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 인천

 

 

 

 

 

 

이희환 지음

2019, 21세기북스

 

 

배곧도서관

SM023816

 

 

981.15502

이97ㅇ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02

 

 

인천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문을 연 용기와

모험의 도시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비로소 한국은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인천은 이 새롭고 두려운 역사가

펼쳐지는 생생한 현장이자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인천 도슨트 이희환

 

 

문학산, 소래포구, 인천항, 연안부두,

차이나타운, 신포시장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35개 공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인문학적 질문들

 

 

이희환

 

1966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하여 줄곧 인천에서 성장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시민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해왔다. 2019년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제물포구락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인천문화를 찾아서』, 『김동석과 해방기의 문학』,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 『문학으로 인천을 읽다』, 『만인의 섬 굴업도』 등이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인천 도슨트’ 이희환


인천의 짧은 역사 ㆍ 근대를 향한 거대한 실험실 인천

 



01 월미도 -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함께한 섬
02 문학산 - 인천 역사 발상지의 기구한 운명
03 소래포구 - 협궤열차도 추억도 멈춰버린 포구
04 대불호텔 -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05 인천항 - 백범 김구 선생이 노역했던 항구
06 연안부두 - 러일전쟁의 서막, 제물포해전의 기억
07 송도유원지 - 일제 말부터 각광받던 피서지
08 부평 문화의 거리와 지하상가 - 상인들의 지혜가 만든 핫플레이스
09 차이나타운 - 국민 음식 짜장면이 탄생한 곳
10 화도진 - 최초 조약 체결지로 오해된 쇄국정책의 보루
11 구월동 - 돌고 도는 핫플레이스의 역사
12 북성포구 - 배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
13 동일방직공장 -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14 시립율목도서관 - 일본인 별장이 학생들의 도서관으로
15 인현동 - 청춘의 만남의 장소, 동인천역과 삼치골목
16 내리교회 - 감리교회 선교활동의 거점
17 성공회성당 - 인술과 교육을 펼친 병원과 성당
18 신포시장 - 개항기 시장에서 쫄면의 발상지로
19 경인면옥 -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인천냉면
20 계양산 - 의적 임꺽정을 키운 깊은 산
21 부평캠프마켓 1 - 기억해야 할 일제 수탈의 현장
22 부평캠프마켓 2 - 반환을 앞둔 미군부대의 유산
23 인천가톨릭회관 - 80년대 인천 민주화운동의 근거지
24 인하대학교 -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
25 한국이민사박물관 - 한국 이민 역사의 파노라마
26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 똥고개라 불리던 달동네 서민들의 삶
27 웃터골운동장 - 한일전 야구가 펼쳐진 청년운동의 요람
28 주안염전 - ‘인천짠물’들이 소금을 만들던 곳
29 맘모스체육관 - 사라진 ‘동양 최대’의 꿈
30 답동성당 - 탄압을 딛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31 싸리재 - 카페로 부활하는 역사의 거리
32 자유공원 - 최초 서구식 공원의 세 가지 이름
33 인천그라운동장 - 고교 야구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34 소월미도 -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35 배다리역사문화마을 - 도깨비도 홀린 헌책방마을
36 애관극장 -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대한민국 도슨트 ㆍ 인천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인천 연표


참고 자료

 

 

맥아더 장군 동상, 월미도, 문학산, 소래포구, 대불호텔, 대불호텔전시관, 인천항, 연안부두,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 송도유원지, 능허대, 청량산, 부평 문화의 거리, 평리단길, 부평지하상가, 차이나타운(청관거리),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화도진, 벽화거리, 화도진축제(5월 22일 전후), 연희진, 구월동, 구월동 로데오거리, 인천문화예술회관, 북성포구, 시립율목도서관, 인현동, 동인천역, 삼치골목, 인하의 집,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인현동 화재참사 위령비, 성공회성당, 신포시장(신포우리만두, 청실홍살, 신포과자점, 신신옥, 의흥덕양화점, 귀티패션, 성광방앗간), 경인식당, 평양관, 경인관, 신경관, 사정옥, 풍성관, 인천관, 백령도냉면, 세숫대야냉면, 부평막국수, 백령면옥, 변가네 옹진냉면, 사곶냉면, 계양산, 계양산성, 부평캠프마켓, 부평조병창, 인천가톨릭회관, 인천6월항쟁기념비, 인천시민회관쉼터공원, 인하대학교, 인하대 후문가,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장근대건축박물관, 대불호텔전시관, 인천화교역사관, 부평역사박물관, 소래역사관, 계양산성박물관,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제물포고등학교, 맘모스체육관, 답동성당, 싸리재, 애관극장, 배다리마을, 카페 싸리재, 카페 팟알, 자유공원, 인천그라운동장, 인천공설운동장, 숭의운동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우각로 문화마을, 소월미도, 소월미도 등대, 인천해상교통관제센터, 배다리역사문화마을, 배다리시장, 

 

 

 

맥아더 장군 동상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했던 맥아더 장군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1957년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01 월미도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함께한 섬

 

 

 

1918년에 제작된 인천 지도(월미도의 옛모습)  현재 매립돼 육계도가 되었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천 내륙과 떨어져 있는 월미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사진엽서에 담긴 월미도 조탕의 모습(위)1920년대 월미도 유원지의 모습(아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무단통치를 통해 식민지 체제가 안정되자 군사적 요츙지였던 월미도를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유흥관광지로 탈바꿈 시켰다. 식민지 경제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작된 공진회(共進會)의 주도로 월미도에 첨단 관광 상품인 수족관이 개설되었으며, 연이어 운동장, 야외극장, 조탕(潮湯: 바닷물을 데워 만든 목욕탕), 호텔, 요정(料亭) 등의 유흥 · 오락 시설이 들어섰다.

 

 

 

02 문학산

인천 역사 발상지의 기구한 운명

 

 

 

문학산에 남아 있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 문학산 정상은 1960~70년대 초반까지 미군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한국군 미사일 부대가 문학산 정상에 주둔하였다.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던 문학산 정상이 인천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15년의 일이다.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 전경  문학산은 인천의 발상지이자, 1,000년 넘는 세월동안 인천을 품어온 인천의 대표적인 산이다.

 

 

 

03 소래포구

협궤열차도 추억도 멈춰버린 포구

 

 

 

협궤열차를 아는가? (······)

그때의 그 협궤열차만큼 내 인생에 환상으로 달린 열차는 없었다. 가을에 그 작고 낡은 열차는 어차피 노을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라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

    - 이런 곳에서 시를 쓰며 외롭게 외롭게 살았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황량한 선경(仙境)이었다. 나는 이제껏 세파에 시달려온 지난날을 생각했다. (······)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 윤후명 「협궤열차에 관한 한 보고서」 (1990) 중에서*

 

* 조남현외 엮음, 『한국문학선집 : 1900~2000』제2권,문학과지성사,2007.

 

 

 

수인선 협궤열차가 운행되던 모습  1937년 개통된 수인선 협궤열차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 그리고 경기도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왜가리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毒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 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

태업한 꿈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年代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는

                                    - 이창기 「수인선 철도」 (1989) 중에서**

 

** 이창기,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문학과지성사, 1989.

 

 

 

소래포구 어시장 앞에 정박한 어선들  매년 7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관광지가 된 소래포구에서 몇 척의 어선만이 포구의 예전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04 대불호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대불호텔 옛 모습  대불호텔은 2층짜리 목조건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1888년 신축된 대불호텔의 모습으로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된 대불호텔전시관의 모습  전체 전시관은 전임 중구청장이 기증한 대불호텔 터와 중구가 매입한 최초의 2층 목조 건물 터까지 이어진 구조이며 정식 명칭은 중구생활사전시관이다. 대불호텔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불호텔전시관(1관)과 1960~70년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생활사전시관(2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05 인천항

백범 김구 선생이 노역했던 항구

 

 

 

1910년대 인천항 갑문 공사 장면(위)과 내항 1부두의 현재 모습(아래)  1910년대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였던 인천항 갑문 공사에는 많은 노동자와 함께 인천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까지 동원되었다. 일본인들의 감독 아래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이 공사에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도 동원되었다.

 

 

 

06 연안부두

러일전쟁의 사막, 제물포해전의 기억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김트리오, '연안부두'(1979)

 

 

 

연안부두 선착장  연안부두에는 연평도, 백령도 등 서해안 일대 섬 지역을 향하는 여객선과 중국으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할 수 있는 국제여객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해양광장과 종합어시장, 유람선 선착장 등 즐길 거리도 많다.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  연안부두에 있는 이 추모비는 러일전쟁의 첫 전투였던 제물포해전에서 희생된 바랴그호와 코레예츠호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러일전쟁 100주년이었던 2004년에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설치되었다.

 

 

 

07 송도유원지

일제 말부터 각광받던 피서지

 

 

 

능허대 일대를 송도라고 개칭한 1930년대 관광엽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일본의 마쓰시마와 유사한 한국의 해안 절경에 자기 나라의 지명을 이식했다. 부산의 송도해수욕장도 그렇게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처음 거류지를 마련한 뒤 부산 서구 암남반도에 있는 거북섬 인근 해안에 소나무를 식재하고 이 일대를 송도해수욕장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포항의 송도해수욕장을 개발한 것도 일본이었다. 인천의 송도도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았기에 1920년대 중반부터 신문지상에 송도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송도유원지의 최근 모습  인천시의 송도유원지 재개발 사업이 무산되면서 송도유원지는 2011년 폐장 후 지금까지 중고차 야적장으로 방치되고 있다.

 

 

 

08 부평 문화의 거리와 지하상가

상인들의 지혜가 만든 핫플레이스

 

 

 

1998년 준공식 기념사진(위)과 새롭게 단장된 부평 문화의 거리 입구(아래)  부평 문화의 거리는 1996년 전국 최초로 상인들이 주도하여 조성한 문화의 거리이다. 1998년 새롭게 단장되기 전까지 이곳은 노점상과 낡은 건물들로 상권이 쇠락해 있었다.

 

 

 

부평지하상가의 내부(위)와 20A번째 출입구(아래)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평지하상가에는 무려 31개의 출입구가 있다.

 

 

 

09 차이나타운

국민 음식 짜장면이 탄생한 곳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짜장면박물관  1930년대 공화춘 모습부터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짜장면의 탄생과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의 첫 번째 패루 중화가  패루는 중국식 전통 대문으로 전 세계 차이나타운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총 4개의 패루가 있다. 중화가는 인천역 건너편에 위치한 첫 번째 패루로 차이나타운의 시작을 알리는 문이다. 이 패루는 2000년에 목재로 세워졌다가 태풍에 쓰러진 후 석재로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밖에도 인화문(동쪽), 선린문(북쪽), 한중문(서쪽)이 있다. 선린문 근처에는 벽화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10 화도진

최초 조약 체결지로 오해된 쇄국정책의 보루

 

 

 

복원된 화도진 입구(위)와 화도진 내 조미수호통상조약 재현 모습(아래)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화도진 공원이 조성되었다. 화도진에서 체결되지 않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화도진 자체를 기념할 필요가 있다.

 

 

 

화도진도 1  화도진도는 1879년에 제작된 군사지도로 두 장의 채색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은 인천부의 전체적인 지역 정보와 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당시의 산천 이름과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연안의 섬 이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1 구월동

돌고 도는 핫플레이스의 역사

 

 

 

구월동 로데오 거리의 화려한 변신  현재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구월동 로데오거리는 1970년대까지 젖소 목장이 있던 허허벌판이었다. 1985년 인천직할시청이 이전하면서 구월동은 인천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전경  1994년 개관 이후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2019년 개관 25년을 맞이하여 노후화된 시설을 개선하고 야외광장을 새롭게 단장했다.

 

 

 

12 북성포구

배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

 

 

 

북성포구 입구  대한제분주식회사의 사유지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빛바랜 북성포구 표지판이 애처롭게 서 있다.

 

 

 

북성포구(위)와 선상 파시(아래)  북성포구는 가장 인천다운 바다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작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포구와 잡아온 생선을 배 위에서 바로 선상 파시는 북성포구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북성포구는 고깃배가 제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닿는 야매(野昧)한 공간이다. 도시의 뒷간 같은 이 후미진 곳을 애써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예 이곳의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있다. 외지인들과 인천기행 할 적마다 맨 마지막 코스는 거의 이곳이다. 대한제분 공장 옆길이 아닌 만석동 고가도로 아래쪽 길을 일부러 택해 포구로 향한다. 공장 담이 만든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횟집을 거쳐, 드디어 포구로 나오면 백이면 백 모두 감탄사를 내지른다. "와우, 판타스틱!" 신포동, 자유공원, 차이나타운을 지나오면서도 나오지 않았던 탄성이다. 여기에 노을까지 깔리면 그들은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진다. (······) 사람이나 도시나 너무 예쁘기만 하면 질린다. 송도, 청라로도 인천의 화장술은 충분하다. 묵은 내 나고 못생긴 포구 하나 정도는 남겨 둬도 좋지 않을까.

- 유동현 「북성포구를 부탁해」*

 

* <인천일보>, 2016년 11월 25일.

 

 

 

13 동일방직공장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쌀을 고르고 있는 정미소 여공들  선미 직공들은 휴일도 없이 1일 평균 10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했으나 평균 임금은 고작 35전에 불과했다. 당시 냉면 한 그릇이 10전 정도였다고 하니 매우 헐한 임금이었다. 여기에 기계의 도입으로 실직에 대한 공포감까지 겹치면서 여직공들의 생활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당시 신문들은 '눈물과 피를 긁어먹는 정미소'라는 표현으로 정미소를 고발하기도 했다.

 

 

 

조선의 심장지대인 인천의 이 축항은 전 조선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그 규모가 크고 또 볼 만한 것이었다. (······)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쓸어 나온다. 잠깐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어 보이는 노동자들이 축항을 둘러싸고 벌떼같이 와, 와, 하며 떠들었다. 그들은 지게꾼이 절반이나 넘고 그 외에 손구루마를 끄는 사람, 창고로 쌀가마니를 메고 뛰어가는 사람, 몇 명씩 짝을 지어 목도로 짐을 나르는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한뭉치가 되어 서로 비비며 돌아가고 있다.

- 강경애(소설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장편소설 『인간문제(人間問題)』

 

 

 

동일방직공장의 현재 모습  1934년 일제가 세운 이 역사적인 공간은 지난 2017년 8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풍경은 늘어선 공장 건물들의 지붕이다. 이 터는 민간 소유로, 인천시가 매입하지 않는 한 언제든 개발을 위해 매각될 수 있는 상황이다.

 

 

 

14 시립율목도서관

일본인 별장이 학생들의 도서관으로

 

 

 

시립율목도서관 별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보수를 거쳐 현재 율목도서관의 어린이 자료실로 사용되고 있다.

 

 

 

15 인현동

청춘의 만남의 장소, 동인천역과 삼치골목

 

 

 

인하의 집 전경(위)과 삼치 메뉴(아래)  인하의 집은 1972년부터 지금까지 전동 삼치골목을 지키고 있는 원조 삼치구이 가게다. 가난한 일꾼들을 위해 버려지던 삼치를 튀겨주던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위)과 인현동 화재참사 위령비(아래)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은 인현동 화재참사로 희생된 청소년들의 죽음을 위무하고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생활을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뒤편에는 화재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6 내리교회

감리교회 선교활동의 거점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

 

 

 

내리교회의 과거(위)와 현재(아래)  위쪽 사진은 1946년 김구 선생이 내리교회에서 강연을 한 후 촬영한 기념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들 중앙에 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내리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1985년에 새로 지어진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17 성공회성당

인술과 교육을 펼친 병원과 성당

 

 

 

성공회성당의 외관  1890년고요한 신부에 의해 건립된 성공회성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6년 복원되었다. 중세풍의 석조 건물에 한국적인 목구조 처마 양식이 가미되어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고요한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흉상  조선의 문화를 존중하며 선교활동과 의술활동을 전개했던 두 선교사의 흉상을 성당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18 신포시장

개항기 시장에서 쫄면의 발상지로

 

 

 

원조 쫄면  신포우리만두에서 처음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쫄면은 질기게 뽑힌 냉면의 면에 고추장 양념을 더해서 만든 것이었다.

 

 

 

19세기 말 신포동의 푸성귀전을 재현해 놓은 조형물  신포시장의 시초였던 19세기 말 중국인들의 푸성귀전의 모습을 재현하여 2005년에 세운 조형물이다. 사진의 중앙에 채소를 파는 중국 상인이 있고, 양쪽에 손님으로 온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이 보인다. 당시 중국 푸성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에게 인기였다. 이곳에서는 양파, 양배추, 당근, 토마토, 피망, 시금치, 우엉, 부추, 완두콩 등 당시 조선에서는 생소하던 채소들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장 전경(위)과 입구(아래)  19세기 말 중국인들의 푸성귀전에서 시작돼 현재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시장으로 변모한 신포시장에서는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19 경인면옥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인천냉면

 

 

 

경인식당 전경(위)과 냉면(아래) 인천의 대표적인 평양냉면집인 경인면옥은 현재 경인식당으로 상호를 바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백령도냉면  백령도냉면의 비법은 가게마다 다르지만, 사골을 우려낸 뽀얀 육수를 국물로 사용한다는 특징은 같다.

 

 

 

세숫대야냉면  서민들을 위해 개발된 화평동 냉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냉면 사리를 사용하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세숫대야만한 그릇에 담아 판다고 해서 세숫대야냉면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1949년 11월에 한 미군이 촬영한 인천 시가의 모습  신포동 입구에 자리 잡은 경인면옥은 가업을 이어 3대째 운영되고 있다. 1세대 경인면옥 주인장은 1944년 서울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1946년경 인천으로 내려와 경인식당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70여 년이 넘도록 이 집을 찾는 단골 중에서는 6 · 25전쟁 때 피난 내려와 인천에 터를 잡고 살아온 황해도와 평안도 실향민들도 많다고 한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 끝에 작게 보이는 하얀 간판이 경인면옥이다.

 

 

 

20 계양산

의적 임꺽정을 키운 깊은 산

 

 

 

"너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받을 일이 있다."고 점잖게 말하였다.

"검술하는 사람은 죄 없는 목숨을 해치는 법이 없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탐관오리 같은 것도 죄 없는 사람일까요?"

"죄 없는 탐관오리가 어디 있을꼬?"

"그럼, 할 수 있지요."

"여색을 탐하여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악한 재물을 빼앗아 착한 사람을 주는 외에는 재물 까닭으로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답이 있은 뒤에 늙은이는 꺽정이의 맹세를 받고 제자로 정할 것을 하락하였다.

- 홍명희, 『임꺽정』 2권 - 피장편, 사계절, 1995.

 

 

 

1928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소설 『임꺽정』 첫 회  『임꺽정』은 1928년부터 무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와 잡지 <조광> 등에 장기 연재된 미완의 대하역사소설이다. 항일민족운동에 나섰던 홍명희의 투옥 등 사정으로 네차례나 연재가 중단되었다.

 

 

 

계양산성  계양산에는 삼국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활발히 사용되다 점차 잊혀졌던 것이 2000년대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21 부평캠프마켓 1

기억해야 할 일제 수탈의 현장

 

 

 

1948년 부평조병창 건물  해방 후 미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전쟁을 위한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지던 부평조병창 건물 앞으로 트럭과 무기들이 방치되어 있다.

 

 

 

노무자수첩이니 하여 현장 징용 이전부터 직장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기회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한 오까 노무과장, 겨울에는 연료 없는 직장에 동사할 것 같고 여름에는 통풍장치 없는 노역장에서 질식할 것 같고 화상, 타박상 등 공장 일에 불구하고 휴식을 주지 않던 하야시 총무과장, 지독한 기아와 쇠약임에도 공휴일 출근 명령을 하야 반공설비 구축, 공장수리, 공장하천 도로 개수 등을 시키고, 정상임금을 지불할 성질의 것을 근로봉사란 편리한 협잡으로 처리하던 나까야마 연성과장, 어쩌다 나오는 쌀, 피륙, 신발, 약품, 술 등의 노무자 특배품을 딴 구멍으로 돌리던 쯔다 후생계장, 조선사람 종업원을 전부 도적놈으로 보고 게으름뱅이로 인정하고 경찰서 끄나풀로 앉아서 마치 사법형사의 권력을 부리던 후꾸다 수위장······.

- 이규원, 「해방공장」, 『우리문학』 10, 문장사, 1948.

 

 

 

22 부평캠프마켓 2

반환을 앞둔 미군부대의 유산

 

 

 

넓은 부평평야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한 당시 '인천 조병창'은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미군에 점령돼 일반의 출입은 '애스컴'이란 영자(英字) 문패로 금지돼 오는 터이므로 그 구내에 무엇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

- <대중일보>, 1946년 1월 25일.

 

 

 

미군에 징집된 금단의 땅  일제의 조병창 부지에 자리한 캠프마켓은 해방과 동시에 미군기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부대 대부분이 평택으로 이전하고 부대 공급용 빵공장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다.

 

 

 

1948년 에스컴시티 전경  일제 수탈의 현장이었던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부대에 귀속되어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23 인천가톨릭회관

80년대 인천 민주화운동의 근거지

 

 

 

인천가톨릭회관  철거되기 직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인천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현장인 이곳은 안타깝게도 관광자원 개발을 이유로 2018년 철거되었다.

 

 

 

인천6월항쟁기념비(위)와 인천시민회관쉼터공원(아래)  인천6월항쟁의 중요한 근거지였던 인천가톨릭회관과 인천시민회관은 모두 철거되고 사라진 상태이다. 인천 민주화운동의 기억은 답동성당 앞에 있는 인천6월항쟁기념비와 시민회관 터의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24 인하대학교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이민자들의 모습  1900년대 초반 하와이로 이민을 간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하와이 이민 1세대 이원수 씨  1915년 당시 농장에서 작업 중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인하대학교의 현재 모습  1954년 인하공업대학교로 개교하였던 인하대학교는 1971년 종합대학 인가를 받은 후 인천의 대표 사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5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 역사의 파노라마

 

 

 

한국이민사박물관 외관(위)과 전시실(아래)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해외 한인사회의 형성과 성장에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한국 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로 떠나던 이민자들이 탔던 갤릭호의 외관을 그대로 살린 전시실이 인상적이다.

 

 

 

하와이 사진 신부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찾아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정착했던 여성들은 사진 한 장으로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다.

 

 

 

 

 

 

26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똥고개라 불리던 달동네 서민들의 삶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전경(위)과 전시실 모습(아래)  수도국산 달동네는 1990년대 도시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그 자리에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섰다. 2005년 개관한 달동네박물관에는 1960~70년대 서민들의 생활상이 재현되어 있다.

 

 

 

27 웃터골운동장

한일전 야구가 펼쳐진 청년운동의 요람

 

 

 

전인천 춘가야구대회의 1, 2회전은 이미 보도한 바거니와 제3회전과 결승전은 예정대로 오는 21일 상오 9시부터 시작된 바 정각 전부터 앞을 다투어 모여든 관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 하오 4시 반부터 한용군의 선공으로 결승전이 시작되니 장내를 뒤집는 듯한 박수 소리와 한용군의 여용여호한 용기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듯한 기세로 대전할 때 일본인 루심의 왕왕 부정당한 심판에 일반 관중은 분개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자주 일어 (······) 감정이 격앙되었던 일반 관중은 장내로 모여들어 심판의 불공평을 책망하며 사태가 심히 험악하였으므로 이 급보를 접한 경관대가 현장에 들어와서 문제의 해결은 경찰서로 가서 하자 할 때에 약송 체육협회장은 심판진과 체육협회 간부와 양 군의 주장을 자기 집으로 청하여 심사한즉 사실은 야구 규정에 의하여 심판의 실수이므로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오후 10시 반에 이르러 결승전은 무조건으로 무기 중지되었으며, 협의하는 동안에는 경관대의 제지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관중은 위립하여 사태가 심히 험악하였으나 밤이 깊은 후에야 무사히 헤어져 돌아갔다더라.

- 「전 인천야구 결승 중지」*

 

* <동아일보>, 1922년 5월 23일.

 

 

 

인천으로부터 경성시내 각 학교에 통학하고 있는 조선학생 수십여 명의 발기로써 한용단(漢勇團)이라 하는 일종의 구락부를 조직해 가지고 인천에 있는 일반 청년들의 친목과 지식의 교환, 운동의 장려를 도모한다 하는데, 그 단은 작년 봄에 세워 차츰차츰 확장을 해나가던 바 그 당시에 만세소요로 인하여 중요한 임원들은 모두 철창 아래에서 신음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몇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내려오다가 지금은 그 단의 회원은 칠팔십 명에 달하였으며, 운동은 야구, 정구, 축구 등이 있고 문예부에는 도서 같은 것도 갖추어 놓고 단원이 수의로 열람케 한다 하는데, 인천 유지들은 청년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각각 기부들도 많이 한다고 한다.

- 「인천에 한용단, 일반 청년의 화목과 운동의 장려도모」 **

 

** <매일신보>, 1920년 6월 15일.

 

 

 

1921년의 한용단 야구팀  한용단은 일제강점기 인천의 대표적인 청년운동단체였다. 야구팀뿐 아니라 정구팀과 축구팀도 있었다고 한다.

 

 

 

웃터골운동장 터에 자리 잡은 제물포고등학교  1937년 일본인만 입학할 수 있는 인천중학교가 세워지면서 인천 청년운동의 요람이었던 웃터골운동장은 사라졌다. 현재 웃터골운동장 터에는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28 주안염전

'인천짠물'들이 소금을 만들던 곳

 

 

 

'인천 짠물에 대한 해명' 전시 포스터  201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특별전시로 기획되었다. 이 주제로 전시가 기획되었다. 이 주제로 전시가 기획될 만큼 '인천짠물'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포스터의 소재로 사용된 당구와 소금포대 등이 재미있다.

 

 

 

일제강점기의 주안염전 지대  1929년에 작성된 인천관광지도. 지도의 우측에 표시된 '주안염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안염전 터 표지석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은 낡은 건물 앞 철제 울타리에 갇혀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9 맘모스체육관

사라진 '동양 최대'의 꿈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은 선인학원 백인엽(白仁燁) 이사장의 필생의 꿈이 담긴 것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획득의 요람으로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동양 최대 다목적 '스포츠전당' 인천체전 매머드 실내종합경기장」***

 

*** <경향신문>, 1973년 6월 14일.

 

 

 

1973년 <경향신문>에 실린 맘모스체육관 건립 당시의 모습(위)과 2013년 <연합뉴스>에 실린 맘모스체육관 철거 장면(아래)  1973년 동양 최대 규모로 건설된 맘모스체육관은 40년 만에 전격 철거되었다. 맘모스체육관의 철거는 인천도시공사가 도화도시개발지구 개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폭파공법으로 진행했다. 체육관 내부 기둥에 196개의 폭약 485kg을 설치해 2013년 8월 3일 토요일 저녁 7시경 30초 동안 순식간에 진행했다. 1층부터 13층까지 차례로 폭약이 폭파되면서 완전히 주저앉은 맘모스체육관은 건립된 지 약 40년 만에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30 답동성당

탄압을 딛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답동성당의 현재 모습  1897년에 지어진 답동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아름다움과 종교적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제물포 고아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답동성당은 1890년대부터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복지에 힘썼다. 근대식 벽돌 기둥을 배경으로 식사 중인 당시 원생들과 수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1 싸리재

카페로 부활하는 역사의 거리

 

 

 

옛 한옥을 고쳐 만든 카페 싸리재  카페 싸리재는 미음자 모양의 2층 짜리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다.

 

 

 

카페 싸리재의 전경(위)과 천장(아래)  카페 싸리재는 오래된 일식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한옥 수선을 위해 2층 천장을 뜯어내자 1933년에 건축되었음을 알려주는 상량문이 드러났다.

 

 

 

카페 팟알.

 

 

 

32 자유공원

최초 서구식 공원의 세 가지 이름

 

 

 

각국공원 꼭대기에 자리 잡았던 세창양행 사택의 모습  세창양행은 독일산 면도칼, 바늘, 염료, 화약 등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조선의 홍삼, 금 등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독일 회사였다. 이 사택은 인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각국공원 꼭대기에 위치하여 전망 좋은 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유럽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둥에 조선의 기와지붕이 올라간 구조로 동서양의 건축기술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물은 1920년대에는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33 인천그라운동장

고교 야구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지금은 철거된 인천공설운동장  인천 도원동에 있던 공설운동장은 1934년 준공되어 2008년에 철거될 때까지 74년 동안 인천을 지켰다. 화면 좌측에 보이는 운동장이 삼미슈퍼스타즈가 활약하던 야구장이고, 우측이 축구장, 육상경기장 등으로 쓰였던 메인스타디움이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위)과 숭의동 109번지 마을 풍경(아래)  인천공설운동장과 숭의야구장이 있던 자리에는 2012년에 건립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자리하고 있다. 근처 숭의동 109번지 일대는 주민 주도로 형성된 우각로 문화마을이 있다.

 

 

 

34 소월미도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잘 있거라, 인천아. 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

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올리겠지. 월미도야.

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

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 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 1951년 결성된 '후쿠오카 인천회'에서 출간

 

 

 

 

소화 20년 8월 15일의 중대한 방송으로 일본인들은 느닷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바뀐 것으로 오로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였다.

- 『인천인양지』

 

 

 

『인천인양지』에 그려진 소월미도 등대  고타니 마스지로는 1945년 8월 27일 일본인들이 소월미도 등대를 폭파하고 떠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인천해상교통관제센터  1945년 8월에 일본인들에 의해 폭파된 소월미도 등대 자리에는 현재 해상교통관제센터가 있다.

 

 

 

35 배다리역사문화마을

도깨비도 홀린 헌책방마을

 

 

 

1948년 12월 배다리시장의 모습  배다리시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온갖 문물이 넘쳐나던 매우 크고 번창한 시장이었다. 2층짜리 목조 건물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점들과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상인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때 20개가 넘는 헌책방이 있던 헌책방거리에는 현재 6개 정도의 헌책방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6 애관극장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인천 조선인 측 극장으로는 용리(龍里)에 있었던 바 건축한 지 오랠 뿐 아니라 그 경영자 정치국(丁致國) 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특히 수리도 아니 하야 그나마 창파벽퇴(窓破壁頹)하야 간혹 연극단(演劇團)이 인천에 들어올지라도 일본인 경영인 극장을 빌어 쓰는 상황이었는데 인천 유지(有志) 김윤복(金允福) 씨는 조선인측으로 상당(相當)한 극장 하나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어 수만의 금전을 비(費)하야 그간 신축에 착수하였는 바 금번 그 신축이 낙성(落成)하였음으로 지난 10일에 신축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금후 주선인측 공공적 모임에는 언제던지 공개한다더라.

- 「인천 애관 낙성식」****

 

**** <동아일보>, 1927년 10월 13일.

 

 

 

1948년 애관극장(위)과 현재의 애관극장(아래)  1930년대 이후 애관극장은 활동사진관으로 유명했다. 애관극장은 국내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해방 이후 오늘나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단했던 시절, 인천부민들의 심금을 올리던 애관극장이 있었기에 인천에서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영화배우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명배우 서일성 등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Posted by 드무1
,

2020-021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2019, 미래

 

 

대야도서관

SB139922

 

 

349.11013

이64ㅂ

 

 

거짓말하는 개인, 거짓말하는 사회, 거짓말하는 구가

그 거대한 문화 진영에 돌진하는

 

바른 역사를 위한 진실된 기록!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 이를 그냥 안고선 이 나라의 선진화는 불가능합니다. 선진화는 커녕 후진화할 것입니다. 거짓말의 문화, 정치, 학문, 재판은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_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승만학당 교장

 

 

좌익은 우리 역사를 반란과 투쟁으로 덧칠하기 바쁘고, 우익도 유라시아 대륙을 말 달리는 판타지로 정신이 없다. 종족주의는 현대 한국인들의 신경병적 증후군이다.

 

_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

 

 

 

 

이영훈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직하였다.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Ⅰ · Ⅱ』(일조각, 2016) 등의 저서가 있다.

 

 

김낙년

 

동경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이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장기통계를 정비하는 작업과 한국의 경제성장이나 소득과 부의 불평등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장기통계Ⅰ · Ⅱ(해남, 2018), 『일제하 한국경제』(해남, 2003), 『日本帝囯主義下の朝鮮経済』(東京大学出版会, 2002) 등의 편저 또는 저서가 있다.

 

 

김용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조선일보,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현대사를 담당했다. 현재는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이승만학당 교사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정희 혁명 1 · 2』(지우, 2019), 『대구 10월 폭동, 제주 4 · 3사건, 여 · 순반란사건』(백년동안, 2017),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북앤피플, 2013) 등의 저서가 있다.

 

 

주익종

 

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산업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방문학자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교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편찬(2008년)에 참여했으며, 『대군의 척후』(푸른역사, 2008)와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해남,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정안기

 

교토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만주, 동아시아의 융합과 공간』(소명출판, 2008)과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동북아역사재단, 2009)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제경영사』(한울아카데미, 2010) 등을 번역하였다.

 

 

이우연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선후기 이래 산림과 그 소유권의 변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버드대 방문연구원, 규슈대 객원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다. 『한국의 산림소유 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일조각, 2010), Commons, Community in Asia, (Singapore National University Press, 2015, 공저), 등의 논저가 있다.

 

 

 

차례

 

 

책머리에
프롤로그 - 거짓말의 나라_이영훈


1부 종족주의의 기억


01 황당무계 『아리랑』_이영훈
경찰의 즉결 총살 / 이유 없는 대량 학살 / 환상의 역사


02.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_이영훈
국사 교과서의 40% 수탈설 / 피스톨과 측량기 / 수탈설의 뿌리는 전통문화


03. 식량을 수탈했다고?_김낙년
쌀의 ‘수탈’인가 ‘수출’인가? / 조선인의 쌀 소비 감소가 곧 생활수준의 하락을 뜻하는가? / 당시 농민들은 왜 그렇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나? / 맺음말


04.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방식_김낙년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을까? / 식민지 조선 경제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 맺음말


05. ‘강제동원’의 신화_이우연
역사왜곡의 출발 / ‘강제징용’이라는 허구 / 한국 교과서의 역사왜곡 / 역사를 왜곡하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06. 과연‘강제노동’ㆍ‘노예노동’이었나?_이우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 작업배치부터 조선인을 차별? / 조선인의 산업 재해율


07.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_이우연
정치적 목적의 임금 차별론 / 조선인-일본인 임금 격차의 실태 / 어느 탄광 『임금대장』으로 본 조선인-일본인 임금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_정안기
육군특별지원병제란? / 육군특별지원병이란? / 제국의 첨병, 조국의 간성


09.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_정안기
학도지원병제란? / 학도지원의 총수와 실태 / 천재일우의 기회 / 둔갑하는 학도지원병 / 기억과 망각의 정치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_주익종
청구권 협정에 관한 오해 / 청구권 협정은 한일 간 상호 재산, 채권채무의 조정 / 청구권 교섭-무상 3억 달러로 타결된
경위 / 개인 청구권까지 모두 정리되었는데도···


11. 후안무치하고 어리석은 한일회담 결사반대_주익종
장면 정부의 청구권 교섭 / 1960년대 야당의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 / 누가 진짜 굴욕적이었나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12. 백두산 신화의 내막_이영훈
백두산 체험 / 소중화의 상징 /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 / 백두 광명성의 출현 / 남북 공명의 정신사 /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13.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_이영훈
참된 지식인은 세계인 / 『삼국사기』의 우산국과 울릉도 /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과 무릉 / 15세기 초까지도 한 개의 섬 / 팔도총도 / 떠도는 섬 / 안용복 사건 / 우산도의 종착지 / 환상 판명 / 석도의 실체 / 일본의 독도 편입 / 한국의 독도 편입 / 내 조상의 담낭


14. 쇠말뚝 신화의 진실_김용삼
역술인, 지관을 쇠말뚝 전문가로 동원 / 주민 다수결에 의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정 / 측량기준점(대삼각점)을 쇠말뚝으로 오인


15.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__김용삼
김영삼 대통령의 느닷없는 결정 / 민족정기 회복 사업 대대적으로 벌여 / 총독부 청사에서 중앙청으로! /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 지우기”가 그 목적? / 반달리즘식 문화 테러


16.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_김용삼
망국의 주요 원인은 외교의 실패 /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이유는? / 러시아 황제에게‘조선 보호’요청 / 일부 학자들, 고종을 개명군주라고 미화


17.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_김용삼
정상적인 외교 절차 무시하고 고종에게 조약체결 요구 / 기회주의로 일관한 고종 /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 ‘조약체결’
어명 내려


18. 친일청산이란 사기극_주익종
제헌국회가 추진한 건 반민족행위자 처벌 / 친일파 청산론으로 탈바꿈해 되살아나다 /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친일파 청산으로 바꿔치기


19. Never Ending Story_주익종
박정희 정부의 국내 청구권 보상 / 노무현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사업 / 노무현 정부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사업의 과오


20. 반일 종족주의의 신학_이영훈
브로델의 역사학 / 불변의 적대 감정 / 토지기맥론 / 유교적 사생관 / 전통과 유교의 상호작용 / 민족 형성의 원리 / 신채호의 『꿈하늘』 / 민족의 신분성 / 종족주의 신학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21. 우리 안의 위안부_이영훈
갈등의 원인 / 위안부의 만연 / 한국군 위안부 / 민간 위안부 / 미국군 위안부 / 정치적 접근에 대한 의문 / 어색한 불균형


22.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_이영훈
성 지배의 긴 역사 / 기생제 / 공창제의 시행 / 소수를 위한 특권적 매춘업 / 군 위안시설로서 공창제 / 매춘업의 대중화 / 조선풍의 공창제 / 호주제 가족 / 가정윤리와 성문화 / 저항과 탈출 / 매춘업의 역외 진출


23.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_이영훈
공창제의 군사적 편성 / 위안소의 실태 / 강제연행설 / 여자정신근로대와 혼동 / 터무니없이 과장된 수 / 동남아 위안소 / 어느 위안소 조바의 일기 / 방패사단의 위안부 문옥주 / 과연 성노예였던가 / 다시 ‘우리 안의 위안부’로 / 폭력적 심성


24.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_주익종
오랫동안 위안부는 거론되지 않았다 / 위안부는 단지 불행하고 불쌍한 여성 / 한 일본인의 사기극과 위안부 가짜 기억


25.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_주익종
정대협의 공세 / 일본 정부의 사과 / 정대협, 일본 정부의 사죄를 거부 / 일본 정부의 위로금 지급 시도 / 정대협의 위안부 여론 몰이 / 정대협과 문재인 정권, 2015년 위안부 합의마저 폐기 / 강제동원? / 일본군 위안소 운영은 성노예 강간범죄? / 한일 관계 파탄이 목적

 

에필로그 - 반일 종족주의의 업보_이영훈

 

참고문헌


찾아보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조선일보사)

 

1부

 

종족주의의 기억

 

 

 

01. 황당무계

     『아리랑』               이영훈

 

 

토지조사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의한 조선 농민 즉결 총살 이미지(김명서 작).

 

 

무엇보다 소설의 전후 문맥에서 대량 학살의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공중에 노출된 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이 무에 그리 중대한 군사비밀이라고 공사에 종사한 노무자들을 학살한단 말입니까. 당시 지시마열도와 홋카이도北海道에서는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슷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어렵사리 동원한 노무자를 학살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문득 소설가 조정래 자신이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이영훈)

 

 

『아리랑』에서 저는 한 사회를 선진사회로 이끄는 가치와 이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미덕과 신앙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곳은 강포한 종족이 약소 종족을 무한 겁탈하고 학살하는 야만의 세계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러한 종족주의의 특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설가 조정래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한국의 역사학 자체가 그러한 종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잇습니다. 비록 외세에 눌렸지만 그 시대 우리 조상의 역사가 진정 그러하였습니까.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도 자신을 근대적 인간으로 개발해 가는 우리 조상의 눈물겨운 노력은 정녕 그 시대의 역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이영훈)

 

 

02.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이영훈

 

 

 

토지조사사업 당시 경기도 고양군에서의 일필지 측량 장면.

 

 

저는 앞의 글에서 소설가 조정래를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증오의 소설가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소설 『아리랑』은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개 주재소 경찰이 조선 농민을 즉결 처형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전국적으로 4,000명의 조선인이 그런 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했습니다. 조정래가 그런 엉터리 역사를 소설로 지어낸 것은 그의 책임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 몇 년 전에 신용하라는 한국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학자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엉터리 학설을 펼쳤던 것입니다.

일제의 조선 병합은 몇 조각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총면적이 2300만 헥타르가 되는 한반도 전체를 그의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의 토지가 얼마인지, 토지의 형질이 어떠한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토지조사사업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도 이 나라가 펼치는 온갖 토지 행정의 기초 자료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터의 번지와 주소는 언제 붙여진 것입니까. 다른 아닌 1910~1918년의 토지조사사업에서였습니다.(이영훈)

 

 

그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전남 고흥의 어느 양반의 일기는 마을 앞을 통과하는 철로가 부설되자 더없이 개탄하였습니다. "저것이 우리의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철로 부설에 많은 토지가 수용되고 또 마을의 당산나무까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제가 펼친 각종 행정이나 시설은 전통문화, 전통 풍수, 전통 터부에 대한 파괴로 간주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피해의식과 분노감이 해방 후 역사가에 의해 토지, 식량, 노동력에 대한 수탈의 역사로 포장되고 부풀려져 왔던 것입니다.(이영훈)

 

 

 

일제는 당시 한인들의 다수가 풍수지리를 신뢰하고 산천의 정기를 중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명산의 혈맥에 이를 차단하여 죽인다고 하는 철침(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물론 일제 자신은 풍수지리설을 신앙하지 않았으나 한국인들이 이를 신앙하므로 한국인들에 좌절감을 심어 주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신용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민족문제」: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 175쪽에서 재인용).

 

 

 

1960년 이후 50년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전국 토지의 40%를 수탈했다고 써왔습니다. 일본과 조선을 뺏고 빼앗기는, 죽이고 죽는 야만의 두 종족으로 감각한 것입니다.우리 조상을 소유권 의식도 없고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량한 종족으로 감각한 것입니다. 그 선량한 조선 종족을 사악한 일본 종족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 마구잡이로 수탈한 것입니다. 조선인은 토지의 측량을 위해 일본이 설치한 대소 삼각점을 토지의 혈맥을 찌른 것으로 알고 분노했습니다. 국사 교과서의 터무니없는 토지 수탈설은 이렇게 우리의 전통문화에 규정된 낮은 수준의 역사의식, 곧 반일 종족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이영훈)

 

 

 

03. 식량을

     수탈했다고?               김낙년

 

 

 

쌀의 생산량 · 수출량 · 조선내 소비량(단위: 천석) 자료 : 『한국의 장기통계』(2018)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입을 제한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한다면,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 오늘날에는 일본의 쌀값을 압박하는 최대 원인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에 있다는 사정은 조선 농민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이 자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그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다가 조선 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와서 조선미의 이입을 막아 산미증신계획의 결과로 야기된 손해를 전부 조선 농민에게만 전가할 이유가 없음을 일본 농민도 알아야 한다. ··· 여하간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에 의한 이입 제한에는 물론이고 ···조선미유출의자유를속박하는어떠한조치에도절대반대할수밖에없다. (『동아일보』 1931년 6월 16일, “조선미 이입 제한엔 절대 반대”, 문장을현대어로손질함).

 

 

 

 

소작지율 · 소작농 비율의 추이(단위: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당시 조선의 농민, 특히 소작농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결국 농업 생산성이 낮았고, 토지에 비해 인구가 넘쳐나다 보니 소작농에게 불리한 지주제가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다는, 전통 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햇기 때문입니다. 산미증산계획이 쌀의 증산을 어느 정도 가져왔다고 해도 이러한 틀을 깰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지주제의 문제는 해방 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을 통해 해소됩니다. 그리고 농촌의 낮은 생산성과 과잉 인구의 문제는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이농이 급속히 진행되고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기계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일제시기 농민의 궁핍을 엉뚱하게도 일제가 쌀을 수탈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형성된 일반인들의 통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쌀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수출'한 것인데도 말이죠. 생산과 수출이 크게 늘고 가격도 불리해지지 않았다면 소득이 올라가는 것은 경제의 상식인데, 이를 뒤집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입니다. 교과서가 '수탈'이나 '반출'이라는 표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수출'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자마자 자신의 일제 비판의 논리가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이라도 만들어 내서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논리로 이루어지는 교과서의 일제 비판에 대해 과연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김낙년)

 

 

 

04.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방식               김낙년

 

 

 

일본은 구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지배했습니다. 한 나라의 주권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제는 바로 이 점에서 비판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는 개인의 재산권마저 유린해서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토지나 식량을 마구잡이로 '수탈'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실생활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민족 간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의 조선 경제는 기본적으로는 자유 거래의 시장체제였고, 민법 등이 시행되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 없이 개인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수탈'이 일상화되고 '차별'이 공식화되어 있는 체제라고 한다면, 조선인의 반발로 식민지 통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영구히 편입하고자 했던 식민지 지배의 목표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시행한 각종 제도와 조선에서 실제로 일어난 경제적 변화에 비추어 보면, 교과서의 서술은 초보적인 상식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동안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은 "그 경우 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라고 합니다. 거짓말과 엉터리 논리로 일제를 비판해 왔고, 또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보니, 그것이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도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허구를 만들어 내서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국내에서는 통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제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우지 못하는 교육,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주의 역사교육이 빠져 있는 함정이고 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05. '강제동원'의

     신화                     이우연

 

 

 

교과서의 '강제노역에 동원된 우리 민족', 자료: 2019년 초등학교 6학년 『사회』,54쪽

 

 

 

강제사역되던 일본인들의 모습.

자료: 『아사히카와 신문旭川新聞』 1926년 9월 9일

 

 

 

서울 용산역 앞의 '강제징용 노동자상'

 

 

 

 

조선인 근로자 기념사진

자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 기증자료집』, 100쪽

 

 

 

06. 과연

'강제노동' · '노예노동' 이었나?         이우연

 

 

 

'조선인 징용노동자'로 잘못 알려진 1950년대 일본인.

자료: 『산케이신문産經新聞』2019년4월3일.

 

 

 

1934년 공기 압축식 착암기를 사용하는 탄광부.

자료: 일본 오무타시大牟田市, 『大牟田市の100年』,89쪽

 

 

 

 

07.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                               이우연

 

 

 

日本窒素 江迎炭鑛, 『1944년 5월 賃金臺帳』 표지.

 

 

 

조선인 탄광부와 다른 직종 임금의 비교

연도 비교 직종 월수입(원) 비율
1940 서울 방직(면가공) 남공 14.00 5.2
1940 서울 남자 교원 15.96 4.6
1940 서울 남자 회사원 21.00 3.5
1940 서울 남자 은행원 30.80 2.4
1944 일본 순사 초임 45.00 3.7
1944 일본 사무직 대졸 초임 75.00 2.2

자료: 大內規夫(1945), 『炭鑛 における半島人の勞務管理』.

 

 

 

전쟁으로 인한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해 두고 싶습니다.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에서 일한 것은 1910년대에도 종종 발견되는 모습이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면 그 수가 부쩍 늘어납니다. 이때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 정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컸던 차이가 전쟁과 함께 조선인이 일본으로 동원됨과 동시에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의 임금이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조선인이 오히려 더 많이 받는다"거나 "조선인이 일은 못하는데, 임금은 일본인보다 오히려 더 높다"는 불만이 일본인들 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위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찬 것이었고, 우리 조상들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           정안기

 

 

 

육군특별지원병의 선발 전형과 추계(단위 : 명, 배)

연도 모집인원 지원자 적격자 입소자 입영자 지원배율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400
  600
3,000
3,000
4,500
5,000
    2,946
  12,348
  84,443
144,745
254,273
304,562
  1,381
  6,247
33,392
44,884
69,761
69,227
  406
  613
3,060
3,277
5,017
5,330
  395
  591
3,012
3,211
4,917
5,223
  7.4
20.6
28.1
48.2
56.5
60.9
합계 16,500 803,317 224,892 17,703 17,350 48.7

자료: 정안기(2018 A).

 

 

 

조선지원병 자료 『사진주보』 제22호, 1938.7.13.

 

 

 

이들은 20세기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 일본군에 투신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신민이었고, 그것도 참정권과 병역의무를 결여한 2등 국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망국노亡國奴'라는 편견과 차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지식과 기술, 근면성과 책임감을 체득한 근대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1948년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6 · 25전쟁기 국제 공산세력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지킴으로써 오늘날 대한민국 성취의 기초를 닦은 공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상투적으로 매도하는 '반민족행위자'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1950년대 '자유인의 공화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육군특별지원병은 식민시기 일본에 충성하는 '제국의 첨병'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또 다른 조국 대한민국에 진충보국盡忠報國하는 '조국의 간성干城'이었습니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자신의 생명과 권리마저 일본에 내맡기는 무기력하고 타율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은 아니었습니다.

 

 

 

09.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           정안기

 

 

 

해방 이후 학도지원병 출신자들이 구현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는 하나의 커다란 허위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몇 사람의 학도병에게서 관찰되는 반일 지사로서의 행위를 그들의 집단 지향인향 분식하였습니다. 당초 학도지원 행위에 깔린 입신출세의 욕망은 그것으로 훌륭하게 은폐하였습니다. 그러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는 그들이 지도층으로 군림한 한국인의 집단 심성마저 왜곡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구속하는 반일 종족주의는 그들의 위선적 기억에서 그 형성의 단초를 구할 수 있습니다. 2018년 정부가 나서서 그들의 학도지원을 독립운동으로까지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역사가 정치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교과서적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 청구권 협정의 진실                             주익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국 관계 조항

제2조 (a): 일본은 한반도 독립을 승인하고 모든 권리를 포기
제4조 (a): 양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을 특별조정(special arrangement)함
(b):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해 미국이 취한 조치의 승인
    ※ 1945.09.25. 군정령 2호 재한 일본인 재산 동결
       1945.12.06. 군정령 33호 미군정이 취득
       1948.09.11. 한미재정협정으로 한국 정부에 이양
제14조 (a): 각 나라에 있는 일본인 재산 몰수(일부 예외) 및 연합국이 희망할 경우는
     일본 생산물과 용역으로 인한 추가 배상 협상 권리 부여
(b): 연합국은 연합국과 연합국 국민의 기타 청구권을 포기함

 

한일 간 청구권 특별 조정

 

 

 

한국 측 대일 8개항 요구

1 한국에서 가져간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 지도원판, 지금 지은의 반환
2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대조선총독부 채무의 변제
3 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이체 또는 송금된 금원(金員) 반환
4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
5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 기타 청구권 변제
6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 소유의 일본법인의 주식 또는 기타 증권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
7 전기 제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생긴 제 과실 반환
8 전기 반환 또는 결제는 협정 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늦어도 6개월 이내에 종료할 것

 

 

 

대한민국은 36년간 일본의 점령에서 발생하는 불쾌한 과거의 기억에 의하여 촉구되는 모든 청구권의 충족을 일본에 대해서 요구하는 의도는 없으며, 단지 한국에 합법적으로 속하며 그리고 장래의 한국의 생존을 위하여 충족되어야 하는 재산에 대해서만 그 청구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 임송본林松本,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첫 회의에서 한국 측 대표

 

 

 

일본의 역청구권에 대한 미국 측 중재 의견

국무장관 애치슨의 답신(1952년 4월 29일자)
"미군 정부가 취한 관련 조치와 평화조약 4조(b)항으로 인해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은 몰수된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그 재산들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요구도 할 수 없으나, 그러한 처분은 평화조약 제4조(a)이 규정한 양국 간의 특별조정과는 관련이 있다(relevant)."
미합중국의 입장 표명의 재 제출(1957년 12월 31일자)
"한국에 대해 재한 일본인 재산의 완전한 지배 권한을 부여한 것이 취득 조항과 이양 협정의 취지이다.
재한 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인해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기에, 평화조약 작성자는 그와 같은 문제를 당사자 간의 조정에 맡기도록 했다.
평화조약 4조(a)에서 규정된 '특별조정'이라 함은 재한 일본인 재산이 취득되었다는 것이 고려된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며, 한일 간의 특별조정은 한국의 대일청구권이 재한 일본인 재산의 인도로 어느 정도 소멸 또는 충족되었는가를 결정하는 과제를 동반한다."

 

 

 

개인 청구권에 대한 한국 정부 설명

한국 이규성 공사와 일본 외무성 조약국 사토 탐사관의 면담
"아측으로서는 이동원-시이나 합의 사항에 의하여 일단 개인관계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1965.4.17. 이규성 수석대표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
1965년 조약과 협정에 관한 한국 정부의 공식 해설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에 관한 조항으로 소멸되는 우리의 재산 및 청구권의 내용을 보면···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에 관한 청구, 한국인의 대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이 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협정 해설』, 대한민국 정부, 1965.7)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 · 보상이 아니고는 한국이 애당초 일본에 청구할 게 별로 없었고, 그를 확인하는 선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한일 간 최선의 합의였습니다. 한일협정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국이 무언가 못 받은 게 있으므로 일본은 더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과의 과거사가 매듭지어졌음을, 과거사가 청산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11. 후안무치하고 어리석은

     한일회담 결사반대                 주익종

 

 

 

야당 한일회담 반대 연설 - 3월 15일 부산 강연회(경남중 운동장)

연사 주요 발언
김영삼

김도연

윤보선

장준하
"대대로 침략자인 일본은 평화선마저 뺏으려 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

"정부는 어업협정에서 12해리 전관수역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실은 10년 뒤에는 6해리선까지 일본 어선에 어로활동을 허용하는 흥정을 하고 있다."
"일본 자금으로 한국의 부흥은 불가능하다. 한일협정은 한국을 일본의 시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료: 『동아일보』 1964년 3월 16일.

 

 

 

나와 정부는 학생에 못지않게 국가와 민족만을 위해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이 회담에 임하고 있음을 나와 정권의 생명을 걸고 역사 앞에 맹세한다. 회담에 만약 흑막이 있다면, 관련자는 역적으로 처단할 것을 약속한다. 대학생들의 우국충정과 주장을 마음에 새겨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노력하라고 대표단에 훈령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3월 26일 특별담화문 중 언급)

 

 

 

"오늘의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한다."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의식이다.""우리의 주체의식이 건전하면 한일 국교 정상화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비굴한 생각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다."

-박정희 대통령, 한일협정 조인 다음날인 6월 23일 특별담화 중에서

 

 

 

물론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일본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플랜트 수출 등 이익을 봤지요. 한마디로 한국 경제와 일본 경제 모두 한일 국교 정상화로 큰 이익을 봤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 한국은 일본의 정치적 ·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는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의 예언은 어리석은 소견이었을 뿐입니다.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고 선후진국 협력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문 밖에 나가면 사자에게 잡아먹힌다며 안에서 꼼짝도 안한 것과 같습니다. 문 밖에 나가야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지요. 문 밖에는 사자만 있는 게 아니라, 곡식과 과일이 자라나고, 소와 말, 양과 염소가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문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일협정으로 우리는 대문을 열어젖혔고, 그 덕분에 오늘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잇게 되었습니다.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12. 백두산

     신화의 내막           이영훈

 

 

 

백두산은 우리 종성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대이시다. 삼계를 헤매는 비렁뱅이 아이가 산 넘고 물 건너 자애로운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번 뵙기 위해 왔습니다. 한아버지, 한어머니, 저올시다, 아무것도 없는 저올시다.

- 최남선,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최남선(1890~1957)과 그의 발상 '맹호기상도'

 

 

 

백두 밀영에 참배하는 북한 주민.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백두산 천지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 부부(2018년 9월 20일).

 

 

2018년 9월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북한의 3대 세습 통치자 김정은金正恩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사진에서 보듯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습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곳은 북한 신정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거기에 남한의 대통령이 올라 백두혈통의 계승자와 손을 마주 잡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어떠한 운명을 우리에게 예보하는 것일까요. 사진 속 문 대통령의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없이 착잡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백두산 신화의 마력은 저터럭 강렬한 것일까요.

지난 2000년 평양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장차 남북한이 연방제로 통일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사진 속의 네 사람은 그 약속을 다짐하며 웃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문 대통령과 그의 지지세력은 그러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연방제 통일이 이루어졌다 칩시다. 벌써 남한 주민의 적지 않은 무리가 공공연히 백두혈통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백두산 밀영의 통나무집으로 참배차 몰려갈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행렬에 동원될 것입니다. 저는 사진 속의 웃음에서 그런 운명을 예감합니다. 백두산에 뿌리박은 박달 겨레 여러분, 하루빨리 그 불길한 신화로부터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13.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이영훈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귀의하였다. 매년 토산물을 공납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다.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 한다. 땅의 크기는 백 리이다. 험준한 것을 믿고 신라에 불복하였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정벌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왕智證王 13년(512년)

 

 

 

우산과 무릉武陵 두 섬은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떨어짐이 멀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칭했는데 울릉도라고도 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1년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蔚珍縣

 

 

 

울릉도는 원래 두 섬으로 이루어졌다. 둘을 합해서 울릉도 또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언제부턴가 따로따로 불리기 시작하여 하나는 울릉도, 다른 하나는 우산도가 되었다.

 

 

 

우산은 원래 나라 이름이엇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그러니까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섬이다.

 

 

 

 

 

 

팔도총도(八道總圖) 중의 울릉도와 우산도(1530년).

 

 

 

16~19세기 여러 지도 중의 울릉도와 우산도.

 

 

 

대한전도大韓全圖 중의 울릉도와 우산(1899년).

 

 

 

죠션디도와 울릉도 부분 (1911년).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竹島 혹은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으로 불리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오키隱岐 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 1951년 8월 미 국무부의 한국 정부에 독도에 대해 보낸 회신

 

 

 

내 조상의 담낭 독도

네 오랜 담즙으로

나는 온갖 파도의 삶을 살았다.

- 고은

 

 

 

1951년 미 국무부가 밝힌 대로 독도는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땅이 있고 물이 있어서 사람이 사는 섬이 아닙니다. 국제사회가 영해를 가르는 지표로 인정하는 섬이 아닙니다. 국제사회가 영해를 가르는 지표로 인정하는 섬이 아닙니다. 그것을 민족의 혈맥이 솟은 것으로 신성시하는 종족주의 선동은 멈추어야 합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독도를 응시하면 한국사의 속살이 보입니다. 독도에 관한 성찰은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4. 쇠말뚝 신화의

     진실                         김용삼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정기와 맥을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거나, 쇳물을 녹여 붓거나 숯이나 항아리를 파묻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유명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地氣를 눌러 인재 배출과 정기를 누르고자 한 것이다.

-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50주변 기념 '근대 백년 민속풍물전'에 전시되었던 양구에서 제거된 쇠말뚝 옆에 있던 설명문

 

 

 

김영삼 정부 시절 한 쇠말뚝 제거 현장.

 

 

 

쇠말뚝 신화는 한국인들의 닫힌 세계관, 비과학성, 미신성이 역사와 함께 오랜 반일 감정과 결합하여 빚어낸 저열한 정신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문화를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속하는 21세기의 한국인이 아직도 그런 종족주의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되겠습니까.

 

 

 

15.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

     - 대한민국 역사를 지우다                김용삼

 

 

 

1970년대의 중앙청.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부분이 충남 천안시 소재 목천 독립기념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선동을 통해 미 군정청 역사의 현장, 대한민국 제헌의회 개원 현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건국 현장,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부터 박정희 · 전두환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어 대한민국의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를 낳은 현장을 깨끗이 지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올바른 역사관이나 민족정기의 수립은 구호나 정치적 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욕의 역사와 물증을 때려 부숴버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치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영삼 정부는 치욕의 역사현장을 없앤다고 선동하면서 실제로는 대한민국 제헌국회 출범의 현장, 건국의 현장, 근대화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했던 현장을 파괴했습니다. 문민정부의 '민족 지상주의자'들이 행한 구 조선총독부 철거는 일제 침략의 현장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을 파괴한 반달리즘Vandalism식 마녀사냥, 종족적 민족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는 문화 테러였습니다.

 

 

 

16.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김용삼

 

 

 

최근 들어 개명군주로 평가받고 있는 고종.

 

 

 

고종은 망국의 암주暗主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서 일부 학자들은 고종을 개명군주로 둔갑시켜 그가 개혁을 열심히 추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는 저서와 논문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반일 종족주의가 고양되자 '반일'이면 무슨 학설이든 존중되는 세태가 빚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김용삼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만고의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상소문 내용을 제보 받아서 제멋대로 "황제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복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결과 "고종이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허구의 신화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조약이 체결될 당시 신문이 그에 관해 오보를 내거나 그에 일반 백성이 격분하여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을 망국의 주범으로 저주한 것은 그런대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1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자각적 인식이 아직도 결여되어 있음은 우리 한국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건국을 포함한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초래하고야 말 실로 적지 않은 걱정거리입니다.

 

 

 

18. 친일청산이란

     사기극                     주익종

 

 

 

관료 중 반민족행위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인물의 정의

구분 반민특위 조사대상
반민족행위자
노무현 정부 위원회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물
정의 (제4조 6, 9항)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2조 16항)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헌병분대장 이상 또는 경찰간부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 · 고문 ·학대등탄압에앞장선행위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행위



key
word
'악질적' "일정 직급 이상으로서···
탄압에 앞장선"
'하수인'

 

 

 

 

반민족행위자 ⊂ 친일반민족행위자 ⊂ 친일인물.

 

 

 

각 범주별 인물 예

구분 (반민특위 조사대상)
반민족행위자
(노무현 정부 위원회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물
총수 688명 1,005명
(추가된 인물)
김성수, 김활란, 백락준, 고황경, 장덕수, 노기남, 양주삼, 방응모, 김동인, 서정주, 모윤숙, 노천···
4,389명






(추가된 인물)
박정희, 안익태, 백선엽, 김백일, 김홍량···
 
 

 

 

 

 

오늘날, 일제에 대한 협력과 북한 정권에 대한 협력 중에서 더 중대한 과오는 어느 쪽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한국인은 일제에 대한 협력 문제를 캐는 것만큼 과거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그를 파탄 시키려 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의 활동을 캐고 있습니까? 그리고 김대중 · 노무현 정부가 북한 정권에 협력해서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도운 것을 캐고 있습니까? 한국인은 친일파 청산의 열의만큼이나 친북파 ·종북파청산에힘을쏟고있습니까?국민의생명과재산이걸린진짜중요한문제에집중해야하지않겠습니까?

 

 

 

19. Never Ending Story

     - "배상! 배상! 배상!"                주익종

 

 

 

위원회 피해자 지원 결정 실적

구분 위로금 지급 지원금 지급
사망 행불 부상장해 미수금 의료지원금
건수 17,780 13,993 16,228 24,530 72,631
지원금액(억 원) 3,600 1,022 522 1,040 6,184

 

 

 

강제동원위원회 예산 사용 (억 원)

구분 진상규명위
2005~2009년
희생자지원위
2008~2009년
통합 위원회
2010~2015년
인건비 및 행정비 713 28 998 1,739
지원금액(억 원) - 1,751 4,257 6,008
713 1,779 5,255 7,747

 

 

 

 

위자료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할 것이지만, 해방 전 조선인 노동자를 쓴 일본 기업이 현재 모두 존속하는 게 아니므로 누구는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누구는 청구할 수 없다는 형평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또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실제 일본 기업 재산 압류가 시작되었습니다만, 이게 정부 차원 협상에서 해결될 전망은 희박합니다. 향후 한일 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될 겁니다. 국교단절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친한 이웃이 한 나라도 없게 되는 겁니다. 이래서 한국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른바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배상 요구는 영구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엇이든지 요구해도 된다는 게 현 국민정서입니다만, 이는 반일 종족주의에 따른 오해와 편견일 뿐입니다. 6 · 25전쟁으로 남한에서만 100만 명이 죽고 100만 명이 부상을 입게 한 북한에 대해 단 1원이라도 배상 · 보상을 요구했습니까? 일본에 대해선 배상을 요구하면서, 훨씬 더 큰 피해를 준 북한에 대해선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게 정상입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20. 반일 종족주의의

     신학                               이영훈

 

 

 

경북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의 묘제(김광억 촬영).

 

 

 

민족의 태양 김일성을 숭배하는 북한 주민.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

한국의 정치가 자유민주체제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가 자유시장경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가 선진적 교양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이 역사와 함께 오랜 반일 종족주의로부터 탈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닐 터입니다. 느린 속도로 흐르는 장기지속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정보 · 통신혁명이 급하게 진행 중입니다. 장기지속의 시간도 빨라졌음이 분명합니다. 노력하면 한두 세대 만에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서 반일 종족주의 청산을 위한 일대 문화혁명을 추진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21. 우리 안의

     위안부                  이영훈

 

 

 

김학순의 위안부 국내 첫 증언, "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기사 (『조선일보』 1991.8.16).

 

 

 

부류별 성병 검진 여인의 실수(명)

구분 1955년 1959년 1966년
총수 110,642              164,461               391,713             
땐사
위안부
접대부
밀창
3,196             
61,833             
14,020             
31,593             
4,734              
98,891              
21,285              
39,561              
8,524             
250,964             
32,856             
99,369             

자료: 『보건사회통계연보』 각년도판.

 

땐사 - dancer(영), 예기(藝妓)(일정기) - 요리점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여인

위안부(창녀) - prositute(영) - 유곽이나 사창가에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

접대부 - entertainer(영), 작부(酌婦)(일정기) - 음식점에서 객석에 앉아 손님의 술시중을 드는 여인

밀창 - harlot(영), 여급(女給)(일정기) - 까페, 빠, 다방, 여관 등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인

 

 

 

제5연대가 후방으로 나왔다. 나는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장병에게 티켓을 우선 배분했다. 티켓을 받은 19세의 박판도 중사는 숫총각이었다. 위안부대의 천막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분대원들이 억지로 밀어 넣었다. 여자가 박판도의 물건을 만지며 숫총각이라 놀리자 박판도는 도망쳐 나왔다. 다음날 박판도는 재시도 끝에 결국 성공하였다. 박판도는 티켓을 한 장 더 달라고 하였다. 우리 부대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박판도는 이쉽게도 전사하였다.

- 채명신, 회고록 『사선死線을 넘고 넘어』에서 위안부에 대한 회고

 

 

 

1970년대 동두천 기지촌의 풍경. ⓒ 구와바라 시세이原史成, 사진제공 눈빛출판사

 

 

 

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운동가들은 한국 국민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베푸는 관심과 배려를 미군 위안부 문제에도 동일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군 위안부나 일본군 위안부는 그 역사적 속성에서 동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국 국민은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 기묘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종사하는 사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선을 그어왔습니다.

이 어색한 불균형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보기에 두 그룹의 주장이 다 정치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파장은 전혀 다릅니다. 다름 아닌 반일 종족주의가 그 해답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은 더 없이 분노합니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집단 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할 집단 정서가 없습니다. "나는 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은 불과 두세 명입니다. 나아가 "나는 한국군 위안부였다"고 폭로한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백을 권유받은 여인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집단 정서가 거기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호와 지원은 커녕 '역사상 가장 오랜 직업'에 종사한 비천한 여인으로 내쳐질 위험성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밑바닥에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종족주의적 적대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해방 후 '우리 안의 위안부'에 관한 고찰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일깨웁니다.

 

 

 

22.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이영훈

 

 

 

대좌부 창기업의 개황 (1929년)

구분 일본인 조선인
창기수 1,900명 1,385명 3,285명
유객수 450,615명 110,683명 561,298명
유객 1인당 유흥비 8원 4월  
창기 1개월 접객수     14.2명

출처: 宋連玉(1994), 「日本の植民地支配と國家的管理賣春 - 朝鮮の公娼を中心にして」.

비고: 창기 1개월 접객 수는 필자가 계산한 것임.

 

 

 

서울 신마치新町의 유곽 거리.

 

 

 

 

인천 시키시마 유곽의 개황(명, 원)

연도 조선인루 일본인루
호수 창기수 유객수 소비액 호수 창기수 유객수 소비액
1924 25   95 10,084   38,428 14 115 22,972 190,902
1937 27 149 24,974 101,872  8  83 22,913 199,366

출처: 『동아일보』 1925년 2월 10일; 1938년 2월 3일.

 

 

 

종래 상놈은 극도로 타락해서 신도信道의 자유도, 취학의 자유도 없이 그야말로 사람의 부스러기로 살아왔다. 양반은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놈도 스스로를 우습게 여겼다. 염치와 도덕이니 하는 것은 그들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난은 한층 그들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조선의 창기하면 누구나 경상도 여자가 가장 많음을 생각할 것이다. 그곳에 가서 알아보니 창기들은 모두 미천한 상놈들의 생활난으로 자기의 딸을 방매한 것이다.

- 『개벽開闢』, 1921년

 

 

 

딸을 팔아먹는 것은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다. 남의 딸이나 제 아내를 파는 일도 있다. 팔아서 먹는 놈이 있는 한편에 사다가 먹는 놈도 있다. 이른바 창기, 예기, 작부, 첩 같은 것이다.

- 이광수李光洙, 「팔려가는 딸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중략)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 현진건玄鎭健, 단편소설 「고향」

 

 

 

23.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위안소 벽에 부착된 위안소 규정.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일로 소개되었다. 의뢰인들은 다액의 수입, 가족 부채의 면제, 고되지 않은 노동,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을 미끼로 제공하였다.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을 받고 응모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매춘업에 종사해 왔지만, 대부분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였다.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개인별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영업하였다. 식사는 위안소의 업주가 제공하였다.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장(시모노세키下関 우체국)

 

 

 

 

군산시 위안부의 인공유산 횟수(1934년, 명)

인공유산 횟수 한국인 상대 188명 중 미군 상대 132명 중
1
2
3
4
5
6
7
15 
20 
26
 3
 2
 1





20
16
13
 1
10
 3
 1
 2
 2
31 68

출처: 朴大根(1964), 「慰安婦들에 대한 社會醫學的 調査硏究 - 群山地區를 中心으로-」.

 

 

 

그녀는 죽기 얼마 전 그녀를 찾은 모리카와 마치코에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위안부 생활했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어. 대구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가족을 얼마나 보살폈는데. 필사적으로 돈을 모았어. 남자들은 왜 그런지 나를 좋아했어. 사람들은 말했어. '당신은 눈이 동그란 것이 아주 예뻐.' 내 목소리는 맑고 예뻐서 높은음도 잘 낼 수 있었어. 내 노래는 일본 군인들을 즐겁게 했어. 나는 군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어. 야마다 이치로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어." 그렇게 그녀는 죽는 날까지 결코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반 나부랭이들이, 직업적 운동가들이 품은 반일 종족주의의 적대 감정과는 거리가 먼 정신세계였습니다.

 

 

 

24.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주익종

 

 

 

<사르븬江에 노을이 진다> 포스터 (제공 양해남)

 

 

 

요시다 세이지의 책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 (왼편, 1983년간)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오른편, 1977년간).

 

 

 

우물가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소녀 이미지(김명서 작).

 

 

 

 

1970년대까지 위안부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에는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40년도 넘게 지나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어지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자 가공의 새 기억이 만들어지면서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겁니다. 해방 이후 45년은 한국인 머릿속에 위안부에 관한 새 기억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25.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 정대협 활동사                               주익종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되었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있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그를 담당했지만, 이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한 사례가 많이 있었으며, 당시 관헌 등이 직접 모집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또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 상황 아래서 처참한 것이었다.

결국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 기회에···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여 몸과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한다. 또한 이러한 뜻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관한 것은 전문가의 의견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내각 관방장관 담화河野談話, 1993.8.4.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2019.5.30. 촬영)

 

 

 

 

서울 남산의 옛 통감관저 터에 만든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2016년 8월 29일 조성)

 

 

 

인터뷰 연도별 위안부가 된 경로 답변

위안부 증언록 출간 연도 취업권유, 전차금 유괴, 약취, 납치
1권 1993 15 4
2권 1997 9 5
3권 1999 9 5
4권 2001 3 4

 

 

 

 

진정 원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이었다면, 먼저 일본을 공격할 게 아니라, 1990년까지 우리의 45년을, 아니 그 이후까지 포함해서 해방 70여년을 반성해야 했습니다. 딸을 팔아먹은 것도, 가난한 집 딸을 꾀어 위안부로 넘긴 것도, 또 그 딸이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도, 설령 돌아왔더라도 사회적 천시 속에서 숨죽여 살도록 한 게 우리 한국인 아니었습니까? 근 50년간 지독하게 무관심하지 않았나뇨. 50년 만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어 일본을 끝없이 공격해 결국 한일 관계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간 것, 이게 바로 1990년 이후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사였습니다.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반일 종족주의를 이 위안부 문제의 전개에서 봅니다. 

 

 

 

Posted by 드무1
,

2020-019 속초

 

 

 

 

 

 

 

김영건 지음

2019, 21세기북스

 

 

대야도서관

SB153169

 

 

911.42

김64ㅅ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1

 

 

 

속초는 빠르게 변화 중이다

실향민의 도시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로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기록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진다. 특히 정규 교과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1970~80년대 이후의 한국은 젊은 세대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속초에 관한 책이 없답니다.

- 그래서 이 책을 썼습니다.

속초 도슨트 김영건

 

 

속초 사람이 쓴 속초 책

여행자가 아니라 속초인의 내부적 시선으로 쓰여진

최초의 속초 안내서

 

 

동명동성당, 문천당, 칠성조선소, 대포항 등

속초의 핫플레이스 24곳에서 건져 올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김영건

 

1987년에 속초에서 태어났다. 2015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속초에서 동아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당신에게 말을 건다』를 썼고, 2018년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를 기획하고 인터뷰했다. 속초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내일의 속초를 생각하는 일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내는 일과 맞닿아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속초 도슨트 김영건
속초의 짧은 역사 ㆍ 언제나 젊은 도시 속초

01 동명동성당 - 전쟁 중에 지어진 유일한 성당
02 문천당 -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가게
03 청초호 - 속초의 땅과 바다를 잇는 문
04 갯배선착장 - 속초와 속초를 이어주는 갯배
05 수복탑과 수복로 - 북한으로부터 되찾은 땅을 기념하며
06 칠성조선소 - 살롱과 뮤지엄으로 재탄생한 산업의 현장
07 영랑호 - 신라시대 화랑도 반한 호수
08 보광미니골프장 - 세상에 하나뿐인 골프장
09 등대전망대 - 짧지만 꽉 찬 속초 여행을 꿈꾼다면
10 영금정과 동명항 - 파도 소리를 품은 정자와 항구
11 비단우유차 - 속초에 둥지를 튼 밀크티
12 중앙시장 - 속초에서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시장
13 순대골목 - 아바이순대가 담긴 속초만의 순댓국
14 김송순아마이젓갈 - 식혜가 아니라 식해
15 조양동 선사유적지 - 3,000년 전에도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
16 속초시립박물관 - 인문학적 속초 여행의 시작점
17 대포항 -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속초의 관문
18 설악산 자생식물원 - 속초판 타샤의 정원
19 동아서점 - 3대째 이어온 특별한 동네서점
20 (구) 수협 건물 - 사라져 가는 속초 수산업의 영광
21 조도 - 속초해변의 정체성을 이루는 작은 무인도
22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 - 우리는 속초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23 학무정 - 고고한 선비를 닮은 소나무숲
24 완벽한 날들 - 닭강정 없이도 완벽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곳

대한민국 도슨트 ㆍ 속초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속초 연표
참고 자료

 

 

 

근대 이후

속초는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변화했다.

그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실향민의 도시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로.

 

 

중앙시장, 칠성조선소, 동아서점, 아바이순대, 청초호, 영랑호, 속초해수욕장, 아바이마을, 함흥냉면, 김송순아마이젓갈,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북청사자놀음(속초사자놀이),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 비단우유차, 갯배선착장, 동명동성당, 영금정, 문천당, 99강원국제관광엑스포상징탑(엑스포타워), 엑스포공원, 철새도래지, 석봉도자기미술관, 우동당, 속초시립박물관, 아트플랫폼 갯배, 수복기념탑, 오징어난전, 도루묵축제, 양미리축제, 커피벨트(Coffee belt), 조롱박(즉석 떡볶이 전문점), 천일이용원, 습지생태공원, 범바위, 화랑도체험관광지, 카누체험장, 스토리자전거, 보드니아, 보광미니골프장, 등대전망대(영금정 등대전망대), 등대해변과 포장마차, 동명항 난전, 유람선 야식, 동명항, 속초관광수산시장, 아바이마을, 함흥냉면옥, 진미막국수, 조양동 선사유적지, 척산온천, 크래프트루트, 너울집, 설악산국립공원, 그나데, 커피벨트, 조롱박, 내일은니가쏴라,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 장사항, 소풍, 어나더블루, 학무정, 상도문 한옥마을, 목우재 벚꽃길, 딸기마을, 알쉬미커피, 완벽한 날들

 

 

 

대포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속초에서는 산, 바다, 호수를 모두 만날 수 있다. 속초의 대표 항구인 대포항이지만 오늘날엔 어선보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양강지풍 통고지설. (讓江之風 通高之雪)

 

양양과 강릉에는 바람이 세고, 통천과 고성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는
이 지방의 기후특성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다.

 

[출처] 2005년 5월 4일 - 양강지풍 통고지설|작성자 강가에 부는 바람

 

 

 

바닷물이 고여 만들어진 청초호  청초호는 개발과 오염으로 몸살을 앓으면서도 놀라운 자정능력으로 청명함을 유지하고 있어 매년 철새들이 도래한다.

 

 

 

1950년대 명태관태작업  말린 명태를 싸리로 한 쾌에 20마리씩 꿰는 작업을 관태라고 한다. 멍석에 앉아 관태작업이 한창인 모습이다.

 

 

 

1950년대 아바이마을 전경  청초호와 동해 사이의 작은 섬 지역에 대충 지은 움막과 판자로 지은 건물들이 빼곡하다. 속초시내에서 청호동 아바이마을 사이에는 청초호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아바이마을 주민들의 주 이동수단은 갯배였다. 지금은 동명항에서부터 방파제를 축조해 놓았지만 당시에는 태풍과 거센 풍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동해안 끝자락의 이 위험한 곳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의 고난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북청사자놀음을 즐기는 1950년대 속초 사람들  함경남도 북청의 전통 민속극 북청사자놀음은 실향민에 의해 속초에도 전승되었다. 속초사자놀이라는 이름으로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31호에 지정되면서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01 동명동성당

전쟁 중에 지어진 유일한 성당

 

 

 

1953년 속초성당  전쟁 중에 지어진 동명동성당의 건립 당시 모습. 본당을 둘러싼 울타리와 대문은 현재는 철거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동명동성당의 현재 모습  베이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성당 외벽은 건립 초기에는 검은색이었다. 당시 방수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 비가 내리면 돌로 된 지붕 위로 물이 새곤 하였는데, 이를 막기 위해 지붕 위에 드럼통을 쌓고 드럼통과 성당 외벽을 검은색 페인트로 칠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주민들은 동명동성당을 '검은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당 앞 고층건물 반대 현수막  동해와 조도가 보이는 성당 앞에 40층 고층건물이 들어서게 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될 것이다.

 

 

 

02 문천당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가게

 

 

 

초기 문천당의 모습  1951년 가을 당시 속초의 번화가였던 영랑동 1구시장에서 '문천시계점'이라고 쓰인 나무 입간판을 세우고 영업을 시작한 것이 문천당의 시작이었다.

 

 

 

 

 

문천시계점이 위치한 중앙동 사거리 전경(1968년)  오랜 시간이 흐르며 중앙동의 모습도 문천당의 외관도 여러 번 바뀌어왔다. 그러나 이 노포가 7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속초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어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 문천당 외부에 걸린 시계  중앙시장 옆에 위치한 문천당 앞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사람들이 언제든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커다란 시계가 달려 있다.

 

 

 

03 청초호

속초의 땅과 바다를 잇는 문

 

 

 

청초호 엑스포타워  속초에서 이동 중에 엑스포타워가 보이면 청초호 주변이라는 뜻이다. 청초호를 보고자 하는 이들은 호수와 물결과 철새보다 이 타워를 먼저 볼 수 밖에 없다.

 

 

 

04 갯배선착장

속초와 속초를 이어주는 갯배

 

 

 

가을동화 은서네집  갯배선착장에는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였던 은서네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 여행객들을 반기고 있다. 속초의 중요한 교통수단에서 관광자원으로 변모한 갯배의 위상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예전 갯배(위)와 현재 갯배(아래)  속초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예전의 갯배가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면 관광객을 위해 운영되는 새로운 갯배는 FRP로 만들어졌다. 크기도 35명 정원으로 새로운 갯배가 훨씬 작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예전 갯배는 이제 청초호 물 위가 아닌 설악산 한가운데 놓여 있다. 속초시립박물관 야외 공간에 청초1호가 전시되어 있고, 갯배선착장에는 청초2호가 전시되어 있다. 위 사진은 속초시립박물관에 있는 청초1호의 모습이다.

 

 

 

05 수복탑과 수복로

북한으로부터 되찾은 땅을 기념하며

 

 

 

수복탑의 모자상  1954년 처음 세워졌던 수복탑이 강풍으로 훼손되어 1983년 11월 17일 다시 세웠다. 복원된 탑에는 화강암 재질로 폭 4m, 높이 7m의 받침대에 높이 2.55m의 모자 동상을 세웠고, 탑 뒷면에는 '민족 통일'이라는 네 글자를 한자로 새겼다. 처음 세워진 모자상은 어머니와 아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1983년에 새로 세워진 모자상은 아들이 손으로 북쪽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속초시립박물관으로 옮겨진 옛 속초역사 건물  1941년 세워진 동명동 450-195번지에 있었던 속초역사. 북한 땅의 원산과 양양을 잇는 동해북부선이 지나던 속초역사는 38선 이북지역에 속해 북한의 통제 하에 있었고, 휴전 후 1950년에는 미군항만사령부의 취사장과 댄스홀로 사용되기도 했다. 동해북부선의 철로가 가로막히면서 속초역사 역시 제 기능을 잃고 1978년 끝내 처거되었다.

 

 

 

수복로의 오래된 이발소  빛바래고 덧칠한 간판에서 건물의 세월이 느껴진다. 예스러운 골목과 건물들은 수복로의 정취를 더하는 소중한 풍경들이다.

 

 

 

06 칠성조선소

살롱과 뮤지엄으로 재탄생한 산업의 현장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칠성조선소의 모습

 

 

 

1950년대 배 목수들이 목선을 건조하는 모습  목선은 한옥이나 목조 건축과 다르게 나무를 구부리는 기술이 핵심이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물이 스며들지 않아야 한다. 배 목수는 집을 짓지만 집 목수가 배를 못 만드는 차이가 여기 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플라스틱 배(FRP)가 나오면서 목선과 함께 배 목수도 사라지고 있다.

 

 

 

옛 조선소의 흔적들  닻은 얕은 바다나 강가에 배를 정박시킬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물속에 있어야 할 닻이 육지에 놓여 있는 모습이 속초 조선업의 현재를 보여준다.

 

 

 

07 영랑호

신라시대 화랑도 반한 호수

 

 

 

영랑호의 범바위  영랑호 주변에는 바위가 많다. 그증 범바위는 속초팔경 중 제2경으로 호랑이가 웅크리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위는 영랑정이라는 정자 바로 옆에 있어 찾기가 쉬우며 범바위에 오르면 속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08 보광미니골프장

세상에 하나뿐인 골프장

 

 

 

울창한 소나무숲에 위치한 보광미니골프장 외관  알록달록한 보광미니골프장의 간판 위로 파란색으로 새로 칠한 창틀과 새 간판이 보인다. 한편 예전 모습을 그대로 둔 왼편 갈색 창틀과 슬레이트 지붕은 건물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미니골프를 즐기는 사람들  총 17개의 코스는 제각각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중장년과미니골프를 처음 경험하는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옛날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보광미니골프장  보광미니골프장에는 이제는 학교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사각형의 타일로 마감된 작은 수돗가가 있고, 각 코스들에는 서툴지만 정확한 글씨로 코스의 이름과 점수가 적혀 있다.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매점으로 들어가면 옛날 그대로의 냄새가 난다. 옛날의 감성을 뽐내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소품들로 장식한 게 아니라, 주판, 연필깎기 같은 옛날부터 존재하던 모든 것을 위에 시간이 그대로 쌓여 복제 불가능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09 등대전망대

짧지만 꽉 찬 속초 여행을 꿈꾼다면

 

 

 

 

1957년 건립 당시의 속초등대전망대  속초등대, 영금정 등대전망대라고도 불리는 속초 등대전망대는 1957년 6월 8일 건립과 함께 최초로 점등한 후 지금까지도 속초의 어민들을 위해 바다를 밝히고 있다.

 

 

 

 

돌산 위에 위치한 등대전망대 건물 외관(위)과 바다를 향해 있는 등대전망대 모습(아래).  총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약 10m 높이의 이 하얀 건물은 속초를 찾는 사람들의 길잡이이자, 속초 앞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다. 등대전망대에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속초 시내와 설악산, 동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등대해변 뒤쪽 골목길 풍경  등대해변의 포장마차거리 뒤쪽에 있는 영랑동과 장사동은 속초의 구시가지로 수복 직후 한동안 속초의 시내이자 번화가였다. 지금은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낮은 1층 집들과 잘 가꿔진 작은 화단들을 볼 수 있는 골목길로 남아 있다.

 

 

 

10 영금정과 동명항

파도 소리를 품은 정자와 항구

 

 

 

영금정의 첫 번째 정자(왼쪽)와 두 번째 정자(오른쪽)  첫 번째 정자가 1997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만들었던 원래 정자이고, 두 번째 정자는 최근에 새롭게 만든 정자이다. 두 정자는 높이가 다르고 바다와의 거리도 달라서 각기 다른 바다 풍광을 선사해준다.

 

 

 

속초항북방파제등대(위)와 동명항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오징어 난전(아래)  지금은 등대도 난전도 새단장되어 깔끔한 외관이지만, 동명항의 역사는 같다.

 

 

 

11 비단우유차

속초에 둥지를 튼 밀크티

 

 

 

병에 담겨 판매되는 비단우유차  차를 우려내 끓인 후 숙성 과정까지 거치는 비단우유차는 현재 7가지 종류로 개발되어 있다.

 

 

 

삼화제재소 건물 2층에 위치한 비단우유차  이 건물 측면 쪽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단우유차를 만날 수 있다. 옛것을 부수고 새롭고 깔끔한 건물을 세우기 바쁜 도시에서 낡고 오래된 건물의 정취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비단우유차의 외관과 재료 본연의 맛을 실린 은은한 우유차의 맛, 그리고 켜켜이 세월을 쌓으며 일하고 싶다는 주인장의 말이 부드럽게 겹쳐진다.

 

 

 

12 중앙시장

속초에서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시장

 

 

 

 

중앙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들  오징어를 비롯한 싱싱한 해산물과 새우튀김, 닭강정, 젓갈, 아바이순대 등 속초의 다양한 먹거리를 한자리에서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중앙시장이다.

 

 

 

중앙시장의 건어물가게  중앙시장은 관광객들을 위한 시장이기 이전에 속초시민들의 장터였다. 1960년대에는 '명태시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명태와 오징어 등의 건어물시장으로 유명했다. 속초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보니, 시장 또한 각종 수산물들이 거래되는 장소였던 것이다. 중앙시장이 발전하면서 계속 접포 수가 늘었지만,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종은 물론 건어물이었다.

 

 

 

13 순대골목

아바이순대가 담긴 속초만의 순댓국

 

 

 

중앙시장의 순대골목과 순댓국  중앙시장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순대골목. 가게마다 커다란 양은솥을 걸고 순댓국을 팔팔 끓이고 있어서 골목에 구수한 냄새가 가득하다.

 

 

 

14 김송순아마이젓갈

식혜가 아니라 식해

 

 

 

가자미식해 명인 김송순아마이젓갈  대부분의 식해 전문점과 젓갈을 대량으로 납품받아 판매한다. 반면 김송순아마이젓갈은 가족들이 여전히 직접 식해를 담그고 있다. 할머니는 2015년 속초의 '가자미식해 명인'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15 조양동 선사유적지

3000년 전에도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

 

 

 

조양동 선사유적지의 움집  청동기시대 거주지였던 조양동의 움집은 바닥을 파고 만든 형태로 어뜻 지붕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속초시립박물관의 전시실과 전망대  제1전시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근세까지 속초의 역사를 만날 수 있고, 제2전시실에서는 어업과 실향민의 문화 등 속초의 현재를 만날 수 있다. 전시실을 나와 전망대에 오르면 실향민문화촌과 발해역사관은 물론 설악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실향민문화촌의 아바이마을 청호동 골목  물자가 없어 판자, 깡통 등을 구해다가 만든 작은 부엌과 단칸방으로 이루어진 당시 공동주택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놓았다. 50년이 넘은 오래된 가옥들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고향을 잃은 피난민의 고난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17 대포항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속초의 관문

 

 

 

아치형의 대포항 옆 주차장(위)과 대포항의 튀김골목(아래)  110여년 전 개항하여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고,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대포항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포항의 역사를 알리는 이정표나 설명은 찾기 힘들고 튀김골목과 횟집 등 각종 상업시설과 간척사업으로 만든 넓은 주차장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8 설악산 자생식물원

속초판 타샤의 정원

 

 

 

 

설악산의 축소판 설악산 자생식물원  설악산을 향하는 속초의 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웅장한 설악산의 원경과 설악산에 서식하는 식물들의 근경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

 

 

 

설악산 자생식물원의 암석원  설악산의 희귀 식물과 고산지대에서 생육하는 식물들이 있다. 설악산 등산을 하더라도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식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설악산을 만나는 또다른 방법이다.

 

 

 

19 동아서점

3대째 이어온 특별한 동네서점

 

 

 

 

1960년대 동아서점의 모습  동아서점은 1956년부터 속초를 지켜온 속초의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문구류를 빼고 본격적으로 서점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66년의 일이다.

 

 

 

동아서점의 현재 모습  60년이 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점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의 책 목록과 운영 방식도 계속 변화해왔다.

 

 

 

 

동아서점의 북규레이션  오직 동아서점에서만 볼 수 있는 책의 분류와 소개다.

 

 

 

20 (구) 수협 건물

사라져가는 속초 수산업의 영광

 

 

 

1950년대 동명항 부두에 입항한 어선  돌로 만든 작은 방파제에 입항한 어선을 맞이하는 어민들이 빼곡하다. 어획한 생선을 내리는 분주함과 줄줄이 입항 대기중인 어선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활기와 생활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수협 어판장 부두  수협 어판장에 어민들이 조업한 수산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태, 오징어, 꽁치, 양미리 등 어종과 어획량이 풍부해 속초 수산업의 중심지이자 속초의 중심지로 가능했던 수협 건물은 속초의 어민, 상인, 시민 모두의 터전이었다.

 

 

 

구 수협 건물의 현재 모습  낙후된 상태로 방치된 커다란 공간을 철거하고 경제적으로 사용하자는 의견과 수협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21 조도

속초해변의 정체성을 이루는 작은 무인도

 

 

 

속초해수욕장 앞 조도  속초 사람들은 '섬'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조도를 떠올린다. 1984년에 세운 무인등대를 둘러싼 아직 어린 해송들이 애처롭다.

 

 

 

22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

우리는 속초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의 외관  '완앤송'은 박재완 씨와 송지은 씨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고, 좋아하는 곳에서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집이자 일터를 꾸미고자 했던 생각 그대로 '하우스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부부의 진지한 생각이 담긴 이름이기에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완앤송하우스레스토랑의 대표 메뉴 쌀국수  속초에 쌀국수를 파는 가게가 없어, 본인들이 먹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쌀국수가 이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가 되었다. 독특한 향취의 이국 욜;를 호수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먹는 경험은 이곳만이 선사하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23 학무정

고고한 선비를 닮은 소나무숲

 

 

 

 

학무정 가는 길에 있는 마을 풍경  한옥마을인 상도문동에 있는 작은 가게. '육모정'은 육각형의 정자, 즉 학무정을 이르는 말이다. 우표와 필름을 판매한다는 시트지가 붙어 있는 걸로 짐작컨데, 영업을 하지 않은 지 꽤 되어 보인다. 학무정을 세운 오윤환 선생의 생가가 있는 상도문동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는 동네이다.

 

 

 

노송들에 둘러싸여 있는 학무정(위)과 내부에 걸린 현판(아래)  정자의 크기는 너무 작고, 그 주변의 조성된 상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박하다. 각기 다른 이름의 현판이 4개나 걸려 있다. 게다가 높다랗게 빼빽이 자란 소나무들에 가려져 정자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모로 그냥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24 완벽한 날들

닭강정 없이도 완벽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곳

 

 

 

 

문이 활짝 열린 1층의 서점과 2층의 게스트하우스  서점, 게스트하우스, 카페가 결합된 완벽한 날들은 책을 중심으로 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여백과 쉼이 있는 조용한 속초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대한민국 도슨트 · 속초 인문 지도

영랑호 · 청초호 주변

 

 

 

 

대한민국 도슨트 · 속초 인문 지도

노학동 · 대포동 주변

 

 

 

 

 

 

Posted by 드무1
,

2020-018 통영

 

 

 

 

 

 

이서후 지음

2020, 21세기북스

 

 

대야도서관

SB144511

 

 

981.18802

이54ㅌ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6

 

 

새로운 문화가 숨 쉬는

바다의 땅 통영은

언제나 푸르다

 

 

예술가의 고뇌와 장사치의 잇속이

뒤섞여 있는 게 통영의 골목들이다.

통영 도슨트 이서후

 

 

동피랑 벽화마을, 미륵산, 욕지도

세병관, 윤이상기념공원

봄날의 책방, 삼문당커피컴퍼니 등

 

종잡을 수 없는 '통영스러움'을 찾아

골목골목을 없는 '통영스러움'을 찾아

골목골목을 직접 밟으며

발견해낸 28곳의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기록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진다. 특히 정규 교과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1970~80년대 이후의 한국은 젊은 세대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서후

 

경상남도 토박이로, 지금은 창원에 살지만 바다가 고플 때면 언제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통영으로 달려간다. 지금은 <경남도민일보> 문화체육부 기자로 일하며 일상 속 소박한 풍경과 이야기를 발견하는 여행지로 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경남 남해를 1년간 걸으며 기록한 『남해 바래길』, 경남 둘레길을 소개하는 『경남을 걷다』(임용일 공저), 경남 유 · 무형 자산에 얽힌 스토리를 담은 『한국 속 경남』(남석형외 공저)이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통영 도슨트’ 이서후
통영의 짧은 역사 ㆍ 새롭게 피어나는 문화도시 통영

01 서피랑 - 통영이 한눈에 보이는 서쪽 벼랑
02 서피랑 99계단 - 서피랑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
03 박경리 문학동네 - 『김약국의 딸들』이 펼쳐지는 소설 속 동네
04 정당샘 -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던 우물가
05 세병관 -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조선시대 객사
06 삼문당커피컴퍼니 - 통영 힙스터들의 아지트
07 동피랑 벽화마을 - 철거 위기 달동네에서 통영 대표 관광지로
08 강구안 - 포구에서 먹는 충무김밥과 꿀빵
09 남망산 조각공원 - 15개 조각품과 두 팔 벌린 소녀상
10 울라봉·미륵미륵 - 쌍욕라떼 카페와 수제맥주 호스텔
11 윤이상기념공원 - 동서양 음악의 중개자 윤이상
12 통영옻칠미술관 - 한국 현대 옻칠 예술의 중심지
13 통영운하 -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 좁은 물길
14 봉숫골 - 봄날의 책방, 전혁림미술관, 내성적싸롱 호심
15 미륵산 - 통영 풍경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산
16 통영국제음악당 - 음악창의도시 통영에서 즐기는 클래식
17 박경리 묘소 - 작가의 성품을 닮은 소박한 무덤가
18 만지도 - 명품마을에서 먹는 전복해물라면
19 욕지도 - 신선한 고등어회와 장쾌한 바다 풍경
20 당포성지 - 이순신 장군이 되찾은 산성과 바다
21 사량도 - 대한민국 섬 트레킹의 성지
22 카페 배양장 - 멍게배양장과 아메리카노의 공존
23 평인노을전망대 - 굴과 멍게가 가득한 맑은 바다
24 시락국골목 - 서호시장에서 만나는 통영의 맛
25 항남동 도깨비골목 - 제철 해산물이 한 상 가득, 통영 다찌
26 김용식·김용익기념관 - 서양을 사로잡은 마술의 펜
27 중앙동우체국 - 청마가 부친 5,000통의 연애편지
28 견내량 - 거센 물살이 키운 진상품 돌미역


대한민국 도슨트 ㆍ 통영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통영 연표
참고 자료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 「통영(統營)」 중에서

 

* 백석, 『백석 시전집』, 지만지, 2012.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투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으로 몇천만 년 동안 몇천 몇백 사람들을 겪어오다가 ···

 

 

두룡포기사비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던 두룡포에 통제영이 세워진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 바다의 도시 통영의 뿌리를 살필 수 있는 사적비다.

 

 

타관의 영락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온 말일 게다.**

 

**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인구가 4만 여. 항구도시로 시가의 중심지는 모두 일본 사람이 차지하고, 우리 민족들은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3 · 1운동 때 격렬한 만세 운동이 퍼졌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예수교가 일찍 들어왔고(호주선교회 구역) 그를 따라서 서양문화가 들어와, 민족정신도 일찍 깨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민족의 피에 줄기차게 깨끗한 정열이 생동하고 있었다.

- 윤이상 '회수록' 중에서

 

 

 

미륵산 케이블카  관광도시 통영의 전성기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제 다른 지역에도 케이블카가 많이 생기고, 여행 문화가 변화하면서 통영 관광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서피랑, 통제영, 서포루, 동포루, 북포루, 세병관(국보 305호), 동피랑, 뚝지먼당, 통영 문화동 배수시설, 명정동, 통영시 문화동 328-1, 박경리 생가, 서문고개, 서피랑 99계단, 동피랑 벽화마을, 서피랑 일주도로, 피아노 계단, 200년된 후박나무, 유채 · 코스모스 동산, 서피랑 목장, 서호벼락당, 서피랑 떡복기집, 서피랑 공작소, 나전 카페 '새미', 전기불터, 삐삐책방, 한옥스테이 잊음, 충렬사, 서피랑 문학동네(박경리 문학동네), 공덕귀 여사 생가터(핍박받는 자의 울타리), 정당샘(명정), 충렬사 돌계단, 통영인디페스티벌, 두룡포기사비, 미륵산 케이블카, 한산도 제승당, 이순신공원, 문화동 벅수, 삼문당커피컴퍼니,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동피랑 할머니 바리스타, 강구안, 남망산 조각공원, 동호만, 청마 유치환 생가, 청마문학관, 울라봉 카페, 미륵미륵 호스텔, 윤이상기념공원, 도천음악마을, 통영옻칠미술관, 통영시립박물관, 통영옻칠미술관, 화삼리마을, 통영RCE 세자트라숲, 통영운하, 통영 해저터널, 착량묘, 봉숫골, 봄날의 책방, 전혁림미술관, 내성적싸롱 호심, 용화사, 빌레트의 부엌×봉수, 니지텐, 모노드라마, 릴리봉봉, 몸과 마음, 오월, 미륵산, 삼칭이길, 복바위, 박경리 묘소, 박경리 기념관, 만지도, 전복해물라면, 몬당길, 만지도 출렁다리, 욕지도, 빼떼기죽, 고등어회, 욕지도 모노레일, 대기봉, 고양이, 소매물도 등대섬, 장사도 해상공원 까멜리아,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 기념비, 당포성지, 삼덕리마을제당, 할배 벅수, 할매 벅수, 달아공원, 통영 767, 수산과학관, 사량도 지리산, 최영 장군 사당, 사량도 일주도로, 카페 배양장, 어부박물관, 평인노을전망대, 평인노을길, 시락국골목, 도다리쑥국, 서호시장, 중앙시장, 북신시장, 거구장, 중앙시장 회초장집, 가두리, 항남동 도깨비골목, 통영 다찌,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 김용식 · 김용익기념관, 당산, 태평동 언덕, 중앙동우체국, 초정거리, 김춘수 동상, 청마문학관, 견내량, 통영타워, 

 

 

 

 

01 서피랑

통영이 한눈에 보이는 서쪽 벼랑

 

 

 

서포루  서피랑 정상에 서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 오르면 통영 시내뿐 아니라 바다 건너 미륵산까지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통영 지도  북포루, 동포루, 서포루와 세 누각을 잇는 삼각형 모양의 통제영 성곽이 보인다.

 

 

 

통영 문화동 배수시설  1933년 일제가 통제영 장군기를 모신 뚝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든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상수도시설이다.

 

 

 

자연은 인성을 풍요롭게 하고 감성을 길러주는 교사입니다. ······ 오늘날 자연은 더 이상, 물질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도 생명이고 나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 박경리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한실댁은 코를 풀고 멍멍한 소리로 말하며 마등으로 내려와 용란의 손을 잡았다.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그들은 서문고개를 넘는다.***

 

***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02 서피랑 99계단

서피랑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

 

 

서피랑 99계단

 

 

 

서피랑 떡복기집  통영시의 지원으로 지금은 가게 외관이 깔끔해졌다. 특별한 비법이랄게 없는 동네 떡복기집이지만, 할머니가 직접 만든 튀김과 국물 떡복기를 맛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

 

 

 

03 박경리 문학동네

『김약국의 딸들』이 펼쳐지는 소설 속 동네

 

 

 

삐삐책방

 

 

 

한옥스테이 잊음

 

 

 

04 정당샘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던 우물가

 

 

 

정당샘  이순신 장군의 향사를 지낼 때 쓰였던 일정과 마을 주민들이 사용했던 월정,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빨래터였던 수로가 한눈에 보인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한때 일정, 월정을 합하여 팔각정으로 개축하였더니 돌림병이 발생하는 이변이 생겨 팔각정을 허물고 명정으로 복원하였다. 이 샘은 햇빛을 받지 아니하면 물이 흐려지므로 지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오랜 가뭄에도 물이 줄어들지 아니하므로 몇 년 전만 해도 주민의 주요 식수원이 되어 왔었다.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 넷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통영 2」 중에서

 

** 백석, 『백석 시전집』, 지만지, 2012.

 

 

 

충렬사 돌계단

 

 

 

05 세병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조선시대 객사

 

 

 

세병관  일제강점기 학교로 사용된 세병관은 1872년 복원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세병관 현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현판으로 높이가 2m를 넘는다.

 

 

 

제일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는 교실이 세병관에 있었다. 내가 통영에서 태어난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친구들과 세병관 교실 칠판에 빨간 분필로 '대한민국독립만세'라고 쓰고 일본을 욕하는 글도 썼다.

 

- 소설가 박경리가 2004년 마산 MBC 토지 완간 10주년 특별 대담에서 한 말

 

 

 

화살과 나전함  12공방에서는 군수품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물건까지 만들었다. 통영 나전칠기, 소반 등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06 삼문당커피컴퍼니

통영 힙스터들의 아지트

 

 

 

삼문당의 스페셜티 커피  윤덕현 대표는 직접 커피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매번 계절에 어울리는 원두를 골라 직접 로스팅하고 블랜딩한다.

 

 

 

단골들은 커피만 마시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음악도 들어볼 겸 가수를 초대해 볼까 이야길 던지면 옆에 있는 친구가 인디밴드를 안다며 연락처를 건넨다. 좀 더 던지다 보면 그럴싸한 계획이 서고 결국 진짜 콘서트가 열린다.***

 

*** 밥장, 『밥장님! 어떻게 통영까지 가셨어요?』, 남해의봄날, 2019.

 

 

 

삼문당의 풍경  표구사 시절 삼문당을 지키던 병풍과 액자가 여전하고, 창밖으로 사진 같은 통영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07 동피랑 벽화마을

철거 위기 달동네에서 통영 대표 관광지로

 

 

 

"베르빡(담벼락)만 빌리주모 안 쫓기나도 되나?"

"그거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뭔가를 해보입시다."*

 

* 윤미숙, 『춤추는 마을 만들기』,남해의봄날,2015.

 

 

 

동피랑 벽화마을  2007년 마을 벽화를 그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참가자가 모였다. 동피랑 전국 벽화 공모전을 계기로 동피랑은 철거 위기 마을에서 통영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됐다.

 

 

 

한 달 정도 되었을까. 발 빠른 블로거와 카페쟁이들이 다녀가기 시작했다. 물론 언론에 난 기사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동피랑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묻는 이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하고 그 후 두어 달 지나니 주말이면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가기 시작햇다. 하나같이 카메라를 들고서**

 

** 윤미숙, 『춤추는 마을 만들기』,남해의봄날,2015.

 

 

 

여름이면 난닝구 차림으로 골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던 노인들이 집 안으로 갇혔다. 사진기를 훈장처럼 가슴에 하나씩 매단 방문객들은 아무 데나 무턱대고 렌즈를 들이대고 찍어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속곳도, 낡은 화장실도,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집 안의 남루한 일상까지, 덥고 습한데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제대로 없는 짐 안에서 노인들이 너무너무 갑갑하고 힘들어졌다.***

 

*** 윤미숙, 『춤추는 마을 만들기』,남해의봄날,2015.

 

 

 

동피랑 할머니 바리스타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가게에서는 할머니의 손맛이 깃든 커피와 음료를 맛볼 수 있다.

 

 

 

08 강구안

포구에서 먹는 충무김밥과 꿀빵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잘리어져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은 복장대 줄기를 타고 뻗은 안뒤산이 시가를 안은 채 고깃배가 무수히 드나드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뒤산 기슭에는 동헌과 세병관 두 건물이 문무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 잡고 잇었다. ······ 동헌에서 남문을 지나면 고깃배, 장배가 밀려오는 갯문가, 둥그스름한 항만이다.*

 

*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통영항 일대 매립지도  항남동 도깨비 골목 바닥에 있는 지도로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꾸준한 매립으로 강구안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충무김밥(위)과 꿀빵(아래) 먼 뱃길에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김밥과 반찬을 따로 싸 판매한 데서 유래한 충무김밥과 팥앙금을 넣고 튀긴 다음 조청, 물엿을 입히고 깨를 뿌려 만든 꿀빵

 

 

 

강구안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입구로, 강구안은 오래전부터 배를 대던 포구였다.

 

 

09 남망산 조각공원

15개 조각품과 두 팔 벌린 소녀상

 

 

 

남망산 조각공원  남망산 조각공원 내 15개 작품은 1997년 통영에서 열린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 결과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정의비  남망산 소녀상은 전국 각지에 만들어진 소녀상과는 모양이 다르다. 돌로 만든 여성이 통제영 방향으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다.

 

 

 

동호만 풍경  부두를 따라 정박한 수많은 어선과 항구 주변 공장들이 이곳이 삶의 엄중한 터전임을 증명한다.

 

 

10 울라봉 · 미륵미륵

쌍욕라떼 카페와 수제맥주 호스텔

 

 

 

울라봉의 쌍욕라떼  주문한 손님과 직접 인터뷰를 한 후 맞춤형으로 욕을 써주는 쌍욕라떼는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친 울라봉 카페의 전매품이다.

 

 

 

울라봉 지하에서 열린 공연  울라봉은 단순한 카페를 넘어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미륵미륵 호스텔  1층은 수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 2 · 3층은 객실과 명상을 위한 공간이다. 맥주와 명상은 미륵미륵이 추구하는 쉼의 중요한 요소다.

 

 

 

편한 오르막길에 냇물 흐르는 소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잇다는 안도, 담을 것은 단단히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마음 휴식을 찾아가는 느낌, 절에 찾아가는 기분을 담고 싶습니다.

 

 

 

11 윤이상기념공원

동서양 음악의 중개자 윤이상

 

 

 

윤이상기념공원  통영시가 윤이상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고자 2010년 그의 생가터가 있는 도천동에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만들었다.

 

 

 

문득, 앞날이 불투명한 가운데 학업에 몰두하던 파리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가 부쳐준 돈이 다 떨어지면 식권이 없어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암담한 날들도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독일로 건너와 악착같이 공부한 끝에 서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참관하여 충격을 받고 나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던 일들이 모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선욱, 『윤이상 평전』, 삼인, 2017.

 

 

 

구라파(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충무(통영)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 1994년 귀국이 좌절된 후 통영 시민에게 보낸 윤이상의 육성 메시지 중에서

 

 

 

나는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남과 북이 갈린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입니다.**

 

** 윤이상 · 루이제 린저, 『윤이상, 상처입은 용』, 알에이치코리아, 2017.

 

 

 

윤이상 흉상  평양 윤이상박물관의 흉상과 같은 동상으로 한동안 창고에 보관되는 등 곤혹을 치렀다.

 

 

 

윤이상의 베를린 하우스와 승용차  독일 유학 시절 윤이상이 쓰던 소지품뿐 아니라 가구까지 그대로 옮겨 놓은 베를린 하우스 내부와 그가 생전 타고 다니던 벤츠 승용차를 볼 수 있다.

 

 

 

윤이상이 어릴 적 살던 통영 도천동 집은 조금만 나가면 바로 바다였다. 돌담 밑을 흐르는 물결은 먼 고장의 아련함을 쉼 없이 실어 날랐다. 밤이면 파도가 꿈결을 타고 부서졌다. 낮에는 파란 물이랑이 끝도 없이 출렁였다. 바다는 윤이상의 가슴에 넘실거렸다. 파도 소리는 맥박을 타고 흘렀다.**

 

** 박선욱, 『윤이상 평전』, 삼인, 2017.

 

 

12 통영옻칠미술관

한국 현대 옻칠 예술의 중심지

 

 

통영에서 예술가가 많이 태어난 것은 이순신에서 출발한다. 이순신은 덕장이면서 예술가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은 한촌(閑村)이다. 해군본부가 들어서면서 8도의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기술자들도 다 모였다. 통영은 기후, 먹거리, 풍광이 아름다워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눌러앉아 소목장, 입자장, 선자장, 주석장이 되었다. 이들이 통영예술의 토양이었다.

 

- 소설가 박경리가 『토지』 완간 10주년 기념 특별대담에서 한 말

 

 

 

「칠예의 문」  옻칠 재료에서 평면 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김성수 관장의 작품으로 자개를 가공한 나전이 돋보인다. 그는 2002년 미국 이민 100주년 전시를 열면서 처음으로 고유명사 'Ottchil(옻칠)'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림 중에는 '화삼리 풍경'이라는 제목이 자주 등장한다. 통영에서 거제로 넘어가는 길 끝자락을 화삼리라 부르는데, 언덕길을 넘어 내려가는 길을 따라 숲이 우거지고, 그 길 사이로 보이는 마을의 풍광이 작품의 구도로 안성맞춤이다.*

 

* 전영근, 『그림으로 나눈 대화』, 남해의봄날, 2015.

 

 

 

13 통영운하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 좁은 물길

 

 

통영운하  통영 시내와 미륵도 사이로 배가 지나가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1,420m 길이의 수로, 1932년에 완공된 이 운하로 부산-여수 간 항로가 짧아졌다.

 

 

 

통영 해저터널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1932년에 완공되었다. 길이 483m, 너비 5m인 이 터널은 방파제로 바닷물을 막고 건설했다.

 

 

 

전혁림 화백의 「한려수도」  청와대 인왕실에 걸려 화제가 된 「통영항」과 유사한 그림으로, 통영 바다를 닮은 푸른색을 사용하는 전혁림 화백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2003년 2월 1일,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터를 닦앗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골격에 전시실은 최대한 넓게 하고 외부를 미로처럼 구성하여 외관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버지의 그림을 넣어 구워 낸 타일 7,500장을 미술관 외벽에 장식하고 나니, 아버지의 평가가 궁금했다. '꿈을 꾸는 것 같다! 내 아들이지만 니 대단하다!' 새벽 어스름에 눈을 뜨고 깜깜한 밤의 장막 속에 잠들며 보낸 그해 겨울은 내 일생 가장 뜨거운 겨울로 남았다.그리고 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전시실과 연결된 작업실을 오가며 더 왕성하게 작품 활동에 매진하였다.*

 

* 전영근, 『그림으로 나눈 대화』, 남해의봄날, 2015.

 

 

전혁림 화백(1916~2010)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서영화가 전혁림은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작업실에서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다.

 

 

 

2012년 7월 첫 책을 낸 이후 만 7년 동안 45권의 책을 출간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통영의 문화예술을 알리는 북스테이 겸 작은 책방을 함께 운영하는 통영의 출판사입니다.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 부문 대상을 수상한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전국에 작은 책방 봄을 일으킨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영국 BBC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중략) 등을 출간하며 독자들과 함께 소통해왔습니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책을 만들고 책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의 많은 지원바랍니다.

 

-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올린 글

 

 

 

봄날의 책방  출판사 남해의봄날에서 운영하는 동네 책방으로, 통영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담은 책들과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간 덕에 통영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됐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두 번째 집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골목 하늘을 채우던 벚나무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바닥에 쓸린다. 흑백사진관 입간판과 모퉁이 카페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작은 책방과 전혁림미술관이 나온다. (중략) 짧은 거리인데도 동네 사람 한둘은 꼭 만난다. 그때마다 가벼운 인사만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정원에 줄 비료는 냄새 안 나는 지렁이 흙이 좋다거나 새로 생긴 일본식 튀김덮밥집 튀김은 바삭하기보다 촉촉하더라 같은 깨알 같은 이야기를 길바닥에서 주고받는다. 5분이면 충분한데 10분, 20분이 걸리는 건 예사다.**

 

** 밥장, 『밥장님! 어떻게 통영까지 가셨어요?』, 남해의봄날, 2019.

 

 

 

내성적싸롱 호심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여행작가인 밥장이 운영하는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북토크나 그림 교실이 자주 열린다. 삼문당 원두로 내린 커피와 밥장이 까다롭게 고른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봉숫골의 봄  매년 봄 용화사 가는 도로 양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봉숫골 꽃나들이' 축제가 열린다.

 

 

 

미륵산 용화사  신라 선덕여왕(632~646년) 때 지어진 용화사는 통영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용화사, 미륵산 모두 불교 미륵 신앙과 관련 있다.

 

 

 

미륵산에서 본 통영 도심  미륵산 정상에 오르면 통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미륵산에 올라 이 풍경들을 만나야 통영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

 

 

 

미륵산에서 본 통영 다도해  미륵산 정상에 오르면 푸른 바다 위 흩뿌려진 통영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6 통영국제음악당

음악창의도시 통영에서 즐기는 클래식

 

 

 

통영국제음악당  갈매기가 날아오르는 모양의 지붕 앞뒤로 언덕과 푸른 바다의 풍경이 선명하게 나뉜다.

 

 

 

나는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리고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것들을 써두려고도 하지 않으며,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 윤이상 · 루이제 린저, 『윤이상, 상처입은 용』, 알에이치코리아, 2017.

 

 

 

음악 교사 시절 윤이상(앞줄 오른쪽 세 번째)과 학생들  화양학원 음악 교사로 활동하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윤이상은 한시도 고향 통영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삼칭이길과 복바위  푸른 물빛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삼칭이길에는 옛 전설과 생긴 모양 탓에 남근 바위로 불리다 후세 사람들이 다시 이름 붙인 복바위도 있다.

 

 

17 박경리 묘소

작가의 성품을 닮은 소박한 무덤가

 

 

 

박경리기념관 내부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작품을 썼던 강원도 원주 집필실을 재현해 놓았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박경리, 시 「산다는 것」의 마지막 연

 

 

 

박경리 묘소와 주변 풍경  잔디와 소나무로만 조성한 무덤과 평화로운 주변 풍경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작가의 성품을 닮았다.

 

 

 

박경리 동상  박경리기념관 앞 선생의 전신 동상은 통영뿐 아니라 원주, 하동, 러시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 한반도 남단의 통영에서 태어나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수많은 소설과 시와 수필을 남겼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장대한 서사 속에 담아낸 대하소설 『토지』 가 대표작이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노래했으며 유려하면서도 대담한 문체로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문학적 기념비로 승화시켰다.

 

- 러시아 동상 받침대에 러시아어로 적힌 선생의 소개문

 

 

 

18 만지도

명품마을에서 먹는 전복해물라면

 

 

 

만지마을 전복해물라면  전복이 유명한 만지도에는 이를 다양하게 활용한 요리를 많이 파는데, 특히 전복해물라면이 유명하다.

 

 

 

만지도와 출렁다리  연대도에서 바라본 만지도. 만지도와 연대도는 길이 98m, 폭 2m의 출렁다리로 이어져 있다.

 

 

 

19 욕지도

신선한 고등어회와 장쾌한 바다 풍경

 

 

 

욕지도의 바다 풍경  아기자기한 섬들과 넓고 푸른 남태평양의 매력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욕지도 사람들에게 고구마는 참 소중한 작물이라. 고메로 뭘 해 묵냐꼬? 주식은 고구마 빼떼기죽이지. 고매를 납작납작 썰어 갖고 지붕이나 마당, 밭둑 사이에 널어 말리는 기라. 그라모 빼떼기가 돼. 그 빼떼기를 소죽처럼 가마솥에 푹푹 낄이 묵었지.*

 

* 김상현,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 남해의봄날, 2014.

 

 

 

빼떼기죽(위)과 고등어회(아래)  욕지도에서 키워낸 최고의 고구마로 만든 빼떼기죽과 신선한 고등어회는 욕지도 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별미다.

 

 

욕지도 모노레일  모노레일은 욕지도 풍경을 감상하는 멋진 방법 중 하나다. 타는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제법 가팔라서 스릴이 있다.

 

 

욕지도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 트인 남태평양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 다도해의 소담함과 대해의 장쾌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섬이다.**

 

** 강제윤, 『당신에게, 섬』,꿈의지도,2015.

 

 

 

20 당포성지

이순신 장군이 되찾은 산성과 바다

 

 

 

1604년 6월 14일 거대한 적선 한 척이 조선 수군의 본영인 통영 앞바다에 침입했다.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으로 전함인 판옥선이 출동, 평화적인 투항을 요청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므로 치열한 접전 끝에 격침시켰다. 이 배는 당시 일본의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 왕국에 파견한 첫 외교무역선으로 캄보디아의 프놈펜항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귀항 중 풍랑 때문에 길을 잘못든 것이었다.

 

- 2006년 세운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 기념비 옆 안내 표지석에 적혀 있는 내용

 

 

 

당포성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이 병사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아 왜구를 물리친 곳이다. 정상에 이르는 완만한 언덕길이 매력이다.

 

 

 

할배 벅수와 할매 벅수  벅수는 돌장승을 이르는 통영 사투리다. 당포 마을 벅수 한 쌍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21 사량도

대한민국 섬 트레킹의 성지

 

 

 

사량도 지리산 등산로  지리산에서 옥녀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공룡 등뼈 같은 모양인데, 경사가 가팔라 오르다 보면 아찔하다.

 

 

 

사량도  지리산 능선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중앙으로 상도와 하도를 잇는 사량대교가 보인다.

 

 

 

카페 배양장의 외부와 내부  멍게배양장 건물을 그대로 살려 만든 카페. 일부는 지금도 멍게배양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년 넘게 전복과 멍게를 배양해 온 건물의 높은 층고와 낡은 골조를 살린 인더스트리얼풍 공간. 이곳에서 그는 파나마, 온두라스산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과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 수제 디저트 몇 종류를 선보인다. 여느 리 사이클링 공간과의 차별점이라면 지금도 실제 운영하는 배양장의 일부라는 사실.*

 

* 오성윤 · 이기선, <어떤 조합들>, 《론리플래닛 코리아》, 2019. 09. 05. lonelyplanet.co.kr/magazine/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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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박물관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박물관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투박한 박물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어부의 삶이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촌의 진짜 모습이다.**

 

** 김장주, 『남자의 고향』,더난출판,2015.

 

 

 

명지마을 어부박물관  어부박물관은 가정집을 고쳐 만들었다. 명지마을 출신 김장주 씨가 애써 모은 어구와 곁들여진 이야기를 함께 구경할 수 있다.

 

 

23 평인노을전망대

굴과 멍게가 가득한 맑은 바다

 

 

 

 

양식장과 조개껍데기  푸른 바다 위 굴을 양식하는 부표가 빼곡하다. 통영에서는 새끼 굴을 빈 조가비 껍데기에 붙여 바다 깊숙이 넣는 수하식 양식을 한다.

 

 

 

굴무침, 굴전, 멍게비빔밥  통영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다양하고 싱싱한 굴 · 멍게요리를 즐길 수 있다.

 

 

 

24 시락국골목

서호시장에서 만나는 통영의 맛

 

 

 

 

참 달다 이 봄맛, 앓던 젖몸살 풀듯 곤곤한 냄새 배인, 통영여객선터미널 앞 서호시장 식당 골목,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 사이, 우리처럼 알음알음 찾아온 객이, 열 개 남짓한 식탁을 다 차지한, 자그마한 밥집 분소식당에서 뜨거운 김 솟는, 국물이 끝내준다는 도다리쑥국을 먹는다.*

 

- 「통영의 봄은 맛있다」 중에서

 

* 배한봉, 『주남지의새들』,천년의시작,2017.

 

 

 

도다리쑥국  영양 가득한 도다리와 쑥의 조합으로 탄생한 도다리쑥국은 봄철 통영에서 만날 수 있는 별미다.

 

 

 

시락국(위)과 우짜(아래) 시락국골목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통영 음식. 시락국은 장어 육수로 맛을 낸 시래깃국이고, 우짜는 우동에 짜장을 올린 것이다.

 

 

 

25 항남동 도깨비골목

제철 해산물이 한 상 가득, 통영 다찌

 

 

통영 다찌 한 상  다찌는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통영 특유의 음식문화다.

 

 

항남동 도깨비골목  도깨비골목은 항남동 골목 별명 중 하나로, 도깨비가 요술을 부리듯 골목의 변화가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카페와 술집이 많아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도깨비와 어울리는 골목이란 의미도 있다.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  현재 상가로 쓰이고 있는 양성소 건물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건물 입구 오른쪽에 이중섭이 머물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26 김용식 · 김용익기념관

서양을 사로잡은 마술의 펜

 

 

 

그 배는 계절과 함께 쭈그러든 것 같이, 고향으로 가지도 못할 것 같이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아주 작아 보인다. 많은 선객들을 보자 나도 그 틈에 끼었다. 배에 오르니 생선, 해초 냄새-이제야 고향에 들어선 것 같다.*

 

* 김용익, 『꽃신』, 남해의봄날, 2018.

 

 

 

김용식 · 김용익기념관  김용식, 김용익 형제가 태어나 자란 주소의 주택을 개조해 만든 기념관으로, 김용식의 아들 김수환이 통영시에 기부하여 2013년 문을 열었다.

 

 

 

별안간 비바람이 불던 다음 날,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언덕과 푸른 하늘 사이에 공기는 맑고 풍성하여 꿈꿀 수 있는 그 거리, 농부들이 황금빛 새 짚으로 단장한 마을 초가들은 젊고 매끄럽게 보였다. 우리 집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사는 시끄러운 참새들이 수수밭으로 날아가기 전, 이른 아침 아버지는 암소를 사러 부산으로 떠났다.**

 

** 김용익, 『꽃신』, 남해의봄날, 2018.

 

 

 

태평동 언덕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던 산으로, 능선을 따라 들어선 주택을 사이로 올라가 보면 통제영이 가까이서 보인다.

 

 

 

27 중앙동우체국

청마가 부친 5,000통의 연애편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행복」 중에서

 

* 유치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시인생각,2013.

 

 

 

중앙동우체국 앞 조형물  유치환의 시 「행복」이 새겨진 이 조형물은 통영중앙동우체국(옛 통영우편국)을 자주 찾아 편지를 보내던 유치환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운, 당신을 생각하면 무한히 외롭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외로움이 얼마나 내게 즐거운지 모릅니다. 당신을 생각함으로 날마다 외로움에 잠기어 있을 수 있음이 행복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내게 가지가지 보배로운 것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 유치환,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1995.

 

 

 

사랑한 내 운! 당신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안심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애정이, 내 목숨이 더불어 있는 한 당신을 향해서 마르지 않을 터이니까요. 그리고 한 애정의 나무에 애정의 빗물을 줌이 또한 내가 나를 구원함이요, 그것을 줄 수 없는 날인 즉 나는 나를 죽이는 순간이고 말겠으니 말입니다.***

 

*** 유치환,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1995.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시인생각,2013.

 

 

 

28 견내량

거센 물살이 키운 진상품 돌미역

 

 

 

통영타워와 신 · 구 거제대교  붉은 신거제대교(1999). 푸른 거제대교(1971) 아래 좁은 바다가 견내량이다. 신거제대교를 건너기 전 통영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부산까지 볼 수 있다.

 

 

견내량 돌미역  임금님 수랏상에 진상하던 자연산 돌미역을 채취하고 있다. 이곳의 미역은 견내량의 빠른 물살 덕에 더욱 고들고들하다.

 

 

 

 

 

 

 

Posted by 드무1
,

2020-016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시집

2020, 문학과지성사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3073

신천역스마트도서관

 

 

811.7

김38ㄴ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시인

김민정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등이 있으며,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꼭 저녁 같습니다. 시인이 만들어낸 시의 경계를 두고 하는 은유입니다.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 펼쳐지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나의 쓰기는 말하지 않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시인의 말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2019년 12월

김민정

 

 

 

 

차례

 

시인의 말

 

1월1일 일요일

사발이 떴어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

꿈에 나는 스리랑카 여자였다

나는 뒤끝 짱 있음

그니깐 여름이 부르지 마요

쾰른성당

실마리

이제니가사람된다

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니고

나의 까짐 덕분이랄까

네 삽이냐? 내 삽이지!

어느 날 저기는 자기가 되고 어느 날 자기는 저기가 되어

기적은 왜 기적을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마 들어봤나 마

하여간에 선수인 것 같은, 끝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둘

열하고도 하루쯤 전일 거다

수경의 점 점 점

모르긴 몰라도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철규의 감자

준이의 양파

그 들통

다른 이상함은 있다

베이다오北島

감삼甘三 사는 제이크

제이크의 문자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저녁녘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끝물과 꿀물

깨지, 깨

귀가 귀 가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

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난데요

삼세번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발문
우리도 폴짝 · 박준

 

 

 

사발이 떴어

- 곡두 2

 

 

  일곱 살 때 집 마당에서 키우던 개의목덜미를 쓸고 있는데 난데없이 옆집 기승이 아줌마네 집 안방에서 흰 사발이 뒤집혀 허공중에 뜨는 것을 보았지. 국 먹을 때 흰 사발을 내려다만 보았지, 뒤집힌 흰 사발을 올려다보기는 처음이라 내 머리 어디쯤 젖지 않게 그 흰 사발을 우산으로 쓰자면 쓸 수도 있겠구나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눈이, 희지도 않게 뿌옇게 쏟아지는 함박 눈이 너무 더러워서 내 입은 차마 못 벌리겠고 눈을 떠서 눈이나 피하는데 연탄집게로 연탄 대신 쥐를 집어갖고 광에서 나오는 엄마에게 사발이야 사발이 떴어 사발 맞다니까, 사발 타령이나 하는데 그 낮에 기승이 아줌마 혼자 떡국 한 그릇 자시고 주무시다 주무시던 그대로 상여 타고 나갔다는 거지. 그 상여 꽃상여 되게 예뻤는데 상여나갈 때 광목으로 된 어깨끈이 느슨해지면 추어올리던 아빠의 폼이 꼭 코 훌쩍대는 아이 같았는데 여직도 침대 매트리스 고를 때마다 그 상여의 두께가 이만큼이었나 저만큼이었나 재게 된다는 거 뭐 내가 가늠하는 깊은 수면의 질은 언제나 속곳 그 속속곳인데 상여 같은 침대면 수면제 없이도 술 없이도 잠이려나. 돈이겠지. 개뿔 돈일거야, 아마 혼자 드신 점심상이었으니 고명은 안 해 올렸을 거야. 깨끗했거든 흰 사발. 불어 흰 사발에 붙은 떡은 잘 떨어지지도 않으니 누가 알겠어, 그 흰 사발의 속사정. 근데 그 흰 사발에 목숨 수壽 자 같은 거 퍼런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을까. 그랬을까. 그날로부터 20년도 더 지나 한국은행 취직해서 배 한 상자 들고 집에 인사 온 기승이 오빠에게 아무리 물어도 흰 사발은 뉘 집 사발이냐 하는 표정으로 얘 왜 이래요 어머니 하고 우리 엄마나 쳐다보는데 요즘 얘가 사발 모으잖니 요즘 얘 사발에 미쳤잖니, 엄마는 왜 사발도 모르면서 사발 안다는 뉘앙스를 풍기냔 말이지. 포인트는 사발이 아니고 상여고 소창인데 두 필 사서 그 한 필은 황현산 선생님 1주기 추모식 때 밟고들 들어오시라고 2층에서 입구까지 층층 나무 계단 물 흘리듯 깔았고 남은 한 필은 옷장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결혼한답시고 함 띠로 두를 것도 아니고 애 있어 기저귀 오릴 것도 아니고 행주로나 들들 박아야지 하는데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니까 그치 그 흰 사발, 리틀엔젤스예술단 어린이합창단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캐럴 부를 때 쓰던 모자 같은 그 흰 사발. 뒤집혀 있음으로 이날 입대껏 살아 있나 그거 뒤집을 작심에 그거 뒤집어 떡국 담아 먹을 욕심에 사들인 흰 사발이 얼마 전 부엌 찬장 세 칸을 넘겼다는 얘기지.

 

 

 

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

 

- 곡두 4

 

 

  눈도 예쁜데 눈이 예쁜데 눈은 예쁜데 눈만 예쁜데 눈도 안 예쁘네. 마음이라는 거. 변한다는 거. 안 변하는 게 또한 마음이겠냐는 거. 미련 같은 거 치우면 또 연두 같은 게 들어찬다는 거. 그 연둣빛 청개구리 한 마리. 1층 살던 어느 여름 고양이 무구가 어디선가 청개구리를 물어 와 내 앞에 툭 뱉어냈지. 먹지도 않아 물지도 않아 그러다 청개구리 뒷가리 중 하나만을 작정하고 팼지. 다다다 때렸지. 그 다리 하나가 펴지고 펴져서 쭉 편 실 같아졌지. 이유를 아나. 아나, 모르지. 다리가 그리 늘어진 청개구리와 그 다리를 그리 늘인 고양이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 숨죽임 같은 거. 아직 안 죽었으니까 아직 안 죽었으니까 누가 먼저 튈까 누가 먼저 튈래 방어와 공격의 그 타이밍을 보는 서로 간의 집중, 그 무아의 무한 팽창 같은 거. 4층에 사니 고양이 무구가 여름이라고 어디선가 귀뚜라미를 물어 와 저 혼자 씹어 먹기에 바쁘지. 먹지 말라고 씹지 말라고, 뱉어 무구야 뱉으라고 무구야. 검은 곤충 한 마리의 있다 없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선 내 앞에 홀린 듯 고양이가 흘려준 귀뚜라미 앞다리 하나. 킁킁 냄새 맡더니 다시 제 입에 넣지를 않나 내 몫으로 남은 귀뚜라미 앞다리 하나. 이거 어쩌기 어렵지. 이거 어쩌기 어려운 한 이거 어쩌기 쉬울 때까지는 앙심과 양심 사이에서 계속 두루마리 휴지 풀겠지. 그치, 그런데 그거 본 적 있어? 1977년도 <10대가수가요제>에서 혜은이가 「당신만을 사랑해」 노래하는데 옆에서 길옥윤이 색소폰을 불지. 예쁘게 웃으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양 볼 오지게 깨가면서 불지. 혜은이 목소리는 알아도 길옥윤 목소리는 모르지. 제 목소리 뽐내는 것도 아닌데 길옥윤은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 색소폰을 불었을까. 그렇게 불더니 지금은 어디 가서 무엇을 볼까. 모르지, 모르니까 썼다 지웠다 그러다가 없을 것이란 얘기지.

 

 

실마리

 

- 곡두 9

 

 

아랍에미리트 갔을 적에

거기가

아부다비였나 두바이였나

황금을 잘 개서 잘 처바른

거기가

왕의 두번째였나 세번째였나

왕의 부인네 궁전 앞뜰

노니는 공작을 봤을 적에

뭐라도 더 가질 게 없으니까

느려터지기나 하는 공작이

어떤 두리번거림도 없이

손 없이도 뒷짐 질 줄 아는

허세 당당한 포즈로

나니까

나나 빤히 보고 섰는데

아주 정면으로다가

보면 마주하는 거지

무슨 용건이 더 있겠냐마는

짙은 공작의 쌍꺼풀이

다만 흉내 내고 싶은 아이셰도라

그 배색이나 커닝하는 주제가

나니까

공작이나 빤히 보고 섰는데

내가 봐도 그 타이밍에 나는 꽤

기차서 거 참 기차다 하였는데

동선이라나

동선이라니

그려져서 그려본 것을

말이야

말이라

기실

그 실 찾으려니

실패는 커녕

휴대용 미니 재봉 키트 하나 없고

그런 건 또

편의점에서 판다 하니

문발CU점에 가 사고 앉았는데

꼭 그래

영수증에 찍힌 문발씨유점에서

그 발씨를 씨발로 읽은 거

그 동네 작은 부엌 반찬 전문점 앞에서

셰프 박찬일에게 안부 메시지 보낸 거

춘천 가는 기차 아니고

순천 가는 기차 타고

최정진 시인이 하는 서점

'생각구름'에 갔을 적에

또오르는 글 하나 적어보라 해서

내 글 새긴 접시 하나

후에 보내준다 하였는데

여적 그 접시가 안 오고 있는

기실

그 실 찾으려니

실패는커녕

족히 2년은 풀려

있는 채로

잇는,

 

 

이제니가사람된다

 

- 곡두 10

 

 

  살아가는 사람이 먼저일까, 죽어 있는 사람이 먼저일까. 시는 나일까, 내가 시일까. 시란 나는 누구이기에 "이제니가사람된다"라고 누군가가 갈긴 메모를 "이제 니가 사람된다"라고 누군가가 갈긴 메모를 "이제 니가 사람 된다"와 "이제니가 사람 된다"로 갈라 읽으며 낄낄대고 앉았나. 웃긴 걸 좋아하는 나. 웃긴 사람을 편애하는 나. 누군가 더럽게 웃긴 년이라 할 때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먹는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친구가 닭집을 개업했을 때 애들은 그런 데 가는 거 아니다 하는데도 시루떡 쪄서 가는 엄마 손 모자라다며 엄마 지갑 들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거길 졸졸 따라간 데는 체인점 홍보대사가 코미디언 엄용수라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였다. 그때 그 시절 코미디와 개그의 차이를 아는 정의로 엄용수는 연기란 걸 했을까. 알았던들 우리에게 설명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겠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김형곤과 함께여야만 무대가 무대였겟지. 코미디언 엄용수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앉아 사진을 찍은 엄마와 아줌마는 1952년생 용띠. 사진 뒷장에 엄용수 아저씨와 함께라는 메모는 둘 중 누가 쓰신 거라니. 이제 와 검색해보니 엄용수는 1953년생 뱀띠. 그러고 보면 1988년 10월 17일에 찍힌 이 사진은 어쩌다 31년이나 흘러 파주 사는 내 집 건넌방 서랍에서 내가 다닌 인천남부국민학교 졸업 앨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게된 걸까.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 곡두 18

 

 

미주알이 빠져 미주알을 넣어주는 병원에 가니 의사 이름이 김태형인 거라. 아랫도리 까는 게 끝이 아니고 아랫도리 까는 게 시작인 데다 모로 누워 무릎을 턱에까지 붙이고 공이 될 요량으로 콩처럼 몸을 마는데 느낌 좀 이상할 겁니다. 쑥 하고 들어가요, 자자 숨 참으시고, 금방 끝납니다. 네, 끝났어요 하시는데 순식간에 오므린 입처럼 쫀쫀한 아랫도리인 거라. 소의 볼깃살이라 할 그 살점이 대체 뭐라고 앉으면 풍선처럼 터질세라 서면 바지 밖으로 삐져나올세라 어찌어찌 모범택시 불러 서교동 SC제일은행이 1층에 자리한 병원 건물에 내리기는 하였으나 새삼 내가 여기 왜 왔나 이제 와 능청이나 떨고 싶은 거라. 개업한 친구 남편 병원에 뭐 책잡을 비뚤어진 액자라도 없나 째진 눈의 아내 친구처럼 사정없이 두리번거리기나 하는데 책상 위에 피케티 얼굴을 띠지로 두른 『21세기 자본』이 놓여 있는 거라. 어머 이 책 읽으시나 보네요. 저 다니는 회사의 계열사에서 나온 거거든요, 참 저희 사장님도 이름이 태형인데 성이 달라서 성이 강이긴 한데, 누가 물어봤나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저 혼자 계속 씨부려대는 가운데 시 쓰는 김태형 선배도 불러냈다가 희곡 쓰는 김태형 출판사 제철소 대표도 불러냈다가 프랑스에서 조향 공부하고 온 김소진 소설가와 함정임 소설가의 아들도 김태형이라며 그 조카의 이름도 불러냈다가 엊그제 일산 백병원 응급실에 위경련으로 실려 갔는데 유난히 친절했던 당직 의사 이름도 김태형이라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세상 아는 이름 태형은 죄다 불러들이기에 바빴던 나는 대장항문과 담당의 김태형 씨가 보라는 대로 정지된 화면 속에 시선을 두기나 하는데 그 안 가득 너무 붉음이고 그 한가득 죄다 붉음이라 빨간 토마토 반 갈라 숟가락으로 속 퍼내서 모으면 딱 이 색이라는 등 믹서에 빨간 피망 넣고 갈다 잘 갈렸나 들여다보면 딱 이 색이라는 등 딴청에 능청이나 부리는데 있죠.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마세요, 과로하면 이거 또 빠집니다 하시는 대장항문과 담당의 김태형 씨에게 일순 얻어먹은 게 일명 감동이라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또 올게요, 곧 올게요, 단골인 철원양평해장국집 나설 때처럼 그리 말하는데 이리 살짝 덧붙여주시기를, 다행히 치질은 없으세요.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

 

- 곡두 19

 

 

드라마 보다 자막에 밑줄 그은 이야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김영옥 할머니가

다리 저는 아들이 밤낮 결혼시켜달라고 조르니까

이렇게 말했다.

야, 이 미친놈아,

밭일은 안 하고 밤일만 생각하는 새끼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이순재 할아버지가

택시로 함께 드라이브 나선 강부자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밖 사람 구경혀.

어차피 평생 모르고 살다 갈 사람들이야.

 

 

 

수경의 점 점 점

 

- 곡두 22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그래주니 대낮에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요······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어······ 내 집 아닌 누구의 집도 아닌 그 먼 집에서 누구세요? 아 누구네 집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지겹다는 느낌이 슬픔인 걸 알아버린 오늘······ 언니가 멀리 있어 언니에게 부릴 수 있는 엄살······ 언니가 가까이 있으면 내게만 부리고 말았을 몸살······ 언니는 왜 내게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 딱히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봄이어서 봄인 탓에 언니에게 부렸을 투정······ 봄이 전부여서일까 봄만 빼고 전부여서 그랬을 것도 같은데 그건 다 언니가 가르쳐줘서 내 안에 허용하게 된 말줄임표 때문이라고 떼를 쓴 적도 그러고 보면 있었다 언니야······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에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교과서대로라면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안찍는다 언니야······ 점 하나에 추억과 점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쓸쓸함과 점 하나에 동경과 점 하나에 시와 점 하나에 언니, 언니 언니야······ 혼자 갔을 먼 집에서 검은 바둑돌로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놓아가며 먼저 놀고 있어라 언니야······ 그거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리다 만 얼굴로 배지 만들어 내 오늘 가슴에 달았으니 뾰족하여라 배지의 핀이여 넘어지면 찔려버릴 심장이기에 꼿꼿하게 직립하게도 만드는구나 언니야······ 나는 귤 박스를 앞에 놓고 귤껍질을 벗기는데 한 번에 열두 알도 족히 먹었던 귤인데 나는 먹지 못하고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는 먹을 수도 없어 귤의 껍질을 벗겨 한 짝만 남은 한 짝의 커피색 스타킹에다가 귤껍질이나 모으는데······ 향이네 언니야······ 향이라서 피워 나누고 향이니까 피워 가진다 언니야······ 사람들의 수다스러운 음성 무엇 하나 접시에 담아다 줄 수 없으니 나 혼자 가진다 언니야······ 욕조를 채워가는 뜨거운 물속에 던진 망 귤 망 퍼져가는 땅 맺히지 않는 망 잡히지 않는 땅의 망 속 물을 낚아채는 손 물도 꿰맬 수 있는 어리둥절한 사기······ 밤새도록 여린 짐승 하나가 창밖에서 서성거리기에 성냥에 불을 붙였는데 커져서는······ 번져서는······ 더는 쓸 수가 없겠다 언니야······ 침침해서······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 곡두 24

 

 

민정아 하셨다.

네 하였다.

보리다 하셨다.

네 하였다.

고양이다 하셨다.

네 하였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겪은 것들을 좀 생각해라.

 

시간 나면 여 와서

며칠 잇다 가거라.

아무 생각 안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숨 쉬어가면서.

뭐 드러 급하게 하냐.

한 박자 늦춰가면서.

 

봄이니까.

꽃 피잖아.

바람도 불고.

세도 울어.

 

민정아 천천히 일해라.

성질대로 하지 말고.

서둘 것은 없다.

대략 알면 된다.

책이 중헌 게 아니다.

알았쟈?

 

거미줄만 보러 다닌다 하셨다.

네 하였다.

김용택 선생님은 전화를 끊고

거미줄을 보러 또 나갈 거라 하셨다.

네 하였다.

 

 

철규의 감자

 

- 곡두 25

 

 

철규가 거창에서 감자를 보냈다 했고

내가 인천에서 감자를 받았다 했다

그 감자의 신묘함이라 하면

철규가 보냈다는 그 감자를

철규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받았다는 그 감자를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서로 그 감자를 두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맞던데 뭐

아는 척을 마구마구 한 일

 

먹어봤니?

아니

만져봤어요?

아니

 

하여튼 간에 시인들이란

말이 앞서

말만 앞서

그래 감자 심는 거나 아나?

아니 모르지

 

농사 안 짓는 인천의 우리 엄마가

찌니 아주 포슬포슬 맛 좋다고

까만 비닐봉지에 나눠 보내며

농사 안 짓는 파주의 내게

맛봐라

거창의 철규 어머니가 농사지어 보낸 감자라

 

세어보니 열세 알

어머니 둘은 아는 이 감자

나는 이제 보는 이 감자

어머니들은 다 아는 이 감자

철규는 아직 못 봤을 이 감자

 

열세 알 감자가 든

까만 비닐봉지 배를 반 갈라

조리대 위에 훤히 벌려놓고

파를 썰다가도 힐끔

컵을 씻다가도 흘끔

마른손이거나 젖은 손일 때도 꾹

눌러보는 관심사는 단단하기가

플라스틱 지우개라

 

연둣빛 감자의 싹수가

두어 달 지나니까 움을 터

군데군데 움튼 이 감자의 쓰임을 두고

철규와 얘기나 해볼까 하는데 문득

철규는 다리에 털이 많을까

그게 왜 궁금해지더냐 말이지

 

엄마, 철규 다리에 털이 많을까

그걸 철규 씨한테 묻지 왜 나한테 묻냐

아침부터 털털거리지 말고

털이고 자시고 간에

더 썩히지 말고 싹 다 파내서

된장에 남은 감자나 썰어 넣으라고

국으로나 끓여 먹으라더니

엄마는 전화를 뚝 끊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철규에게 물어나 봐야지 않을까

여하튼 간에 시인들인데

다리에 털 많은가 털 없는가

그걸 묻는 게 죄라면

단박에 나는 수갑 차고 말 누나라지만

 

 

준이의 양파

 

- 곡두 26

 

 

   준이가 트렁크에 양파를 싣고 왔다는 말. 나누자는 양파라는 말. 나눈다는 양파라는 말. 트렁크를 열어 함께 양파를 모았다는 말. 연준이도 머리를 숙여 함께 양파를 보았다는 말. 큼지막한 신고배 같은 양파라는 말. 상자 그득그득 빼곡한 양파라는 말. 나는 다섯 알만이라 하던 연준이의 말. 더 갖고 가 이것아 하던 나의 말. 뒀다 장 제부 먹여 하던 나의 말. 트렁크를 열었을 때 생각보다 덜했던 매운 내가 뒷좌석에 앉았을 때 생각보다 더한 매운 내여서 바람이 불어 그런가 하는데 언니 파주가 너무 좋은 게 파주는 나무들이 짐승처럼 자라요, 하던 연준이의 말. 커 알이 좀 컸어 크더라고 들어보니 무겁고 고른 사이즈야 전화로 양파 얘기를 하니까 파주 롯데아웃렛에서 쇼핑하다 전화받고는 양파는 안 싣고 쇼핑백만 싣고 가며 너 또 썩힐 텐데 썩혀 버릴 텐데 하는 엄마의 말.

 

   누나 이 중에 한 개의 무름이 있어요. 한 개의 무름은 모두를 무르게 하는 무름. 무름은 부름. 흰색 발가락 양말을 신은 퀵 서비스 아저씨 샌들 보다 웃음이 나 양파 박스 떨어뜨릴 뻔한 부름. 저는 만수동이 집이니까 학익동 가까워서 싣고 가는 기분이가 아주 좋습니다. 하시니 나도 내가 좋아지는 부름. 금요일 퇴근 시간대라 막힐 거니 너무 서둘지는 마세요 착한 안주인 코스프레로 나 아는 사람은 눈 흘길 게 빤한 내 말의 부름. 한 시간 두 시간 파주에서 인천까지 출발한 지 세 시간 반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영문 모를 양파의 부름.

 

   아저씨 어디세요? 수원 가는 길인데요. 인천 가시는 거 아니세요? 아 맞다, 양파! 수원 가는 큰 콜이 들어와서 인천에 당장은 못 간다는 지경. 인천이 집이라더니 집에 안 가실 거냐니까 내일 가도 된다는 지경. 그럼 내 양파는 어쩌란 말이냐니까 내일 밤에 갖다 주면 안 되겠냐는 지경. 무르기 시작한 한 개의 양파가 잇어 나는 절대로 안 된다는 지경. 양파가 싸니 양파값을 물어주면 될 거 아니냐는 지경. 양파가 싸도 그 양파는 그냥 양파가 아니라는 지경. 그건 준이가 사 준 양파라는 지경. 난데없이 준이가 누구냐는 지경. 박준이라는 시인이 이고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양파라는 지경. 듣고 듣다 세상에 없는 양파가 있다는 얘기는 도통 들어본 적이 없다며 되레 성을 내는 지경. 퀵 서비스 센터에 항의하고 나 그런 몰상식한 여자는 아닌데 화나면 나도 날 몰라요 입을 다물어버리는 지경. 나는 집 안에서 아저씨는 도로 위에서 침묵의 양 끝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 지경. 나 그렇게 양파 떼어먹고 그러는 사람 아니라는 지경. 알아요 아는데 양파 박스 안에 한 개의 무른 양파가 있다는 지경. 어쩐지 양파 냄새가 솔솔 나긴 했었다는 지경. 다마스 안에 페브리즈 있냐고 묻고 있는 지경. 좌우지간 자정 넘어 도착일 텐데 새벽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엄포의 지경. 어처구니없지만 오기를 부리게 하는 지경. 양파 값이 얼마인데 기름값도 안 나오겠다며 툴툴대는 지경.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적반하장의 지경. 알았다더니 끝내 내일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일 필요가 있겠냐고 한 번 더 묻는 지경.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만 오늘이라고 끝내 한 번 더 답하는 지경.

 

   퀵 비 기본 4만 원에 팁 5천 원 얹어서 4만5천 원이었는데 양파 한 상자의 값을 알지를 못하니까 더없이 당당해지니 요지경. 준이의 양파 한 알에 퀵 비에 전화비를 비율 대비로 계산하려니까 그 계산이 사라지는 요지경.암마가 준이의 양파고 우리 집 양파고 있는 양파 다 썰어서 양파장아찌를 담글 참이라는데 준이도 좀 줘야 되지 않겠냐고 해서 나는 연준이도 줘야 한다니까 그럼 과실청 담글 때 쓰는 락앤락 숨 쉬는 밀폐 유리병 0.5리터짜리 한 열 개 사서 집으로 보내라니 배보다 배꼽인 요지경. 일단 맥주 한 잔은 마시고 나야 조갈증 달래고 주문도 하게 생겨서 냉장고를 여는데 준이가 전북 임실 절호수 농원에서 주문해 보내준 1리터짜리 고추장과 1리터짜리 된장이 바로 보여 나는 고추장 뚜껑을 열고 맥주 안주로 집어든 김부각을 거기 푹 찍어 씹는데 바삭하니 준이의 양파장아찌도 아삭하겠지 싶어 미리부터 청양고추도 장바구니에 담아두는데 왜 엄마는 새벽 2시가 넘어 양파 써느라 울면서 웃는 째진 눈으로 콧물 흘리는 요지경 속에 있나. 이거 봐요 민정 엄마 콧물 닦아요. 전화 너머로 엄마 코에 휴지 대주고 있다는 아빠는 뭐 하냐니까 이 오밤 중에 칼을 갈고 있다는 요지경. 엄마 손 말고 양파 속 잘 썰리라고!

 

 

 

그 들통

 

- 곡두 27

 

 

장석남 시인이 형과 둘이 나무를 해다

산속에 작은 집 하나 지었다 해서

슬렁슬렁 가보게 된 셈이다.

 

닿고 보니 컴컴하고도 깜깜함이

무인지경만 같았는데

개가 있었던 것도 같고

그 개가 없었으면 하는 데는

아무려나 들통

그 들통이

내 손에 들려 있기도 했거니와

 

푹푹 고더라고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들통에다

엄마가 새벽부터 내내 끓이더라고 그

들통

여럿이들 밤부터 아침까지 퍼 먹더라고 그

들통

아무려나 들통

 

그 빈 통을 가져간다니까

웬만하면 놓고 가라 하고

왜 안 갖고 왔냐 해서

놓고 가라 했다니까

별나라 그 못난 걸 어따 쓴다니 하고

 

10년도 더 지난 얘기임서도

들통 안 준대?

여적 되묻는 것이 강화도 여자인 엄마고

그 들통 버릴 리는 없고

어디 골동품이 되어 있으려나?

여적 답하는 것이 덕적도 남자인 시인이고

 

그 들통을 섭처럼 드문 멀리에 두고

안부를 묻는 새로운 방식이다 할 적에

인천 섬것이나 꼭 인천의 섬것만은 아니다 하는

두 사람의 말본새는 용케도 닮은 데가 있다.

 

 

 

 

다른 이상함은 있다

 

- 곡두 28

 

 

"개새끼 못 잊어"라 하셨는데 나는

"못 잊어 개새끼"를 제목으로 올려 붙였다.

 

저녁참으로 만둣국을 끓여 먹고

개수통에 담아둔 놋대접 위로

수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그러했는데 그대로 놔둔 참이었다.

저 스스로는 도저히 소리를 못 내는

물방울

작금의 내 저간에서 들을 방도는

수전을 덜 잠그는 일 말고는 없어서

객기일지언정 그 헐거움의 미덕

써보면 알리라 가만히 지켜보던 참이엇다.

 

책상 위 스탠드를 끄지 못한 채로

책상 아래 스탠스를 1도 두지 못한 채로

잠이 들어서는 두 다리가 저려서는 그래서는

 

김민정 씨, 나 최승잔데요.

최승자라고요.

내가요, 책을 읽고 잇었는데요······

 

전화기를 들고 벌떡 깨어나서는

쌀뜨물같이 뿌옇던 유리창을 바라보고서는

개수통 밖으로 넘쳐흐르던 개숫물

수전부터 왜 잠갔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는

 

 

 

베이다오北島

 

-곡두 29

 

 

그의 시집 한 권을 챙겨 온 것이

그에 대한 앎의 전부였다.

 

"비겁은 비겁한 자들의 통행증이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들의 묘비이다"로 시작하는

그의 시 「대답」 군데군데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그의 시집 『한밤의 가수』에서

"꿈이 거짓임을 나는 믿지 않는다

죽으면 보답이 없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에

또다시 밑줄을 긋는 내가 그를 맞는 전부였다.

 

중국 푸젠성 샤먼의 섬 구랑위

2016 International Poetry Festival에 그가 섰다.

무대 위에 선 그에게 조명이 쏠리자

무인도도 아닌데

일순 그 말고는 숨 쉬는 이가

이 섬에 하나 없는 듯했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가

이제는 홍콩에서 산다는 그가

간만에 중국으로 왔다는 그가

시를 읽는다,

제 시를.

자막에 그의 시는 없었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그의 전부를 다하였다.

 

나는 못 알아먹었는데

내 두 손은 알아먹은 듯

오른손과 왼손이 절로 깍지를 끼는 합함으로

기도하는 한 손이 되는 연유.

 

그 이유를 설명할 길 없는 나는

공연히 하늘이나 올려다보는 여유.

 

들리는 저 시가 읽히는 이 시가 아닌들

"새로운 조짐과 반짝이는 별들이

훤히 트인 하늘을 수놓고 있다" 하니

당연히 별을 세는 데서 깊어지는 사유.

 

분교가 전부인 마을처럼 우리는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좋아지고 있었다,라고 말하지 못한 건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시집 면지에

'2016년 10월 23일 밤,

내가 혼자 아는 이 작은 큼'이라 써둬서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할 때 이 감정의 분분함.

지극히 없던 상냥함이 쌔고 쌔져서

지극한 상투어라지만 나는 그 밤

셰셰를 얼마나 흘리고 다녔는지

셰셰 하나는 퍽 잘하게 되었다는 말미다.

 

 

 

감삼甘三 사는 제이크

 

- 곡두 30

 

 

1

미국에서 온 시인 제이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의 초임 교수

미국에서 와 한국 시 번역도 하는 제이크와

계명대역에서 지하철을 함께 탔는데

감삼에 산다고 했다

제이크는 감삼역에서 계명대역까지

수업이 있는 날마다 오간다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제이크나

한국에서 태어난 나나

공평한 것이 감삼을 몰라

감삼이라는 네모 받침에 갇혀

맥없이 가나다라 연습이나 해보는데

 

각삭이라 했다 간산이라 했다

갇삳이라 했다 갈살이라 했다

갑삽이라 했다 갓삿이라 했다

강상이라 했다 갖샂이라 했다

갗샃이라 했다 갘샄이라 했다

같샅이라 했다 갚샆이라 했다

갛샇이라 했다 감 하나 띄고 삼

 

발음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I don't know

정말이지 너무 피곤한 한국어야

누나 감삼이면

감을 산다는 뜻이야?

 

달 감에 석 삼

단 감 셋이면

달겠지 달까나? 나는 떫은데

 

석 삼은 알지?

달 감은 못 쓸거야

나도 한자는 내 이름 석 자나 그린단다

 

2

미국에서 온 시 쓰고 번역하는 제이크와

파주장단콩축제에 가기로 했다

파주는 콩이니까

파주는 메주니까

홍어 다음으로

제이크는 청국장을 좋아하니까

파주에는 지하철이 없단다

그래도 걱정은 말렴

버스 한 방이거든

파주장단콩축제 현수막 붙인 버스는

죄다 임진각 가거든

임진각에서 북한 보이냐고?

보이겠지 보일까? 보인다던데

나도 임진각은 처음이거든

참, 너 그거 들어봤어?

경상도사투리말하기대회란 게 다 있더라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 곡두 32

 

 

의사는 더 진중해지고

여자는 더 자발맞아지고

의사는 모으고

여자는 주각내고

의사는 나아가고

여자는 주저앉고

그래서요

그래서일까요

의사는 궁금한 게 아니라

궁금한 척이고

여자는 오줌 마려운 게 아니라

오붓하고 싶은 척이고

의사는 말하라 하고

여자는 그린다 하고

그려보니

4층 옥상에 심은 공작단풍나무 아래

발가벗은 채로 웅크려 앉은 아이고

네가 사 준다 하더니 안 사 줘서 결국

내가 사 입은 슬립은 어디 갔냐 하면

슈퍼맨 망토처럼 내 목 뒤로 내가 묶은 뒤고

살짝 여유가 잇어 걸면 걸릴 거라

내가 걸릴 데를 내가 찾는 이 배려는

나무야 부러지면 너한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부르짖는 당위가 되고

개미들 기어들어 거기로 내 거기로

떼를 지어 오글오글 내 거기가 따갑다고

씨발 꺼지라니까 이 개미 새끼들!

후지지 참 내가 꼬진 거 다 아는데

이렇게 작은 지랄들이 지지고 더 지져댄다니까

개미들이 뭐라고 근데 그 개미들이

뭐긴 뭐거든 그렇거든 그리고 이젠

내가 먼저 짓밟을 차례거든 더 이상 나는

내 어깨가 니들 엉덩이에 깔리도록

그날처럼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거든

나는 컸어 나는 더는 어리지도 않아

골무를 끼고 내 속을 후비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가 덜 아플 거라고

그럼 니들 손은 더 깨끗할 거라고

때가 탄 골무는 빠나

살 벗겨진 골무는 버리나

일상과 망상 사이

골무만 보면 쭈뼛쭈뼛하다가도

골무만 보면 또 환장을 하는 게,

고우니까

곱다고 색색 그거

길 건너 한복집 언니네 가게에서

꼬깔콘 먹는 시늉하며 훔쳐냈던

색동 입힌 골무도 내게 아직 있지

못버리지

어떻게 버려

기억인데

기념 아니고

기록이어야 해서

통영 나전 반짇고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송방웅 선생 거

사 달라고 그래서 조르는 건데

모이니까

모을 수 있으니까 그럼

꺼내 볼 수 있으니까

안 잊으려고 절대

안 잊히려고

가만두지 않는 게 아니라

가만히 두고 보려고

보면 볼 수 있음으로

이기니까

그 골무와 이 골무는

태생이 다르다는 걸 아는

덤덤함을 덤으로,

이겨왔지

무던함의 무덤

그 둥글넓적한 얼굴로

자랐구나 잘 다 컸구나 너

그럼 니들만 자라고 나는 주냐

말 걸지 마라 입낸새 지독했으니까

쪽가위로 잘라내고 싶은 입이었으니까

죽으로 니들 주동이들 닥치고 있어라

분다 니들 불까 니들

작은 개미여도 낄끼리 날 무니까

날 무는 개미만 찾아 죽이는 집요 속에

내 거기를 물었던 너와

내 거기를 물렸던 나는

그렇다고 불구대천지원수까지 될 건 뭐니

국으로 약이나 타 먹게 된 사이라면

그건 뜻밖의 동지이고 환상의 파트너라

두고두고 남을 관계라는 흐뭇한 결말인데

그래서 그저 약이면 된다는 흔쾌한 결론인데

어차피 줄 거면서 느물느물 쥐고 안 놓으려 하니까

나는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파주 안 가고

거기 어디냐 홍콩이나 마카오 가잘 사람처럼

즉흥이라는 불균형의 식성을 자랑하고 있는 건데

식빵 한 장 위에 태양초 고추장 5백 그램짜리

네모진 통의 반을 펴서 처발라 먹는 맛

별점은 별 하나의 반도 아까워 색 안 칠할 맛

무맛 맹맛 병맛 느낌은 흐느낌

폭식은 누가 가르쳤냐면

내가 깨우친 행동이고

내가 처음으로 취해본 적극성이고

먹어 조질 때의 쾌, 그 쾌라 하면

나는 이쾌대 상쾌환 다음에 꼭

박팽년이 오더라고요 이 선회

급선회 나한테 요 선회라 하면

연희라는 이름의 우리 아빠랑 항렬이 같은

안동 김씨 족조 속 아재일 것인데

그 집 아들 셋 중 둘째를

우리 집 양자로 들인다던 개수작들

종친이랍시고 우르르 몰려와서는

우리 집에서 우리 엄마가 차린 술상들

받아 처먹으면서 씨부리던 말들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엄마를 무릎 꿇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아빠에게 삿대질을 해

네 사주에 아들 없으면

네 각시라도 대신 나가 아들을 낳아 오든가

한쪽이라도 피는 이 집 피 아니겠냐

말이면 다인가 하는데

말이면 다인가 보는데

기어이 내뱉는 거지

밑도 끝도 없는 무지렁이 훈계를

피피거리는데 정작 무슨 형인지 아실까

그 혈액형 모르고 오로지 그 피만 운운인 게

젯밥 너 하나 못 먹어서 끝나는 게 아니야

그 잘난 고추 하나도 못 뽑을 거면서

저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다 어쩔 것이여 살림 들어먹을 년들

시방 혀 차기도 아깝다니까 쯧쯧 하시니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저 곰방대 할배

검은 갓 쓰고 옥색 두루마기 입고 와서

검은 갓 벗고 옥색 두루마기 벗고 나서

졸라 드시는 거죠 촵촵거리면서

저 같잖은 말도 말이라고 저 입에다가

아귀수육하고 민어 살 뜨고 육전 부치고

소갈비 재고 게장 담그고 새우 튀기는

엄마는 미쳤어 엄마는 미친 거야

그래 나 미쳤다 미쳤으니 네 아빠랑 살지

감 깎는데 양자 새끼 이 집에 들이기만 해봐

내가 이걸로 눈 다 후벼버릴 거야

엄마가 아끼던 소반 끄트머리를

갉작갉작 과도로 긁어애는데 소리 좋아

연필도 아니고 지우개도 아니고

도루코 문구도 새마을 칼만 사서 모으던

5학년 6반 63번 김민정 어린이는

발뒤꿈치 벗길 때 말고는 귀찮아서

깎아 먹는 과일은 사지도 않아가며

칼보다 칼집 모으는 마흔넷 김민정 언니로

뭐든 매달고 거는 취미로다가 오믈도 바쁜데

어느 날부터는 하도 징징거려

깨진 징 몇 개를 얻어 걸었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 즉시 고요 너무 완전 고요

징채로 머리통을 맞은 것도 아닌데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지

나는 1인극 배우처럼

그 배우의 유일한 연출자처럼

즉흥인데,

아무도 안 볼 연기를 하는 거지

와이프가 혹시 현악기 안 하세요?

울림통인데 흠흠 나무 냄새 나는데

탄탄한 줄 몇 가닥 터진 굳은살인데

뭐 비올라 전공이기는 합니다만

내게 징을 준 건 김운태 선생님이신데

일명 자반뒤집기의 대가시거든요

자반······ 뭐요?

아 모르시는구나

상모돌리기 보면 완전 지리실 텐데

하루 세 끼를 위해 하루 천 바퀴를 도는

회전의 대가라고나 할까요

사람이 공중회전을 해요

우주 비행사처럼 제 몸을 띄워요

뜸요 아니

그 뜸 말고 그 뜸요

뜸을 뜰 때의 내 기분이란 게 있으니

뜸도 기분이란 게 있겠죠

우리 평생 그 뜸을 알고나 죽을까요

죽으면서 떠봤자 입이 없는 뜸이잖아요

뜸을 뜨고 뜸이 드는 그 두 뜸도 좋은데

앞 뜸이 더 좋다니까 혈액순환장애래요

스물셋에 속발성 무월경으로 근 7개월

피 안 흘려본 달 있었는데

피 나오는데 이 닦고

피 나오는데 맥심에 프림 넣고

피 나오는데 비빔냉면 비비고

피 나오는데 수금하러 신세계백화점 가고

피 나오는데 하이힐 사고

피 나오는데 선 자리에서 빙수 꼳고

피 나오는데 인상이 좋아 보이십니다에 팔 잡히고

피 나오는데 서울역 계단에서 구르고

피 나오는데 지하철에서 졸고

피 나오는데 집에 와 장구 치고

피 나오는데 아빠가 내 발톱을 깎아주고

피 나오는데 얼굴에 요구르트 팩 하고

피 나오는데 일기 쓰다 책 읽고

피 나오는데 통화하다 잠들고

피 나오는데 가위에 또 놀리고

근데 나는 또 뜸을 이렇게나 잘 참는다니까요

배꼽 여기 위에 살색 붉은 거 보이시죠?

다 뜬 뜸 안 건져서 자국으로 남은 뜸요

아 내가 왜 갑자기 여기서 배를 까고 그럴까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일주일 치 약 더 주세요

출장이 열흘이라니까요 정말이라니까요

아껴 먹을게요 한 번에 안 털게요

하도 징징대서 그랫을 거야 안 주고는

못 배길 만큼 연기가 탁월해서 그랬을 거야

차 안에서 보는데 깜짝 놀랐다니까요

큰 베개 하나 품고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누님

약을 큰 품에 안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님

병원까지 날 데려다준 홍보부 이천희 대리가

회사까지 날 데려다주기로 한 이 대리가

그렇게 신이 나세요? 멀리서 봐도 너무 환하셔서요

약이란 게 그렇게나 좋은 겁니까? 묻는데

어,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어어, 하는 거야 내가

멀리서 봐서 그래

멀리서 보면 다정들 하잖아

네?

그러니 잡지를 말아야 해

행여나 닿지를 말아야 해

잡고 싶으면 놓아야 하고

닿고 싶으면 달아나야 해

누님?

나는 벌받을 거고

나는 죄받을 거야

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운전수로 따라왔을 뿐인데

왜 저한테······

네가 오늘 재수에 털 난 날이라 그래

내가 그날 거기에 털 난 날인지 몰랏던 것처럼

있지, 천희야

화는 참아지는데

억울함은 왜 못 참아지는 걸까?

내가 안 참는 걸까?

참으면 병 됩니다, 누님

걱정 마 죽어도 복수는 하고 뒈질 거니

복수가 별거겟어?

끝끝내 죽어라 살아남는 거지

마침내 해내고 마는 거 그거지

가다가 롯데백화점 잠깐 들러주면 고맙고

하이힐 봐둔 거 있거든

내가 모으잖니 그치? 내가 좀 많긴 하지 그치?

귓구멍 같은 데 똥구멍 같은 데 그런

구멍들에다 하이힐 뒷굽 쑤셔 넣고는

쑤셔대는 꿈 나는 왜 그리도 꾸나 몰라

예? 예······

왜 드문히도 난 그렇게 전 부치는 꿈을 꾸어댈까

왜 이렇게 꿈에서 나는 전을 부칠까

전을 어떻게, 좀 사 갈까요?

가자

갈까요?

갈 수 있다면 오죽이야 좋겠니

못 간다고 전해라 근데 그 가수 말이다,

요즘 왜 안 보이는 걸까?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겠죠

연예인 걱정은 할 게 아니래요

그러니까 누님 걱정이나 해요

파주에 목욕탕이라도 파주고서 그런 소리 해라

너 어깻죽지에서 때가 얼마나 나오는지 아니?

날개가 돋을 것도 아닌데

딱 날개 자리인 것은 맞는데 말이지

"난다는 것은 여자의 동작"

이 제목은 정말 멋지지 않니?

왜 나는 이런 제목은 또 짓지를 못할까

「날개」 알지?

날개라 하면 나한테는 가수 허영란이거든

허영란은 <순풍산부인과> 허 간호사 아니가요, 누님?

가수 중에서도 허영란이라고 있어

미국에서 목사가 되었대

"'날개의 허영란'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세요.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도 크고 깊습니다.

복음의 날개를 달고 다시 일어나세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라면 일어날 수 있어요.

희망을 향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믿으면 되나?

일어나면 되나?

되면 나나?

나나?

「검은 나나의 꿈」이 내 등단작인데

봐, 여적 나 못 나는 거

 

 

 

귀가 귀 가

 

- 곡두 38

 

 

여전히 일본의 어떤 남자들은 스모용 선수로 태어나고

여전히 케냐의 칼렌진족은 장거리용 선수로 길러진다.

1973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태어난

여자 체조 선수 스베틀라나 보긴스카야

소비에트연방, 독립국가연합, 벨라루스

3개 국기를 제각각 유니폼에 새기고서

서울과 바르셀로나와 애틀랜타 세 올림픽에

3회 연속 12년을 대표로 뛴 전적이 있는데

그걸 제가 원했다면 정치인 팔자인 셈인데

미국 텍사스에서 피자집을 운영한다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기에 그 인생 시네,

수첩에 적은 것이 2016년 6월의 일이었는데

2019년 11월 17일 오후 1시 22분에 검색하니

미국 텍사스에서 온라인 체조 의상 소매업과

체조 선수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고 나온다

 

있다 사라진 시가 잇으되

서로 반짝이는 타이밍이다.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

 

- 곡두 39

 

 

  교하 중국정통마사지집에서 발마사지하던 내몽골 여인 렁렁이 나 걱정해서 느끼는 그대로 해준 이야기

 

  한국 다시 온 지 넉 달 되었어요. 들어갔다가 또 나왔어요. 한국 좋아서요. 왔다 갔다 10년도 넘었어요. 마사지는 스무 살에 배웠어요. 나 힘이 세서 손님들이 좋아해요.

나는 서른세 살요. 남편은 텐진에서 살아요. 오래 못 봤어요. 보고 싶죠. 몽골 좋은데 가면 심심해요. 별만 있어요. 그래도 몽골 별 같은 거 한국에서 못 봤어요. 몽골 별 사진 보여줄까요? (방 밖으로 나가서 휴대폰을 챙겨 오더니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여주다 다시금 수건에 손을 닦고 마사지를 시작하는 렁렁) 잠깐만요, 물소뿔로 만든 괄사인데 이것 좀 쓸게요. 피멍 들 수 있는데 나중에 없어져요. 안 좋은 데는 색깔 더 울긋불긋해요. 마사지 학교 산생님이 나한테 선물로 준 거예요. 잠깐 여기가 한국말로 뭐지? (휴대폰에 대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뭐라 하니 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로 십이지장! 췌장! 감정의 고저를 모르는 여성 통역의 음성) 들었어요. 거기 안 좋아요. 아주 안 좋아요. 사장님 이 언니 여기 배 속 안 좋아요. (카운터 입구에서였는데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하면서 렁렁의 등짝을 찰싹하고 때리는 주인아줌마였는데 그날로부터 한 달 반쯤 뒤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나니 과정이야 어떠했든 찝찝함보다는 고마움이라 다시 찾아갔더니 렁렁은 없고 렁렁의 욕만 잔뜩 늘어놓는 연변 출신 조선족 주인아줌마의 한층 더 걸쭉해진 구시렁구시렁)

 

 

 

난데요

 

-곡두 41

 

 

  인삼을 언제부터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불렀는지 기억에 없지만(그러고 보면 우리가 우리말을 알아서 다 한다는 일이 좀 기적 같지 않은가요) 인삼을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봤을 때 어쩜 이렇게 사람처럼 생겼을 수가 있는지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은 납니다. 어릴 적, 그러니까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랫을 거예요. 외가가 강화도라서 타 지역보다 흔한 것이 그 지역의 특산품인 인삼이기도 하여서 엄마가 얇디얇은 인삼 뿌리나 부서진 인삼 몸통을 어슷어슷 썰어 믹서에 넣고 우유와 꿀을 넣어 윙윙 갈아 등굣길 신발장 앞에 선 내게 한 컵씩 마시게도 했는데요, 그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에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아 아침마다 신문지로 몇 겹을 싸 친정에서 보내 온 인삼을 엄마가 둘둘 말아 펴볼 때면 그 옆에 가만히 가 그걸 구경하기도 했는데요., 그중 멀쩡한 삼 한 뿌리를 흙만 털어서는 살살 찬물에 헹궈서는 아빠 입에 물려드려라 하면 그걸 들고 안방에 가 아빠를 깨우기도 했는데요, 그때 든 생각이라면 왜 인삼이 백일 기념 속 사촌 동생을 닮았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엄마, 왜 인삼이 발가벗은 민석이 닮은 거야?

인어는 왜 하필 몸의 절반이 물고기를 닮았는지 동화책 속 인어공주가 아무리 예뻤어도 인어공주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게 다리가 물고기 지느러미라는 낯섦 때문인지 물속에서 참아야 하는 숨의 답답함 때문인지 지금껏 궁금해도 엄마가 여태 담을 해주지 않아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물음표를 우산처럼 들고 아니는 난데요,

인형은 특히나 바비나 미미라는 이름의 마론 인형은 매일같이 성실하나 매일같이 가난한 우리 집 살림살이에 엄마에게 사 달라는 말 한 번 못 한 채 인형이 내 친구는 될 수 없구나, 일찌감치 옆집 담장을 가위뛰기로 넘는 상상 따위와는 결별을 할 수밖에 없던 게 난데요, 이상하게 또 눈사람에게는 꽂혀서 한겨울에 빨개진 볼을 해가지고는 몸을 공처럼 굴려 만든 눈사람을 데리고 집에 못 들어가는 슬픔에 은색 털 장화에 핑크 목도리에 남색 털장갑까지 죄다 들고 나와 그 옆에 차곡차곡 놔주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일이 일견 사랑이기는 했겠구나, 35년쯤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그 감정에 이름표를 달기도 하는 것이 난데요,

원숭이야 뭐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바나나를 오물오물 입에서 안 떨어뜨리셨던 할머니 얼굴을 쏙 빼닮았으니 달리 이유를 찾으려고도 안 한 것이 난데요, 풀각시는 뭐냐, 막대기나 수수깡의 한쪽 끝에 풀로 색시 머리 땋듯이 곱게 땋아서 만든 인형이라는데 이건 내가 만들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 만든 것을 사본 적도 없으니 이담에 겨울 이불을 풀로 삼을 만큼 무성한 풀의 언덕에 가면 그때나 한번 만들어볼 작정인 것이 난데요, 허수아비야 평생을 배추 농사 어깨 빠지게 짓고는 온동네 집집마다 포대에 담아 배추 돌렸다는 러닝 차림의 수수깡 같은 말라깽이 할아버지가 범벅인 땀을 바람에 식힐 때 겨드랑이 들어 말린 장면을 오버랩시켜본 것이 난데요.

 

  그런데요. 마네킹 있잖아요. 쇼윈도 너머 착착 세워놓을 때는 언제이고 폐점한 옷 가게 맞은편 종량제 쓰레기 봉투 옆에 그물 같은 카디건을 윗옷으로 레인보우 레깅스를 아랫도리로 입은 여성용 마네킹은 왜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내다 버렸을까요. 단정한 앞머리에 그러나 금발에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생머리에 허벅다리 절반쯤 덮는 교복 치마에 목에는 작은 넥타이에 재킷 안에는 조끼에 교복 파격 할인 90퍼센트라 쓴 띠를 어깨에 두른 여성용 마네킹은 왜 땅을 보는 자세로 내다 버렸을까요. 서 있는 마네킹과 누워 있는 마네킹, 공통점이라면 입술은 있는데 입이 없다는 거! 간혹 그 입이 없어 부럽다 싶을 때면 호루라기를 입에 뭅니다. 불지도 않을 거면서 꼭 물고만 있는 호루라기. 그런 호루라기가 필요한 순간이 꽤 있죠. 점점 있고 왕왕 있죠. 자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고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봅니다. 물을 채운 비커에 빨간 잉크가 뚝뚝 떨어져 연기처럼 퍼지는 번짐. 요즘 들어 무엇이든 물어볼까, 그 놀이에 재미 들린 다섯 살배기 조카가 비도 안 오는데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땡땡이 우산을 쓰고 있다 해서요, 그건 한번 물어볼까 하는 참입니다.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 곡두 43

 

 

  중국 시인 정샤오충이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발표한 산문 「시詩의 문」을 요약한 이야기

 

  나는 18년 전 중국 서남부 사천으로 광등 동관에 이르는 일대에서 공장 생활을 몇 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완구 공장 설치공, 전자 공장 검품 인원, 카세트테이프 공장 설치공과 사출 성형공, 금속 공장 절단공, 피혁 공장 검사 담당, 가구 공장 회계 담당, 플라스틱 공장 물자 관리공 등으로 일하면서 세계의 공장이라 불린 동관의 조립 라인에서 생계를 도모하였다. 나는 그냥 A245였다. 그렇지 않으면 담당 제조 공정이나 포장 담당이라 불렸다. 동료 중에 조립 라인의 업무 강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밤마다 꿈을 꾸며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노라면, 그 외침이 내 몸에서 뿜어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공장 출입문 앞에서 자기 월급을 독촉하는 여성 노동자를 공장 보안 요원이 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끌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공업 단지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는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칼과 나이 든 얼굴을 마주하면, 타향에서 실종된 이가 나인 듯 했다. 동료가 타향의 길거리에서 컨테이너에 치여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죽은 이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따르고 교류했던 무수한 여성 노동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중에 그들이 끝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왔다. 나는 바로 내가 그 무리 속에서 이들 여성 노동자를 구출하여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이자 아내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들 모두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이야기, 그들 이름의 이면에는 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지 무리인 것이 아니다. 나를 신뢰하는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그들의 불운을 서로 기록하였다. 모든 이의 이름은 그녀의 존엄을 뜻한다. 이 말은 조립 라인에서 일하던 시절 깊은 깨달음을 준 구절이다. 나의 이름은 정샤오충이다. 나를 중국의 어느 여성 노동자로 부르지 말기를 바란다.

 

 

 

모자란 모자라

마침내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 곡두 44

 

 

  교양 시 수업 시간에 광고홍보학과 남달리 학생이 마스크를 쓰고 계시기에 너 감기냐 하였더니 메이크업을 안 해서 그렇다기에 네가 연예인이여 뭐여 웃자고 몇 마디 보태다 그끄제의 의사 선생님이 그제의 나를 보시며 어제와 같은 사람인가 긴가민가하시기에 오늘의 나도 5층 병원으로 직행하기 전 1층 행복한약국에 들러 성인용 특대 사이즈의 흰색 마스크를 사긴 사뒀는데 마스크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그 쓰는 습관이 아직은 들지 않아서 일단 가방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진단명이 대상포진이라 하시니 나는 아프지도 않았고 쑤시지도 않았고 다만 등 언저리가 간지러워죽겠는 것이 등 언저리는 또 저 혼자 속 시원히 긁을 수가 없는 까닭에 어제 위트앤시니컬에서 만난 오은에게 반갑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뒤로 돌아 티셔츠 등을 깐 채로 거기 뭐 물렸는지 좀 긁어봐라 하였더니 하여간 별걸 다 시켜요 김민정은 그러면서도 여기 우툴두툴하고 많이 빨개 병원 가봐야겠다 누나야 하기에 이건 분명 벌레다 중국 샤먼에서 이상 야릇한 벌레에 쏘여 온 것이 확실하다 싶어 다시금 선생님을 찾게 되었다고 하니 이리 보고 저리 보다 일단 처치실로 가 안내를 받으라시니 뭐 간호사 언니가 시키는 대로 상의를 탈의한 채 커튼이 쳐진 침대 위에서 아무리 혼자라지만 정면은 어색하니까 엎드린 채 누워 기다리는데 하의 탈의하시고 침대 위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는 간호사 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러니까 팬티는 안 벗어도 된다는 거죠? 사타구니 언저리 다 퍼졌단 말씀인데 쓸려가지고요 하는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정면인 채로 누워 기다리겠지 싶으니까 제각각 쳐진 하나의 커튼 너머로 앞을 보고 누워 있을 남자와 뒤를 보고 누워 있는 나를 젓가락 두 짝처럼 여기자니 「젖이라는 이름의 좆」 2탄 쓸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게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구나 알겠어서 쉼표 패스하고 마침표 하나 후딱 이쯤 해서 찍고 끝내려는데 찔끔 시작되는 이 조짐은 어럽쇼 생리구나 그 즉시 떠오르는 대로 가방 속에서 그 마스크란 걸 까서 팬티 속 그 아래에 갖다 대니 여자들은 알고 여자들만이 너무 아는 그의 본격 시작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잇어 알코올 적신 솜이 내 등을 차게 스쳐 가도 나는 이맛살 절로 찡그려져 닭살 돋음에도 솜털 안 세우는 나름의 기개인데 의사 선생님은 알까 간호사 언니는 알까 안 아픈 척이 아니라 참는 척이 아니라 순발력 잇게 도구를 사용했다 싶으니까 진짜 어른이라도 되었다 싶으니까 내 질박함을 칭찬하고 싶어 여유 만만인 건데 그러나 저러나 얼마나 다행이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마스크가 아니라 두고두고 빨아 쓰는 면 마스크인 것이 좀 굿이지 않니?

 

 

 

 

빚 같지만 빛이고, 앙갚음 같지만 갚음입니다.

시인으로, 시집을 만들면서 살다 보니

시로부터 아주 객관적인 자세를 갖게 된 나는

이제 와 믿게 된 것이 단 하나란다.

그러니까, 시간, 그리고 시라는 나.

우리는 잊힐 것이다.

우리는 우리로밖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 김민정 시인에게서 온 이메일(2011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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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0-014 교양 서양미술

 

 

 

 

샤를 블랑 지음 | 정철 옮김 | 하진희 감수

2020, 인문산책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4190

 

650.1

블292ㅅ

 

 

마 침 내   발 견 한   회 화 의   문 법

 

Grammaire des Arts du Dessin

 

프랑스 최고의 미술평론가,

 

샤를 블랑의 미술이야기

 

 

"가장 위대한 화가는

자신의 사유의 땅으로,

그가 상상한 궁전이나 들판으로

우리를 이끌고,

거기에서 신들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화가는 자연을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바라보고,

비평가는 자연을 화가들의 마음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비유한다.

 

법은 명령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고,

도덕은 강요하는 것이기에 귀담아 듣지 않으나,

예술은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설득할 줄 안다.

 

화가는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된 적이 없는 생각들을 움직여서

천둥소리가 귀를 때리듯이 우리의 영혼을 자극한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방된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된 것이다.

 

 

지은이

샤를 블랑 (Charles Blanc, 1813~1882)

 

19세기 프랑스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

프랑스 학술원 및 예술원의 회원으로서 예술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프랑스 대학에서 미학 및 역사 교수를 역임했다. 초기에는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그의 형 루이 블랑(Louis Blanc)이 주관하는 여러 언론에 비평문을 기고했고, 《예술 잡지 Gazette des beaux-arts》 등의 편집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 저서로서 이 책의 원저인 《데생 예술의 문법 : 건축, 조각, 회화 Grammaire des arts du dessin : Architecture, Sculpture, Peinture》(1867)의 〈회화편〉에서는 색의 3원색과 이를 기초로 한 색상환, 보색, 유채색과 무채색의 개념 등의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했고, 이는 19세기에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De Paris a Venise》(1828)

《호기심의 보물 Le tresor de la curiosite》(1857~1858, 2 vols.)

《모든 화파 화가들의 역사 Histoire des peintres de toutes les ecoles》(1861)

《렘브란트 전작 Loeuvre complet de Rembrandt》(1873, 2 vols.)

《앵그르, 그의 생애와 작품들 Ingres, sa vie et ses ouvrages》(1870)

《장신구와 의상 예술 Lart dans la parure et dans vetement》(1875)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 Les artists de mon temps》(1876)

《장식 예술의 문법 Grammaire des arts decoratifs》(1881)

이외에 다수의 저서가 있다.

 

 

역자

정철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1983년 KOTRA에 입사해 유럽 지역 조사 작업을 담당했으며, 다섯 차례 해외 근무를 통해 파리, 리옹, 헬싱키, 브뤼셀, 암스테르담에서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5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2018년 정년퇴임했다. 유럽에서 근무하면서 그 인연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이 책을 조우하고 3년 동안의 번역 작업을 거쳐 국내에 처음으로 샤를 블랑의 이론을 소개하게 되었다. 역서로는 〈조선의 참 유학자이자 담대한 크리스천들〉, 〈메가체인지〉 등이 있다.

 

 

감수

하진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과 인도 비스바바라티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도 미술에 홀리다〉, 〈아잔타 미술로 떠나는 불교여행〉, 〈천상에서 내려온 갠지스 강〉, 〈샨티니케탄, 평화를 부르는 타고르의 교육도시〉 등이 있고, 역서로는 〈인도의 신화〉 등이 있다.

 

 

 

차례

 

저자의 말 : 회화 미학의 교양을 위하여

 


1 독립                    10 자연


2 설득                    11 빛


3 한계                    12 명암


4 표현                    13 색상


5 숭고함                  14 터치


6 구상                    15 다양성


7 통일성                16 생명력


8 원근법                17 스타일


9 제스처                18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간략한 서양미술사 / 찾아보기 / 그림 목록

 

 

 

 

 

메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년, 캔버스에 호일, 104×141cm, 내셔널갤러리 소장 (영국 런던)

 

 

빈센트 반 고흐,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화가>, 1888년 소실됨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브리오슈 빵>, 1763년, 캔버스에 오일, 47×56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프랑스 파리)

 

 

 

 

 

1868년 오텔 드루오에서의 미술품 경매 장면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 A.D. 1년, 폼페이 프레스코 벽화

 

백조의 형상을 한 제우스 신이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를 임신시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신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그림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2018년 발견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20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선명한 색감과 그림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

 

독립

 

 

회화는

자연의 모든 실재를 수단으로

영혼의 모든 개념을

하나의 통일된 표면 위에서

형태와 색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갈라테아의 승리>, 1514년, 프레스코화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 B.C. 2세기~B.C. 1세기 초, 그리스

 

 

 

 

 

헤라르트 테르뷔르흐, <편지를 쓰는 여성>, 1655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Baptiste Simeon Chardin), <순무를 다듬는 여인 Woman Cleaning Turnips>, 1738년

 

샤르댕의 그림은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화와 정직을 조언해주고 있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을 통해 실제 현실에서는 잡을 수 없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은 도덕적 가치까지도 표현한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정물화가로 인정받았던 샤르댕은 후에 세잔의 정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2

 

설득

 

 

회화는 어떤 유용성이나 도덕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서도

그 장면의 위엄성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고,

가시적인 교훈을 통해

인간을 교화시킬 수 있다.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 <사보나롤라의 심문>, 1843년

 

 

 

 

 

장 바티스트 그뢰즈, <부서진 주전자>, 18세기

 

 

 

 

 

피에테르 코르네리츠 반 슬링헬란트, <앵무새를 들고 있는 소녀>, 17세기

 

 

 

 

 

가브리엘 메취, <청어가 있는 점심식사>, 17세기

 

 

 

 

"의심할 여지없이 예술가는 그 시대의 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따르는 사람이거나 인기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어떤 자비로운 신이 젖먹이를 엄마 젖가슴에서 일찍 떼어내서 보다 적령(適齡)의 여자의 젖을 먹여 멀리 떨어진 그리스의 하늘 아래서 성년으로 키워냈다고 하자. 그가 낯선 사람이 되어 현 시대로 돌아온다면, 그의 등장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가멤논의 아들처럼 그 존재를 정화시키기 위해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는 현재로부터 그의 소재들을 받아들일 것이 확실하지만, 그 소재들의 형태는 보다 고상한 시대로부터, 심지어 시간을 벗어나 그 자신의 본질의 절대성과 불편의 통일성으로부터 형태를 빌려올 것이다. 그 뒤에 자신이 천상의 순수한 창공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이슈화하면서 부패한 세대와 시대에도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임을 계속해서 흘려보낸다. 그의 소재들, 즉 허상은 기품을 받은 것처럼 불명예스러울지 모르지만, 형태는 항상 순수하여 그것의 변덕스러움을 피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 1세기의 로마인들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어왔다. 하지만 황제들의 입상들은 항상 우뚝 서 있었고, 사원은 신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눈에 여전히 신성하게 남아 있었으며, 네로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의 악행에 대항해 문제제기를 했던 대피처의 건물들은 고귀한 스타일로 남아 있다. 인류가 존엄성을 잃어버릴 때 그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예술이다. 진실은 계속해서 환상 속에서 살아 있고, 그 복제품은 어느 날 모델을 복원시키는 데 이용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 《미학 교육에 관한 편지 Letter sur l'Education esthetique》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세비야의 물장수 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0년

 

 

 

진실이 크면 클수록 거짓은 그만큼 더 우리를 배신하게 되듯이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에 더 배신감을 느낀다. 이 그림에서는 물잔과 항아리를 실제와 너무 똑같게 묘사해서 갈증을 풀어주는 듯 잠시 동안이라도 감상자에게 착각을 일으킨다.

 

 

 

 

 

3

 

한계

 

 

회화는 물질적인 모방이 제약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으나,

허구는 뒤로 물러나고

정신만은 더 커지는 것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브리오슈 빵>, 176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술 마시는 사람>, 1629년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일부분, 1485년

 

 

엄숙한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던 시기에 보티첼리는 신화 속 여신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비로소 눈을 돌리게 한 역사적인 작품이 되었고, 보티첼리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4

 

표현

 

 

회화는 표현의 예술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표현 예술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

회화는 스타일로 인물을 이상화시키면서,

다시 말해 생생한 개성 속에서

전형적인 참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아름다움으로 표현을 가다듬을 수 있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B.C. 175~B.C. 150년

 

 

 

 

 

산드로 보티첼리, <아테나 여신과 켄타우로스>, 1482년

 

 

 

 

 

라파엘로 산치오, <절름발이의 치유>, 1515년, 템페라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막달리나 마리아 앞에 나타난 예수 Christ Appearing to Mary Magdalene>, 1651년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밝은 부분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주위와 배경에 어두운 부분이 넓게 배치되어,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특징이 있다.

 

 

 

 

 

5

 

숭고함

 

 

회화는 숭고하게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회화 자체의

고유 수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화가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엠마오의 만찬>, 1628년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 성경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 1638~164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 1489~149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그림을 '역동적인 초상화 양식'이라 지칭하였다. 돌아서는 여인과 담비의 동작을 통해 화면 우측의 공간으로부터 누군가가 접근하여 주의를 끌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6

 

구상

 

 

화가는 주제를 생각해내거나

첫 이미지를 고안할 때부터

회화 고유의 특별한 표현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

 

 

 

 

 

다비트 테니르스,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는 원숭이들>, 1660년

 

 

 

 

아드리안 브라우머, <싸움질하는 농부들>, 1631~1635년

 

 

 

 

 

<볼테르의 계단>, 18세기

 

 

 

 

 

폴 슈나바르, <역사의 철학>, 1850년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9년

 

 

 

 

 

 

"회화는 질투심 많은 여신이어서 아낌없이 자신에게 헌신해줄 연인들을 바라고 있다."

- 미켈란젤로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The Death of Socrates>, 1787년

 

 

 

피라미드형 구성이 명확하지 않다면 수평적인 방향이 화면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피라미드형 구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면 수직적인 방향이 화면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7

 

통일성

 

 

화가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첫 번째 방법은 배열이다.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은 그 형벌의 대상자인 범죄자를 거의 압도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Horace, B.C. 65~B.C. 8)의 시 구절

 

 

 

 

피에르 폴 프뤼동, <범죄자를 쫓는 정의와 징벌의 여신>, 1808년

 

 

 

 

 

"먼저 나를 감동케 하라. 나를 놀라게 하라. 나를 고뇌케 하라. 나를 전율케 하고 울게 하며 떨게 하라. 나를 분노케하라. 그러고 나서 너는 네가 할 수 있다면 내 눈을 즐겁게 하라."

-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조반니 벨리니, <왕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1487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565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그리스도의 세례>, 1472~1475년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 세례자 요한의 탄생>, 1486~1490년

 

 

 

 

 

피에트로 페루지노,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 1481~1482년

 

 

 

 

라파엘로 산치오, <디스푸타, 성체에 대한 토론>, 1509~1510년

(♣ 디스푸타Disputa는 '논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성찬(성체)', '무구수태', '삼위일체' 등 중요한 신학상의 문제를 논하는 성직자, 성인, 교부(敎父) 등의 집회도를 말한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10~1511년

 

 

 

 

니콜라 푸생, <유다미다스의 유언>, 1643~1644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성 부르노의 삶 : 레이몽 디오크레스의 죽음>, 1645~1648년

 

 

 

 

 

니콜라 푸생,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37년

 

 

 

 

 

니콜라 푸생, <구출된 어린 피루스>, 1634년

 

 

 

 

 

렘브란트 반 레인, <100플로린 동전>, 1646~1650년

 

 

 

 

라파엘로 산치오, <예수의 변모>, 1516~1520년

 

 

 

 

 

라파엘로 산치오, <시스티나 성모>, 1513~1514년

 

 

 

 

 

"우리는 화가에게 '피라미드형으로 구성하시오, 구멍을 막으시오, 비어있는 곳을 남겨두지 마시오, 각과 평행선 구도를 피하시오, 콘트라스트를 찾으시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느낌에 따라 구성하시오. 그러나 당신의 조합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당신이 선택하고 느꼈을지 모르는 통일성으로 선과 그룹, 대중의 무리들, 방향, 크기를 갖추도록 하시오'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회화총론Traite Complet de Peinture》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2~1614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 리비아에게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811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 리비아에게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864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Eustache Le Sueur), <성 브루노의 삶 : 기도하는 성 브루노 Life of St. Bruno : St. Bruno at Prayer>, 1645~1648년

 

 

 

르 쉬외르는 그림의 구석에 시점을 몰아둠으로써 세속적인 시선과 떨어져 있으며, 은둔 수도자가 세상일을 보지 못하게 가려주는 베일을 살짝 들어 올려주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8

 

원근법

 

 

그림을 구성하는 화가가

원근법을 확실히 알고 있고

그것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법칙들을 지킨다는 것은

일부 감각에 호소해야 할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년

르네상스 시기에 처음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3차원적 공간감을 창출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40년경

마사초의 후계자로 평생 원근법에 몰두한 우첼로는 선 원근법으로 공간적 깊이를 표현하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케르메스>, 1635년

 

 

 

 

파울로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 1563년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서약>, 1794년

 

 

 

 

 

앙투안 장 그로,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 1808년

 

 

 

 

 

"일부는 앉아 있고 일부는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방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수평선을 어떤 서 있는 사람의 높이로 맞추어야 한다. 이 경우 그림을 보는 관객은 그림 속 인물 옆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림 속에 앉아 있는 두세 사람만 표현한다면 수평선의 높이는 앉아 있는 사람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이 좋다. 잠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다면, 관객은 그림 속 인물들 옆에 같이 앉아서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 중 한 사람이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머리를 약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앞의 예에서와 같이 서 있는 사람의 높이로 수평선을 맞추어야 한다."

 

- 요셉 아데마르(Joseph Adhemar, 1797~1862), 저서 《원근법 논문 부록Supplement to the Treatise upon Perspective》에서

 

 

 

 

 

안드레아 만테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 중 일부, 148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년,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니콜라 푸생, <솔로몬의 심판>, 1649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에페소스에서 설교하는 성 바오로>, 1649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호메로스의 신격화>, 1827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성 브루노의 삶 : 나눔>, 1645~1648년

 

 

 

 

라파엘로 산치오,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1511~1513년

 

 

 

 

 

"좁은 거리에 있는 집의 정면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는 반대편 벽에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그 건물 정면을 그리려고 해서는 안 되며, 상상의 거리를 앞에 두고 그려야 한다. 즉 보다 넓은 거리, 집 정면 높이의 3배 정도의 거리를 상정하고 그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림 속의 인물들이 비틀거리거나 뒤로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지오반 파올로 로마초(Gian Paolo Lomazzo, 1538~1592), 저서 《그림 예술의 논문Trattato della Pittura》에서 발타자르 페루치(Balthasar Peruzzi, 1481~1536)와 라파엘로는 위와 같이 생각했다고 기록

 

 

 

 

 

"우리가 어떤 가정을 하든 다섯 발짝 떨어져 어떤 사람을 보는 각도는 열발짝 떨어져 보는 각도보다 항시 두 배 정도 크며, 이러한 문제는 기하학도 수학도 풀 수 없는 것이다."

 

- 볼테르(Voltaire), 저서 《뉴턴의 철학Philosophy of Newton》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레다의 두부 습작 Studies for the Head of Leda>, 1530년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를 그리기 전에 그린 데생으로, 레다의 머리에 빛이 비춰지는 조명을 생각하고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수많은 여성들을 그릴 때 남성 모델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속 수많은 여성들도 남성처럼 근육이 있음을 볼 수 잇다.

 

 

 

 

 

9

 

제스처

 

 

단지 데생으로 국한시켜 그림의 구성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든,

아니면 스케치를 채색하는 것이든 간에

화가는 데생을 통해서

각 인물들의 자세. 몸짓, 동작을

명확히 함으로써만 표현에 들어간다.

 

 

 

 

 

 

"뭐라고! 즉석에서 그린다! 다시 말해 스케치와 마무리를 동시에 하고, 단박에 상상력과 판단력을 충족시키며, 단숨에 그린다고! 그것은 아마 인간이 일상의 언어로 신들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재능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 재능의 노력을 감추려 할 것인가? 그런 놀라운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즉석에서 그린다는 것은 수정이나 변화 없이 빠르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다 마쳤을 때 어떻게 보일지 미리 현명하게 검토해보는 스케치 없이 즉흥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화가들 중 가장 감동시킬 줄 안다고 알려진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1594)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같은 화가에게 있어서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특별히 루벤스의 경우 예술가의 생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손질이라는 이 최고의 노동이, 그들의 힘과 확고함으로부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심치 않고 믿는 것과 같이 흥미롭게도 화가의 창조 열의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는 그림의 윤곽을 처음 잡을 때 이미 전체적인 구상 안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 있응 것이며, 여러 부분의 배열 속에 재능이 극대화되어 발휘되는 것으로, 이는 진실로 화가가 최선을 다하는 작업이다."

 

-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

 

 

 

 

무덤 안치 장면을 그린 라파엘로의 스케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7~1541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천벌을 받는 사람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구원을 받는 사람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마리아와 예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기록

 

 

 

 

미켈란젤로, <이사야 예언자>, 1508~1512년

 

 

 

 

미켈란젤로, <쿠마에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델포이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페르시아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리비아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예레미아 예언자>, 1508~1512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스케치 일부분

 

 

 

 

자크 칼로, <음식을 준비하는 집시들>, 1621년

 

 

 

 

니콜라 투생 샤를레, <동정>, 석판화, 1819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교황의 편지를 읽고 있는 성 브루노>, 1645~1648년

 

 

 

램브란트 반 레인, <이삭의 희생>, 1635년

 

 

 

 

 

렘브란트 반 레인, <아브라함의 희생>, 1655년

 

 

 

 

렘브란트 반 레인, <눈 먼 토비>, 1651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 1799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1817년

 

 

 

 

"우리가 그렇게 마시면서 성대한 식사를 하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 한 노예가 은으로 된 해골을 가져왔는데, 그 해골은 마디마디와 척추가 모든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해골을 테이블 위에 놓고 움직이는 사지를 여러 차례 이리저리 돌려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면서 트리말시온(trimalcion)은 '불쌍한 인간이여! 이게 바로 우리가 아닌가!'하고 외쳤다."

 

-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Arbiter, 27~66)의 풍자극에

 

 

 

기원전 1,000년경의 그리스 항아리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이삭 줍기 Gleaners>, 1857년

 

 

자연주의 화가로 알려진 밀레는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생활과 주변의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은 파리 근교 바르비종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땅에 떨어진 이삭 줍는 모습을 담았다.

 

 

 

 

 

10

 

자연

 

 

구성이 일단 결정되고

제스처와 동작의 모습을 잡았다면,

화가는 그가 표현해야 하는 형태에

그의 이상(理想)에 맞는 그럴듯함과

자연스러움을 주기 위해

모델과 협의한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제우스와 이오>, 1531~1532년

 

 

 

 

미켈란젤로, <에리트레아 무녀>, 1508~1512년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년

 

 

 

 

클로드 로랭, <로마 주변의 풍경>, 1639년

 

 

 

 

니콜라 푸생, <평온한 풍경>, 1650~1651년

 

 

 

 

"이는 여전히 정확한 개념과 어떤 지고(至高)의 예술을 창조하는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초보 학습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건축학이 여러 실용적인 방법을 갖추고 있는 병기고처럼 생각할 수 있고, 보다 높은 단계의 학습 초기에서는 건축학이 구성의 모든 원칙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학은 모든 미술 작품에 어떤 기초와 어떤 틀을 제공하고 있다. 건축학은 조형물에 균형 개념을 제시한다. 건축학은 안정된 선(線) 속에서 그림이 될 만한 생각이 자리 잡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건축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고착시키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건축학을 배움으로써 회화에서 어떤 장면이 비틀거리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그 장면이 활기차도록 덩어리와 움직임, 생명과 감정까지도 자리 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예전에 어떤 훌륭한 조각가가 데생 교육에 관해 이야기한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어느 강의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긁어모으면서 기분이 고조된 조각가는 미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美)을 창조한다."

 

- 무명의 시인이 어떤 옛 화가 한 명을 두고 읊은 시 구절

 

 

 

 

라파엘로 산치오, <파르나소스>, 1509~1511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오이디푸스>, 1808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샘>, 1856년

 

 

 

 

라파엘로 산치오, <성 가족>, 1518년

 

 

 

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33년

 

 

 

 

샤를 조셰프 나투아르, <프시케의 화장실>, 1735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인상 : 해돋이 Impression : Sunrise>, 1872년

 

 

인상주의, 인상파의 이름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 효과를 통해 인상을 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이 전시되었던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는 대충 그린 듯한 느낌 때문에 당대에는 온갖 야유와 비난으로 시달렸다.

 

 

 

 

11

 

 

 

화가는 그가 택한 형태를 확인한 뒤에

빛과 색상으로써 그가 생각한 바를

도덕적으로 표현하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함으로써

작품을 마무리한다.

 

 

 

 

메디치가 로렌초(Lorenzo) 무덤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생각하는 사람>, 1531년

 

 

 

 

조반니 발리오(Giovanni Baglione),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1602년

( 극명한 구성의 명암법, 키아로스쿠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피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년

( 루벤스는 렘브란트와 대척점에서 있으면서 또 다른 명암법을 보여주었다.)

 

 

 

 

요하네스 얀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년경

 

 

빛을 통해서 인물이 갖고 있는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투명하고 맑게 극대화시켰다. 목선 아래쪽으로 갈수록 어둡게 떨어지는 명암은 진주귀걸이를 더 영롱하게 비추는 효과를 보여준다.

 

 

 

 

12

 

명암

 

 

명암은 어떤 형태를 도드라지게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전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 아름다움의 법칙과

자연 진리의 법규를 따르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17년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탈출>, 1609년

 

 

 

 

레오나르드 브라머, <동방박사의 예배>, 1628~1630년

 

 

 

헤리트 반 혼트호르스트, <군인과 소녀>, 1621년

 

 

 

 

지로데, <프랑스 영웅들의 영혼을 맞이하는 오시안>, 1801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의심 많은 도마>, 1601~1602년

 

 

 

 

 

발랑탱 드 볼로냐,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20~1622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 <마리 드 메디치 대관식>, 1622~1625년

 

 

 

 

"전면적으로 비추는 빛은 부분적이고, 적은 양의 빛보다 인물을 보다 우아하게 만들어준다. 그 이유는 넓고 강한 빛은 물체의 도드라짐을 감싸주고 끌어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그 빛이 비춰주는 작품은 멀리서도 우아하게 살아나게 된다. 반면에 좁은 빛 아래서 그려진 그림은 어두운 부분이 많아서 멀리서 보면 밋밋한 것처럼 보인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저서 《회화론Treatise on Painting》의 363장에서

 

 

 

 

 

렘브란트 반 레인, <명상에 잠긴 철학자>, 1632년

 

 

 

 

렘브란트 반 레인, <책을 보는 철학자>, 1645년

 

 

 

 

렘브란트 반 레인, <야경>, 1642년

 

 

 

 

"로마의 젊은 처녀들은 결혼을 서약한 다음 판테온의 원형 홀에 신랑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인들 앞에 나타난다. 이곳은 둥근 천장 중앙의 유일하게 열린 부분을 통해서만 햇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위에서 내리 비추는 빛이 가장 선호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자들이 여기에서 최고의 심판관이며, 그녀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똑바른 자세로 서 있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신랑만이 자연스럽다. 그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빛은 그의 얼굴을 우아함으로 돋보이게 하고, 키를 무척 커 보이게 한다."

 

-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kelmann, 1717~1768), 저서 《고대인들의 건축적요Remarks upon the Architecture of the Ancients》에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 <신성한 밤>, 1529~1530년

 

 

 

 

조슈아 레이놀즈, <뱀프파일드 초상화>, 1776년

 

 

 

 

"베네치아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베네치아의 대가들이 따랐던 원칙을 이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택했다. 나는 그들의 그림에서 특별한 빛과 그림자(음영)의 효과를 알아차리고서 노트 한 장을 뜯어서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순서와 같은 방법으로 종이 전체를 검은색 연필로 서서히 칠하면서 종이의 하얀 부분을 빛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몇 번 실험해 본 후에 나는 종이가 항상 거의 비슷한 면적으로 칠해져 잇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대가들의 일반적인 관행은 주된 밝은 부분과 2차적인 밝은 부분의 빛에 그림의 4분의 1 이상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분의 1은 어두운 부분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반농담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덩어리로 크게 연필 칠을 한 종이, 어떻게 보면 거칠게 얼룩덜룩한 이 종이를 눈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두고 보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방식에 놀라게 된다. 즉 관객들은 빛과 그림자의 뛰어난 배분이 가져오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림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역사적인 주제든 아니면 풍경이든 초상화든 정물화든 간에 상관없이 빠짐없이 나타나는 즐거움인데, 그 이유는 동일한 원칙이 모든 분야의 회화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

 

 

 

 

 

"우리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야외에서, 충만한 햇빛 속에서 강렬하게 빛을 받고 있는 어떤 아이들의 눈부신 살색에 감탄한다. 이 광채는 신선한 그들의 머리 위에 어떠한 어둡고 짙은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아우르며 뚜렷한 입체감이 있다. 또한 모든 것이 연하고 신선하나, 너무 부드럽지 않고 너무 흐릿한 것은 조금도 없다···. 그러한 효과를 모방하기 위해 화가는 빛의 광채를 배가시켜야 하고, 그늘의 어두움을 높여서는 안 된다."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저서 《회화개론Traite de Peinture》에서 루벤스를 염두에 두고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20~1621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장갑 낀 남자>, 1520~1523년경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1822년

 

 

 

 

안 루이 지로데, <잠자는 엔디미온>, 1791년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 <로마 카푸친 수도원 내부>, 1818년

 

 

 

 

장 바티스트 위카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790~1793년

 

 

 

 

렘브란트 반 레인, <토비아와 그 가족을 떠나는 천사>, 1637년

 

 

 

 

렘브란트 반 레인, <신성한 가족>, 1640년

 

 

 

 

클로드 로랭, <사무엘의 축성을 받는 다윗>, 1647년

 

 

 

 

프란치스코 프란치아, <검은 옷을 입은 청년>, 1510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밤의 카페 테라스 Cafe Terrace at Night>, 1888년

 

 

반 고흐는 샤를 블랑의 색채이론에 따라 보색 관계로 화면을 구성했다. 이 작품은 청색 하늘과 보색관계인 노란색을 대비함으로써 색을 통해 단순한 색의 재현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13

 

색상

 

 

색상은 다른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화가는 반드시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색상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1880년판 색상환 도표

 

 

 

6색 색상환

 

 

 

 

12색 색상환

 

 

 

 

 

"캔버스에 한 색을 칠하면, 붓이 지나간 자리에 그 색이 칠해지는 것 이외에도 그 주변에 보색의 후광이 생긴다. 예를 들어 빨간색 원을 그렸다면 그 주위에 옅은 초록색 잔영이 생기며, 빨간색으로부터 그 잔영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오렌지색 원 주위에는 파란색의 후광으로 둘러싸여지며, 노란색 원 주위에는 보라색 후광이 나타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 셰르뢸

 

 

 

 

"1829년 4월 어느 날씨 좋은 날, 철학자 괴테와 정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만개한 노란색 크로커스 꽃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바닥으로 앉아 다시 바라보니 보라색 자국이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어느 날 들라크루아가 노란색 옷 장식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원하는 노란색을 찾지 못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는 '루벤스나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은 어떻게 그 아름답고 빛나는 노란색을 찾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을 가기로 하고 마차를 불렀다. 1830년 당시 파리에는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이륜마차들이 무척 많았다. 이들 마차 중 하나가 들라크루아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마차에 타려는 순간 멈춰 서서 마차의 노란색이 그늘진 곳에 보라색 잔영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곧장 그는 마차를 돌려보내고 크게 감동하여 돌아와서는 일단 그가 발견한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법칙이란 그늘진 곳에는 색의 보완이 항상 미미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햇빛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 때 그 현상은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괴테가 말한 것처럼 우리 눈은 배경에 맞는 보색을 보게 된다."

 

- 요한 페터 에커만(Johann Peter Eckermann, 1792~1854), 저서 《괴테와의 대화Conversations of Goethe》에서

 

 

 

 

 

"우리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아파트에 있고, 창문은 빨간색 커튼이 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커튼 위에 지름 3~4밀리미터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받기 위해 조금 떨어져 하얀 종이를 받친다면, 이 햇살은 하얀 종이 위에 초록색 자국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커튼이 초록색이라면 빨간색 자국이 나타날 것이다."

 

-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저서 《기하학 서술Geometric Descriptive》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외젠 들라크루아, <성 세례자 요한의 죽음>, 1838년

 

 

 

 

외젠 들라크루아, <돈 주앙의 난파선>, 1840년

 

 

 

 

외젠 들라크루아, 1845년, 뢱상부르 궁 도서관 천장화

 

 

 

 

외젠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들>, 1834년

 

 

 

 

"붉은 강낭콩이든 아니면 파란 청금석이나 옥색 터키석이든 간에 색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동양의 화가들은 그 색상이 더 반짝이도록 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음영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좀 더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무미건조하고 단조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마디로 이러한 진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진동 없이는 어떤 색도 눈으로 봐줄 수 없는 색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같은 조건 하에서 어떤 소리도 이러한 진동 없이는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 보몽, 《르뷔 데 되 몽드Revnu des Deux Mondes》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바다를 대하고 연설하는 데모스테네스>, 1859년

 

 

 

 

외젠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840년

 

 

 

 

페테로 파울 루벤스, <사랑의 정원>, 1630~1631년

 

 

 

페테로 파울 루벤스, <최후의 심판>, 1614~1617년

 

 

 

 

외젠 들라크루아, <무덤의 그리스도>, 1848년

 

 

 

 

외젠 들라크루아,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1839년

 

 

 

 

외젠 들라크루아, <트라얀의 정의>, 1840년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년

 

 

 

촐 세잔(Paul Cezanne), <사과와 오렌지 Apple and Oranges>, 1899sus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로, 소파 위에 놓인 흰색 식탁보는 과일을 더욱 빛나고 도드라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작은 색면들이 겹쳐지면서 대상은 입체감을 갖게 된다.

 

 

 

 

 

14

 

터치

 

 

터치의 특징,

곧 물질적 실행의 질은

화가에게 마지막 표현의 수단이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성 베드로의 순교>, 1585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성모 승천>, 1516~1518년

 

 

 

 

안토니오 다 코레조, <레디와 백조>, 1530년

 

 

 

니콜라 푸생, <레베카와 그 동료들>, 1648년

 

 

 

 

후세페 데 리베라, <성 오누프리우스>, 1630년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20~1621년

 

 

 

 

장 일 레스투, <성령강림>, 1732년

 

 

 

 

프랑수아 부세,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모르페우스와 아리리스>, 1811년

 

 

 

 

헤라르트 테르뷔르흐, <편지 읽는 여인>, 1660~1662년

 

 

 

 

가브리엘 메취, <편지 읽는 여인>, 1665년

 

 

 

 

가브리엘 메취, <아픈 아이>, 1663~1664년

 

 

 

 

장 바티스트 그뢰즈, <비둘기를 안고 있는 소녀>, 연도 미상

 

 

 

 

다비트 테니르스,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1637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베 짜는 여자>, 1655년

 

 

 

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의 초상>, 1721년 이전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년

 

 

쇠라는 물감을 섞는 대신 색을 원색의 미세한 점들로 분할하는 방법, 즉 '분할주의' 혹은 '점묘법'을 고안해냈다. 인상주의가 색과 빛을 대체로 동일시했다면, 쇠라는 색과 빛의 성질이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상주의와는 다른 신인상주의를 창조했는데, 이는 '물리적' 혼합 대신에 안구 위에서 섞는 '시각 혼합'을 제안한 샤를블랑의 색채론을 연구하고 활용할 것이다.

 

 

 

 

 

15

 

다양성

 

 

회화와 어떤 관습들은 다양하며,

내적인 특성이든 장식적인 특성이든

그리는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화가가 채워야 하는

표면의 성격에 따라서

다양해야만 한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1511~1512년, 프레스코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고대 로마의 회화 양식을 보여주는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벽화

 

 

 

 

"석회반죽 면이 아직 마르지 않은 동안에 석회의 탄산칼슘은 안료를 빨아들이고 스며들게 하며, 완전히 반투명한 니스처럼 두께감이 없는 진짜 결정체 같은 것으로 그것의 표면을 형성한다. 이 피막은 그림을 손상키는 모든 외부적인 요인으로부터 그림을 보호하게 된다. 튼튼한 벽에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견고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말하자면 습기의 영향과 같이 불순한 기후의 공기 속에서도 변치 않는 내구성을 지니게 된다."

 

- 프랑수아 아나톨 그루이에(Francois Anatole Gruyer, 1825~1909), 저서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fresques de Raphael》에서

 

 

 

 

 

프레스코화로는 조금도 다시 손댈 필요가 없다.

맨 처음에 다 처리되어야 한다.

 

- 극작가 시인 몰리에르(Moliere, 1622~1673) 프레스코화에 대해

 

 

 

 

 

피에르 미냐르, 파리의 발 드그라스 궁전 천장화, 1663년, 프레스코화

 

 

 

이폴리트 플랑드랭,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1846년, 파리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 벽화

 

 

 

 

안드레아 만테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 중 일부, 1482~1492년

 

 

 

 

한스 멤링, <성 우르술라 성골함>, 1489년

 

 

 

안토니오 다 코레조, <성모 승천>, 1526~1530년, 두오모 성당 돔 천장화 (이탈리아 피렌체)

 

 

 

 

 

줄리오 로마노, <넵투누스와 물의 요정>, 1528년

 

 

 

 

라파엘로 산치오, <신들의 향연>(위쪽)과 <신들의 회의>(아래쪽), 1517~1518년

 

 

 

 

"파르마(Parma)의 산 조반니(San Giovanni) 예배당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면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Antonio da Correggio)의 붓은 벽을 뚫고 하늘로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자신이 딛고 있는 들판을 없애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면서 견고한 표면에 대칭의 통로만을 그려 넣고, 가상 건축물의 장식물로 가장자리 틀을 장식했던 미켈란젤로보다 더 대담하게 코레조는 실제 건축물이 없어져 보이게 끔 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빈 공간으로 그 건축물을 대신하고, 끝없는 이 공간의 한 중앙에 불규칙적인 선형으로 무한히 많은 무리들이 매달려 있으면서 가장 어려운 수직 원근법에 따라 서로서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 앙리 들라보르도(Henri Delaborde, 1811~1899, 예술 평론가), 저서 《현대 예술에 대한 잡기Melanges sur l'art contemporain》에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 <예수 승천>, 1520~1521년, 산 조반니 성당 천장화 (이탈리아 피렌체)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그림에 칠해진 오일 분자들이 쌓이고, 마르면서 증발로 인해 오일 분자들의 흔적들이 낳는다. 표면으로 나타날 때 오일 분자는 이미 말라버린 분자에 의해 형성된 얇은 막이나 증발을 막아주는 불침투성의 니스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오일 분자들은 물감의 경계 부분에서 이탈하려는 진행에 막혀 기름층을 형성하고, 이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농축되어 그림을 누렇게 변색시킨다."

 

- 토반하인 남자(Charles, Baron de Taubenhein, 1769~?), 저서 《밀랍 유화에 대하여De la Peinture a l'huile-cire》에서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 <밀짚모자를 쓴 폴리냑 공작부인>, 1782년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22~1765년

 

 

 

 

 

"(라 투르는) 그로(Gros)와 지로데(Girodet), 게랭(Guerin), 그리고 나, 모두 'G'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우리 화가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이보다 나은 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 1770~1837), 라 투르가 초벌칠을 한 두상을 보여주면서

 

 

 

 

조르주 루제,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 1811년

 

 

 

 

 

"에나멜화는 공기, 물, 열기, 추위, 습기, 먼지를 포함해서 유화를 손상시킬 수 있는 모든 요인들로부터 안전하다. 따라서 걸작들의 보존을 위해 대량으로 칠해지는 에나멜은 헤아릴 수 없는 장점이 있다."

 

- 루이 뒤시유(Louis Dussieux, 1815~1894), 저서 《에나멜 역사의 연구Recherche sur l'histoire de l'Email》에서

 

 

 

 

 

"색상 염료를 가루로 빻아진 유리와 섞어서 불로 녹이면 반짝거림은 변하지 않는다. 유리가 액체로 변하면서 염료의 미립자를 둘러싸고 에나멜 위에 이 미립자를 고착시키게 된다. 불의 작용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러한 작품은 프레스코화나 아교풀 화(peinture a l'eau encollee)와 같이 보인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무런 탈 없이 다시 손질이 가해질 수 있다···."

 

- 피에르 쥘 졸리베(Pierre Jules Jollivet, 1794~1871), 저서 《용암 위의 에나멜화Peinture en Email sur lave》에서

 

 

 

 

레오나르 리모쟁, <그리스도 수난도>, 1553년

 

 

 

"인간의 기술에 있어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고, 시각적으로 보기에 이보다 더 예쁘고 놀라우며, 내구성과 정교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 영상으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물을 보여주는 (에나멜) 그림이 아닌가!"

 

-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장 페니코, <갈보리 산 가는 길>, 1525~1535년

 

 

 

 

레오나르 리모쟁, <아이네아스>, 1540년

 

 

 

 

장 프티토,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 초상>, 1660년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8세기, 과슈화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 <전통 의상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 19세기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중 1월과 6월, 1412~1416년

 

 

 

 

예한 푸케, <프랑스 연대기> 중

'필립 왕에게 에드워드 3세의 헌정' 장면, 1455~1460년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

<마멜루크의 루스탐 초상>, 1806년

( 마멜루크Mameluk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군을 말함)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수채화와 같이 빨리 지워져버릴 때에만 무관심한 남자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러나) 어떤 연인의 마음속에서는 이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의 힘에 의해 고착된다. 그것이 바로 납화이다. 시간도 결코 그것을 지울 수 없다."

 

- 플루타르코스(Plutarch, 45~120)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굴 Oysters>, 1862년

 

 

똑같은 정물을 그리더라도 어떤 화가는 단지 자연을 모방할 뿐이고, 또 다른 화가는 자연을 모방하면서도 해석하고 선택하며 정리한다. 그것이 장인과 예술가를 구분하는 차이이다.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에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그의 그림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이 특징이다.

 

 

 

 

 

16

 

생명력

 

 

회화의 영역이

자연 전체로 확대된다 할지라도

회화 예술에는 상대적이든 또는 절대적이든,

지역적인 또는 범세계적인 의미에 따라서

단계적인 서열이 있다.

 

 

 

 

 

앙리 오라스 롤랑 들라포르트, <정물>, 1765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부엌 정물>, 1732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자두가 있는 그릇>, 1728년

 

 

 

 

 

 

카스파르 네츠허르, <음악 레슨>, 1664~1665년

 

 

 

 

카스파르 네츠허르, <구애> 1665

 

 

 

 

가브리엘 메취, <음악을 작곡하는 여성과 호기심 많은 남자>, 1662~1663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Farm Garden with Sunflowers>, 1907년

 

 

화면을 가득 채운 꽃과 녹색, 노랑, 빨강, 흰색 등 명도 대비는 풍부함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아르누보 계역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했다. 그의 그림들은 '색채로 표현된 슈베르트의 음악'이라 불리며,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17

 

스타일

 

 

회화의 다양한 장르가

열등한 형태에 속하느냐,

아니면 우월한 형태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방과 스타일 중 어느 것이

주된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얀 데 헤엠, <샴페인 잔과 파이가 있는 아침식사 정물>, 1642년

 

 

 

 

라헬 라위스, <꽃이 있는 정물>, 1664~1665년

 

 

 

 

렘브란트 반 레인, <큰 나무가 있는 초가집>, 1641년

 

 

 

 

실로몬 반 라위스달, <곡물밭 풍경>, 1638년

 

 

 

 

니콜라스 피터스존 베르헴, <세 사람의 목동 무리>, 1656년

 

 

 

 

니콜라 푸생, <이상향의 풍경>, 1645~1650년

 

 

 

 

클로드 로랭, <석양>, 1646~1647년

 

 

 

 

 

클레드 로랭, <석양의 항구>, 1639년

 

 

 

 

빌럼 반 더 펠더, <풍랑>, 1660년

 

 

 

 

라자르 브뤼인데, <낚시꾼이 있는 호수 풍경>, 18세기

 

 

 

얀 피트, <큰 개, 난쟁이와 소년>, 1652년

 

 

 

 

멜키오르 돈데코테르, <닭과 오리>, 17세기

 

 

 

 

 

파울루스 포테르, <어린 황소>, 1647년

 

 

 

 

 

필립 바우베르만, <백마>, 1646년

 

 

 

 

 

프란스 스니데르스, <사슴 사냥>, 17세기

 

 

 

 

 

앙투안 장 그로, <아부키르 전투>, 1807년

 

 

 

 

앙투안 장 그로, <아일라우 전투>, 1807년

 

 

 

 

라파엘로 산치오, <콘스탄티누스 전투>, 1517~1524년

 

 

 

 

샤를 르 브룅, <알렉산드로스 전투>, 1673년

 

 

 

 

오라스 베르네, <소모지에라 전투>, 1816년

 

 

 

 

 

오거스트 라페, <나폴레옹의 근위병들>, 1836년

 

 

 

 

조슈아 레이놀즈, <사라 캠프벨의 초상>, 1778년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 초상>, 1805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브로글리 공주>, 1851년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37년

 

 

 

 

조슈아 레이놀즈, <존슨 박사>, 1770년

 

 

 

 

조슈아 레이놀즈, <그란비 후작 존 매너스>, 1766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베르탱 씨 초상>, 1832년

 

 

 

 

 

"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진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모습, 짐작컨대 16세기의 모든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고, 에라스무스의 비웃는 듯한 입술이 아니면서도 그와 같이 고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홀바인의 이 초상화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영혼이 이처럼 얼굴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결코 없었다."

 

- 폴 만츠(Paul Mantz)

 

 

 

 

안토니스 모르, <메리 여왕의 초상>, 1554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1659년

 

 

 

 

 

아드리안 반 오스타데, <마을 학교>, 1662년

 

 

 

 

아드리안 반 오스타데,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화가>, 1663년

 

 

 

 

폴 시냐크(Paul Signac),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 In the Time of Harmony>, 1893~1895년

 

 

조르주 쇠라를 이어 신인상주의(점묘주의)를 이끌었던 폴 시냐크는 색채 분할은 체계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 빛과 색채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며 모자이크화 된 작은 직사각형의 색점들을 통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밝은 색점들은 감각적이고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리듬감을 주었다. 또한 특유의 붓 터치감은 세심한 균형감을 줌으로써 현대적 감각을 돋보이게 했다. 1886년 시냐크는 파리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고, 1887년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파리 외곽의 아니에르 쉬르 센느(Asnieres-sur-Seine)에 가서 강의 풍경과 카페 등을 그렸다. 이때 반 고흐는 시냐크의 느슨한 기법에 감탄했고, 짧고 굵은 스트로크로 화면을 채우는 반 고흐의 기법에 영향을 미쳤다. 폴 시냐크의 작품들은 후대의 입체파와 야수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18

 

에필로그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방된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화가 Painter on the Road to Tarascon>, 1888년

 

 

이 작품은 1888년 반 고흐가 프랑스 아를(Arles)에 머물고 있을 당시 그려진 작품으로 이를 북동쪽 교외에 있는 몽마주르(Montmajour) 수도원을 지나 타라스콩(Tarascon)으로 걸어가는 반 고흐의 자화상이다. 전신이 그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유일한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아이리스 Irises>, 1890년

 

 

노란색 배경과 아이리스 꽃의 대조적 색깔이 강한 효과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샤를 블랑의 보색 대비를 바탕으로 하여 충실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아이리스는 원래 자주색에 가깝게 색칠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붉은색이 바래면서 푸른색 꽃잎으로 보인다고 한다.

 

 

 

 

♧ 간략한 서양미술사

 

 

 

선사시대 미술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류는 벽화 등을 그리며 미술 활동을 해왔다. 기원전 2만 년 전 알타미아 동굴 벽화나 라스코 동굴 벽화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고대 이집트 미술

 

태양 숭배, 절대왕권주의 중심이었던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 등을 통해 영혼불멸의 사상을 믿었다. 그 결과 얼굴과 발은 측면을 그리고 몸은 정면을 그리는 전형적인 틀이 생겨났다.

 

 

 

고대 그리스 미술

 

조화와 균형을 중심으로 신전 건축이 주를 이루었고, 황금 비례라는 이상적인 미(美)를 추구한 신들의 조각상을 많이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밀로의 비너스, 파르테논 신전 등이 있다.

 

 

 

고대 로마 미술

 

미(美)의 기준에 있어 기능성과 실용성, 합리성을 중시하였다. 콜로세움 극장, 카리칼라 황제의 목욕탕과 같은 건축물과 카이사르 흉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 등이 있다.

 

 

 

중세 미술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15세기 초까지 약 천 년 동안의 미술을 말한다. 기독교 중심의 세계가 형성되면서 종교적 필요에 따라 주문 제작되었다. 중세 미술은 크게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미술 3단계로 변화한다.

 

 

 

르네상스 미술

 

'재생', '부활'이라는 뜻의 '르네상스'는 인간 정신의 회복을 바탕으로 중세의 기독교 신앙 위주의 미술에서 인간 위주의 미술로 전환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전반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이 시대에 유화가 발명되어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이 있다.

 

 

 

바로크 미술

 

17세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절대 왕권이 성립하였고, 대표적 건축물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잇다. 회화에서는 역동적이면서 빛을 통한 강한 색채 대비를 추구했다. 대표적 작가로는 루벤스, 렘브란트, 베르니니, 카라바조 등이 활동했다.

 

 

 

로코코 미술

 

루이 15세가 통치하는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다. 18세기까지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성향이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 데 널리 유행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와토, 프라고나르, 부셰 등이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미술

 

18세기 계몽주의 여파로 귀족층이 몰락하면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주의 양식이 부활하게 된다. 대표적 작가로는 다비드, 앵그르 등이 있다.

 

 

 

낭만주의 미술

 

18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산업혁명, 미국의 독립, 나폴레옹의 전쟁 등 급변하는 시기에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며 등장하였다. 죽음, 전쟁, 광기를 표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주로 다루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제리코, 들라크루아 등이 있다.

 

 

 

자연주의 미술

 

19세기 중엽 낭만주의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 하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대표적 작품으노는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등이 있다.

 

 

 

사실주의 미술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시민 평등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평범한 일상과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발, 도시 근로자를 소재로 삼았다. 대상의 세부 특징까지 정확히 재현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사조다. 대표적 작가로는 쿠르베, 도미에 등이 있다.

 

 

 

인상주의 미술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중요한 회화운동.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은 귀족의 초상화나 신흥 부르주아층의 누드화 등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퇴폐적 관행에서 탈피하여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실적 묘사를 던져 버리고, 야외에서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였다. 모네의 《인상 : 해돋이》(1872)는 인상파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후 이들 인상주의는 현대미술 즉 모더니즘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

 

 

 

신인상주의 미술

 

점묘파라 불리며, 모자이크화 된 작은 직사각형의 색점들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 이 밝은 색점들은 감각적이고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리듬감을 주었다. 인상주의가 경험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한다면, 신인상주의는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 화가로는 쇠라, 시냐크, 피사로 등이 있다. 특히 시냐크의 작품들은 후대의 입체파와 야수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짧고 굵은 스트로크로 화면을 채우는 반 고흐의 기법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 미술

 

대략 1890년에서 1905년 사이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인상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찰나의 순간에 주목한 인상주의와는 달리 후기 인상주의는 작가만의 주관과 경험 등 화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하여 화가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떤 시점으로 보느냐의 주관성에 주목했다. 대표적 작가로는 반 고흐, 고갱, 세잔, 로트렉, 드가 등이 있다.

 

 

 

야수주의 미술

 

20세기 주류인 아방가르드의 사조로서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았다.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명암과 색채를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감성에 따라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했다. 대표적 작가인 마티스는 피카소와 함께 회화에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Posted by 드무1
,

2020-013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편저 | 진노 마사후미 감수 | 최미숙 옮김

2020, 다산초당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4176

신천역스마트도서관

 

909

조78ㅅ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수천 년 세계사의 주요 흐름을 도시 이야기를 통해 한눈에 펼쳐내다!

 

 


 

1 DAY · 1 CITY · 30 DAYS · 30 CITIES

 

하루 한 도시

가볍게 펼쳐 언제든 시작하는

세계사 공부!

 

세계 문명을 좌우한 로마, 아테네, 파리는 물론

장안, 앙코르, 교토까지

30개 도시와 함께 떠나는 세계사 여행

 

이 책은 기원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세계사를 총 30개 도시의 역사를 통해 단순하고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세계사는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모습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것은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세계사의 큰 축을 담당하는 도시들을 비롯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도시들까지 폭넓게 다루었고, 각 도시의 전문가들이 꼭 알아야 할 핵심 지식을 엄선하고 감수했습니다.

하루 한 도시 역사 여행을 마쳐나가다 보면,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훑었다는 성취감과 함께 어느새 세계사의 기본 지식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도시의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와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국가     이라크공화국

 

         인      구      도시 현존하지 않음

 

 


 

 

 

엮은이

조 지무쇼造事務所

 

‘쉽게, 재미있게, 정확하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985년에 창립한 기획·편집 집단이다. 역사를 중심으로 문화, 종교, 생활 실용까지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전문 지식에서 꼭 알아야 할 핵심만을 추려 단순 명쾌하게 풀어내자는 목표를 가지고 의기투합했다. 다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국내에도 『30가지 발명품으로 읽는 세계사』, 『한눈에 꿰뚫는 전쟁사 도감』,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황제의 세계사』, 『신화대전』 등이 번역, 출판되었다.

 

 

감수자

진노 마사후미神野正史

 

세계사 강의로 유명한 인기 강사. 일본 내 유명 입시학원인 가와이주쿠학원의 세계사 과목을 담당하고 있고, 방송, 저술, 온라인 강의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세계사의 재미를 대중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고 국내에도 『세계사 수업』, 『역사로 읽는 세계』, 『숙청으로 보는 세계사』가 번역, 출판되었다.

 

 

옮긴이

최미숙

 

숙명여대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 졸업. 꾸준히 ‘함께 책 읽기’를 하며,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다방면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시각을 갖추려 노력 중이다.
현재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 과정을 수료한 후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한번에 끝내는 세계사』, 『역사로 읽는 세계』, 『역사로 읽는 경제』, 『미래 연표』 등이 있다.

 

 

CONTENTS

 

 

들어가는 글


30개 도시 세계지도

 



01 바빌론___성서에 이름을 남긴 고대의 요충지
   ㆍ 우루크


02 예루살렘___고난의 역사가 새겨진 성지


03 아테네___민주정을 꽃피운 문화와 학문의 도시


04 알렉산드리아___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한 학술 도시


05 테오티우아칸___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은 ‘신들의 도시’


06 로마___몇 번이고 되살아난 ‘영원의 도시’
   ㆍ 바티칸


07 콘스탄티노플___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은 요충지


08 장안___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수도의 대명사


09 바그다드___이슬람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평안의 도시’


10 교토___일본의 중심이었던 ‘천년의 수도’


11 사마르칸트___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12 앙코르___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품은 밀림 속 도시


13 튀니스___3000년의 역사를 품은 지중해의 십자로


14 베이징___지방도시에서 중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역대의 수도


15 믈라카___세계유산과 일상이 혼재하는 오래된 항구도시

 

16 모스크바___대삼림에 건설된 ‘제3의 로마’


17 이스파한___‘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린 고원의 고도


18 베네치아___무역으로 지중해를 석권한 ‘물의 도시’


19 델리___다문화가 혼재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ㆍ 뭄바이


20 상트페테르부르크___표트르대제가 건설한 ‘유럽으로 열린 창’


21 파리___세계로 전파된 프랑스 문화의 발신지


22 암스테르담___프로테스탄트 상인이 만들어낸 무역도시


23 런던___19세기에 ‘세계의 중심’이 된 도시


24 뉴욕___초강국 미국을 상징하는 메가시티
   ㆍ 워싱턴 D.C.


25 빈___합스부르크 가문이 일군 ‘음악의 도시’
   ㆍ 프라하


26 리우데자네이루___열대의 미항에 건설된 뉴타운
   ㆍ 상파울루


27 시드니___리아스식 해안에 조성된 항만도시


28 싱가포르___아시아 부국으로 자리 잡은 도시국가


29 상하이___경제발전의 기치를 내걸고 급성장한 항만도시
   ㆍ 홍콩


30 두바이___사막지대에 출현한 근미래 도시

 

도판 출처 및 지도 참고문헌

 

 

 

 

 

 

 

 

WORLD HISTORY

01

 

바빌론

Babylon

 

성서에 이름을 남긴

고대의 요충지

 

많은 사람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 전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전설에 의하면, 당시 크게 번성했던 고대도시 바벨(바빌론)의 왕이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탑을 쌓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바빌론신전의 석탑은 약 90미터의 어마어마한 높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황량한 사막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수천 년 전, 무엇이 존재했을까?

 

 

현재 국가      이라크공화국

 

       인       구      도시 현존하지 않음

 

 

 

 

 

 

함무라비 법전비

 

 

 

 

 

신바빌로니아왕국과 그 주변국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강의 하류지역에 위치하였다.

 

 

 

 

 

바빌론의 구조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건설한 남북 왕궁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일설에 따르면 피라미드형의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풀, 꽃,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아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대왕

 

 

 

 

 

이라크 우르의 지구라트

 

 

 

우루크(Uruk)

 

인류 최초의 문자 기록을 남긴 도시

우루크는 바빌론이 건설되기 훨씬 전에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건설한 최대 도시국가다. 『구약성서』에는 '에레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현재의 이라크 국명이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우루크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들이 모여 산 흔적이 있으며, 기원전 3000년경에 설형문자의 원형인 그림문자로 농작물의 수확량이나 가축 수 등을 점토판에 기록했다.

우루크인이 사용한 문자와 지명, 직업과 같은 어휘는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다양한 민족에게 전해져 2000년 이상 사용되었다.

가장 번성했던 시기 우루크의 면적은 약 2.5제곱킬로미터 정도이고, 인구는 여러 설이 있지만 2만 ~ 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우루크인은 하늘의 신과 여신, 아누와 이난나를 숭배했고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신전과 지구라트를 건설했다.

 

 

 

 

WORLD HISTORY

02

 

예루살렘

Jerusalem

 

고난의 역사가

새겨진 성지

 

현존하는 대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공통적인 성지로 유명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분쟁의 무대가 되어왔다.

고대 유대인들이 세운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시가 건설된 이후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제국,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거쳤다.

 

 

현재 국가     이스라엘

 

                    인      구      약 92만 명(2019년 기준)

 

 

 

 

 

 

가나안에서 돌아온 정탐꾼을 맞이하는 모세  『구약성서』에 따르면 가나안으로 떠나라는 야훼의 명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12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곳이 살만한 땅인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위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왕국의 중간에 위치하면서도 어떤 유대 부족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키루스 2세  키루스 2세는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통곡의 벽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

 

 

 

 

 

현재 예루살렘의 중심 시가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예루살렘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이 도시에는 다양한 민족의 유적이 존재한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당시

 

 

 

 

 

다마스쿠스 문

 

 

 

 

 

성스테파노 문

 

 

 

 

 

다윗의 묘

 

 

 

 

 

 

WORLD HISTORY

03

 

아테네

Athens

 

민주정을 꽃피운 문화와

학문의 도시

 

고대 그리스 시대에 고대 민주정을 완성한 아테네. 이곳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이 교류하며 철학, 문학, 건축 등 학문을 발달시키고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스에 존재한 많은 도시국가 중에서 아테네가 특히 민주정을 발전시키고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국가    그리스공화국

                인       구    약 315만 명(2019년 기준)

 

 

 

 

 

아테네 통치를 두고 싸우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위치지도

 

기원전 5세기경 에게해 주변  고대 그리스세계는 여러 차례 대제국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마라톤 전투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이 전투에서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 경주가 유래되었다.

 

 

 

 

복원된 트리에레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고 아고라는 정치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장소였다.

 

 

 

 

 

 

고대 아고라 유적지

 

 

 

 

 

소크라테스 흉상

 

 

 

 

 

플라톤 흉상

 

 

 

 

 

디오니소스 극장

 

 

 

 

 

카이로네이아전투  이 전투를 통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지배권을 손에 넣었고, 이는 훗날 마케도니아를 물려받은 알렉산드로스가 대제국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WORLD HISTORY

04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한

학술도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베트남의 호찌민 등 위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도시는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는 무려 2300년 이상의 기나긴 역사를 자랑한다.

동지중해에 접한 이 도시에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학술을 전하는 거대한 도서관이 건설되어 많은 학자가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지(知)의 성과는 중세 이전에 사라져버렸다.

 

 

현재 국가     이집트아랍공화국

 

          인       구     약 518만 명(2019년 기준)

 

 

 

 

 

 

 

 

알렉산드리아의 위치  이집트왕국의 왕도는 나일강 연안에 위치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하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  파로스섬으로 이어지는 둑을 경계로 두 개의 항구로 나뉘어 기능했다.

 

 

 

 

 

무세이온에서 모신 아홉 명의 무사이  무세이온은 본래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그리스 여신들인 무사이를 모시던 곳이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은 신전 기능과 더불어 학술기관의 역할도 담당했다.

 

 

 

 

 

파로스섬의 대등대를 묘사한 회화

 

 

 

 

 

밀라노대성당에서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되고 난 후, 현실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성직자에게 굴복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라비 파샤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WORLD HISTORY

05

 

테오티우아칸

Teotihuacan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은

'신들의 도시'

 

아시아와 유럽 문화권에서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대륙에도 대도시는 존재했다. 거대한 피라미드가 세워진 고원의 도시 테오티우아칸.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기경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왕조의 기록이 없는 탓에 도시의 성립배경, 생활모습, 쇠퇴과정까지 모두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현재 국가     멕시코공화국

       인       구    도시 현존하지 않음

 

 

 

 

태양의 피라미드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바라본 달의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의 구조  도시 구조를 살펴보면 당시 지배계층이 고도의 천문학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WORLD HISTORY

06

 

로마

Rome

 

몇 번이고 되살아난

'영원의 도시'

 

역사적으로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로마제국의 수도답게 로마는 당대의 최신기술을 활용해서 상하수도와 공중목욕탕을 건설했다. 이러한 시설은 무엇보다 로마 시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에 로마는 가톨릭교회의 소재지로 규모와 지위가 축소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또다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현재 국가     이탈리아공화국

 

             인       구    약 423만 명(2019년 기준)

 

 

 

 

 

세르비우스 성벽

 

 

 

 

 

카이사르의 죽음  그가 죽기 직전 한 말로 널리 알려진 "브루투스, 너마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로, 역사적 사실로서의 근거는 없다.

 

 

 

 

 

콜로세움 내부

 

 

 

 

 

1세기경 로마 시가지  원로원의사당 등의 건물이 세워졌던 포로로마노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마르틴 루터

 

 

 

 

 

 

현재의 로마 시가  시간이 흐르면서 테베레강의 양쪽으로 도심이 점점 확대되었다.

 

 

 

 

 

 

바티칸 전경

 

 

 

 

바티칸(Vatican City)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이 위치한 도시국가

면적 0.44제곱킬로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는 도시국가 바티칸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26년, 이탈리아와 로마교황청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어 국가로서 독립을 승인받은 후 비로소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티칸의 국가 원수는 로마교황이다. 초대교황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인 성 베드로가 추존되었다.

사실 바티칸시 자체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756년에 카롤링거왕조의 피핀 3세가 바티칸을 포함한 라벤나 지역을 헌납했을 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은 긴 역사를 가졌다.

394년,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성당이 세워졌고 그 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이곳이 세계 최대의 그리스도교 건축물인 성베드로대성당이다. 이 대성당 옆에는 바티칸궁전이 있는데, 여기에 로마교황이 거주하고 있다.

 

 

 

 

 

WORLD HISTORY

 

07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은 요충지

 

 

 

현재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은 고대 로마제국, 동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등 각 시대별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세 대국이 수도로 삼은 곳이다.

그리스인이 처음 건설한 이 도시는 2700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로마제국의 내분, 십자군 원정, 이슬람세력의 침공 등 수많은 전란을 겪으며 유럽과 아시아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도시로 성장했다.

 

 

 

현재 국가     터키공화국

 

                    인       구     약 1500만 명(2019년 기준)

 

 

 

 

 

이스탄불의 위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루스해협의 양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발렌스 수도교

 

 

 

 

 

공의회가 열렸던 아야이레네성당

 

 

 

 

 

아야소피아성당

 

 

 

 

 

톱카프궁전

 

 

 

 

술레이만 1세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현재 이스탄불의 중심가  구시가지에는 궁전과 모스크 등 역사상 중요한 건축물이 많다.

 

 

 

 

 

 

WORLD HISTORY

 

08

 

 

장안

長安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수도의 대명사

 

 

 

현재 산시성 시안시인 장안은 전한 시대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중국왕조의 수도 역할을 했다. 치밀한 도시계획하에 정돈된 장안은 당대 최고의 거대도시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주나라, 진나라의 도읍도 자리했던 장안 일대에는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의 중국사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광대한 중국 영토 중에서도 장안과 그 주변지역이 수도로 거듭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인       구     약 1200만 명(2019년 기준)

 

 

 

 

 

진시황제

 

 

 

 

 

병마용갱

 

 

 

 

 

웨이수이강 주변에 자리 잡은 도읍지  주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여러 왕조가 웨이수이강과 그 지류 주변 도시를 수도로 정했다.

 

 

 

 

 

장안의 구조  장안성은 고대중국의 풍수사상을 토대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종루

 

 

 

 

 

고루

 

 

 

 

 

 

시안사건 당시의 장쉐량(왼쪽)과 장제스(오른쪽)

 

 

 

 

 

 

 

WORLD HISTORY

 

09

 

 

바그다드

Baghdad

 

 

이슬람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평안의 도시'

 

 

 

대부분 사막인 아랍 땅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잇는 운하로 둘러싸인 바그다드는 동서의 다양한 사람과 상품이 모이는 수상도시로 발전했다.

아바스왕조의 수도로 번성한 바그다드는 이후 몽골제국을 비롯한 영국, 미국 등 강대국에 번갈아 침략당하기도 했지만, 현재 이라크의 수도이며 중동의 대표적인 대도시로 손꼽힌다.

 

 

 

현재 국가     이라크공화국

                인       구     약 722만 명(2019년 기준)

 

 

 

 

 

아바스왕조와 그 주변국  바그다드는 콘스탄티노플, 장안과 같은 대도시와 비슷한 시기에 번성했다.

 

 

 

 

 

 

8~12세기의 바그다드 시가지  궁전은 티그리스강 서쪽에서 점차 동쪽으로 옮겨갔다.

 

 

 

 

 

 

『천일야화』 원본

 

 

 

 

 

1958년 이라크 혁명 당시

 

 

 

 

 

 

WORLD HISTORY

 

10

 

 

교토

京都

 

 

일본의 중심이었던

'천년의 수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도시로서의 측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교토는 794년 시작된 헤이안시대부터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는 헤이안시대에 천황을 중심으로 귀족정치가 행해진 곳이고, 무로마치시대에는 무가정권의 중심지였다. 수도라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쟁의 격전지가 되었지만, 이 도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번영을 이루었다.

 

 

현재 국가     일본국

 

                        인       구     약 150만 명(2019년 기준)

 

 

 

 

 

간무 천황

 

 

 

 

 

헤이안쿄의 구조  헤이안쿄도 장안과 같이 황제의 궁을 도시 북쪽에 건설했는데, 이런 구조를 '북궐형(北闕形) 도시'라고 한다.

 

 

 

 

 

오닌의 난

 

 

 

 

금각사

 

 

 

 

료안지

 

 

 

 

 

 

WORLD HISTORY

 

11

 

 

사마르칸트

Samarkand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유라시아대륙의 중앙에서는 크고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많은 도시가 발전했는데, 이 도시들은 실크로드 무역망의 중계지로서 번성했다. 그중 하나인 사마르칸트는 중국대륙의 당나라, 이슬람의 아바스왕조 등 여러 대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5세기 티무르왕조 시대에는 인도 북부부터 터키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지배했는데, 당시 사마르칸트는 이슬람문화권의 중심지였다.

 

 

현재 국가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인      구      약 32만 명(2019년 기준)

 

 

 

 

 

현장법사

 

 

 

 

 

티무르왕 동상

 

 

 

 

 

15세기경 티무르왕조와 그 주변국  몽골족 출신 이슬람교도였던 티무르는 티무르왕조를 창건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했다.

 

 

 

 

 

구르 에미르

 

 

 

 

19세기 후반의 사마르칸트 신시가지  도시 중심지가 황폐한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남서쪽 레기스탄 광장으로 바뀌었다.

 

 

 

 

 

울루그 벡이 세운 이슬람 신학교

 

 

 

 

 

 

WORLD HISTORY

 

12

 

 

앙코르

Angkor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품은

밀림 속 도시

 

 

캄보디아의 대표적 관광명소 앙코르와트를 품고 있는 거대한 앙코르 유적은 과거 크메르왕국의 수도이자 신앙의 땅이었다.

밀림에 묻힌 석조 사원은 왕의 독실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왕국이 얼마나 반영했었는지, 그 문화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었는지 알려준다.

 

 

현재 국가     캄보디아왕국

 

       인       구    도시 현존하지 않음

 

 

 

 

 

앙코르와트

 

 

 

 

 

앙코르의 위치  앙코르 유적군은 캄보디아 북부의 씨엠립주에 자리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  동서 바라이 주변으로 역대 왕들이 건설한 수도와 사원이 있다.

 

 

 

 

앙리 무오가 그린 앙코르와트

 

 

 

 

 

WORLD HISTORY

 

13

 

 

튀니스

Tunis

 

 

3000년의 역사를 품은

지중해의 십자로

 

 

수차례 주인이 바뀐 도시는 많지만, 지중해의 요충지 튀니지에서는 유난히 많은 세력이 얽히고설켜 반목했다. 튀니스 동쪽 근교의 도시국가 카르타고는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근대에는 프랑스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각 시대의 다양한 유적과 건축물을 볼 수 있는 튀니스는 오늘날 아프리카대륙의 대표적인 국제도시로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현재 국가     튀니지공화국

 

              인       구     약 69만 명(2019년 기준)

 

 

 

 

 

아랍의 봄 당시 튀니지 시위 현장

 

 

 

 

 

튀니스의 위치  튀니스부터 시칠리아섬까지의 최단거리는 약 12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이베리아 반도부터 피레네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인 일은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지투나 모스크

 

 

 

 

 

알제리에 세워진 이븐 할둔 동상

 

 

 

 

 

현재 튀니스의 중심 시가지  구시가지 메디나에서는 주변의 현대적인 모습과 대조적인, 옛 정취가 담긴 거리 풍경을 볼 수 있다.

 

 

 

 

 

 

WORLD HISTORY

 

14

 

 

베이징

北京

 

 

지방도시에서 중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역대의 수도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옛 황제가 생활하던 고궁을 에워싸듯이 근대 건축물과 낡은 집들이 섞여 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속에서도 베이징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이다. 베이징은 언제 어떻게 중국의 수도가 되었고 어떠한 역사를 거쳐왔을까?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인       구     약 2000만 명(2019년 기준)

 

 

 

 

 

복원된 베이징 원인 흉상

 

 

 

 

 

쿠빌라이 칸

 

 

 

 

 

자금성

 

 

 

 

 

베이징의 구조  명과 청의 황제는 천제를 모셨으며, 천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2차 아편전쟁 때의 팔리카오전투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의 베이징 입성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린 천안문

 

 

 

 

 

 

베이징 전경

 

 

 

 

 

WORLD HISTORY

 

15

 

 

믈라카

Melaka

 

 

세계유산과 일상이 혼재하는

오래된 항구도시

 

 

믈라카는 한때 말레이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던 믈라카왕국의 왕도이자 동서무역의 중계기지로서 번창했지만 이후 지배자가 잇따라 바뀌며 수도의 기능을 상실했다.

현재의 믈라카는 동서 문화가 혼재한 역사적인 거리가 세계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다채롭고 활기찬 관광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국가     말레이시아

 

                 인       구     약 50만 명(2019년 기준)

 

 

 

 

 

믈라카의 위치  믈라카는 믈라카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의 중요한 기항지였다.

 

 

 

 

 

믈라카 풍경

 

 

 

 

 

 

현재 믈라카의 중심 시가지  믈라카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아직 산티아고 요새의 성문과 대포 등이 남아 있다.

 

 

 

 

 

 

WORLD HISTORY

 

16

 

 

모스크바

Moscow

 

 

대삼림에 건설된

'제3의 로마'

 

 

러시아는 때로 단일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대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는 16세기 이후 동방정교 문화권의 중심지를 자임해왔다.

18세기에는 수도의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20세기에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수도라는 지위와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의 중심지’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 이 도시는 흔히 유럽의 변경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사실 무척이나 다채로운 역사를 지닌 국제도시다.

 

 

현재 국가     러시아연방

 

                    인       구     약 1250만 명(2019년 기준)

 

 

 

 

 

류리크

 

 

 

 

 

모스크바공국의 국기와 국장

 

 

 

 

 

크렘린과 우측으로 보이는 우스펜스키대성당

 

 

 

 

성바실리대성당

 

 

 

 

러시아 원정을 떠나는 나폴레옹  이 전쟁의 완패를 계기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12년 조국 전쟁'이라 부른다.

 

 

 

 

블라디미르 레닌

 

 

 

 

현재 모스크바의 중심 시가지  크렘린을 중심으로 시가지의 주요 도로가 방사상으로 확장되었다.

 

 

 

 

 

모스크바대학

 

 

 

 

 

WORLD HISTORY

 

17

 

 

이스파한

Isfahan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린

고원의 고도

 

 

16~17세기, 중동의 대부분 지역은 투르크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가운데 이란의 사파비왕조는 독자적인 페르시아문화를 지켰다.

사파비왕조의 문화가 새겨진 이스파한에는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열리는 활기찬 바자르가 있고, 유럽과 인도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 도시가 품은 푸른 타일로 뒤덮인 이슬람 사원과 아름다운 신학교의 건축미는 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신비로운 고도의 분위기를 풍긴다.

 

 

현재 국가     이란이슬람공화국

 

          인       구     약 155만 명(2019년 기준)

 

 

 

 

이스마일 1세

 

 

 

 

 

이맘 모스크

 

 

 

 

 

현재 이스파한의 중심 시가지  계획적으로 도로를 반듯하게 정비한 신시가지에 비해 구시가지는 직선도로가 적다.

 

 

 

 

 

WORLD HISTORY

 

18

 

 

베네치아

Venice

 

 

무역으로 지중해를 석권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관광도시다. 과거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발전해서 당시의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일대를 지배하는 도시국가로 우뚝 섰다. 베네치아는 어떻게 한정된 토지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현재 국가     이탈리아공화국

 

                인       구     약 5만 1000명(2019년 기준)

 

 

 

 

 

 

베네치아의 위치  베네치아는 다리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 마르코 유해의 피신  전승에 의하면 이교도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쳤고, 놀란 이교도들이 혼비백산하는 틈을 타 신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로 옮겼다고 한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베네치아 풍경

 

 

 

 

 

 

현재 베네치아 본섬  베네치아 본섬에는 현재에도 많은 운하와 수로 그리고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다.

 

 

 

 

 

 

WORLD HISTORY

 

19

 

 

델리

Delhi

 

 

다문화가 혼재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델리는 전통적인 토착 힌두문화를 바탕으로 외부의 침입세력, 즉 13세기 이후의 이슬람왕조와 19세기 이후의 영국에 의해 발전해왔다. 이슬람 건축과 힌두 건축이 어우러져 있는, 근대적인 계획도시 뉴델리를 포함한 델리 지역은 말 그대로 인도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가     인도공화국

 

                    인       구     약 2100만 명(2019년 기준)

 

 

 

 

 

쿠트브미나르와 철기둥

 

 

 

 

 

무굴제국 시대의 델리  현재와 비교해 랄 킬라와 야무나강 사이 거리가 더 가까웠다.

 

 

 

 

 

랄 킬라

 

 

 

 

 

자마 마스지드

 

 

 

 

 

 

샤자한

 

 

 

 

 

아그라의 타지마할

 

 

 

 

 

현재 델리의 중심 시가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올드렐리의 남서쪽에 뉴델리가 건설되었다.

 

 

 

 

 

뭄바이(Mumbai)

 

영국 주도로 개발된 상공업의 중심지

아라비아해에 면한 뭄바이는 현재 델리에 필적하는 대도시로, 인구는 1800만 명이 넘는다.

원래는 해안에 일곱 개의 섬이 밀집한 작은 어촌지역이었는데, 1534년에 포르투갈이 이곳에 성채를 쌓고 교역거점을 건설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포르투갈어로 '좋은 항구'라는 뜻의 '붐바이'로 불렸지만 이후 영국인에 의해 '붐베이'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95년에 힌두교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옛 이름인 '뭄바이'로 개칭했다. 1661년에 영국에 양도했던 이 도시는 중동이나 유럽 방면으로 나가기 용이한 입지조건 때문에 동인도회사의 거점이 되었다. 19세기에 영국자본에 의해 방적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1891년에는 인구 82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도가 독립한 후에도 뭄바이는 상공업의 중심 도시로 발달했다. 현재는 인도의 최대 재벌인 타타그룹을 포함한 여러 대기업의 본사, 증권거래소와 같은 중요한 금융기관이 모인 인도 최대의 경제도시다.

 

 

 

 

 

 

WORLD HISTORY

 

20

 

 

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

 

 

표트르대제가 건설한

'유럽으로 열린 창'

 

 

내륙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러시아에서 18세기에 새롭게 조성된 항구도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유럽문화를 동경하는 황제의 꿈이 담긴 뉴타운인 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과 교회는 표트르대제가 초대한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20세기 이후 모스크바가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금도 제정시대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현재 국가     러시아연방

 

                  인       구     약 543만 명(2019년 기준)

 

 

 

 

 

 

상트페테르부르크 위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핀란드만의 가장 안쪽인 네바강 하구에 위치한다.

 

 

 

 

 

 

현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표트르 대제

 

 

 

 

 

 

여름궁전

 

 

 

 

 

겨울궁전

 

 

 

 

 

청동기마상

 

 

 

 

데카브리스트의 난

 

 

 

 

 

피의 일요일 사건  이 사건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이라고 불린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이때 시작된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거리를 청소하는 시민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 시가지  운하가 도심을 휘감고 흐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WORLD HISTORY

 

21

 

 

파리

Paris

 

 

세계로 전파된

프랑스문화의 발신지

 

 

프랑스왕국이 성립한 것은 9세기지만 파리가 줄곧 그 수도의 자리를 지켰던 것은 아니다. 16~17세기 프랑스 왕들은 영내를 이동하며 지냈는데, 18세기 말까지 이어진 부르봉왕조는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시민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문화가 발전했지만,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이 자리 잡은 것은 혁명과 전란이 휘몰아친 19세기가 되고 나서다.

 

 

 

현재 국가     프랑스공화국

 

               인       구     약 210만 명(2019년 기준)

 

 

 

 

파리시족이 사용한 금화

 

 

 

 

노트르담대성당

 

 

 

 

파리대학

 

 

 

 

 

루브르박물관

 

 

 

 

오를레앙전투에서의 잔다르크  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리는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백년전쟁에 참전해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흑사병이 창궐한 마르세유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거의 1억 명이 줄었다.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퐁네프 다리

 

 

 

 

 

보주 광장

 

 

 

 

프랑스혁명

 

 

 

 

파리 국립극장

 

 

 

 

나폴레옹 3세

 

 

 

 

 

파리의 구역과 명소의 위치  시테섬을 중심으로 점차 도시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① 루브르박물관 ①④ 시테섬 ①⑥ 퐁네프 다리 ③④ 보주 광장 ④ 노트르담대성당 ④ 바스티유 광장 ⑦ 에펠탑 ⑧ 상젤리제 거리 ⑨ 파리오페라좌(가르니에궁) ⑰ 개선문 (숫자는 구역번호)

 

 

 

 

 

1889년에 촬영한 에펠탑

 

 

 

 

 

68운동  청년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성세대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해 프랑스를 뿌리 끝까지 뒤흔든 '68운동'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변혁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WORLD HISTORY

 

22

 

 

암스테르담

Amsterdam

 

 

프로테스탄트 상인이

만들어낸 무역도시

 

 

암스테르담은 교역권 확대를 배경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17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도시 중 하나로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물론 그 영광에 이르기 위해 간척으로 토지를 넓히고 오랜 세월 동안 홍수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과거의 황금기에도 현재도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왕국의 수도로서 성장하고 있다.

 

 

현재 국가     네덜란드왕국

 

               인       구    약 114만 명(2019년 기준)

 

 

 

 

풍차 마을

 

 

 

 

 

암스테르담의 위치  암스테르담항의 선박들은 자위더르 방조제를 통해 북해로 드나든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일본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을 묘사한 회화

 

 

 

 

네덜란드왕실왕궁

 

 

 

 

암스테르담의 구시가지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과거에 항구였던 곳에 위치하고 있다.

 

 

 

 

 

WORLD HISTORY

 

23

 

 

런던

London

 

 

19세기에

'세계의 중심'이 된 도시

 

 

세계에 군림하던 '대영제국'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런던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시는 서서히 규모를 확대했고, 마침내 대영제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재해를 극복하고 계획적으로 도시를 개조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 있었다.

 

 

 

                         현재 국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연합왕국(영국)

 

인       구     약 918만 명(2019년 기준)

 

 

 

 

 

스테인드글라스에 묘사된 애설스탠왕

 

 

 

 

웨스트민스터사원

 

 

 

 

 

17세기의 런던 시내  이 무렵 웨스트민스터지구는 이미 정치의 중심지였다.

 

 

 

 

 

웨스트민스터궁전

 

 

 

 

버킹엄궁전

 

 

 

 

런던 대화재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린 수정궁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인 '수정궁'은 유리와 강철로만 지어졌고, 가로 124미터에 세로 564미터로 약 6만 7000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30만 장의 유리와 4500톤의 주철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런던의 중심 시가지  런던의 특별행정구역 '시티'는 금융 중심지로 영국중앙은행과 런던증권거래소가 이곳에 있다.

 

 

 

 

 

1952년 당시 런던

 

 

 

 

 

브리튼전투 당시 런던 상공의 독일 전투기

 

 

 

 

 

 

WORLD HISTORY

 

24

 

 

뉴욕

New York

 

 

초강국 미국을

상징하는 메가시티

 

 

고층빌딩이 경쟁하듯 높이 솟아 있고 바둑판같은 격자무늬 도로가 쭉쭉 뻗어 있는 뉴욕. 자타공인 세계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하지만 뉴욕은 19세기 초만 해도 현재와 같은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뉴욕이 인구 10만의 소도시에서 오늘날과 같이 미국 최대의 메가시티로 변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시장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     미합중국

 

                     인       구     약 860만 명(2019년 기준)

 

 

 

 

 

베일을 벗은 자유의 여신상

 

 

 

 

월 스트리트

 

 

 

 

올리버 크롬웰

 

 

 

 

보스턴 차 사건

 

 

 

 

 

 

드위트 클린턴

 

 

 

 

뉴욕시의 다섯 개 자치구  브롱스크만이 본토에 위치하고 나머지 구는 모두 섬 혹은 섬의 일부이다.

 

 

 

 

 

맨해튼 전경

 

 

 

 

맨해튼의 중심부  맨해튼은 섬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유명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다.

 

 

 

 

 

 

워싱턴 D.C.(Washington, D.C.)

 

'건국의 아버지'를 기념한 수도

워싱턴주와 혼동하기 쉬운 미합중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정식명칭은 '워싱턴콜롬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다.

워싱턴주가 캐나다와 국경을 접한 서해안 태평양 연안에 있는 데 비해, 워싱턴 D.C.는 동해안쪽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도시는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은 특별구다.

'워싱턴'은 짐작하다시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사람인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서 유래했고, '콜롬비아'는 흔히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자로 간주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따웠다.

1790년에 조지 워싱턴이 이곳에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안했다. 그에 따라 프랑스인 건축가의 지휘하에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정리하고, 거기에 대각선 모양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계획했다.

이 도시계획은 1800년에 완성되었고, 워싱턴 D.C.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WORLD HISTORY

 

25

 

 

Vienna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군

'음악의 도시'

 

 

유럽의 민족분포는 대체로 북서 게르만어권(독일), 남서 라틴어권(이탈리아), 러시아를 비롯한 동부 슬라브어권으로 크게 나뉘는데, 빈은 이 세 지역의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빈은 13세기에 합스부르크가(家)의 본거지가 된 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든 빈에서 특히 18세기 이후 많은 음악가, 예술가, 학자가 배출되었다.

 

 

현재 국가     오스트리아공화국

 

          인       구     약 192만 명(2019년 기준)

 

 

 

 

 

카를대제

 

 

 

 

슈테판대성당

 

 

 

 

빈대학

 

 

 

 

14세기의 빈  빈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도시 중심과 외곽에 성벽을 쌓았다.

 

 

 

 

1차 빈공방전

 

 

 

 

쇤부른궁전

 

 

 

 

베토벤

 

 

 

빈 국립 오페라극장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현재 빈의 중심 시가지  과거에 설치된 성벽들은 도시개발을 할 때 철거되었다. 외곽 성벽 자리에는 순환도로 링슈트라세가 들어섰다.

 

 

 

 

블타바강과 카를교

 

 

 

 

프라하

 

중세의 모습이 감도는 '북쪽의 로마'

합스부르크가가 15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독점하기 전까지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 프라하다.

8세기경부터 블타바강(독일어로 몰다우강)이 가로지르는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서 유럽 통상의 요충지로 번성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보헤미아의 왕이 135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4세로 즉위했다.

이 시기 프라하에는 515미터 길이의 카를교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프라하대학 그리고 교회 등이 건설되었다. 당시 프라하는 유럽 각지에서 상인과 학자가 모여들었고, '백탑의 거리', '황금의 프라하', '북쪽의 로마'라고 불렀던 융성한 도시였다.

17세기 이후 이곳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에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1918년에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가 되었고, 1993년에 동부 슬로바키아가 분리해 나간 후에도 여전히 체코의 수도로 남아 있다.

 

 

 

 

 

WORLD HISTORY

 

26

 

 

리우데자네이루

Rio de Janeiro

 

 

열대의 미항에 건설된

뉴타운

 

 

 

삼바리듬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니발은 브라질을 상징하는 축제로 인기가 높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뒤섞인 리우데자네이루는 삼바를 비롯해 여러 독자적인 문화를 낳았다.

16세기에 개척된 이 도시는 남미대륙에서 생산되는 금은과 커피의 수출항으로서 발전했다. 하지만 19세기 초에는 종주국인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는 극적인 운명을 맞기도 했다.

 

 

 

현재 국가     브라질연방공화국

 

          인       구     약 650만 명(2019년 기준)

 

 

 

포르투갈 · 브라질 · 알가르브 연합왕국의 판도  이 왕국의 영토는 유럽,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쳐 있었다.

 

 

 

 

 

리오데자네이루 전경

 

 

 

 

카니발 현장

 

 

 

현재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심 시가지  리우브랑코 대로를 중심으로 고층빌딩, 은행, 호텔 등 주요 건물이 많다.

 

 

 

 

 

상파울루(Sao Paulo)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이는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서쪽으로 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파울루는 남반구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다. 표고 750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위도가 거의 비슷한 라우데자네이루보다 조금 더 시원한 편이다. 인구는 약 1100만 명이다.

상파울루는 포르투갈인이 1554년에 도시의 기초를 닦은 뒤에도 한참 잠자고 있다가, 19세기 중기에 커피재배가 브라질의 기간산업이 된 이후에 급속하게 발전했다. 1890년대에는 인구가 약 6만 명에서 약 24만 명으로 증가했고, 20세기에 리우데자네이루를 능가하는 브라질 제일의 공업지대가 되었다.

상파울루의 특징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어우러진 도시라는 점이다. 포르투갈계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계, 독일계 외에 중국인과 아랍인 등 아시아계 이주민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1900년 전후부터 이민을 온 일본계 주민이 현재 약 100만 명에 달한다. 동남부의 리베르다지 지역에는 일본과 중국 출신이 많은 동양인 거리가 형성되어 한자 간판을 내건 가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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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Sydney

 

 

리아스식 해안에 조성된

항만도시

 

 

남반구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인 시드니는 오스트레일리아 개척의 역사를 함께해왔다. 이주민이 만든 이 아름다운 항만은 19세기 이후 태평양에서 대영제국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큰 전쟁과는 관계가 없었을 것 같은 시드니지만 유일하게 이 도시를 직접 공격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와의 싸움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완전한 독립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국가     오스트레일리아연방

 

      인       구    약 486만 명(2019년 기준)

 

 

 

 

아서 필립

 

 

 

 

데니슨 요새

 

 

 

 

하버브리지

 

 

 

 

일본의 공격에 대비할 것을 경고하는 포스터

 

 

 

 

시드니오페라하우스

 

 

 

 

현재의 시드니 중심 시가지  시드니가 위치한 대륙의 남동부는 지진이 적어 해안 가까이에 초고층빌딩이 많다.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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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Singapore

 

 

아시아 부국으로 자리 잡은

도시국가

 

 

아무 자원도 갖지 못한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독립한 지 50여 년 만에 '세계의 금융센터'가 될 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싱가포르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의 강력한 리더십과 엄격한 통제하에서 추진된 도시계획이 있다.

 

 

현재 국가     싱가포르공화국

 

            인      구     약 564만 명(2019년 기준)

 

 

 

 

머라이언

 

 

 

 

토마스 래플스

 

 

 

 

싱가포르의 위치  말라카해협의 출입구에 위치한 상가포르는 인도, 동아시아 교역거점을 찾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리콴유

 

 

 

 

현재의 싱가포르  싱가포르 남부의 센턴웨이에는 금융기관이 많이 모여 있다.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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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上海

 

 

경제발전의 기치를 내걸고

급성장한 항만도시

 

 

황허강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강인 양쯔강 하구 일대에 위치한 상하이는 세계 제일의 화물취급량을 자랑하는 상하이항을 보유한 세계 유수의 경제도시다.

옛 조계지(租界地)에서 발전한 상하이는 현재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수도인 베이징보다 인구가 더 많다. 어느덧 중국 해양진출의 상징으로까지 우뚝 올라선 급성장의 비결은 무엇일까?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인       구    약 2632만 명(2019년 기준)

 

 

 

 

상하이 전경

 

 

 

19세기의 상하이  현재 상하이의 중심 시가지에는 서구 열강의 조계지가 있었다.

 

 

 

 

중일전쟁

 

 

 

현재의 상하이  상하이는 양쯔강 하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항구를 건설했다.

 

 

 

 

 

홍콩(香港)

 

중국화가 될수록 약해지는 존재감

옛날에 작은 항구마을이었던 홍콩은 향나무의 집적지여서 '홍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아편전쟁 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크게 발전했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영화와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산업이 발전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구축됐다.

현재 홍콩은 북쪽 해안을 형성하고 있는 주룽반도, 그 북쪽에서 중국 본토까지 길게 뻗어있는 신지에, 항구의 남쪽에 위치한 홍콩섬, 홍콩국제공항이 위치한 란타우섬을 비롯한 250개가 넘는 외진 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1000제곱킬로미터의 토지에 700만 명 이상이 사는 인구 밀집지다. 1997년에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동시에 '1국가 2제도'가 적용되어 50년간 고도의 자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근 홍콩정부의 친중정책에 대해 홍콩 시민이 반대운동을 펼치며 종종 충돌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상하이의 발전과 함께 홍콩의 존재감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제 · 교역 · 관광의 명소로 유명한 도시임에는 변함이 없다.

인근 마카오 역시 1999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반환되어 카지노와 화려한 리조트호텔 등 이국적인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관광도시로 자리 잡았다.

 

 

 

 

WORLD HISTORY

 

30

 

 

두바이

Dubai

 

 

사막지대에 출현한

근미래 도시

 

 

두바이는 외자획득을 위한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화려한 고급리조트로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 도시는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초고층빌딩이 빽빽한 최첨단 디자인도시로 급속히 탈바꿈했다. 사막지대가 많은 중동국가 대부분은 석유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두바이가 석유자원에 의존하지 않는 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국가     아랍에미리트 연합국(UAE)

 

인      구     약 333만 명(2019년 기준)

 

 

 

 

두바이의 위치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인 두바이는 페르시아만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막툼

 

 

 

 

버즈 칼리파

 

 

 

 

현재 두바이의 중심 시가지  두바이의 국제공항과 국제항구에는 전 세계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든다.

 

 

 

 

팜 주메이라(왼쪽)와 더 월드(오른쪽)

 

 

 

 

 

 

 

 

 

 

 

 

 

 

 

 

 

 

Posted by 드무1
,

2020-012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

 

 

 

 

 

 

린지 아다리오 지음, 구계원 옮김

2020, 문학동네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4345

신천역스마트도서관

 

668.48349

아22ㅊ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사랑과 전쟁

 

 

최전선의 순간을 빛과 셔터로 담아내는 린지 아다리오

죽음을 감수할 만큼 뜨겁게 사랑하는 일과

살아 있음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일상에 관하여

 

"나는 일을 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가장 나다운 모습이 된다.

물론 다른 형태의 행복도 많겠지만,

이것이 나의 행복이다."

 

 

인내하는 목격자, 린지 아다리오. 세계의 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기록한 여성 사진기자. 수단 반란군으로 가득찬 다르푸르의 트럭에 있든, 위험천만하기로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코렌갈계곡의 도랑에 있든, 우리는 연민이 담긴 그녀의 사진을 통해 아다리오가 목격한 것들의 힘을 마주하게 된다.

_오프라 윈프리('2010 오프라 윈프리가 선정한 여성 20인' 추천사)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회고록. 리비아, 다르푸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취재해온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 그녀의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요동칠 것이다.

_리즈 위더스푼(배우, 영화제작자)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진기자인 아다리오의 사진만큼이나 훌륭하다. 전 세계 가장 위험한 곳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녀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포착해왔다. 그녀는 기적 그 자체다. 이 책 또한 기적이다.

_팀 와이너(<뉴욕 타임스> 기자, 퓰리처상 수상 저널리스트)

 

 

린지 아다리오 Lynsey Addario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비는 여성 종군사진기자. 1973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태어났다. 1995년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19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를 시작으로 〈AP통신〉 〈뉴욕 타임스〉 〈내셔널 지오그래픽〉 〈타임〉 등 여러 매체와 일했다.

전쟁지역의 여성 인권에 대해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아다리오는 200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며 탈레반 치하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다. 9ㆍ11테러 이후에도 이라크, 수단, 리비아, 시리아, 소말리아, 콩고 등에서 동시대의 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현장을 취재했다. 2009년에는 〈뉴욕 타임스〉 취재팀과 함께 작업한 〈탈레바니스탄〉 시리즈로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맥아더 펠로십’에 선정되어 50만 달러를 지원받아 미국의 명실상부한 종군사진기자로 자리하게 된다. 2010년에는 ‘오프라 윈프리가 선정한 여성 20인’에 이름을 올렸고, 2015년에는 엘 문도El Mundo 저널리즘상과 미국국제언론인센터ICFJ에서 수여하는 국제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6년에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의 전쟁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세 어린이들의 기록을 담은 〈난민The Displaced〉 시리즈로, 2018년에는 시리아 난민문제를 다룬 〈집을 찾아서Finding Home〉 시리즈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종군사진기자가 된 이래로 그녀는 수많은 나라에서 사고를 당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고, 함께 일하던 동료와 군인, 민간인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계속해나갔고, 이 기록을 묶어 『최전방의 시간을 찍는 여자』와 사진집 『전쟁과 사랑에 대하여Of Love & War』를 출간했다. 종군사진기자의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아다리오는 이후로도 영아사망, 청소년범죄, 미성년자 성폭행, 영양실조, 아프리카의 교육 등 여러 인권문제를 카메라에 담아내며, 사진으로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힘쓰고 있다.

 

 

옮긴이 구계원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도쿄일본어학교 일본어 고급코스를 졸업했다. 미국 몬테레이 국제대학원에서 통 번역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충돌하는 세계『생리의 힘『열두 가지 레시피『제가 투명인간인가요?『영국 육아의 비밀『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난센스『술취한 식물학자『사랑할 때 우리가 속삭이는 말들『화성 이주 프로젝트『옆집의 나르시시스트』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1부

세계를 누비며

코네티컷, 뉴욕, 아르헨티나, 쿠바, 인도, 아프가니스탄

뉴욕에서는 아무도 두번째 기회를 주지 않아
아이는 몇 명이에요?
이제 전쟁이 시작된 거야

 

 

2부

9ㆍ11테러 이후의 몇 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당신 같은 미국인은 더이상 여기서 환영받지 못해
총알은 두렵지 않아
저 여자에게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해

 

 

3부

내 삶의 균형을 찾아

수단, 콩고, 이스탄불,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프랑스, 리비아

여성은 출생지의 피해자
당신 일을 해, 그리고 다 끝나면 돌아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 코렌갈계곡
운전사는 끝났어

 

 

4부

삶과 죽음

리비아, 뉴욕, 인도, 런던

너는 오늘밤 죽을 거야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여행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나의 아이, 루카스

 

 

에필로그
추천의 말

 

 

 

 

반란군이 기관총 폭격을 하는 카다피군 헬기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다. 반란군은 카다피군에게서 라스라누프를 재탈환했지만, 다음날 빈 자와드에서 밀려나 다시 동쪽에 있는 라스누프로 향했다. 리비아 동부, 2011년 3월 6일.

 

 

 

반란군이 벵가지에서 싸울 지원군을 모집하고 있다. 2011년 3월 1일.

 

반란군 병사가 라스라누프의 한 병원 바깥쪽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위로하고 있다. 2011년 3월 9일.

 

 

 

 

 

 

반란군 병사와 운전병이 폭탄과 전투기를 예상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2011년 3월 10일.

 

반란군 병사들은 라스라누프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날 최전선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2011년 3월 11일.

 

 

 

 

우리가 포박되었던 곳에 떨어진 끈 풀린 내 운동화.

 

 

 

 

 

아버지 필립과 어머니 카밀.

 

 

 

 

 

수영하는 어린 시절의 린지.

 

 

 

 

 

가족사진. 1975년경.

 

 

 

 

아버지 필립과 브루스

 

 

 

 

집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는 쿠바의 한 부부. 1997년.

 

 

 

 

뉴욕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트랜스젠더. 1999년.

 

 

 

 

동틀 무렵 콜카타 거리에서 목욕하고 있는 인도 남자들. 2000년.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2000년 5~7월.

 

 

 

 

 

 

 

 

 

 

카불의 여성병원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2000년 5월.

 

 

 

 

 

 

 

페샤와르의 반미 시위. 2001년 10월.

 

 

 

 

 

 

 

 

파키스탄의 폐샤와르에서 코란을 배우고 암송하는 여성과 소녀들. 2001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지하드 여설 시리즈, 2001년 11월.

 

 

 

 

 

 

탈레반의 핵심거점인 칸다하르가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2001년 12월

 

 

 

 

 

 

 

탈레반이 몰락한 후의 칸다하르. 아프가니스탄 남성들이 스스로를 주지사로 선출한 셰르자이의 맨션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2001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청년들이 탈레반 몰락 이후 최초로 공공장소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2001년 12월.

 

 

 

 

 

 

미국이 쿠르드족 군인들과 연합하여 알 카에다와 연계되었다고 알려진 원리주의자 단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가운데, 쿠르드족의 페시메르가 군대가 안사르 알 이슬람의 영토에서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이라크 북부 할랍자 근처. 2003년 3월 30일.

 

 

 

 

 

 

 

이라크 북부 할랍자 근처의 검문소에서 안사르 알 이슬람 테러단체가 감행한 차량폭탄테러 직후, 민간인과 쿠르드의 페시메르가 군인들이 중상을 입은 동료 군인을 차에 옮기고 있다. 2003년 3월 22일.

 

 

 

 

 

<뉴욕 타임스> 이장욱 기자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며칠 후에 키르쿠크의 미국-페시메르가 합동 군사기지의 의료시설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아버지와 다친 아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내 모습을 찍었다. 2003년 4월.

 

 

 

 

 

 

 

키르쿠크가 이라크 중앙 정부의 통치에서 해방된 후 페시메르가 병사들이 키르쿠크 정부 건물에 붙어 있는 전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의 포스터를 훼손하고 있다. 2003년 4월 10일.

 

 

 

 

 

모술에 있는 이라크 전 지도자 후세인의 궁전 주변에 조성된 인공호수에서 수영하는 아이들. 2003년 4월 29일.

 

 

 

 

 

이라크 도시 티크리트가 공화국 수비대의 통치에서 해방된 날, 후세인의 궁전 앞에서 면도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국 해군들. 2003년 4월 14일.

 

 

 

 

 

 

바그다드 남쪽의 집단 매장지에서 수습된 수많은 유해 사이를 걸어가던 이라크 남성이 벽에 기대 서 있다.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후 이라크 전역의 집단 매장지에서 수습된 수천 구의 유해는 과거 독재정권이 저지른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003년 5월 29일.

 

 

 

 

 

이른아침에 미군이 발라드 근처의 건물에서 발견된 이라크인을 억류하고 있다. 미군 정보부는 이 남자를 후세인을 지지하던 바스당 소속으로 지목했다. 제4보병사단의 미군들은 군사력을 과시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이라크측의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실시하는 대대적인 야간 공습과 순찰에 참여했다. 공습은 티그리스강을 따라 바스당의 근거지이자 후세인의 뿌리깊은 지지기반으로 추정되는 바그다드 북쪽의 티크리트까지 이어졌다. 2003년 6월 29일.

 

 

 

 

 

 

 

 

 

 

 

 

 

 

 

 

 

 

 

제4보병사단 제3여단 제68기갑연대의 제1대대. 소속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 북쪽 발라드 공군기지 근처를 야간 순찰하던 도중 이라크인들을 일시적으로 억류 및 수색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직후, 한 이라크 민간인이 미군을 노리고 도로에 설치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원격조정 폭탄을 밟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발사고로 해당 이라크 민간인은 크게 다쳤다. 2003년 6월 27일.

 

 

 

 

 

 

 

 

 

 

 

 

 

 

 

 

 

 

 

 

 

 

 

 

 

 

 

 

 

 

 

 

 

 

 

 

 

 

 

 

 

 

 

 

 

 

 

 

 

 

 

 

 

 

 

 

 

 

 

 

 

 

 

 

 

 

 

 

 

 

 

 

스무 살 카힌도가 콩고 동부 북키부의 카냐바용가라는 마을에서 강간으로 태어난 두 아이와 함께 집에 앉아 있다. 카힌도는 본인이 르완다 병사들이라고 주장하는 여섯 명의 인테라함웨에게 납치되어 거의 3년간 갇혀 있었다. 납치범들은 지속적으로 카힌도를 강간했으며, 카힌도는 첫아이를 숲속에서 낳았고 탈출했을 때쯤에는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2008년 4월 12일.

 

 

 

 

 

 

 

비비안(28세, 남키부 거주)

 

● 비비안

 

비비안은 아이 셋을 낳았으나 아이들 중 한 명을 영양실조 또는 에이즈,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의 이유로 막 잃은 상태였다. 비비안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다가 겪은 어려움과 최근에 딸을 잃은 고통을 털어놓았다. 어떤 여성이 비비안에게 산길을 따라 카사바cassava(탄수화물이 풍부한 열대지방의 구황작물) 가루를 운반하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비비안은 바로 그 산 속에서 남자 세 명을 만났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자들은 3일 동안 비비안을 잡아놓고 여러 차례 강간햇다.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온 남편은 비비안이 납치되어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녀를 버렸다. 그후 비비안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으며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비비안은 임신 8개월이었는데 당장 다음날 배 속의 아이를 출산한다고 해도 산파 비용조차 지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설탕조차 없었다. 비비안이 가진 것이라고는 남자들이 남겨놓은 질병뿐이었다. 나는 비비안에게 에이즈 치료약을 먹고 있느냐고 물었고, 비비안은 짙은 자주색 가방을 열어 알약 몇 개와 점심으로 먹을 감자 한 알을 보여주었다. 비비안은 이제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잇었으며, 자신이 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밝혔다.

 

 

 

뷰밀라(38세, 카니올라 거주)

 

● 뷰밀라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뷰밀라는 자고 있었다. 르완다 공용어인 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는 남자들 아홉 명이 현관문을 발로 차서 연 다음 집으로 들어와서 옷과 밧줄로 뷰밀라와 아이들의 손을 묶고 도둑질을 했다. 뷰밀라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침입자들은 뷰밀라의 손을 풀어준 다음, 훔친 물건들을 그녀의 등에 지워 산속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뷰밀라가 일주일 동안 언덕을 오르내리고 산속을 헤맨 끝에 탈진하여 쓰러지자 남자들은 그녀를 발로 찼다. 일행이 첫번째 반란군 검문소에 도착하자 일부는 군복, 일부는 운동복을 입은 남자들이 뷰밀라가 등에 지고 있던 짐을 풀어놓은 다음 거듭해서 강간했고, 몇몇 남자들이 그녀의 물건들을 가져갔다. 적어도 아홉 명이 넘는 남자들이 뷰밀라, 그리고 같은 시기에 끌려온 다른 여성들을 탁 트인 커다란 방에서 강간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반란군 지휘관은 뷰밀라를 자신의 '아내'로 점찍었고, 뷰밀라는 하루종일 강제로 지휘관의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수없이 강간을 당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뷰밀라의 몸에 동물처럼 끈을 묶은 뒤 강까지 따라갔다.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은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다른 포로들에게 시체를 보여주었다. 결국 납치범들은 포로 한 명과 소 세 마리를 교환하기 위해 뷰밀라와 함께 억류되어 있던 남자 중 한 명을 다시 마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한 명당 소 두 마리씩밖에 받지 못했고 납치범들은 뷰밀라를 비롯한 포로들에게 매질과 채찍질을 한 후 발로 타고 옷을 빼앗았다. 마침내 꺼져버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포로들은 옷도 입지 못한 채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마을로 돌아왔다. 그 시점에 뷰밀라의 남편은 마을로 돌아와 있었고, 뷰밀라는 지휘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남편은 르완다 후투족 무장단체인 인테라함웨의 아이를 임신한 뷰밀라레게 분노하여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제 뷰밀라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했다.

"제가 바라는 바는 그저 학교에서 제 아이들을 받아주는 것뿐입니다. 예전에는 가축을 길러서 학비를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정부는 모든 아이들의 학비 지원과 무료 교육을 약속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채 집으로 보내고 있어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콩고는 어떤 나라가 되겠어요?"

 

 

 

마펜도(22세, 버할레 거주)

 

 

● 마펜도

 

마펜도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마펜도가 집단강간을 당했고 그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 갈 돈과 교통수단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전에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간 우리는 어머니, 자매들과 함께 오두막 밖에 앉아 있는 마펜도를 발견했다. 그녀는 온몸에 발진이 돋은 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한때는 아름답고 윤기가 돌았던 검은 피부는 발진으로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쇠약하고 뼈밖에 남지 않은 그녀는 나와 악수할 힘조차 짜내기 힘들어했다. 마펜도 역시 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는 다섯 명의 군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해서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지 이제 5개월이 되던 때였다. 그 사건 이전에는 평생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남자들이 돌아가며 여러 차례 자신을 강간한 다음 병을 옮기고 몸 전체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다는 것뿐이었다. 마펜도는 매트리스로 사용하는 나무판자에 누웠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터키 해안에서 나와 폴. 2007년 7월.

 

 

 

 

 

 

제173공수여단 배틀컴퍼니의 병사들이 코렌갈 전초기지의 대피소 근처에서 박격포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

 

 

 

 

 

 

 

 

 

 

 

 

 

 

 

아발란체 작전, 코렌갈계곡, 2007년 10월 18~23일.

 

 

 

 

 

 

아발란체 사태 작전. 커렌갈계곡. 2007년 10월 18~23일.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탈레바니스탄 시리즈. 2008년 7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탈레바니스탄 시리즈. 2008년 7월.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주의 산비탈에서 분만을 준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누르 니사. 2009년 11월.

 

 

 

 

 

한 미국 해병대원의 죽음. 아프가니스탄 남부. 2010년

 

 

 

 

 

 

바그다드에서 3D 영화를 보는 이라크 사람들. 2010년

 

 

 

 

 

시에라리온에서 사망한 산모. 2010년.

 

 

 

 

 

 

리비아 동부에서 민중봉기가 세력을 얻는 가운데 벵가지의 주거지역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둘러싸고 노는 아이들. 2011년 2월 28일.

 

 

 

 

 

튀니지로 인도되기 전, 트리폴리 주재 터키 대사관에서. 왼쪽부터 스티븐 패럴, 타일러 힉스, 터키 대사 레벤트 사힌카야, 나, 앤서니 샤디드.

 

 

 

 

 

소말리아 아이들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여성에게 비스킷을 먹이려 하고 있다. 이 여성은 소말리아의 오랜 가뭄을 피하여 케냐 국경을 넘은 후 이날 아침에 소말리아와 인접한 케냐 다다브의 난민캠프다. 그 당시 이미 수용인원을 크게 초과해 물, 위생용품, 식량, 주거지와 같은 필수 자원이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유입되는 새로운 난민들과도 배급품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이곳 난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2011년 8월 20일.

 

 

 

 

 

소말리아의 의사가 모가디슈의 바나디르병원에서 심각한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18개월 된 아기 아바스의 심장 박동을 확인하고 있다. 이 병원의 대다수 병동은 바닥에 누워서 자는 환자들로 포화상태였다. 2011년 8월 25일.

 

 

 

 

 

아들 루카스 사이먼 데 벤데른, 2011년 12월 28일.

 

 

 

 

 

 

 

 

 

 

 

 

 

 

 

 

 

 

 

 

 

 

 

 

 

 

 

 

 

 

 

 

이 책에는 아다리오의 인생이 담겨 있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유일무이하다. 전 세계를 배경으로, 아다리오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는 매우 특별한 모험에 착수한다.

_덱스터 필킨스(<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타고난 재능으로 동시대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아다리오는, 9 · 11테러라는 잔인한 사건 이후에 성장한 젊은 사진기자들의 선두에 서 있다. 그녀는 독보적인 추진력과 용기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인도적이며 풍부한 유머를 구사한다.

_존 리 앤더슨(<뉴요커> 소속 종군기자)

 

 

놀라울 정도로 영화적이다. 낯설고, 생각을 환기시켜주는 생생한 사진과 아름다운 기록이 담긴 책. 독자들이 좀더 렌즈를 가까이 대고 이 글을 읽는다면, 아다리오가 인간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웅대한 생각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바라보는 공감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_<보스턴 글로브>

 

 

회고록의 첫 장면은 단단한 주먹으로 날리는 강력한 펀치 같다. 아디리오는 여성의 성역할이 한정된 남성중심 국가에서 겪은 경험뿐 아니라 남성 동료들과 미군들에게서 존중받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만 했던 여성으로서의 좌절감을 조명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적군의 영토에서든, 정치를 논할 때든, 이것 저것 재지 않고 늘 앞장선다.

_<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풍부한 삽화가 담긴 회고록이자,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직업적 소명으로 삼은 사진기자의 일기. 아다리오는 자신과 비슷한,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한 시각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로써 사람들이 안락한 영역에서 벗어나 주변을 볼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전달한다.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다리오가 경험한 모험과 투쟁의 순간들. 발빠르게 세계의 갈등을 포착하는 종군기자가 살아낸 인생과 도전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_<워싱턴 포스트>

 

 

아다리오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주제를 찾아내고 포착했기 때문이다.

_<AP통신>

 

 

평범한 미용사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진기자로 성장한 아다리오의 매혹적인 이야기. 아다리오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동시에 힘든 일인지 철학적으로 보여준다.

_<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 수상자인 아다리오는 세계의 전쟁과 분쟁을 경험했던 여성 사진기자의 삶을 솔직히 묘사하며 저널리즘 분야에서 큰 업적을 달성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세계의 모든 전장에서 인간성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선사한다. 특히 아다리오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직업의 영역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잘 전달하고 있다. 광신도를 다루든, 무척 까다로운 편집자를 다루든, 카메라를 지니고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고, 그 어떤 고난에도 멈추지 않은 아다리오의 생생한 회고.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영감을 고무시킨다.

_<커커스 리뷰>

 

 

사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아다리오의 글은 고통과 불의를 기록함으로써, 정치와 여론 형성에 잠재적 영향을 주는 종군사진기자의 역할을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아다리오는 자신이 왜 이토록 위험한 일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짜릿하지만 무서운 이 '특별한 직업'에서 '약속' '책임감' '소명'이라는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지금까지 얼마나 훌륭하게 일해왔는지 보여주는 아다리오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책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_<북리스트>

 

 

 

 

 

 

 

 

 

 

 

 

 

 

 

 

 

 

 

 

 

 

 

 

 

 

 

 

 

 

 

 

 

 

 

Posted by 드무1
,

2020-011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공원 산책

 

 

 

 

김해경 지음

2020, 정은문고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3007

신천역스마트도서관

 

525.93

김93ㅁ

 

 

 

창경원에 밤벚꽃놀이가 본격화되면서 경성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창경원을 찾았다.

 

벚꽃 사이에 켜진 일루미네이션 아래에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든 모던걸, 모던보이, 도포를 입은 노인이 동시에 보이며, 다른 만문 만화에서도 어린아이, 아버지, 룸펜까지 밤벚꽃놀이를 위해 창경원으로 모여들었다.

 

벚꽃 터널을 빠르게 휘돌아 나온 조선인 구경꾼들은 춘당지 앞 잔디에 설치된 공연장 바닥에 앉아서 '값싼 레뷰'를 하는 '레뷰걸'의 종아리 곡선에 황홀해하고 '흔한 요술, 기술'에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전통 무용 · 가부키 같은 일본의 전통 연행, 서양 음악과 춤, 마술 · 곡예 등 서로 이질적인 내용의 연행이 이어지는 방식인 레뷰는 근대를 설명하는 수사의 하나이다.

 

 

 

지은이 김해경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사회적 구성으로 본 서울의 역사문화경관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간에 구현되는 실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조경기사, 건축기사 그리고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를 취득했다. (사)한국전통조경학회 사무국장,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건국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경기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통 조경을 전공으로 하였으나 전통 사상과 공간의 상관관계보다 당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증적인 도상 자료에 관심이 많았다. 조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실제적인 공간 변화를 근대공원과 근대도시문화 관련 논문으로 발표했다.
공저로 『오늘, 옛 경관을 다시 읽다』, 『1930~40년대 경성의 도시체험과 도시문제』가 있고, 번역서로 『조경 설계 키워드 52: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이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근대공원 태어나다


1. 외국에서 보고 온 이상 공간, 공원
2. 한국의 최초 공원, 각국공원
3. 민중의 첫 공원, 독립공원
4. 경성의 최초 공원, 파고다공원



2부 근대공원의 성장통

 

1. 조선의 흔적 지우기
2. 그들의 종교, 근대공원이 되다
3. 궁궐의 개방과 테마파크화
4. 일제가 새롭게 제시하다

 


3부 도시문화를 느끼다


1. 인공 자연의 대중 향유 장소
2. 공공과 상업, 소외와 집중의 장소
3. 끽다점에서 맥주를 마시다
4. 근대 교양과 아동이 등장하다

 


4부 공원은 나이테가 없다


1. 사라진 원형, 원형과 복원의 충돌
2. 공공장소의 이념 동상과 기억을 강요하는 기념비
3. 갈 곳 잃은 노년의 공원 이야기



나가는 글

 

 

 

 

 

박물관에 가다. 관내에는 초목 · 조수 · 어별 · 곤충 · 고금의 진귀한 것 등 없는 것이 없다. 학과 공작, 원앙새(중략) 모두 살아 있는데 이것들을 기르고 있다. 가히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수신사일기』)

 

나라 안의 큰 도시마다 도서관, 식물원, 박물관, 공원 등을 개설하는데, 이는 국민의 지식을 실제적으로 돕는 큰 기틀이 되므로 정부가 크게 힘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다. (중략) 나라 안에 이러한 장소가 많으면 자연히 인습을 교도하여 바른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잇고 방탕한 행실이나 사특한 습속을 잘라버리게 되어 악한 일에 빠지는 지가 적어진다. (『서유견문』 2부 6편)

 

누가 도시에 있는 언덕의 위쪽으로 올라간다면, 유럽인들의 거주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공 정원(public garden)은 아름다우며 여행자로 하여금 유럽의 과학과 예술이 헐벗은 섬을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어놓은 방식을 알게 한다. (중략) 유럽인이 자부심을 가져도 당연한 일이리라. (『윤치호 일기』 1896년 12월 24일)

 

오늘 오후에 서대문 밖 모화관에 공원(public park)을 만들기 위한 타당성을 논의할 목적으로 중추원의 사무실에서 조선 관리들의 큰 모임이 있을 예정이다. 이 공원은 '독립공원지' 혹은 'Independence Park'로 불리게 될 것인데, 이곳에는 조선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이 세워질 것이다. 이 공원은 시민들의 개별적인 기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조선인 관리들의 머리 속에 주입된 진보적 정신의 표식이라 여긴다. 우리는 이 운동이 조선에서 공공정신의 발전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그중에서도 공원을 여기저기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간에 (중략) 정신이 피곤하고 기력이 나태해졌을 때에 공원에 들어가 한가한 걸음 걸이로 소요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수목이 우거진 그늘 밑에서 청명한 공기를 호흡하고 아름답고 고운 경치를 감상하면 가슴이 맑아지고 심신이 상쾌하여 고달픈 모습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재산을 들여 공중을 위한 즐거움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실상 부유한 분위기를 가난한 자와 함께 이바지한다는 뜻이므로. (『서유견문』 2부 6편)

 

중식 후 공원에 가다. 녹음이 짙고 (중략) 경치가 새롭다. 청국사람들, 상하 귀천할 것 없이 공원 밖에서 주저하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 (중략) 굉장한 규모의 이 공원은 잘 정돈된 형태로 유지되어 있다. 내가 러시아 공원들에서 좋아하는 점이란 미국에서처럼 촌스럽게 번지르르한 꽃 화단이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로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멋진 도로, 아름다운 산책로, 자연스러운 잔디, 웅장한 나무, 이것들이 러시아의 공원을 구성하고 있다. (『윤치오 일기』 1896년 6월 14일)

 

 

 

 

「대동여지도」에서의 인천과 제물포

 

 

 

 

 

「화도진도(花島鎭圖)」에서의 부내면과 제물포(국립중앙박물관)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의 상세(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인천거류지지도」. 『신찬인천사정』. 1898

 

 

 

 

도면에 검은 점으로 표기된 부분이 한국인 거주지

『인천-경성 간 도로시찰보고서』. 1894

 

 

 

 

인천 거류지(위) / 인천 외국공원(아래)

『조선실업시찰단 기념사진첩』. 민우사, 1912

 

 

 

 

인천부, 「대경성부대관」, 1936

 

 

 

 

일제강점기 도상 자료에 등장하는 공원 명칭

 

발행연도 제목 명칭 형태 축적
1893년 「제물포각국조계지도」 Public Garden 지도 non-scale
1912년 「조선실업시찰단」 인천 외국공원 엽서 -
1914년~1918년
(추정)
「인천」 산수공원 측량지도 1:10000
1916년(측량)
1929년(수정)
「인천」 산수공원 군사기밀지도 1:10000
1920년대 후반 「인천명소」 서공원 관광지도 -
1929년 「인천부관내도」 서공원 측량지도 1:10000
1932년 「인천」 산수공원 지도 1:10000
1936년 「대경성부대관」부분 각국공원, 서공원 조감도 -
1930년대 후반 「경승인천」 서공원 관광지도  
일제강점기 엽서 각국공원, 서공원    

 

 

 

 

 

1910년대 각국공원

 

 

 

 

 

존스턴 별장 주변

 

 

 

 

 

「인천지도」 요시다 하츠사브로, 1930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조선시대 간선도로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도로고(道路考)』에서 육대로로 구분했는데, 경성서북저의주로제일(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 경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 경성동저평해로제삼(京城東抵平海路第三), 경성동남저동래로제사(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 경성서남제주로제오(京城西南濟州路第五), 경성서저강화로제육(京城西抵江華路第六)인데 그중 첫 번째로 거론되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는 십대로로 구분했고, 서남지의주일대로(西南至義州一大路), 동북지경흥이대로(東北至慶興二大路), 동남지평해삼대로(東南至平海三大路),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동남지봉화오대로(東南至奉化五大路), 서지강화육대로(西至江華六大路), 남지수원칠대로(南至水原七大路), 남지해남팔대로(南至海南八大路), 서남지충청수영구대로(西南至忠淸水營九大路), 남지통영별로십대로(南至統營別路十大路) 중 첫 번째이다.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이용되었기때문에 다른 도로처럼 정치적 · 군사적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도 그 의미가 컸다.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행은 조선 전기에는정기사행으로만 1년에 4회를 보냈으며,수시로 임시 사행이 파견되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사절을 조선에 보내왔었다." 김지현, 「18세기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반송방」. 『서울학연구』 제67호, 2016

 

 

 

 

 

 

의주대로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의주대로 일대. 「도성도」. 1788

 

 

 

 

 

영은문 주변 경관. 「경기감영도」. 19세기

 

 

 

 

의주로에 위치한 영은문과 모화관

 

 

 

 

영은문 상세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독립문). We do'nt know as its inscription will be writen in on-mun but we wish tin might. This arch means independence not from china alone but from Japan from Russia and From all European powers. Not that she could stand against them in the brent of war but that she is so situated that the interests of peace, of progress demand for the and will seeura to her the enjoyment of an integral position among the powers of the East(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구지(舊址)에 새롭게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의 건립 결정한 사실을 기뻐한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새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과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중요하여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享有)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독립관에서 찍은 독립문 기공식 사진(왼쪽) / 확대한 사진에서 보이는 녹문 형태(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개울은 말끔한 석축으로 정비되고 그 위로 띄엄띄엄 다리가 놓인다. 개울 양쪽 호안을 따라서 버드나무가 일렬로 늘어서고, 그 아래로는 잘 만든 도로가 있으며, 그곳으로 마차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개울 양편의 담은 점차 언덕 쪽으로 높아져서는 부드럽게 언덕으로 이어지고, 이곳저곳에는 낙엽수와 관복들이 식재되며, 산책로와 도로가 구불구불 들락날락한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들은 틀림없이 명실상부한 근사한 공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주된 관심을 끄는 것은 1894년에 헐어버린 영은문 자리에 세워질 독립문일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7월 2일)

 

 

 

 

 

독립관과 독립문 주변 경관

 

 

 

 

독립관과 국민연설대

『한국풍속풍경사진첩』. 경성일한서방, 1910

 

 

 

 

'동광사' 광고

「매일신보」 1911. 11. 27

 

 

 

독립관은 처음에 모화루라고 불렀으나 이조 성종 12년 루(樓)를 고쳐 관(館)으로 하였고, 더욱이 무과의 등용시험소로 삼아 무이소(武二所)라고도 불렀다. 관은 지금의 건물을 고치고 또한 증축을 더하여 일진회의 의장으로 충용함으로써 한때는 황황악악(遑遑諤諤)하던 논전(論戰)이 관의 내외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뒤에 명치 43년(즉 1910년)의 4월 1일 통감부중학교가 설립되자마자 일시 가교사(假校舍)로 충당되어 졌으나, 지금은 송병준 자작이 경영하는 동광사가 되어 한창 권련초를 만들고 있다. (『별건곤』제23호,1929년9월27일)

 

 

 

 

독립문에 대한 조선총독부 보물고적지정대장(국립중앙박물관)

 

 

 

 

오랜 역사를 가진 조선 문화의 자랑거리인 고대 건물과 불상 같은 조각품과 탑, 부도, 도자기, 석비 같은 귀중한 고적 명소와 기념물 같은 보물이 수없이 남아 있으나 산일에 방임하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멸하여 가는 상황이므로 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에서 이산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법령을 세우리라고 함은 누보한바어니와 그간 종교과장 이창근씨가 오로지 이 법령을 총나하여 심의실에 넘기어 심의케 하였던 것이 수일 전에 종료되었으므로 일간 법제국에 넘길 터인데 법제국의 심의가 마치는대로 조선고적명소천연물보존령과 보물보존령의 두 가지의 이름으로 제령으로 발포될 터이라 한다. (중략) 이밖에 보존하여야 할 것은 사찰 100개소, 고분 320여 총, 사찰 외의 건물 129개소, 기타가 195점인데 고건물과 탑비, 부도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경성부(73) : 경복궁, 광화문, 건춘문, 신무문 동부속무, 동십자각, 근정전, 근정문, 사랑(舍廊),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동부무랑, 수정전, 경회루, 자경전 동부무랑병문, 재수각, 선원각 부무랑급병, 경안궁, 집경당, 향원정, 집옥채, 협길당, 오운각, 규장각, 숭례문, 흥인지문, 창의문, 독립문, 노인정, 장충단, 동포열사, 동양무헌, 동무장당, 기념비전, 종각, 사직단 재실, 흥화문, 천연정, 동묘 (후략) (「동아일보」 1931년 6월 9일)

 

 

 

 

원구단은 보물로 되고, 독립문은 고적으로, 경성성벽과 사직단도 이축에, 보물고적으로 122점 지정되었다.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는 9월 중순경에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로 지정물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고적으로선 대방군태수(帶方郡太守) 장무이(張撫夷)의 고분으로 비롯하야 경성의 성벽, 독립문, 노인정, 사직단, 신라무렬왕릉, 부여의 청마산성 등 49건이 선정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9일)

 

 

 

 

독립문 주변 정비 공사 사진

 

 

 

 

「탑동연첩(塔洞宴帖)」. (서울역사박물관)

 

 

 

 

 

1896년 이전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 경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896년 대원각사비(위) / 1897년 대원각사비(아래)(경성부)

 

 

 

 

 

탑골공원 주변 담장

『꼬레아 에 꼬레아니, 사진 해설판』. 2009

 

 

 

 

짓고 있는 과정의 팔각정

『꼬레아 1903년 가을 러시아 학자 세로세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2006

 

 

 

 

 

팔각정 조성 전 사진

(세키노 다다시, 1904)

 

 

 

 

 

탑골공원 조성 초기 모습

일제강점기 엽서

 

 

 

 

 

「파고다공원문기타신설설계구연와병모양체공사평면도」

 

 

 

 

 

「파고다공원석탑신설배치도」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세키노 타다시, 『조선고적도보』 6권)

 

 

 

 

 

탑골공원에 세운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동상

「매일신보」 1929. 10. 17

 

 

 

 

1930년대 탑골공원 전경

(이순우, 2005))

 

 

 

 

파고다공원 뒷문박 비인터에다 조선물산장려회관을 방금 공사중인데 그 공사를 맛흔 동경토지건물회사에서 기초공사를 하다가 23척 두께 3척되는 초석 한 개를 발견하고 동회사경성지점장 서촌복송(西村福松) 씨는 즉동 학무과(學務課) 가등(加藤) 씨가 3일 오전에 현장에서가 검사한 결과 그 초석은 거금 464년 전 그 터에다 건축하엿든 대원각사 금당의 대초석으로 판명되었다. (중략) 지금 유명한 탑동 공원의 석탑이 초석을 맨들때에 가티 맨든 것이다. 벌서 수백 년이 되야 알지 못하게 된 대원각사의 대웅전 자리가 바로 그것이 든것도. 이 초석으로 말이암아 소개되게 도엇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경성부사적연구의 재료로 보관하기도 하얏다. (1931년 원각사와 관련된 금당 초석이 발굴될 당시 신문기사)

 

 

 

 

'발견된 대원각사 초석'

「매일신보」 1931. 6. 4

 

 

 

 

「남소영도」. 김홍도

 

 

 

 

 

남소영터, 「도성도」, 1860

 

 

 

 

 

「박문사 평면도」 조선건축회. 1932

 

 

 

 

박문사 전경

 

 

 

 

이전되는 경희궁 흥화문(「매일신보」 1932. 10. 14)

 

 

 

 

경복궁 선원전을 이축한 박문사 후면 고리

 

 

 

 

정선, 「사직노송도」

 

 

 

 

1894~1904년의 사직단

(이자벨라 비숍)

 

 

 

 

유휴지화된 사직단

『조선고적도보』 11권

 

 

 

「사직단공원평면도」 1937

 

 

 

 

 

「사직단공원관유림내고손목조사도」, 1937(국가기록원)

 

 

 

 

 

「사직단공원광장이전공사설계도」, 1940(국가기록원)

 

 

 

 

「경조오부도」, 1861

 

 

 

 

의빈성씨의 묘는 효창원 동남쪽의 작은 언덕 위에 있으며, 효창원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중략) 숙의박씨의 묘는 청엽정 2정목 11번지 효창원의 경내에 있다. 일부는 효창공립보통학교의 후면에 있다. (중략) 영온옹주의 묘는 생모인 숙의박씨 묘의 서쪽에서 99m 떨어진 곳의 작은 언덕에 있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효창공원계획도」

「매일신보」 1938. 2. 19

 

 

 

 

효창원 골프장 사진에 등장하는 최초의 캐디(1920년대), 『한국골프 일백년사』, 한국골프협회, 2000

 

 

 

 

 

효창원 골프장 평면도

 

 

 

 

효창원 골프장 각 홀에 대한 설명

 

YDS 별명 설명
1 188 불명(unknown) 180야드 오르막 경사 티 전방 30야드에 깊은 계곡이 있어 어려움.
2 195 낙원(paradise) 오르막이 심하고 그린 옆에 고분이 있음. 플래토 그린(plateau green), 포대(elevated) 그린으로 쉬운 코스가 아님.
3 200 알프스(Alps) 효창원 코스 중 가장 높은 도그래그(doglag)홀. 새와 시냇물 소리가 무성한 나무 사이로 들림. 나무 사이에 남산 성곽도 보임.
4 385 펀치볼(Punch Bowl) 거친 롱 홀. 5타로 홀 아웃(hole out)하면 다행이라는 평.
5 260 고개(Toge) 중간에 높은 봉우리가 잇어 고개라는 별명.
6 263 푸른잎(Green Leaves) 숲이 깊어 롱 드라이브가 아니면 어프로치 때도 핀이 전혀 안 보임.
7 250 레슬링선수(Wresler) 티는 높은 곳에 있고, 핀은 내리막길에 있어 호쾌한 샷 요구함.
8 220 북한산(Pukhan) 9번 홀과 나란히 있으며 북한산이 잘 보인다 하여 별명이 북한산임.
9 361 F.D.A(free for all) 양쪽에 깊은 솔숲이 있고 그린 주변에 계곡이 흘러 물소리가 낭랑함. 이 소리는 흥에 겨워 모두들 한잔 마시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림.
T 2,322    

 

 

 

 

 

 

 

삼열사 국민장 행렬

「동아일보」 1946. 7. 7

 

 

 

 

 

훈련원 마당의 YMCA 야구단과 청사

 

 

 

 

 

1919년 고종 황제 장례식에 등장하는 훈련원 청사

 

 

 

 

 

1900년경 「한성부지도」

 

 

 

 

훈련원은 지면이 평탄하고 또 면적이 넓어서 시민의 운동장으로 장래에 크게 필요한 지점임으로 당국에서도 역시 운동장으로 필요한 설비를 할 터라는데, 장차 훈련원에 큰 연못을 파서 스켓트 경기장도 설비할 터이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8일)

 

3군데의 공원은 착수할 터이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금년에도 다소간 공사를 하얏으나 아직까지도 공원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얏기 때문에 내년도에는 공사를 시작하야 부근에 수목도 많이 심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1921년 12월 26일)

 

 

 

 

 

훈련원공원 구성요소, 스케이트 타는 모습, 「동아일보」 1921. 12.26

 

 

 

 

 

 

훈련원공원의 위치 「대경성지도」, 1936

 

 

 

 

경성부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대정 12년, 13년, 14년도의 계속사업으로 15만 5천 원이라는 많은 돈을 들여 훈련원에 만들려던 부립 그라운드는 경비상 관계로 12년도에 착수치 못하고 이제부터 설계에 착수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에서 돈이 없다는 핑계로 계획하였던 모든 사업을 축소하여 혹은 중지한 때에 한갓 그라운드에만 전력을 다하는 데 대하여 그 내막을 알아보면 역시 정실에 관계되어 正大치 못한 사실이 잠재하였다는데 부청 당국자의 말에는 황태자 전하 어성혼(御成婚) 기념 사업으로 다른 것보다 먼저 한다고 하며 장소를 훈련원으로 택한 것은 교통의 편리와 이미 넓은 마당이 있는 관계라고 하나 다 발림소리에 불과하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경성도시개조 계획이 완정되지 못하여 그 부근은 장래 경성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인즉 위치상으로 보아 합당치 못하여 또 지금과 같이 재정이 궁핍한 때에 한 평에 10원씩이나 주고 5천여 평을 더 사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중략) 경성부에서 부득 부득 훈련원을 취한 까닭은 새로 사들여야만 할 5천여 평 땅은 고아(古我)라는 일본 사람이 사장인 조선산업무역주식회사의 소유 토지로 (중략) 처음 교섭에는 엉터리도 없는 매평에 15원이라는 비싼 값을 불렀던 것을 10원에 우물주물 하여 버릴 모양이라는데 아직 계약은 성립되지 않앗으나 만일 성립된다면 경성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리라더라. (「동아일보」 1924년 10월 26일)

 

 

 

 

 

「경성부공원계획지도」, 1920년대 후반

 

 

 

 

 

훈련원공원의 운동 시설

순서대로 정구장 / 경성운동장 / 경성풀장

 

 

 

 

왜성대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거류민회가 주도한 신사 창건과 관련이 있다. 경성에 일본인이 거류하기 시작한 이후 유지들 사이에서는 황대신궁(皇大神宮) 봉안건이 제창되었으며(1892년) (중략) 결국 신사는 왜성대공원 일대에 조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중략) 본래 일본거리(日本街)는 남산 북면 산기슭에서 시작되었다. 그 지세의 이로움이나 과거 역사 속의 감회를 살펴보더라도, 왜성대 일대는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유락(遊樂)을 즐길 수 있는 영지(靈地)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일본인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최적지로 떠올랐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1900년의 일본 공사관(후 통감 관저)

 

 

 

 

 

왜성대공원의 구성 요소와 조망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 입지

 

 

 

 

한양공원 개원식

 

 

 

 

 

현재 한양공원 석비

 

 

 

 

 

경성신사 주변 변화 1911년 이후

 

 

 

 

 

 

달성공원 내 요배전

 

 

 

 

이토 공작(이등박문)이 궁중의 숙청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궁전의 조영(造營)과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을 신설할 것을 진언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진언을 들은 이왕 전하는 크게 만족하시며 이를 허락하셨다. (중략)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909년 봄 마침내 준공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동양 건축물의 정수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정전과 경성 40만 시민이 꽃구경인 단풍놀이와 같이 봄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설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창경원과 조선 2000년 예술을 볼 수 있는 박물관 및 경성에 단 하나뿐인 민중의 오락장이라 할 수 있는 식물원이다. 살풍경하던 경성에 이와 같은 문화적 정취를 만들어주신 것은 모두 왕 전하의 은혜로 시민들은 이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창덕궁을 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담긴 물체에서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외의 손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하며 궁전이든 후원이든 그 희망에 따라 관람할 수 있게 개방하여 왕가의 근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면서 이왕가의 현재를 알리려 힘을 기울였다. 이로써 이왕가에 대해 우리나라(일본)가 얼마나 후하게 예우하고 있으며, 이왕가가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오해를 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이왕직에서 어떻게 하면 두 분 전하를 위로해드릴 수 있을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당히 고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식물원에 있는 연못 옆에 일본식 정취가 흐르는 정자를 지어 달맞이 연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후략) (『이왕궁비사』,1926)

 

 

 

박물관(博物館), 동물원(動物園), 식물원(植物園)을 지금부터 창경원(昌慶苑)으로 통칭한다. 그것은 창경궁(昌慶宮)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달 11일에는 원(苑)의 명칭을 동원(東苑)이라 하였다가 이번에 또 개정한 것이다. (『순종실록』1911년4월26일)

 

 

 

 

 

 

「창경궁급비원평면도」, 1908

 

 

 

 

 

순서대로 식물본관과 수정 / 춘당지와 수정 / 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경운궁과 상림원

『서울지도』, 2006(서울역사박물관)

 

 

 

 

 

 

돈덕전과 경운궁 동선

『덕수궁사』, 1938

 

 

 

 

 

일제강점기 엽서의 덕수궁

 

 

 

 

 

이왕가미술관과 석조전 정원 전경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조선시대 용산 일대

 

 

 

 

 

일제강점기 용산역

 

 

 

 

 

만철운동장의 류학생야구단 선수

「동아일보」 1930. 4. 13

 

 

 

 

 

수목 식재 전과 후의 경성부청 앞 '수원1'

 

 

 

 

 

순서대로 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18세기 중엽 /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花)」, 1786 /

정선, 「장동춘색(壯洞春色)」, 1751

 

 

 

 

 

 

30만 경성 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든 밤의 환락장 창경원의 금년 야행대회는 오는 20일 밤부터 개방하고자 하였으나, 따뜻한 봄빛에 예정보다 꽃이 일찍 피어 벚꽃(사쿠라)은 벌써 반이나 웃게 되었음으로 창경원 당국에서는 예정보다 앞서 금 18일 밤부터 개방(입장권 십전)하게 되었는데, 시간은 매일 야 오후 7시부터 10시 반까지요, 기간은 18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간이라는 바, 창경원에는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휘황찬란한 전등 조명 장치를 한 이외에 박물관 앞 광장에는 음악당을 설치하야 여흥으로 이왕가의 조선아악과 양악을 연주할 터이며 또 동물원 앞 광장에는 여러 가지 활동사진을 영사도 하고 휴식소에는 '라디오'의 설비까지 하는데, 금년에도 역시 밤마다 만경 인파로 대혼잡을 이룰 것이 지금부터 예상된다. (「조선일보」 1926년 4월 25일)

 

 

 

 

 

밤벚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창경원 인파, 「매일신보」 1933. 4. 26

 

 

 

 

 

 

만문만화 '일일일화(一日一畵)'

순서대로 꽃구경이 사람구경, 「조선일보」 1930. 4. 12 /

야앵 기간 레뷰쇼, 「조선일보」 1930. 4. 15

 

 

 

 

서울 풍경, 이마동(李馬銅). 공원을 말하는 것은 한 개의 우울이다. 왜그러냐 하면 이것은 숨이 막힐 듯이 헐덕거리는 근대 도회 생활자의 궁여지책으로 산출된 것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근대 도회인의 심정에 무슨 량미(凉味)를 주랴고 하다가 도리어 울적한 기분을 더해줄 뿐이다. 보라, 우리의 이 유서 깊은 탑동공원을. 오붓한 듯, 아담한 듯, 가끔 우리 발길이 돌아서는 이곳은 서울의 별천지를 그려내고 있다. 점쟁이, 관상쟁이, 천양만양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군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는 곳이다. 말막음으로 뚜엄뚜엄 울긋붉읏 피어 있는 화초도 초라하거니와 뭉그러지고 일그러져가는 창연한 팔각정의 석대도 이 더운 여름을 몸부림하는 듯, 육중한 철문을 들어서서 녹음을 넘어 바라보이는 북악만이 홀로 시원한 숨을 내뿜게 할 뿐이다. 공원, 그곳은 위조된 자연이 심오로부터 인간의 '소세공(小細工)'을 모멸하는 곳이다. 몬지를 뒤집어쓰고 실증에 떠는 그 가엾은 녹음을 보라. 우리의 이 탑골공원에서 우리의 루소의 '루비앙 · 아 · 라 · 나룸(자연으로 도라가라)' 이 얼마나 욕을 먹고 잇나 보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의 잊지 못할 곳이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

 

 

 

 

 

 

성벽을 격한 별세계, 장충단공원관 신당리 화장장. 장충단의 츈흥, 봄의 설움, 봄의 기쁨. 볏 잘드는 남산마루에 긔여올을 듯이 발도듬하는 장충단 노리터에도 새봄을 실은 신풍의 멍에가 이른지 오래였다. 그리하야 생명의 갑주로 알맛게 취한 진달레는 바야흐로 붉엇다. 벌일 듯이 담은 '벗지'의 입솔에 도움키면 잡힐 듯한 신춘의 미소가 흘럿다. 찰찰 넘쳐 졸졸 흐르는 개천가에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 구름다리의 그늘밋헤서 조으는 듯이 지저괴는 오리떼의 합창 비단물결에 꼬리치는 금붕어와 푸른 잔듸에 나물 캐는 어린처녀가 한테 어우르는 활화(活畵)의 한폭은 한 조각봄이라 하려니와 굽이진 언덕마다 만발한 개나리의 요염한 우슴가 가벼운 바람에 휘늘어진 버들이 애교 많은 춤에 소리 없는 노래와 냄새 없는 향긔를 탐하야 모아드는 수천명 인생의 질탕한 놀음노리는 진실로 천년만년의 봄을 한곳에 모힌 듯 하얏다. 송림 사이로 들리는 청춘의 속살거림이나 주점과 다점에 랑자한 술상은 모다 봄을 마지한 청춘의 자랑이니 방금 죽은 고기를 태어버리는 화장터와 성벽의 사이로 한 장충단 노리터는 실로 구십춘광의 독무대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

 

 

 

 

 

 

이 효창원은 순조황제 형님 문효세자의 원소입니다. 홍살문 밧게 잔디밧 넓고 또 솔나무 그늘이 조키때문에 이맘때는 놀러오는 사람이 만슴니다. 원소인 효창원을 가르침이 아니라 효창원 해자 안에 사람 만히 모혀드는 솔아래 잔디밧을 명물이라 한 것이겠지요. 내동리명물이란 말입니다. 한동리에서 명몰 노릇하는 명물이 알뜰은 하지요마는 세상이 다 아는 명물을 가진 동리라야 참 기운잇게 명물자랑을 할 것 아닙니까. 빨래하는 녀인데, 작란하는 아이들까지 효창원이라면 누가 몰으겟습니까. 여그와 노느 이들이 갓금 소낙비에 경겁을 하면서도 그래도 또 모혀드는 이 효창원이랍니다. 달밤에 솔밧속 경치는 참으로 형용할 수 업시 좃습니다. 그런데 으슥한 곳이 엿마는 자살하는 사람은 하나도 아니오고, 죽으랴다가도 오장까지 서늘한 솔바람에 잡렴이 사러진답니다. 한강철교가튼 사위스러운 명물과는 항여나 비교하지 마십시오. (「동아일보」 1924년 7월 20일)

 

 

 

 

 

 

온양온천, 소요산, 관악산, 우이동, 모도가 머럿습니다. (중략) 온양온천에를 간대도 토요일에는 왕복 려비가 반액이 되고 소요산을 가도 경원선 동두천에서 나리면 구비구비 선경가튼 산곡을 뜰코 드러가는 긔이한 풍경을 대하게 됩니다. (중략) 아츰에 일즉 가면 종일 놀고 저녁에 도라오게 됩니다. 절에는 술 과자의 준비까지 잇고 오십전만 내면 진수성찬을 배설하야 내놋습니다. 관악산도 경부선 안양정거장에서 나려 산길노 십리입니다. (중략) 우이동은 벗꼿의 명승이요 련도 교주 고손 의암 선생의 별장이 잇습니다. 꼿그늘 사히로 삼각산이 놉히 소사 잇고 산곡간에 흐르는 물결 우에는 꼿닙이 수를 노화 하로동안 놀기는 너모나 과만한 승지입니다. 경원선 창동까지 긔차 우이동까지 자동차 십원 돈 가지고는 넉넉히 놀너 갈 곳입니다. (『별건곤』 제51호 1932년 5월 1일)

 

 

 

 

 

1929년 「경성전차안내도」

 

 

 

 

 

탑동 까페, 근일에 신지(新池)가 조성하야 (중략) 원변(園邊)에 적당한 음식점이 무(無)하야 가경(佳景)을 견(見)하고, 청량(淸凉)을 취하고 다과를 즐길 수 없었어라 (중략) 일편 희소식이 들리는데, 원내에 적절한 '끽다점'이 명일 8일부터 개업한다더라. 끽다점은 다년 양요리의 경험이 있는 구보타(久保田) 군이 '청목당'을 봄에 건축을 시행하여 일전에 공사를 마치었다. 일명 '탑다원(까페-파고다)'라 명하였다. (「매일신보」 1914년 6월 7일)

 

 

 

 

 

 

 

'무시당한 삼십만 경성시민',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삼십만 시민의 유일한 놀이터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어라, 이 곳은 공원이 아니라 술집의 정원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그전부터 '청목당'이라 하는 술집이 있었거니와, 근일에 이르러 다시 청목당의 별명인지 '승리'라는 요리집을 또 새로히 지었다. 돈짝만한 터전에 술집만 지어놓고, 일반의 불평이 있는 뒷문은 닫아두면서도 따로 담을 트고 문을 내는 꼴은 정말 화가 나서 볼 수가 없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3일)

 

 

 

 

 

 

 

종래 경성의 공원은 억더한 경우던지 사용료 또는 차대료를 내이지 아니하면 사용할 수가 업는 고로 부자유한 일이 적지안턴 바 미리전부터 부청에서 신청하이던 공원사용료 조례 제3조의 개정이 지난 익월 20일로부터 허가되는고로 금후로는 교육 또는 체육상여 기타의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한것과 영리에 이비자하고할 경우는 물론이오. 개님비와 동자 등을 건설하는 경우라도 무료도 사용할 수가 잇게 되엿는데. 요컨대 부의 공원을 공공덕으로 개방된 것이다. 제3조의 개정은 '영리의 목적에 이바지 하지안는 경우와 또 공로 또는 위적(偉蹟)을 적하여 바라지 안이하고. 전해나러 가고자 하는 목적으로써 기념비 등을 세우는 경우에는 사용료를 면제할 수가 있다고 하얏는고로 새로히 설치되는 두 공원도 활용하게 된 것은 시민을 위하서도 가장 깃거워할만 할일이겟더라. (「매일신보」 1920년 2월 6일)

 

 

 

 

 

일본 맥주 광고 「매일신보」 1915. 5. 4

 

 

 

 

 

 

 

한참동안 이곳에서 즐겁게 노다가 샘물을 다시 한박아치식 마신 뒤에 길을 서편을 택하야 녯 성을 끼고 나리면 장충단 송림 사히에 도달합니다. 여긔까지의 로정이면이야 그리 왼만한 자근 아씨이면 대개 다리병은 나지 안을 것이올시다. 길도 매우 순탄하고 길찾기도 쉬운 덤에 잇서 아모라도 갈 수 잇습니다. 장충단까지 나려스면 아해들이 치룽에 사이다, 라무네, 껍삐루 등을 지고 사랑의 청춘들을 차자 다닙니다. 다리 압흔 김에 십전 주고 돗자리를 사서 깔고 안습니다. 아해는 짓굿게 엽해서 물건을 사라고 조름니다. 사지를 안으면 어느 때까지든지 서서 졸느니 단 두 사람의 세게를 찻는 청춘들노 엇지 견대어 참습니까. 하는 수 업시 남은 돈 삼십전에서 이십전을 분발하야 라무네 두 병을 사서 목을 춥입니다. 여긔서는 배가 곱흘 때까지 놀아도 좃습니다. 십전이 아즉도 남앗스니까 장충단 압헤만 나려스면 던차가 기다리고 잇지 안습니까. (『별건곤』 1932년 51호)

 

 

 

 

 

장충단공원 연못 주변의 상업 시설(일제강점기 엽서)

 

 

 

 

 

 

거긔에는 근 이백이나 되는 무리가 움주거리고 잇다. 원내의 기분은 몹시도 침체하고 혼란하야서 맛치 5, 6월 똥물에 구덱이가 논는 것 갓흐다. 갓쓰고 흔옷입은 노인, 색옷 입은 애들, 중학생, 노동자, 걸인, 지게꾼, '못지' 장수 양복쟁이 왜 친구 각종각층의 인간들이 구석구석이 안자서 또는 서서 몃달이라도 조타는 듯이 줄큿하니 어물어물한다. (중략) 정문 갓가운데는 분바른 중년게집 두엇이 담배를 픠고 안저서 출입하는 사람을 뜻잇시 흘터보는 품이 심상치 안흔 눈치엿다. 시골서 갓올나 온듯한 여학생이 대원각사비를 구경하는데 '도리우찌'를 눌러 쓴 부랑자가태 뵈는 청년이 흘금흘금 눈짓을 하는 것도 탈날 징조가 안일가. 요리점 '승리'에 '죠쥬'와 하인은 자미잇게 갈감질을 한다. ('기자 대출동 1시간 탐방 대경성 백주 암행기, 3월 29일 오후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별건곤』 제20호, 1929년 4월)

 

 

 

 

 

 

봄날 신세한탄 하는 룸펜, 「조선일보」 1934. 4. 23

 

 

 

 

 

덕수궁 동물원 원숭이 신입원(新入苑), 덕수궁 석조전 수풀에 소동물원을 신설중이든바 거의 준비가 완성되었으므로 동경에서 새로 사들여다가 창경원 동물공실에서 기르든 일본산원숭이, 대만종 레사스 백공작, 진공작, 봉황공작 외에 2백사십여종의 동물이 일요일까지는 덕수궁 수풀로 옮겨진다고 함. (「동아일보」 1935년 5월 16일)

 

 

 

 

 

'시련의 독립문. 72년 전 오늘 기공, 이젠 고가차도 밑 신세, 치욕의 영은문을 누르고, 세웠던 독립 의지, 옮길 것인가, 말 건인가 확정 없이 엉거주춤'. 독립문은 그 자리에 그냥 놓아두어도 좋을 것인가. (중략) 독립문의 장한 모습도 이젠 팽창하는 서울의 도시계획에 따라 고가차도가 머리 위에 새로 생겨나면서 '다리 밑에 웅크린 몰골이 되어간다'는 서울 시민들의 걱정들이다. 독립문이 이같은 시련을 겪게 된 것은 지난해 4월 서울시가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남가좌동-성산대교-시흥으로 이어지는 성산대로 개설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직터널과 금화터널 중간 지점에 위치, 도로계획선에 들어가게 된 독립문을 놓고 서울시 측은 현 위치에서 북쪽인 옛 영은문 쪽으로 옮겨 앉히자고 제의한데 반해 문화재 위원들은 소중한 문화재를 옮길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 팽팽하게 맞섰다. (중략) 비록 3m의 거리를 둔다고는 하지만 오는 연말이면 폭 15m 길이 528m의 고가차도가 독립문 1m 위를 동서로 가로질러 나게 돼 있다. (「동아일보」 1978년 11월 2일)

 

 

 

 

 

독립문지 동판 알리지 않고 묻힐 뻔.  서울시가 15일 유서 깊은 독립문 옛자리를 먼 후세까지 알리기 위한 동판을 묻으면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보도진에도 일체 알리지 않아 서울시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를 천하에 과시. 서울시는 이날 하오 5시 건설국 산하 직원들만을 입회시킨 가운데 노면으로부터 40cm 깊이에 독립문지라고 새겨진 동판을 묻고 16일 새벽 5시 그 위에 1t 무게의 원형 무쇠 뚜껑을 엎어버렸던 것.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사진기자들이 현장에 몰려들자 뚜껑을 다시 여는 등 법석을 떨어 생각 않는 서울시 공무원의 진면목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평. 이에 대해 문화재 관리 및 보존의 주무국인 서울시공보 관계자는 "우리도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이날 보신각 중건과 성산대로 개통 등 큰 행사가 겹쳐 미처 신경쓸 뜸이 없었다"고 옹색하게 변명했다. (「동아일보」 1979년 8월 17일)

 

 

 

 

 

순서대로

1979년 도로 밑에 묻힌 독립문지 동판 /

1979년 독립문 이전 공사 현장(서울사진아카이브)

 

 

 

 

 

성산대로와 독립문

 

 

 

 

 

한자로 쓰인 독립관 현판

협동 측량조합소 제2회 졸업 기념사진

(1909년 또는 1910년 추정)

 

 

 

 

 

1897년 독립관 후면

 

 

 

 

 

독립관 현재 모습

 

 

 

 

 

 

순서대로 2007년 서대문독립공원 재조성 사업 조감도 / 현재 독립공원 안내판

 

 

 

 

 

 

미군 공병에 의해서 올려지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의 상륜부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미군의 진주로 옛 모습으로 다시 쌓아올리기는 하였지만, 왜정 말기의 전화로 쇠창살 등이 철거되고 벽이 파손되는 등 우리의 국보를 보존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상태에 있어 보는 사람들의 한숨거리였다. 그것이 다행히 이중화 씨라는 독지가의 정성으로 자재를 던져 탑 근방을 수리하고 쇠창살을 재건하여 보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다. (「독립신문」 1946년 11월 16일)

 

 

 

 

 

 

1953년 탑골공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2년에서 1953년에 사용된 한국은행 신 천원 권의 탑골공원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967년 9월 20일

1969년 3월 26일

1983년 5월 17일

1983년 아케이드 철거 후

탑골공원 경계부의 변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정문이 된 탑골공원 정문

 

 

 

 

 

2001년 독립후손에 의해서

떼어진 삼일문 현판

 

 

 

 

 

 

'문화재 깔고 가는 도시계획'. 서울시 도시계획과 문화재 보존의 마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5 · 16 직후 덕수궁 담을 헐면서 후퇴시켜 투시 철책으로 대신한 데서 표면화한 말썽은 도로 확장을 위한 경복궁 담의 일부를 철거 후퇴, 사직단 정문의 도로변 노출, 고가도로 건설에 따른 수구문 철거 시비, 파고다공원 주변의 상가화, 효자동-세검정 간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한 칠궁의 일부 철거 이전, 종묘담의 철거 후퇴에 의한 도로 신설 등의 큰 문제를 제기해왔었다. (중략) '이국에서는 문화재가 있으면 길도 피해 건설한다'고 각국의 문화재 보호 의욕을 밝히는 손보기 교수(연세대)는 '근대화가 결코 과거의 문화 전통이나 유산을 없애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시당국의 성급한 의욕을 나무란다. (「동아일보」 1968년 2월 1일)

 

 

 

 

 

1960년 12월 장충체육관 공사

(서울사진아카이브)

 

 

 

 

 

 

1959년 장충단공원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1967년 4월 29일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공화당 박정희 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장충단공원 재정비 사업 조감도

 

 

 

 

 

1960년 10월 12일 효창운동장 개장식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4권, 1559-1960

 

 

 

 

 

 

 

1960년 효창운동장 항공 사진(국가기록원)

 

 

 

 

 

 

1960년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국가기록원)

 

 

 

 

 

1964년 세종로 중앙분리대에 도입된 애국선현 37인 석고상

(국가기록원)

 

 

 

 

 

사직공원의 율곡 이이 동상

(e영상역사관)

 

 

 

 

 

 

탑공공원의 손병희 동상

(서울사진아카이브)

 

 

 

 

 

효창공원의 원효대사 동상

 

 

 

 

 

장충단공원의 사명대사 동상 제막식

(e영상역사관)

 

 

 

 

 

장충단공원의 이준 열사 동상 제막식

(서울사진아카이브)

 

 

 

 

 

현재 탑골공원에 남은 기념물 현황

(「중앙일보」 디지털스페셜 '120년의 타임슬립, 탑골공원' 페이지)

 

 

 

 

 

북한반공투사위령탑

 

 

 

 

 

육영수여사송덕비

 

 

 

 

 

 

효창공원 내 기념물

 

 

 

 

 

 

현 장충단비

 

 

 

 

 

 

노인 문제와 관련된 시리즈 기사(「아시아경제」 2013년 기획기사)

 

신문 날짜 기사 제목 신문 날짜 기사 제목
11월 4일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다 11월 18일 외로움, 그 허기도 달랜다
원각사 무료급식소
11월 4일 시간이 멈춘 그곳, 차라리 섬이었어라 11월 18일 주린 그분들 행복 없이는
원각사 존재 이유 없죠
11월 6일 자식 전화 안 기다려, 얘가 내 애인이야 11월 19일 탑골공원 편의점 막걸리가 다른 곳의
5배나 더 팔리는 까닭
11월 6일 2000원 국밥에 반주 한 잔,
인생을 해장한다
11월 19일 음악 DJ가 있는 낙원상가 '추억 더하기'
11월 6일 파고다 출근자들이 꼽은 낙원동 맛집 11월 20일 커피 한 잔 200원의 파고다 '노천카페'
11월 6일 45년간 한 평 쪽방서 사는 70세 할아버지 11월 20일 '대인춘풍 천객만리' 파고다 슈사인
할아버지
11월 7일 윤락녀 소탕 나비작전 후 쪽방이 채워졌다 11월 21일 갈 때 가더라도 깨끗하게 하고 가려고
11월 8일 도시 투명인간으로 14년······
무표정의 또 하루
11월 21일 '찍기는 찍어야하는데······'
풀기힘든 숙제 영정사진
11월 8일 윤 할아버지 '자식 얘긴, 묻지 말랬잖아' 11월 22일 '우리 안의 섬 그곳,'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11월 11일 박카스 아줌마 400명 활동, 주름진 性,
은밀한 거래
11월 25일 '노인 존경 못 받아', '존경 받아'보다
7배 많아
11월 11일 박카스와 동양제약에 보내는 사과문 11월 25일 박카스 아줌마 해결책 묻자······
'ㅗ인도 성상담 받아야'
11월 12일 정신지체 박카스 아줌마
남편은 알고도······
11월 25일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혜택 축소 찬성
60% 이상
11월 12일 여성 가난과 노인 성욕의 일그러진 결합 11월 26일 홍보관 · 약장수 · 사기꾼 그래도 자식보다
살가워 알고도 속는 거지
11월 13일 그림자 인생도, 손 쥐어보면
다 36.5º더라고요
11월 27일 그가 남긴 건 '사인미상-고독사'뿐이었다
11월 13일 파고다 파수꾼 종로2가 파출소 11월 27일 죽음의 흔적을 지워드립니다
11월 14일 종로 한복판서 매일 벌어지는 수백 개의
전투
11월 28일 60세 이상만 근무하는 성남 카페-
12인의 일자리 찬가
11월 14일 장기만큼 볼만한 '구경꾼 스타일' 11월 28일 노인 고용증가 청년층 일자리 뺏는다는
건 오해
11월 15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분들이 뽑은
파고다 명소는
   

 

 

 

 

 

 

탑골공원 주변 먹거리

「아시아경제」 2013. 11. 4

 

 

 

 

 

 

 

탑골공원 인근 쪽방촌

「아시아경제」 2013. 11. 7

 

 

 

 

 

 

 

 

 

 

 

 

 

Posted by 드무1
,

2020-010 미술관에 간 심리학

 

 

 

윤현희 지음

2019, 믹스커피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1000

신천역스마트도서관

 

601.8

윤94ㅁ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러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에서 찾은 예술가의 삶과 심리

뭉크는 왜 절규하는 그림을 그렸을까? 에곤 실레 작품에는 왜 누드가 많을까?

 

위대한 예술작품 속에 숨겨진 심리학을 만나다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림이 더 잘 보인다!

미술과 심리 공부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책!

 

 

저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들이 캔버스에 펼쳐놓은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내면을 돌아보고, 성장하게 된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삶의 무게와 일상의 분주함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억눌렸던 내면의 에너지와 잃어버렸던 순수함을 되찾게 될 것이다.

 

김은숙(임상심리학자)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접근 방향은 매우 다양하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뇌 과학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이름하에 과학적 접근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책은 심리학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에 대해 인간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관찰하고 있다. 미술과 관련된 기존의 심리 서적들은 단순히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림 속에 숨은 심리학적 코드를 파헤치는 작업이었다. 반면 저자는 화가들의 인생을 소개하고 그들이 그림에 담은 감정을 독자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지친 우리 모두의 삶을 다독거려주고 있다.

 

조지현(정신과 전문의)

 

 

 

● 윤현희

 

한국, 캐나다, 미국 3개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후, 학생들을 가르치고 정신과병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다. 심리치료의 영역이 치료실을 벗어나 글쓰기, 그림 그리기, 정원 가꾸기 등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풍경 속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실천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한 소수를 위한 글쓰기보다는 대중적 글쓰기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최근에는 심리학과 시각예술의 접점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는 동안 한국아동인성검사(KPI-C)의 연구개발에 긴 시간 참여한 후 캐나다 온타리오의 치료기관 온타리오 주정부 아동정신건강센터(Children’s Mental Health Ontario)에서 훈련을 받고 캐나다의 임상심리 현장을 경험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 두 아들을 키우며 아동청소년 임상신경심리를 공부했다.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와 미국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청소년의 공감 능력 발달에 미치는 상이한 영향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선의 교육청에서 근무했으며 한국과 미국의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다. 시간이 허락될 땐, 라이스대학교의 글래스콕 스쿨과 휴스턴 현대예술박물관의 아트 스쿨을 오가며 드로잉과 페인팅을 배운다. 브런치에서 '치유를 위한 심리학' 매거진을 연재해 브런치북 프로젝트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브런치 brunch.co.kr/@veronicahyu

 

 

 

차례

 

지은이의 말

심리학과 미술의 만남

과거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쁨


1장

나이브 아트와 긍정심리학


천진한 에너지와 동심의 세계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자기 치유적 삶과 창작물 : 헤르만 헤세
주말 화가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 앙리 루소
숲속의 세렌디피티, 클림트의 풍경화 : 구스타프 클림트



2장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아들러 심리학

 


17세기의 아방가르드, 조망의 확장 : 디에고 벨라스케스
현재성의 미학 : 에두아르 마네
발레리나가 있는 풍경 : 에드가 드가
세상을 바꾼 세잔의 사과 : 폴 세잔

 


3장

추상의 세계와 게슈탈트 심리학

 


어린아이의 눈으로 : 파블로 피카소
색채를 통한 감정의 치유 : 바실리 칸딘스키
우주의 진실에 다가가다 : 피에트 몬드리안
균형에 도달하는 길 : 파울 클레



4장

화가 내면의 상처와 표현주의

 


내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질 수 있을까? : 빈센트 반 고흐
상처와의 처절한 대면 : 에드바르트 뭉크
벌거벗은 영혼, 인체의 정신분석적 탐구 : 에곤 실레
골목길의 미학 : 모리스 위트릴로



5장

여성 화가의 정체성: 전문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제비꽃 장식을 한 여인 : 베르트 모리조
미국적인 독립성, 페미니즘의 향기 : 메리 카사트
내 삶의 주인공은 나 : 수잔 발라동
상처는 나의 힘 : 루이스 부르주아



참고문헌
도판 목록
인물과 용어 해설

 

 

 

 

1장

 

나이브 아트와

긍정심리학

 

 

1장에서는 제도권 내에서 그림을 배우지 않았으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스스로 우뚝 선 화가들의

소박한 그림과 그들의 인생을 따라가본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기록한 소소한 일상과 꿈은

우리에게 정신적 휴식과 활기를 가져다준다.

또한 창작을 통해 삶의 곤궁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상에 도달한 그림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삶의 도구로서의 미술을 실천했던 화가들의 삶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아웃사이뎌 예술 또는 나이브 아트로 분류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

긍정심리학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진한 에너지와 동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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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Mary Robertson Moses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블리자드>, 1956,

나무패널에 유채, 21.59×27.94cm, 개인 소장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메이플 시럽 채취>, 1955,

나무패널에 유채, 91.4×114.3cm, 뉴욕 페니모어미술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칼훈>, 1955,

나무패널에 유채, 42.55×60.96cm, 워싱턴 국립여성화가미술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애플 버터 만들기>, 1944~1947,

나무패널에 유채, 91.4×114.3cm, 개인 소장

 

 

 

사람들은 늘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 어려서부터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살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은 천천히 하세요. 때로는 삶이 재촉하더라도 서두르지 마세요.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중에서

 

 

 

 

자기 치유적 삶과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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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 Hesse

 

헤르만 헤세

 

 

 

 

저자의 습작, <수채화의 오마주>, 종이에 수채(왼쪽)

저자의 습작, <타신의 풍경> 종이에 수채(오른쪽)

 

 

 

헤르만 헤세, <타신의 산>, 1927, 종이에 수채, 24×30.3cm, 바덴 위르텐베르크 개인 소장

 

 

 

 

헤르만 헤세, <보드머의 집>, 1934, 종이에 수채, 30×23.7cm

 

 

 

종종 참을 수 없었던 이 모든 쓸쓸함으로부터 나만의 탈출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이전에 해보지 못한 어떤 것. 그러니까 그리기와 색칠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글쓰기가 더 이상의 위안을 주지 못할 때, 예술이 주는 위안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는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수채화 물감으로 시와 먼 기억, 꿈을 그립니다. 나는 그림에 있어서 아마추어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글을 쓸 때 펜으로, 그림을 그릴 때 붓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나는 단순한 풍경화를 그리고 있지만 그 풍경들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이도 깊어지고 예술에 대한 나의 안목도 깊어집니다. 나의 글과 그림이 지향하는 저 목표점에 절대적이며 숭고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1917년 헤세가 펠릭스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헤르만 헤세, <타신의 풍경>, 1924, 종이에 수채, 27×21cm, 바젤 개인 소장

 

 

 

 

주말 화가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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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Rousseau

 

앙리 루소

 

 

 

 

앙리 루소, <나 자신, 초상 : 풍경>, 1890,

캔보스에 유채, 145.8×112.8cm, 프라하 국립미술관(1890년 낙선 전 출품작)

 

 

 

 

앙리 루소, <전쟁 혹은 불의 기마상>, 1894, 캔버스에 유채, 114×19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앙리 루소, <야비드가의 꿈>, 1910, 캔버스에 유채, 204.5×298.5cm, 뉴욕 현대미술관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 캔버스에 유채, 131×97cm, 바젤 쿤츠미술관

 

 

 

 

 

앙리 루소, <잠 자는 집시>, 1897, 캔버스에 유채, 129.5×200.7cm, 뉴욕 현대미술관

 

 

 

 

앙리 루소, <22회 앙데팡당전에 참석하는 화가를 초대하는 자유의 여신>,

1905~1906, 캔버스에 유채, 174×118cm, 도쿄 국립현대미술관

 

 

 

 

 

숲속의 세렌디피티, 클림트의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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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 <카소네의 교회가 있는 풍경>, 1913,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개인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 <북부 오스트리아의 농가>, 1911,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빈 벨데베레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 <소나무 숲 2>, 1901, 캔버스에 유채, 91.5×89cm, 개인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 <공원>, 1914,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뉴욕 현대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 <풍경화 정원>, 1906,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개인 소장

 

 

 

 

 

2장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아들러 심리학

 

 

 

이번 장에선 시대가 규정한 가치와 심미안에서 벗어나

외부의 비평에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나간

화가들의 인생을 따라가본다.

벨라스케스와 마네, 드가와 세잔의 예술적 여정을 보면,

인간은 역동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이며

고유한 세계관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아들러 심리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 미술에서부터 바로크 이전까지 회화의 목적은

종교의 숭고함과 이상세계의 이데아를 담아내는 것이었다.

이데아의 세계는 이상화되고 정교화된 인지적 도식cognitive concept

또는 스키마schema의 형태로 인간의 정신에 박제되어 있다.

17세기 벨라스케스 이후 19세기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로 대변되는 화가들은

자연의 빛과 감각기관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악한

객관적 진실에 주관적 해석을 담아 화폭에 재구성한다.

회화에서 이런 실험은 인식 전환의 기폭제로 작용하며

현대 미술의 서막이 열리는 시대로 이끈다.

 

 

 

 

 

17세기의 아방가르드, 조망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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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go Velazquez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비야의 물장수>, 1623,

캔버스에 유채, 106.7×87cm, 런던 앱슬리하우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쿠스의 승리 : 술 취한 사람들>, 1628,

캔버스에 유채, 165×227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1650,

캔버스에 유채, 81.3×69.9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1650,

캔버스에 유채, 140×120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47~1651,

캔버스에 유채, 122.5×177cm, 런던 내셔널갤러리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현재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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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 캔버스에 유채, 96×130cm, 런던 코톨드미술관

 

 

 

 

 

 

 

관찰자는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다. 일반의 싦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대한 전기 에너지 저장소로 들어가듯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또한 그 사람을 이 군중만큼이나 거대한 거울에 빗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다양한 모습의 삶을, 삶의 온갖 요소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아함을 비춰주는, 인지력을 갖춘 만화경에다가도.

 

-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중에서

 

 

 

 

 

에두아르 마네, <비극적 배우>, 1866,

캔버스에 유채, 185×110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 캔버스에 유채, 161×97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캔버스에 유채, 208×264.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130×190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9, 캔버스에 유채, 170×124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발레리나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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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Degas

 

에드가 드가

 

 

 

 

 

 

에드가 드가, <리허설>, 1874, 캔버스에 유채, 46×61cm, 글래스고 코코란미술관

 

 

 

 

 

 

 

 

에드가 드가, <무대 위의 발레 리허설>, 1874,

파스텔과 오일 물감 복합재료, 54.3×73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1886, 캔버스에 유채, 76×81.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5~1876,

캔버스에 유채, 92×68.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 1858~1860, 캔버스에 유채, 200×250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에드가 드가, <뉴올리언스의 목화 사무실>, 1873, 캔버스에 유채, 73×92cm, 프랑스 포미술관

 

 

 

 

 

 

세상을 바꾼 세잔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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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ezanne

 

폴 세잔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화>, 1899, 캔버스에 유채, 73×92cm, 파리 오르세미술관

 

 

 

 

 

 

폴 세잔, <대수욕도>, 1906, 캔버스에 유채, 208×249cm, 필라델피아미술관

 

 

 

 

 

 

폴 세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세잔 부인>, 1888~1890,

캔버스에 유채, 116.5×89.5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폴 세잔, <자화상>, 1875, 캔버스에 유채, 64×53cm, 파리 오르세미술관

 

 

 

 

 

 

폴 세잔, <큰 소나무가 있는 생 빅투아르 산>, 1887, 캔버스에 유채, 67×92cm, 런던 코톨드미술관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3, 캔버스에 유채, 65×81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3장

 

추상의 세계와

게슈탈트 심리학

 

 

 

 

20세기를 시작한 화가들, 피카소와 몬드리안,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는

인식의 급진적 진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시각 예술의 혁명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잔의 환원주의를 계승하고 자연 세계를 구성하는

조형의 기본 요소들을 연구한 이들은

3차원적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오는 데 있어서

회화의 진실성을 추구했다.

이들의 시도는 나아가 형태의 해체와 색채의 해방을 가져오고

추상화의 서막을 열었다.

회화가 추상적으로 발전하면서

의미와 공감을 찾아내는 감상자의 몫이 중요해진다.

회화가 일방적인 소통에서 작가와 감상자 간의

긴밀하고 사적인 상호 소통으로 옮겨오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형태와 색이 자유로워 모호해진 추상화를 탐색하는 동안

내면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과 감정이 풀려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20세기 이전의 그림들과는 다른 차원의 공감이다.

그만큼 감상자는 더 자유롭게 그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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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조각가와 그의 머리, 그리고 아네모네>, 1933,

에칭, 26.7×19.4cm, 뉴욕 현대미술관, 록펠러재단

 

 

 

 

내가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여인의 얼굴>, 1962,

금속 조각에 채색 · 금속 끈, 127×74×40cm, 파리 피카소미술관

 

 

 

 

 

 

파블로 피카소, <해부도>, 1933, 종이에 연필, 19.8×27cm, 파리 피카소미술관

 

 

 

 

 

 

파블로 피카소, <정원의 여인>, 1929~1930, 브론즈, 210×117×82cm, 마리나 피카소재단

 

 

 

 

 

색채를 통한 감정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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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sily Kandinsky

 

바실리 칸딘스키

 

 

 

 

숲 냄새가 났다.

가을, 밤에 가까운 시간의 숲.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 우는 소리를 냈다.

밤이 되기 시작한 시간의 숲 냄새.

눈앞에 크고 새까만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 뚜껑은 열려 있었고 그옆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잇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 미야시타 나츠, 「양과 강철의 숲」 중에서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시리즈, 1890~1891,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빛과 색채의 차이로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를 알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블루 라이더>, 1903, 보드에 오일, 55×65cm, 개인 소장

 

 

 

 

 

 

바실리 칸딘스키, <무르나우의 교회>, 1910, 캔버스에 오일, 64.7×50.2cm, 뮌헨 렌바흐미술관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1923,

캔버스에 유채, 140×201cm,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바실리 칸딘스키, <색채 연구 : 동심원과 정사각형>, 1913,

종이에 수채 · 크레용, 23.9×31.6cm, 뮌헨 렌바흐미술관

 

 

 

 

 

우주의 진실에 다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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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피에트 몬드리안

 

 

 

 

 

피에트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2~1943.

캔버스에 유채, 127×127cm, 뉴욕 현대미술관

 

 

 

 

 

 

피에트 몬드리안, <농가>, 1900, 수채와 과슈, 개인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 <농가의 햇살>, 1904, 수채, 개인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 나무>, 1908~1910,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시립박물관

 

 

 

 

 

 

피에트 몬드리안, <회색 나무>, 1911,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시립박물관

 

 

 

 

 

 

피에트 몬드리안, <꽃핀 사과나무>, 1912,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시립박물관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 캔버스에 유채, 51×51cm, 개인 소장

 

 

 

 

 

 

균형에 도달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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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파울 클레

 

 

 

 

 

 

파울 클레, <바다에서의 가능성>, 1932, 로스엔젤레스 노턴사이먼미술관

 

 

 

 

 

 

파울 클레, <수퍼 체스>, 1937, 캔버스에 유채,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파울 클레, <고양이와 새>, 1928, 캔버스에 유채와 잉크, 뉴욕 현대미술관

 

 

 

 

 

 

파울 클레, <골드피시>, 1925, 종이에 유채와 수채, 69.2×49.6cm, 함부르크미술관

 

 

 

 

 

 

파울 클레, <장미 정원>, 1920, 종이에 유채 · 펜 · 잉크, 뮌헨 렌바흐하우스

 

 

 

 

 

 

 

파울 클레, <새로운 달 아래서의 사랑 노래>, 1939, 헝겊에 수채화, 베른 현대미술관

 

 

 

 

 

 

파울 클레, <두려움이라는 제국 아래서 춤>, 1938, 헝겊에 수채화, 바젤 파울클레미술관

 

 

 

 

 

4장

 

화가 내면의 상처와

표현주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갈망했던 화가들의 캔버스는 강렬한 색채로 가득하다.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와 노르웨이의 뭉크,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는 사적인 경험과 내면의 열망,

상처를 과장된 색과 단순화된 구도를 통해 표현했다.

그들의 그림은 세계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표현주의로 명명되는 그들의 캔버스는

그림과 심리학이 본격적으로 만나는 지점이다.

프로이트가 소개한 의식과

그 아래 감춰진 무의식이라는 층위 이론은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던

표현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뭉크는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性과 죽음의 본능,

그리고 실존의 불안과 상처받은 자아를 그려내고 있다.

이들의 그림은 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적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어 특히 인상 깊다.

 

 

 

 

 

 

내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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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어.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구나.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껴.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 갈 수 있을까? 트와일라잇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어.

 

- 1888년 6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뉴욕 현대미술관

 

 

 

 

 

 

이곳의 색깔은 미묘해. 잎이 타들어가고 먼지가 끼었을 때도 풍경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아. 그때는 또 다양한 색조의 황금빛이 깔리기 때문이지. 녹색을 띤 황금빛, 노란색을 띤 황금빛, 분홍색을 띤 황금빛···. 그리고 이 황금빛은 파란색과 결합하는데 이 파란색은 또 물의 짙은 진보라색으로부터 물망초의 파란 코발트색, 특별히 맑고 파란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채로워. 밤은 낮보다 색깔이 훨씬 더 풍부해.

 

- 1888년 여동생 월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캔버스에 유채, 80.7×65.3cm, 암스테르담 크뢸러뮐러미술관

 

 

 

 

 

서로 보완해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해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조화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람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 1888년의 편지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 <타라스콘으로 가는 길 위의 화가>, 1888,

캔버스에 유채, 48×44cm,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57×43.5cm, 워싱턴 국립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피에타>, 1889, 캔버스에 유채, 73×60.5cm,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울고있는 노인 : 영원의 문턱에서>, 1890,

캔버스에 유채, 80×64cm, 암스테르담 크뢸러뮐러미술관

 

 

 

 

 

사람을 그리든 풍경을 그리든, 나는 멜랑콜리한 감정보다 깊은 고뇌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야.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사람은 깊이 고뇌하고 있다. 정말 섬세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 ···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이고, 지속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끈질기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쉼 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 1882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상처와의 처절한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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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에드바르트 뭉크

 

 

 

 

 

에드바르트 뭉크, <자화상 : 시계와 침대 사이에서>, 1940~1943,

캔버스에 유채, 120.5×149.5cm, 오슬로 뭉크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119.5×118.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생 클루 강의 풍경>, 1890,

캔버스에 유채, 60×38cm, 오슬로 뭉크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 보드에 템페라, 83.5×66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흡혈귀>, 1895, 캔버스에 유채, 91×109cm, 오슬로 뭉크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마돈나>, 1894, 캔버스에 유채, 90×68cm, 오슬로 뭉크미술관

 

 

 

 

 

나의 아버지는 정신병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강박적인 종교인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죽음의 천사들은 내가 태어난 날부터 내 곁에 있었다(Prieadux, 2005).

 

- 아버지가 돌아가신 1889년 어느 날의 일기 중에서

 

 

 

 

 

 

 

에드바르트 뭉크, <생명의 춤>, 1899~1900,

캔버스에 유채, 125.73×190.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벌거벗은 영혼, 인체의 정신분석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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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에곤 실레

 

 

 

 

 

에곤 실레, <이중의 자화상>, 1915, 종이에 과슈와 수채, 개인 소장

 

 

 

 

 

 

실레의 가족 사진(왼쪽부터 에곤, 멜라니, 어머니와 아버지, 엘비라)

 

 

 

 

 

 

에곤 실레, <어머니와 두 아이들 Ⅱ>, 1915, 종이에 연필과 과슈, 빈 레오폴드미술관

 

 

 

 

 

 

 

에곤 실레, <네 그루 나무>, 1917,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미술관

 

 

 

 

 

 

 

에곤 실레, <사랑의 행위 연구>, 1915, 종이에 색연필, 빈 레오폴드미술관

 

 

 

 

 

빈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도시는 암흑이고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나는 혼자이고 싶다.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오월, 유월, 칠월, 팔월, 새로운 것들을 보아야 하고, 새로운 것들을 탐구해야 한다. ··· 어린 자작나무들의 재잘거림과 잎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빛과 태양을 바라보고 축축하고 푸르스름한 저녁의 계곡을 즐기고, 황금빛 물고기의 반짝임을 느끼고, 하늘에 차곡차곡 쌓인 구름들을 바라보며 꽃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 1910년 안톤 페슈카에게 보내는 에곤 실레의 편지 중에서

 

 

 

 

 

 

 

에곤 실레,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판넬에 유채, 32.2×39.8cm, 빈 레오폴드미술관

 

 

 

 

 

 

 

 

에곤 실레, <발리의 초상>, 1912, 판넬에 유채, 32.2×39.8cm, 빈 레오폴드미술관

 

 

 

 

 

 

 

에곤 실레, <가족>, 1918, 캔버스에 유채, 152.5×162cm, 오스트리아미술관

 

 

 

 

 

골목길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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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Utrillo

 

모리스 위트릴로

 

 

 

 

 

모리스 위트릴로, <코팽의 막다른 골목>, 1910,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박물관

 

 

 

 

 

 

수잔 발라동과 어린 모리스 위트릴로

 

 

 

 

 

 

 

수잔 발라동, <나의 아들 위트릴로>, 1921, 캔버스에 유채

 

 

 

 

 

 

모리스 위트릴로, <몽마르트르 성 피에르 교회>, 1914,

보드에 유채, 105×76cm, 파리 오랑주리미술관

 

 

 

 

 

 

모리스 위트릴로, <클리냥쿠르의 교회>, 1913~1915,

캔버스에 유채, 73×100cm, 파리 오랑주리미술관

 

 

 

 

 

 

 

모리스 위트릴로, <라팽 아질>, 1913, 캔버스에 유채, 나고야미술관

 

 

 

 

 

 

 

모리스 위트릴로, <퐁투아즈의 에페론과 쿠텔레리 거리>, 1914,

판넬에 유채, 74.3×105.41cm, 개인 소장

 

 

 

 

 

모리스 위트릴로, <노트르담 성당>, 1929, 파리 오랑주리미술관

 

 

 

 

 

5장

 

 

여성 화가의 정체성 :

 

전문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5장에서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전문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자기 발전을 위해 여성에게 강요되던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며

시대를 앞서간 여인들의 용기 있는 일생을 따라가본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구속과 제약 속에서도

인상파 화가로서 열정적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던 베르트 모리조와

미국적 독립성을 지녔던 강단 넘치는 여인 메리 카사트,

몽마르트 언덕에서 피어난 수잔 발라동,

20세기의 작은 거인 루이스 부르주아까지,

그들의 삶과 예술 세계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들의 삶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많은 공감과 울림을 안겨주는 모델들이라 할 수 잇다.

남성 화가들에 비해 대중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꼿꼿하고 향기 짙은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예술을 기억하고자 한다.

 

 

 

 

 

제비꽃 장식을 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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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he Morisot

 

베르트 모리조

 

 

 

 

 

베르트 모리조, <요람>, 1872, 캔버스에 유채, 56×46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베르트 모리조의 모습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1872,

캔버스에 유채, 55×28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베리트 모리조, <와이트 섬의 외젠 마네>, 1875,

캔버스의 유채, 38×46cm, 파리 마르모탄모네미술관

 

 

 

 

 

 

 

베리트 모리조, <여름날>, 1879,

캔버스의 유채, 45.7×75.2cm, 런던 내셔널갤러리

 

 

 

 

 

 

베리트 모리조, <젠느빌리에의 밀밭에서>, 1875, 캔버스의 유채, 46×69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베리트 모리조, <점심 식사 후>, 1881, 캔버스의 유채, 38×46cm, 개인 소장

 

 

 

 

 

 

미국적인 독립성, 페미니즘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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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Cassatt

 

메리 카사트

 

 

 

 

 

메리 카사트,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 1884, 캔버스에 유채, 97.4×74.2cm, 워싱턴 국립미술관

 

 

 

 

 

 

메리 카사트, <푸른색 암체어에 기대 있는 소녀>, 1878,

캔버스에 유채, 89.5×129.8cm, 워싱턴 국립미술관

 

 

 

 

 

 

메리 카사트, <투우사에게 물잔 건네기>, 1873,

캔버스에 유채, 101.6×81.1cm, 메사추세츠 클락미술관

 

 

 

 

 

 

메리 카사트, <르 피가로지를 읽고 있는 여인>, 1878, 캔버스에 유채, 10×84cm, 개인 소장

 

 

 

 

 

 

메리 카사트, <졸린 아이를 씻기려는 어머니>, 1880,

캔버스에 유채, 100×65cm, 로스엔젤레스 카운티미술관

 

 

 

 

 

 

메리 카사트, <목욕>, 1892, 캔버스에 유채, 100.3×60cm, 시카고 아트인스티튜드

 

 

 

 

내 삶의 주인공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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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zanne Valadon

 

수잔 발라동

 

 

 

 

 

수잔 발라동, <푸른 방>, 1923, 캔버스에 유채, 90×116cm, 파리 퐁피두센터미술관

 

 

 

 

 

 

수잔 발라동의 모습

 

 

 

 

 

수잔 발라동, <지화상>, 1893, 캔버스에 유채, 휴스턴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숙취 : 수잔 발라동의 초상화>, 1887~1888,

캔버스에 유채와 초크, 캠프리지 포그미술관

 

 

 

 

 

 

수잔 발라동, <기대 누운 여인>, 1928,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수잔 발라동, <그물 치는 사람들>, 1914, 낭시미술관

 

 

 

 

 

상처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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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e Bourgeois

 

루이스 부르주아

 

 

 

내게 낙천주의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예술은 나 자신의 정신분석학이자 나만의 공포와 두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직시하고 알아야만 한다. 그런 고찰이 당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2008년 10월 28일 매거진 GQ와의 인터뷰 중에서

 

 

 

 

 

 

 

 

루이스 부르주아, <마망>, 1991, 청동, 돌, 태피스트리, 오타와 내셔널갤러리

 

 

 

 

 

 

 

루이스 부르주아, <감옥 Ⅳ>, 1999, 색칠한 나무와 철, 뉴욕 현대미술관

 

 

 

거미는 나의 어머니께 바치는 송사다. 엄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매우 섬세하고 영리하고 끈기 있고 부드럽고 합리적이며 흥미로우며 섬세하고 없어서는 안 될 깔끔한 사람이었다. 거미가 그런 것처럼··· 모기를 잡아먹는 거미는 친근한 존재다. 우리는 모기가 질병을 퍼뜨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 거미처럼 돕고 예방하고 그랬다.

 

- 왜 하필 거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루이스 부르주아, <꽃>, 2009, 종이에 과슈로 그린 12점의 드로잉,

각 59.6×45.7cm, 뉴욕 현대미술관

 

 

 

참고문헌

 

● 애나 메리 로버트슨(2017),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수오서재

● 와카타케 치사고(2018),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토마토출판사

● 이지선, 김민영, 서은국(2004), 한국인의 행복과 복 : 유사점과 차이점, 「한국심리학회지 : 사회 및 성격」 18, 3

● 에른스트 곰브리치(1960), 『서양미술사』 16판, 도서출판 예경

● 샤를 보들레르(2014),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정혜용, 양효실 옮김, 은행나무

● 베른트 그로베(2005), 『에드가 드가』, 엄미정 역, 마로니에북스

● 마틴 게이 퍼드(2012), 『내가, 그림이 되다 :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 김미라(2014), 『예술가의 지도』, 서해문집

● 페르낭드 올리비에(2003), 『첫사랑 피카소』, 청년정신

● 미야시타 나츠(2016), 『양과 강철의 숲』, 예담

● 에릭 캔델(2014), 『통찰의 시대』, 랜덤하우스코리아

● 빈센트 반 고흐(2017), 『영혼의 편지』, 예담

● 지그문드 프로이트(1917), 『예술과 무의식』

● 칸딘스키(1921),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 뭉크(2000), 『뭉크 뭉크』, 이충순 옮김, 다빈치출판사

● <GQ 코리아>, 2008-10-28 루이스 부르주아와의 인터뷰(http://www.gqkorea.co.kr/2008/10/28/루이스-부르주아와의-인터뷰/)

● <신동아>,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http://shindonga.donga.com/3/all/13/109596/1)

 

 

인물과 용어 해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 소설가, 시인, 극작가다. 1920년대 그녀가 파리에서 운영하던 예술가 모임인 스타인 살롱Stein salon은 전후 시대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거트루드는 무명 예술가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들의 경제적 후견인이자 멘토로서 현대 예술이 꽃피는 데 기여한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거트루드는 자신도 작가였지만, 그보다도 다른 사람의 예술적 천재성을 알아보는 데 탁월했다. 피카소, 마티스, 세잔을 일찍이 발견해 후원하고, 20대의 기자이자 신참 작가였던 헤밍웨이에게 기자직을 그만두고 작품을 쓰도록 권했다. 거트루드와 피카소의 우정은 특히 유명하다.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

 

   게슈탈트는 형태, 모양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인간은 물리적 대상이나 현상을 부분의 합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이 게슈탈트 심리학의 기본 전제다. 1900년 초반 독일에서 발전한 사조로 마음을 구성 요소로 분석하려는 구성주의와 인간을 환경적 반응에 대한 수동족인 반응자로 보았던 행동주의를 반박했다. 인간이 지각한 내용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고, 분리된 자극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체계화하는 원리를 연구했으며, 인지심리학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유사성의 원리'는 비슷한 자극들을 함께 통합적으로 인식하려는 원리이며, '연속성의 원리'는 동일한 속성을 지녔으나 연결되지 않은 개별의 대상들이 여러 개 제시될 때 그것들을 연속적인 선으로 보는 경향을 말한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신화와 역사적 서사, 가공의 미를 재현하는 데 주력하던 전통적 화법에 반기를 들고, 실제 경험과 사실을 건조하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무정부주의로 치달을 정도로 과격했다. 파리 코뮌 때 방돔광장의 나폴레옹 전승 기념비를 쓰러트려 체포되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가 방돔광장의 기둥을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을 변상하라고 요구하자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본 대로 그리는 자유인이었다. 대표작으로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 <오르낭의 매장>, <돌깨는 작업>, <세상의 기원> 등이 있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떠돌며 살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나 죽기 2년 전에야 프랑스에 귀화했다.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898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전위예술에 참여하면서 피카소, 막스 자코브 등과 교류했다. 마리 로랑생과 사귀면서 그녀를 위해 지은 시 <미라보 다리>는 프랑스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상징주의의 황혼기이며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문학으로 구현했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같은 대시인들에게 배우는 한편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확립했다. 저서로는 『알코올』, 『칼리그람』, 『동물 우화집 혹은 오르페우스의 행렬』과 장편소설 『살해당한 시인』 등이 있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프랑스의 여성 화가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스텔 색조로 여자와 소녀, 꽃과 동물 등을 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파블로 피카소, 코코 샤넬, 알베르 카뮈 등 예술가와 교류하며 1910~1930년대 프랑스 파리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들은 동시대 미술로 보일 정도로 현대적이다.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

 

   영국의 미술평론가이자 작가, 큐레이터이다. <스펙테이터>와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미술평론가를 거쳐 <블룸버그 뉴스>의 수석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시, 그림이다-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 하우스』, 『사랑에 빠진 컨스터블』 등이 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비평가다. 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에게 영향을 미쳐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8세 때 처녀작으로 시집을 쓰고 파리의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해서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다. 1843년 그는 아직 출판을 하지 않은 문인이었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책과 예술 작품, 골동품을 사들였고 결국 파산했다. 1857년에 시집 『악의 꽃』을 출판햇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시 6편을 삭제하라는 명령과 벌금을 부과받았다.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음악 이론가, 교사, 저술가, 화가다.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태계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나치에 의해 퇴행적 음악으로 낙인찍혔고 오스트리아 합병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음악적 하모니와 전개에 있어 20세기 음악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후기 낭만파의 영향을 받은 곡을 썼으나 후기로 가면서 12음 기법을 확립한다. 대표 작품으로는 <달의 피에로>, <바르샤바의 생존자> 등이 있다.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화가이자 예술사가였으며, 스페인 화가들에 관한 전기를 담은 『미술관과 시각적 단계』를 저술했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다.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공동연구자였으나, 인간의 성격과 행동은 초기의 경험과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프로이트의 환원론적 입장에 반대했다. 개인은 통합된 성격 구조를 가졌으며 자유롭고 목적 지향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그의 '개인주의 심리학'에 의하면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긍정적인 변화와 영향력을 주고 싶어 하는 존재다.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형성하지 못하면 영등감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성취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긍정적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다는 그의 관점은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관심이 공동체의 삶, 예방, 대중의 건강 등에 집중했기 때문에 커뮤니티 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하며, 카네기 등 자기계발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

 

   프랑스의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창시자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말로든 글로든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든 사유의 현실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정신적 오토메티즘, 이성에 의한 아무런 통제 없이 미적, 도덕적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유의 옮겨 쓰기"라고 정의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목적을 '이전의 꿈과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절대적 현실, 초현실적 상태로 변형시키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 안에서 서로 상이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수많은 주장과 기술을 혼합시키면서, 이성과 의식적인 통제의 지배를 거부하려고 한 다양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뼈가 약한 유전병이 있었고, 어렸을 때 낙상으로 인해 불구가 된다. 파리에서 카미유 코로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몽마르트에 거주하며 서커스, 경마장, 카바레 등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드가와 고갱을 존경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아방가르드 화가들 중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에 구현했다.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켄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인쇄술에 몰두해 예술적 포스터 그림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양극성 우울증(bipolar disorder)

 

   양극성 장애는 조증과 우울증의 극단적인 기분 변화와 정상적인 기분을 보이는 기간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과적 장애다. 양극성 장애는 전문 용어이고, 일반적으로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증 상태에서는 지나치게 기분이 좋거나 예민해지고 흥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잠을 안 자도 피곤한 줄 모르면서 에너지가 넘치며,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거나 자신감이 넘쳐 무모한 일을 하거나 경제적으로 충동적인 행동을 보인다. 우울증은 조증의 반대 상태다. 의욕을 잃어 만사가 귀찮고 불면, 피로, 식욕과 체증의 변화를 보인다. 집중력이 저하되고 우유부단해진다. 무가치함 또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자살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장기적 인간관계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영아가 정상적인 정서 발달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생애 초기 몇 년간 주 보호자primary caregiver와 안정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착 이론은 심리학, 진화학, 동물학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접근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고아와 홈리스들이 사회적 관계 형성에 겪는 어려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인 존 볼비가 이를 연구했다. 볼비는 애착 이론의 토대가 되는 이론을 가져왔고 이후 메리 애인스워스나 제임스 로버트슨 등의 연구에 의해 발전했다. 발달심리학자인 메리 에인스워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안전 기지'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아기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 패턴을 설명했다. 안정 애착secure attachment, 불안정-회피insecure-avoidant 애착, 불안정-양가 또는 불안정-저항insecure-ambivalent, 혼돈 또는 비조직화disoganized 애착이 그것이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미술사학과 건축을 전공하고 옥스퍼드 캠브리지 하버드대학교 미술사 교수, 런던대학교 로그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39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저서들은 미술의 사회적 배경, 이론적 배경과 심리학적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서양미술사』는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 교양서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예술과 환상』은 회화와 철학, 심리학 등 회화적 재현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1902~1994)

 

   덴마크계 독일인이지만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아동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다. 예일대학교와 버클리대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은퇴했다. 빈의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안나 프로이트와 교류하며 정신분석학을 연구했고, 빈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학을 배우면서 아동기 발달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5단계의 심리 성적 발달 이론에서 나아가 전 생애를 통한 8단계 발달 이론을 주장했다. 인간에게서 무의식의 역할보다 의식적인 자아의 역할을 중시했다. 아동의 환경은 정체성 발달과 성장에 결정적이며 자아 정체성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에릭 에릭슨의 생의 발달주기

 

1. 기본적 믿음 vs. 불신(0~1세) : 신생아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시기이며 이 관계에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살핌을 받을 때 엄마에 대한 신뢰를 형성한다. 이는 세상에 대한 기본 신뢰의 바탕이 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세상에 대한 불신을 형성하게 된다.

2. 자율성 vs. 수치심(1~3세) : 아동이 혼자 걷고 뛸 수 있게 되면서 자율성이 생긴다. 안전한 가이드와 보호 속에서 아동이 독립적으로 자율성을 시험할 수 있도록 지지를 받으면 자신에 대한 자율성을 발달시키며, 그러지 못했을 경우 수치심이 발달한다.

3. 주도권 vs. 죄책감(3~6세) : 자율성을 발달시킨 아동은 본인의 행동과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발달시킨다. 놀이를 할 때 상황과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고 최선을 다하며 세상 속에서 본인의 역할을 알아간다.

4. 근면 vs. 열등감(6세~청소년기) : 학교 수업에 불편함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처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찾아내고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동이 이 단계에서 스스로 책임과 역할을 행할 때 그 행위가 충분한 관심과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무능하고 열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5. 정체성 vs. 역할 혼란(청소년기) : 신체적 변화와 이차 성징에 따라 지금까지 습득한 모든 지식, 능력, 경험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청소년기에는 외부 세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고 미래에 대해 갈등한다.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띠거나 외부의 영향에 취약해진다. 순조롭게 극복한다면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6. 친밀감 vs. 고립 : 이 단계에서 어른 직전의 청소년은 무언가를 희생해 직업적 · 감정적 · 정치적으로 정착해야 한다. 만약 두려움 때문에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결국 고립된다. 이 단계에서 본인이 내리는 결정과 도전을 통해 정감을 갖게 된다. 또한 이들의 직업, 우정, 가족 관계가 돈독해지는 단계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 위한 확실한 걸음을 떼는 셈이다.

7. 생산성 vs. 침체성 : 가정을 꾸리고 후세를 양육하려는 욕구가 생기는 시기이며, 이 과제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미래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걱정 등 개인적 성장 부진이 생길 수 있다.

8. 자아 통합 vs. 절망 : 삶의 마지막 단계는 평화롭고 고요하거나 불안감과 분주함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전 단계에서 어떻게 문제들을 다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 1908~1970)

 

   미국의 심리학자로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인간의 자아실현, 성장 한계 등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으며, '성장 동기', '성장 인지'를 성숙한 정신을 특징으로 본다. 그는 동기의 작용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의 총 다섯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매슬로의 욕구 단계). 하위의 욕구가 충족될 때 상위욕구가 발현된다. 만약 하위 4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결핍 욕구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상위 욕구에 대한 갈망을 지니며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상위 동기meta motivation를 가진 것으로 설명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 화가이자 극작가로, 빈 공예학교에서 수학하며 구스타프 클림트가 지도하는 빈 아틀리에에서 환상적인 화풍의 판화 · 그림책 · 플래카드 등을 제작했다. 1910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해 표현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심리 묘사에 탁월한 화풍은 대상의 운명을 예언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화필의 점술사'라 불렀다. 나치를 피해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침략주의에 대항해 전란의 유럽을 비판하는 경세적警世的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의 환상화 <바람의 신부>, 초상화 <포렐 박사상>, 풍경화 <몬타나>가 잇으며, 풍자적 작품인 <테레모피레>가 유명하다.

 

 

인상파(Impressionism)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회화의 혁신으로, 빛의 변화에 따른 색채 변화에 주목했다. 빛의 파장이 만들어내는 일곱 가지 색만으로 지연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색에 집중하며 야외 풍경을 빠르게 그러므로 붓질이 거칠고 형태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후기 인상파들은 자연광과 색채의 상호작용을 포착했던 인상파의 성과를 물려받으면서 형태와 구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잔은 특히 자연을 관찰하며 찾아낸 조형의 근본 요소인 원, 원뿔, 원기둥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

 

   사람들은 정보를 다룰 때 특정 정보를 더 강조해 처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인지적 편향이라 한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고(주의 편향attentional bias), 같은 대상을 보고도 해석을 달리하며(해석 편향interpretive bias), 동일한 경험 이후에 정보를 기억하는(기억 편향memory bias) 내용도 상이하다. 정보를 취할 때 긍정적인 측면을 선택적으로 얻거나 부정적인 측면에 더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나 기억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기억할 수도 있다. 다양한 정신질환이 발생하는 이면에는 부정적인 인식 편향의 기여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가 많다. 정신질환까지 발전하지는 않아도 부정적 편향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인식 편향을 가지고 있다.

 

1차 사고 과정과 2차 사고 과정

 

1. 1차 사고 과정 : 무의식적인 식욕, 성욕, 갈증, 불안이 발생할 때 그것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드id의 작용이다. 쾌락의 원리는 욕구를 즉각적으로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드의 작용을 받으며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흔히 아동기 행동의 대부분은 1차 사고 과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인 긴장 해소와 욕구 만족을 추구한다.

2. 2차 사고 과정 : 성장하면서 현실 원리로 작용하는 자아와 초자아가 발달과 더불어 2차 사고 과정이 발달한다. 즉각적 만족을 원하는 이드의 욕구와 현실의 제한 사이를 중재하며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사고 과정이다. 2차 사고 과정을 현실의 원리라고 한다.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wan-Baptiste-CamilleCorot, 1796~1875)

 

   18세기 말에 대두된 신고전주의(고대 그리스의 이성적 숭고함과 계몽주의적 사상의 재현을 지향)를 계승하면서도 인상주의 싹을 틔운 화가로, 자연의 세밀한 관찰과 사실적 묘사에 몰두했다. 3년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에 거처를 마련하고 숲에서 예술적 영향을 찾으며 바르비종파를 탄생시킨다. 그는 장 자크 루소의 범신론적 자연관에 심취했고, 이런 철학은 바르비종파의 예술적 지표가 되었다. 세련되고 정교한 인물화와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인상파인 베르트 모리조가 자연의 빛을 묘사하는 화풍을 발달시킨 것은 코로에게 배운 영향이 크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다.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강조하며 낭만주의를 탄생시켰다. 루소의 사상은 여러 분야의 예술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당시 생활 및 교육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18세기 계몽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미국의 추상 화가로, 마룻바닥에 펼친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뿌리는 액션 페인팅을 선보여 미국의 자유와 풍요로운 정신을 유럽에 널리 알린 화가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고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활동했다.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칼 융의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초기 작품에선 꿈과 원시적 무의식을 표현하는 그림을 다수 그렸다.

 

조현병(調絃病, 독일어 : Schizophrenie, 영어 : Schizophrenia)

 

   비정상적인 사고(망상)와 지각이상(환각)을 특징적으로 보이는 정신질환이다. 사회적 능력과 감정 반응의 저하 등이 동반되므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이나 학업 수행을 할 수 없을 때 진단된다. 정신분열병精神分裂病으로도 불렸으나 2010년부터 정신건강의학회에서 조현병으로 병명을 변경했다.

 

주의력결핍 과잉활동장애(ADHD :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가 산만하고 지나치게 활동적이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행동이 학교와 가정, 소속된 단체에서 일관적으로 관찰된다. 이런 행동으로 인한 학업적 · 사회적 곤란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에 진단된다. 약물치료에 빠르게 반응하며 조기에 발견하면 성인기까지 증상을 막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위적인 문학 · 예술 운동이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다다이즘과 미래주의 등 다른 전위운동에 비해 광범위하게 확산되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것,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며, 추상미술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 사조의 하나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큰 특징은 꿈을 그린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꿈의 공간에 논리적으로 무관한 대상들을 암시적으로 병치해 꿈의 감성적 특징을 전달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

 

   폴 세잔이 그를 정신적 아버지로 추종했을 만큼 성품과 실력이 뛰어난 화가다. 12세에 프랑스 기숙학교 세이버리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회화의 기초를 배웠다. 25세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쿠르베, 밀레, 코로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물감을 매우 두껍게 겹쳐 발랐으며, 화사한 느낌의 색채가 생생한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칸딘스키의 색채이론

 

   칸딘스키는 색채를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연구했다. 음악이 음의 높낮이를 통해 감동을 전달하듯이 회화 역시 구체적인 대상이 없어도 색채의 조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듯이 색채도 저마다의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노란색은 맹목적인 착란이나 광기 어린 상태를, 푸른색은 순수에 대한 동경으로 보았다. 색채이론을 응용한 미술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빛을 통해 경험하는 색을 다양하고 균형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큐비즘(cubism)

 

   화면을 파편화해서 일종의 전개도 형태로 만들어낸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중심의 입체주의를 말한다. 큐비즘이라는 단어는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눠 여러 가지 원색을  칠하고 자연을 재구성한다. 조르주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어느 비평가가 기이한 입방체bizarreries cubique이라고 풍자한 데서 비롯되었다. 실험적인 공간 구성과 대상의 표현 양식에서 시작된 브라크의 실험은 점차 입체적인 형태, 원통형, 입방형, 원추형으로 형태를 표현해나가는 것으로 발전했다. 자신들이 조형의 기본 요소라고 믿었던 입방체만으로 자연을 재현하려는 입체주의 작품들은 다양한 관점으로 사물을 해체했다가 재조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종합적 입체주의로 발전해 파비에 콜레 등의 기법이 생겼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 양식으로 대상의 사실적 측면보다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화가의 주관적 감정을 비교적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색으로 표현한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대표적인 화가로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들 수 있다.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독일 태생으로 역동적 모사와 구도 강한 색감,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을 선보인 화가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화를 주로 그렸으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그의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전역에 다수의 공방을 운영했으며, 특히 안트베르펜의 화실은 유럽 전역의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에게 인기 있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 받은 외교관이기도 하다. 루브르박물관에 루이 13세의 어머니이자 앙리 4세의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일생을 신화처럼 미화해 그린 그림 24점을 전시한 방이 따로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철학자 · 시인 · · 수필가로, 자신을 '신비주의자, 초절주의자, 자연철학자'로 소개하는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단순하고 금욕적인 삶에 대한 선호, 사회와 정부에 대한 개인의 저항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형과 함께 사립학교를 열어 잠시 교사 생활을 했다. 그 후 목공, 석공, 조경, 토지 측량, 강연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 · 독서 · 글쓰기로 보냈다. 문필가이자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가정교사를 하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45년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지어 1847년 9월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숲속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리는 『월든』을 저술했다.

 

환원주의(reductionism)

 

환원주의는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해 각 부분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패러다임이다. 다시 말해 부분부분의 합이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되고, 부분은 전체에서 분리 가능하다는 관점이 환원주의의 골격이다. 현대 물리학은 거의 이런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특정 물체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원자이며, 원자의 합은 특정 물체가 된다. 물은 H2O로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비교해보면, 서양의학에서는 환자의 아픈 부위에 국한해 환부를 치료하지만 한의학에서는 환자가 아픈 원인을 몸 전체에서 찾는다.

 

후기 인상주의(post-expressionism)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엄격한 형태의 부활, 원시적인 소재와 강렬한 색채의 도입 등의 특징을 가지며 20세기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형태뿐만 아니라 색채와 사상에서도 19세기 예술과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등 20세기 미술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문헌에 따라서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배치해 인상파 화가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는 후기 인상파와 같은 시기(1880년대)의 인상파 기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을 모색했다는 공통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으로 조르주 쇠라도 신인상파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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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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