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4 교양 서양미술

 

 

 

 

샤를 블랑 지음 | 정철 옮김 | 하진희 감수

2020, 인문산책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4190

 

650.1

블292ㅅ

 

 

마 침 내   발 견 한   회 화 의   문 법

 

Grammaire des Arts du Dessin

 

프랑스 최고의 미술평론가,

 

샤를 블랑의 미술이야기

 

 

"가장 위대한 화가는

자신의 사유의 땅으로,

그가 상상한 궁전이나 들판으로

우리를 이끌고,

거기에서 신들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화가는 자연을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바라보고,

비평가는 자연을 화가들의 마음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비유한다.

 

법은 명령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고,

도덕은 강요하는 것이기에 귀담아 듣지 않으나,

예술은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설득할 줄 안다.

 

화가는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된 적이 없는 생각들을 움직여서

천둥소리가 귀를 때리듯이 우리의 영혼을 자극한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방된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된 것이다.

 

 

지은이

샤를 블랑 (Charles Blanc, 1813~1882)

 

19세기 프랑스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

프랑스 학술원 및 예술원의 회원으로서 예술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프랑스 대학에서 미학 및 역사 교수를 역임했다. 초기에는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그의 형 루이 블랑(Louis Blanc)이 주관하는 여러 언론에 비평문을 기고했고, 《예술 잡지 Gazette des beaux-arts》 등의 편집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 저서로서 이 책의 원저인 《데생 예술의 문법 : 건축, 조각, 회화 Grammaire des arts du dessin : Architecture, Sculpture, Peinture》(1867)의 〈회화편〉에서는 색의 3원색과 이를 기초로 한 색상환, 보색, 유채색과 무채색의 개념 등의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했고, 이는 19세기에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De Paris a Venise》(1828)

《호기심의 보물 Le tresor de la curiosite》(1857~1858, 2 vols.)

《모든 화파 화가들의 역사 Histoire des peintres de toutes les ecoles》(1861)

《렘브란트 전작 Loeuvre complet de Rembrandt》(1873, 2 vols.)

《앵그르, 그의 생애와 작품들 Ingres, sa vie et ses ouvrages》(1870)

《장신구와 의상 예술 Lart dans la parure et dans vetement》(1875)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 Les artists de mon temps》(1876)

《장식 예술의 문법 Grammaire des arts decoratifs》(1881)

이외에 다수의 저서가 있다.

 

 

역자

정철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1983년 KOTRA에 입사해 유럽 지역 조사 작업을 담당했으며, 다섯 차례 해외 근무를 통해 파리, 리옹, 헬싱키, 브뤼셀, 암스테르담에서 무역관장을 역임했다. 35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2018년 정년퇴임했다. 유럽에서 근무하면서 그 인연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이 책을 조우하고 3년 동안의 번역 작업을 거쳐 국내에 처음으로 샤를 블랑의 이론을 소개하게 되었다. 역서로는 〈조선의 참 유학자이자 담대한 크리스천들〉, 〈메가체인지〉 등이 있다.

 

 

감수

하진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과 인도 비스바바라티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도 미술에 홀리다〉, 〈아잔타 미술로 떠나는 불교여행〉, 〈천상에서 내려온 갠지스 강〉, 〈샨티니케탄, 평화를 부르는 타고르의 교육도시〉 등이 있고, 역서로는 〈인도의 신화〉 등이 있다.

 

 

 

차례

 

저자의 말 : 회화 미학의 교양을 위하여

 


1 독립                    10 자연


2 설득                    11 빛


3 한계                    12 명암


4 표현                    13 색상


5 숭고함                  14 터치


6 구상                    15 다양성


7 통일성                16 생명력


8 원근법                17 스타일


9 제스처                18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간략한 서양미술사 / 찾아보기 / 그림 목록

 

 

 

 

 

메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년, 캔버스에 호일, 104×141cm, 내셔널갤러리 소장 (영국 런던)

 

 

빈센트 반 고흐,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화가>, 1888년 소실됨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브리오슈 빵>, 1763년, 캔버스에 오일, 47×56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프랑스 파리)

 

 

 

 

 

1868년 오텔 드루오에서의 미술품 경매 장면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 A.D. 1년, 폼페이 프레스코 벽화

 

백조의 형상을 한 제우스 신이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를 임신시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신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그림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2018년 발견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20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선명한 색감과 그림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

 

독립

 

 

회화는

자연의 모든 실재를 수단으로

영혼의 모든 개념을

하나의 통일된 표면 위에서

형태와 색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갈라테아의 승리>, 1514년, 프레스코화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 B.C. 2세기~B.C. 1세기 초, 그리스

 

 

 

 

 

헤라르트 테르뷔르흐, <편지를 쓰는 여성>, 1655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Baptiste Simeon Chardin), <순무를 다듬는 여인 Woman Cleaning Turnips>, 1738년

 

샤르댕의 그림은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화와 정직을 조언해주고 있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을 통해 실제 현실에서는 잡을 수 없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은 도덕적 가치까지도 표현한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정물화가로 인정받았던 샤르댕은 후에 세잔의 정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2

 

설득

 

 

회화는 어떤 유용성이나 도덕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서도

그 장면의 위엄성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고,

가시적인 교훈을 통해

인간을 교화시킬 수 있다.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 <사보나롤라의 심문>, 1843년

 

 

 

 

 

장 바티스트 그뢰즈, <부서진 주전자>, 18세기

 

 

 

 

 

피에테르 코르네리츠 반 슬링헬란트, <앵무새를 들고 있는 소녀>, 17세기

 

 

 

 

 

가브리엘 메취, <청어가 있는 점심식사>, 17세기

 

 

 

 

"의심할 여지없이 예술가는 그 시대의 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따르는 사람이거나 인기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어떤 자비로운 신이 젖먹이를 엄마 젖가슴에서 일찍 떼어내서 보다 적령(適齡)의 여자의 젖을 먹여 멀리 떨어진 그리스의 하늘 아래서 성년으로 키워냈다고 하자. 그가 낯선 사람이 되어 현 시대로 돌아온다면, 그의 등장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가멤논의 아들처럼 그 존재를 정화시키기 위해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는 현재로부터 그의 소재들을 받아들일 것이 확실하지만, 그 소재들의 형태는 보다 고상한 시대로부터, 심지어 시간을 벗어나 그 자신의 본질의 절대성과 불편의 통일성으로부터 형태를 빌려올 것이다. 그 뒤에 자신이 천상의 순수한 창공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이슈화하면서 부패한 세대와 시대에도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임을 계속해서 흘려보낸다. 그의 소재들, 즉 허상은 기품을 받은 것처럼 불명예스러울지 모르지만, 형태는 항상 순수하여 그것의 변덕스러움을 피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 1세기의 로마인들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어왔다. 하지만 황제들의 입상들은 항상 우뚝 서 있었고, 사원은 신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눈에 여전히 신성하게 남아 있었으며, 네로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의 악행에 대항해 문제제기를 했던 대피처의 건물들은 고귀한 스타일로 남아 있다. 인류가 존엄성을 잃어버릴 때 그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예술이다. 진실은 계속해서 환상 속에서 살아 있고, 그 복제품은 어느 날 모델을 복원시키는 데 이용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 《미학 교육에 관한 편지 Letter sur l'Education esthetique》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세비야의 물장수 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0년

 

 

 

진실이 크면 클수록 거짓은 그만큼 더 우리를 배신하게 되듯이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에 더 배신감을 느낀다. 이 그림에서는 물잔과 항아리를 실제와 너무 똑같게 묘사해서 갈증을 풀어주는 듯 잠시 동안이라도 감상자에게 착각을 일으킨다.

 

 

 

 

 

3

 

한계

 

 

회화는 물질적인 모방이 제약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으나,

허구는 뒤로 물러나고

정신만은 더 커지는 것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브리오슈 빵>, 176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술 마시는 사람>, 1629년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일부분, 1485년

 

 

엄숙한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던 시기에 보티첼리는 신화 속 여신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비로소 눈을 돌리게 한 역사적인 작품이 되었고, 보티첼리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4

 

표현

 

 

회화는 표현의 예술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표현 예술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

회화는 스타일로 인물을 이상화시키면서,

다시 말해 생생한 개성 속에서

전형적인 참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아름다움으로 표현을 가다듬을 수 있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B.C. 175~B.C. 150년

 

 

 

 

 

산드로 보티첼리, <아테나 여신과 켄타우로스>, 1482년

 

 

 

 

 

라파엘로 산치오, <절름발이의 치유>, 1515년, 템페라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막달리나 마리아 앞에 나타난 예수 Christ Appearing to Mary Magdalene>, 1651년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밝은 부분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주위와 배경에 어두운 부분이 넓게 배치되어,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특징이 있다.

 

 

 

 

 

5

 

숭고함

 

 

회화는 숭고하게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회화 자체의

고유 수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화가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엠마오의 만찬>, 1628년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 성경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 1638~164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 1489~149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그림을 '역동적인 초상화 양식'이라 지칭하였다. 돌아서는 여인과 담비의 동작을 통해 화면 우측의 공간으로부터 누군가가 접근하여 주의를 끌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6

 

구상

 

 

화가는 주제를 생각해내거나

첫 이미지를 고안할 때부터

회화 고유의 특별한 표현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

 

 

 

 

 

다비트 테니르스,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는 원숭이들>, 1660년

 

 

 

 

아드리안 브라우머, <싸움질하는 농부들>, 1631~1635년

 

 

 

 

 

<볼테르의 계단>, 18세기

 

 

 

 

 

폴 슈나바르, <역사의 철학>, 1850년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9년

 

 

 

 

 

 

"회화는 질투심 많은 여신이어서 아낌없이 자신에게 헌신해줄 연인들을 바라고 있다."

- 미켈란젤로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The Death of Socrates>, 1787년

 

 

 

피라미드형 구성이 명확하지 않다면 수평적인 방향이 화면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피라미드형 구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면 수직적인 방향이 화면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7

 

통일성

 

 

화가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첫 번째 방법은 배열이다.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은 그 형벌의 대상자인 범죄자를 거의 압도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Horace, B.C. 65~B.C. 8)의 시 구절

 

 

 

 

피에르 폴 프뤼동, <범죄자를 쫓는 정의와 징벌의 여신>, 1808년

 

 

 

 

 

"먼저 나를 감동케 하라. 나를 놀라게 하라. 나를 고뇌케 하라. 나를 전율케 하고 울게 하며 떨게 하라. 나를 분노케하라. 그러고 나서 너는 네가 할 수 있다면 내 눈을 즐겁게 하라."

-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조반니 벨리니, <왕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1487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565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그리스도의 세례>, 1472~1475년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 세례자 요한의 탄생>, 1486~1490년

 

 

 

 

 

피에트로 페루지노,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예수>, 1481~1482년

 

 

 

 

라파엘로 산치오, <디스푸타, 성체에 대한 토론>, 1509~1510년

(♣ 디스푸타Disputa는 '논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성찬(성체)', '무구수태', '삼위일체' 등 중요한 신학상의 문제를 논하는 성직자, 성인, 교부(敎父) 등의 집회도를 말한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10~1511년

 

 

 

 

니콜라 푸생, <유다미다스의 유언>, 1643~1644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성 부르노의 삶 : 레이몽 디오크레스의 죽음>, 1645~1648년

 

 

 

 

 

니콜라 푸생,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37년

 

 

 

 

 

니콜라 푸생, <구출된 어린 피루스>, 1634년

 

 

 

 

 

렘브란트 반 레인, <100플로린 동전>, 1646~1650년

 

 

 

 

라파엘로 산치오, <예수의 변모>, 1516~1520년

 

 

 

 

 

라파엘로 산치오, <시스티나 성모>, 1513~1514년

 

 

 

 

 

"우리는 화가에게 '피라미드형으로 구성하시오, 구멍을 막으시오, 비어있는 곳을 남겨두지 마시오, 각과 평행선 구도를 피하시오, 콘트라스트를 찾으시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느낌에 따라 구성하시오. 그러나 당신의 조합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당신이 선택하고 느꼈을지 모르는 통일성으로 선과 그룹, 대중의 무리들, 방향, 크기를 갖추도록 하시오'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회화총론Traite Complet de Peinture》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2~1614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 리비아에게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811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 리비아에게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864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Eustache Le Sueur), <성 브루노의 삶 : 기도하는 성 브루노 Life of St. Bruno : St. Bruno at Prayer>, 1645~1648년

 

 

 

르 쉬외르는 그림의 구석에 시점을 몰아둠으로써 세속적인 시선과 떨어져 있으며, 은둔 수도자가 세상일을 보지 못하게 가려주는 베일을 살짝 들어 올려주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8

 

원근법

 

 

그림을 구성하는 화가가

원근법을 확실히 알고 있고

그것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법칙들을 지킨다는 것은

일부 감각에 호소해야 할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년

르네상스 시기에 처음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3차원적 공간감을 창출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40년경

마사초의 후계자로 평생 원근법에 몰두한 우첼로는 선 원근법으로 공간적 깊이를 표현하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케르메스>, 1635년

 

 

 

 

파울로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식>, 1563년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서약>, 1794년

 

 

 

 

 

앙투안 장 그로,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 1808년

 

 

 

 

 

"일부는 앉아 있고 일부는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방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수평선을 어떤 서 있는 사람의 높이로 맞추어야 한다. 이 경우 그림을 보는 관객은 그림 속 인물 옆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림 속에 앉아 있는 두세 사람만 표현한다면 수평선의 높이는 앉아 있는 사람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이 좋다. 잠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다면, 관객은 그림 속 인물들 옆에 같이 앉아서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 중 한 사람이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머리를 약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앞의 예에서와 같이 서 있는 사람의 높이로 수평선을 맞추어야 한다."

 

- 요셉 아데마르(Joseph Adhemar, 1797~1862), 저서 《원근법 논문 부록Supplement to the Treatise upon Perspective》에서

 

 

 

 

 

안드레아 만테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 중 일부, 148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년,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니콜라 푸생, <솔로몬의 심판>, 1649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에페소스에서 설교하는 성 바오로>, 1649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호메로스의 신격화>, 1827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성 브루노의 삶 : 나눔>, 1645~1648년

 

 

 

 

라파엘로 산치오,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1511~1513년

 

 

 

 

 

"좁은 거리에 있는 집의 정면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는 반대편 벽에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그 건물 정면을 그리려고 해서는 안 되며, 상상의 거리를 앞에 두고 그려야 한다. 즉 보다 넓은 거리, 집 정면 높이의 3배 정도의 거리를 상정하고 그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림 속의 인물들이 비틀거리거나 뒤로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지오반 파올로 로마초(Gian Paolo Lomazzo, 1538~1592), 저서 《그림 예술의 논문Trattato della Pittura》에서 발타자르 페루치(Balthasar Peruzzi, 1481~1536)와 라파엘로는 위와 같이 생각했다고 기록

 

 

 

 

 

"우리가 어떤 가정을 하든 다섯 발짝 떨어져 어떤 사람을 보는 각도는 열발짝 떨어져 보는 각도보다 항시 두 배 정도 크며, 이러한 문제는 기하학도 수학도 풀 수 없는 것이다."

 

- 볼테르(Voltaire), 저서 《뉴턴의 철학Philosophy of Newton》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레다의 두부 습작 Studies for the Head of Leda>, 1530년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를 그리기 전에 그린 데생으로, 레다의 머리에 빛이 비춰지는 조명을 생각하고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수많은 여성들을 그릴 때 남성 모델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속 수많은 여성들도 남성처럼 근육이 있음을 볼 수 잇다.

 

 

 

 

 

9

 

제스처

 

 

단지 데생으로 국한시켜 그림의 구성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든,

아니면 스케치를 채색하는 것이든 간에

화가는 데생을 통해서

각 인물들의 자세. 몸짓, 동작을

명확히 함으로써만 표현에 들어간다.

 

 

 

 

 

 

"뭐라고! 즉석에서 그린다! 다시 말해 스케치와 마무리를 동시에 하고, 단박에 상상력과 판단력을 충족시키며, 단숨에 그린다고! 그것은 아마 인간이 일상의 언어로 신들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재능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 재능의 노력을 감추려 할 것인가? 그런 놀라운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즉석에서 그린다는 것은 수정이나 변화 없이 빠르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다 마쳤을 때 어떻게 보일지 미리 현명하게 검토해보는 스케치 없이 즉흥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화가들 중 가장 감동시킬 줄 안다고 알려진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1594)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같은 화가에게 있어서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특별히 루벤스의 경우 예술가의 생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손질이라는 이 최고의 노동이, 그들의 힘과 확고함으로부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심치 않고 믿는 것과 같이 흥미롭게도 화가의 창조 열의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는 그림의 윤곽을 처음 잡을 때 이미 전체적인 구상 안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 있응 것이며, 여러 부분의 배열 속에 재능이 극대화되어 발휘되는 것으로, 이는 진실로 화가가 최선을 다하는 작업이다."

 

-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

 

 

 

 

무덤 안치 장면을 그린 라파엘로의 스케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7~1541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천벌을 받는 사람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구원을 받는 사람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마리아와 예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중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기록

 

 

 

 

미켈란젤로, <이사야 예언자>, 1508~1512년

 

 

 

 

미켈란젤로, <쿠마에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델포이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페르시아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리비아 무녀>, 1508~1512년

 

 

 

미켈란젤로, <예레미아 예언자>, 1508~1512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스케치 일부분

 

 

 

 

자크 칼로, <음식을 준비하는 집시들>, 1621년

 

 

 

 

니콜라 투생 샤를레, <동정>, 석판화, 1819년

 

 

 

 

외스타슈 르 쉬외르, <교황의 편지를 읽고 있는 성 브루노>, 1645~1648년

 

 

 

램브란트 반 레인, <이삭의 희생>, 1635년

 

 

 

 

 

렘브란트 반 레인, <아브라함의 희생>, 1655년

 

 

 

 

렘브란트 반 레인, <눈 먼 토비>, 1651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 1799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1817년

 

 

 

 

"우리가 그렇게 마시면서 성대한 식사를 하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 한 노예가 은으로 된 해골을 가져왔는데, 그 해골은 마디마디와 척추가 모든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해골을 테이블 위에 놓고 움직이는 사지를 여러 차례 이리저리 돌려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면서 트리말시온(trimalcion)은 '불쌍한 인간이여! 이게 바로 우리가 아닌가!'하고 외쳤다."

 

-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Arbiter, 27~66)의 풍자극에

 

 

 

기원전 1,000년경의 그리스 항아리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이삭 줍기 Gleaners>, 1857년

 

 

자연주의 화가로 알려진 밀레는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생활과 주변의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은 파리 근교 바르비종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땅에 떨어진 이삭 줍는 모습을 담았다.

 

 

 

 

 

10

 

자연

 

 

구성이 일단 결정되고

제스처와 동작의 모습을 잡았다면,

화가는 그가 표현해야 하는 형태에

그의 이상(理想)에 맞는 그럴듯함과

자연스러움을 주기 위해

모델과 협의한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제우스와 이오>, 1531~1532년

 

 

 

 

미켈란젤로, <에리트레아 무녀>, 1508~1512년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년

 

 

 

 

클로드 로랭, <로마 주변의 풍경>, 1639년

 

 

 

 

니콜라 푸생, <평온한 풍경>, 1650~1651년

 

 

 

 

"이는 여전히 정확한 개념과 어떤 지고(至高)의 예술을 창조하는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초보 학습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건축학이 여러 실용적인 방법을 갖추고 있는 병기고처럼 생각할 수 있고, 보다 높은 단계의 학습 초기에서는 건축학이 구성의 모든 원칙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학은 모든 미술 작품에 어떤 기초와 어떤 틀을 제공하고 있다. 건축학은 조형물에 균형 개념을 제시한다. 건축학은 안정된 선(線) 속에서 그림이 될 만한 생각이 자리 잡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건축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고착시키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건축학을 배움으로써 회화에서 어떤 장면이 비틀거리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그 장면이 활기차도록 덩어리와 움직임, 생명과 감정까지도 자리 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예전에 어떤 훌륭한 조각가가 데생 교육에 관해 이야기한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어느 강의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긁어모으면서 기분이 고조된 조각가는 미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美)을 창조한다."

 

- 무명의 시인이 어떤 옛 화가 한 명을 두고 읊은 시 구절

 

 

 

 

라파엘로 산치오, <파르나소스>, 1509~1511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오이디푸스>, 1808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샘>, 1856년

 

 

 

 

라파엘로 산치오, <성 가족>, 1518년

 

 

 

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33년

 

 

 

 

샤를 조셰프 나투아르, <프시케의 화장실>, 1735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인상 : 해돋이 Impression : Sunrise>, 1872년

 

 

인상주의, 인상파의 이름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 효과를 통해 인상을 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이 전시되었던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는 대충 그린 듯한 느낌 때문에 당대에는 온갖 야유와 비난으로 시달렸다.

 

 

 

 

11

 

 

 

화가는 그가 택한 형태를 확인한 뒤에

빛과 색상으로써 그가 생각한 바를

도덕적으로 표현하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함으로써

작품을 마무리한다.

 

 

 

 

메디치가 로렌초(Lorenzo) 무덤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생각하는 사람>, 1531년

 

 

 

 

조반니 발리오(Giovanni Baglione),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1602년

( 극명한 구성의 명암법, 키아로스쿠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피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년

( 루벤스는 렘브란트와 대척점에서 있으면서 또 다른 명암법을 보여주었다.)

 

 

 

 

요하네스 얀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년경

 

 

빛을 통해서 인물이 갖고 있는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투명하고 맑게 극대화시켰다. 목선 아래쪽으로 갈수록 어둡게 떨어지는 명암은 진주귀걸이를 더 영롱하게 비추는 효과를 보여준다.

 

 

 

 

12

 

명암

 

 

명암은 어떤 형태를 도드라지게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전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 아름다움의 법칙과

자연 진리의 법규를 따르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17년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탈출>, 1609년

 

 

 

 

레오나르드 브라머, <동방박사의 예배>, 1628~1630년

 

 

 

헤리트 반 혼트호르스트, <군인과 소녀>, 1621년

 

 

 

 

지로데, <프랑스 영웅들의 영혼을 맞이하는 오시안>, 1801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의심 많은 도마>, 1601~1602년

 

 

 

 

 

발랑탱 드 볼로냐,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20~1622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 <마리 드 메디치 대관식>, 1622~1625년

 

 

 

 

"전면적으로 비추는 빛은 부분적이고, 적은 양의 빛보다 인물을 보다 우아하게 만들어준다. 그 이유는 넓고 강한 빛은 물체의 도드라짐을 감싸주고 끌어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그 빛이 비춰주는 작품은 멀리서도 우아하게 살아나게 된다. 반면에 좁은 빛 아래서 그려진 그림은 어두운 부분이 많아서 멀리서 보면 밋밋한 것처럼 보인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저서 《회화론Treatise on Painting》의 363장에서

 

 

 

 

 

렘브란트 반 레인, <명상에 잠긴 철학자>, 1632년

 

 

 

 

렘브란트 반 레인, <책을 보는 철학자>, 1645년

 

 

 

 

렘브란트 반 레인, <야경>, 1642년

 

 

 

 

"로마의 젊은 처녀들은 결혼을 서약한 다음 판테온의 원형 홀에 신랑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인들 앞에 나타난다. 이곳은 둥근 천장 중앙의 유일하게 열린 부분을 통해서만 햇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위에서 내리 비추는 빛이 가장 선호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자들이 여기에서 최고의 심판관이며, 그녀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똑바른 자세로 서 있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신랑만이 자연스럽다. 그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빛은 그의 얼굴을 우아함으로 돋보이게 하고, 키를 무척 커 보이게 한다."

 

-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kelmann, 1717~1768), 저서 《고대인들의 건축적요Remarks upon the Architecture of the Ancients》에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 <신성한 밤>, 1529~1530년

 

 

 

 

조슈아 레이놀즈, <뱀프파일드 초상화>, 1776년

 

 

 

 

"베네치아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베네치아의 대가들이 따랐던 원칙을 이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택했다. 나는 그들의 그림에서 특별한 빛과 그림자(음영)의 효과를 알아차리고서 노트 한 장을 뜯어서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순서와 같은 방법으로 종이 전체를 검은색 연필로 서서히 칠하면서 종이의 하얀 부분을 빛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몇 번 실험해 본 후에 나는 종이가 항상 거의 비슷한 면적으로 칠해져 잇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대가들의 일반적인 관행은 주된 밝은 부분과 2차적인 밝은 부분의 빛에 그림의 4분의 1 이상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분의 1은 어두운 부분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반농담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덩어리로 크게 연필 칠을 한 종이, 어떻게 보면 거칠게 얼룩덜룩한 이 종이를 눈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두고 보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방식에 놀라게 된다. 즉 관객들은 빛과 그림자의 뛰어난 배분이 가져오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림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역사적인 주제든 아니면 풍경이든 초상화든 정물화든 간에 상관없이 빠짐없이 나타나는 즐거움인데, 그 이유는 동일한 원칙이 모든 분야의 회화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

 

 

 

 

 

"우리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야외에서, 충만한 햇빛 속에서 강렬하게 빛을 받고 있는 어떤 아이들의 눈부신 살색에 감탄한다. 이 광채는 신선한 그들의 머리 위에 어떠한 어둡고 짙은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아우르며 뚜렷한 입체감이 있다. 또한 모든 것이 연하고 신선하나, 너무 부드럽지 않고 너무 흐릿한 것은 조금도 없다···. 그러한 효과를 모방하기 위해 화가는 빛의 광채를 배가시켜야 하고, 그늘의 어두움을 높여서는 안 된다."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저서 《회화개론Traite de Peinture》에서 루벤스를 염두에 두고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20~1621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장갑 낀 남자>, 1520~1523년경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1822년

 

 

 

 

안 루이 지로데, <잠자는 엔디미온>, 1791년

 

 

 

 

프랑수아 마리우스 그라네, <로마 카푸친 수도원 내부>, 1818년

 

 

 

 

장 바티스트 위카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어주는 베르길리우스>, 1790~1793년

 

 

 

 

렘브란트 반 레인, <토비아와 그 가족을 떠나는 천사>, 1637년

 

 

 

 

렘브란트 반 레인, <신성한 가족>, 1640년

 

 

 

 

클로드 로랭, <사무엘의 축성을 받는 다윗>, 1647년

 

 

 

 

프란치스코 프란치아, <검은 옷을 입은 청년>, 1510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밤의 카페 테라스 Cafe Terrace at Night>, 1888년

 

 

반 고흐는 샤를 블랑의 색채이론에 따라 보색 관계로 화면을 구성했다. 이 작품은 청색 하늘과 보색관계인 노란색을 대비함으로써 색을 통해 단순한 색의 재현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13

 

색상

 

 

색상은 다른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화가는 반드시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색상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1880년판 색상환 도표

 

 

 

6색 색상환

 

 

 

 

12색 색상환

 

 

 

 

 

"캔버스에 한 색을 칠하면, 붓이 지나간 자리에 그 색이 칠해지는 것 이외에도 그 주변에 보색의 후광이 생긴다. 예를 들어 빨간색 원을 그렸다면 그 주위에 옅은 초록색 잔영이 생기며, 빨간색으로부터 그 잔영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오렌지색 원 주위에는 파란색의 후광으로 둘러싸여지며, 노란색 원 주위에는 보라색 후광이 나타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 셰르뢸

 

 

 

 

"1829년 4월 어느 날씨 좋은 날, 철학자 괴테와 정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만개한 노란색 크로커스 꽃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바닥으로 앉아 다시 바라보니 보라색 자국이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어느 날 들라크루아가 노란색 옷 장식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원하는 노란색을 찾지 못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는 '루벤스나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은 어떻게 그 아름답고 빛나는 노란색을 찾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을 가기로 하고 마차를 불렀다. 1830년 당시 파리에는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이륜마차들이 무척 많았다. 이들 마차 중 하나가 들라크루아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마차에 타려는 순간 멈춰 서서 마차의 노란색이 그늘진 곳에 보라색 잔영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곧장 그는 마차를 돌려보내고 크게 감동하여 돌아와서는 일단 그가 발견한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법칙이란 그늘진 곳에는 색의 보완이 항상 미미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햇빛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 때 그 현상은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괴테가 말한 것처럼 우리 눈은 배경에 맞는 보색을 보게 된다."

 

- 요한 페터 에커만(Johann Peter Eckermann, 1792~1854), 저서 《괴테와의 대화Conversations of Goethe》에서

 

 

 

 

 

"우리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아파트에 있고, 창문은 빨간색 커튼이 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커튼 위에 지름 3~4밀리미터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받기 위해 조금 떨어져 하얀 종이를 받친다면, 이 햇살은 하얀 종이 위에 초록색 자국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커튼이 초록색이라면 빨간색 자국이 나타날 것이다."

 

-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저서 《기하학 서술Geometric Descriptive》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외젠 들라크루아, <성 세례자 요한의 죽음>, 1838년

 

 

 

 

외젠 들라크루아, <돈 주앙의 난파선>, 1840년

 

 

 

 

외젠 들라크루아, 1845년, 뢱상부르 궁 도서관 천장화

 

 

 

 

외젠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들>, 1834년

 

 

 

 

"붉은 강낭콩이든 아니면 파란 청금석이나 옥색 터키석이든 간에 색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동양의 화가들은 그 색상이 더 반짝이도록 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음영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좀 더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무미건조하고 단조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마디로 이러한 진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진동 없이는 어떤 색도 눈으로 봐줄 수 없는 색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같은 조건 하에서 어떤 소리도 이러한 진동 없이는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 보몽, 《르뷔 데 되 몽드Revnu des Deux Mondes》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바다를 대하고 연설하는 데모스테네스>, 1859년

 

 

 

 

외젠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840년

 

 

 

 

페테로 파울 루벤스, <사랑의 정원>, 1630~1631년

 

 

 

페테로 파울 루벤스, <최후의 심판>, 1614~1617년

 

 

 

 

외젠 들라크루아, <무덤의 그리스도>, 1848년

 

 

 

 

외젠 들라크루아,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1839년

 

 

 

 

외젠 들라크루아, <트라얀의 정의>, 1840년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년

 

 

 

촐 세잔(Paul Cezanne), <사과와 오렌지 Apple and Oranges>, 1899sus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로, 소파 위에 놓인 흰색 식탁보는 과일을 더욱 빛나고 도드라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작은 색면들이 겹쳐지면서 대상은 입체감을 갖게 된다.

 

 

 

 

 

14

 

터치

 

 

터치의 특징,

곧 물질적 실행의 질은

화가에게 마지막 표현의 수단이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성 베드로의 순교>, 1585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성모 승천>, 1516~1518년

 

 

 

 

안토니오 다 코레조, <레디와 백조>, 1530년

 

 

 

니콜라 푸생, <레베카와 그 동료들>, 1648년

 

 

 

 

후세페 데 리베라, <성 오누프리우스>, 1630년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 1620~1621년

 

 

 

 

장 일 레스투, <성령강림>, 1732년

 

 

 

 

프랑수아 부세,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56년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모르페우스와 아리리스>, 1811년

 

 

 

 

헤라르트 테르뷔르흐, <편지 읽는 여인>, 1660~1662년

 

 

 

 

가브리엘 메취, <편지 읽는 여인>, 1665년

 

 

 

 

가브리엘 메취, <아픈 아이>, 1663~1664년

 

 

 

 

장 바티스트 그뢰즈, <비둘기를 안고 있는 소녀>, 연도 미상

 

 

 

 

다비트 테니르스,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1637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베 짜는 여자>, 1655년

 

 

 

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의 초상>, 1721년 이전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년

 

 

쇠라는 물감을 섞는 대신 색을 원색의 미세한 점들로 분할하는 방법, 즉 '분할주의' 혹은 '점묘법'을 고안해냈다. 인상주의가 색과 빛을 대체로 동일시했다면, 쇠라는 색과 빛의 성질이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상주의와는 다른 신인상주의를 창조했는데, 이는 '물리적' 혼합 대신에 안구 위에서 섞는 '시각 혼합'을 제안한 샤를블랑의 색채론을 연구하고 활용할 것이다.

 

 

 

 

 

15

 

다양성

 

 

회화와 어떤 관습들은 다양하며,

내적인 특성이든 장식적인 특성이든

그리는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화가가 채워야 하는

표면의 성격에 따라서

다양해야만 한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1511~1512년, 프레스코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고대 로마의 회화 양식을 보여주는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벽화

 

 

 

 

"석회반죽 면이 아직 마르지 않은 동안에 석회의 탄산칼슘은 안료를 빨아들이고 스며들게 하며, 완전히 반투명한 니스처럼 두께감이 없는 진짜 결정체 같은 것으로 그것의 표면을 형성한다. 이 피막은 그림을 손상키는 모든 외부적인 요인으로부터 그림을 보호하게 된다. 튼튼한 벽에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견고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말하자면 습기의 영향과 같이 불순한 기후의 공기 속에서도 변치 않는 내구성을 지니게 된다."

 

- 프랑수아 아나톨 그루이에(Francois Anatole Gruyer, 1825~1909), 저서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fresques de Raphael》에서

 

 

 

 

 

프레스코화로는 조금도 다시 손댈 필요가 없다.

맨 처음에 다 처리되어야 한다.

 

- 극작가 시인 몰리에르(Moliere, 1622~1673) 프레스코화에 대해

 

 

 

 

 

피에르 미냐르, 파리의 발 드그라스 궁전 천장화, 1663년, 프레스코화

 

 

 

이폴리트 플랑드랭,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1846년, 파리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 벽화

 

 

 

 

안드레아 만테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 중 일부, 1482~1492년

 

 

 

 

한스 멤링, <성 우르술라 성골함>, 1489년

 

 

 

안토니오 다 코레조, <성모 승천>, 1526~1530년, 두오모 성당 돔 천장화 (이탈리아 피렌체)

 

 

 

 

 

줄리오 로마노, <넵투누스와 물의 요정>, 1528년

 

 

 

 

라파엘로 산치오, <신들의 향연>(위쪽)과 <신들의 회의>(아래쪽), 1517~1518년

 

 

 

 

"파르마(Parma)의 산 조반니(San Giovanni) 예배당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면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Antonio da Correggio)의 붓은 벽을 뚫고 하늘로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자신이 딛고 있는 들판을 없애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면서 견고한 표면에 대칭의 통로만을 그려 넣고, 가상 건축물의 장식물로 가장자리 틀을 장식했던 미켈란젤로보다 더 대담하게 코레조는 실제 건축물이 없어져 보이게 끔 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빈 공간으로 그 건축물을 대신하고, 끝없는 이 공간의 한 중앙에 불규칙적인 선형으로 무한히 많은 무리들이 매달려 있으면서 가장 어려운 수직 원근법에 따라 서로서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 앙리 들라보르도(Henri Delaborde, 1811~1899, 예술 평론가), 저서 《현대 예술에 대한 잡기Melanges sur l'art contemporain》에서

 

 

 

 

안토니오 다 코레조, <예수 승천>, 1520~1521년, 산 조반니 성당 천장화 (이탈리아 피렌체)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그림에 칠해진 오일 분자들이 쌓이고, 마르면서 증발로 인해 오일 분자들의 흔적들이 낳는다. 표면으로 나타날 때 오일 분자는 이미 말라버린 분자에 의해 형성된 얇은 막이나 증발을 막아주는 불침투성의 니스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오일 분자들은 물감의 경계 부분에서 이탈하려는 진행에 막혀 기름층을 형성하고, 이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농축되어 그림을 누렇게 변색시킨다."

 

- 토반하인 남자(Charles, Baron de Taubenhein, 1769~?), 저서 《밀랍 유화에 대하여De la Peinture a l'huile-cire》에서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 <밀짚모자를 쓴 폴리냑 공작부인>, 1782년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1722~1765년

 

 

 

 

 

"(라 투르는) 그로(Gros)와 지로데(Girodet), 게랭(Guerin), 그리고 나, 모두 'G'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우리 화가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이보다 나은 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 1770~1837), 라 투르가 초벌칠을 한 두상을 보여주면서

 

 

 

 

조르주 루제,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 1811년

 

 

 

 

 

"에나멜화는 공기, 물, 열기, 추위, 습기, 먼지를 포함해서 유화를 손상시킬 수 있는 모든 요인들로부터 안전하다. 따라서 걸작들의 보존을 위해 대량으로 칠해지는 에나멜은 헤아릴 수 없는 장점이 있다."

 

- 루이 뒤시유(Louis Dussieux, 1815~1894), 저서 《에나멜 역사의 연구Recherche sur l'histoire de l'Email》에서

 

 

 

 

 

"색상 염료를 가루로 빻아진 유리와 섞어서 불로 녹이면 반짝거림은 변하지 않는다. 유리가 액체로 변하면서 염료의 미립자를 둘러싸고 에나멜 위에 이 미립자를 고착시키게 된다. 불의 작용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러한 작품은 프레스코화나 아교풀 화(peinture a l'eau encollee)와 같이 보인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무런 탈 없이 다시 손질이 가해질 수 있다···."

 

- 피에르 쥘 졸리베(Pierre Jules Jollivet, 1794~1871), 저서 《용암 위의 에나멜화Peinture en Email sur lave》에서

 

 

 

 

레오나르 리모쟁, <그리스도 수난도>, 1553년

 

 

 

"인간의 기술에 있어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고, 시각적으로 보기에 이보다 더 예쁘고 놀라우며, 내구성과 정교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 영상으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물을 보여주는 (에나멜) 그림이 아닌가!"

 

-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Jacques 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

 

 

 

 

장 페니코, <갈보리 산 가는 길>, 1525~1535년

 

 

 

 

레오나르 리모쟁, <아이네아스>, 1540년

 

 

 

 

장 프티토,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 초상>, 1660년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8세기, 과슈화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 <전통 의상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 19세기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중 1월과 6월, 1412~1416년

 

 

 

 

예한 푸케, <프랑스 연대기> 중

'필립 왕에게 에드워드 3세의 헌정' 장면, 1455~1460년

 

 

 

 

자크 니콜라 파이요 드 몽타베르,

<마멜루크의 루스탐 초상>, 1806년

( 마멜루크Mameluk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군을 말함)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수채화와 같이 빨리 지워져버릴 때에만 무관심한 남자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러나) 어떤 연인의 마음속에서는 이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의 힘에 의해 고착된다. 그것이 바로 납화이다. 시간도 결코 그것을 지울 수 없다."

 

- 플루타르코스(Plutarch, 45~120)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굴 Oysters>, 1862년

 

 

똑같은 정물을 그리더라도 어떤 화가는 단지 자연을 모방할 뿐이고, 또 다른 화가는 자연을 모방하면서도 해석하고 선택하며 정리한다. 그것이 장인과 예술가를 구분하는 차이이다.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에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그의 그림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이 특징이다.

 

 

 

 

 

16

 

생명력

 

 

회화의 영역이

자연 전체로 확대된다 할지라도

회화 예술에는 상대적이든 또는 절대적이든,

지역적인 또는 범세계적인 의미에 따라서

단계적인 서열이 있다.

 

 

 

 

 

앙리 오라스 롤랑 들라포르트, <정물>, 1765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부엌 정물>, 1732년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자두가 있는 그릇>, 1728년

 

 

 

 

 

 

카스파르 네츠허르, <음악 레슨>, 1664~1665년

 

 

 

 

카스파르 네츠허르, <구애> 1665

 

 

 

 

가브리엘 메취, <음악을 작곡하는 여성과 호기심 많은 남자>, 1662~1663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Farm Garden with Sunflowers>, 1907년

 

 

화면을 가득 채운 꽃과 녹색, 노랑, 빨강, 흰색 등 명도 대비는 풍부함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아르누보 계역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했다. 그의 그림들은 '색채로 표현된 슈베르트의 음악'이라 불리며,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17

 

스타일

 

 

회화의 다양한 장르가

열등한 형태에 속하느냐,

아니면 우월한 형태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방과 스타일 중 어느 것이

주된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얀 데 헤엠, <샴페인 잔과 파이가 있는 아침식사 정물>, 1642년

 

 

 

 

라헬 라위스, <꽃이 있는 정물>, 1664~1665년

 

 

 

 

렘브란트 반 레인, <큰 나무가 있는 초가집>, 1641년

 

 

 

 

실로몬 반 라위스달, <곡물밭 풍경>, 1638년

 

 

 

 

니콜라스 피터스존 베르헴, <세 사람의 목동 무리>, 1656년

 

 

 

 

니콜라 푸생, <이상향의 풍경>, 1645~1650년

 

 

 

 

클로드 로랭, <석양>, 1646~1647년

 

 

 

 

 

클레드 로랭, <석양의 항구>, 1639년

 

 

 

 

빌럼 반 더 펠더, <풍랑>, 1660년

 

 

 

 

라자르 브뤼인데, <낚시꾼이 있는 호수 풍경>, 18세기

 

 

 

얀 피트, <큰 개, 난쟁이와 소년>, 1652년

 

 

 

 

멜키오르 돈데코테르, <닭과 오리>, 17세기

 

 

 

 

 

파울루스 포테르, <어린 황소>, 1647년

 

 

 

 

 

필립 바우베르만, <백마>, 1646년

 

 

 

 

 

프란스 스니데르스, <사슴 사냥>, 17세기

 

 

 

 

 

앙투안 장 그로, <아부키르 전투>, 1807년

 

 

 

 

앙투안 장 그로, <아일라우 전투>, 1807년

 

 

 

 

라파엘로 산치오, <콘스탄티누스 전투>, 1517~1524년

 

 

 

 

샤를 르 브룅, <알렉산드로스 전투>, 1673년

 

 

 

 

오라스 베르네, <소모지에라 전투>, 1816년

 

 

 

 

 

오거스트 라페, <나폴레옹의 근위병들>, 1836년

 

 

 

 

조슈아 레이놀즈, <사라 캠프벨의 초상>, 1778년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 초상>, 1805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브로글리 공주>, 1851년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37년

 

 

 

 

조슈아 레이놀즈, <존슨 박사>, 1770년

 

 

 

 

조슈아 레이놀즈, <그란비 후작 존 매너스>, 1766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베르탱 씨 초상>, 1832년

 

 

 

 

 

"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진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모습, 짐작컨대 16세기의 모든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고, 에라스무스의 비웃는 듯한 입술이 아니면서도 그와 같이 고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홀바인의 이 초상화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영혼이 이처럼 얼굴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결코 없었다."

 

- 폴 만츠(Paul Mantz)

 

 

 

 

안토니스 모르, <메리 여왕의 초상>, 1554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1659년

 

 

 

 

 

아드리안 반 오스타데, <마을 학교>, 1662년

 

 

 

 

아드리안 반 오스타데,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화가>, 1663년

 

 

 

 

폴 시냐크(Paul Signac),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 In the Time of Harmony>, 1893~1895년

 

 

조르주 쇠라를 이어 신인상주의(점묘주의)를 이끌었던 폴 시냐크는 색채 분할은 체계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 빛과 색채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며 모자이크화 된 작은 직사각형의 색점들을 통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밝은 색점들은 감각적이고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리듬감을 주었다. 또한 특유의 붓 터치감은 세심한 균형감을 줌으로써 현대적 감각을 돋보이게 했다. 1886년 시냐크는 파리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고, 1887년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파리 외곽의 아니에르 쉬르 센느(Asnieres-sur-Seine)에 가서 강의 풍경과 카페 등을 그렸다. 이때 반 고흐는 시냐크의 느슨한 기법에 감탄했고, 짧고 굵은 스트로크로 화면을 채우는 반 고흐의 기법에 영향을 미쳤다. 폴 시냐크의 작품들은 후대의 입체파와 야수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18

 

에필로그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방된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화가 Painter on the Road to Tarascon>, 1888년

 

 

이 작품은 1888년 반 고흐가 프랑스 아를(Arles)에 머물고 있을 당시 그려진 작품으로 이를 북동쪽 교외에 있는 몽마주르(Montmajour) 수도원을 지나 타라스콩(Tarascon)으로 걸어가는 반 고흐의 자화상이다. 전신이 그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유일한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아이리스 Irises>, 1890년

 

 

노란색 배경과 아이리스 꽃의 대조적 색깔이 강한 효과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샤를 블랑의 보색 대비를 바탕으로 하여 충실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아이리스는 원래 자주색에 가깝게 색칠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붉은색이 바래면서 푸른색 꽃잎으로 보인다고 한다.

 

 

 

 

♧ 간략한 서양미술사

 

 

 

선사시대 미술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류는 벽화 등을 그리며 미술 활동을 해왔다. 기원전 2만 년 전 알타미아 동굴 벽화나 라스코 동굴 벽화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고대 이집트 미술

 

태양 숭배, 절대왕권주의 중심이었던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 등을 통해 영혼불멸의 사상을 믿었다. 그 결과 얼굴과 발은 측면을 그리고 몸은 정면을 그리는 전형적인 틀이 생겨났다.

 

 

 

고대 그리스 미술

 

조화와 균형을 중심으로 신전 건축이 주를 이루었고, 황금 비례라는 이상적인 미(美)를 추구한 신들의 조각상을 많이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밀로의 비너스, 파르테논 신전 등이 있다.

 

 

 

고대 로마 미술

 

미(美)의 기준에 있어 기능성과 실용성, 합리성을 중시하였다. 콜로세움 극장, 카리칼라 황제의 목욕탕과 같은 건축물과 카이사르 흉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 등이 있다.

 

 

 

중세 미술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15세기 초까지 약 천 년 동안의 미술을 말한다. 기독교 중심의 세계가 형성되면서 종교적 필요에 따라 주문 제작되었다. 중세 미술은 크게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미술 3단계로 변화한다.

 

 

 

르네상스 미술

 

'재생', '부활'이라는 뜻의 '르네상스'는 인간 정신의 회복을 바탕으로 중세의 기독교 신앙 위주의 미술에서 인간 위주의 미술로 전환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전반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이 시대에 유화가 발명되어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이 있다.

 

 

 

바로크 미술

 

17세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절대 왕권이 성립하였고, 대표적 건축물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잇다. 회화에서는 역동적이면서 빛을 통한 강한 색채 대비를 추구했다. 대표적 작가로는 루벤스, 렘브란트, 베르니니, 카라바조 등이 활동했다.

 

 

 

로코코 미술

 

루이 15세가 통치하는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다. 18세기까지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성향이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 데 널리 유행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와토, 프라고나르, 부셰 등이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미술

 

18세기 계몽주의 여파로 귀족층이 몰락하면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주의 양식이 부활하게 된다. 대표적 작가로는 다비드, 앵그르 등이 있다.

 

 

 

낭만주의 미술

 

18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산업혁명, 미국의 독립, 나폴레옹의 전쟁 등 급변하는 시기에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며 등장하였다. 죽음, 전쟁, 광기를 표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주로 다루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제리코, 들라크루아 등이 있다.

 

 

 

자연주의 미술

 

19세기 중엽 낭만주의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 하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대표적 작품으노는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등이 있다.

 

 

 

사실주의 미술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시민 평등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평범한 일상과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발, 도시 근로자를 소재로 삼았다. 대상의 세부 특징까지 정확히 재현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사조다. 대표적 작가로는 쿠르베, 도미에 등이 있다.

 

 

 

인상주의 미술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중요한 회화운동.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은 귀족의 초상화나 신흥 부르주아층의 누드화 등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퇴폐적 관행에서 탈피하여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실적 묘사를 던져 버리고, 야외에서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였다. 모네의 《인상 : 해돋이》(1872)는 인상파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후 이들 인상주의는 현대미술 즉 모더니즘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

 

 

 

신인상주의 미술

 

점묘파라 불리며, 모자이크화 된 작은 직사각형의 색점들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 이 밝은 색점들은 감각적이고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리듬감을 주었다. 인상주의가 경험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한다면, 신인상주의는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 화가로는 쇠라, 시냐크, 피사로 등이 있다. 특히 시냐크의 작품들은 후대의 입체파와 야수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짧고 굵은 스트로크로 화면을 채우는 반 고흐의 기법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 미술

 

대략 1890년에서 1905년 사이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인상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찰나의 순간에 주목한 인상주의와는 달리 후기 인상주의는 작가만의 주관과 경험 등 화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하여 화가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떤 시점으로 보느냐의 주관성에 주목했다. 대표적 작가로는 반 고흐, 고갱, 세잔, 로트렉, 드가 등이 있다.

 

 

 

야수주의 미술

 

20세기 주류인 아방가르드의 사조로서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았다.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명암과 색채를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감성에 따라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했다. 대표적 작가인 마티스는 피카소와 함께 회화에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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