 

요약 : 사람속(homo genus)에 속하는 하나의 종으로 유럽과 아시아 서부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의 매장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을 가진 최초의 네안데르탈인은 35만년 전 유럽에 나타났으며, 13만년 전에 이르러서 완전한 네안데르탈인이 출현했다. 5만년 전 아시아에서 사라졌으며, 유럽에는 3만 3천년 내지 2만 4천년 전까지 살았다.

어원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이란 말은 1863년에 앵글로 아이리시(Anglo-Irish)의 해부학자 윌리엄 킹(William King)에 의해 명명되었다. 현재 네안데르탈인은 두가지 철자를 사용한다. 네안데르탈인이란 말은 독일의 네안데르(Neander)계곡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네안데르 뒤에 붙은 탈(thal)은 독일어로 계곡이란 뜻이다. 그 후 1901년에 독일어 ‘thal’ 은 ‘tal’로 철자가 바뀌어 독일어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을 ‘Neandertal’로 쓴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원래의 철자를 써서 ‘Neanderthal’로 표기한다.

발견

1856년 독일 네안데르계곡에서 발견된 화석을 통해 네안데르탈인이 알려졌고, 그 후 그 전에 벨기에 엔기스(Engis)에서 1829년에, 지브롤터(Gibraltar)에서 1848년에 발견된 화석도 네안데르탈인으로 밝혀졌다. 네안데르계곡에서 발견된 화석은 네안데르탈인1(Neanderthal 1)으로 이름 불리며 두개골 상부, 두개의 대퇴부 뼈, 오른팔 뼈 3개, 왼팔 뼈 2개, 왼쪽 장골(ilium)의 일부, 어깨뼈 일부, 몇 개의 갈비뼈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발굴한 사람은 곰의 일부로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아마추어 박물학자 플로트(Johann Karl Fuhlrott) 손에 들어갔고 그는 이것을 해부학자 샤프하우젠(Hermann Schaaffhausen)에게 보냈다. 이 발견은 1857에 발표되었다.

 

분류

오랜 기간 동안 과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을 사람속에 속하는 하나의 독립된 종으로 간주할지 아니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속하는 아종(subspecies)으로 간주할지를 두고 토론해 왔다. 초기에는 별개의 종(種)으로 보고 ‘호모 네안데르탈엔시스(Homo neanderthalensis)’라는 학명으로 나타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亞種)인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ens neanderthalensis)’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DNA(mitochondrial DNA)의 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유전적으로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서로 다른 종(種)으로 보아야 한다는 학설도 생겨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우며 일부 인종들에게서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유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외양적 특징

네안데르탈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추위에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큰 머리, 짧지만 강인한 체격, 큰 코가 그것이다. 그들의 두뇌 크기는 현대인(modern humans)의 두뇌보다 크다고 추정된다.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키는 평균 1.65m이며, 여성은 1.53 내지 1.57m이다.

거주지역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독일 북부에서부터 남쪽의 이스라엘과 지중해 연안의 나라, 서쪽의 영국에서부터 동쪽의 우즈베키스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모든 곳, 같은 시기에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북쪽의 거주 경계는 날씨가 추울 때마다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추측되지만, 화석이 발견되는 지역이 북쪽 거주 경계를 정확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세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 생각되는 것이 그 보다 더 북쪽인 북위 60° 지방까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는 남부 시베리아까지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 및 도구

중기석기시대(Middle Paleolithic)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문화는 무스테리안 문화(Mousterian Culture)이며 네안데르탈인이 이끌었다. 무스테리안 문화의 석기 제작은 르발루아기법(Levallois technique)으로 대표된다. 또한 무스테린안 문화의 석기 제작은 하드해머보다는 소프트해머를 사용하여 제작됐다. 하드해머란 해머의 재질로 돌을 사용한 것을 말하고 소프트해머란 돌보다 덜 단단한 뼈나 나무, 동물의 뿔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네안데르탈인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 쯤에는 무스테린안 문화보다 발전한 샤텔페로니안(Châtelperronian)시대를 열었다.

언어의 사용

네안데르탈인의 소리를 내는 기관에 대한 연구가 정확하지 않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1983년까지 복잡한 언어가 없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83년 이스라엘의 케바라동굴(Kebara Cave)에서 현대인의 것과 거의 같은 네안데르탈인의 설골(hyoid bone)이 발견되면서 네안데르탈인도 언어를 가졌을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설골은 혀의 근육조직과 후두를 연결해 주는 부분으로써 이 뼈의 존재는 네안데르탈인의 언어 사용이 해부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를 가졌을 신경학적 가능성은 설하신경관(hypoglossal canal)의 형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설하신경관은 현대인의 것과 비슷하거나 좀 더 크며, 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ine)과 침팬지 보다는 휠씬 크다. 설하신경관에는 혀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설하신경(hypoglossal nerve)이 있다. 이와 같은 점은 네안데르탈인의 목소리를 내는 능력은 현대인과 비슷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David DeGusta가 이끄는 University of California의 연구팀은 설하신경관의 크기와 목소리를 내는 능력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며, 현존하는 많은 영장류와 오스트랄로피테신도 같거나 혹은 더 큰 설하신경관을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네안데르탈인의 선조인 하이델베르크인(Homo heidelbergensis)의 외이와 중이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네안데르탈인의 소리에 대한 감각은 현대인과 비슷하고 침팬지와는 매우 다르다. 그들은 아마도 매우 여러 가지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 man] (두산백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Australopithecus ]

 

요약 : 플라이오세에서 플라이스토세 초기에 걸쳐 존재하였던 최초의 화석인류로 1925년 R.A.다트가 남아프리카에서 출토한 유아두골(幼兒頭骨)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라는 학명을 주었던 것이 속명의 시초이다.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거나 육식동물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으면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였다는 설이 정설인데 유인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다운 특징으로 도구 사용, 성에 따른 노동의 분담 등을 들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학명

Australopithecus

 

1925년 R.A.다트가 남아프리카에서 출토한 유아두골(幼兒頭骨)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라는 학명을 주었던 것이 속명의 시초이다. 다트는 유인원화석인 줄 알고 이 이름을 붙였던 것이나 그후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것을 화석인류인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학명은 그런 의미를 떠나서 최초의 명명을 존중하게 되어 있어 그대로 사용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가장 후대의 자료는 S.B.리키 부부가 동아프리카의 올두바이 협곡(Olduvai Gorge)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진잔트로푸스보이세이(Zinjanthropus boisei)로 명명했다. 그후 별개의 인류화석 5체를 발굴하였는데, 호모하빌리스(Homo habilis : 능력있는 사람)라 명명하였고, 진잔트로푸스보다 진화한 것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형이라 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일반적으로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로부스투스(A. robustus) 및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의 3종으로 분류한다. 아파렌시스는 두개골의 구조상 현생인류보다는 이전의 유인원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두개골을 제외한 나머지 골격구조는 현생인류와 매우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어 직립보행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부스투스는 다른 종에 비해 두개골과 안면 형태 및 치아 구조가 거대하고 튼튼하다. 특히 먹이를 씹는 기능을 가진 어금니가 매우 크다는 점이 이 종의 특징인데, 극단적인 경우 그 크기는 현대인의 4배에 달한다. 큰 어금니에 비해 앞니와 송곳니는 작은 편으로 전체적인 치열 형태는 뒷부분이 크게 벌어진 포물선형을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파렌시스와 로부스투스보다 현생인류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로부스투스와 상당기간 공존하였지만 로부스투스보다 일찍 소멸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아프리카누스의 일부가 사람속(屬)으로 일찍 진화하였기 때문이라는 가설과 이미 발생한 사람속과의 생존경쟁 속에서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소멸하였다는 가설이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거나 육식동물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으면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였다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들은 유인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생활근거지의 확보, 성에 따른 노동의 분담, 의사소통의 수단, 친족관계 등의 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생활하였으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이 만들어 사용한 석기군을 흔히 올두바이 공작(Olduvai Industry)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석기는 자갈돌 끝을 간단히 가공한 석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도구의 제작은 아직 뚜렷하지 않고 석기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의 조상임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진화의 과정에 대하여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ustralopithecus] (두산백과)

 

◇ 올도완(Oldowan) 석기


'올도완(Oldowan)석기'는 250만~170만년 전 초기 인류가 만들었던 돌도끼를 말한다. 올도완(Oldowan)은 최초의 석기가 발견된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에서 딴 이름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브라질 상파울루대 공동연구팀은 10월 19일(현지 시각) "브라질 세하 다 카피바라 국립공원에 살고 있는 카푸친원숭이(꼬리감는원숭이)들이 돌과 돌을 부딪쳐 깨는 방식으로 뾰족한 석기(石器)를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원숭이가 만든 돌도끼는 '올도완 석기'와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픽사베이 제공

 

연구팀은 카푸친원숭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여러 마리가 돌을 골라 깨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발견했다. 깨진 돌 111개를 모아 분석한 결과 이 중 절반 가량은 한쪽 면이 날카로운 형태로 초기 인류가 만들었던 올도완 석기와 흡사했다.

옥스퍼드대 토모스 프로핏 교수는 "원숭이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처음 돌도끼를 봤을 때 새로 발견된 올도완 석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돌을 깨는 원리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석영암이나 규암을 골라낸 다음 이를 바위에 대고 여러 차례 후려치는 방식으로 돌도끼를 만들었다. 인류의 조상들도 도구 제작에 석영암과 규암을 주로 이용했다. 허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는 "진화 과정에서 뇌가 급격히 커진 인간만이 도구를 만든다는 확신이 깨진 것"이라고 말했다.

네이처는 "이번 연구는 인류의 고고학적 기록에 근원적인 의문을 던졌다"고 평가했다. 우선 지금까지 발굴된 초기 석기가 모두 인류가 만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 중 일부는 다시 검토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재원 박사는 "사용처까지 확인된다면 고고학과 진화학계에 일대 혁명이 될 사건"이라며 "원숭이가 인간처럼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출처 : jobsN 블로그팀 잡스엔

 

 

호모 사피엔스

[ 新人 , Homo sapiens ]

 

호모 사피엔스 두개골

 

플라이스토세 중기 말엽에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와 유사한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몇몇 형질적 특징에서 현대인에 보다 가까이 접근한 고인류 화석이다. 이 새로운 종은 인도네시아, 중국, 아프리카, 유럽 등 구대륙 각지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들이 등장한 최초의 시기는 40~25만년 전경이다. 즉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는 후기의 호모 에렉투스와 상당한 시간 동안 공존하였다.

이들 양 집단 사이에는 실상 화석의 형태나 문화내용에 있어서 그리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플라이스토세 중기의 호모 속을 위의 두 종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이며 결과론적인 분류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경향을 계승하며 일정한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플라이스토세 중기 말의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와 비교하여 두개골의 용량과 형태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안면부의 형태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치아의 구조는 호모 에렉투스와 유사하다. 아울러 사피엔스의 화석은 두개골 상단의 융기부(sagital keel)의 크기와 두개골의 두께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궁골의 융기정도는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그리 줄어들지 않은 편이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과 치아의 특징은, 두뇌 각부 크기의 차별적 증가, 앞니 부위의 집중적 사용 및 어금니와 작은 어금니 부위의 중요성 감소라는 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사냥도구의 발달과 이 도구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발달 및 그 기술을 활용하여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체 특정부위의 집중적 · 반복적 사용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미궁골과 비강부의 발달은 석기제작에 요구되는 근육운동을 지지하기 위한 필연적 결과로 해석된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석기문화는 매우 세련되게 발전하며 다양해진다. 하지만 한가지 공통된 특징으로 묶자면 아슐리안 문화의 최후 단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도구는 점차 고정화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여 종류가 다양해지고 형태가 정제화 되어지며 기술형태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표석기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발달된 사냥도구를 활용하여 그들이 처한 적절한 생태적 적소를 선택하여 발달된 사냥기술을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영국 클락톤 유적에서 발견된 것처럼 과거의 사냥도구에 비하여 효율성이 높은 새로운 무기인 창을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대표적인 석기제작방법은 아슐리안 석기문화에 기원을 둔 르발루아 기법(Levallois technique)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인류가 석재를 선택하여 복잡한 박리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가며 르발루아 격지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 곧 이들 집단 간의 기술적 전통을 밝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동일한 전통을 전승한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사고능력의 발달, 즉 인식체계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문화진화를 가능하게 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것은 형질적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주먹도끼로 대표되는 아슐리안 석기문화는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석기문화 중에 하나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적은 아프리카와 유럽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프랑스 니스의 테라 아마타(Tera Amata) 유적이다. 이 유적은 11개의 생활층이 정연하게 퇴적되어 있다. 각 문화층에 걸쳐 다수의 타원형 평면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는 집의 골조를 세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가 있었으며 유물의 분포양상으로 볼 때, 도구를 제작하던 작업공간도 존재하였다. 도구는 주로 아슐리안석기문화의 것이며 창으로 쓰였을 첨두기 등도 발견되었다. 그밖에 페트랄로나(Petralona), 빌징스레벤(Bilzingsleben), 슈타인하임(Steinheim) 및 스완스콤(Swanscomb)의 호모 사피엔스 유적이 있다.

또 중요한 초기 사피엔스의 유적들 가운데 케냐의 올로게세일리에(Ologesailie)와 탄자니아의 이시밀라(Isimila) 유적은 인간행위가 전문화되고 분화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우선 서식처의 환경조건에 따라 뚜렷이 다른 석기군이 발견되는 점과 동일 생활면에서도 구석기시대인의 작업양식에 따라 상이한 종류의 도구가 각각 무리져 발견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같이 작업목적에 따라 도구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거나 그에 적당한 석기를 제작 사용하는 능력은 이미 이 시기에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는 이전 화석 단계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의 생계양식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서식처에서 얻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원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적응양식을 지닌 집단이었다. 약 30만년 전 플라이스토세 중기 말에 형성된 유적인 스페인의 토랄바 유적에서는, 인간집단이 불을 사용하여 매머드와 같은 큰 동물을 늪지에 몰아 사냥을 하고, 그곳에서 사체를 해체해서 생활 근거지로 되돌아오는 일련의 조직적인 행위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예술행위나 상징행위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테라 아마타에서 발견된 안료덩어리는 아마도 신체를 장식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며, 페슈데라쥬(Pech de L’aze) 유적에서 발견된 석판조각을 통해 이들의 예술행위를 엿볼 수 있으며, 프랑스 라제레(Lazeret) 동굴 유적에서 그 얼굴 쪽이 동굴입구를 향하도록 늑대의 머리뼈를 1점씩 주거지의 출입구 부분에 배치한 행위는 상징행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격적인 언어의 구사와 예술행위가 시작되었을 높은 가능성, 구조물의 건축 및 고고학 자료에서 유추되는 고도로 조직화된 적응양식의 존재에서, 초기 사피엔스는 집단 내적으로 또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고도로 구조화·조직화된 양식의 사회적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들의 물질문화가 지닌 많은 특징은 그들의 사회조직이 아마도 많은 점에서 현대의 원시집단에 가까운 형태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들 사회에는 적어도 연령 혹은 개인적 능력에 따른 사회적 상하질서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 사피엔스 [新人, Homo sapiens] (고고학사전, 2001. 12.)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 Homo heidelbergensis ]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화석은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 분류되는 화석은 에티오피아의 보도(Bodo) 이외에 남아프리카의 엘란스폰테인(Elansfontein)과 허스동굴(cave of Hearths), 잠비아의 브로큰 힐(Broken Hill), 탄자니아의 누투(Ndutu)와 에야시(Eyasi), 케냐의 캅투린(Kapthurin), 에티오피아의 멜카쿤투레(Melkakuntre), 지부티의 와디 다가드레(Wadi Dagadle), 그리고 모로코의 케비바트(Kebibat)와 살레(Sale) 등에서 출토되었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 분류된 호미니드의 화석은 유럽 전역에서도 출토되었다. 영국의 스완스콤(Swanscombe)과 폰트네위드(Pontnewydd), 그리고 프랑스의 몽마우린(Montmaurin), 아라고(Arago), 라자레(Lazaret), 쉐즈(La Chaise), 폰트쉐바드(Fonteche-vade), 비아쉬 쌩 바스트(Biache-Saint-Vasst), 스페인의 아타푸에르카(Atapuerica), 독일의 마우어(Mauer), 스타하임(Steinheim)과 빌징스레벤(Bilzingsleben), 헝가리의 베르테스죌레스(Vertesszollos), 그리고 그리스의 페트라로나(Petralona)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아시아에서 이른 시기의 호모 사피엔스(Early Homo sapiens)로 알려졌던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범주에 속하는 화석은, 자바의 낭동(Ngandong=Solo)과 삼붕마찬(Sambungmachan)에서 보고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대리(大理), 허가요(許家窯), 마패(馬壩) 그리고 금우산(金牛山)에서 발견되었으며, 인도에서는 나르마다 계곡(Narmada Valley)에서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Homo heidelbergensis] (고고학사전, 2001. 12.)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나스

[ australopithecus africanus , アフリカオ-ストラロピテカス ]

 

아프리카에서 갱신세초기에 생존한 사람의 절멸종.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아프리카나스 [australopithecus africanus, アフリカオ-ストラロピテカス] (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호모하빌리스

 

요약 : 약 150만 년 전 홍적세에 살았던 인류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화석인류

 

외국어 표기

Homo habilis(영어)

호모하빌리스 | 출처: 시사상식사전

 

영국의 인류학자인 리키가 1964년에 동아프리카의 탕가니카에서 발견한 화석 인류로 약 150만 년 전 홍적세에 살았던 인류이다. 발견 당시 L.S.B. 리키, P. 터바이어스, J. 네이피어 등이 이 화석인류에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호모하빌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키는 약 130cm였으며 뇌용량은 약 600cc였다.
얼굴 각 부분의 비례는 표본마다 상당히 달라서 어떤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비슷한 반면 어떤 것은 호모에렉투스와 비슷하다. 팔다리뼈를 보면 이들이 두 발로 능숙하게 걸어 다녔으며 정확한 손놀림으로 도구를 다룰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석과 함께 발견되는 조악한 도구를 통해서는 석기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현생인류의 진화 단계 | 출처: 시사상식사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하빌리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 Sahelanthropus Tchadensis ]

 

요약 : 중앙아프리카의 차드에서 600∼700만년 전의 지층을 통해 발견된 초기 인류화석.

 

2002년 프랑스의 고인류학 연구팀에 의해 두개골과 2개의 아래턱, 3개의 이빨 등 6점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학명은 '차드에 살았던 사헬이라는 인류'라는 뜻의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이다. 투마이원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투마이란 차드어로 '삶의 희망'이라는 뜻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DNA를 이용한 연구로 인간은 침팬지와 유연관계에 있으며, 양자가 갈라진 것은 500만에서 600만년 전 사이인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화석의 형태가 분명히 침팬지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출현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적어도 100만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인류학자들은 약 500만 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인류의 진화과정을 이제까지 발견된 원인의 화석으로 추적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350만 년 전에 출현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또 440만년 전에 출현하여 직립보행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아디피테쿠스 라미더스 등이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류와 원숭이의 공동조상이 다양한 원인류(猿人類)로 갈라지기 시작한 700만년 전후의 인류화석은 이제까지는 발견된 것이 없었다. 따라서 700∼800만년 사이에 갈라진 원인류가 지금의 인류로 연결되어 온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었다. 이번에 발견된 화석은 바로 700만년 전후,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조상에서 인류라는 종이 분기한 직후에 살았던 가장 오래 된 인류의 화석으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도 이번 화석의 발견으로 인류 발생지에 관한 학설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은 남오스트레일리아와 동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이번의 화석 발견은 700만년 전부터 중앙아프리카에도 고인류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헬란트로푸스차덴시스 [Sahelanthropus Tchadensis] (두산백과)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 Ardipithecus ramidus ]

 

요약 : 1992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초기 유인원(類人猿) 화석의 학명으로써 라미두스 원인(猿人)이라는 뜻이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라고도 한다. 약 440만년 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은 두발걷기(bipedalism)로의 초기 진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어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두발로 걸었다는 증거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인류의 출현과 진화

 

1992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초기 유인원(類人猿) 화석의 학명으로써 라미두스 원인(猿人)이라는 뜻이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라고도 한다. 약 440만년 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은 두발걷기(bipedalism)로의 초기 진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어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두발로 걸었다는 증거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1992년 12월 20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통합생물학(Integrative Biology) 교수 화이트(White, Tim D,)는 에티오피아 아와쉬 강(Awash 江) 중류의 아라미스 유적지에서 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ines)과 다른 종류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이 화석은 1994년 화이트가 네이처지(誌)에 발표한 논문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에티오피아 아라미스로부터 초기 호미니드의 새로운 종 (Australopithecus ramidus, a New Species of Early Hominid from Aramis, Ethiopia)》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40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anamensis)와 같이 삼림지대에 살았지만 발견된 치아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작고 유인원의 치아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속명이 붙었다. 한편 1994년 도쿄대학 쓰와 겐(諏訪 元) 교수는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가 발굴된 지역과 같은 곳에서 580만~520만년 전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의 아종(亞種)인 이 화석은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카다바(Ardipithecu ramidus kadabba)라고 부른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Ardipithecus ramidus] (두산백과)

 

파란트로푸스

요약 : 플라이스토세(世) 전기에 주로 아프리카에 생존하고 있던 인류의 선조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일종이다. 최근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ralopithecus robustus)라고 부르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일종이다. 1938년 이후에 남아프리카의 크롬드라이, 스와르트크란스 등에서 발견되었다. 두개골이 크고 튼튼하며 어금니가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나, 최근에 이것들이 속(屬)이 다를 정도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강해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ralopithecus robustus)라고 부르게 되었다.

1939년 자바에서 발견된 메간트로푸스 팔레오자바니쿠스(Meganthropus paleojavanicus)나 1955년 이후 동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진잔트로푸스보이세이(Zinjanthropus boisei)도 같은 종에 포함시키는 학자가 많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파란트로푸스 (두산백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요약 : 약 300만 년 전의 원시 인류로,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젊은 여성의 화석인 '루시'가 가장 유명하다.

 

학명

Australopithecus Afarensis

 

1974년 발견된 '루시' 화석(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약 300만 년 전의 원시 인류로, 지금까지 발견된 아파렌시스의 화석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루시(Lucy)이다. 루시라는 명칭은 발견 당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루시의 화석은 320만년 전에 살았던 25세의 여성으로, 키는 약 107cm · 몸무게는 28kg, 뼈가 변형된 것으로 보아 관절염을 앓았다는 점 등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루시의 무릎뼈는 인류가 두발걷기(직립보행)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면서, 인류의 기원을 320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셀람

요약 : 330만년전 살았던 3살짜리 여자 아이의 화석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속한다.

 

원어명 : Selam

 

2000년 12월 10일 에티오피아 북동부 디키카(Dikika) 지역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의 이름이다. 셀람은 에티오피아어로 평화라는 뜻으로 이 화석이 발견된 곳과 멀지 않은 지역에서 1974년 발견된 320만년전의 화석 루시(Lucy)와 같은 종으로 알려졌다.
이 화석을 발굴한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Evolutionary Anthropology)는 2006년 9월 20일 왼쪽 두개골 화석을 공개하고 2006년 9월 21일자 《네이처》에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5년 동안 셀람을 발굴하고 연구한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알렘세게드(Alemseged, Zeray,) 박사 연구팀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셀람이 루시보다 오래된 330만년전 화석이라고 밝혔다.

두개골과 몸통, 두 팔과 다리뼈 등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발견된 이 화석의 주인공인 3살배기 여자아이는 홍수로 떠내려가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며, 영장류와 인간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루시와 같이 직립보행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유인원처럼 긴 팔을 사용하여 나무를 타고 이동하였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침팬지의 것과 비슷한 설골(舌骨)이 발견되어 인두(咽頭)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셀람 (두산백과)

 

만달인

 

목차

  1. photo
  2. 2D Data
  3. 3D Data

등고선사진보기

 

2만 년 전 경에 지금의 북한 평양 근교 만달리(萬達里)에서 살았던 장년남자. 이 시대는 구석기 시대로서 그 동안 남한 지역에서도 공주의 석장리, 경기도 연천의 전곡리 등에서 구석기 유물은 발견되지만, 아직 인골은 발견된 적이 없었으나, 비록 적은 예이지만, 다행이 만달인 자료가 비교적 구체적이고, 또한 국제학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골이므로 이를 예전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 거주했던 사람으로 보고 복원해 본 것이다.

북한의 논문에 게재된 두개골의 사진과 칫수를 이용하여 복원두개골을 만들고, 이 복원두개골을 이용하여 복원상을 만든 것. 일견에 북미 인디언 닮은 인상을 풍기며, 현대인에 비하여 얼굴 길이가 짧은 대신 앞뒤로 길어 다부진 인상을 풍긴다. 우선, 두상을 보면 마루점이 높은 고구마두상이고, 이마가 뒤로 넘어져 있는 형이다. 이 두 가지 점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과 도통하므로 이 만달인 같은 구석기인의 특징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옆얼굴을 보면 뒤통수가 뾰족하고(미간에서 뒤통수까지의 직선 거리가 200mm에 달한다) 위쪽에 높게 붙어 있고 얼굴도 볼록형인데, 이런 두 가지 점은 현대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현대 한국인은 뒤통수가 납작하고 또 뒤통수의 가장 돌출한 곳의 위치도 아래로 내려와 있다. 두개골의 눈구멍으로 보아 눈도 크지 않은데, 현대 한국인의 눈이 작은 것도 이런 용모인자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 때문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치아는 현대인처럼 윗니가 아랫니를 덮는 겸상교합이 아니고 아랫니와 윗니가 정확히 맞닿아 교합하므로 이가 마모되어 짧다. 측두골과 두정골의 만곡상태로 보아 왼쪽 어금니로 음식을 씹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이렇게 왼쪽 저작형인 사람은 오른쪽 이마가 왼쪽보다 더 도드라져 있으며, 이 또한 한국인에게 많은 특징이다. 한편, 모발은 검은 색깔의 직모였을 가능성이 높고, 피부색은 검붉은 색으로 보는 편이 좋다. 입술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참고할 자료: 등고선사진 및 정. 사. 측면 사진
전용가능: 한반도 전역,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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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상사진

두상사진

두상사진

연령변화 좌측 - 청년 얼굴

연령변화 우측 - 노년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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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두

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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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색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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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발부착

모발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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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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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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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만달인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인 얼굴 유형),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호모 에르가스터

[ Homo ergaster ]

 

투르카나 호수 동쪽 지역인 쿠비포라에서 출토된 화석으로,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아시아 출토 호모 에렉투스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어 호모 에르가스터(KNM ER-3733)로 분류되고 있다. ER-3733 화석은 여성으로 머리뼈의 이음새와 이빨의 마모 정도, 세 번째 어금니까지가 다 솟은 점으로 볼 때, 이 화석은 성숙한 어른의 머리뼈로 보인다. ER-3733 머리뼈는 낮은 머리통에 가운데 머리가 약간 솟아오르고 뒷머리뼈에 가로로 둥근 마디가 있으며 머리 최대너비가 머리 밑면에 위치한다.

두개골 용량은 850㏄로 중국의 주구점(周口店)에서 출토된 화석과 비슷하며 옆머리뼈 윤곽은 현생인류처럼 곡선이 아닌 곧게 내려온 모습이다. 이런 특징은 아시아 출토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에서 발견되는데,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하웰 등은 ER-3733을 호모 에렉투스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ER-3733 화석에서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출토된 호모 에렉투스와는 다른 특징도 관찰된다. 얇은 머리뼈나 각이 진 뒷머리, 그리고 눈두덩 뒤에 파인 부위 등은 아시아 출토 호모 에렉투스 화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ER-3733 화석이 새로운 종인 호모 에르가스터로 재정립된 것이다.

호모 에르가스터에 속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화석으로는, 리차드 리키팀이 1984년에 투르카나 호수 서쪽의 나리오코톰에서 찾은 165만년 전 호모 에르가스터(WT-15000) 화석으로 나이는 대략 12살로 키는 160㎝정도이다. 뼈대의 특징을 근거로 남자아이임이 판명되었는데, 이 호미니드는 지금까지 발견된 이른 시기 호미니드 중 가장 완전하게 남은 화석이다. 몸의 모습과 사지뼈의 비율로 볼 때, 소년은 오늘날 아프리카 적도에 살고 있는 소년처럼 가는 몸매에 큰 키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뼈는 거의 70개의 조각으로 부서졌는데 이빨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빨의 모습은 중국에서 출토된 호모 에렉투스의 이빨과 유사하다. 머리 최대너비는 머리밑쪽에 있으며 눈두덩 뒤에 파임이 있는데, 이런 특징은 호모 에렉투스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두개골 용량은 880㏄로 이 소년이 성장하였을 때의 두개골 용량은 990㏄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등뼈 솟기는 현생인류보다 더 길고, 신경굼이 좁기 때문에 목등뼈굼을 통과하는 신경의 수가 현생인류보다 적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좁은 굼 때문에 허파에서 입으로 보내지는 공기의 양이 줄어들어 화석의 주인공은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엉덩뼈가 좁기 때문에 현생인류보다 더 잘 걷고 잘 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허벅지뼈의 목은 길고 오스트랄로피테신에서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WT-15000 화석은 전체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현생인류와 같은 몸의 구조와 머리크기로 변해가고 있다.

호모 에르가스터(SK-847)의 화석은 남아프리카 스와르트크란스 동굴에서도 발견된다. 스와르트란스에서 호모가 살았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동굴에서는 석기와 불의 사용흔적이 발견되었고, 동굴에서 발견된 호미니드 화석의 95%가 강건해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신의 화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강건해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신이 연모를 만들고 불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스와르트크란스 동굴에서 발견된 석기와 불의 사용흔적은 이른 시기의 호모 에르가스터가 남긴 것으로 보여진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 에르가스터 [Homo ergaster] (고고학사전, 2001. 12.)

 

 

호모 루돌펜시스

요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초기 원인(原人)

 

외국어 표기

Homo rudolfensis

 

호모 루돌펜시스 화석은 지난 1972년 리키 박사가 이끄는 쿠비포라연구단(KERP)이 케냐 루돌프 호수(현 투르카나호)에서 발견하였다. 당시 발견된 단 하나의 화석만으로는 이 화석이 별개의 인류종인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KNM-ER 1470' 등으로 불렸다. 이후 리키 박사팀은 2007∼2009년에 처음 화석을 발견한 곳과 멀지 않은 장소에서 약 178만∼195만 년 전 인류의 두개골과 턱뼈 2개 등 3개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리키 박사팀은 2012년 8월, 이 인간 화석을 분석한 결과, 직립원인인 호모 에렉투스와는 다른 종인 인류 화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발굴지의 이름을 따서 호모 루돌펜시스란 이름이 붙였으며, 이를 뇌의 용량이 크고, 긴 형태의 넓적한 얼굴을 띠는 것이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번 연구는 현생인류가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에서 직립원인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곧바로 진화하였다는 기존 단선진화론을 뒤집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과학자들은 두 종 이상의 인류 조상이 동일 시기, 동일 지역에서 함께 존재하였다는 복수종이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실제 이번 연구 결과 현재의 케냐 지역에서 약 200만 년 전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루돌펜시스, 그리고 호모 에르가스터 등 세 인류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케냐의 쿠비 포라(Koobi Fora) 지역은 호모 루돌펜시스를 비롯해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등 다수의 고대 인류 화석이 발굴된 곳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루돌펜시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 Homo floresiensis ]

 

인도네시아 자바 섬 동쪽 적도 위의 섬인 플로레스 섬에서 2003년에 발견된 신종 인류 화석. 발견된 화석을 근거로 이들의 생활 연도를 추정한 결과 약 9만 5000년~1만 8000년 사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름은 발견지의 지명을 딴 것으로 ‘플로레스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키 약 1m, 뇌용량 약 380mL이다. 덩치가 작은 것은 식량과 자원이 부족한 곳에 적응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뇌용량이 침팬지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과거 자바 섬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에서 분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1만 8000년 전까지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Homo floresiensis] (과학용어사전, 2010. 4. 14., 뉴턴편집부, 현춘수)

 

 

필리핀에서 새로운 고인류 '호모 루조넨시스' 발견

 

요약 : 호주, 필리핀, 프랑스 연구진 등이 참여한 프로젝트팀은 필리핀에서 새로운 고인류 화석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이 신종 인류에 '호모 루조넨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2019.04)

 

호주국립대의 필립 파이퍼 교수가 호모 루조넨시스의 뼈를 들고 있다. (Lannon Harley, ANU 제공)

 

필리핀에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고인류 화석이 발견됐다. 화석을 연구한 국제 공동연구진은 새로운 고인류에 '호모 루조넨시스'(Homo luzonensis)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이는 화석이 발견된 '루존 섬'의 이름에서 왔다.

국제연구진은 루존 섬의 칼라오 동굴(Callao Cave)에서 5만년 이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종의 인류 화석을 분석했다. 손가락뼈와 발가락뼈, 치아, 대퇴골 등이었는데, 이들은 최소 성인 두 명과 아이 한 명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뼈에는 흥미로운 특징이 보인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치아 크기가 매우 작다는 게 한 가지 사례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필립 파이퍼 호주국립대(ANU) 교수는 "일반적으로 치아 크기는 포유류의 신체 크기를 반영하므로, 우리는 호모 루조넨시스가 상대적으로 작을 거라고 예상한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아직은 얼마나 작을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몇 가지 골격 요소를 더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손뼈와 발뼈 끝은 굽어있어 나무를 타기에 좋은 특성을 보였다. 이는 200만년 이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과 유사한 것이다.

파이퍼 교수는 "신종 인류가 섬에 살며 이런 특성을 얻은 건지, 아니면 조상으로부터 2백만년에 걸쳐 전해진 해부학적 특징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고 전했다.

또 호모 루조넨시스는 잘 알려진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와 일부 골격 특성을 공유한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서 발견됐으며, 키가 겨우 1m 정도라 '호빗'으로도 불린다.

파이퍼 교수에 따르면 이번 발견은 동남아시아 전역의 인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돌파구를 제공한다.

프로젝트 팀에는 필리핀대,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프랑스 푸아티에대, 호주 그리피스대 등이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2019년 4월 10일자에 실렸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필리핀에서 새로운 고인류 '호모 루조넨시스' 발견 (유럽 주요 연구소)

 

 

데니소바인

[ Denisovan ]

 

데니소바인(Denisovan)은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에 있는 데니소바 동굴(Denisova cave)에서 처음 발견된 고대 인류이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어금니와 새끼 손가락 마디 뼈에서 DNA를 추출하여 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현대 인류보다 네안데르탈인에 가깝지만 독립적인 고대 인류 계통으로 확인되었다. 현대인의 유전체와 비교한 결과, 호주와 파푸아 뉴기니 등 멜라네시아 원주민 유전체의 약 4-6%가 데니소바인에서 유래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즉 현대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와 유라시아로 이동하면서 먼저 네안데르탈인과 혼혈을 이룬 후,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해 이동한 현대 인류의 한 계통이 다시 데니소바인과 혼혈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일부 뼈는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1세대 혼혈로 밝혀져, 인류의 이동과 진화 과정에서 다양한 혼혈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목차

  1. 1.데니소바인의 발견과 분포
  2. 2.데니소바인과 현대인의 혼혈
  3. 3.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혼혈
  4. 4.관련용어
  5. 5.참고문헌

데니소바인의 발견과 분포

러시아의 남중부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 있는 데니소바 동굴에서 고대 인류의 것으로 보이는 어금니, 손가락 마디 뼈, 다리 또는 팔 뼈 조각들이 1984 년부터 계속해서 발견되었다(그림 1). 스반테 페보(Svante Pääbo) 박사 연구팀은 어금니와 손가락 마디 뼈에서 DNA를 추출하여 고유전체학(Paleogenomics) 기법으로 분석하였다1). 고유전체학은 멸종한 고대 생물의 뼈와 사체에서 DNA를 추출하여 미토콘드리아와 핵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이다. 어금니와 뼈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한 결과, 현대 인류나 네안데르탈인과는 다른 새로운 계통의 고대 인류임이 밝혀졌고, 발견된 동굴의 이름을 따서 "데니소바인"으로 명명되었다. "데니소바 2", "데니소바 4", "데니소바 8"로 불리는 어금니들과, "데니소바 3"으로 불리는 손가락 마디 뼈, "데니소바 11"로 불리는 팔 또는 다리 뼈의 주인들은 약 3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티벳의 한 마을인 샤허(Xiahe)의 바이시야 카르스트 동굴(Baishiya karst cave)에서 1980 년에 발견되었던 턱뼈 조각의 단백질 서열을 분석한 결과 데니소바인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턱뼈의 주인은 약 16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데니소바인은 알타이 산맥, 티벳 고원, 인도차이나 반도 등까지 분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데니소바인은 현대 인류 계통보다는 네안데르탈인 계통에 가까우며, 네안데르탈인 계통과는 약 30만 년 전에, 현대 인류 계통과는 약 55만 년 전에 분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 데니소바인의 분포와 시료. (A)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대략적인 활동 범위. 파랑색 화살표는 현대인의 이동 경로이며, 파랑색 원은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 사건을, 빨강색 원은 데니소바인과의 혼혈 사건을 의미한다. (B) 데니소바 동굴의 입구 모습. (C) 데니소바인의 어금니. (D) 데니소바인의 새끼손가락 뼈. (출처: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File:%D0%A2%D0%B0%D0%B8%D0%BD%D1%81%D1%82%D0%B2%D0%B5%D0%BD%D0%BD%D0%B0%D1%8F_%D0%BF%D0%B5%D1%89%D0%B5%D1%80%D0%B0.jpg, https://en.wikipedia.org/wiki/File:Denisova_Molar.jpg, https://en.wikipedia.org/wiki/File:Denisova_Phalanx_distalis.jpg)

 

데니소바인과 현대인의 혼혈

데니소바인과 현대인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해 보면, 현대인 중에서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등 태평양에 거주하는 멜라네시아인들의 유전체의 약 4-6%는 데니소바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1). 멜라네시아인을 제외한 다른 현대인에게서는 데니소바인 서열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 인류의 이동 중에 멜라네시아인 계통 조상들만이 제한적으로 데니소바인과 혼혈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아프리카에서 빠져나온 현대 인류의 조상들은 먼저 중동 지방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혼혈을 이루었다. 유럽과 아시아로 갈라져 이동하던 한 집단이 이동 경로에 살던 데니소바인과 혼혈을 이루고, 계속해서 이동하여 멜라네시아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혼혈

"데니소바 11"로 불리는 팔 또는 다리 뼈의 조각에서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뼈의 주인은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혼혈 1세대인 것으로 밝혀졌다(그림 2). "데니소바 11"의 주인은 약 9만 년 전에 살았던 13세 정도의 소녀이며 "데니(Denny)"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유전체의 반은 데니소바인과, 나머지 반은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하였다. 미토콘드리아 서열이 네안데르탈인의 것이어서, 아버지는 데니소바인, 어머니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추정되었다. 데니소바 동굴이 있는 지역은 네안데르탈인의 뼈도 발견되기 때문에,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의 거주지가 겹쳐, 혼혈이 쉽게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데니소바인의 유전체에서는 미지의 고대 인류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서열을 가지고 있다. 많은 데니소바인, 네안데르탈인, 오래 전에 살았던 현대 인류의 유전체 서열들을 서로 비교 분석한 결과, 인류의 이동과 진화 과정에서 여러 인류 계통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 2. "데니"의 뼈 조각과 인류의 혼혈. (A) "데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데니소바 11"의 뼈조각 (B) 현대인,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알려지지 않은 인류 계통 사이에는 종종 혼혈(점선)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처: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위키피디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데니소바인 [Denisovan] (분자·세포생물학백과)

 

 

호모 에르가스테르

 

 

학명 호모 에르가스테르 Homo ergasther

 

호모 에르가스테르(Homo ergasther)는 동부 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약 180만년 전~120만년 전의 제3기 플라이스토세 전기에 생존했던 사람속의 고인류이다. 1972년 영국의 인류학자 리처드 리키가 케냐의 루돌프 호수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초창기에는 호모 에렉투스의 아프리카 인종으로 여겨졌으나, 아프리카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된 종 중 초기의 종에서 다소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와는 두개골과 골격에서 다소 다른 점이 발견되어 초기의 종은 별도로 호모 에르가스터로 분류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상 아프리카 밖으로 처음 이주한 인류로 추정되나 이론의 여지는 있다.

개요

 

호모 에르가스테르 복원상

 

1972년 리처드 리키케냐의 루돌프 호수(현 투르카나 호수)에서 발견한 화석들 중 투르카나 소년으로 알려진 남성 소년의 전신골격이 대표적인 화석이다. 13~18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성 소년의 화석은 발 부분을 제외한 전신 골격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미 당시에 현생인류와 비슷한 키와 체형, 직립보행에 적합한 구조를 지녔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밖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테르크폰테인 동굴에서 발견된 텔란트로푸스 화석 중 초기의 화석은 호모 에르가스터로 잠정 분류된다. 여전히 다소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보다는 호모 에르가스테르가 후기 호미니드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사피엔스 등의 직접적인 조상으로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즉, 이 종은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 계통에 해당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초기에 이들 화석은 호모 에렉투스의 아프리카 인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의 두개골 형태나 체형의 차이점을 발견한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된 화석들 중의 일부를 1985년 호모 에르가스테르로 재분류하였다. 아틀란트로푸스나 아프리칸트로푸스 등 몇몇 화석을 제외하고는 호모 에르가스테르로 판명되었다.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가장 초기 사람속의 일종이며, 호모 에렉투스와는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호모 에렉투스의 선조로 보나, 호모 에렉투스와는 수만년간 공존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호모 하빌리스의 계통과 약 190만년전에서 180만년 전에 분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호모 에르가스터로 추정되는 화석이 조지아의 드마니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화석은 호모 게오르기쿠스라는 다른 종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호모 하빌리스보다 더욱 진보된 석기를 사용하였으며 아슐 문화기에 살았고, 목소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조지아의 화석은 호모 하빌리스의 석기와 유사한 형태의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호모 에르가스테르의 키는 대략 6피트에서 6피트 2인치(180~189cm) 정도로 추정되며, 초기 호모 에르가스테르의 뇌용적은 700-900cm³, 후기 호모 에르가스테르의 뇌용적은 900-1100cm³이다.

출처 : 위키백과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여행본능

 

2008년 9월 늦은 밤 도착한 조지아(당시는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러시아와 짧지만 격렬한 전쟁을 막 끝낸 트빌리시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군데군데 남아 있는 폭격의 흔적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트빌리시까지 날아간 이유는 유명한 드마니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드마니시인은 조지아의 드마니시에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으로 아프리카 바깥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인류로 알려져서 소위 말하는 첫 번째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때 아프리카를 벗어난 고인류로 여겨진다.

 

▲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

 

조지아 국립박물관장 로드 키파니드제의 손에서 건네받은 드마시니인의 두개골은 180만년 전의 고인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보존 상태가 좋았다. 다음날 화석이 발견된 현장을 방문해 보니 화산 폭발 후 화산재에 묻히고 용암이 그 위를 다시 덮어 마치 석고붕대를 감아 놓은 것처럼 남게 되면서 오랜 세월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마니시인은 학자에 따라 호모에렉투스, 호모에르가스터로 부르다가 요즘은 호모지오지쿠스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이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다.

오늘날 인류는 거의 전 지구에 넓게 퍼져 살고 있으며 약 70억명 달하는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하는 가장 성공한(?) 대형 유인원이다. 인류가 언제? 어떻게? 왜? 아프리카를 벗어나 전 지구로 퍼져 나갔는지는 인류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분야 중 하나다.
최초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으로 여겨지는 고인류 호모에르가스터는 골격이 호리호리하고 키도 크다. 전곡선사박물관에 복원돼 있는 호모에르가스터는 털이 없이 매끈한 몸매를 자랑한다. 뜨거운 열기를 견뎌 내며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아프리카를 벗어나려면 이런 날렵한 신체 구조와 지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오랫동안 달리는 지구력은 인류가 가진 가장 두려운 무기였다. 더위에 지친 짐승을 쫓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구멍을 한껏 열어 굵은 땀을 쏟아 내던 고인류의 질주 본능은 마라톤의 한계적 고통을 즐기는 현대인의 유전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구력으로 무장한 고인류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저 산 너머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두근두근 호기심으로 그들은 그렇게 걷고 또 뛰었다. 그리고 이들의 후예들은 마침내 지구의 끝까지 가게 됐다. 먼 길을 떠났던 모험가 호모에르가스터의 유전자는 버킷리스트에서 항상 압도적 1위로 여행을 꼽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행에서 돌아와 짐을 풀면서 다시 떠나는 날을 꿈꾼다. 가히 여행 본능이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기차 타고 유럽 여행 가는 것을 희망 사항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 출정할 때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떠나서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가왕 조용필의 ‘미지의 세계로’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서울역 터미널에서 ‘여행을 떠나요’를 떼창하며 유럽행 기차에 올라타 보는 상상을 해 본다. 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던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행 본능을 되살려 이번 주말 어디든지 떠나 보자. 열심히 일한 우리는 떠날 자격이 있다. 그곳에서 또 새로운 희망을 품어 보자.

출처 : 서울신문 2018-05-26 22면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호모 뮤지시언시스

 

음악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 차분한 노래를 들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흥겨운 노래를 들으면 춤을 추게 된다. 음악은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음악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인데 이런 정서적 유대감은 인류가 사회적인 동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간에게 음악은 무엇인가? 왜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즐기는가? 음악은 생물학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다움을 보여 주는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말하는 능력, 즉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다. 그래서 언어의 기원은 음악의 기원과도 연결된다. 노래를 부르려면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고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 바로 노래하고 음악 하는 인간인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정교한 정보 교환을 위한 소리의 다양화는 생존능력 향상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생사와 관련된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를 자기들만의 언어로 공유하는 집단이 바로 공동체다. 정확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톤이 다른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높낮이가 다른 소리를 내는 능력을 보다 정교화하는 과정은 인간의 언어가 발달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높낮이가 다르고 길이가 다른 소리, 그게 바로 노래다. 초기의 언어는 마치 합창의 허밍과도 같은 ‘흠흠흠’ 하는 소리에서 출발했다는 스티브 미슨의 주장은 그래서 일리가 있어 보인다.

정교한 의사소통은 사냥꾼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사납게 날뛰는 매머드를 향해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창을 던지며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이보다는 사냥에 참여하는 구성원들 간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어떻게 사냥감을 제압할 것인지를 서로 간의 충분하고도 효율적인 언어로 대화하며 협동하는 것이 사냥의 성공률을 높이는 기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정교한 언어로 충분하고 정확하게 대화하는 능력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능력이었다.

인간의 진화는 우리의 DNA가 세대를 거듭해 내려가면서 새로운 생명체로 재탄생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도 항상 새로워진다. 배우지 않아도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음악이 이어지는 것이다. BTS의 노래가 전 지구에 울려 퍼지는 것도 새로운 음악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그리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호모 뮤지시언시스다. DNA가 서로 연결되고 복합돼 새로운 진화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듯이 변화하는 음악도 진화가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인 것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흠흠흠’ 부드러운 허밍으로 노래하듯 대화하는 호모 뮤지시언시스로 가득한 여의도를 상상해 본다.

출처 : 서울신문 2019-05-29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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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0-001 어쩐지 고전이 읽고 싶더라니

 

 

김훈종 지음

2019, 한빛비즈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0901

신천역스마트도서관

 

150

김96ㅇ

 

나답게 살자니 고전이 필요했다

 

공자께서 말씀했다.

"나이 마흔에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끝장이다!" - 논어

 

나 역시 어느새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내 얼굴에 책임지기도 힘들고, 여전히 누군가의 미움도 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정녕 끝장이란 말인가! 그저 겉으로 보기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된다고 나 같은 필부가 갑자기 성인군자로 변신할 수는 없으리라. 아무나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생긴대로 살면된다.

 

≪논어≫ <위정>편을 요즘 시류에 맞게 개정 독해하시길비란다.

'열다섯에는 원래 공부가 안 됩니다. 놀고 싶은 게 당연하죠. 그러니 자식들에게 뭐라 좀 마시라.' '나이 서른에는 요즘 같은 세상에 자립하기 힘듭니다. 취직도 힘들고, 결혼도 힘드니 제발 좀 내버려두시라.' '나이 마흔에는 유혹이 빗발칩니다. 그러니 좀 흔들리는 게 정상이에요.' '쉰 나이에는 천명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입니다.' '육십까지 당신은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제멋대로 살아요. 그러니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사시오.' '나이 칠십이 되어도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칫 그랬다가는 법무부에서 제공하는 숙식에 몸을 의탁해야 하거든요.' - 본문 중에서

 

흔들리는 마흔,

이제야 느껴지는 고전의 힘

고전의 맛

 

왜 수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찾겠는가.

유사 이래 결국 인간은 똑같고, 세상사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은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이다.

≪논어≫를 읽다 보면 이게 정말 유학의 '고전'인지 '현대생활백서' 같은 자기계발서인지 도통 구분이 안 간다. 공자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건 철학적 정합성과 정교함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논어≫에서 사람살이의 구린내와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공자는 우리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처럼 고결하고 구름 위에 올라 붕붕 떠다니는 유형의 성인聖人이 결단코 아니었다. 지극히 실리적이며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짜증나고 답답할 때, 나를 알아주는 이 없을 때, 어딘가 기대고 싶을 때, 이제 고전을 읽어보자.

 

지은이 김훈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먹을 갈아 화선지에 붓으로 써가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외웠고, 한글 반 한자 반 신문을 옥편 찾아가며 읽었다. 이미 윈도95가 전 세계를 휩쓸던 시절에도 대학에서 《맹자》 원문을 한 땀 한 땀 필사하며 익혔다. 정이 떨어질 법도 하지만 삶의 굽이굽이마다 고전을 읽었고, 큰 힘을 얻었다. 이제는 어떻게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의 맛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을 공동 진행하고 있으며, 라디오 PD로 여러 프로그램을 거쳐 현재는 SBS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을 즐겁게 연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빨간 책》, 《뭐라도 될 줄 알았지》, 《무비유환》, 《20세기 라디오키드》(이상 공저)가 있다.

 

 

차례

 

 

프롤로그

 


1부 마음을 다잡다

 


⊙ 아직 이룬 게 없어도 괜찮다
⊙ 내 안에 가득한 욕망을 어찌해야 하는가
⊙ 기껏해야 백 년, 영원한 건 없다
⊙ 내가 하기 싫으면 남도 하기 싫다
⊙ 무엇보다 내 마음이 먼저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자가 살았다면
⊙ 당신의 혼밥을 응원한다
⊙ 사람과 사람이 통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
⊙ ‘때’가 중요한 이유
⊙ 연대책임을 넘어 사람을 보다
⊙ 생명의 가치가 떨어질 때 일어나는 일
⊙ 우리는 이로움을 먼저 좇는 존재일까
⊙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 눈물겨운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 언제까지 구직활동을 해야 하나
⊙ 노오오오력자와 노심자
⊙ 사이비를 경계하라
⊙ ‘예’의 핵심은 경청
⊙ 질 때 지더라도 내용 있게 져야 한다
⊙ 인간이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2부 나를 세우다 省

 


⊙ 누구의 힘으로 역사는 움직이는가
⊙ 역사 인식이 중요한 이유
⊙ 성찰 없는 권력은 잔혹하다
⊙ 기록의 무서움을 잊지 말 것
⊙ 권력의 속성
⊙ 나라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음식남녀조차 이루지 못하는 시대
⊙ 위대한 영도력의 비밀은 무엇인가
⊙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일까
⊙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을 상상하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말의 의미
⊙ 진정으로 이롭게 하는 ‘의’의 정체
⊙ 말을 잘해야 성공하는 시대?
⊙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다시 생각하다

 


⊙ 에필로그
⊙ 참고문헌

 

 

 

1부 마음을 다잡다

인륜 윤

 

 

파자하면, 사람人이 책侖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한다는 뜻.

윤리나 도리라는 뜻도 있지만, 모여서 뭉친 무리라는 의미도 있다.

 

 

공자께서 말씀했다. "나이 마흔에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끝이다!"

⊙ 《논어》 <양화>편 중

 

아침이 돌아오면 날마다 전당포에 봄옷을 저당 잡혀

매일같이 강어귀에 나가 만취해서 돌아오네.

술 마신다고 진 빚이야 가는 곳마다 늘 있는 것이지만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물다네.

⊙ 두보 <곡강이수>

 

공자께서 말씀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삼십 세에 자립했다. 사십 세에 현혹되지 않았다. 오십 세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 육십 세가 되니 귀가 순해졌다. 칠십 세에 이르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 《논어》 <위정>편 중

 

진시황은 말했다. "나는 진인眞人(신선이 된 자)을 흠모하여 스스로 '진인'이라고 할 것이며 짐이라 부르지 않겠다."

⊙ 《사기》 <진시황본기> 중

 

- 《사기》는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로서 크게 본기本紀, 세가世家, 서書, 표表, 열전列傳으로 나뉜다. 본기는 황제에 대한 기록이요, 세가는 제후에 관한 기록이다. 서는 제도 문물에 관한 기록이요, 표는 말 그대로 연표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이야기나 맹상군이 식객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탈출한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 등은 모두 열전에 포함된다.

 

덕천가강은 꾀를 잘 써서 강자를 제압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이룬 뒤에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

 

괴팍스럽고 싸움질을 좋아한다.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어둡다. 한번 비위에 거슬리면 반드시 죽이고 만다. 풍신수길이 살았을 때는 인심을 얻었으나, 그가 죽자 도리어 신망을 잃었다.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두툼한 몸집에 덕스러운 편이다.

⊙ 《간양록》 중

 

- 《간양록》 :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의병장 강항이 일본 현지 사정과 포로 생활 경험을 기술한 책. 1597년 9월부터 1600년 5월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부자유不自由를 친구로 삼으면 부족할 것이 없다.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무사장구의 적이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탓하지 말라.

모자람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

⊙ 《논어》 <안연顔淵>편 중

 

진나라에 머물 때,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가 병에 걸려, 일어나게 할 수 없었다. 자로가 성을 내며 스승에게 말했다. "군자에게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군자는 곤궁해도 지키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넘치게 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연."

⊙ 《논어》 <위령공>편

 

'진채지액陳蔡之厄' : 공자가 채蔡나라에 있을 때에 초楚나라에 초빙되었다. 그러자 약소국인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대부들은 자신들의 결점이 노출될까 두려워하여, 국경지대에서 공자의 무리를 포위했다. 양식이 떨어져 굶고, 종자從者가 병을 앓는 재액災厄을 당했다하여 이를 진채지액이라 일컫는다. 공자의 가장 신산한 고생을 꼽힌다.

 

공자가 말했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려 한다. 나를 따를 자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 자로가 이를 듣고 기뻐하자, 공자가 말했다. "자로는 용기가 뛰어난 점이 나보다 낫다. 하지만 취할 만한 자질이 없다."

⊙ 《논어》 <공야장>편 중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삼아! 나의 도는 오직 하나로 꿰어진다." 증자가 대답한다. "예." 공자가 자리를 뜨자 다른 제자들이 묻는다. "나의 도가 하나로 꿰어진다는 저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증자가 대답한다. "스승님의 도는 오직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 《논어》 <이인>편 중

 

자공이 물어 말한다. "죽을 때까지 평생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안 된다己所不欲 勿施於人."

⊙ 《논어》 <위령공>편 중

 

<설문해자說文解字> : 후한시대 허신이 편찬. 1만 자의 한자에 뜻, 발음, 본래 글자 모양 등을 기술해놓았다.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렵다. 친하게 대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 《논어》 <양화>편 중

 

덕이 근본이다. 재물은 덕의 결과로 오는 말단지엽이다. 근본인 덕을 밖으로 내보내고 말단지엽인 재물을 근본으로 삼게 되면, 백성은 다투게 되고 서로 빼앗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백성에게서 재물을 모으려 포악하게 굴면, 백성은 바로 흩어지게 된다. 반대로 재물을 흩어 베풀면 백성은 곧 모인다. 그래서 거슬리는 말이 나가면 역시 거슬리는 말이 되돌아오듯, 재물도 백성들의 뜻과 거슬러 모으게 되면 역시나 군주의 뜻을 거슬러 흩어지게 된다.

⊙ 《대학》

 

공자가 말씀했다. "내가 듣건대, 국가를 소유한 자는 재화가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재화가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 대개 재화의 분배가 고르면 가난한 자가 없고, 조화로우면 적다고 느끼지 않으며,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

⊙ 《논어》 <계씨>편 중

 

공사를 진행시킬 때에  품삯은 날수로 계산하지 말고 실적을 기준으로 삼되 원근遠近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힘이 센 자는 넉넉히 백 전錢을 가져가고 약한 자도 한 몸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부府의 백성들만 혜택을 받는 일이겠는가.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마땅한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품팔이로 생활을 꾸려가는 자들 모두가 바람결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올 것인데, 움집이나 상점을 차리고 술도 팔고 밥도 팔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9년> 중

 

대압착시대Great Compression : 대공황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으로, 폴 크루그먼이 저서 《미래를 말하다》에서 강조해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대공황을 이겨낸 1960년대 미국, 부유층과 노동자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고 노동자 안에서도 임금 격차가 줄어든 상황을 뜻한다. 그야말로 계층의 피라미드가 찌그러져 꼭지점과 맨 아래 기층의 간극이 압착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이런 이상적 형태의 사회가 도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는 정의로운 조세 정책, 강력한 노조 그리고 안정적인 복지정책이 그 근간에 놓여 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 《논어》 <자로>편 중

 

경공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안영이 천대라는 곳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때 양구거가 찾아왔다. 경공이 말한다. "오직 양구거만이 나와 더불어 화和의 관계로구나!" 그러자 안영이 대꾸한다. "양구거 역시 동同의 관계이지, 어찌 화和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까?" 이에 경공이 묻는다. "화和와 동同은 다릅니까?" 그러자 안영이 답한다. "다릅니다. 화和는 마치 국과 같습니다. 식초와 젓갈, 소금, 매실을 넣어 물을 넣고 불을 때어 어육을 삶되, 장작으로 불을 지펴 주방장이 화和의 원리로써 맛을 고르게 합니다. 부족하면 보충하고 지나치면 덜어내어 군자가 이를 맛보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옳다고 하면 아니라고 간하는 신하가 잇어야 합니다. (중략) 그 때문에 《시경》에 '덕스러운 그 음성 흠 하나 없네!'라고 하였는데, 지금 양구거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임금께서 '옳다!'고 하면 양구거도 역시 '옳다!'고 합니다. 임금께서 '안 돼!'하면 양구거 역시 '안 돼!'라고 맞장구만 칩니다. 이는 물로써 물을 맞추는 것이니, 누가 그런 국을 먹겠습니까? 그래서 동同으로만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하다는 말씀이옵니다." 경공이 듣고 "옳구나!"라고 답했다.

⊙ 《춘추좌전》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 없음을 걱정해야 한다."

⊙ 《논어》 <헌문>편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 《논어》 <학이>편 중

 

귤화위지橘化爲枳 :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 안영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 영공, 장공, 경공, 세 왕을 섬겼고, 온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그 명성을 들은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한다. 그러고는 짐짓 안영의 명성이 허명이 아닌지 심술궂게 시험을 해보았다. 영왕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이렇게 비꼰다. "제나라에는 인재가 없는가 보오. 하필 경과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소?"라며 안영의 작은 키를 비웃었다. 안영은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대꾸한다. "다 이유가 있사옵니다. 우리 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의 격에 맞는 사신을 면밀히 검토해 골라서 보냅니다. 큰 나라에는 큰 사신을 보내고,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신을 보내지요. 신은 특히 작고 작아 초나라에 보내진 것이옵니다."

안영의 달변에 코가 납작해진 영왕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제나라 출신 죄인을 하나 끌고 오라고 시킨다. 그러고는 안영이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죄인의 죄명을 낱낱이 밝힌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둑질을 밥 먹듯이 하는군." 안영에게 망신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안영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듣기에 귤나무를 회수 남쪽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회수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잎은 비슷하지만 그 과실은 맛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물과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 가운데 제나라에서 나고 자란 자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나라에 들어오면 도둑이 됩니다. 초나라 땅과 물이 백성들을 도둑으로 만드는군요."

⊙ 《춘추좌전》 중

 

안영의 언변에 압도당한 영왕은 쓴웃음을 짓고는, 이내 사과의 말을 전한다. "성인聖人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오. 농담을 지껄인 과인이 오히려 부끄럽구려." 말로만 사과한 게 아니라, 제나라 죄수를 안영에게 인계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 안영을 망신 주려던 영왕이 오히려 톡톡히 당한 셈이다. 안영의 기지는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다. 우리 인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기원전 522년, 진晉나라에 내분이 일어났다. 권력다툼에서 패한 난영이 초나라를 거쳐 제나라로 망명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제 장공이 크게 기뻐하자, 안영이 간한다. "우리는 진나라와 맹방의 의리를 맺고 있습니다. 신의를 잃으면 나라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이제 난영을 받아들이면 장차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제 장공이 웃으며 답한다. "우리 제나라는 진나라와 필적할 만한 나라요. 그러니 우리가 그들보다 약하다 말할 수 없소. 과인이 어찌 진나라를 섬긴단 말이오?" 제나라 장공 딴에는 난영의 세력을 이용해 진나라를 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제나라는 진나라와 상대가 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제나라 장공의 지원하에 난영은 반기를 들어 진나라 조정에 맞섰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난영은 패배하게 되었고, 제나라 장공은 진나라의 침공을 번민하는 신세가 된다.

 

내우외환이라 했던가. 제나라 장공은 이 와중에 대부 최저의 아내와 사통하다 최저에게 딱 걸렸다. 분노에 찬 최저는 집으로 장공을 유인해 살해했다. 제나라이 대부들은 당황했다. 장공의 시신조차 최저의 집에 찾아가 수습하여 가져오지 못한 채, 자신들의 보신에만 급급했다. 이때 안영은 당돌하게도 최저의 집으로 찾아가 장공을 애도한다. 기실 장공은 주색에 빠져 있어 안영의 충간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늘 묵살했다. 하루는 장공이 "과인은 경이 보고 싶지 않은데 계속 찾아와 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라고 물었다. 안영은 이렇게 답한다. "군주가 어질지 못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면 필시 재앙이 닥칩니다. 정 그렇게 대왕께서 계속 주색에 빠져 계신다면 신은 떠나겠사옵니다." 실제 안영은 재상의 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그러다가 장공이 시해를 당하자, 누구보다 먼저 용기 있게 나서서 조문을 했다. 최저가 안영을 죽이려 하자 안영은 특유의 달변을 늘어놓아 위기를 벗어난다.

⊙ 《춘추좌전》 중

 

사람과 사람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예법과 풍류가 다 무슨 소용이냐人以不仁 如禮何 人以不仁 如樂何!

⊙ 《논어》 <팔일八佾>편 중

 

환관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이세 황제 호해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폐하. 이것은 말입니다." 이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봤습니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들을 쭉 둘러보며 "이게 말이오? 사슴이오?"라고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그 후로 대소신료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 《사기》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 중

 

그러는 사이 11월 중순이 되자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만 갔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송의의 목을 베고, 군대를 모두 이끌고 황하를 건너갔다. 그러고는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치 양식만 지니고서 병졸에게 필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누구 하나 마음을 돌이키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나라 군대와 아홉 번 싸워 크게 쳐부수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초나라 군대가 제후군 가운데 으뜸이 되었고, 항우는 비로소 제후의 상장군이 되었으며, 제후군이 모두 그의 소속이 되었다.

⊙ 《사기》 <항우본기> 중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구나.

때가 불리하여 나의 오추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나의 오추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우희야, 우희야, 너를 어찌해야 할까.

- 항우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하루는 전장에서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한신과 담소를 나눈다.

 

유방이 묻는다. "공이 보기에 나는 군사 몇을 거느릴 수 있겠는고?" 한신이 답한다. "폐하께서는 십만도 쉽지 않습니다." 유방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대는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소?" 한신이 답한다.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유방이 웃으며 되묻는다. "다다익선이라는 장수가 어째서 나에게 묶여 있소?" 한신이 답한다. "폐하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데 능하지 못하지만 장수를 거느리는 데는 능하십니다. 그래서 신이 폐하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폐하의 능력은 이른바 하늘이 주신 겁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 《사기》 <회음후열전> 중

 

단언컨대, 한신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진이 망하고 한 제국이 세워지는 격동의 시기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 가운데에서도 유독 튄다. 결국 돌고 돌아 유방을 드높이긴 했지만, 건방제게 '나는 다다익선'이라고 말하는 한신의 모습에서 장량이나 소하의 지혜로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한신은 결국 토사구팽당한다.

한 고조 유방은 정리에 끌리고 의리에 움직이는 건달이었다. 결국 한신의 모반을 용서하고 회음후에 봉한다. 한신 역시 유방이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일부러 조회도 나가지 않고 한 고조를 원망하며 지낸다. 그러다 진희의 반란을 토벌하러 유방이 직접 나서게 되자, 그 틈을 이용해 여후가 소하를 시켜 한신을 장락궁으로 유인한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한신을 죽여버린다. 사마천은 이토록 파란만장한 한신의 인생을 이렇게 평한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한나라에 끼친 공로는 주공, 소공, 태공망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사기》 <회음후열전> 태사공자서 중

 

주공, 소공, 태공망은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의 폭정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주나라 건국의 아버지들로, 주나라의 시조 무왕의 사후에는 이세 성왕을 도와 공자의 이상향인 주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룬 인물들이다. 한신을 이들에 비유한 것은 사마천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상찬이다. 그만큼 한나라의 성립을 위해 한신이 기울인 공은 지대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서삼경四書三經 : 《대학》《논어》《맹자》《중용》을 사서라 일컫고, 《시경》《서경》《역경》을 삼경이라 묶어, 흔히 '사서삼경'을 유학 경전의 정석으로 칭한다. 사서삼경이란 말이 낯익겠지만, 중국에서는 흔하게 쓰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삼경에 《예기》와 《춘추》를 더해 '사서오경'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신은 삼가 아뢰옵니다. 정사는 때의 알맞음을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중합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때의 알맞음을 모르고 일을 함에 있어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비록 성군과 현신이 만난다 해도 치적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 1574년(선조 7년) 이이의 상소문 중

 

공자가 말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도 사람을 멀리한다면 그것을 할 수 없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도끼 자루 베네. 도끼 자루 베네. 그 기준은 멀리 있지 않네'라고 했다. 도끼 자루를 잡고 도끼 자루에 쓸 나무를 벨 때는 잡고 있는 자루를 자세히 보고 비슷한 것을 자르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보기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도 사람을 다스리는 데 그 기준은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그친다."

⊙ 《중용》 중

 

공자께서 공명가에게 공문숙자에 대해 묻는다. "정말인가요? 공문숙자 그분은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남의 것을 취하지도 않습니까?" 공명가가 대답하여 말한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좀 과하군요. 그분은 때에 맞은 연후에 말하기에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지요. 그분은 즐거워할 만한 이치가 있은 연후에야 웃기에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지요. 그분은 의로워진 이후에 취하기에 사람들이 그 취하는 행동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한다. "그런가요? 어찌 그럴 수 있죠?"

⊙ 《논어》 <헌문>편 중

 

중니왈仲尼曰 군자君子 중용中庸 소인小人 반중용反中庸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 소인이무기탄야小人而無忌憚也

자왈子曰 중용기지의호中庸其至矣乎 민선능구의民鮮能久矣

⊙ 《중용》 중

 

공자가 말씀했다.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다우며 때에 맞는다. 소인의 중용은 소인다우며 거리낌이 없다." 공자가 말씀했다. "중용의 그 지극함이여! 백성 가운데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공자가 말씀했다.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안다. 지혜로운 자는 도를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도에 미치지 못한다. 도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안다. 현명한 자는 도를 지나쳐버리고 우둔한 자는 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는 사람이 모두 먹고 마시지만 맛에 정통한 사람이 적은 것과 같다." 공자가 말씀했다. "그 도가 행해지지 않음이여!"

⊙ 《중용》 중

 

방효유方孝孺 : 정난의 변으로 황제가 된 연왕 주체는 방효유를 회유해 즉위조서를 쓰도록 시켰다. 하지만 곧은 절개의 방효유는 주공과 성왕의 고사를 들며 영락제를 모욕했고, 진노한 영락제는 구족을 멸하다 못해 친구, 제자 등 지인들까지 처형했다.

 

"죄인을 처벌할 때에도 그 처자식은 연좌제로 벌하지 않았습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진晉나라 위무자에게는 애첩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위무자가 병이 들자 아들 위과에게 말했다. "반드시 애첩을 개가시켜라." 그런데 병이 위중해지자 말을 바꾼다. "애첩을 순장시켜라." 위무자가 죽은 후 아들 위과는 아버지의 애첩을 개가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병이 위중해지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는 정신이 맑을 때 아버지가 내린 명을 받들겠다." 진秦 환공이 진晉나라를 침공하자, 위과는 옹명을 받고 출정해 두회와 결전을 벌인다. 위과는 불리한 전세에 몰려 쫓기는데, 두회가 말을 달려 쫓아올 때 누군가 풀을 엮어 두회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 덕분에 위과는 구사일생 위기에서 탈출하게 되고 도리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등장한다. "당신이 개가시킨 위무자의 애첩이 내 딸이오. 그대가 옳은 결정을 내려줘 내 딸이 순사殉死하지 않고 살아서 개가했으니, 그 지극한 은공을 갚고자 풀을 묶어 두회를 넘어지게 했소."

⊙ 《춘추좌전》 <선공 15년>편 중

 

여불위 : 한나라 양책 출신인 여불위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거부가 되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싼 가격에 사서 장거리를 이동해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 이문을 챙겼다. 《허생전》의 허생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식. 불과 200년 전이나 저 멀리 2000년 전이나 상업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재벌이 된 여불위는 권력을 잡기 위한 거대한 계획에 돌입하게 된다. 중원의 최강대국 진의 소양왕은 태자인 안국군의 아들 자초를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놓고 있었다. 자초는 소양왕의 손자이지만 조정에 세가 전혀 없기에 남의 나라에 볼모로 보내진 것이다. 그러니 한단에서 자초의 생활도 넉넉할 리 없었다. 자초를 만나본 여불위는 그에게 왕재가 있음을 간파하고 일생일대의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서 여불위가 주목한 지점이 바로 '아들이 없는 애첩'이란 권력 구조다. 아들이 없는 애첩은 '대통령 출마를 할 수 없는 당대표'처럼, 지금 당장이야 공천권이다, 최고위원 임명권이다, 다양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지만, 임기가 절반만 지나도 레임덕에 시달리는 불안한 존재다. 왕의 총애를 받는 지금이야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존재가 애첩이지만, 왕이 아파서 눕기라도 하면 벌써 찬밥 신세가 되는 게 그들의 운명.

태자 안국군에게는 화양부인이란 애첩이 있었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해 이러한 정치적 메커니즘을 강의한다. 물론 어마어마한 뇌물을 들이미니 강의 내용에 화양부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초를 양아들로 삼아 미래 권력을 준비하라는 여불위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니, 화양부인과 자초 모두에게 윈윈게임이 된 것이다.

여불위의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국군이 즉위하자 마자 죽고 이어서 등장한 아들 자초마저 즉위하자마자 죽는다. 독살설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선 안국군의 아버지이자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이 무려 56년간 재위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아무튼 연이은 짧은 재위 기간 때문에 여불위의 애첩으로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한 채 자초에게 바쳐진 조희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공자가 말씀했다. "처음으로 용俑을 만든 자는 후손이 없을 것이로다."

⊙ 《예기》 중

 

양 혜왕이 말했다. "과인은 안온하게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를 쓰나, 칼을 쓰나 차이가 있습니까?" 양 혜왕이 답했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가 다시 물었다. "정치로 사람을 죽이나, 칼로 사람을 죽이나 차이가 있습니까?" 양 혜왕이 답했다. "차이가 없습니다." 맹자께서 말했다. "부엌에 기름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보이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자가 나뒹굽니다. 이것은 짐승을 몰아 백성을 먹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것 또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백성의 부모 노릇을 하며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짐승을 몰아 사람을 먹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찌 그 부모 노릇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용을 만든 자는 그 후손이 없으리라' 이는 사람의 모양을 본떠 만든 인형을 파묻는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나무인형도 그러할진대, 어찌 살아 있는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든단 말입니까."

⊙ 《맹자》 <양혜왕>편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옛 사람들이 예악을 행하는 것은 거칠었고, 후세에 예악을 행하는 것은 세련되었다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만약 예악을 행해야 한다면 나는 옛 사람의 방식을 따르겠다如用之 則吾從先進."

⊙ 《논어》 <선진>편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본질이 무늬를 이기면 조악하고, 무늬가 본질을 이기면 번지르르하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무늬와 본질이 아름답게 조화하고 난 연후에 드디어 군자답게 된다文質彬彬 然後君子."

⊙ 《논어》 <옹야>편 중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라고 한다. 공방숙이 백하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은 안씨 딸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으니···

⊙ 《사기》 <공자세가>편 중

 

자공이 말했다. "그 예禮를 보면 그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악樂을 들으면 그 덕을 알 수 잇다. 백 세대가 지나고 백 명의 옹이 있어도, 공자님의 예악에 대한 원칙을 어기는 자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난 이래 공자님 같은 분은 없었다."

⊙ 《맹자》 <공손추>편 중

 

자로가 묻는다. "환공이 규를 죽이고 소홀이 그를 위해 죽었지만, 관중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묻는다. "이것은 인仁하지 않은 겁니까?" 공자가 대답하길 "환공이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을 사용치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그러니 그는 인仁하다고 할 수 있다."

⊙ 《논어》 <헌문>편 중

 

자공이 여쭙는다. "관중은 인仁한 자가 아닌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자결하지 않고 다시 환공을 도와주었습니다." 공자가 답한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만들고 단숨에 천하를 바로잡았다. 백성들은 오늘날까지 그의 은혜를 입고 있다.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가 작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도량에 목을 매고 자결해, 아무도 알아 주는 이가 없게 되는 일을 만들겠는가?"

⊙ 《논어》 <헌문>편 중

 

그래서 장차 큰일을 도모하려는 임금에게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신하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계획이 서면, 그 신하에게 찾아갔습니다. 덕을 존중하고 도를 즐기는 바가 이와 같지 않다면 함께 일을 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탕왕은 이윤에게 나아가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런 태도이기에 탕왕은 고생하지 않고 상나라를 세우고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제나라 환공도 관중에게 나아가 배우고 그를 신하로 삼았습니다. 고로 환공은 수고를 덜고 천하의 패자가 된 것입니다."

⊙ 《맹자》 <공손추>편 중

 

지금 천하의 땅은 비슷하고 임금들의 덕도 엇비슷합니다. 누구 하나 덕이 특출한 임금이 없는 이유는 '신하를 가르치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임금을 가르치려는 신하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나라 탕왕이 이윤을 대하는 태도, 제 환공이 관중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자면 함부로 그들을 오라 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관중도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관중처럼 하지 않는 자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 《맹자》 <공손추>편 중

 

제나라 선왕이 묻는다. "제 나라 환공과 진 나라 문공의 일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맹자가 답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환공과 문공의 일을 가르치는 자가 없으니, 후세에 전해진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말고 계속 말하라 하신다면, 곧 왕도 정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힘으로써 인仁을 빌리는 자가 패자覇者요, 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가진다. 덕德으로써 인仁을 행하는 자는 왕자王者요, 왕은 대국에 기대지 않는다. 탕왕은 고작 칠십 리 나라를 왕도 정치로 다스렸고, 문왕은 백 리 나라를 왕도 정치로 다스렸다."

⊙ 《맹자》 <공손추>편 중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의 복종이 아니다. 힘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이 진실로 기뻐 복종하는 것이다. 칠십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이와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동에서, 서에서, 남에서, 북에서, 그 어디에서도 불복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네'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종이다.

⊙ 《맹자》 <공손추>편 중

 

주나라의 공식 아악곡집인 《시경》 <대아大雅> 가운데 문왕유성文王有聲을 인용한 구절이다. '대왕이시여! 아름답도다!' 찬양구가 바로 이어진다.

 

맹자가 양 혜왕을 뵈었다.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마다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길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왕께서 내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할까?"라고 말한다면, 대부는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라고 말할 것이고, 선비와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에게 이익을 취하니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수레 만 대를 동원하는 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수레 천 대를 동원하는 집안이요, 수레 천 대를 동원하는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수레 백 대를 동원하는 집안입니다.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의를 뒤로하고 이익을 앞세우면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인을 실행하면서 그 부모를 버린 자는 없고,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자는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뿐이지, 하필 이롬음을 말씀하십니까?

⊙ 《맹자》 <양혜왕>편 중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맹자》란 책을 읽다가 양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 《사기》 (맹자, 순경 열전>편 중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합니다. 아비는 아비다원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시오. 진실로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먹을 수 있겠소!"

⊙ 《논어》 <안연>편 중

 

노나라 소공 20년, 공자의 나이는 아마 서른이었을 것이다. 제나라 경공이 안영과 함께 노나라에 와서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에 진秦나라 목공은 나라도 작고 사는 지역도 외졌지만 그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진나라는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은 원대했고, 처한 곳이 외졌어도 정치하는 것이 정도에 맞습니다. 목고은 몸소 백리해를 등용하고 그에게 대부의 직위를 주며 오랏줄로 갇힌 몸을 풀어주고 더불어 사흘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서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설령 천하의 왕이 되어도 가능했을 터인데,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자그마한 일입니다." 경공이 기뻐했다.

⊙ 《사기》 <공자세가>편 중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왕이 선생님을 우대하여 정치를 맡기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실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했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자로가 여쭈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선생님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계시군요. 뭘 바로잡는다는 겁니까?" 공자가 말씀했다. "거칠구나! 자로야!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문으로 남겨두는 법이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다.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날 수 없다.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 형벌이 들어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팔다리를 둘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명명할 때에는 반드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대해 대충하는 것이 없도록 할 뿐이다."

⊙ 《논어》 <자로>편 중

 

자장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벼슬에 머물 때에는 나태하지 않고, 법을 집행할 때는 충심으로 해야 한다."

⊙ 《논어》 <안연>편 중

 

승상께서는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하였습니다.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렇다면 저는 비록 죽어서도 황천에서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마속이 제갈량에게 보낸 편지

 

공자께서 말씀했다. "3년 동안 학문을 익히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 《논어》 <태백>편 중

 

제나라 경공이 말한다. "나도 늙었나 봅니다. 당신을 등용할 수 없소."

⊙ 《논어》 <미자>편 중

 

회해선사懷海禪師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 당나라의 고승 백장百丈 회해선사는 90세의 노구를 이끌고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수행에 정진햇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들이 농기구를 감추었다. 그러자 회해선사는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식사도 하지 않앗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쭙자 "하루 일하지 않았으니, 하루 먹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맹자께서 물었다. "허자는 반드시 곡식을 직접 파종하고 난 연후에 음식을 먹나요?"  진상陳相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허자는 반드시 베를 직접 짠 연후에 옷을 입습니까?" 진상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거친 베옷을 입습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허자는 관을 쓰나요?" 진상이 말했다. "관을 씁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어떤 관인가요?" 진상이 답햇다. "그냥 흰관입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스스로 그 관을 짜나요?" 진상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곡식으로 그 관을 바꿉니다." 맹자께서 묻는다. "허자는 왜 스스로 관을 짜지 않습니까?" 진상이 대답했다. "농사일에 방해가 되어 그렇습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허자는 솥과 시루로 밥을 짓습니까? 청제 농기구로 밭을 갑니까?" 진상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맹자께서 물었다. "직접 그 솥과 농기구를 만듭니까?" 진상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농사지은 곡식으로 그것들과 바꿉니다."

⊙ 《맹자》 <등문공> 중

 

진상陳相 : 본디 유가를 공부하다가, 유가를 버리고 농가의 학설을 추종했다.

 

맹자께서 말씀했다. "대인의 일이 따로 있고, 소인의 일이 따로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몸에는 백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는 소질이 갖추어져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스스로 농사짓고 스스로 만들고 난 연후에만 그것을 이용하도록 한다면, 이는 천하의 백성을 길바닥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고생하고, 어떤 사람은 힘으로 고생합니다. 마음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힘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다스림을 당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다스림을 당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얻어 먹게 되는 것이 천하의 공통의 옳은 의리입니다."

⊙ 《맹자》 <등문공> 중

 

공자가 말씀했다. "군자는 자신의 말이 자신의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 《논어》 <헌문>편 중

 

"건괘의 상구는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지만 지위가 없고, 높지만 백성이 없어, 항룡에겐 후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숭고함을 자처해 어진 이를 홀대하고 자신만 성인인 척하거나 자신만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고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려는 의지가 없다면 재앙을 맞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이 점을 아신다면 큰 허물은 없으실 겁니다."

- 이황, 항룡유회亢龍有悔

 

공자가 말씀했다. "유由야! 자네에게 어떤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 《논어》 <위정>편 중

 

만자가 말했다. "한마을이 모두 성실한 사람으로 칭하면 어디에 간들 역시 성실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자님께서 그러한 자를 '덕德의 적敵'으로 여기시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그 사람은 비난하려 해도 바난할 것이 없고, 찌르려 해도 찌를 구석이 없다. 세속에 동조하여 더러운 세상에 잘 살아간다. 평소 행실은 충성과 믿음에 비슷하고, 행동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마을 사람이 모두 그를 기쁘게 맞이하고, 그 역시 자신을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요순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그리하여 '덕의 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했다. "비슷하나 아닌 것을 나는 미워한다.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은, 벼와 비슷하게 생겨 벼의 싹을 해칠까 해서 그런 것이다. 아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의로움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그렇다. 말 잘하는 입을 미워하는 것은, 그 말솜씨가 믿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나라의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정나라 음악이 아악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그렇다. 중간색인 자주색을 싫어하는 것은, 원색인 붉은색의 순수함을 해칠까 봐 그렇다. 향원鄕原을 싫어하는 것은, 그 향원이 덕을 어지럽힐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군자는 흐트러진 도리를 되돌려 바르게 할 뿐이다. 정도를 바로 세우면 곡 백성들이 흥하게 된다. 백성들이 흥하면 곧 사특함은 사라진다.

⊙ 《맹자》 <진심>편 중

 

재아가 여쭈었다. "3년상은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닦지 않으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겁니다. 3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겁니다. 묵은 곡식이 없어지면 새 곡식이 올라오는 기간, 그리고 불씨 얻을 나무를 다시 바꾸는 기간으로는 1년이면 충분합니다." 공자가 말씀했다.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 편안하느냐?" 재아가 답했다. "편안합니다." 공자가 말씀했다.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거라. 군자는 상을 치르는 기간에 기름진 것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움을 모른다. 집에 있어도 편치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너는 편안하다고 하니 그렇게 하거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가 말씀했다. "그대는 인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3년상은 천하에 통용되는 상례이다. 그대도 부모로부터 3년 동안 사랑을 받았을까?"

⊙ 《논어》 <양화>편 중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서는 매사를 물어보셨다. 어떤 이가 말했다. "누가 추 땅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말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서는 모든 일을 묻더라." 공자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다."

⊙ 《논어》 <팔일>편 중

 

자공이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답한다. "괜찮다. 다만, 가난하되 즐거움으로 삼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 《논어》 <학이>편 중

 

자공이 이어 묻는다. "《시경》에서 '칼로 끊듯이切, 줄로 갈듯이磋, 정으로 쪼듯이琢, 숫돌로 윤을 내듯이磨'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사야, 비로소 나와 더불어 《시경》을 논할 수 있겠구나. 지나간 것을 알려주었더니 다가올 일을 아는구나!"

⊙ 《논어》 <학이>편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존립할 수 없고,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 《논어》 <요왈>편 중

 

초 장왕은 말馬을 특히나 아끼고 좋아했다. 사람도 먹기 힘든 대추와 육포를 먹이로 주고, 비단옷을 입혀주고, 잠도 침대에서 자게 했다. 그러다 말馬이 말語이 아니게 되어 비만으로 죽고 말았다. 초 장왕은 관을 잘 짜서 대부大夫의 예로 장사 지내게 명했다. 신하들이 과하다고 반대하자 장왕은 "감히 말馬을 가지고 말語하는 자는 참하겠노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키가 8척이며 변설과 풍자에 능한 악공 우맹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조정에 뛰어와 통곡했다. 장왕이 연유를 묻자, 우맹은 이렇게 답한다. "말馬은 대왕께서 아끼시는 영물이온데 이 막강한 초나라에서 뭔들 구하지 못하겠습니까? 대부의 예로 장사 지내는 것은 너무 야박하옵니다. 임금의 예로 장사 지내야 합니다." 장왕이 그 상세한 방도를 묻자, 우맹이 답한다. "폐하, 옥을 다듬어 관의 속널을 만들고 무늬 가래나무로 바깥널을 만드십시오.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로는 횡대를 만드시면 됩니다. 군사를 동원하여 큰 무덤을 파게 하시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져 나르게 하십시오. 제나라와 조나라의 조문단을 앞에 세우시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조문단을 뒤에 세우십시오. 사당을 세워 소, 양, 돼지를 한 마리씩 바치는 최고의 제사를 지내고 만 호의 읍으로써 받들게하소서. 제후들이 이 모습을 보고 듣게 된다면, 누구나 대왕께서 말을 사람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맹의 말을 듣고는 장왕은 장탄식을 한다. "내 죄가 이토록 크구나!" 반성하고는 평범하게 말을 장사 지내라 명하고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

⊙ 《사기》 <골계열전> 중

 

공자께서는 향당에 계실 때는 공손하게,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같이 말씀하셨다. 함께 서 있는 자에게 읍을 하실 때에는 마주잡은 양손을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 사람에게 읍을 하실 때에는 오른쪽으로 돌리셨는데 읍을 하실 때마다 옷깃이 앞뒤로 펄럭이게 하셨다. 궁궐 문을 들어가실 때에는 삼가고 공손하게 처신하며 마치 궁궐의 문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군자는 감색과 검붉은 천으로 옷깃을 장식하지 않고,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일상복을 만들지 않는다. 밥은 잘 찧은 쌀이라야 싫어하지 않으셨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이어야 꺼리지 않으셨다. 사 온 술과 저잣거리의 육포는 드시지 않았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받은 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고 드셨다. 그 외에 제사 지낸 고기는 사흘 안에 드셨고 사흘을 넘긴 고기는 드시지 않았다. 사람을 다른 나라에 전송할 적에는 두 번 절하고 보내셨다. 계강자가 약 선물을 보내자 공자께서 "제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오니 감히 맛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씀했다. 수레에 오르면 반드시 바르게 서서 손잡이 끈을 잡으셨다.

⊙ 《논어》 <향당>편 중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를 일컬어 왜 '문文'이라고 칭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는 영민하고 학문을 사랑했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문文'이라 칭하는 것이다."

⊙ 《논어》 <공야장>편 중

 

공자께서는 괴이한 일, 위세를 부리는 일, 어지럽히는 일, 귀신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 《논어》 <술이>편 중

 

공자가 말씀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잇다. 그 가운데 좋은 점을 가려 그 점을 따르고 그 가운데 좋지 아니한 점은 가려서 고친다."

⊙ 《논어》 <술이>편 중

 

하늘의 명,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한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道는 잠시 떠나는 것도 불가하다.

떠날 수 있다면 도道가 아니다.

⊙ 《중용》 중

 

공도자가 말했다.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성性에는 선함善도 없고 선하지 않음不善도 없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성性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불선을 행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문왕과 무왕이 일어나면 백성은 선을 좋아하고, 유왕과 려왕이 일어나면 백성은 포악함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선하지 않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요 임금이 다스려도 상과 같은 자가 생기고, 고수가 아버지인데도 순 임금 같은 성군이 탄생하기도 한다. 폭군 주왕을 조카로 두고 왕으로 섬겨도 미자계와 왕자 비간 같은 어진이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시는 데, 그럼 저 사람들의 주장은 모두 틀린 겁니까?"

⊙ 《맹자》 <고자>편 중

 

맹자가 말했다孟子曰. "그런데 그 마음을 놓고 보면,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그래서 본성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乃所謂善也. 무릇 선하지 않음을 행하는 것은 그 마음 본연이 저지르는 죄가 아니다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불쌍한 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惻隱之心 人皆有之.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역시 사람들 모두 지니고 있다羞惡之心, 人皆有之. 타인을 공경하는 마음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恭敬之心 人皆有之. 옳고 그름을 가리고자 하는 마음 역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是非之心 人皆有之. 측은지심은 인이다惻隱之心 仁也. 수오지심은 의다羞惡之心 義也. 공경지심은 예다恭敬之心 禮也. 시비지심은 지다是非之心 智也. 인의예지는 밖에서 들어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본래 내 자신이 지니고 있지만 그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我固有之也 弗思耳矣.

⊙ 《맹자》 <고자>편 중

 

《대학》이란 책은 옛날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이다. 대개 하늘로부터 백성을 내릴 때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그 기질의 타고남은 한결같을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 본성이 소유한 바를 알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모두 다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총명하고 슬기로워 능히 그 본성을 다하는 자가 나온다면, 하늘은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만백성의 군주와 스승이 되게 한다. 그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가르치게 하여 백성의 본성을 회복케 만든다. 이는 복희, 신농, 황제, 요, 순이 하늘의 뜻을 잇고 법도를 세운 것이다. 사도의 직책과 전악의 벼슬을 이런 이유로 설치한 것이다.

⊙ 《대학장구》 중

 

측은, 수오, 사양, 시비, 사단은 어디에서 발동해 나온 것입니까? '인의예지'라는 본성에서 발동해 나온 겁니다. 희, 노, 애, 구, 애, 오, 욕. 일곱 가지 감정은 어디에서 발동해 나온 겁니까? 칠정은 바깥 사물이 우리 몸의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와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바깥 대상에 다가가서 나오는 감정이란 말입니다.

 

옛날에 맹자가 사단은 마음에서 발동해 나온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마음이란 분명 리와 기 둘을 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자가 주목한 것은 '리와 기' 가운데 '리'입니다. 왜냐하면, '인의예지'의 본성은 마음속에서 순수한 채로 있는데, 사단이 순수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마리이기 때문입니다.

 

칠정의 발현에 대해 주희도 칠정에는 본래 당연한 도덕적 원칙이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희가 주목한 지점은 기입니다. 왜냐하면, 바깥 사물이 들어와 쉽게 먼저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 기관을 이루는 기인데 칠정이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리가 발현하자마자 기와 섞인 것도 있고, 또는 바깥 사물에 감동받은 기가 발현할 때 리로 변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해 발현되어 나온 근원을 무시하고 결과만 보고 리와 기 모두 본래 마음속에 있는 본체라고 둘을 구준하지 않으십니까?

⊙ 《퇴계집》 <답기명언>편 중

 

- 양계초 : 중국 근대 사상가이자 개혁가, 교유가, 사학자. 신문화운동을 이끌고 오사운동을 지지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별명답게 동양, 서양 학문에 두루 밝았다.

 

- 초 장왕 솥 : 부국강병을 이룬 초나라 장왕은 장강을 넘어 낙수가에 진을 치고 열병식을 가진다. 장차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허울만 종주국이던 주周나라는 사신을 파견해 초나라를 달래려 한다. 초 장왕은 종주국의 상징물인 솥에 대해 묻는다. "구정九鼎을 한번 보고싶소.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오." 대놓고 천하의 주인자리를 내놓으라는 불손한 언사에, 사신으로 온 왕손王孫 만滿이 답한다. "나라의 권위는 덕에 있는 것이지, 솥의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덕행이 이루어지면 솥은 아무리 작아도 움직일 수 없고, 세상이 혼란하고 간사한 무리가 들끓게 되면 구정은 아무리 커도 가벼이 옮길 수 있습니다."

 

- 장사태수 손견 옥새 : 타도 동탁을 기치로 모인 토벌군의 일원이던 장사태수 손견은 폐허가 된 낙양에서 옥새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 원술에게 바치자, 원술은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제위에 오르니 국명을 중㑖이라 하였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렇게 평한다. "티끌만한 공적도 없이 황제를 칭하니 의로운 자들이 분기탱천했다. 사치와 향락으로 망했다는 표현으로는 그 큰 죄악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

 

자사는 이른바 온전한 것을(칠정) 말했고 맹자는 사단을 정에서 골라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으면 본성이라 말하고 이미 발동했으면 정이라고 말하니, 본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정은 선악이 잇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그러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비록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더라도 칠정 밖에 사단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만약 사단은 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조건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선악이 모두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이것은 리와 기를 쪼개어 둘로 구분한 것이기 때문에 칠정은 본성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생의 말씀에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학인 저로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퇴계집》 <답기명언>편 중

 

내가 강릉에 있을 때, 기대승이 이황과 사단칠정을 논한 편지를 보았다. 이황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본디 둘이 아니다. 칠정 가운데 리가 발동한 것이 사단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오아복한 글이 만여 자가 되도록 서로 합치하지 않았다. 기대승의 주장이 바로 나의 뜻에 합치한다. 대개 본성에는 인의예지신이 있고, 감정에는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이 있을 뿐이다. 인의예지신 오성 이외에 다른 성이 없고, 칠정 이외에 다른 정이 없다. 칠정 가운데 인욕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이다.

⊙ 《율곡전서》 <논심성정>편 중

 

2부 나를 세우다

 

살피다 성

 

파자하면, 작은 것少까지 자세히 본다目는 뜻.

살피다, 반성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중국 고대 중앙정부를 뜻하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했다. "봉황새는 오지 않고, 황하에서도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끝났구나!"

⊙ 《논어》 <자한>편 중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가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 그토록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간언할 수 없고, 다가올 것은 오히려 좇을 수 없네. 그만두시게! 그만두시게! 오늘날 정치를 따르는 것은 위태롭다네." 공자는 수레에서 내려 접여와 말을 섞으려 했다. 그러나 접여는 종종걸음으로 공자를 피했다. 그래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없었다.

⊙ 《논어》 <미자>편 중

 

맹자가 말씀했다.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사방 삼 리의 내성과 사방 칠 리의 외성을 포위하고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경우가 있다. 대체로 포위하고 긴 시간 공격하다 보면 반드시 천시가 유리해지는 시기를 맞는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천시가 땅의 유리함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곽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요, 해자가 깊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병기와 갑옷이 견고하고 날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쌀과 조 같은 군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러할진대 땅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우는 지리가 인화보다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백성이 사는 영역은 나라의 국경선으로 그 이동을 막을 수 없다. 나라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과 계곡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것은 병기와 갑옷이 뛰어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를 얻어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그를 돕는다. 도를 잃고 방탕하고 포악해진 자는 도와주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도를 잃어 도움이 적어지다 보면 마지막에는 그 피붙이마저 그를 배반하게 된다. 도를 실천해 그정도가 지극해지면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돕고 그의 정치에 순종하게 된다. 천하의 사람들이 순종하는 군주가 자신의 피붙이에게도 배신당하는 군주를 공격하게 되면 싸우지 않아도 된다. 굳이 싸우게 된다 해도 반드시 승리한다.

⊙ 《맹자》 <공손추>편 중

 

- 사마천 :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사마천을 숭앙해 이렇게 표현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유산으로 추앙받지만 누가 유철이란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유철은 한 무제의 이름이다. 이 논평은 뭔가 사마천의 한 서린 슬픔을 조금이나마 신원伸寃하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한 무제가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제백학사모옥題栢學士茅屋> : 두보의 칠언율시

벽산의 학사가 은어 모양의 학사증서 불태우고

백마로 달려서 몸을 바위 속에 숨겼도다.

옛사람은 겨울 동안 독서에 몰두했다 하거늘

그대 젊은 나이에 만여 권을 읽었도다.

채색 구름이 집에 가득 차서 둥글게 덮개를 엎어놓은 듯하고

가을 물이 섬돌에 넘쳐서 도랑으로 떨어지네.

부귀는 반드시 애써 노력함에서 얻어지나니

남아로서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하느니라.

碧山學士焚銀魚

白馬却走身巖居

古人已用三冬足

年少今開萬卷餘

晴雲滿戶團傾蓋

秋水浮階溜決渠

富貴必從勤苦得

男兒須讀五車書

 

제나라 환공이 대청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마루 아래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대청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감히 묻겠사옵니다. 대왕께서 읽고 계신 책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답했다. "성인聖仁의 말씀이네." 윤편이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시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돌아가셨다네."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노해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놈이 감히 왈가왕부하는가! 나를 설득한다면 무사하겠지만,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무사치 못하리라!" 윤편이 대답했다. "제 평소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너무 많이 깎으면 헐겁고, 너무 적게 깎으면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깎지도 너무 덜 깎지도 않는 것은, 손의 감각으로 터득해 마음으로 느낄 뿐입니다.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으니 바로 거기에 비결이 존재합니다. 저도 이 비결을 제 자식에게 설명해줄 수 없고, 제 자식도 저에게 이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이가 일흔이 되었지만 아직도 수레바퀴 깎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옛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깨달음을 책에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왕께서 읽고 계신 책들이 옛 성인의 찌꺼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 《장자》 <천도>편 중

 

- 포사 : 포사褒姒는 절세미인으로 유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사는 웃지 않았다. 어느 날 비단 찢어지는 소리에 웃음을 터뜨린 포사를 보고, 유왕은 비단을 징발해 찢어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사의 웃음을 더 많이 보기 위해, 유왕은 금단의 선을 넘게 된다. 적이 침범했을 때 올리는 봉화를 피워 제후들의 군사를 소집한 것이다. 유왕이 장난으로 봉화올린 걸 알게 된 제후들이 허탈하고 황당한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 모습을 보고 포사는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이후, 유왕은 태자와 왕후인 신후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 그러자 분노에 찬 신후 세력이 건융과 결탁해 유왕을 공격해 들어온다. 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려 제후들에게 원군을 청하지만 또다시 유왕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그 어떤 제후도 달려오지 않는다. 유왕은 결국 죽음에 이르고, 주 왕실은 막을 내리게 된다.

 

글은 말을 다 전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 전할 수 없다書不盡言 言不盡意.

⊙ 《주역》 <계사전> 중

 

맹자 말씀했다孟子曰. "왕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가 없어졌다王者之迹熄而詩亡. 시가 사라진 연후에 《춘추》가 지어졌다詩亡然後春秋作. 진나라의 역사서 승, 초나라의 사서 도올, 노나라의 사서 춘추가 모두 한가지다之乘 之檮杌 之春秋 一也. 그 기록된 일은 곧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의 치적이다其事則齊桓 晉文. 그 문체는 곧 사관의 기록체였다其文則史." 공자가 말씀했다曰. "그 사관 기록의 의로움을 내가 몰래 취해 《춘추》를 적었다其義則丘 竊取之矣."

⊙ 《맹자》 <이루>편 중

 

함구몽이 말했다. "순임금이 요임금을 신하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이미 말씀을 들어 알겠습니다. 《시경》에 '넓고 너른 하늘 아래 왕의 영토 아닌 것이 없고, 땅의 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임금이 이미 천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아버지 고수가 신하가 아닐 수 있는지 감히 질문드려봅니다. 어찌 그럴까요?" 맹자가 답했다. "그 말은 시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그 시는 왕이 일으킨 일에 수고가 너무 많아서 부모를 봉양할 수 없는 상황을 이르는 것이다. 이 시는 '하늘 아래 왕의 일이 아닌 것이 없겠지만, 왜 유독 나만 이렇게 힘들고 지쳐야 하는가!'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시를 해석하는 사람은 글자 자구 하나하나에 매달려 문장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 문장을 가지고 그 시의 전체 뜻을 해쳐서는 아니 된다. 그 시의 의도를 파악해 그 뜻을 맞이해야만 진정한 시의 내용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만약 자구대로만 본다면 《시경》 <대아운한>편에 '주나라에는 살아남은 백성 한 명도 없네'라고 했는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주나라에 남은 백성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것이다."

⊙ 《맹자》 <만장>편

 

- 五經博士 : 한대에 시詩, 서書,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마다 박사관博士官을 두어 제자를 양성시키고 유학의 보급을 도모했다. 동중서의 건의로 한무제가 그 기틀을 세웠다.

 

- 좌전벽 : 지금으로 말하자면, '좌전 마니아' 혹은 '좌전 오타쿠'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좌전벽' 가운데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관우가 좌전벽이었다. 전장에서도 《춘추좌씨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암송할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다고 하니, 《춘추좌씨전》은 관우의 인생 지침서 같은 책이다.

관우는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다. 위대한 영웅 서사와 더불어 비극적 결말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조건이다. 개자추, 악비, 백이와 숙제 등등 중국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 가운데, 유독 후대에 사랑받는 영웅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도 관우를 신성시하는 관점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 관우는 조조의 끝없는 환대를 뒤로 하고 유비의 소식을 듣자마자 떠난다. 보장된 부와 명예를 송두리째 버리고, 다섯 관문의 여섯 장수를 베어가며 유비에게 돌아가는 의리의 사나이 관우. 오관참장五關斬將의 전설을 만들어낸 그의 비극적 죽음은 관우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버렸다. 관우를 벤 손권은 유비의 복수가 두려운 나머지 꾀를 낸다. 조조에게 관우의 참수된 목을 보내버린 것. 유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관우에 대한 흠모 때문이었을까. 조조는 향나무로 용俑을 만들어 관우 목에 붙여서 시신의 형체를 복원하고는, 제후의 예로 후하게 장사 지냈다.

낙양에 가면 관우의 사당인 관림關林이라는 명소가 있다. 관림은 극존칭이다. 일반인의 무덤을 '분墳'이라 하고, 제후의 무덤을 '총塚'이라 칭하며, 황제의 무덤을 '릉陵'이라 한다. 진시황의 무덤을 진시황'릉'秦始皇陵이라 부르고, 장수왕이나 광개토대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그 용례가 쉬이 이해간다. 그런데 관우의 무덤에 붙은 '림林'은 무엇일까. 림은 성인聖人의 무덤을 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한마디로 관우는 중국 역사에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관림에 들어서 여러 관우상을 마주해보라. 의구심이 들 것이다. 하나같이 두꺼운 책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있다. 관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적토마와 청룡언월도가 아니던가. 그런데 마치 백면서생처럼 책만 주야장천 틀어쥐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토록 관우가 애지중지하는 책이 바로 《춘추좌씨전》이다. 관우가 좌전 마니아란 사실이 중국인들에게도 꽤나 의미가 깊었나 보다. 정작 청룡언월도는 관우상 옆에서 시커먼 얼굴로 늠름하게 서 있는 한 장수가 꼬나들고 있다. 그가 바로 관우의 부장 주창周倉이다. 《삼국지연의》에는 여포, 장비, 황충, 위연, 조자룡, 마초, 하우돈, 서황, 허저, 감녕, 태사자 등등 이루 거명할 수 없이 많은 장수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유독 관우의 부장 주창의 존재만이 두드러진다. 다른 맹장들에게도 당연히 부장이 있었을 터인데 주창만이 《삼국지연의》에서 제대로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관우가 신격화되면서 부장인 주창과 관련된 신비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적진으로 달리면 주창은 그 무거운 청룡언월도를 들고 같이 뛴다. 그런데 오히려 주창이 먼저 도착해 있으니 그 이유는 주창의 발에 비모飛毛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기한 털 비모 덕분에 관우는 전장에서 청룡언월도를 건네받고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괄목상대刮目相對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여몽이 주창이 고향 친구를 포섭해 첩자로 보낸다. 술이 거나해진 주창이 비모의 존재를 발설하게 되고, 첩자는 비모를 제거한다. 그 이후 관우는 때맞춰 청룡언월도를 받지 못해, 결국 손권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관우는 신격화되었는데, 무려 세 분야의 신으로 섬겨진다. 삼국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뒤이어 찾아온 위진남북조시대에 사상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도교에서 신으로 섬겨지는 것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로 재물의 신으로 여겨진다. 관우가 도원결의를 하고 유비, 장비와 뜻을 합쳐 거병하기 전, 소금 장사를 했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봉급을 뜻하는 샐러리가 소금에서 유래되었듯, 중국 전통 사회에서도 소금은 귀한 물품이었기에 재물의 신으로 추앙받는 듯하다. 산동 지방의 염상들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강력하게 결속하기 위해 관우를 구심점으로 삼아 숭앙했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 세 번째는 바로 유교의 신이다. 관우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인 의리와 충성심은 유교의 핵심 가치다. 그런 의미에서 관우가 끼고 살았다는 《춘추좌씨전》이야말로 유교 가치의 핵심을 담은 경전經傳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흔히 권위 있는 고전을 경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성경현전聖經賢傳의 준말이다. 독음은 같지만 종교의 교리를 다룬 경전經典과 다른 말이다. 성경경전이란 말을 풀이하자면, '경전의 경은 성인이 지은 것이요, 경전의 전은 현자가 쓴 것이다'라는 뜻이다. 예컨대 《춘추》는 공자의 말씀으로 경이 되는 것이다. 성인의 저작이란 말이다. 하지만 좌구명은 성인의 반열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기에 《춘추》에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은 '춘추좌씨경'이 아닌 《춘추좌씨전》이 되는 것이다.

 

악사 광이 진晉나라 도공悼公을 공손하게 모시고 있었다. 도공이 묻는다. "위나라 백성들이 군주를 축출했다는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악사 광이 답한다. "어쩌면 쫓겨난 군주야말로 정말 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은 임금은 선한 자를 상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줍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양육하고, 하늘이 만물을 품듯 품어주며, 대지가 만물을 껴안듯 안아줍니다. 백성은 군주를 부모처럼 받들고 사랑하고, 해와 달을 보듯 우러르며, 천지신명을 섬기듯 정성을 다하고, 천둥번개가 칠 때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임금은 신을 모시고 백성이 우러르는 존재입니다. 만일 백성의 삶을 곤궁하게 하고 신을 섬기는 제사를 거르면, 백성이 절망하고 사적에는 주인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만드는 임금을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거하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 《춘추좌전》 <양공 14년>편 중

 

"하늘은 백성을 몹시 사랑합니다. 그러니 어찌 한 사람이 백성들 위에서 방자하게 굴고 악행을 일삼아, 백성이 하늘과 땅으로부터 받은 천성을 잃게끔 만들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 《춘추좌전》 <양공 14년>편 중

 

맹자가 양梁 양왕襄王을 알현하고 나와서 말했다. "그를 바라보아도 임금 같지 않았고, 다가가서 바라보아도 외경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맹자가 제 선왕에게 물었다. "왕의 신하 한 명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처와 자식을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에 다녀왔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처자식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선왕이 답했다. "그 친구를 버립니다." 맹자가 물었다. "형벌을 관장하는 사사士師가 선비를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선왕이 답했다. "그만두게 하겠습니다." 맹자가 물었다. "나라의 사방 국경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제 선왕은 좌우를 돌아보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애당초 양공이 즉위한 이후 제나라는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포숙아가 말했다. "군주가 백성을 사악하게 만드니 곧 변란이 일어날 것이다."

⊙ 《춘추좌전》 <장공 8년>편 중

 

관중을 압송해줄 것을 청한 포숙아. 포숙아가 관중을 넘겨받자 제나라 당부 땅에 이르러 그를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돌아가서 고했다. "관중은 제나라의 상경인 고해보다 정사에 더 능하오니, 그에게 재상 자리를 맡겨도 될 것입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따랐다.

⊙ 《춘추좌전》 <장공 9년> 중

 

관중이 병이 드니 환공이 문병 와서 물어본다. "재상의 병이 악화되니, 비록 하기 싫은 말이지만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대의 병이 위중해지면 과인은 누구에게 정사를 맡겨야 합니까?" 관중이 말한다. "임금께서는 누구를 마음에 두고 계시오?" 환공이 답한다. "포숙아가 좋을 것 같소이다.." 관중이 말한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묻는다. "그럼 누가 적임자입니까?" 관중이 답한다. "습붕입니다."

⊙ 《열자》 <력명>편 중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은 걸桀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고, 무왕은 주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한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시 왕이 말한다. "신하 된 자로써 자신의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답한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놈'이라고 하니 '무왕께서 그 주紂라는 놈을 처형하셨다'는 말은 들었어도 '누가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사옵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 《삼봉집》 중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 때문에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천자가 되고, 천자의 신임이 잇어야 제후가 되면,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로 갈아 치운다. 희생이 이미 이루어지고 기장과 피가 이미 정결하여 제사 의식이 때에 맞게 되었음에도,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다면, 곧 사직을 갈아 치운다.

⊙ 《맹자》 <진심>편 중

 

-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일제강점기, 그리고 바로 이어진 한국전쟁을 통해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만든 것은 뭘까? 비정상적인 교육열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유태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대한민국의 뜨거운 교육열에 대의명분이 되어주었던 금과옥조가 바로 맹모삼천지교다. '맹자의 엄마는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는데, 대치동으로 이사 한 번 가주는 게 부모 된 도리 아니겠어?'라는 자기합리화가 강남 8학군을 만들어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학벌 공화국으로 변질되는 데 중차대한 역할을 해낸 '맹자의 이사 세 번'에는 치명적인 오독誤讀이 숨어 있다. 유향이 지은 《열녀전》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맹자의 이름은 '가軻'다. 처음에 묘지 근처에 살던 맹가孟軻는 매일같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장례 치르는 놀이를 해댄다. 그 모습을 본 맹모가 이사를 결심한다. 두 번째 자리 잡은 곳은 시장 근처 도살장이다. 도살하는 행동과 상인들이 물건 파는 모습을 흉내 내는 맹가의 모습에, 맹모는 다시 좌절한다. 마지막으로 이사한 곳은 학교 근처다. 매월 초 하루가 되면 관원들이 문묘에 들어와 예를 행한다. 무릎 꿇고 절하고, 읍하고, 사양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를 행한다. 맹가는 그것을 보고 일일이 익히고 기억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은 진정 아이를 데리고 살 만한 곳이구나"라고 말했다.

 

여기서 '유儒'의 개념을 다시 상기해보자. 유학이 어디에서 비롯됐던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던 사람의 형상 아니던가. 기우제에서 출발해 죽은 자를 장례 치르고 제사를 모시던 일에서 유학儒學은 비롯되었다. 비록 맹모는 아이를 기를 만한 곳이 못 된다며 이사를 결행했지만, 사실상 어린 맹가는 착실하게 유학의 엘리트 코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 것이다. 지금이야 대학 가기 전에 보람상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마트 정육코너에서 일을 하는 게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당시 맹가에게는 생활밀착형 교육이 되었던 것이다.

맹모는 자신도 모르게 완벽한 수행 평가 대비를 시키고 나서 시험 공부를 시킨 셈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김주영쌤 뺨치는 어마어마한 코디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맹자의 단단한 공부는 전체 왕조 시대에 남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는 도발적인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 이백 : 당대唐代 최고의 시인. <소년행> <월하독작> <조밭백제성> 등의 명작을 남겼다. 술을 워낙 좋아해 술 관련 에피소드가 여럿 전해진다. 어느 날 현종이 이백을 찾았는데, 이미 취해 있었다. 만취한 채 업혀 와 일필휘지로 갈겨 쓴 시가 <청평조사>라는 명시다. 이백은 죽음을 두고도 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양자강 채석기采石磯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늘그랬듯이 술에 취해 있던 이백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속에 뛰어들었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 때문에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 때문에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천자가 되고, 천자의 신임이 없어야 제후가 되며,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로 갈아 치운다. 희생이 이미 이루어지고 기장과 피가 이미 정결하여 제사 의식이 때에 맞게 되었음에도,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다면, 곧 사직을 갈아 치운다.

⊙ 《맹자》 <진심>편 중

 

하늘과 땅이 바뀌어 네 계절을 이루듯天地革而四時成, 탕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과 백성의 뜻에 호응한 것이다湯武革命 順乎天而應乎人.

⊙ 《주역》 <혁革>편 중

 

"임금은 배다君者舟也. 백성은 물이다庶人者水也. 물은 배를 띄우기도하고 뒤집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이 이 점을 염두하며 위험을 대비한다면, 위기가 닥치지 않을 것이다君以此恩危 則危將焉而不至矣."

⊙ 《순자》 <왕제>편 중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묻는다. "천자가 훌륭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 백성들이 그를 받든다. 그러나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를 천자의 자리에서 몰아낸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위징이 답한다. "옛말에 '임금은 배다.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백성이야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시온데, 진실로 그러합니다."

⊙ 《정관정요》 중

 

먹고 마시는 것과 남녀간의 사랑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원하는 일이고飲食男女 人之大欲存焉, 죽음과 가난의 고통은 사람들이 크게 싫어하는 것이다死亡貧苦 人之大惡存焉.

⊙ 《예기禮記》 <예운禮運>편 중

 

"아마도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비록 백대의 왕조가 지나고 난 이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논어》 <위정>편 중

 

"주나라는 하와 은, 두 왕조를 거울로 삼았으니, 찬란하구나! 그 문화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 《논어》 <팔일>편 중

 

공자가 말씀했다. "정치政治로 지도하고 형벌刑罰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반면,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 《논어》 <위정>편 중

 

진晉나라의 도공이 즉위했다. 도공은 백관을 새로이 임명했고 사면령을 내려 백성의 부채를 탕감해주었으며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고 방치되었던 인재를 등용했다. 널리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고 재난에서 백성을 구해냈으며 사악한 행동을 금지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죄를 가볍게 다스렸으며, 물자를 절약했다.

⊙ 《춘추좌씨전》 <성공 18년> 중

 

추나라와 노나라가 전쟁을 벌였다. 추나라 목공이 묻는다. "나의 부하 관리들 가운데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은 자가 33명이나 되는데, 백성은 죽은 자가 없습니다. 백성을 벌로 베어 죽이려 해도 그 수가 너무 많아 죽일 수 없소이다. 그렇다고 처벌치 않으려 하니, 윗사람들이 전장에서 죽는 걸 보고도 구하지 않는 백성들을 어찌 처단해야 옳단 말입니까?" 맹자가 대답한다. "흉년이 들어 굶주릴 때, 백성 가운데 노약자는 도랑과 계곡에 시신으로 뒹굴고 건장한 자는 사방으로 흩어져 유랑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 숫자가 거의 1,000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임금의 창고와 관청의 창고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제대로 보고한 관리가 없었으니, 관리가 태만하여 백성을 해친 것입니다. 증자가 말씀하셨습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너에게서 비롯된 것이 너에게로 다 돌아간다.' 저 백성들이 지금 와서 되갚음을 한 것이니, 임금께서는 원망하지 마십시오. 임금이 어진 정치를 하게 되면 백성은 그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그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등나라 문공이 나라를 위하는 방법을 물었다. 맹자가 답한다. "백성의 생업은 느긋할 수 없습니다. 《시경》에 '낮에는 지붕 이을 띠를 베어 오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 어서 빨리 지붕을 이어라. 새해가 시작되면 백곡을 파종하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백성이 살아가는 방법론을 말씀드리지요. 일정한 생산이 있는 자는 일정한 마음이 있습니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자는 항상심이 없게 됩니다. 인간에게 항상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사악하고 사치스러워 못 하는 짓이 없게 됩니다."

⊙ 《맹자》 <등문공>편 중

 

양 혜왕이 물었다. "과인은 나라에 진심을 다했을 뿐이라오. 하내河內가 흉년이면 백성을 하동河東으로 옮기고, 곡식은 하내로 옮깁니다. 하동이 흉년이어도 마찬가지요. 이웃나라의 정치를 살펴보면 과인처럼 마음을 쓰는 자가 없소. 그런데 이웃나라 백성의 숫자가 줄지 않고, 과인의 백성이 늘지 않습니다. 이건 어찌된 일이오?" 맹자가 대답하여 말했다. "임금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청컨대, 전쟁에 비유해 말해보겠습니다. 둥둥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전쟁을 시작했는데, 갑옷을 버리고 병장기를 끌면서 도망칩니다. 어떤 자는 백 걸음을 도망치고, 어떤 자는 오십 걸음을 도망칩니다. 오십 걸음 도망친 자가 백 걸음 도망친 자를 비웃는다면, 어떠합니까?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겠지요. 오십 걸음 도망쳐도 백 걸음 도망친 게 아닐 뿐, 역시나 도망친 것은 도망친 것입니다. 임금께서 만약 이 점을 아신다면, 백성이 이웃 나라보다 늘어나리라 기대하지 마시옵소서."

⊙ 《맹자》 <양혜왕>편 중

 

농사짓는 때를 어기지 않으면, 곡식은 다 먹어치울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코가 작은 그물을 연못에 넣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는 다 먹어치울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도끼를 때에 따라 숲 속에 투입하면, 목재는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자라를 다 먹을 수 없고 목재를 다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백성이 살아 있는 자를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데 유감스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잘ㄹ 봉양하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이 결국 왕도정치의 시작입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는 것을 먹는데도 단속할 줄 모르고, 길에 굶어 죽은 자가 있어도 곡식 창고를 개방할 줄 모르면서 사람이 죽으면 그저 "내 탓이 아니오. 흉년이 들어 그렇소"라고 말한다면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내 탓이 아니오. 칼이 죽였소"라고 말하는 갓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일 왕께서 흉년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신다면, 천하의 백성이 위나라로 몰려들 것입니다.

⊙ 《맹자》 <양혜왕>편 중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었다. 공자가 답했다. "참으로 큰 질문이구나! 예는 사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함이다. 장례의 예는 수월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함이 낫다."

⊙ 《논어》 <팔일>편 중

 

공자께서 말씀했다.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모든 별이 북극성을 만들어 따르는 것과 같다."

 

공자가 말씀했다. "정치政治로 지도하고, 형벌刑罰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반면,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 《논어》 <위정>편 중

 

예는 아래로 백성들에게까지 내려가 적용되지 않고禮不下庶人, 형벌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 적용되지 않는다刑不上大夫.

⊙ 《예기禮記》 <곡례>편 중

 

- 상앙 : 상앙의 원래 이름은 공손앙公孫鞅인데, 왕에게 상 땅을 받아 상앙이라 불리게 된다.

 

공자께서 말씀했다. "공손하지만 예禮심가 없으면 수고롭기만 하다. 신중하지만 예가 없으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용감하면서 예가 없으면 질서를 어지럽힌다. 정직하면서 예가 없으면 박절하게 된다. 군자가 친족들을 잘 보살피면 백성 가운데 인의 기풍이 일어나,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며 백성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 《논어》 <태백>편 중

 

"묵적과 양주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

⊙ 《맹자》 <등문공>편 중

 

노나라 사람인 공수반은 그 재주가 뛰어나 초나라 혜왕의 초빙을 받는다. 공수반은 초나라에서 공격 기계인 운제雲梯를 만들었고, 초 혜왕은 이를 이용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묵자가 이 소식을 듣고는 100리에 한 번씩 쉬며 발이 부르트게 공수반을 찾아와 말한다. "송나라에서 듣자하니, 그대가 초나라에서 중용된다고 들었소. 나는 그대에게 송나라 왕을 직접 죽이라 말하고 싶소." 공수반이 답한다. "나는 의로운 사람인데 어찌 왕을 죽일 수 있겠소." 다시 묵자가 받아친다. "듣자하니 운제를 만들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데 송나라가 무슨 죄를 지었소? 의롭기 때문에 왕의 목숨 하나 죽이지 못하겠다면서 도리어 그 나라를 송두리째 공격하니, 이것은 적은 수의 목숨을 죽이지 않고 도리어 많은 무리를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감히 묻겠소이다. 송나라를 공격하면서 어찌 의를 논하시오?" 공수반은 그 논리에 할 말을 잃고 초 혜왕에게 묵자를 인도한다.

 

묵자는 왕을 보자 묻는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훌륭한 마차가 있는데도 이웃의 낡은 수레를 훔치려 하고, 자신의 비단 옷을 두고 이웃의 낡은 옷을 훔치려 하며, 자신의 산해진미를 버려두고 이웃의 초라한 음식을 탐하려 합니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초 혜왕이 답한다. "틀림없이 도벽이 심한 자군요." 그러자 묵자가 답한다. "초나라는 영토가 5,000리에 달하지만 송나라 영토는 500리에 불과합니다. 마치 좋은 마차와 낡은 수레 같은 관계이지요. 초나라 땅에는 무소, 외뿔소, 사슴, 고라니가 가득하고, 초나라 강에는 물고기와 자라 등이 가득합니다. 반면 송나라에는 꿩, 토끼, 붕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이것은 산해진미와 초라한 음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초나라에는 다양한 목재가 많이 나지만, 송나라에는 변변한 나무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옷과 낡은 옷의 관계입니다. 초나라 왕께서 송나라를 공격한다면, 결국 도벽이 있는 자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초나라 혜왕이 답한다. "옳은 말이오. 송나라 공격을 멈추도록 하겠소."

⊙ 《전국책》 중

 

공벌을 좋아하는 군주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과인이 금옥이나 자녀, 영토가 모자라 공벌을 행하는 게 아니다. 나는 천하에 의를 내세워 명성을 떨치고, 덕으로 제후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이에 묵자가 답한다. "지금 천하에 의를 내세워 명성을 떨치고 덕으로 제후들을 굴복시키는 자가 잇다면, 천하의 복종은 서서 기다릴 정도로 빠를 것입니다. 천하에 공벌이 벌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유컨대, 어린아이가 말을 기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 서로 신의를 두터이 하며 천하를 이롭게 할 제후가 있다면 불의를 행하는 대국에 합세하여 대항하고, 대국의 침공을 받은 소국을 합세해 구해주고, 소국의 성곽이 허술하면 합세해 수리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다면 힘을 합쳐 보내주고, 예물이 부족하면 합세해 보내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국과 맞서게 한다면 소국의 군주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상대가 힘을 소진해 피로할 때, 내가 평온을 유지하면 아군은 강해집니다. 또한 백성을 은혜로운 마음으로 구해주면 백성들 또한 마음으로 귀의할 것입니다. 공벌의 정책을 바꿔 치국에 매진하면 오히려 그 공업이 배가 될 것입니다. 군사를 동원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제후들의 피폐함을 헤아려 사용하면 그 이득이 반드시 더 클 것입니다."

⊙ 《묵자》 <비공>편 중

 

맹자 말씀했다. "양주는 이기주의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털오라기 하나를 뽑아서 천하가 이로워진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묵적은 겸애의 마음으로, 자신의 이마를 갈아 발꿈치까지 다다른다 해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자막은 중도를 잡았다. 중도를 잡았다는 것은 성인의 도에 가까운 것을 행하는 것이다. 중도를 잡았지만 저울추가 없는 것은 오히려 한쪽에 치우치는 것과 같다. 한쪽에 치우쳐 잡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인의 도를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도 하나를 드높이고는, 백 가지 도를 없애는 셈이다."

⊙ 《맹자》 <진심>편 중

 

"남을 해치는 사람은 자신의 몸은 사랑하면서 남은 사랑하지 않는다."

⊙ 《묵자》 <겸애>편 중

 

"심지어 대부들이 서로 남의 집안을 어지럽히고 제후들이 서로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데 이르기까지 역시 그러하다. 대부들은 각기 자기 집안은 사랑하면서도 남의 집안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집안을 어지럽힘으로써 자기 집안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제후들은 각기 자기 나라는 사랑하면서도 남의 나라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자기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들은 전부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면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묵자》 <겸애>편 중

 

"겸애란 남의 나라 보기를 자기 나라 보듯 하고, 남의 집안 보기를 자기 집안 보듯 하며, 남의 몸 보기를 자기 몸 보듯 하는 것이다."

⊙ 《묵자》 <겸애>편 중

 

"남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사랑을 받게 된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반드시 그를 사랑하게 된다."

⊙ 《묵자》 <겸애>편 중

 

"남을 사랑한다는 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들에 포함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기에 자기 자신도 사랑받는 것이다.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게 남을 사랑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 《묵자》 <대취>편 중

 

"저와 선생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더불어 모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이웃인 추나라 사람들을 저 먼 곳에 있는 월나라 사람들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노나라 사람들을 이웃인 추나라 사람들보다 더 사랑합니다. 또한 노나라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내 고향 사람들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보다 내 집안사람들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 집안사람들 중에서도 내 부모를 더욱 사랑합니다."

⊙ 《묵자》 <경주>편 중

 

"내 부모를 받드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부모에까지 미치고, 나의 아이를 아끼고 기르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아이에까지 미친다."

⊙ 《맹자》 <양혜왕>편 중

 

성인聖人인 왕이 나오지 않으니, 제후들이 방자해진다. 선비들은 함부로 의견을 개진하니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찬다. 천하의 여론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양주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로서 오직 자신만 위하니, 이는 임금에 대한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묵적은 극도의 이타주의자로서 세상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리라 하니, 이는 부모에 대한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모도 안중에 없고 임금도 안중에 없으니 이게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공명의가 말하길 "부엌에 기름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잇으나,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가득하다. 이는 금수를 몰아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 《맹자》<등문공>편 중

 

- 자막 : 노나라의 현자.

 

- 형법 151조

  1항.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항.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하여 전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맹헌자가 말했다. 말 네마리가 끄는 수레를 가진 대부는 닭과 돼지 같은 가축을 기르면서 가난한 서민과 경쟁하며 재산을 늘리려 해서는 안 된다. 장례에 얼음을 사용하는 경대부 지위에 이른 자는 소와 양을 길러 백성과 경쟁하려 들면 안 된다. 수레 백 대를 보유한 제후는 백성을 수탈하는 신하를 양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백성을 수탈하는 신하를 두느니 차라리 도적을 신하로 두는 편이 낫다. 이는 국가란 금전적 이득을 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로움으로 여겨야 함을 말한다.

⊙ 《대학》 중

 

나라의 군주가 재물을 늘리는 데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이 국사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 소인을 선하다고 여기고 소인을 활용하여 국사를 처리하면 재앙과 해로움이 함께 오게 된다. 이럴 때 비록 선한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국가는 이익을 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로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 《대학》 중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태산泰山의 명당明堂을 헐자고 합니다. 헐까요?" 맹자께서 대답했다. "명당은 왕을 위한 건물입니다. 왕께서 왕도 정치를 하고자 하시면 헐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제 선왕이 물었다. "왕도 정치에 대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답했다. "옛날 문왕이 기岐 땅을 다스릴 때 농민에게 정전법을 시행해 9분의 1을 세금으로 받았고 벼슬하는 사람은 대대로 녹봉을 주었으며 관문시장은 단속했지만 세금은 안 받았고 물고기 잡는 시설을 못 하게 금지하지 않았으며 죄인을 처벌할 때에도 그 처자식은 연좌제로 벌하지 않았습니다. 늙어서 부인이 없는 것을 홀아비라 합니다. 늙어서 남편이 없음을 과부라 합니다. 늙어서 자식이 없음을 독신이라 합니다. 어려서 부모가 없음을 고아라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의 곤궁한 국민들로서 고할 곳이 없으니 문왕이 정치를 폐하고 어짊을 베푸니 반드시 이 부류의 백성들에게 먼저 어짊을 베풀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좋구나! 부유한 사람들 이 시름이 애달프고 슬프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 선왕이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했다. "왕께서 그것을 좋게 여기신다면 어째서 실행하지 않으십니까?"

⊙ 《맹자》 <양혜왕>편

 

"화하華夏의 중원은 안정되었지만, 아직은 하늘과 땅에 제사 드리는 봉선의식의 비용을 부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중략) 수년간 연속하여 풍성하게 수확을 거두었지만, 식량 창고는 텅 비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봉선을 거행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 《정관정요》 <납간納諫>편 중

 

- 관문시장 : 맹자는 일찍이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관문시장을 관리하되 세금은 매기지 않았다는 점은 시장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국가 통제력의 범주에 넣어두되 세금은 부과하지 않아 상인들과 백성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정책이었다. 건륭제 재위 기간에 영국 조지 3세는 조지 맥카트니를 특사로 보낸다. 건륭제를 알현하고 무역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친서로 전달했지만, 건륭제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영국과 통상이 필요 없다." 이 한마디가 결국 중국의 운명을 급전직하로 추락시켰다.

조선시대 명종 재위 시, 천하를 뒤흔들었던 간신 윤원형은 집권하자마자, 세 가지 원칙을 천명한다. 간척사업이 그 하나요, 서얼 철폐가 둘이다. 마지막이 시장의 활성화인데, 얼핏 보면 중상주의를 이미 명종 시기에 확립한 윤원형의 업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가관이다. 윤원형은 시장을 자기 집 앞에 개설하려 했다. 한마디로 시장 경제의 활성화가 필요한 듯 주장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것이다. 뇌물로 받은 음식이 어찌나 많았던지 곳간에서 썩어나니, 이를 처리하기 위한 용도로 시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쌀이나 고기를 썩지 않는 유기로 교환해서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시장을 관리하되 세금은 부과하지 않은 맹자의 왕도 정치와는 대척점에 있는 악랄한 정책이다.

중국 고대사에서 생필품처럼 귀중한 물품은 늘 나라에서 관리하려 들었다.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제도가 대표적이다. 한나라 선제 때 환관桓寬이 지은 정치 토론집 《염철론鹽鐵論》을 보면 국가 자원에 대한 군주와 백성의 역학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원전 81년, 조정에서 회의가 열린다. 회의 주제는 '민생의 고통'이다. 어사대부 상홍양을 상대로 수많은 문학(관리 후보생)과 현량들이 격렬한 토론을 펼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100분 토론>에 국무총리나 장관이 출연하고 그를 상대로 대학생 토론단이 국정 현안과 민생에 대한 질의를 벌이는 모양새다. 열띤 난상토론 가운데 가장 뜨거운 이슈는 단연코 한 무제 이래 시행된 일련의 경제 정책, 특히 소금, 철, 술의 전매가 옳은가에 관한 문제였다.

어사대부가 먼저 포문을 연다. "세상을 떠난 선제(무제)께서 오랜 세월 흉노의 침략에 고통받아온 변경의 백성을 가련히 여겨 성을 짓고, 망루를 세우고 병사를 주든시키며 방어력을 키워왔습니다. 그 결과로 재정 곤란에 빠지자 소금, 철, 술의 전매와 균수법을 실행하여 국고 수입을 확보했고, 그것을 방위비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자들은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국고는 텅 빌 것이고 방위비를 확보하지 못해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은 굶어야 합니다. 대체 논자들은 이런 비용을 어디서 충당하란 말이오?"

이에 문학이 답한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물이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자께서는 이익이 많고 적음을 말하지 않고 또한 제후나 대부도 이해득실을 입에 담지 않으며 오로지 인의와 덕행으로 백성을 교화해야 합니다."

관리가 되려는 문학들이 공자를 들먹인다. '이해득실을 입에 담지 않으며'란 표현은 '하필왈리'의 맹자를 연상케 한다. 오직 인의와 덕행만을 강조하는 그들은 철저한 유학의 신봉자다. 소금이나 철을 전매하여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한나라 정부는 맹자가 보기에는 왕도 정치에서 한참 모자란 나라일 수밖에 없다.

 

-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던 길이다. 태산 옆을 지나가고 있는데 부인 한 명이 무덤가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 궁금해진 공자는 자로를 시켜 연유를 묻게 한다. 자로가 묻는다. "부인께서 슬피 우시는데, 필시 곡절이 있어 보입니다. 누구의 무덤입니까?" 부인이 답한다.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의 무덤입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이제 아들까지 호랑이에게 죽었습니다." 이에 공자가 묻는다. "호랑이가 이렇게 무서운데, 왜 이곳에 계속 사십니까? 떠나시지요." 그러자 부인이 흐느끼며 답한다. "여기 사는 게 차라리 괜찮습이다. 다른 곳으로 가면 세금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이에 공자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구나"라고 하였다. 태산 기슭의 이 호랑이는 동물원 호랑이가 아니다. 집안 삼대를 작살낸 괴물이다. 그런데 그 괴물보다 세금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어느 해에 기근이 들어, 재정이 부족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소?" 유약이 답했다. "어찌 철법을 행하시지 않습니까?" 애공이 물었다. "10분의 2의 세금으로도 나는 부족하거늘, 어찌 철법을 행하라 하시오?" 유약이 답했다. "만일 백성이 풍족하다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다 여기시겠습니까? 만일 백성이 부족하다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다 여기시겠습니까?"

⊙ 《논어》 <안연>편 중

 

- 철법 : 10분의 1을 과세하는 세법 제도.

 

옛날 미자하彌子瑕는 위나라의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이르길 왕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들자 어떤 이가 몰래 와서 알려주었다. 그러자 미자하는 위나라 왕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왕은 이 일을 듣고는 미자하를 칭찬하여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발이 잘리는 형벌도 잊었구나!"

어느 날, 미자하는 위나라 왕과 함께 정원에서 노닐다가 복숭아를 따 먹게 됐는데, 맛이 아주 달자 먹다 남은 반쪽을 왕에게 먹으라고 바쳤다. 왕이 말했다. "미자하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맛이 좋으나까 나를 잊지 않고 맛보게 하는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미모가 쇠하고 왕의 사랑도 식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왕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이놈은 옛날에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또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미자하의 행동은 변한 게 없는데, 예전에는 상을 주고 지금은 벌하는 까닭은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총애를 받을 때는 지혜를 내는 것마다 왕의 마음에 들고 더 친밀해졌다. 하지만 왕에게 미움을 받을 때는 아무리 지혜를 쥐어짜도 왕에게는 옳은 말로 들리지 않아 벌을 받고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따라서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신하는 군주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미리 살핀 뒤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 밑에 한 자가량 되는 거꾸로 난 비늘, 즉 역린逆鱗이 있는데, 만약 누군가 그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유세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 《한비자》 <세난>편 중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하며, 지나치게 공손하게 구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다. 나 역시 이를 부끄러운 행동이라 여긴다.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역시 그러하다.

⊙ 《논어》 <공야장>편 중

 

군자는 말하는 데 있어서는 더듬거리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민첨하고자 한다.

⊙ 《논어》 <이인>편 중

 

- 교언영색巧言令色 : 《논어》 <공야장>편에서 공자는 "좌구명이 교언영색을 싫어하니, 나도 싫다"라고 언급한다. 굳이 좌구명을 업고 자신의 뜻을 펼친 것은 그만큼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다. 좌구명은 《춘추좌씨전》의 저작자로 알려져 있다. 흔히 좌구명을 공자의 선배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춘추》가 공자가 일생을 바쳐 이룬 저작이라면, 물리적으로 좌구명이 《춘추》에 주석을 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가 요절하고 선배인 좌구명이 장수를 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공자는 칠순을 훌쩍 넘길 정도로 오래 살았다. 도저히 앞뒤가 맞질 않는다.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구명 집안사람들이 사관 직책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 사관의 직무는 세습이었다. 따라서 《춘추좌씨전》을 좌구명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좌구명부터 시작된 좌씨 집안의 집단 창작물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아버지의 뜻을 살피고···

⊙ 《논어》 <학이>편 중

 

오늘날 효도란 부모를 봉양하는 걸 말한다. 개나 말 따위도 모두 먹이를 주고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 《논어》 <위정>편 중

 

부모님을 섬길 때에는 완곡하게 간언하고, 설사 부모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또한 공경하여 거스르지 않아야 하고 힘들더라도 부모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 《논어》 <이인>편 중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놀러 가지 않고, 놀러 가게 되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한다.

⊙ 《논어》 <이인>편 중

 

도응이 물었다. "순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는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어 있습니다. 이때 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맹자께서 대답했다. "그를 잡을 수밖에 없도다." 도응이 물었다. "그러면 순임금이 막지 않을까요?" 맹자께서 답했다. "무릇 순임금이 어찌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무릇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바가 있을 뿐이다." 도응이 물었다. "그렇다면 순임금은 어찌해야 합니까?" 맹자께서 대답했다. "순임금은 천하를 버리기를 헌신짝처럼 여길 것이다.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가 바닷가에서 숨어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기뻐하며 즐기고 천하를 잊을 것이다."

⊙ 《맹자》 <진심>편 중

 

천하의 선비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순임금은 자신의 근심을 풀기에 부족하다 여겼다. 색色을 좋아하는 건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요임금의 딸 둘을 아내로 맞았으나 근심을 풀기에는 부족하다 여겼다. 부富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천하를 소유했지만 자신의 근심을 풀기에 부족하다 여겼다. 귀함은 소유했지만 자신의 근심을 풀기에 부족하다 여겼다. 귀함은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귀하게도 천자의 역할을 했으나, 역시나 자신의 근심을 풀기에 부족하다 여겼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와 호색, 부귀 역시 그의 근심을 풀기에는 부족했고, 오직 부모를 따르는 것만이 그의 근심을 풀 수 있었다.

⊙ 《맹자》 <만장>편 중

 

사람이 어리면 부모를 사모하게 된다. 호색을 알게 되면 어여쁜 처자를 사모하게 된다. 처자식이 잇으면 처자식을 사모하게 된다. 벼슬을 하게 되면 임금을 사모하게 된다. 사모하는 임금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열이 나게 된다. 큰 효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부모를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순임금에게서 바로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맹자》 <만장>편 중

 

맹자께서 말씀했다. "인仁의 본질은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다. 의로움義의 본질은 형을 잘 따르는 것이다. 지혜智의 본질은 이 두 가지를 알고 꾸준히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예禮의 본질은 이 두 가지를 절도 있게 꾸며주는 것이다. 악樂의 본질은 이 두 가지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즐기게 되면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마음이 생겨나면 그만두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만두는 것을 싫어하게 되면, 발이 저절로 뛰고 손이 저절로 춤추는 것을 모르게 된다."

⊙ 《맹자》 <이루>편 중

 

맹자가 말씀했다.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모두들 '천하, 나라, 집'의 순서로 말하는데, 사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으며 집의 근본은 개인에 있다.

⊙ 《맹자》 <이루>편 중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고大學之道 在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에 있고在親民,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함에 있다在止於至善.

⊙ 《대학》 중

 

옛날에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그 집안을 다스렸다欲治其國者 先齊其家. 그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다欲齊其家者 先修其身.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다欲修其身者 先正其心.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뜻에 정성을 다했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그 뜻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앎에 이르렀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먼저 그 앎에 이른다는 것은 사물을 연구함에 있어야 한다致知在格物.

⊙ 《대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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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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