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 인천
이희환 지음
2019, 21세기북스
배곧도서관
SM023816
981.15502
이97ㅇ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02
인천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문을 연 용기와
모험의 도시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비로소 한국은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인천은 이 새롭고 두려운 역사가
펼쳐지는 생생한 현장이자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인천 도슨트 이희환
문학산, 소래포구, 인천항, 연안부두,
차이나타운, 신포시장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35개 공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인문학적 질문들
이희환
1966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하여 줄곧 인천에서 성장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시민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해왔다. 2019년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제물포구락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인천문화를 찾아서』, 『김동석과 해방기의 문학』,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 『문학으로 인천을 읽다』, 『만인의 섬 굴업도』 등이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인천 도슨트’ 이희환
인천의 짧은 역사 ㆍ 근대를 향한 거대한 실험실 인천
01 월미도 -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함께한 섬
02 문학산 - 인천 역사 발상지의 기구한 운명
03 소래포구 - 협궤열차도 추억도 멈춰버린 포구
04 대불호텔 -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05 인천항 - 백범 김구 선생이 노역했던 항구
06 연안부두 - 러일전쟁의 서막, 제물포해전의 기억
07 송도유원지 - 일제 말부터 각광받던 피서지
08 부평 문화의 거리와 지하상가 - 상인들의 지혜가 만든 핫플레이스
09 차이나타운 - 국민 음식 짜장면이 탄생한 곳
10 화도진 - 최초 조약 체결지로 오해된 쇄국정책의 보루
11 구월동 - 돌고 도는 핫플레이스의 역사
12 북성포구 - 배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
13 동일방직공장 -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14 시립율목도서관 - 일본인 별장이 학생들의 도서관으로
15 인현동 - 청춘의 만남의 장소, 동인천역과 삼치골목
16 내리교회 - 감리교회 선교활동의 거점
17 성공회성당 - 인술과 교육을 펼친 병원과 성당
18 신포시장 - 개항기 시장에서 쫄면의 발상지로
19 경인면옥 -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인천냉면
20 계양산 - 의적 임꺽정을 키운 깊은 산
21 부평캠프마켓 1 - 기억해야 할 일제 수탈의 현장
22 부평캠프마켓 2 - 반환을 앞둔 미군부대의 유산
23 인천가톨릭회관 - 80년대 인천 민주화운동의 근거지
24 인하대학교 -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
25 한국이민사박물관 - 한국 이민 역사의 파노라마
26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 똥고개라 불리던 달동네 서민들의 삶
27 웃터골운동장 - 한일전 야구가 펼쳐진 청년운동의 요람
28 주안염전 - ‘인천짠물’들이 소금을 만들던 곳
29 맘모스체육관 - 사라진 ‘동양 최대’의 꿈
30 답동성당 - 탄압을 딛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31 싸리재 - 카페로 부활하는 역사의 거리
32 자유공원 - 최초 서구식 공원의 세 가지 이름
33 인천그라운동장 - 고교 야구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34 소월미도 -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35 배다리역사문화마을 - 도깨비도 홀린 헌책방마을
36 애관극장 -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대한민국 도슨트 ㆍ 인천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인천 연표
참고 자료
맥아더 장군 동상, 월미도, 문학산, 소래포구, 대불호텔, 대불호텔전시관, 인천항, 연안부두,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 송도유원지, 능허대, 청량산, 부평 문화의 거리, 평리단길, 부평지하상가, 차이나타운(청관거리),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화도진, 벽화거리, 화도진축제(5월 22일 전후), 연희진, 구월동, 구월동 로데오거리, 인천문화예술회관, 북성포구, 시립율목도서관, 인현동, 동인천역, 삼치골목, 인하의 집,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인현동 화재참사 위령비, 성공회성당, 신포시장(신포우리만두, 청실홍살, 신포과자점, 신신옥, 의흥덕양화점, 귀티패션, 성광방앗간), 경인식당, 평양관, 경인관, 신경관, 사정옥, 풍성관, 인천관, 백령도냉면, 세숫대야냉면, 부평막국수, 백령면옥, 변가네 옹진냉면, 사곶냉면, 계양산, 계양산성, 부평캠프마켓, 부평조병창, 인천가톨릭회관, 인천6월항쟁기념비, 인천시민회관쉼터공원, 인하대학교, 인하대 후문가,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장근대건축박물관, 대불호텔전시관, 인천화교역사관, 부평역사박물관, 소래역사관, 계양산성박물관,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제물포고등학교, 맘모스체육관, 답동성당, 싸리재, 애관극장, 배다리마을, 카페 싸리재, 카페 팟알, 자유공원, 인천그라운동장, 인천공설운동장, 숭의운동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우각로 문화마을, 소월미도, 소월미도 등대, 인천해상교통관제센터, 배다리역사문화마을, 배다리시장,
맥아더 장군 동상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했던 맥아더 장군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1957년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01 월미도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함께한 섬
1918년에 제작된 인천 지도(월미도의 옛모습) 현재 매립돼 육계도가 되었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천 내륙과 떨어져 있는 월미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사진엽서에 담긴 월미도 조탕의 모습(위)과 1920년대 월미도 유원지의 모습(아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무단통치를 통해 식민지 체제가 안정되자 군사적 요츙지였던 월미도를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유흥관광지로 탈바꿈 시켰다. 식민지 경제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작된 공진회(共進會)의 주도로 월미도에 첨단 관광 상품인 수족관이 개설되었으며, 연이어 운동장, 야외극장, 조탕(潮湯: 바닷물을 데워 만든 목욕탕), 호텔, 요정(料亭) 등의 유흥 · 오락 시설이 들어섰다.
02 문학산
인천 역사 발상지의 기구한 운명
문학산에 남아 있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 문학산 정상은 1960~70년대 초반까지 미군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한국군 미사일 부대가 문학산 정상에 주둔하였다.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던 문학산 정상이 인천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15년의 일이다.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 전경 문학산은 인천의 발상지이자, 1,000년 넘는 세월동안 인천을 품어온 인천의 대표적인 산이다.
03 소래포구
협궤열차도 추억도 멈춰버린 포구
협궤열차를 아는가? (······)
그때의 그 협궤열차만큼 내 인생에 환상으로 달린 열차는 없었다. 가을에 그 작고 낡은 열차는 어차피 노을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라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
- 이런 곳에서 시를 쓰며 외롭게 외롭게 살았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황량한 선경(仙境)이었다. 나는 이제껏 세파에 시달려온 지난날을 생각했다. (······)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 윤후명 「협궤열차에 관한 한 보고서」 (1990) 중에서*
* 조남현외 엮음, 『한국문학선집 : 1900~2000』제2권,문학과지성사,2007.
수인선 협궤열차가 운행되던 모습 1937년 개통된 수인선 협궤열차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 그리고 경기도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왜가리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毒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 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
태업한 꿈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年代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는
- 이창기 「수인선 철도」 (1989) 중에서**
** 이창기,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문학과지성사, 1989.
소래포구 어시장 앞에 정박한 어선들 매년 7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관광지가 된 소래포구에서 몇 척의 어선만이 포구의 예전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04 대불호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대불호텔 옛 모습 대불호텔은 2층짜리 목조건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1888년 신축된 대불호텔의 모습으로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된 대불호텔전시관의 모습 전체 전시관은 전임 중구청장이 기증한 대불호텔 터와 중구가 매입한 최초의 2층 목조 건물 터까지 이어진 구조이며 정식 명칭은 중구생활사전시관이다. 대불호텔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불호텔전시관(1관)과 1960~70년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생활사전시관(2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05 인천항
백범 김구 선생이 노역했던 항구
1910년대 인천항 갑문 공사 장면(위)과 내항 1부두의 현재 모습(아래) 1910년대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였던 인천항 갑문 공사에는 많은 노동자와 함께 인천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까지 동원되었다. 일본인들의 감독 아래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이 공사에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도 동원되었다.
06 연안부두
러일전쟁의 사막, 제물포해전의 기억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김트리오, '연안부두'(1979)
연안부두 선착장 연안부두에는 연평도, 백령도 등 서해안 일대 섬 지역을 향하는 여객선과 중국으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할 수 있는 국제여객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해양광장과 종합어시장, 유람선 선착장 등 즐길 거리도 많다.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 연안부두에 있는 이 추모비는 러일전쟁의 첫 전투였던 제물포해전에서 희생된 바랴그호와 코레예츠호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러일전쟁 100주년이었던 2004년에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설치되었다.
07 송도유원지
일제 말부터 각광받던 피서지
능허대 일대를 송도라고 개칭한 1930년대 관광엽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일본의 마쓰시마와 유사한 한국의 해안 절경에 자기 나라의 지명을 이식했다. 부산의 송도해수욕장도 그렇게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처음 거류지를 마련한 뒤 부산 서구 암남반도에 있는 거북섬 인근 해안에 소나무를 식재하고 이 일대를 송도해수욕장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포항의 송도해수욕장을 개발한 것도 일본이었다. 인천의 송도도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았기에 1920년대 중반부터 신문지상에 송도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송도유원지의 최근 모습 인천시의 송도유원지 재개발 사업이 무산되면서 송도유원지는 2011년 폐장 후 지금까지 중고차 야적장으로 방치되고 있다.
08 부평 문화의 거리와 지하상가
상인들의 지혜가 만든 핫플레이스
1998년 준공식 기념사진(위)과 새롭게 단장된 부평 문화의 거리 입구(아래) 부평 문화의 거리는 1996년 전국 최초로 상인들이 주도하여 조성한 문화의 거리이다. 1998년 새롭게 단장되기 전까지 이곳은 노점상과 낡은 건물들로 상권이 쇠락해 있었다.
부평지하상가의 내부(위)와 20A번째 출입구(아래)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평지하상가에는 무려 31개의 출입구가 있다.
09 차이나타운
국민 음식 짜장면이 탄생한 곳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짜장면박물관 1930년대 공화춘 모습부터 196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짜장면의 탄생과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의 첫 번째 패루 중화가 패루는 중국식 전통 대문으로 전 세계 차이나타운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총 4개의 패루가 있다. 중화가는 인천역 건너편에 위치한 첫 번째 패루로 차이나타운의 시작을 알리는 문이다. 이 패루는 2000년에 목재로 세워졌다가 태풍에 쓰러진 후 석재로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밖에도 인화문(동쪽), 선린문(북쪽), 한중문(서쪽)이 있다. 선린문 근처에는 벽화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10 화도진
최초 조약 체결지로 오해된 쇄국정책의 보루
복원된 화도진 입구(위)와 화도진 내 조미수호통상조약 재현 모습(아래)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화도진 공원이 조성되었다. 화도진에서 체결되지 않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화도진 자체를 기념할 필요가 있다.
화도진도 1 화도진도는 1879년에 제작된 군사지도로 두 장의 채색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은 인천부의 전체적인 지역 정보와 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당시의 산천 이름과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연안의 섬 이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1 구월동
돌고 도는 핫플레이스의 역사
구월동 로데오 거리의 화려한 변신 현재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구월동 로데오거리는 1970년대까지 젖소 목장이 있던 허허벌판이었다. 1985년 인천직할시청이 이전하면서 구월동은 인천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전경 1994년 개관 이후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2019년 개관 25년을 맞이하여 노후화된 시설을 개선하고 야외광장을 새롭게 단장했다.
12 북성포구
배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
북성포구 입구 대한제분주식회사의 사유지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빛바랜 북성포구 표지판이 애처롭게 서 있다.
북성포구(위)와 선상 파시(아래) 북성포구는 가장 인천다운 바다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작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포구와 잡아온 생선을 배 위에서 바로 선상 파시는 북성포구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북성포구는 고깃배가 제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닿는 야매(野昧)한 공간이다. 도시의 뒷간 같은 이 후미진 곳을 애써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예 이곳의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있다. 외지인들과 인천기행 할 적마다 맨 마지막 코스는 거의 이곳이다. 대한제분 공장 옆길이 아닌 만석동 고가도로 아래쪽 길을 일부러 택해 포구로 향한다. 공장 담이 만든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횟집을 거쳐, 드디어 포구로 나오면 백이면 백 모두 감탄사를 내지른다. "와우, 판타스틱!" 신포동, 자유공원, 차이나타운을 지나오면서도 나오지 않았던 탄성이다. 여기에 노을까지 깔리면 그들은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진다. (······) 사람이나 도시나 너무 예쁘기만 하면 질린다. 송도, 청라로도 인천의 화장술은 충분하다. 묵은 내 나고 못생긴 포구 하나 정도는 남겨 둬도 좋지 않을까.
- 유동현 「북성포구를 부탁해」*
* <인천일보>, 2016년 11월 25일.
13 동일방직공장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쌀을 고르고 있는 정미소 여공들 선미 직공들은 휴일도 없이 1일 평균 10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했으나 평균 임금은 고작 35전에 불과했다. 당시 냉면 한 그릇이 10전 정도였다고 하니 매우 헐한 임금이었다. 여기에 기계의 도입으로 실직에 대한 공포감까지 겹치면서 여직공들의 생활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당시 신문들은 '눈물과 피를 긁어먹는 정미소'라는 표현으로 정미소를 고발하기도 했다.
조선의 심장지대인 인천의 이 축항은 전 조선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그 규모가 크고 또 볼 만한 것이었다. (······)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쓸어 나온다. 잠깐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어 보이는 노동자들이 축항을 둘러싸고 벌떼같이 와, 와, 하며 떠들었다. 그들은 지게꾼이 절반이나 넘고 그 외에 손구루마를 끄는 사람, 창고로 쌀가마니를 메고 뛰어가는 사람, 몇 명씩 짝을 지어 목도로 짐을 나르는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한뭉치가 되어 서로 비비며 돌아가고 있다.
- 강경애(소설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장편소설 『인간문제(人間問題)』
동일방직공장의 현재 모습 1934년 일제가 세운 이 역사적인 공간은 지난 2017년 8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풍경은 늘어선 공장 건물들의 지붕이다. 이 터는 민간 소유로, 인천시가 매입하지 않는 한 언제든 개발을 위해 매각될 수 있는 상황이다.
14 시립율목도서관
일본인 별장이 학생들의 도서관으로
시립율목도서관 별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보수를 거쳐 현재 율목도서관의 어린이 자료실로 사용되고 있다.
15 인현동
청춘의 만남의 장소, 동인천역과 삼치골목
인하의 집 전경(위)과 삼치 메뉴(아래) 인하의 집은 1972년부터 지금까지 전동 삼치골목을 지키고 있는 원조 삼치구이 가게다. 가난한 일꾼들을 위해 버려지던 삼치를 튀겨주던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위)과 인현동 화재참사 위령비(아래)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은 인현동 화재참사로 희생된 청소년들의 죽음을 위무하고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생활을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뒤편에는 화재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6 내리교회
감리교회 선교활동의 거점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
내리교회의 과거(위)와 현재(아래) 위쪽 사진은 1946년 김구 선생이 내리교회에서 강연을 한 후 촬영한 기념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들 중앙에 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내리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1985년에 새로 지어진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17 성공회성당
인술과 교육을 펼친 병원과 성당
성공회성당의 외관 1890년고요한 신부에 의해 건립된 성공회성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6년 복원되었다. 중세풍의 석조 건물에 한국적인 목구조 처마 양식이 가미되어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고요한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흉상 조선의 문화를 존중하며 선교활동과 의술활동을 전개했던 두 선교사의 흉상을 성당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18 신포시장
개항기 시장에서 쫄면의 발상지로
원조 쫄면 신포우리만두에서 처음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쫄면은 질기게 뽑힌 냉면의 면에 고추장 양념을 더해서 만든 것이었다.
19세기 말 신포동의 푸성귀전을 재현해 놓은 조형물 신포시장의 시초였던 19세기 말 중국인들의 푸성귀전의 모습을 재현하여 2005년에 세운 조형물이다. 사진의 중앙에 채소를 파는 중국 상인이 있고, 양쪽에 손님으로 온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이 보인다. 당시 중국 푸성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에게 인기였다. 이곳에서는 양파, 양배추, 당근, 토마토, 피망, 시금치, 우엉, 부추, 완두콩 등 당시 조선에서는 생소하던 채소들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장 전경(위)과 입구(아래) 19세기 말 중국인들의 푸성귀전에서 시작돼 현재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시장으로 변모한 신포시장에서는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19 경인면옥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인천냉면
경인식당 전경(위)과 냉면(아래) 인천의 대표적인 평양냉면집인 경인면옥은 현재 경인식당으로 상호를 바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백령도냉면 백령도냉면의 비법은 가게마다 다르지만, 사골을 우려낸 뽀얀 육수를 국물로 사용한다는 특징은 같다.
세숫대야냉면 서민들을 위해 개발된 화평동 냉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냉면 사리를 사용하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세숫대야만한 그릇에 담아 판다고 해서 세숫대야냉면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1949년 11월에 한 미군이 촬영한 인천 시가의 모습 신포동 입구에 자리 잡은 경인면옥은 가업을 이어 3대째 운영되고 있다. 1세대 경인면옥 주인장은 1944년 서울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1946년경 인천으로 내려와 경인식당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70여 년이 넘도록 이 집을 찾는 단골 중에서는 6 · 25전쟁 때 피난 내려와 인천에 터를 잡고 살아온 황해도와 평안도 실향민들도 많다고 한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 끝에 작게 보이는 하얀 간판이 경인면옥이다.
20 계양산
의적 임꺽정을 키운 깊은 산
"너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받을 일이 있다."고 점잖게 말하였다.
"검술하는 사람은 죄 없는 목숨을 해치는 법이 없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탐관오리 같은 것도 죄 없는 사람일까요?"
"죄 없는 탐관오리가 어디 있을꼬?"
"그럼, 할 수 있지요."
"여색을 탐하여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악한 재물을 빼앗아 착한 사람을 주는 외에는 재물 까닭으로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답이 있은 뒤에 늙은이는 꺽정이의 맹세를 받고 제자로 정할 것을 하락하였다.
- 홍명희, 『임꺽정』 2권 - 피장편, 사계절, 1995.
1928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소설 『임꺽정』 첫 회 『임꺽정』은 1928년부터 무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와 잡지 <조광> 등에 장기 연재된 미완의 대하역사소설이다. 항일민족운동에 나섰던 홍명희의 투옥 등 사정으로 네차례나 연재가 중단되었다.
계양산성 계양산에는 삼국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활발히 사용되다 점차 잊혀졌던 것이 2000년대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21 부평캠프마켓 1
기억해야 할 일제 수탈의 현장
1948년 부평조병창 건물 해방 후 미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전쟁을 위한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지던 부평조병창 건물 앞으로 트럭과 무기들이 방치되어 있다.
노무자수첩이니 하여 현장 징용 이전부터 직장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기회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한 오까 노무과장, 겨울에는 연료 없는 직장에 동사할 것 같고 여름에는 통풍장치 없는 노역장에서 질식할 것 같고 화상, 타박상 등 공장 일에 불구하고 휴식을 주지 않던 하야시 총무과장, 지독한 기아와 쇠약임에도 공휴일 출근 명령을 하야 반공설비 구축, 공장수리, 공장하천 도로 개수 등을 시키고, 정상임금을 지불할 성질의 것을 근로봉사란 편리한 협잡으로 처리하던 나까야마 연성과장, 어쩌다 나오는 쌀, 피륙, 신발, 약품, 술 등의 노무자 특배품을 딴 구멍으로 돌리던 쯔다 후생계장, 조선사람 종업원을 전부 도적놈으로 보고 게으름뱅이로 인정하고 경찰서 끄나풀로 앉아서 마치 사법형사의 권력을 부리던 후꾸다 수위장······.
- 이규원, 「해방공장」, 『우리문학』 10, 문장사, 1948.
22 부평캠프마켓 2
반환을 앞둔 미군부대의 유산
넓은 부평평야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한 당시 '인천 조병창'은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미군에 점령돼 일반의 출입은 '애스컴'이란 영자(英字) 문패로 금지돼 오는 터이므로 그 구내에 무엇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
- <대중일보>, 1946년 1월 25일.
미군에 징집된 금단의 땅 일제의 조병창 부지에 자리한 캠프마켓은 해방과 동시에 미군기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부대 대부분이 평택으로 이전하고 부대 공급용 빵공장만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다.
1948년 에스컴시티 전경 일제 수탈의 현장이었던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부대에 귀속되어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23 인천가톨릭회관
80년대 인천 민주화운동의 근거지
인천가톨릭회관 철거되기 직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인천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현장인 이곳은 안타깝게도 관광자원 개발을 이유로 2018년 철거되었다.
인천6월항쟁기념비(위)와 인천시민회관쉼터공원(아래) 인천6월항쟁의 중요한 근거지였던 인천가톨릭회관과 인천시민회관은 모두 철거되고 사라진 상태이다. 인천 민주화운동의 기억은 답동성당 앞에 있는 인천6월항쟁기념비와 시민회관 터의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24 인하대학교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이민자들의 모습 1900년대 초반 하와이로 이민을 간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하와이 이민 1세대 이원수 씨 1915년 당시 농장에서 작업 중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인하대학교의 현재 모습 1954년 인하공업대학교로 개교하였던 인하대학교는 1971년 종합대학 인가를 받은 후 인천의 대표 사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5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 역사의 파노라마
한국이민사박물관 외관(위)과 전시실(아래)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해외 한인사회의 형성과 성장에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한국 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로 떠나던 이민자들이 탔던 갤릭호의 외관을 그대로 살린 전시실이 인상적이다.
하와이 사진 신부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찾아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정착했던 여성들은 사진 한 장으로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다.
26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똥고개라 불리던 달동네 서민들의 삶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전경(위)과 전시실 모습(아래) 수도국산 달동네는 1990년대 도시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그 자리에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섰다. 2005년 개관한 달동네박물관에는 1960~70년대 서민들의 생활상이 재현되어 있다.
27 웃터골운동장
한일전 야구가 펼쳐진 청년운동의 요람
전인천 춘가야구대회의 1, 2회전은 이미 보도한 바거니와 제3회전과 결승전은 예정대로 오는 21일 상오 9시부터 시작된 바 정각 전부터 앞을 다투어 모여든 관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 하오 4시 반부터 한용군의 선공으로 결승전이 시작되니 장내를 뒤집는 듯한 박수 소리와 한용군의 여용여호한 용기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듯한 기세로 대전할 때 일본인 루심의 왕왕 부정당한 심판에 일반 관중은 분개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자주 일어 (······) 감정이 격앙되었던 일반 관중은 장내로 모여들어 심판의 불공평을 책망하며 사태가 심히 험악하였으므로 이 급보를 접한 경관대가 현장에 들어와서 문제의 해결은 경찰서로 가서 하자 할 때에 약송 체육협회장은 심판진과 체육협회 간부와 양 군의 주장을 자기 집으로 청하여 심사한즉 사실은 야구 규정에 의하여 심판의 실수이므로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오후 10시 반에 이르러 결승전은 무조건으로 무기 중지되었으며, 협의하는 동안에는 경관대의 제지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관중은 위립하여 사태가 심히 험악하였으나 밤이 깊은 후에야 무사히 헤어져 돌아갔다더라.
- 「전 인천야구 결승 중지」*
* <동아일보>, 1922년 5월 23일.
인천으로부터 경성시내 각 학교에 통학하고 있는 조선학생 수십여 명의 발기로써 한용단(漢勇團)이라 하는 일종의 구락부를 조직해 가지고 인천에 있는 일반 청년들의 친목과 지식의 교환, 운동의 장려를 도모한다 하는데, 그 단은 작년 봄에 세워 차츰차츰 확장을 해나가던 바 그 당시에 만세소요로 인하여 중요한 임원들은 모두 철창 아래에서 신음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몇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내려오다가 지금은 그 단의 회원은 칠팔십 명에 달하였으며, 운동은 야구, 정구, 축구 등이 있고 문예부에는 도서 같은 것도 갖추어 놓고 단원이 수의로 열람케 한다 하는데, 인천 유지들은 청년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각각 기부들도 많이 한다고 한다.
- 「인천에 한용단, 일반 청년의 화목과 운동의 장려도모」 **
** <매일신보>, 1920년 6월 15일.
1921년의 한용단 야구팀 한용단은 일제강점기 인천의 대표적인 청년운동단체였다. 야구팀뿐 아니라 정구팀과 축구팀도 있었다고 한다.
웃터골운동장 터에 자리 잡은 제물포고등학교 1937년 일본인만 입학할 수 있는 인천중학교가 세워지면서 인천 청년운동의 요람이었던 웃터골운동장은 사라졌다. 현재 웃터골운동장 터에는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28 주안염전
'인천짠물'들이 소금을 만들던 곳
'인천 짠물에 대한 해명' 전시 포스터 201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특별전시로 기획되었다. 이 주제로 전시가 기획되었다. 이 주제로 전시가 기획될 만큼 '인천짠물'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포스터의 소재로 사용된 당구와 소금포대 등이 재미있다.
일제강점기의 주안염전 지대 1929년에 작성된 인천관광지도. 지도의 우측에 표시된 '주안염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안염전 터 표지석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은 낡은 건물 앞 철제 울타리에 갇혀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9 맘모스체육관
사라진 '동양 최대'의 꿈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은 선인학원 백인엽(白仁燁) 이사장의 필생의 꿈이 담긴 것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획득의 요람으로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동양 최대 다목적 '스포츠전당' 인천체전 매머드 실내종합경기장」***
*** <경향신문>, 1973년 6월 14일.
1973년 <경향신문>에 실린 맘모스체육관 건립 당시의 모습(위)과 2013년 <연합뉴스>에 실린 맘모스체육관 철거 장면(아래) 1973년 동양 최대 규모로 건설된 맘모스체육관은 40년 만에 전격 철거되었다. 맘모스체육관의 철거는 인천도시공사가 도화도시개발지구 개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폭파공법으로 진행했다. 체육관 내부 기둥에 196개의 폭약 485kg을 설치해 2013년 8월 3일 토요일 저녁 7시경 30초 동안 순식간에 진행했다. 1층부터 13층까지 차례로 폭약이 폭파되면서 완전히 주저앉은 맘모스체육관은 건립된 지 약 40년 만에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30 답동성당
탄압을 딛고 사회적 약자와 함께
답동성당의 현재 모습 1897년에 지어진 답동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아름다움과 종교적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제물포 고아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답동성당은 1890년대부터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복지에 힘썼다. 근대식 벽돌 기둥을 배경으로 식사 중인 당시 원생들과 수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1 싸리재
카페로 부활하는 역사의 거리
옛 한옥을 고쳐 만든 카페 싸리재 카페 싸리재는 미음자 모양의 2층 짜리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다.
카페 싸리재의 전경(위)과 천장(아래) 카페 싸리재는 오래된 일식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한옥 수선을 위해 2층 천장을 뜯어내자 1933년에 건축되었음을 알려주는 상량문이 드러났다.
카페 팟알.
32 자유공원
최초 서구식 공원의 세 가지 이름
각국공원 꼭대기에 자리 잡았던 세창양행 사택의 모습 세창양행은 독일산 면도칼, 바늘, 염료, 화약 등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조선의 홍삼, 금 등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독일 회사였다. 이 사택은 인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각국공원 꼭대기에 위치하여 전망 좋은 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유럽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둥에 조선의 기와지붕이 올라간 구조로 동서양의 건축기술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물은 1920년대에는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33 인천그라운동장
고교 야구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지금은 철거된 인천공설운동장 인천 도원동에 있던 공설운동장은 1934년 준공되어 2008년에 철거될 때까지 74년 동안 인천을 지켰다. 화면 좌측에 보이는 운동장이 삼미슈퍼스타즈가 활약하던 야구장이고, 우측이 축구장, 육상경기장 등으로 쓰였던 메인스타디움이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위)과 숭의동 109번지 마을 풍경(아래) 인천공설운동장과 숭의야구장이 있던 자리에는 2012년에 건립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자리하고 있다. 근처 숭의동 109번지 일대는 주민 주도로 형성된 우각로 문화마을이 있다.
34 소월미도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잘 있거라, 인천아. 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
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올리겠지. 월미도야.
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
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 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 1951년 결성된 '후쿠오카 인천회'에서 출간
소화 20년 8월 15일의 중대한 방송으로 일본인들은 느닷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바뀐 것으로 오로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였다.
- 『인천인양지』
『인천인양지』에 그려진 소월미도 등대 고타니 마스지로는 1945년 8월 27일 일본인들이 소월미도 등대를 폭파하고 떠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인천해상교통관제센터 1945년 8월에 일본인들에 의해 폭파된 소월미도 등대 자리에는 현재 해상교통관제센터가 있다.
35 배다리역사문화마을
도깨비도 홀린 헌책방마을
1948년 12월 배다리시장의 모습 배다리시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온갖 문물이 넘쳐나던 매우 크고 번창한 시장이었다. 2층짜리 목조 건물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점들과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상인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때 20개가 넘는 헌책방이 있던 헌책방거리에는 현재 6개 정도의 헌책방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6 애관극장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인천 조선인 측 극장으로는 용리(龍里)에 있었던 바 건축한 지 오랠 뿐 아니라 그 경영자 정치국(丁致國) 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특히 수리도 아니 하야 그나마 창파벽퇴(窓破壁頹)하야 간혹 연극단(演劇團)이 인천에 들어올지라도 일본인 경영인 극장을 빌어 쓰는 상황이었는데 인천 유지(有志) 김윤복(金允福) 씨는 조선인측으로 상당(相當)한 극장 하나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어 수만의 금전을 비(費)하야 그간 신축에 착수하였는 바 금번 그 신축이 낙성(落成)하였음으로 지난 10일에 신축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금후 주선인측 공공적 모임에는 언제던지 공개한다더라.
- 「인천 애관 낙성식」****
**** <동아일보>, 1927년 10월 13일.
1948년 애관극장(위)과 현재의 애관극장(아래) 1930년대 이후 애관극장은 활동사진관으로 유명했다. 애관극장은 국내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해방 이후 오늘나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단했던 시절, 인천부민들의 심금을 올리던 애관극장이 있었기에 인천에서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영화배우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명배우 서일성 등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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