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05 방구석미술관

 

 

 

조원재 지음

2018, 블랙피쉬

 

시흥시중앙도서관

SA275721

신천역중앙도서관

 

650.4

조66ㅂ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미술, 우아하고 고상한 줄 알았더니!

제대로 뒤통수 맞다?

 

낄낄 웃다 보면 빠져드는 미술 입덕 교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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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절규한 에드바르트 뭉크

사실은 평균 수명을 높인 장수의 아이콘?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알고 보니 원조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사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순수 지존?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알고 보면 선배의 미술을 훔친 도둑놈?

 

푀초의 추상미술을 창조한 바실리 칸딘스키

알고 보면 최강 연애 찌질이?

 

"미술은 어렵고 지루하다고요?

그렇다면, 《방구석 미술관》이 딱!"

 

□ 한 개 이상 해당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합니다

 

□ 미술책만 펼치면 졸음이 쏟아진다

□ 아무리 미술을 공부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까먹는다

□ 미술관을 동물원 간 듯 구경하고 나온다

□ 미술 얘기만 나오면 식은땀이 나고, 말이 안 나온다

□ 명화를 보아도 왜 명화인지 모르겠다

□ 편하고 쉽게, 무엇보다 제대로 미술을 배워보고 싶다

□ 문화생활을 즐기는 교양인이 되고 싶다

□ 재미없고 지루한 건 딱 질색이다

 

조원재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남자. 줄여서 ‘미남’이라고 불린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미술이 본능적으로 끌려 독학했다. 미술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돈을 벌었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순례했다.
지난 2016년부터 ‘미술은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모토 아래,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을 진행하고 있다. 미술에 대한 오해와 허례허식을 벗겨 ‘미술, 사실은 별거 아니구나!’를 깨닫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청취자와 진심으로 소통 중이다.

팟캐스트 | 방구석 미술관
인스타그램 | instagram.com/minamshow
페이스북 | facebook.com/minamshow

 

Contents

 

들어가며

 

01. 죽음 앞에 절규한 에드바르트 뭉크

     사실은 평균 수명을 높인 장수의 아이콘?


02.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알고 보니 원조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03. 나풀나풀 발레리나의 화가 에드가 드가

     알고 보니 성범죄 현장을 그렸다고?


04. 전 세계가 사랑한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사실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겼다고?


05.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그림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사실은 테러를 일삼은 희대의 반항아?


06.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사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순수 지존?


07. 자연의 삶을 동경했던 폴 고갱

     알고 보니 원조 퇴사학교 선배?


08.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에두아르 마네

     사실은 거장들이 업어 모신 갓파더?


09. 로맨틱 풍경화의 대명사 클로드 모네

     알고 보니 거친 바다와 싸운 상남자?


10.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접수한 폴 세잔

     알고 보면 그 속사정은 맨땅에 헤딩맨?


11.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알고 보면 선배의 미술을 훔친 도둑놈?


12.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사실은 밀애를 나눈 또 다른 사랑이 있었다?


13. 최초의 추상미술을 창조한 바실리 칸딘스키

     알고 보면 최강 연애 찌질이?


14. 현대미술의 신세계를 연 마르셀 뒤샹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 장인?

 

참고문헌


도판 목록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 판지에 유채 · 템페라 · 파스텔

 

죽음 앞에 절규한

에드바르트 뭉크

 

 

죽음 앞에 절규한 뭉크

 

사실은 평균 수명을 높인

장수의 아이콘?

 

절규의 화가 뭉크. 단명하거나 요절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네요. 그는 평생을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당시 평균 수명의 3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과연 장수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하네요. 혹시 그만의 장수 비결이 따로 있기라도 했던 걸까요?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임간의 심혈이다."

- 에드바르트 뭉크

 

 

"심장의 피로 그린 절규?"

르트 뭉크, <절규>, 1893

 

"예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과 그의 삶이며, 우리는 죽어버린 자연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난 죽음의 기억을 그린다."

에드바르트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뒤바뀐 흡혈귀!"

에드바르트 뭉크, <흡혈귀>, 1895

 

"마돈나여, 내 피를 빨지 마오!"

에드바르트 뭉크, <마돈나>, 1894~1895

 

"나에게는 사람도 죽음이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마라의 죽음>, 1907

 

"나는 옛 이탈리아 화가들처럼 여성들을 천국에 남겨두기로 했어. 장미의 가시는 고통스럽기도 한 것. 나는 꽃을 즐기듯 여성들을 즐기기 시작했네. 꽃향기를 맡고 아름다운 잎을 감상하더라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지."

 

"아무리 피해도 이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1940~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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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Edvart Munch

출생 · 사망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

국적         노르웨이

사조         표현주의

대표작      <절규>, <사춘기>, <마돈나>, <생명의 춤>

 

◆ 내 감정에 충실해! 뭉크의 표현주의

'감정을 표출한다.' 표현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생각이죠.

이런 푠현주의의 선구자가 바로 뭉크입니다. 뭉크의 독창성은 '자전적 표현'에  잇습니다. 이전의 예술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럴지언정 그 이상의 개인사를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뭉크는 자신의 사사로운 개인사 자체를 시종일관 그림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경험과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에만 집중했고, 또 그것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 사랑의 고통, 존재의 허무함 등의 감정을 회화에 표현했죠.

뭉크의 표현주의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의 시발점이 됩니다. 1905년 키르히너와 놀데로 대표되는 '다리파'라는 예술가 그룹이 드레스덴에서 표현주의 회화를 시작한 것, 그 이후 1911년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청기사파'가 뮌헨에서 표현주의 회화를 시작한 것에서 뭉크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독일 표현주의는 칸딘스키에 의해 추상회화로 이행되기에 이릅니다.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알고 보니

원조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프리다가 원조 막장드라마 주인공이 된 데에는 그녀의 남편 디에고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군요. 사실 사진만 봐서는 별 문제없어 보이는데, 혹시 이 부부 지금 쇼윈도 부부로 지내는 건 아닐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죠.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 프리다 칼로

 

"교통사고! 그 고통의 기억을 남긴 스케치."

프리다 칼로, <사고>, 1926

 

"나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고는 무언가 다른 걸 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을 시작했다."

 

"교통사고 후, 붓을 들고 그린 자화상!"

프리다 칼로,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

 

"결혼 전, 벽화에 프리다를 그려 넣은 디에고. 여기까지는 로맨틱했다!"

디에고 리베라, <무기고>, 1928

 

"발 사이즈 차이가 가히 혁명적!"

프리다 칼로,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유산의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듯!"

프리다 칼로, <떠 있는 침대>, 1932

 

 

"프리다는 기존의 어떤 예술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걸작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진실을 직시하고,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감내하는 프리다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일 뿐이었다."

- 디에고 리베라

 

"디에고, 당신은 살인자야!"

프리다 칼로,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1935

 

 

"뉴욕에는 일시적인 대용물이 있었을 뿐이오. 당신이 돌아간 자리에서 변함없는 안식처를 찾기를 바라오. 우리 셋 중에서 항상 당신들 둘만이 함께였고, 난 항상 느걸 느낀다오. 당신이 리베라의 목소리를 들을 때 흘린 눈물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소. 나는 당신의 반쪽이 그처럼 친절하게도 나에게 베풀어준 행복에 영원토록 감사할 것이오."

- 니콜라스 머레이

 

"어째서 나에게 전시회를 하자고 하는 거지? 그들이 내 작품의 어떤 점을 높이 샀는지 모르겠어."

 

"이것이 내가 자유로워지는 방법이구나. 여행도 갈 수 있겠어. 디에고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어."

 

"널 내 심장에서 잘라버리겠어!"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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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Frida Kahlo

 

 

출생 · 사망  1907년 7월 6일 ~ 1954년 7월 13일

국적          멕시코

사조          분류되지 않음

대표작       <두 명의 프라다>, <떠 있는 침대>, <우주의 대지(멕시코), 나, 디에고, 그리고 애견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출생 · 사망  1886년 12월 8일 ~ 1957년 11월 25일

국적          멕시코

사조          분류되지 않음

대표작       <꽃 축제 : 산타 아니타의 축제>, <알라메다 공원의 일요일 오후의 꿈>, <농민 지도자 사파타>

 

◆ 멕시코가 사랑하는 국민 부부, 프리다 & 디에고

멕시코 500페소 지폐를 본 적 있나요? 앞면에는 디에고 리베라, 뒷면에는 프리다 칼로가 그려져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이 부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시죠? 둘은 국보급 화가임과 동시에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도록 생을 바친 정치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프리다 칼로는 16세기 스페인의 무력 침략과 식민지화로 맥이 끊겼던 멕시코의 전통을 예술로 계승하려 했습니다. <유모와 나>, <뿌리 혹은 거친 땅>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프리다의 애국심이 고스란히 단겨 있죠. 자신의 고통을 예술에 담은 것과는 또 다른 프리다 예술의 한 축입니다. 디에고 리베라 역시 새로운 멕시코를 건설하겠다는 열정으로 선조 인디오가 남긴 유구한 문화적 뿌리와 멕시코인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웅장한 벽화로 담아냈습니다. 또한 그는 평생 수집한 6만여 점의 멕시코 고대 유물을 기증해 아나우아카이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에드가 드가, <스타>, 1876~1877, 파스텔

 

나풀나풀 발레리나의 화가

에드가 드가

 

발레리나의 화가, 에드가 드가

 

알고 보니

성범죄 현장을 그렸다고?

 

 

가지런히 포개놓은 손,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 어쩐지 드가라는 사람이 의뭉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무희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발레리나만 그린 줄 알았는데, 도대체 그는 왜 성범죄 현장을 그렸던 걸까요?

 

"이건 대체 무슨 광경이지?"

에드가 드가, <실내(강간)>, 1868~1869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에 대한 사랑만으로 지내고 싶다."

- 앵그르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고, 게다가 그녀가 예쁘기까지 하다면 그건 엎친데 덮친 격이군. 자네의 예술은 죽은 거야!"

- 들라크루아

 

"결혼한 남자는 예술에 있어 반동적이 된다."

-쿠르베

 

"발레리나 어딨지?"

에드가 드가, <오페라좌의 관현악단>, 1869~1870

 

"주연이 된 발레리나!"

에드가 드가, <관현악단의 연주자들>, 1872

 

 

"일단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서 운명이 결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창녀로 길러지는 것이다."

- 당시 한 발레리나

 

"화려한 듯 음산한 그림."

에드가 드가, <무대 위 발레 리허설>, 1874

 

낮이나 밤이나 연습에 몰두하는 그녀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즐거움이 밀려오네

아직 빈민가의 흔적을 떼버리지 못한 그녀

- <어린 무용수> 중에서

 

거짓의 교수대 아래 너의 무한한 예술이 보이네

너의 발걸음을 쫓지도 못하는 나는 너를 생각하네

그렇게 너는 다가와 이 늙은 멍청이를 괴롭히네

- 제목 미상 중에서

 

"이제, 드가의 시선이 느껴지나요?"

에드가 드가, <발레 교실>, 188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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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Edgar De Gas

 

출생 · 사망  1834년 7월 19일 ~ 1917년 9월 27일

국적          프랑스

사조          인상주의

대표작       <발레 수업>, <다림질하는 여인들>, <압생트 한 잔>, <스타>, <욕조에서 나오는 여인>

 

◆ 인상주의자인 동시에 인상주의자가 아닌 드가?

드가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함께 인상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는 회화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가는 야외 작업보다 전통적인 실내 작업을 좋아했습니다. 즉, 외광 효과에 관심이 없었죠. 또한 자연을 보는 것을 지루해했기 때문에 모네가 선호한 풍경화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색채보다 전통적인 선 중심의 데생을 중시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가가 인상주의자로 분류되는 건 그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했고,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주제에서 벗어나 동시대 현실에서 주제를 찾았으며, 정부와 아카데미 등 기득권자들이 선호했던 고전주의 양식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 드가는 포토그래퍼?

드가만의 전매특허는 바로 '순간 포착'입니다. 말이 달리는 순간, 무용수가 춤추는 순간 등 움직이는 대상의 순간을 포착해 그림을 그렸죠. 그는 순간 포착에 대한 열정 때문에 사진에도 관심이 많았고, 코닥 No.1 카메라를 구입해 촬영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캔버스에 유채

 

 

전 세계가 사랑한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화가, 반 고흐

 

사실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겼다고?

 

 

자신의 그림만큼 강렬한 삶을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 생전엔 단 한 작품밖에 팔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영혼의 화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살아생전 영혼이 없는 'SOULLESS"였다고 합니다. 그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눈을 통해 가슴으로 파고드는 색!"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Yellow World!"

빈센트 반 고흐, <프로방스의 건초더미>, 1888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푸른빛이 도는 술이 가져다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요."

- 시인 랭보, 압생트에 대해

 

 

"당신의 취기가 나의 기쁨!"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반 고흐의 초상>, 1887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극단적인 느낌에 이르도록 색을 사용해보는 일이 내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닫는다."

 

 

"온통 노랗게 물든 집!"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

 

 

"카페도 노랗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밤의 카페>, 1888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해바라기의 심장 속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나. 내가 무섭다!"

빈센트 반 고흐,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1889

 

 

 

"이제 와 생각하니 쓸모없는 일 같지만, 나는 너에게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내 작품에 삶 전체를 걸었고 그 과정에서 내 정신은 무수히 괴로움을 겪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내게 그저 평범한 화상이 아니었고 항상 소중한 존재였다."

 

 

"색채에 생명을 담갔다!"

빈센트 반 고흐, <붓꽃>, 1889

 

 

"고흐의 마지막 작품."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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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출생 · 사망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국적          네덜란드

사조          후기인상주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 반 고흐식 후기인상주의가 뭐지?

반 고흐식 후기인상주의는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색을 향한 100℃ 열정.' 인상주의가 찰나의 빛이 보여주는 찰나의 색을 포착하려고 했다면, 반 고흐는 그 색이 어디까지 순수하게 정제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색을 통해 '자연의 생기'와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반 고흐는 현실 이면의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 화가입니다. 그가 사물을 대하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나죠. 그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색을 그대로 베껴 캔버스에 그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사물 속에 숨겨진 본질을 끄집어내려 했습니다. 꽃, 나무, 태양 등 사물이 품고 있는 생기의 핵심을 포착해 색으로 표현했죠. 색을 향한 그의 열정의 기저에는 '색에 나의 감정을 온전히 담고 싶다'는 열망이 깔려 있습니다. 풍경을 그릴 때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 전해준 황홀한 감동을 색에 담고자 했습니다. 자신을 그릴 때는 자신의 감정 자체를 색에 담고자 했죠. 화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뭉크로부터 시작되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반 고흐가 꼽히기도 합니다. 더불어, 20세기 초 앙리 마티스 역시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적 회화를 추구했고, 이것은 야수주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압생트

[ absinthe ]

 

요약 : 향쑥·살구씨·회향·아니스 등을 주된 향료로 써서 만든 술.

 

원료 : 향쑥 · 살구씨 · 회향 · 아니스
분류 : 리큐어
알코올 농도 : 약 40%

 

압생트(absinthe)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많이 마셨던 술로서 쑥의 줄기와 잎을 잘게 썬 다음 고농도의 알코올을 부어 방치한 후 추출하고, 방향 성분이 녹아 있는 이 추출액을 다시 증류하여 제조한다. 압생트는 알코올 도수(45-74%)가 강하고 당분을 포함하지 않는 암록담황색 술로서 아니스의 방향과 약간 쓴맛이 나서 식전주(apéritife)로 많이 이용하였다. 유럽에서는 쑥의 쓴맛으로 인한 약효로서 식욕부진과 위액 분비 촉진제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압생트는 향쑥의 라틴명 압신티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서 강력한 환각작용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예술의 도시인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 소설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창조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압생트를 상습적으로 마실 경우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20세기 초반부터는 압생트 음주를 법으로 금하게 하였다. 압생트에는 튜존(thujone)이라는 테르펜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은 압생트에 독특한 향취를 주는 성분이지만 뇌세포를 파괴하고 환각 상태를 유발한다. 압생트를 상습적으로 마심으로써 생기는 중독을 압시틴 중독증(absin-thism)이라 하며, 멍청한 상태, 정신력 저하, 신경과민, 안신경염 또는 환각 경험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보고되어 있다.

프랑스의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화가인 로트렉과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사람들이 모두 압생트의 중독으로 인한 간질발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자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압생트의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지난 1981년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가 합법화 결정을 내리면서 상당수 유럽 국가들에서 압생트의 생산이 다시 재개된 상태이며, 현재 200개 브랜드의 압생트가 생산되고 있다. 이들 유럽 국가들이 압생트의 생산을 재개한 이유는 압생트가 정신에 미친 영향이 많이 과장되었고 그 위험이 다른 술보다 그다지 높지 않으며, 유해물질의 농도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는 주류 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압생트 [absinthe] (두산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 ~ 1908, 캔버스에 유채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그림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로맨틱한 그림의 정수, 클림트

 

 

사실은 테러를 일삼은

희대의 반항아?

 

 

 

양 머리가 귀엽게 말려 올라간 것과는 달리, 클림트의 표정에서는 어떤 단단함과 결기가 느껴집니다. 다부진 자세만 보아도 반항아의 포스가 제대로 나오는데요. 도대체 그는 붓으로 어떻게 테러를 저질렀다는 걸까요?

 

 

"이것은 천재의 손길!"

구스타프 클림트, <목가>, 1884

 

 

"대단한데 뭔가 이상한 작품?"

구스타프 클림트,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1888

 

"지금도 빈에 가면 서 있는 그것!"

분리주의 전시관 제체시온

 

 

"과거와 분리된 새로운 예술을 위해 싸우자! 제체시온!"

구스타프 클림트, <팔라스 아테나>, 1898

 

 

"어제의 누드는 가짜다! 이것이 진짜 누드다!"

구스타프 클림트,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 1899

 

 

"너의 행동과 예술 작품으로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을 만족시켜라.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의 진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 1899 ~ 1907

 

 

"나에게 가식을 바라지 마라!"

구스타프 클림트, <의학>, 1900 ~ 1907

 

 

"나에게 허영을 바라지 마라!"

구스타프 클림트, <법학>, 1903 ~ 1907

 

 

"왜 죽기 전 아기를 그렸을까?"

구스타프 클림트, <아기(요람)>, 1917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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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출생 · 사망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국적          오스트리아

사조          표현주의

대표작       <키스>, <유디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스토클레 프리즈>, <베토벤 프리즈>

 

◆ 빈 표현주의를 연 클림트의 표현주의

뭉크로부터 시작된 표현주의는 기득권을 쥔 보수적인 화단에서 분리를 선언하며, '새 시대, 새 예술'을 꿈꾼 독일의 전위적 예술가들에게 전격 수용됩니다. 그런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맞는 표현주의를 담대하게 시작한 화가가 바로 클림트입니다.

독일보다 더욱 보수적인 양식이 팽배하던 오스트리아였기에 클림트의 그림은 고전적이면서도 표현적입니다. 그의 그림에선 대부분 여성의 관능미와 성적 욕구가 강조되는데요. 이는 당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입니다. 사회적 금기나 규율에 갇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예술로 밝히겠다는 클림트의 뜻이 단겨 있는 대목이죠.

더불어 그의 그림은 곡선, 황금빛의 장식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당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적극 반영한 결과입니다. 이것 역시 여성의 관능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클림트의 개척은 오스트리아에서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걸출한 푠현주의자들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에곤 실레, <앉아 있는 남성 누드>, 1910, 캔버스에 유채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사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순수 지존?

 

 

'후방주의' 필수! 에곤 실레의 그림은 웬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몰래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그림을 그린 에곤 실레.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했는데, 사진을 보니 평범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순수 지존이었다고요?

 

 

"클림트는 나의 멘토!"

(위)에곤 실레, <다나에>, 1909

(아래)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1907 ~ 1908

 

 

"신예술가는 자립적인 존재여야 한다. 신예술가는 창조자여야 한다. 신예술가는 과거와 미래의 산물 없이도 오로지 혼자서 직접 기초부터 쌓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야 신예술가라 할 수 있다."

- 에곤 실레

 

"자기신뢰야말로 용기의 초석이고, 자기신뢰는 위험이란 요소와 친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략) 용기란 고뇌하며 위험에 맞서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중략) 삶은 거센 물결과 고통을 헤치고 나아가는 투쟁이자,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과의 투쟁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각자에게 선사한 것을 즐기기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합니다."

- 에곤 실레, 후견인이었던 큰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 중

 

 

"누구에겐 외설일지라도, 나에겐 순수한 본능의 표현!"

에곤 실레, <앉아 있는 남성 누드>, 1910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젊음의 초상'을 그리다!"

(위)에곤 실레, <자화상>, 1910

(가운데)에곤 실레, <삼중자화상>, 1911

(아래)에곤 실레, <자화상>, 1911

 

 

"성욕은 인간의 본능! 숨길 이유가 있는가?"

(위)에곤 실레, <여성 누드>, 1910

(아래)에곤 실레, <검은 스타킹을 입은 여자>, 1913

 

 

에곤 실레, <뒤엉켜 누운 두 소녀>, 1915

 

 

"미칠 듯 괴롭다!"

에곤 실레, <예술가가 활동을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1912

 

 

"확 달라진 스타일!"

에곤 실레, <포옹>, 1917

 

 

"예술은 예술가의 삶에서 나오는 것."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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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Egon Schiele

 

출생 · 사망  1890년 6월 12일 ~ 1918년 10월 31일

국적          오스트리아

사조          표현주의

대표작       <앉아 있는 남성 누드>, <죽음과 소녀>, <포옹>, <바람 속의 가을나무>, <죽음의 고통(사투)>

 

◆ 자전적 욕구 분출의 솔직한 일기, 에곤 실레의 표현주의

실레는 클림트의 제자이자 후배입니다. 사실 클림트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자기만의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창조하는 천재성을 보여주어 그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실레는 클림트보다 더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회화에 표출했습니다.

클림트의 예술관과 프로이트 이론에 영향을 받아 성적 본능, 죽음의 공포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러한 주제를 일반화시켜 차분하게 보여주는 클림트와 달리, 실레는 자신의 격정적인 감정과 욕구를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어찌 보면 노골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죠. 누드와 성행위로 가득한 초기 작품과 달리, <죽음과 소녀>, <가족> 등 후기 작품에서는 뭉크처럼 자신의 자전적인 체험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드로잉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입니다. 1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유화 300점, 드로잉 2,000점을 남깁니다. 드로잉 작품수가 압도적이죠. 그의 드로잉은 종이와 캔버스, 펜화와 유화 간에 위계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보통 습작으로 치부되는 드로잉을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도록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것도 에곤 실레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폴 고갱, <언제 결혼하니?(Nafea Faa Ipoipo)>, 1892, 캔버스에 유채

 

 

자연의 삶을 동경했던

폴 고갱

 

 

자연의 삶을 동경했던 폴 고갱

 

알고 보니

원조 퇴사학교 선배?

 

 

 

예술가는 왜인지 멀게만 느껴지고 우리랑 다른 줄 알았는데, 퇴사 선배라고 하니 갑자기 막 가깝게 느껴지고 친한 척하고 싶어집니다. 예사롭지 않은 복장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폴 고갱. 그의 퇴사 스토리 한번 들어볼까요?

 

 

"고갱의 은밀한 이중생활!"

폴 고갱, <파리 카르셀 거리, 화가의 가정>, 1881

 

 

"지금 나는 용기도 재능도 부족하다. 곡물 창고로 가서 목을 매는 게 낫지 않은가 매일 자문한다. 그림만이 나를 지탱해준다."

- 폴 고갱

 

 

"당시 고갱의 심정이 그대로······."

폴 고갱,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 1885

 

 

"자네는 파리를 좋아하지만, 나는 원시와 야생이 살아 있는 시골을 사랑하네."

- 폴 고갱

 

 

"간절히 원하면 영감이 눈앞에 펼쳐진다."

폴 고갱, <예배 뒤의 환상>, 1888

 

 

"야생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파나마로 가려고 해. 그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한가롭고 비옥한 땅이라고 들었어. 나는 물감과 붓을 가지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기운을 찾을 거야."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길이리라.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길로 떠나자. 그 길은 야생의 시를 간직하고 있다.."

 

 

 

"드디어 나의 세계를 찾았다!"

폴 고갱, <마리아를 경배하며(Ia Orana Maria)>, 1891

 

 

"하나의 삶이 단 한 번 명멸한다는 것!"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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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Paul Gauguin

 

출생 · 사망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

국적          프랑스

사조          후기인상주의

대표작       <황색의 그리스도>, <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 <마리아를 경배하며(la Orana  MAria)>, <타히티의 여인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고갱식 후기인상주의가 뭐지?

고갱은 회화에서 초월적인 미지의 무안가를 추구했습니다. 기존에 없던 전혀 새로운 회화 창조를 열망했죠. 그런 고갱 미술의 핵심 키워드는 '원시성'입니다. 태초의 원시성을 간직한 곳으로 가 문명의 때가 0.01퍼센트도 없는 순수성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인상주의의 짧은 붓 터치를 거부하고, 사물에 진한 윤곽선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강렬하고 대담하게 색면을 칠해 형태를 단순화(클루아조니슴)시켰습니다.

또 인상주의까지 이어져온 외부세계에 대한 단순 재현을 거부하고, 그리는 모든 것에 화가의 주관적 느낌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화가가 색과 형태를 자유롭게 변화 ·왜곡시키는 시발점이 됩니다. 화가의 감정을 담아 새빨간 나무를 그리고, 화가가 생각한 의미를 담아 나무의 형태를 변형시키게 된 거죠. 고갱의 이런 생각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표현주의, 야수주의, 원시주의, 추상주의 회화로 이행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에두아르 마네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마네

 

사실은 거장들이

업어 모신 갓파더?

 

 

 

수많은 패러디를 쏟아내며 우리에게 더 친숙해진 작품 <올랭피아>.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게 누구인지 영 헷갈립니다. 사실 마네는 이런 굴욕을 당할 인물이 아닌데요. 그를 제대로 알고 나면, 우리가 몰라봬서 죄송하다고 인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객들은 영안실에 들어서듯이 마네의 부패한 <올랭피아> 앞으로 몰려들고 있다."

 

"우리의 모든 르네상스는 <올랭피아>에서 시작되었다."

 

"각 시대는 자신만의 자세와 시선, 몸짓을 지니고 있다."

 

"그림을 배우려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지만, 만약 목표가 현재의 아름다움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필요한 훈련일 뿐이다."

 

 

 

"이것은 표현의 신세계!"

(위)가츠시카 호쿠사이, <맑은 아침의 신선한 바람 또는 붉은 후지산>, 1831

(아래)가츠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의 큰 파도>, 1831

 

 

"마네의 첫 번째 도발!"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오마주 작품(라파엘로의 작품을 라이몬디가 모사한 작품 중 일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1515 ~ 1517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위)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아래)티치아노 베첼리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자연이 힘찬 정열에 넘쳐

날마다 괴물 같은 아이를 배던 그 시절,

나는 젊은 여자 거인 곁에 살고 싶었네

여왕 발밑에서 사는 음탕한 고양이처럼

- 샤를 보들레르, <여자 거인> 중에서

 

 

 

"마지막 수수께끼는 어디에?"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 바>,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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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출생 · 사망  1832년 1월 23일 ~ 1883년 4월 30일

국적          프랑스

사조          분류되지 않음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발코니>, <폴리베르제르 바>

 

◆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 마네가 잇다

마네는 사실주의(19세기 중반)에서 인상주의(19세기 후반)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는 마네보다 열세 살 많은 선배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창시했는데요. 쉽게 말해, '내가 눈으로 본 것만을 그리겠다'는 것입니다.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 등 관념적 주제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본 현실'을 주제로 택하죠. 또, 법칙처럼 답습하던 관념적 표현 기법에서 벗어나 '지금 내 망막에 비치는 것'을 참신하게 그립니다. 철저히 전통을 거부하는 사실주의는 회화의 주제와 표현 모두에 지각 변동을 일으킵니다.

마네도 이런 사실주의 정신 아래 그림을 그렸습니다만, 주제는 물론 표현에서 쿠르베보다 더 극단적인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평평하게 그리기'입니다. 야외의 강한 햇빛에서 물체는 입체감 없이 평평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에 마네는 그렇게 그립니다. 이런 마네의 대담한 시도는 모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모네는 마네보다 더욱 심도 있게 '야외의 햇빛'이 야기하는 효과를 탐구했고, 그 결과 인상주의가 탄생합니다. 이렇게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가는 길을 잇습니다.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 1873, 캔버스에 유채

 

 

로맨틱 풍경화의 대명사

클로드 모네

 

 

로맨틱 풍경화의 대명사, 모네

 

 

알고 보니

거친 바다와 싸운 상남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잔뜩 폼 잡고 있는 모네. 온몸으로 상남자의 포스를 내뿜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무심한 듯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아닐까요? 그런데 아무리 상남자라지만, 도대체 어떻게 바다와 싸웠다는 걸까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열여덟 살 모네!"

클로드 모네, <루엘 풍경>, 1858

 

 

"뜨거운 달빛!"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운하 위 달빛>, 1876

 

 

"일단 마네를 따라 그려보자!"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1867

 

 

"내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아.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터리야. 좌절과 치욕, 시대 그리고 더 큰 좌절."

- 1868년, '친구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장님이 막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

 

 

"미술 신대륙에 첫 발을 딛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흐르는 시간 속에 같은 것은 없더라!"

(위) 클로드 모네, <늦여름에 건초더미, 아침 효과>, 1891

(가운데) 클로드 모네, <아침에 건초더미, 눈 효과>, 1891

(아래)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눈 효과>, 1890 ~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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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출생 · 사망  1840년 11월 14일 ~ 1926년 12월 5일

국적          프랑스

사조          인상주의

대표작       <인상, 해돋이>, <생-라자르 역>, <건초더미> 연작, <수련> 연작, <지베르니 부근의 센 강변>

 

◆ 빛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모네의 '인상주의'

인상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오직 빛이 보여주는 세상을 솔직하게 포착해 그린다.' 인상주의 이전에 고전주의 회화는 사물 고유의 색과 형이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 색과 형을 그렸던 것이죠. 인상주의는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의 고유한 색과 형은 없으며,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솔직한 시각의 반영입니다. '내 눈으로 본 것만 그리겠다'는 사실주의가 한 단계 진화한 사조라고 할 수 있죠.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색과 형을 보여주는 햇빛을 포착하기 위해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햇빛의 변화로 시시각각 변하는 색과 형을 즉각 반영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원색을 바로 썼으며, 붓질은 점찍 듯 짦고 빠르게 했습니다. 또한 인상주의는 사진 기술의 근간인 광학이 반영되었습니다. 1874년 최초의 인상주의전이 초상 사진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나다르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 전문 사진가였습니다.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자들은 이런 사진가와 관계를 맺으며 사진 제작의 원리(광학)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회화 작업에 반영한 것입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캔버스에 유채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접수한

폴 세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접수한 세잔

 

알고 보면 그 속사정은

맨땅에 헤딩맨?

 

 

 

무거운 의자도 한 손으로 번쩍! 사과 하나로 미술계를 평정했다고 해서 도대체 그 비결이 뭔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세잔 할아버지, 힘이 좋은 것 같군요. 그래서 지치지 않고 맨땅에 헤딩도 가능했던 걸까요?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의욕적인 그림!"

폴 세잔, <모던 올랭피아>, 1870

 

 

"나 이제 감 잡았다!"

폴 세잔, <에스타크의 바다>, 1878 ~ 1879

 

 

 

"나는 견고하고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었다. 박물관의 예술처럼."

- 세잔

 

 

"나는 겉이 아닌 속을 보겠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정물로 수천수만 번 훈련해 자연의 속살을 담고 싶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892 ~ 1895

 

 

"경지에 오르면 꼭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폴 세잔, <대 수욕도>, 1906

 

 

 

"정신적인 만족, 그것은 작업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것."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자연에 불어넣는 풍부하고 멋진 색이 내 그림에는 부족하다."

- 세상을 떠나기 약 두 달 전,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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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Paul Cezanne

 

출생 · 사망  1839년 1월 19일 ~ 1906년 10월 22일

국적          프랑스

사조          후기인상주의

대표작       <사과와 오렌지>, <생트 빅투아르 산>, <목욕하는 사람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 후기인상주의가 뭐지?

후기인상주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인상주의를 거부한 인상주의.' 모네가 주창한 기존 인상주의를 일부분 긍정하면서도, 특정 부분을 부정하며 새로운 개선책을 내놓은 인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잔, 고갱,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죠. 같은 사조로 분류된다고 해서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인상주의에서 찾은 문제점들이 각자 달랐기에 해결책이 달랐고, 이를 독자적인 화풍으로 개척했죠.

 

◆ 세잔식 후기인상주의가 뭐지?

인상주의는 과거의 것을 낡은 관습으로 보고, 이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세잔은 과거의 것 중에서도 계승해야 할 유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인상주의에 '과거의 소중한 유산'을 불어넣어 인상주의를 완성하려고 햇습니다. 찰나의 빛에 집중하면서 인상주의가 잃어버렸던 그림 속 '조화와 균형', '자연의 본질'을 다시 살려내려고 했죠. 이것이 바로 세잔식 후기 인상주의입니다. 이런 세잔의 노력은 20세기 초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캔버스에 유채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미술 천재'로 불리는 피카소

 

알고 보면

선배의 미술을 훔친 도둑놈?

 

 

 

아니, 잠깐잠깐! 20세기 최고의 거장 피카소가 도둑놈이라뇨? 근데 그 와중에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 식탁 앞에 앉아 빵으로 손가락을 만든 모습이란! 귀여우면서도 상황 파악 못하고 있는 피카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문제작!"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여기에 세잔이 있다고?"

앙리 마티스, <푸른 누드>, 1907

 

 

 

"역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잇어 아버지와 같은 사람."

- 피카소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혐오한다. 회화는 탐구이며 실험일 뿐이다."

- 피카소

 

 

"너무 많이 쪼갰나?"

파블로 피카소, <시인>, 1911

 

 

 

"나만의 목표를 추구하며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다. 실험, 자유화, 색, 에너지로서의 색, 빛으로서의 색에 대한 문제들."

 

 

"침대가 흔들리고 목에선 조금 높은 톤의 울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색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

앙리 마티스, <가지가 있는 실내>, 1911

 

 

"마티스! 땡큐!"

파블로 피카소, <기타>, 1913

 

 

"기본적으로 오직 마티스만 존재할 뿐이지."

 

 

"우리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해.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잃게 될 테니까."

- 앙리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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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출생 · 사망  1881년 10월 25일 ~ 1973년 4월 8일

국적          스페인

사조          입체주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블라르의 초상>, <꿈>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출생 · 사망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

국적          프랑스

사조          야수주의

대표작       <삶의 기쁨>, <마티스 부인의 초상>, <붉은 색의 조화>, <춤>

 

◆ 마티스의 야수주의?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는 19세기 말까지 조금씩 변화를 거듭하는데요. 그럼에도 '회화는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완전히 깨부순 화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 두 화가가 그 명제를 깨부쉈습니다.

마티스는 자연에서 보이는 색을 재현하는 기능에서 '색채'를 해방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은 보통 파란색이지만, 화가의 감정에 따라 분홍색으로 그리는 식이죠. 마티스는 감정을 표출하는데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색이 가진 고유한 표현성에 몰두했기에 강렬한 색채가 특징이죠.

피카소는 자연에서 보이는 형태를 재현하는 기능에서 '형태'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핵심 전략은 '다시점(多時點)'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시점으로 대상을 보고 그리던 전통적 관념을 파괴하고, 다양한 시점에서 본 대상의 부분을 모아 하나의 화면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사물을 불변하는 형태가 아닌, 파편처럼 분해해 재조합시킨 것이죠.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캔버스에 유채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샤갈

 

사실은 밀애를 나눈

또 다른 사랑이 있었다?

 

 

샤갈도 밀애 사실이 발각되어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붓은 놓지 않았네요. 역시 프로답습니다.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샤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 다른 사랑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지는데요.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중략) 나도 벽에 기대앉아 일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었을까? 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아야 했을까? 나는 내 손을 보았다. 내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그래, 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 (중략)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파리에서 나는 미술학교를 다니지도, 선생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그 도시는 그 안의 모든 것, 하루의 모든 순간들이 그 자체로 선생이었다."

 

 

"파리를 흡수해 고향을 그리다!"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

 

 

"샤갈은 매우 재능 잇는 색채주의자이다. 그는 신비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 상상력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 헌신한다. 그의 예술은 매우 감각적이다."

- 기욤 아폴리네르(피카소의 친구로 입체주의 탄생에 큰 영감을 준 시인)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늙고 추한 노인이지만, 샤갈의 눈에는 천사다."

마르크 샤갈, <밝은 적색의 유대인>, 1915

 

 

"정말 절대적으로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

 

 

"슬프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마르크 샤갈, <전쟁>, 1964 ~ 1966

 

 

"만일 화가가 유대인이고 인생을 그리려 한다면, 어떻게 그가 유대인적인 요소들을 그의 작품에 노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뛰어난 화가라면, 좀 더 많은 양의 유대적인 요소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기 이후 나는 성서에 사로잡혀 있다. 나에게 성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위대한 시정의 원천이다."

 

 

"사랑과 평화의 꿈을 색채로 노래하다!"

마르크 샤갈,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의 파라다이스>, 1961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이며, 내가 전달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 비밀입니다. (중략) 이제 나는 그것들을 이곳에 두어 여기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평화와 분위기, 삶의 안식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 작품들이 단지 한 개인의 꿈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꿈을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이곳에 오는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내 색채와 선이 꿈꿔왔던 사랑과 인류애의 이상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나 여기서 상냥하고 평화롭게 그 꿈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는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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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출생 · 사망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

국적          러시아(프랑스로 귀화)

사조          분류되지 않음

대표작       <생일>, <도시 위에서>, <나와 마을>, <농부의 삶>, <흰 십자가>, <추락하는 천사>, <성서 이야기> 연작

 

 

◆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 마르크 샤갈

모든 것을 흡수한 후, 독보적인 자기만의 것을 창조하는 천재성!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화가가 바로 샤갈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한 가지가 아닌 여러 사조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샤갈이 파리에 갔던 당시 유행했던 야수주의, 입체주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분명히 어디에 속해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샤갈만의 '독자성'이 있습니다. 독자성은 극소수의 재능 있는 예술가만이 획득할 수 있는데요. 샤갈과 외부에서 뭔가를 얻자마자 자기만의 것으로 재해석해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샤갈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다',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는 샤갈 특유의 기질이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무의식으로 예술을 하자'는 초현실주의들이 샤갈을 영입하려 러브콜을 보냈지만, 샤갈은 '무의식이 아닌 추억을 그린다'는 이유를 들며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또, 예술의 영감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끄집어내려는 샤갈의 예술관에서 독자성의 비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타인이 만든 작품이나 사조를 추종하는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샤갈은 자기 내면의 지성과 감성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샤갈은 자기만의 독자성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Ⅶ>, 1913, 캔버스에 유채

 

 

 

최초의 추상미술을 창조한

바실리 칸딘스키

 

 

최초의 추상미술 창시자, 칸딘스키

 

알고 보면 최강 연애 찌질이?

 

 

 

저 고양이 지금, 칸딘스키의 속도 모르고 "응"이라고 대답한 거 맞죠? 교묘하고 영리한 고양이 같으니, 그나저나 위대한 화가인 줄만 알았던 칸딘스키에게서 찌질한 구남친의 스멜이 풍깁니다. 과연 그의 연애사는 어땠을까요?

 

 

"나는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나는 뭔가 동경하는데, 무엇에 대한 것일까?

 

 

"넌 학생으로서는 빵점이야. 너에게 가르칠 게 없어. 넌 내면에서 꿈틀대는 것만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넌 재능을 타고났어.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네 재능을 보호하고 키워서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 바실리 칸딘스키,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서로가 서로를 그리며 배우며!"

(위) 바실리 칸딘스키, <그림을 그리는 가브리엘레 뮌터>, 1903

(아래) 가브리엘레 뮌터, <바실리 칸딘스키의 초상>, 1906

 

 

"부화 중인 서로의 예술 세계!"

(위) 바실리 칸딘스키, <푸른 산>, 1908

(아래) 가브리엘레 뮌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1908

 

 

"서로의 개성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위) 바실리 칸딘스키,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910

(아래) 가브리엘레 뮌터, <보트 타기>, 1910

 

 

"난 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Ⅳ>, 1911

 

 

 

"화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말할 수 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대하게 되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것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 그림에는 주제가 없으며 유추할 만한 어떤 오브제도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화면은 색채의 찬란한 얼룩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나의 그림이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뚜렷해졌다. 사물의 객관성과 묘사는 나의 그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것들은 나의 그림에서 해롭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경험들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여기에 쏟은 노력과 작업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 '경험들'은 지하창고에 처박혀 녹이 슬어간다. 인생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미술로부터도 버림빋았다."

 

 

"그녀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가브리엘레 뮌터, <새들의 아침식사>,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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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출생 · 사망  1866년 12월 16일 ~ 1944년 12월 13일

국적          러시아

사조          추상주의

대표작       <즉흥> 시리즈, <인상> 시리즈, <구성> 시리즈

 

 

 

가브리엘레 뮌터 Gabriele Munter

 

출생 · 사망  1877년 2월 16일 ~ 1962년 5월 19일

국적          독일

사조          표현주의

대표작       <자화상>,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장미꽃과 검정 가면>

 

◆ 최초 추상회화 창조자, 칸딘스키의 추상

칸딘스키의 회화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표현주의 화가들은 외부세계의 색과 형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는데요. 칸딘스키는 여기에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굳이 외부세계에 대한 모방이 필요한가? 오히려 내 순수한 감정 표현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아닌가?' 칸딘스키의 추상회화는 이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해답을 찾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주로 자연에서 느낀 감정, 음악을 들으며 느낀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려고 노력하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미술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외부의 가시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정신적인 것을 담으려고 했죠. 그것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 세계라고 보앗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미술이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추상미술' 대신 '실재적 미술'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레디메이드

 

 

현대미술의 신세계를 연

마르셀 뒤샹

 

 

현대미술의 신세계를 연 뒤샹

 

알고 보니

몰래카메라 장인?

 

 

 

담배를 피우면서 한껏 치명적인 느낌을 뽐내는 뒤샹. 사진을 보니 그가 몰래카메라 장인이라는 게 잘 어울리는 것도 같습니다. 개그맨 이경규도 울고 갈 뒤샹의 몰래카메라 실력이 궁금해지는데요. 그는 도대체 누구를 속였던 걸까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입체주의'"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Ⅱ>, 1912

 

 

"내가 원하는 것은 방세를 내고, 식비를 대고, 여가 시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작고도 조용한 직업이었어. 예술가들의 세계에 질려버렸거든. 정말 지긋지긋했지."

 

 

"이제 회화는 끝났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 뒤샹, 친구 브랑 · 쿠시(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에게

 

 

"손재주에 구속당하는 예술가의 처지를 극복하고 지적인 지위를 얻기 위한 일이었어."

 

 

"1913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부엌에서 쓰는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고정시켜서 그것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었어. (중략) 다른 그 어떤 생각도 없었어. 그건 그냥 심심풀이였지."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

 

 

"<자전거 바퀴>와 시크한 뒤샹!"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몰래카메라 풍자쇼의 주인공!"

마르셀 뒤샹, <샘>, 1917

 

 

 

"<샘>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매우 유용한 물건일지 모르지만, 미술 전시장은 그에 알맞은 자리가 아니며 일반적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 독립예술가협회 회장

 

 

 

《눈 먼 사람》 2호에 실린 익명의 사설

 

 

"그들은 6달러를 내면 어떤 예술가든 전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리처드 머트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어떤 논의도 없이 이 작품은 사라졌고 전시되지 않았다. 머트의 <샘>이 거부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음란하고 천박한 것으로 봤다.

2.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이며, 위생용품일 뿐이라고 봤다.

<샘>을 음란하게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욕조가 음란하지 않듯 머트의 <샘> 또한 음란하지 않다. 그것은 배관공의 진열대에서 매일 볼 수 있는 붙박이 세간에 불과하다.

머트가 <샘>을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관점과 제목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잇던 기능이 상실되는 장소에 가져다놓은 것이다. 그는 이 오브제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위생용품이기에 전시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어이없는 생각이다. 지금껏 미국이 만든 유일한 예술 작품은 위생용품과 다리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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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출생 · 사망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

국적          프랑스

사조          다다, 초현실주의

대표작       <샘>, <큰 유리>, <L.H.O.O.Q>, <주어진 것 : 1. 폭포, 2. 점등용 가스>

 

◆ 현대미술 창조자, 마르셀 뒤샹

뒤샹은 지금의 현대미술을 낳은 혁명적 창조자입니다. 눈으로 보는 미술이라는 관념을 파괴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미술(개념미술)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한 예술가죠. 그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레디메이드'입니다. 그 덕분에 미술관에 가면 일상에서 흔히 쓰는 물건을 활용한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죠.

이외에도 뒤샹이 미술에 미친 영향은 무척 큽니다. 그는 원작의 유일성을 거부하며 <샘>을 다량 복제해 판매했는데요. 심지어 대표작 수십 점을 귀여운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방에 넣어 <가방형 상자>를 만들었고, 이를 일반형/고급형 한정판으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런 행위는 1960년대 팝아트 탄생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축음기 위에 채색한 원반이 빙글빙글 도는 요상한 시각 장치를 만들었는데요. 이는 1960년대 시각적 착시효과를 이용한 옵아트(Optical Art)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뒤샹이 약 20년간 비밀리에 작업했지만 그의 바람대로 사후에 공개된 작품 <주어진 것>. 관객이 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작품인데요. 이는 설치미술의 시대를 앞서 예견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 뭐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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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르 클레지오,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백선희 옮김, 다빈치, 2005

안드레아 케텐만, 《프리다 칼로》,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5

크리스티나 버루스, 《프리다 칼로》, 김희진 옮김, 시공사, 2009

클라우디아 바우어, 《프리다 칼로》, 정연진 옮김, 예경, 2007

 

에드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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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에바 디 스테파노, 《구스타프 클림트》, 김현주 옮김, 예담, 2006

니나 크랜젤, 《구스타프 클림트》, 엄양선 옮김, 예경, 2007

타탸나 파울리, 《클림트》, 임동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에곤 실레

구로이 센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김은주 옮김, 다빈치, 2003

이자벨 쿨, 《에곤 실레》, 정연진 옮김, 예경, 2007

 

폴 고갱

가브이엘레 크레팔디, 《고갱》, 하지은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피오렐라 니코시아, 《고갱》, 유치정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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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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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기파랑, 2009

스테파노 추피, 《마네》, 최병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함유선 옮김, 밝은 세상, 2004

샤를 보들레르, 《샤를 보들레르 :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정혜용 옮김, 은행나무, 2014

 

클로드 모네

김광우,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미술문화, 2002

피오렐라 니코시아, 《모네》, 조재룡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7

 

폴 세잔

류승희, 《안녕하세요, 세잔 씨》, 아트북스, 2008

 

파블로 피카소

그자비에 지라르, 《마티스 : 원색의 마술사》, 이희재 옮김, 시공사, 1996

잭 플램, 《세기의 우정과 경쟁 : 마티스와 피카소》, 이영주 옮김, 예경, 2005

류승희, 《안녕하세요, 세잔 씨》, 아트북스, 2008

하요 뒤히팅, 《파블로 피카소》, 엄미정 옮김, 예경, 2009

캐서린 잉그램, 《This is Matisse》, 이현지 옮김, 어젠다, 2016

 

마르크 샤갈

인고 발터 외, 《마르크 샤갈》, 최성욱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5

김종근, 《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 평단아트, 2004

마리 엘렌 당페라 외, 《샤갈》, 이재형 옮김, 창해, 2000

 

바실리 칸딘스키

모니카 부셰이, 《위대한 스캔들》, 조현천 옮김, 예담, 2002

지빌레 엥겔스 외,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홍진경 옮김, 예경, 2007

김광우, 《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마르셀 뒤샹

마르크 파르투슈, 《뒤샹, 나를 말한다》, 김영호 옮김, 한길아트, 2007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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