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2019, 미래
대야도서관
SB139922
349.11013
이64ㅂ
거짓말하는 개인, 거짓말하는 사회, 거짓말하는 구가
그 거대한 문화 진영에 돌진하는
바른 역사를 위한 진실된 기록!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 이를 그냥 안고선 이 나라의 선진화는 불가능합니다. 선진화는 커녕 후진화할 것입니다. 거짓말의 문화, 정치, 학문, 재판은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_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승만학당 교장
좌익은 우리 역사를 반란과 투쟁으로 덧칠하기 바쁘고, 우익도 유라시아 대륙을 말 달리는 판타지로 정신이 없다. 종족주의는 현대 한국인들의 신경병적 증후군이다.
_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
이영훈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직하였다.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Ⅰ · Ⅱ』(일조각, 2016) 등의 저서가 있다.
김낙년
동경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이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장기통계를 정비하는 작업과 한국의 경제성장이나 소득과 부의 불평등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장기통계』Ⅰ · Ⅱ(해남, 2018), 『일제하 한국경제』(해남, 2003), 『日本帝囯主義下の朝鮮経済』(東京大学出版会, 2002) 등의 편저 또는 저서가 있다.
김용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조선일보,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현대사를 담당했다. 현재는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이승만학당 교사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정희 혁명 1 · 2』(지우, 2019), 『대구 10월 폭동, 제주 4 · 3사건, 여 · 순반란사건』(백년동안, 2017),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북앤피플, 2013) 등의 저서가 있다.
주익종
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산업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방문학자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교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편찬(2008년)에 참여했으며, 『대군의 척후』(푸른역사, 2008)와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해남,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정안기
교토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만주, 동아시아의 융합과 공간』(소명출판, 2008)과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동북아역사재단, 2009)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제경영사』(한울아카데미, 2010) 등을 번역하였다.
이우연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선후기 이래 산림과 그 소유권의 변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버드대 방문연구원, 규슈대 객원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다. 『한국의 산림소유 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일조각, 2010), Commons, Community in Asia, (Singapore National University Press, 2015, 공저), 등의 논저가 있다.
차례
책머리에
프롤로그 - 거짓말의 나라_이영훈
1부 종족주의의 기억
01 황당무계 『아리랑』_이영훈
경찰의 즉결 총살 / 이유 없는 대량 학살 / 환상의 역사
02.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_이영훈
국사 교과서의 40% 수탈설 / 피스톨과 측량기 / 수탈설의 뿌리는 전통문화
03. 식량을 수탈했다고?_김낙년
쌀의 ‘수탈’인가 ‘수출’인가? / 조선인의 쌀 소비 감소가 곧 생활수준의 하락을 뜻하는가? / 당시 농민들은 왜 그렇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나? / 맺음말
04.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방식_김낙년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을까? / 식민지 조선 경제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 맺음말
05. ‘강제동원’의 신화_이우연
역사왜곡의 출발 / ‘강제징용’이라는 허구 / 한국 교과서의 역사왜곡 / 역사를 왜곡하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06. 과연‘강제노동’ㆍ‘노예노동’이었나?_이우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 작업배치부터 조선인을 차별? / 조선인의 산업 재해율
07.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_이우연
정치적 목적의 임금 차별론 / 조선인-일본인 임금 격차의 실태 / 어느 탄광 『임금대장』으로 본 조선인-일본인 임금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_정안기
육군특별지원병제란? / 육군특별지원병이란? / 제국의 첨병, 조국의 간성
09.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_정안기
학도지원병제란? / 학도지원의 총수와 실태 / 천재일우의 기회 / 둔갑하는 학도지원병 / 기억과 망각의 정치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_주익종
청구권 협정에 관한 오해 / 청구권 협정은 한일 간 상호 재산, 채권채무의 조정 / 청구권 교섭-무상 3억 달러로 타결된
경위 / 개인 청구권까지 모두 정리되었는데도···
11. 후안무치하고 어리석은 한일회담 결사반대_주익종
장면 정부의 청구권 교섭 / 1960년대 야당의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 / 누가 진짜 굴욕적이었나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12. 백두산 신화의 내막_이영훈
백두산 체험 / 소중화의 상징 /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 / 백두 광명성의 출현 / 남북 공명의 정신사 /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13.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_이영훈
참된 지식인은 세계인 / 『삼국사기』의 우산국과 울릉도 /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과 무릉 / 15세기 초까지도 한 개의 섬 / 팔도총도 / 떠도는 섬 / 안용복 사건 / 우산도의 종착지 / 환상 판명 / 석도의 실체 / 일본의 독도 편입 / 한국의 독도 편입 / 내 조상의 담낭
14. 쇠말뚝 신화의 진실_김용삼
역술인, 지관을 쇠말뚝 전문가로 동원 / 주민 다수결에 의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정 / 측량기준점(대삼각점)을 쇠말뚝으로 오인
15.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__김용삼
김영삼 대통령의 느닷없는 결정 / 민족정기 회복 사업 대대적으로 벌여 / 총독부 청사에서 중앙청으로! /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 지우기”가 그 목적? / 반달리즘식 문화 테러
16.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_김용삼
망국의 주요 원인은 외교의 실패 /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이유는? / 러시아 황제에게‘조선 보호’요청 / 일부 학자들, 고종을 개명군주라고 미화
17.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_김용삼
정상적인 외교 절차 무시하고 고종에게 조약체결 요구 / 기회주의로 일관한 고종 /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 ‘조약체결’
어명 내려
18. 친일청산이란 사기극_주익종
제헌국회가 추진한 건 반민족행위자 처벌 / 친일파 청산론으로 탈바꿈해 되살아나다 /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친일파 청산으로 바꿔치기
19. Never Ending Story_주익종
박정희 정부의 국내 청구권 보상 / 노무현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사업 / 노무현 정부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사업의 과오
20. 반일 종족주의의 신학_이영훈
브로델의 역사학 / 불변의 적대 감정 / 토지기맥론 / 유교적 사생관 / 전통과 유교의 상호작용 / 민족 형성의 원리 / 신채호의 『꿈하늘』 / 민족의 신분성 / 종족주의 신학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21. 우리 안의 위안부_이영훈
갈등의 원인 / 위안부의 만연 / 한국군 위안부 / 민간 위안부 / 미국군 위안부 / 정치적 접근에 대한 의문 / 어색한 불균형
22.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_이영훈
성 지배의 긴 역사 / 기생제 / 공창제의 시행 / 소수를 위한 특권적 매춘업 / 군 위안시설로서 공창제 / 매춘업의 대중화 / 조선풍의 공창제 / 호주제 가족 / 가정윤리와 성문화 / 저항과 탈출 / 매춘업의 역외 진출
23.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_이영훈
공창제의 군사적 편성 / 위안소의 실태 / 강제연행설 / 여자정신근로대와 혼동 / 터무니없이 과장된 수 / 동남아 위안소 / 어느 위안소 조바의 일기 / 방패사단의 위안부 문옥주 / 과연 성노예였던가 / 다시 ‘우리 안의 위안부’로 / 폭력적 심성
24.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_주익종
오랫동안 위안부는 거론되지 않았다 / 위안부는 단지 불행하고 불쌍한 여성 / 한 일본인의 사기극과 위안부 가짜 기억
25.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_주익종
정대협의 공세 / 일본 정부의 사과 / 정대협, 일본 정부의 사죄를 거부 / 일본 정부의 위로금 지급 시도 / 정대협의 위안부 여론 몰이 / 정대협과 문재인 정권, 2015년 위안부 합의마저 폐기 / 강제동원? / 일본군 위안소 운영은 성노예 강간범죄? / 한일 관계 파탄이 목적
에필로그 - 반일 종족주의의 업보_이영훈
참고문헌
찾아보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조선일보사)
1부
종족주의의 기억
01. 황당무계
『아리랑』 이영훈
토지조사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의한 조선 농민 즉결 총살 이미지(김명서 작).
무엇보다 소설의 전후 문맥에서 대량 학살의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공중에 노출된 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이 무에 그리 중대한 군사비밀이라고 공사에 종사한 노무자들을 학살한단 말입니까. 당시 지시마열도와 홋카이도北海道에서는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슷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어렵사리 동원한 노무자를 학살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문득 소설가 조정래 자신이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이영훈)
『아리랑』에서 저는 한 사회를 선진사회로 이끄는 가치와 이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미덕과 신앙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곳은 강포한 종족이 약소 종족을 무한 겁탈하고 학살하는 야만의 세계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러한 종족주의의 특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설가 조정래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 시대에 관한 한국의 역사학 자체가 그러한 종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잇습니다. 비록 외세에 눌렸지만 그 시대 우리 조상의 역사가 진정 그러하였습니까.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도 자신을 근대적 인간으로 개발해 가는 우리 조상의 눈물겨운 노력은 정녕 그 시대의 역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이영훈)
02.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이영훈
토지조사사업 당시 경기도 고양군에서의 일필지 측량 장면.
저는 앞의 글에서 소설가 조정래를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증오의 소설가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소설 『아리랑』은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개 주재소 경찰이 조선 농민을 즉결 처형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전국적으로 4,000명의 조선인이 그런 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했습니다. 조정래가 그런 엉터리 역사를 소설로 지어낸 것은 그의 책임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 몇 년 전에 신용하라는 한국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학자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엉터리 학설을 펼쳤던 것입니다.
일제의 조선 병합은 몇 조각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총면적이 2300만 헥타르가 되는 한반도 전체를 그의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의 토지가 얼마인지, 토지의 형질이 어떠한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토지조사사업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도 이 나라가 펼치는 온갖 토지 행정의 기초 자료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터의 번지와 주소는 언제 붙여진 것입니까. 다른 아닌 1910~1918년의 토지조사사업에서였습니다.(이영훈)
그것만이 아닙니다. 제가 읽은 전남 고흥의 어느 양반의 일기는 마을 앞을 통과하는 철로가 부설되자 더없이 개탄하였습니다. "저것이 우리의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철로 부설에 많은 토지가 수용되고 또 마을의 당산나무까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제가 펼친 각종 행정이나 시설은 전통문화, 전통 풍수, 전통 터부에 대한 파괴로 간주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피해의식과 분노감이 해방 후 역사가에 의해 토지, 식량, 노동력에 대한 수탈의 역사로 포장되고 부풀려져 왔던 것입니다.(이영훈)
일제는 당시 한인들의 다수가 풍수지리를 신뢰하고 산천의 정기를 중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명산의 혈맥에 이를 차단하여 죽인다고 하는 철침(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물론 일제 자신은 풍수지리설을 신앙하지 않았으나 한국인들이 이를 신앙하므로 한국인들에 좌절감을 심어 주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신용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민족문제」: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 175쪽에서 재인용).
1960년 이후 50년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전국 토지의 40%를 수탈했다고 써왔습니다. 일본과 조선을 뺏고 빼앗기는, 죽이고 죽는 야만의 두 종족으로 감각한 것입니다.우리 조상을 소유권 의식도 없고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량한 종족으로 감각한 것입니다. 그 선량한 조선 종족을 사악한 일본 종족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 마구잡이로 수탈한 것입니다. 조선인은 토지의 측량을 위해 일본이 설치한 대소 삼각점을 토지의 혈맥을 찌른 것으로 알고 분노했습니다. 국사 교과서의 터무니없는 토지 수탈설은 이렇게 우리의 전통문화에 규정된 낮은 수준의 역사의식, 곧 반일 종족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이영훈)
03. 식량을
수탈했다고? 김낙년
쌀의 생산량 · 수출량 · 조선내 소비량(단위: 천석) 자료 : 『한국의 장기통계』(2018)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입을 제한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한다면,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 오늘날에는 일본의 쌀값을 압박하는 최대 원인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에 있다는 사정은 조선 농민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이 자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그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다가 조선 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와서 조선미의 이입을 막아 산미증신계획의 결과로 야기된 손해를 전부 조선 농민에게만 전가할 이유가 없음을 일본 농민도 알아야 한다. ··· 여하간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에 의한 이입 제한에는 물론이고 ···조선미유출의자유를속박하는어떠한조치에도절대반대할수밖에없다. (『동아일보』 1931년 6월 16일, “조선미 이입 제한엔 절대 반대”, 문장을현대어로손질함).
소작지율 · 소작농 비율의 추이(단위: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당시 조선의 농민, 특히 소작농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결국 농업 생산성이 낮았고, 토지에 비해 인구가 넘쳐나다 보니 소작농에게 불리한 지주제가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다는, 전통 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햇기 때문입니다. 산미증산계획이 쌀의 증산을 어느 정도 가져왔다고 해도 이러한 틀을 깰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지주제의 문제는 해방 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을 통해 해소됩니다. 그리고 농촌의 낮은 생산성과 과잉 인구의 문제는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이농이 급속히 진행되고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기계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일제시기 농민의 궁핍을 엉뚱하게도 일제가 쌀을 수탈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형성된 일반인들의 통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쌀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수출'한 것인데도 말이죠. 생산과 수출이 크게 늘고 가격도 불리해지지 않았다면 소득이 올라가는 것은 경제의 상식인데, 이를 뒤집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입니다. 교과서가 '수탈'이나 '반출'이라는 표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수출'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자마자 자신의 일제 비판의 논리가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이라도 만들어 내서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논리로 이루어지는 교과서의 일제 비판에 대해 과연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김낙년)
04.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방식 김낙년
일본은 구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지배했습니다. 한 나라의 주권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제는 바로 이 점에서 비판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는 개인의 재산권마저 유린해서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토지나 식량을 마구잡이로 '수탈'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실생활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민족 간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의 조선 경제는 기본적으로는 자유 거래의 시장체제였고, 민법 등이 시행되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 없이 개인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수탈'이 일상화되고 '차별'이 공식화되어 있는 체제라고 한다면, 조선인의 반발로 식민지 통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영구히 편입하고자 했던 식민지 지배의 목표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시행한 각종 제도와 조선에서 실제로 일어난 경제적 변화에 비추어 보면, 교과서의 서술은 초보적인 상식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동안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은 "그 경우 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라고 합니다. 거짓말과 엉터리 논리로 일제를 비판해 왔고, 또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보니, 그것이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도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허구를 만들어 내서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국내에서는 통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제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우지 못하는 교육,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주의 역사교육이 빠져 있는 함정이고 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05. '강제동원'의
신화 이우연
교과서의 '강제노역에 동원된 우리 민족', 자료: 2019년 초등학교 6학년 『사회』,54쪽
강제사역되던 일본인들의 모습.
자료: 『아사히카와 신문旭川新聞』 1926년 9월 9일
서울 용산역 앞의 '강제징용 노동자상'
조선인 근로자 기념사진
자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 기증자료집』, 100쪽
06. 과연
'강제노동' · '노예노동' 이었나? 이우연
'조선인 징용노동자'로 잘못 알려진 1950년대 일본인.
자료: 『산케이신문産經新聞』2019년4월3일.
1934년 공기 압축식 착암기를 사용하는 탄광부.
자료: 일본 오무타시大牟田市, 『大牟田市の100年』,89쪽
07.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 이우연
日本窒素 江迎炭鑛, 『1944년 5월 賃金臺帳』 표지.
조선인 탄광부와 다른 직종 임금의 비교
연도 | 비교 직종 | 월수입(원) | 비율 |
1940 | 서울 방직(면가공) 남공 | 14.00 | 5.2 |
1940 | 서울 남자 교원 | 15.96 | 4.6 |
1940 | 서울 남자 회사원 | 21.00 | 3.5 |
1940 | 서울 남자 은행원 | 30.80 | 2.4 |
1944 | 일본 순사 초임 | 45.00 | 3.7 |
1944 | 일본 사무직 대졸 초임 | 75.00 | 2.2 |
자료: 大內規夫(1945), 『炭鑛 における半島人の勞務管理』.
전쟁으로 인한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해 두고 싶습니다.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에서 일한 것은 1910년대에도 종종 발견되는 모습이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면 그 수가 부쩍 늘어납니다. 이때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 정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컸던 차이가 전쟁과 함께 조선인이 일본으로 동원됨과 동시에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의 임금이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조선인이 오히려 더 많이 받는다"거나 "조선인이 일은 못하는데, 임금은 일본인보다 오히려 더 높다"는 불만이 일본인들 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위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찬 것이었고, 우리 조상들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 정안기
육군특별지원병의 선발 전형과 추계(단위 : 명, 배)
연도 | 모집인원 | 지원자 | 적격자 | 입소자 | 입영자 | 지원배율 |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
400 600 3,000 3,000 4,500 5,000 |
2,946 12,348 84,443 144,745 254,273 304,562 |
1,381 6,247 33,392 44,884 69,761 69,227 |
406 613 3,060 3,277 5,017 5,330 |
395 591 3,012 3,211 4,917 5,223 |
7.4 20.6 28.1 48.2 56.5 60.9 |
합계 | 16,500 | 803,317 | 224,892 | 17,703 | 17,350 | 48.7 |
자료: 정안기(2018 A).
조선지원병 자료 『사진주보』 제22호, 1938.7.13.
이들은 20세기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 일본군에 투신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신민이었고, 그것도 참정권과 병역의무를 결여한 2등 국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망국노亡國奴'라는 편견과 차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지식과 기술, 근면성과 책임감을 체득한 근대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1948년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6 · 25전쟁기 국제 공산세력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지킴으로써 오늘날 대한민국 성취의 기초를 닦은 공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상투적으로 매도하는 '반민족행위자'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1950년대 '자유인의 공화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육군특별지원병은 식민시기 일본에 충성하는 '제국의 첨병'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또 다른 조국 대한민국에 진충보국盡忠報國하는 '조국의 간성干城'이었습니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자신의 생명과 권리마저 일본에 내맡기는 무기력하고 타율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은 아니었습니다.
09.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 정안기
해방 이후 학도지원병 출신자들이 구현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는 하나의 커다란 허위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몇 사람의 학도병에게서 관찰되는 반일 지사로서의 행위를 그들의 집단 지향인향 분식하였습니다. 당초 학도지원 행위에 깔린 입신출세의 욕망은 그것으로 훌륭하게 은폐하였습니다. 그러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는 그들이 지도층으로 군림한 한국인의 집단 심성마저 왜곡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구속하는 반일 종족주의는 그들의 위선적 기억에서 그 형성의 단초를 구할 수 있습니다. 2018년 정부가 나서서 그들의 학도지원을 독립운동으로까지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역사가 정치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교과서적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 청구권 협정의 진실 주익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국 관계 조항
제2조 | (a): 일본은 한반도 독립을 승인하고 모든 권리를 포기 |
제4조 | (a): 양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을 특별조정(special arrangement)함 (b):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해 미국이 취한 조치의 승인 ※ 1945.09.25. 군정령 2호 재한 일본인 재산 동결 1945.12.06. 군정령 33호 미군정이 취득 1948.09.11. 한미재정협정으로 한국 정부에 이양 |
제14조 | (a): 각 나라에 있는 일본인 재산 몰수(일부 예외) 및 연합국이 희망할 경우는 일본 생산물과 용역으로 인한 추가 배상 협상 권리 부여 (b): 연합국은 연합국과 연합국 국민의 기타 청구권을 포기함 |
한일 간 청구권 특별 조정
한국 측 대일 8개항 요구
1 | 한국에서 가져간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 지도원판, 지금 지은의 반환 |
2 |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대조선총독부 채무의 변제 |
3 | 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이체 또는 송금된 금원(金員) 반환 |
4 |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 |
5 |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 기타 청구권 변제 |
6 |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 소유의 일본법인의 주식 또는 기타 증권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 |
7 | 전기 제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생긴 제 과실 반환 |
8 | 전기 반환 또는 결제는 협정 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늦어도 6개월 이내에 종료할 것 |
대한민국은 36년간 일본의 점령에서 발생하는 불쾌한 과거의 기억에 의하여 촉구되는 모든 청구권의 충족을 일본에 대해서 요구하는 의도는 없으며, 단지 한국에 합법적으로 속하며 그리고 장래의 한국의 생존을 위하여 충족되어야 하는 재산에 대해서만 그 청구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 임송본林松本,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첫 회의에서 한국 측 대표
일본의 역청구권에 대한 미국 측 중재 의견
국무장관 애치슨의 답신(1952년 4월 29일자) "미군 정부가 취한 관련 조치와 평화조약 4조(b)항으로 인해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은 몰수된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그 재산들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요구도 할 수 없으나, 그러한 처분은 평화조약 제4조(a)이 규정한 양국 간의 특별조정과는 관련이 있다(relevant)." |
미합중국의 입장 표명의 재 제출(1957년 12월 31일자) "한국에 대해 재한 일본인 재산의 완전한 지배 권한을 부여한 것이 취득 조항과 이양 협정의 취지이다. 재한 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인해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기에, 평화조약 작성자는 그와 같은 문제를 당사자 간의 조정에 맡기도록 했다. 평화조약 4조(a)에서 규정된 '특별조정'이라 함은 재한 일본인 재산이 취득되었다는 것이 고려된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며, 한일 간의 특별조정은 한국의 대일청구권이 재한 일본인 재산의 인도로 어느 정도 소멸 또는 충족되었는가를 결정하는 과제를 동반한다." |
개인 청구권에 대한 한국 정부 설명
한국 이규성 공사와 일본 외무성 조약국 사토 탐사관의 면담 "아측으로서는 이동원-시이나 합의 사항에 의하여 일단 개인관계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1965.4.17. 이규성 수석대표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 |
1965년 조약과 협정에 관한 한국 정부의 공식 해설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에 관한 조항으로 소멸되는 우리의 재산 및 청구권의 내용을 보면···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에 관한 청구, 한국인의 대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이 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협정 해설』, 대한민국 정부, 1965.7) |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 · 보상이 아니고는 한국이 애당초 일본에 청구할 게 별로 없었고, 그를 확인하는 선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한일 간 최선의 합의였습니다. 한일협정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국이 무언가 못 받은 게 있으므로 일본은 더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과의 과거사가 매듭지어졌음을, 과거사가 청산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11. 후안무치하고 어리석은
한일회담 결사반대 주익종
야당 한일회담 반대 연설 - 3월 15일 부산 강연회(경남중 운동장)
연사 | 주요 발언 |
김영삼 김도연 윤보선 장준하 |
"대대로 침략자인 일본은 평화선마저 뺏으려 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 "정부는 어업협정에서 12해리 전관수역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실은 10년 뒤에는 6해리선까지 일본 어선에 어로활동을 허용하는 흥정을 하고 있다." "일본 자금으로 한국의 부흥은 불가능하다. 한일협정은 한국을 일본의 시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
자료: 『동아일보』 1964년 3월 16일.
나와 정부는 학생에 못지않게 국가와 민족만을 위해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이 회담에 임하고 있음을 나와 정권의 생명을 걸고 역사 앞에 맹세한다. 회담에 만약 흑막이 있다면, 관련자는 역적으로 처단할 것을 약속한다. 대학생들의 우국충정과 주장을 마음에 새겨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노력하라고 대표단에 훈령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3월 26일 특별담화문 중 언급)
"오늘의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한다."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의식이다.""우리의 주체의식이 건전하면 한일 국교 정상화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비굴한 생각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다."
-박정희 대통령, 한일협정 조인 다음날인 6월 23일 특별담화 중에서
물론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일본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플랜트 수출 등 이익을 봤지요. 한마디로 한국 경제와 일본 경제 모두 한일 국교 정상화로 큰 이익을 봤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 한국은 일본의 정치적 ·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는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의 예언은 어리석은 소견이었을 뿐입니다.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고 선후진국 협력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문 밖에 나가면 사자에게 잡아먹힌다며 안에서 꼼짝도 안한 것과 같습니다. 문 밖에 나가야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지요. 문 밖에는 사자만 있는 게 아니라, 곡식과 과일이 자라나고, 소와 말, 양과 염소가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문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일협정으로 우리는 대문을 열어젖혔고, 그 덕분에 오늘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잇게 되었습니다.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12. 백두산
신화의 내막 이영훈
백두산은 우리 종성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대이시다. 삼계를 헤매는 비렁뱅이 아이가 산 넘고 물 건너 자애로운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번 뵙기 위해 왔습니다. 한아버지, 한어머니, 저올시다, 아무것도 없는 저올시다.
- 최남선,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최남선(1890~1957)과 그의 발상 '맹호기상도'
백두 밀영에 참배하는 북한 주민.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백두산 천지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 부부(2018년 9월 20일).
2018년 9월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북한의 3대 세습 통치자 김정은金正恩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사진에서 보듯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습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곳은 북한 신정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거기에 남한의 대통령이 올라 백두혈통의 계승자와 손을 마주 잡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어떠한 운명을 우리에게 예보하는 것일까요. 사진 속 문 대통령의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없이 착잡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백두산 신화의 마력은 저터럭 강렬한 것일까요.
지난 2000년 평양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장차 남북한이 연방제로 통일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사진 속의 네 사람은 그 약속을 다짐하며 웃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문 대통령과 그의 지지세력은 그러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연방제 통일이 이루어졌다 칩시다. 벌써 남한 주민의 적지 않은 무리가 공공연히 백두혈통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백두산 밀영의 통나무집으로 참배차 몰려갈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행렬에 동원될 것입니다. 저는 사진 속의 웃음에서 그런 운명을 예감합니다. 백두산에 뿌리박은 박달 겨레 여러분, 하루빨리 그 불길한 신화로부터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13.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이영훈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귀의하였다. 매년 토산물을 공납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다.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 한다. 땅의 크기는 백 리이다. 험준한 것을 믿고 신라에 불복하였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정벌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왕智證王 13년(512년)
우산과 무릉武陵 두 섬은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떨어짐이 멀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칭했는데 울릉도라고도 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1년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蔚珍縣
울릉도는 원래 두 섬으로 이루어졌다. 둘을 합해서 울릉도 또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언제부턴가 따로따로 불리기 시작하여 하나는 울릉도, 다른 하나는 우산도가 되었다.
우산은 원래 나라 이름이엇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그러니까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섬이다.
팔도총도(八道總圖) 중의 울릉도와 우산도(1530년).
16~19세기 여러 지도 중의 울릉도와 우산도.
대한전도大韓全圖 중의 울릉도와 우산(1899년).
죠션디도와 울릉도 부분 (1911년).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竹島 혹은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으로 불리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오키隱岐 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 1951년 8월 미 국무부의 한국 정부에 독도에 대해 보낸 회신
내 조상의 담낭 독도
네 오랜 담즙으로
나는 온갖 파도의 삶을 살았다.
- 고은
1951년 미 국무부가 밝힌 대로 독도는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땅이 있고 물이 있어서 사람이 사는 섬이 아닙니다. 국제사회가 영해를 가르는 지표로 인정하는 섬이 아닙니다. 국제사회가 영해를 가르는 지표로 인정하는 섬이 아닙니다. 그것을 민족의 혈맥이 솟은 것으로 신성시하는 종족주의 선동은 멈추어야 합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독도를 응시하면 한국사의 속살이 보입니다. 독도에 관한 성찰은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4. 쇠말뚝 신화의
진실 김용삼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정기와 맥을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거나, 쇳물을 녹여 붓거나 숯이나 항아리를 파묻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유명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地氣를 눌러 인재 배출과 정기를 누르고자 한 것이다.
-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50주변 기념 '근대 백년 민속풍물전'에 전시되었던 양구에서 제거된 쇠말뚝 옆에 있던 설명문
김영삼 정부 시절 한 쇠말뚝 제거 현장.
쇠말뚝 신화는 한국인들의 닫힌 세계관, 비과학성, 미신성이 역사와 함께 오랜 반일 감정과 결합하여 빚어낸 저열한 정신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문화를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속하는 21세기의 한국인이 아직도 그런 종족주의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되겠습니까.
15.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
- 대한민국 역사를 지우다 김용삼
1970년대의 중앙청.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부분이 충남 천안시 소재 목천 독립기념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선동을 통해 미 군정청 역사의 현장, 대한민국 제헌의회 개원 현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건국 현장,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부터 박정희 · 전두환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어 대한민국의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를 낳은 현장을 깨끗이 지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올바른 역사관이나 민족정기의 수립은 구호나 정치적 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욕의 역사와 물증을 때려 부숴버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치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영삼 정부는 치욕의 역사현장을 없앤다고 선동하면서 실제로는 대한민국 제헌국회 출범의 현장, 건국의 현장, 근대화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했던 현장을 파괴했습니다. 문민정부의 '민족 지상주의자'들이 행한 구 조선총독부 철거는 일제 침략의 현장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을 파괴한 반달리즘Vandalism식 마녀사냥, 종족적 민족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는 문화 테러였습니다.
16.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김용삼
최근 들어 개명군주로 평가받고 있는 고종.
고종은 망국의 암주暗主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서 일부 학자들은 고종을 개명군주로 둔갑시켜 그가 개혁을 열심히 추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는 저서와 논문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반일 종족주의가 고양되자 '반일'이면 무슨 학설이든 존중되는 세태가 빚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김용삼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만고의 역적으로 몰린 이완용.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상소문 내용을 제보 받아서 제멋대로 "황제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복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결과 "고종이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허구의 신화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조약이 체결될 당시 신문이 그에 관해 오보를 내거나 그에 일반 백성이 격분하여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을 망국의 주범으로 저주한 것은 그런대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1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자각적 인식이 아직도 결여되어 있음은 우리 한국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건국을 포함한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초래하고야 말 실로 적지 않은 걱정거리입니다.
18. 친일청산이란
사기극 주익종
관료 중 반민족행위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인물의 정의
구분 | 반민특위 조사대상 반민족행위자 |
노무현 정부 위원회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물 |
정의 | (제4조 6, 9항)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
(2조 16항)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헌병분대장 이상 또는 경찰간부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 · 고문 ·학대등탄압에앞장선행위 |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행위 |
key word |
'악질적' | "일정 직급 이상으로서··· 탄압에 앞장선" |
'하수인' |
반민족행위자 ⊂ 친일반민족행위자 ⊂ 친일인물.
각 범주별 인물 예
구분 | (반민특위 조사대상) 반민족행위자 |
(노무현 정부 위원회 선정) 친일반민족행위자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물 |
총수 | 688명 | 1,005명 (추가된 인물) 김성수, 김활란, 백락준, 고황경, 장덕수, 노기남, 양주삼, 방응모, 김동인, 서정주, 모윤숙, 노천··· |
4,389명 (추가된 인물) 박정희, 안익태, 백선엽, 김백일, 김홍량··· |
오늘날, 일제에 대한 협력과 북한 정권에 대한 협력 중에서 더 중대한 과오는 어느 쪽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한국인은 일제에 대한 협력 문제를 캐는 것만큼 과거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그를 파탄 시키려 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의 활동을 캐고 있습니까? 그리고 김대중 · 노무현 정부가 북한 정권에 협력해서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도운 것을 캐고 있습니까? 한국인은 친일파 청산의 열의만큼이나 친북파 ·종북파청산에힘을쏟고있습니까?국민의생명과재산이걸린진짜중요한문제에집중해야하지않겠습니까?
19. Never Ending Story
- "배상! 배상! 배상!" 주익종
위원회 피해자 지원 결정 실적
구분 | 위로금 지급 | 지원금 지급 | 계 | ||
사망 행불 | 부상장해 | 미수금 | 의료지원금 | ||
건수 | 17,780 | 13,993 | 16,228 | 24,530 | 72,631 |
지원금액(억 원) | 3,600 | 1,022 | 522 | 1,040 | 6,184 |
강제동원위원회 예산 사용 (억 원)
구분 | 진상규명위 2005~2009년 |
희생자지원위 2008~2009년 |
통합 위원회 2010~2015년 |
계 |
인건비 및 행정비 | 713 | 28 | 998 | 1,739 |
지원금액(억 원) | - | 1,751 | 4,257 | 6,008 |
계 | 713 | 1,779 | 5,255 | 7,747 |
위자료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할 것이지만, 해방 전 조선인 노동자를 쓴 일본 기업이 현재 모두 존속하는 게 아니므로 누구는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누구는 청구할 수 없다는 형평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또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실제 일본 기업 재산 압류가 시작되었습니다만, 이게 정부 차원 협상에서 해결될 전망은 희박합니다. 향후 한일 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될 겁니다. 국교단절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친한 이웃이 한 나라도 없게 되는 겁니다. 이래서 한국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른바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배상 요구는 영구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엇이든지 요구해도 된다는 게 현 국민정서입니다만, 이는 반일 종족주의에 따른 오해와 편견일 뿐입니다. 6 · 25전쟁으로 남한에서만 100만 명이 죽고 100만 명이 부상을 입게 한 북한에 대해 단 1원이라도 배상 · 보상을 요구했습니까? 일본에 대해선 배상을 요구하면서, 훨씬 더 큰 피해를 준 북한에 대해선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게 정상입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20. 반일 종족주의의
신학 이영훈
경북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의 묘제(김광억 촬영).
민족의 태양 김일성을 숭배하는 북한 주민.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
한국의 정치가 자유민주체제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가 자유시장경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가 선진적 교양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이 역사와 함께 오랜 반일 종족주의로부터 탈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닐 터입니다. 느린 속도로 흐르는 장기지속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정보 · 통신혁명이 급하게 진행 중입니다. 장기지속의 시간도 빨라졌음이 분명합니다. 노력하면 한두 세대 만에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서 반일 종족주의 청산을 위한 일대 문화혁명을 추진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21. 우리 안의
위안부 이영훈
김학순의 위안부 국내 첫 증언, "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기사 (『조선일보』 1991.8.16).
부류별 성병 검진 여인의 실수(명)
구분 | 1955년 | 1959년 | 1966년 |
총수 | 110,642 | 164,461 | 391,713 |
땐사 위안부 접대부 밀창 |
3,196 61,833 14,020 31,593 |
4,734 98,891 21,285 39,561 |
8,524 250,964 32,856 99,369 |
자료: 『보건사회통계연보』 각년도판.
땐사 - dancer(영), 예기(藝妓)(일정기) - 요리점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여인
위안부(창녀) - prositute(영) - 유곽이나 사창가에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
접대부 - entertainer(영), 작부(酌婦)(일정기) - 음식점에서 객석에 앉아 손님의 술시중을 드는 여인
밀창 - harlot(영), 여급(女給)(일정기) - 까페, 빠, 다방, 여관 등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인
제5연대가 후방으로 나왔다. 나는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장병에게 티켓을 우선 배분했다. 티켓을 받은 19세의 박판도 중사는 숫총각이었다. 위안부대의 천막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분대원들이 억지로 밀어 넣었다. 여자가 박판도의 물건을 만지며 숫총각이라 놀리자 박판도는 도망쳐 나왔다. 다음날 박판도는 재시도 끝에 결국 성공하였다. 박판도는 티켓을 한 장 더 달라고 하였다. 우리 부대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박판도는 이쉽게도 전사하였다.
- 채명신, 회고록 『사선死線을 넘고 넘어』에서 위안부에 대한 회고
1970년대 동두천 기지촌의 풍경. ⓒ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사진제공 눈빛출판사
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운동가들은 한국 국민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베푸는 관심과 배려를 미군 위안부 문제에도 동일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군 위안부나 일본군 위안부는 그 역사적 속성에서 동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국 국민은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 기묘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종사하는 사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선을 그어왔습니다.
이 어색한 불균형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보기에 두 그룹의 주장이 다 정치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파장은 전혀 다릅니다. 다름 아닌 반일 종족주의가 그 해답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은 더 없이 분노합니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집단 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할 집단 정서가 없습니다. "나는 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은 불과 두세 명입니다. 나아가 "나는 한국군 위안부였다"고 폭로한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백을 권유받은 여인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집단 정서가 거기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호와 지원은 커녕 '역사상 가장 오랜 직업'에 종사한 비천한 여인으로 내쳐질 위험성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밑바닥에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종족주의적 적대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해방 후 '우리 안의 위안부'에 관한 고찰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일깨웁니다.
22.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이영훈
대좌부 창기업의 개황 (1929년)
구분 | 일본인 | 조선인 | 합 |
창기수 | 1,900명 | 1,385명 | 3,285명 |
유객수 | 450,615명 | 110,683명 | 561,298명 |
유객 1인당 유흥비 | 8원 | 4월 | |
창기 1개월 접객수 | 14.2명 |
출처: 宋連玉(1994), 「日本の植民地支配と國家的管理賣春 - 朝鮮の公娼を中心にして」.
비고: 창기 1개월 접객 수는 필자가 계산한 것임.
서울 신마치新町의 유곽 거리.
인천 시키시마 유곽의 개황(명, 원)
연도 | 조선인루 | 일본인루 | ||||||
호수 | 창기수 | 유객수 | 소비액 | 호수 | 창기수 | 유객수 | 소비액 | |
1924 | 25 | 95 | 10,084 | 38,428 | 14 | 115 | 22,972 | 190,902 |
1937 | 27 | 149 | 24,974 | 101,872 | 8 | 83 | 22,913 | 199,366 |
출처: 『동아일보』 1925년 2월 10일; 1938년 2월 3일.
종래 상놈은 극도로 타락해서 신도信道의 자유도, 취학의 자유도 없이 그야말로 사람의 부스러기로 살아왔다. 양반은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놈도 스스로를 우습게 여겼다. 염치와 도덕이니 하는 것은 그들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난은 한층 그들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조선의 창기하면 누구나 경상도 여자가 가장 많음을 생각할 것이다. 그곳에 가서 알아보니 창기들은 모두 미천한 상놈들의 생활난으로 자기의 딸을 방매한 것이다.
- 『개벽開闢』, 1921년
딸을 팔아먹는 것은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다. 남의 딸이나 제 아내를 파는 일도 있다. 팔아서 먹는 놈이 있는 한편에 사다가 먹는 놈도 있다. 이른바 창기, 예기, 작부, 첩 같은 것이다.
- 이광수李光洙, 「팔려가는 딸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중략)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 현진건玄鎭健, 단편소설 「고향」
23.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위안소 벽에 부착된 위안소 규정.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일로 소개되었다. 의뢰인들은 다액의 수입, 가족 부채의 면제, 고되지 않은 노동,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을 미끼로 제공하였다.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을 받고 응모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매춘업에 종사해 왔지만, 대부분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였다.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개인별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영업하였다. 식사는 위안소의 업주가 제공하였다.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장(시모노세키下関 우체국)
군산시 위안부의 인공유산 횟수(1934년, 명)
인공유산 횟수 | 한국인 상대 188명 중 | 미군 상대 132명 중 |
1 2 3 4 5 6 7 15 20 |
26 3 2 1 |
20 16 13 1 10 3 1 2 2 |
계 | 31 | 68 |
출처: 朴大根(1964), 「慰安婦들에 대한 社會醫學的 調査硏究 - 群山地區를 中心으로-」.
그녀는 죽기 얼마 전 그녀를 찾은 모리카와 마치코에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위안부 생활했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어. 대구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가족을 얼마나 보살폈는데. 필사적으로 돈을 모았어. 남자들은 왜 그런지 나를 좋아했어. 사람들은 말했어. '당신은 눈이 동그란 것이 아주 예뻐.' 내 목소리는 맑고 예뻐서 높은음도 잘 낼 수 있었어. 내 노래는 일본 군인들을 즐겁게 했어. 나는 군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어. 야마다 이치로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어." 그렇게 그녀는 죽는 날까지 결코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반 나부랭이들이, 직업적 운동가들이 품은 반일 종족주의의 적대 감정과는 거리가 먼 정신세계였습니다.
24.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주익종
<사르븬江에 노을이 진다> 포스터 (제공 양해남)
요시다 세이지의 책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 (왼편, 1983년간)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오른편, 1977년간).
우물가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소녀 이미지(김명서 작).
1970년대까지 위안부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에는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40년도 넘게 지나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어지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자 가공의 새 기억이 만들어지면서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겁니다. 해방 이후 45년은 한국인 머릿속에 위안부에 관한 새 기억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25.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 정대협 활동사 주익종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되었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있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그를 담당했지만, 이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한 사례가 많이 있었으며, 당시 관헌 등이 직접 모집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또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 상황 아래서 처참한 것이었다.
결국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 기회에···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여 몸과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한다. 또한 이러한 뜻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관한 것은 전문가의 의견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내각 관방장관 담화河野談話, 1993.8.4.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2019.5.30. 촬영)
서울 남산의 옛 통감관저 터에 만든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2016년 8월 29일 조성)
인터뷰 연도별 위안부가 된 경로 답변
위안부 증언록 | 출간 연도 | 취업권유, 전차금 | 유괴, 약취, 납치 |
1권 | 1993 | 15 | 4 |
2권 | 1997 | 9 | 5 |
3권 | 1999 | 9 | 5 |
4권 | 2001 | 3 | 4 |
진정 원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이었다면, 먼저 일본을 공격할 게 아니라, 1990년까지 우리의 45년을, 아니 그 이후까지 포함해서 해방 70여년을 반성해야 했습니다. 딸을 팔아먹은 것도, 가난한 집 딸을 꾀어 위안부로 넘긴 것도, 또 그 딸이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도, 설령 돌아왔더라도 사회적 천시 속에서 숨죽여 살도록 한 게 우리 한국인 아니었습니까? 근 50년간 지독하게 무관심하지 않았나뇨. 50년 만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어 일본을 끝없이 공격해 결국 한일 관계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간 것, 이게 바로 1990년 이후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사였습니다.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반일 종족주의를 이 위안부 문제의 전개에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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