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06 화가의 출세작
이유리 지음
2019, 서해문집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3006
신천역스마트도서관
650.9
이66ㅎ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그림 이야기
그림 열 장을 커피 두 잔 값에 팔아야 했던 반 고흐의 예언
월드 스타의 마음을 사로잡은 알폰스 무하의 '대타' 포스터
청와대에 초대받은 아흔의 노화백, 전혁림이 사랑한 코발트블루
잡역부 헨리 다거의 집에서 발견된 기묘하고 섬뜩한 수채화
무명의 시간을 건너, 세상에 한 확을 그은
위대한 예술가 18인의 첫 번째 명작
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의 시작을 엿보다
이제는 누구나 알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던, 거장의 탄생을 알린
그림들이 있다. 이름 없는 예술가에게 단번에 눈부신 명성과
화려한 성공을 안겨 준 이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어떻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알폰스 무하에서 전혁림까지, 불확실한
삶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18인의 예술가가 한 조각 돛단배를
띄우는 심정으로 내놓은 그림들. 그 떨리는 첫걸음에 담겨 있는
가장 순수한 열망과 위대한 꿈을 읽는다.
이
유
리
어릴 적부터 미술 교과서나 신문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오려 내어 스크랩하던 아이였다. 어학연수를 위해 갔던 영국에서 영어 공부 대신 런던에 있는 갤러리를 훑고 다녔고, 영어 대신 머릿속에 미술지식만 꾹꾹 담고서 돌아왔다. 신문사 사회부 경찰출입기자가 되었지만 미술 전문잡지를 보고 있는 걸 선배에게 들켜 “문화부 가고 싶은 거니?”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결국 운명처럼, 미술 분야의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마티스가 그랬던가. “그림은 책꽂이에 있는 책과 같다”고. 책이 책장에 꽂혀 있을 땐, 고작 몇 단어의 제목만 보일 뿐이다. 그림이 품고 있는 풍부한 세계를 알리기 위해, 앞으로도 책꽂이에서 그림을 꺼내어 독자들에게 직접 펼쳐 주는 ‘친절한 손’으로 살고 싶다.
지은 책으로 《화가의 마지막 그림》 《검은 미술관》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등이 있고, 《빛나는 아이: 천재적인 젊은 예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를 옮겼다.
차례
프롤로그
1부 압도적 신세계
월드 스타가 사랑한 ‘르 스틸 뮈샤’ | 알폰스 무하
나는 사회의 한계점에 살고 있어요 | 타마라 드 렘피카
아웃사이더의 기묘한 왕국 | 헨리 다거
튈 수만 있다면, 남달리 보일 수만 있다면! | 살바도르 달리
처음으로 빛을 불러낸 사람 | 조르주 피에르 쇠라
우리는 잠재적인 시체다 | 프랜시스 베이컨
2부 기나긴 터널의 끝
물랭 루주를 사로잡은 남자 | 앙리 드 툴루즈-로드레크
언젠가는 모두가 그를 알게 되리라 | 빈센트 반 고흐
불온한 농민과 위대한 혁명가 사이에서 | 장 프랑수아 밀레
노르웨이에서 온 태풍 | 에드바르 뭉크
근대를 가져다준 횃불 | 오귀스트 로댕
혹독한 길을 온몸으로 통과한 | 이쾌대
3부 아무도 가지 않은 섬
아름답고 싶다, 그녀처럼 |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녹아내리고 용솟음치고 뚝뚝 떨어지는 | 조지아 오키프
동양에서 온 도련님의 반자본주의 퍼포먼스 | 백남준
예순다섯의 활화산 | 전혁림
독일을 재현하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이국땅을 뒤흔든 야심찬 실험 | 엘 그레코
참고 문헌
월드 스타가 사랑한 '르 스틸 뮈샤'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 <지스몬다> 1894년 채색석판화 74.2×216cm 무하 재단
1892년 즬 셰레가 제작한 '레노의 시각극장(파리 그레뱅 박물관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 광고 포스터
테오도라 황후로 분장한 사라 베르나르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을 계몽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일하러 가는 그들은 멈춰 서서 포스터를 보게 될 것이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바란다.
-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 <동백꽃 아가씨(춘희)> 1896년 채색석판화 76.2×207.3cm 무하 재단
알폰스 무하 <뫼즈 지방 맥주 홍보 포스터> 1897년 채색석판화 104.5×154.5cm 무하 재단
아돌프 레옹 윌레트 <무하의 그림을 성화로 착각한 소녀> 1899년 24.8×33.7cm 캐리커처 개인 소장
나는 사회의 한계점에 살고 있어요
타마라 드 렘피카
타마라 드 램피카 <발코니에 있는 키 제트> 1927년 캔버스에 유채 80.8×130cm 프랑스 퐁피두 센터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 캔버스에 유채 90×116cm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1911년, 타마라 드 렘피카가 열세 살 되던 해의 사진
타마라 드 램피카 <부카르 박사의 초상> 1928년 캔버스에 유채 75×135cm 개인 소장
부카르 박사는 설사치료제 '락테올'을 개발한 의사이자 학자였다.
빅토르 마르그리트의 소설 《라 가르손느》의 표지
"보수적인 부르주아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난 열아홉 살의 소르본대학교 여학생 모니크 레르비에Monique Lerbier는 어느 날 자신의 약혼자에게 숨겨 놓은 애인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된다. 모니크는 약혼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 익명의 남자를 만나다 결국 성폭행을 당한다. 1년 후 모니크는 긴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술과 마약을 즐기며 여러 과감한 성적 모험을 감행하던 모니크는 자신을 존중해 주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 준 조르주 블랑세Georges Blancher라는 남성을 만나게 됨으로써 광기와 죽음의 유혹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 빅토르 마르그리트Victor Margueritte의 소설 《라 가르손느La garçonne》 중
타마라 드 램피카 <아름다운 라파엘라> 1927년 캔버스에 유채 61×38cm 개인 소장
타마라 드 램피카 <녹색 부가티를 타마라> 1929년 목판에 유채 27×35cm 개인 소장
이 여인은 자유롭다!
아웃사이더의 기묘한 왕국
헨리 다거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226×55.8cm 개인소장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140×60.9cm 개인소장
다거가 손으로 제본한 《비현실의 왕국》
재현한 헨리 다거의 방
데이비드 버글런드가 찍은 헨리 다거의 사진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91.4×55.8cm 개인 소장
전리품을 가지고 도망치는 비비언 자매들.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60.9×45.7cm 개인 소장
다거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초현실적인 존재 블렌긴.
트레이싱 기법을 써서 그린 다거의 그림들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60.9×48.2cm 개인 소장
카펫에 몸을 말고 탈출을 시도하는 소녀들을 그린 장면.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60.9×48.2cm 개인 소장
헨리 다거, 먹지 트레이싱에 연필과 수채 114.3×60.7cm 개인 소장
"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혐오했고 그들을 죽여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친구였던 적이 없으며, 그들의 적이다. 그들이 현재 죽은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 다거가 쓴 자서전 중
아기들은 나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세상보다도 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아기들을 사랑스럽게 안아 주고 사랑해 준다. 당시에는 더 큰 소년들이나 심지어 어른들도 아기들을 성적으로 괴롭히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쳤다.
- 《비현실의 왕국》에 등장하는 '아동 독립 선언' 중
튈 수만 있다면, 남달리 보일 수만 있다면!
살바도르 달리
그럴 즈음 나는 갓 전속 계약을 맺었던 화상 카미유 괴망스의 전보를 받았다. 계약 조건은 3000프랑에 나의 여름 작업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1929년) 9월이 되면 그의 화랑에서 내 작품들을 전시하고 나는 판매가의 일정 비율을 받기로 했다. 하여간에 그는 3000프랑으로 내 작품 석 점을 골라서 소유할 수 있었다. ··· 온다는 전보를 보냈던 괴망스가 피게라스(달리의 고향)에 도착했다. 그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내 그림 <음산한 유희>를 보고 열광했다.
- 달리의 자서전 《나는 세상의 배꼽이다》 중
살바도르 달리 <음산한 유희> 1929년 판지에 유채와 콜라주 30.3×44.4cm 개인 소장
나는 거짓말을 둘러대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했다. 즉, 초현실주의 그룹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식분증 환자라고 실토한다면 그들이 보기에 나는 더 비범하고 흥미로운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의 너무나 분명한 어조와 얼굴에 드러난 긴장된 표정, 고고하고 무결한 정직성 때문에 나는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맹세컨대 나는 식분증 화자가 아닙니다. 그런 유형의 착란에 대해 나도 당신만큼이나 혐오감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분뇨적 요소들이 피나 메뚜기에 대한 나의 공포심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주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 저서전에서
내 작품을 본 브르통(Andre Breton, 초현실주의 주창자)은 분변학적인 요소에 두려움을 느꼈다. 놀라웠다. 나는 똥으로 데뷔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말해, 이것은 내게 황금을 가져다줄 행운의 전조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분변적인 요소가 이 운동에 부富를 가져다줄 것이라며 초현실주의자들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아량 있게 권한 똥을 마다한다면 그 보물을 나 혼자서 갖는 수밖에.
- 달리, 《어느 천재의 일기》 중
살바도르 달리 <성심> 1929년 판지에 먹 51.1×68.3cm 프랑스 퐁피두 센터
아들이 내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들 권리는 없소. (달리 가족의 별장이 있는) 카다케스는 내 영혼의 피난처이고 ··· 무엇보다도 내 아내가 묻힌 곳이오. 아들이 같잖은 행동으로 그곳을 더럽힌다면 끝장날 것이오.
- 달리의 아버지, 달리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삭발한 머리 위에 성게를 얹은 달리. 1929년 루이스 부뉴엘이 찍은 사진
필립 할스먼이 촬영한 달리, 1953 ~ 1954년
- 호화로운 호텔에서 사는 사치스러운 생활이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죽이지는 않나? (보스케)
- 정반대다. 특급호텔에서는 버튼만 누르면 문이 열리고 원하는 무엇이든지, 예를 들면 영화표까지도 서비스해 준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조직적으로 해결된다. 그런 이상적인 조건에서 광기는 최대한 발현된다. (달리)
- 프랑스 비평가 알랭 보스케와의 대담에서
나는 항상 생각을 한발 앞지르는 달리의 재치 있는 유머를 좋아하고, 그의 콤플렉스와 진지함, 거침없는 상상력을 좋아하며, 달리의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을 좋아하고··· 가끔은 그의 그림도 좋아했다.
- 사진작가 게오르그 브라사이Geroge Brassai
달러가 된 달리의 콧수염, 1954년 필립 할스먼이 찍은 사진
처음으로 빛을 불러낸 사람
조르주 피에르 쇠라
조르주 피에르 쇠라,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4 ~ 1886년 캔버스에 유채, 308×207.6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인상파 사람들은 이미 색채 분해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분해는 자의적으로 행해졌다. 예를 들면 풍경 속의 어떤 곳에 적색의 감각을 도입시켜 본다든가 빛이 있는 부분에 녹색을 더해 본다는 식이었다. 이에 반해 쇠라, 피사로, 시냐크 등의 화가는 색조를 의식적,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할한다. 조르주 쇠라는 처음으로 이 새로운 회화의 기법을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 무능함을 손끝의 재주로 교묘하게 속이는 모든 이들은 쇠라의 충실성에 놀라 도망칠 것이다. 이것은 진짜 '화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다. 작업실의 사기꾼들은 속임수 카드놀이나 야바위를 해야 할 것이다.
- 1886년 9월 벨기에 잡지 <라르 모테른>에 실린 '1886년의 인상파 화가들'에서 쇠라에 대해
1888년, 29세의 쇠라
쇠라는 내게 몇 년간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받은 수업, 상투적이고 단조로운 실습으로 채워졌던 날들을 조금씩 들려줬다. 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토층 아래에 감춰진 보석들을 찾아내듯이, 다른 화가들을 연구하면서 길을 찾아냈다고 이야기했다.
- 벨기에의 시인 에밀 베르하렌Emile Verhaeren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63cm 프랑스 마르모탕 미술관
인상주의와 인상파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작품으로,
해 뜨는 순간의 시각적 인상을 포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유화물감으로 대충 그린 스케치처럼
보인다. 쇠라의 점묘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나는 스케치를 그려 봄으로써 전체 그림의 구도를 가늠한다. 벽을 채우는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에 수십만 개의 색점을 찍는 고통스러운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예상되는 문제들을 점검한다.
- 쇠라, 스케치의 중요성에 대해
프랑스의 화학자 미셀 외젠 슈브뢸이 1864년에 발표한 색상환
어떤 이들은 내 그림 속에서 시를 본다. 나는 오직 과학이 보인다.
- 쇠라
키가 크고, 부끄럼을 잘 타면서도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소녀 같은 부드러움에 사도와 같은 마음씨를 겸비한 젊은이를 상상해 보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해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온후하면서도 모든 것을 염려하는 완고한 사람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도전도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열렬하게 일을 했다. 클리쉬 거리에 있는 작은 화실에 수도승처럼 틀어박혀 안락을 외면하고, 몇 푼 안 되는 돈은 비싼 책을 구입하는 데 투자했다.
- 미술비평가 아르센 알렉상드르Arsene Alexandre가 서술한 28세 때의 쇠라에 대해
조르주 피에르 쇠라 <그랑드 자트섬> 습작 1884년 캔버스에 유채 81.2×64.7cm 개인 소장
우리는 잠재적인 시체다
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 박힘> 1933년 캔버스에 유채 48.5×62cm 개인 소장
파블로 피카소 <목욕하는 여인> 1929년 캔버스에 유채 60×73cm 개인 소장
그곳엔 그림에 눈길을 한 번이라도 줬다면 끊임없이 올라오는 끔찍함에 마음을 닫아야 하는 작품이 잇엇다. 들어오자마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 바로 오른쪽에 걸린 이 작품의 이미지들이 어찌나 고통스러운 것이던지 정신이 그들의 시선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 해부학적 구조의 형상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이며, 천장이 낮은 이상한 비율을 보이는 공간 안에 출구도 없이 갇혀 있다. 이 형상들은 물어뜯고, 후벼 파고, 빨아먹는 듯하다. 목은 뱀장어처럼 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 중요하다. 뭐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그 앞에서 느낀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저마다 관람객을 끌어당기기 위해 구석에서 기다리는 듯하다. ··· 그들은 경기를 일으키게 한다.
- 미술평론가 존 러셀John Russell
나는 도살장과 고깃덩어리를 그린 그림에 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그것이 십자가 책형이 가진 의미의 전부입니다. 가축이 도축되기 전에 찍은 기이한 사진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사진들이죠. 물론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그 사진들을 보면 사진 속 동물들은 자신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동물들은 갖은 노력을 다해 도망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 그림들이 이와 같은 것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온전한 십자가 책형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자가 책형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만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그것은 단지 인간의 행동,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행동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1944년 세 판자 위에 파스텔과 유채 각 74×94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프랜시스 베이컨 <풍경 속의 인물> 1945년 캔버스에 유채 128.3×144.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이 그림은 공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에릭 홀의 사진을 바탕으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 사진은 분실되었다.
베이컨과 절친했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Roy de Maistre가 남긴 에릭 홀의 초상화 1936년 캔버스에 유채 71×91cm 개인 소장
당신도 알고 있듯이, 동성애는 하나의 장애로 여겨졌습니다. 절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 그런 면에서 보면, 난 법의 바깥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법의 바깥에 있습니다. 난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삶이 아니죠.
-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의 작업실
1961년, 베이컨은
마구간이었던 이곳을 개조해
죽을 때까지 이용했다.
물랭 루주를 사로잡은 남자
앙리 드 툴루즈-로드레크
프랑스 파리
물랭 루주에서 열린 무도회
1900년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1892년
하루에 많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책도 조금 읽는데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되도록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드로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어두워지면 사촌 잔 아르마냐크가 내 방으로 들어올까 봐 신경이 쓰입니다. 가끔 그녀는 램프를 밝게 켜고 나와 놀고 싶다고 말합니다. 나는 얘기는 듣지만 (그녀의) 얼굴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매우 키가 크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키가 작고 잘생기지도 않았습니다.
-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
나는 풍경에 대해선 그림자조차도 그릴 수가 없다. 내가 그린 나무들은 시금치처럼 시퍼런 녹색일 뿐이다.
-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말안장을 올리는 포병>
1879년
캔버스에 유채
37.5×50.5cm
프랑스 알비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거울 속의 자화상>
1880년경
마분지에 유채
32.4×40.3cm
프랑스 알비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물랭 루주에서 라 굴뤼>
1891년
채색석판화
116.5×190cm
프랑스 알비 툴루즈-로트레크 미술관
기타가와 우타마로
<후쿠주의 집>
1794 ~ 1795년경
목판에 채색
26×38.3cm
런던 영국 박물관
나는 물랭 루주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 그 포스터는 다소 작은 이륜마차에 실려 오페라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고, 대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나는 그 포스터를 따라 보도를 걸었다.
- 디자이너이자 나중에 툴루즈-로트레크의 친구가 된 프랑시스 주르댕Francis Jourdain
언젠가는 모두가 그를 알게 되리라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
캔버스에 유채
57×66cm
개인 소장
반 고흐 씨는 색의 명암이나 색조의 정확성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붓을 격렬하게 놀려서 거대한 풍경을 그렸다. 양탄자에 얼룩덜룩한 책 더미가 놓여 있는데, 연구에는 괜찮을 법한 모티프지만 회화의 소재로는 적합하지 않다.
- 귀스타브 칸Gustave Kahn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1×73cm
러시아 푸시킨 미술관
반 고흐가 살아 있었을 때 팔린 유일한
그림. 1890년 안나 보흐Anna Boch가
400프랑을 주고 구입했다.
위로부터 빈센트 반 고흐(1872년)와 동생 테오 반 고흐(1878년)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눠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 아들 반 고흐 주니어가 인용한 요한나의 일기, 1928년 날짜 미상
사진가 라울 시쎄가 찍은 요한나와 아들. 1890년 파리
요한나의 두 번째 남편인 화가
요한 코헨 호스할크Johan Cohen Gosschalk가 그린 요한나
요한나는 재혼 후에도
반 고흐의 편지 정리 작업에
잠시도 소홀하지 않았다.
테오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편지는 내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 집에 돌아온 첫날, 외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편지 꾸러미를 열었지. 이 편지들에게 내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요한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이가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부숨에 왔다. 그리고 우리 둘이 먹고살기 위해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빨래하고 청소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테오는 내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아니,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고 함이 옳다.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줬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테오와 빈센트가 평생 동안 모은 이 보물들을 아기를 위해서라도 잘 보존해야겠다. 그게 내 일이다.
- 요한나의 일기, 1891년 11월
내일 아침, 아티에서 반 고흐의 드로잉 전시회가 열린다. 매우 기다려진다. ··· 수도 없이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암스테르담의 뷔파에 유화 열 점, 로테르담의 올덴젤에 스무 점이 전시된다. ··· 12월에는 풀크리에서, 25일 목요일에는 아티에서 같은 전시회가 개최된다.
- 요한나의 일기, 1892년 2월 24일
정말 대단한 밤이었다. 브라이트너, 이즈라엘, 얀 베트 등 내가 원한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이 그림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 요한나의 일기, 1892년 2월 26일
나는 빈센트의 아주 작은 그림 하나를 (암스테르담의 화상에게) 가지고 갔다. 작은 그림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 그들은 수수료만 보장해 준다면 여러 점을 전시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성공이었다!
- 요한나의 일기, 1892년 3월 3일
수년 동안 어머니는 편지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편지에 날짜가 없어 읽으면서 상황을 짐작해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손으로 편지들을 하나하나 옮겨 적다가 나중에는 타자기로 쳐서 정리했습니다.
- 요한나의 아들, 빈센트 W. 반 고흐(1890 ~ 1978, 이하 반 고흐 주니어. 테오는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붙였다)
1948년 당시 네덜란드는 여전히 나치 점령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중이었지요. 종종 가족들 끼니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작품 몇 점을 팔까 하는 유혹을 느끼기도 했어요. 실제로 단 한 번 현실에 굴복해서 삼촌의 그림 한 점을 식량과 맞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후회했고, 그것 때문에 계속 죄의식에 시달렸지요.
- 반 고흐 주니어
테오에게 보낸 편지
1976년 반 고흐 뮤지엄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
그는 생전, 삼촌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인 '엔지니어'로
불리곤 했다.
불온한 농민과 위대한 혁명가 사이에서
장 프랑수아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캔버스에 유채
82.6×101.6cm
미국 보스턴 미술관
내가 그리려 한 건 노동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몸을 움직여 수고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성경》에 쓰인, '네 이마에 흐르는 땀의 대가로 살아야 한다'는 구절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인간의 운명입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
<키질하는 사람>
1848년
캔버스에 유채
71×100.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저자들은 이렇게 해서 나를 꺾으면 내가 거실에나 어울릴 그림을 그릴거라고 믿는가 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농사꾼으로 태어났고 농사꾼으로 죽을 겁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내 눈으로 본 대로 그릴겁니다.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내 뜻을 지킬 터입니다. 필요하다면 명예를 걸고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 1859년 <죽음과 나무꾼>이 살롱전에서 낙선하자 상시에에게 본낸 편지 중
아, 생각난 김에 말입니다만, 장관의 인장이 찍힌 편지 좀 보내 주십시오. 붉은 밀랍으로 봉한 편지 말입니다. 멋지게 장식된, 집배원이 모자를 벗어 들고 제게 얼마나 정중하게 편지를 전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드물지만 "장관님 서신입니다!"라면서, 멋지게 신뢰받는 방ㅂ버이죠. 그들에게 장관이 봉인한 편지는 당연히 장관 자신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 편지는 보통 편지가 아니니까요.
- 장 프랑수아 밀레, 1851년에 당시 내무부 고위공무원이었던 상시에에게 쓴 편지 중
장 프랑수아 밀레
<자화상>
1841년
캔버스에 유채
60×73cm
프랑스 토마 장리 미술관
사람들이 나의 그림 <괭이를 든 사람>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그 말들이 내겐 아주 생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말을 전해 준 당신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덕분에 사람들이 내게 갖다 씌워 준 사상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경탄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비평가와 내가 무슨 당파로 의기투합했다고요? 사회주의당이라니, 원!
- 장 프랑수아 밀레, 상시에에게 보낸 편지 중
장 프랑수아 밀레
<괭이를 든 사람>
1860 ~ 186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0.3×81.9cm
미국 게티 센터
노르웨이에서 온 태풍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 ~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18.5×119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나는 오전에 아틀리에에서 일한다. 아틀리에 한가운데 서 있는 벌거벗은 모델의 몸을 향해 팔을 뻗어 연필로 균형을 잰다. 전신에 비해 머리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전신에 비해 가슴의 넓이는 또 얼마나 될까. 이런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나를 피곤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 오후 내내 난롯가에 발을 올려놓고 타오르는 불꽃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내 눈이 불에 탈 때까지,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 에드바르 뭉크, 1889년 12월 일기 중
나는 카메라와 경쟁하지 않으며, 카메라가 천국이나 지옥에서 사용될 수 없는 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이상 책을 읽는 남자와 뜨개질하는 여자가 있는 실내를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려야 하며 나는 그런 그림들을 하나의 연작으로 그리고 싶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림의 상스러움을 이해할 것이며, 교회 안에서 그러하듯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 에드바르 뭉크
뭉크가 그린
여러 버전의 <병든 아이>
에드바르 뭉크
<봄>
1889년
캔버스에 유채
263.5×169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병든 아이>와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작품 <봄>. 베를린 개인전에도
걸린 작품이다.
뭉크의 초상화들은 매우 서투르게 색칠한 것들로 사람의 모습이라 하기 어렵다. 형태는 상실되었으며 화법은 조잡, 난폭하며 감각은 조야하다. 이 작품들은 예술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가치 조차 없다.
- 독일의 평론가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안톤 폰 베르너
<베르사유에서의 황제 선언>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67×202cm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에드바르 뭉크
<뼈가 있는 자화상>
1895년
석판화
20×60cm
뭉크 미술관
안톤 폰 베르너가 "이 전시회는 예술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불결하고 천박하니 막을 내리겠다"라고 천명했다. 우리는 그에게 손님을 그렇게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지만 베르너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와 무슨 상관이야, 전시회는 끝났다니까!" 휘파람을 불고 소리치는 것으로 시작된 작은 소동은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우리 젊은이들은 전시장을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늙은이들이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적들의 벽을 뚫고 나왔다. 우리는 승리에 도취하여 빌헬름 가를 벗어났다
- 조각가 막스 크루제Max Kruse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마분지에 유채와 템페라
73.5×91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밀 놀데
<열대성 태양>
1914년
캔버스에 유채
104.5×71cm
제뵐 놀데 재단
주관적인 감정과 시각을
강렬한 색채로 담아낸 에밀 놀데의 그림은
뭉크가 독일에 가져온 '표현주의'라는
불씨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다.
근대를 가져다준 횃불
오귀스트 로댕
오귀스트 로댕
<청동시대>
1876년
청동
180cm
브레멘 미술관
로댕의 사진, 1914년
내 기억으론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렸나 보다. 어머니가 자주 들르시던 과일 가게 주인은 그림이 실린 화보나 판화집의 종이를 뜯어서 자두를 담아 주셨다. 나는 그 그림들을 베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과일 봉지가 나의 첫 그림 모델이었다.
- 오귀스트 로댕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점토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팔, 머리, 발과 여러 작은 부분들을 만들어 보고, 다음으로는 몸 전체도 만들어 좠다. 나는 이 모든 작업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숙함은 지금과 견줘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희열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오귀스트 로댕
자크-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
1799년
캔버스에 유채
525×390.7cm
루브르 박물관
자크-루이 다비드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예술을 중시한 에콜 데 보자르는,
<1792년 의용병들의 출정>과 같이 균형 잡힌
구도와 입체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조각을 선호했다.
프랑수아 뤼드
<1792년 의용병들의 출정>
1833 ~ 1836년
석회암
12.7×6m
파리 에투알 개선문
오귀스트 로댕
<장-바티스트 로댕의 흉상>
1859 ~ 1860년
청동
41cm
로댕 미술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청동의 마무리 끌질, 대리석과 돌을 쳐서 다듬는 일, 은 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연마하는 일까지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 작품에 쏟을 노력과 시간을 흩어서 허비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생활은 근근이 꾸려 갈 수 있었다.
- 오귀스트 로댕
아, 첫 작업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더 나은 곳을 얻을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르 브룅 가의 고블랭 공장 근처에 있는 마구간을 빌렸다. 빛이 충분히 들어왔고, 뒤로 물러서서 실물과 점토상을 비교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이는 내가 늘 고수하는 기본 원칙이다). 창문은 아귀가 잘 맞지 않고 목조 문은 뒤틀려, 구석구석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오랜 세월로 낡아서인지 바람 때문인지, 천장의 슬레이트에서는 계속해서 외풍이 새어 들어왔다. 몸이 얼어 붙을 만큼 추웠다. 한쪽 구석의 우물은 물이 넘칠 듯 찰랑대서, 스며드는 습기가 1년 내내 감돌았다. 지금도 그곳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 오귀스트 로댕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영혼을 뱉어 낸다. 나는 그러한 과정을 묘사하고 싶은 것이다.
- 오귀스트 로댕
이것은 로댕의 작품에서 표정의 탄생을 알려 준다. 표정은 들어 올린 두 팔 속에서 머뭇거리며 시작되고 잇다. 아직 팔이 무거운지 한쪽 팔의 손은 다시 머리 위에서 쉬고 있다. 그렇지만 손은 잠든 것이 아니라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른발에는 첫 번째 걸음이 기다리고 있다.
-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청동시대>를 두고
<청동시대>의 모델이었던 오귀스트 네이
로댕은 이 사진으로 <청동시대>가
석고 뜨기 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혹독한 길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쾌대
이쾌대
<운명>
1938년
캔버스에 유채
128×156cm
개인 소장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0×72cm
개인 소장
간단히 말하면 미술건설적인 토대를 쌓았다기보다도 ··· 거의 서울에서 8 · 15 직후의 선전미술대가 핟던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내가 대체로 본 감상이다. ··· 그 회화 자체는 당면적인 과제가 요구하는 조건으로 인하여 미술인들이 목표로 하는 예술적인 욕구를 말살까지는 아니나 거진 기세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제작되는 회화가 미술적 작품들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미술동맹에서 이루어진 회화운동이 이렇게 발전해 나가고 영구 상설화되어 버린다면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릴 우려조차 없지 않다.
- 이쾌대, <신천지> 1947년 2월호에 '북조선 미술계 보고'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216×177cm
개인 소장
이쾌대
<가족>
1947년
종이에 연필
개인 소장
"47.12. 우리 집안 식구 일제히
일어나서 기념 촬영을 하다"라고
쓰여 있다.
아름답고 싶다, 그녀처럼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궁정 예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1778년
캔버스에 유채
193.5×273cm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그때 나는 늘 스케치를 하며 지냈다. 그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내 연습장은 두상과 옆 친구 얼굴 그림으로 가장자리까지 빈틈없이 채워졌다. 기숙사 벽에는 숯으로 인물과 풍경을 스케치했는데 그것은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는 자주 벌을 섰다.
-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이런 것은 모두 여자들을 상대하면서 배웠다. 그 여자들을 칭찬하고,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피부가 고운지 등 수다를 떨어야 한다. 그렇게 기분 좋게, 즐겁게 해 줘야 한다. 게다가 포즈가 무척이나 좋다는 말도 해야 한다. 알아서 포즈를 잘 취하도록.
- 엘리자베스 루이즈-르 브룅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782년
캔버스에 유채
70.5×97.8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폴리냐크 공작부인>
1782년
캔버스에 유채
73.3×92.2cm
프랑스 베르사유 트리아농 궁
나는 모델들을 다소 회화적으로 그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일단 그들의 마음을 얻고 나면, 그들은 드레스의 형태와 디자인, 느낌들을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 어느 누구도 숄을 걸치지 않았지만 나는 커다란 스카프로 드레이프(자연스러운 주름)를 만들어 우아함을 더했다. 이것은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화가들의 그림 속 우아한 주름들을 모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 《회고록》 중에서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1787년
캔버스에 유채
195×271cm
프랑스 베르사유 트리아농 궁
우리 집에서 음악회를 열려고 사람들이 모였던 날 저녁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부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도착했다. 그들은 아침에 롱상(패션 경연장으로 유명한 경마장)으로 산책하러 나갔었다. 레투알(파리 서쪽 변두리)의 장벽에 모여 있던 하층민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살벌하게 모욕했다. 이 딱한 사람들은 마차 발판 위로 뛰어오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년에는 당신네가 마차 뒤로 가고 우리가 거기 앉아 잇게 될거야!" 이런 식으로 수천 가지 모욕적인 험담을 내뱉었다. 상상이 가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저녁 내내 모두를 슬프게 했다.
-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
녹아내리고 용솟음치고 뚝뚝 떨어지는
조지아 오키프
애니타 폴리처. 미국의 사진가이자 여성참정권 운동가
조지아 오키프
<초기 2번>
1915년
종이에 목탄
47.3×61cm
아비키우 조지아 오키프 재단
조지아 오키프
<스페셜 4번>
1915년
종이에 목탄
47×61.6cm
워싱턴D.C. 국립미술관
조지아 오키프
<소묘 8번>
1915년
마분지와 종이에 목탄
47.9×61.6cm
뉴욕 휘트니 미술관 컬렉션
조지아 오키프
<스페셜 12번>
1917년
종이에 목탄
47×60.3cm
아비키우 조지아 오키프 재단
내 머릿속에는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생각들이 있어. 내게 너무나 친숙한,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형태와 구상들이라 억제할 수 없는 것들이.
- 오키프가 폴리처에게 보낸 편지 중
조지아 오키프
<소묘 XIII>
1915년
종이에 목탄
47×61.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조지아 오키프, 1915년
조지아 오키프
<죽은 토끼와 구리 그릇>
1908년
캔버스에 유채
59.6×48.2cm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
난 완전히 새로워지는 중이야. 내가 이제껏 했던 모든 것을 집어던졌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또다시 집어 들지 않을 거야.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오랫동안 그렇게 될 거야.
나는 늘 내가 그린 그림들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어. 사람들에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심경이 좀 복잡해.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이해 못했으면 하기도 해. 그러고는 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나.
-오키프가 폴리처에게 보낸 편지 중
에드워드 스타이건이 찍은 <갤러리 291의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1915년
스티글리츠는 모더니즘에, 그리고 1910년대 중반에는 미국 미술을 활성화하는 데 매진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예상치 않았던 일들을 즐겼고, 주저 없이 아직 이름 없는 화가의 작품에 관심을 두었다. 진보를 지향하는 스티글리츠의 여러 면면 중 하나가, 미술 작품을 전적으로 남성들이 노력해 얻어 낸 결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 바버라 불러 린즈Barbara Buhler Lynes
동양에서 온 도련님의 반자본주의 퍼포먼스
백남준
백남준
<TV 부처>
1974년
부처상 · 모니터 · 카메라 설치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
1933년 아버지 백낙승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불린 백낙승은 대표적인
친일파 기업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잘못된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1950년 우리는 폭격이 쏟아질 때 피난을 떠났다. 탈출 중이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영혼의 깨달음이 필요해. 야구 경기를 구경하듯 매사를 그렇게 하자. 무엇이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그렇게 아주 시니컬했다.
- 1975년에 백남준, 잡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미술가는 '비전문적이고 비예술적이며 사회에서 비엘리트 계층에 속해야 하고', 이 세상 무엇이든지 예술을 대치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예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예술을 대치할 오락은 간단하고, 재미있고, 무의미하며 상품 가치나 전시 가치가 없어야 한다.
- 마키우나스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현이 있는 바이올린>(1975)을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백남준은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의
전통적 권위를 깨기를 원했다.
남준은 하고픈 건 뭐가 되었든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 센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작품 창작과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게 있으면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한꺼번에 수백 대의 TV를 사는 것은 제쳐 놓더라도 작품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전혀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작품을 만들 때면 뉴욕 최고의 엔지니어와 비디오 에디터를 불러야 직성이 풀렸다. 별달리 모아 둔 돈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러한 금전적 무절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랬어. 돈은 물처럼 써야 한다고."
-구보타 시게코, 자신의 책 《나의 사랑, 백남준》에서
동료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1974년
내가 서양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유력한 이론가들의 대부분이 좌파 지식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동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지식인들에게 언제나 영웅이었다. 그들이 나의 예술을 반기성적, 반제도권적, 반미학적, 전복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의 대열에 위치시킬 때 나는 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을 지켜 왔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 백남준
'백남준'이 천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의 이런 대단한 아티스크가 되기 어려웠고 그분이 태어난 시기가 절묘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 내지 현대사에서 하필이면 그때 태어났느냐, 저의 4년 선배인데,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8 · 15 해방과 6 · 25 전쟁을 겪고, 이런 와중에 그 당시로서는 누구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났지요. 어렸을 때부터 작곡을 했고, 실제로 작곡 발표회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스트라빈스키라든가 하는 값비싼 악보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고, 음반도 듣고, 홍콩에도 가곤 했으니 그 시대에 그런 재벌이 아니면 안 되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백남준의 창작의 힘은 그런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필 그때 태어나 독일로 가서 ··· 결과적으로 태어난 시기가 참 중요했던 게 아닌가해서 이야기합니다.
- 황병기
예순다섯의 활화산
전혁림
잊혀져 있어 그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인 전혁림이란 작가야말로 방금 인구마다에 회자되어지고 있는, 죽은 그 누구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현존해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화단 상황 밖의 아웃사이더이고 당당한 유화 제작에 골몰하면서도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적이 익센트릭(eccentric, 괴짜 같은)해서 범상인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존재다. 전혁림의 예술은 전혁림의 신변잡기적, 서정적인 얼굴을 추호도 내밀지 않는다. 이 불확실 시대에 그는 가장 확실한 존재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 1979년 미술잡지 <계간미술> 여름호에 게재된 기획기사, '작가들을 재평가한다' 중에서
전혁림 화백의 생전 모습
당시에 유일하게 간행된 미술잡지
<계간미술> 1979년 10호
추상화는 이해하기 어렵고 화면에서 아무 느낌도 갖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 그도 그럴 것이 기존 추상문화예술은 이론적으로 학술적인 지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한 예로 국전을 구상, 비구상으로 구분해서 전시회를 가지게 한 것도 이런 막연한 무지가 드러낸 소산물인 것이다. 오늘의 미술은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 할 것 없이 다양한 양식의 혼용, 종합으로 형성되어 있다. ··· 여기에 한 작가가 개성적인 예술을 추구하고 제작했을 경우 엄격하게 따지면 어느 부에도 출품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오류는 화단의 잘못이고 우스운 일이 아닌가 싶다.
- 전혁림, 1962년 부산지역신문 <국제신보>에 쓴 '구상과 추상'이라는 칼럼
전혁림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
2005년
캔버스에 유채
700×200cm
용인 이영미술관
전혁림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
2005년
캔버스에 유채
700×200cm
용인 이영미술관
눈만 뜨면 그림을 그리고 머릿속은 늘 새로운 생각들로 출렁거리고 아이디어가 용솟음을 쳐요. 시력이 까딱없지 손노림도 힘이 차지, 이건 하늘이 내게 준 복이지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해 보고 싶고, 예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 전혁림, 2005년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회 '구십, 아직은 젊다'를 앞두고
전혁림
<통영항>
2006년
캔버스에 유채
602.6×255.6cm
청와대 인왕실
독일을 재현하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산속의 십자가(테첸 제단화)>
1807 ~ 1808년경
캔버스에 유채
110.5×115cm
독일 드레스덴 국립 회화관
얀 반 에이크
<헨트 제단화>
1432년
목판에 유채
461×350cm
벨기에 헨트 성 바보 대성당
클로드 로랭
<전원 풍경>
1646 ~ 1647년경
캔버스에 유채
132.7×102.4cm
미국 팀켄 미술관
사람들은 나를 인간 혐오자라고 부른다네.
내가 사회를 피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지,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네.
하지만 인간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다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08 ~ 1809년경
캔버스에 유채, 171.5×110cm,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작업실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812년
캔버스에 유채
40×51cm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작업실. 화가는 창을 등지고 있다. 작업실을
밝혀야 할 빛 때문에 덧문만 열어 두었을 뿐이다. 프리드리히의
청교도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작업실이다.
이국땅을 뒤흔든 야심찬 실험
엘 그레코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77 ~ 1579년경
캔버스에 유채
173×285cm
에스파냐 툴레도 대성당
베른하르트 슈트리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1520년
목판에 유채
72×87cm
독일 베를린국립미술관
작가 미상
<성모 안식 성모 승천>
1621년
목판에 템페라
144×108cm
러시아
엘 그레코
<자화상>
1595 ~ 1600년경
캔버스에 유채
46.7×52.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엘 그레코
<예수의 이름을 경배함>
1578 ~ 1579년경
캔버스에 유채
110×140cm
에스파냐 엘 에스코리알
산 로렌초 수도원
앞쪽에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펠리페 2세다.
내 위대한 작품의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낮게 책정될지라도 내 이름은 에스파냐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길이 남을 것이다.
- 엘 그레코
엘 그레코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1580 ~ 1582년경
캔버스에 유채
301×448cm
에스파냐 엘 에스코리알
산 로렌초 수도원
엘 그레코
<톨레도 전경>
1597 ~ 1599년경
캔버스에 유채
108.6×121.3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신성한 그리스인이여, 당신은 자연을 능가하는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예술가가 아니라 붓을 통해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자입니다. 그래서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늘의 태양은 당신의 캔버스에서처럼 자신의 궤도 속에서 빛을 비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미완성인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신의 역할을 합니다.
- 호르텐시오 펠릭스 파라비시노Hortensio Felix Paravicino, 시인이자 살라망카대학 수사학 교수였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
-------------
'내가 읽은 책들 > 202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008 혼자 보는 그림 (0) | 2020.09.27 |
---|---|
2020-007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2) | 2020.09.25 |
2020-005 방구석미술관 (0) | 2020.09.04 |
2020-004 고전필사 (0) | 2020.09.02 |
2020-003 미술에게 말을 걸다 (0) | 2020.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