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공원 산책

 

 

 

 

김해경 지음

2020, 정은문고

 

시흥시중앙도서관

SA283007

신천역스마트도서관

 

525.93

김93ㅁ

 

 

 

창경원에 밤벚꽃놀이가 본격화되면서 경성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창경원을 찾았다.

 

벚꽃 사이에 켜진 일루미네이션 아래에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든 모던걸, 모던보이, 도포를 입은 노인이 동시에 보이며, 다른 만문 만화에서도 어린아이, 아버지, 룸펜까지 밤벚꽃놀이를 위해 창경원으로 모여들었다.

 

벚꽃 터널을 빠르게 휘돌아 나온 조선인 구경꾼들은 춘당지 앞 잔디에 설치된 공연장 바닥에 앉아서 '값싼 레뷰'를 하는 '레뷰걸'의 종아리 곡선에 황홀해하고 '흔한 요술, 기술'에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전통 무용 · 가부키 같은 일본의 전통 연행, 서양 음악과 춤, 마술 · 곡예 등 서로 이질적인 내용의 연행이 이어지는 방식인 레뷰는 근대를 설명하는 수사의 하나이다.

 

 

 

지은이 김해경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사회적 구성으로 본 서울의 역사문화경관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간에 구현되는 실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조경기사, 건축기사 그리고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를 취득했다. (사)한국전통조경학회 사무국장,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건국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경기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통 조경을 전공으로 하였으나 전통 사상과 공간의 상관관계보다 당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증적인 도상 자료에 관심이 많았다. 조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실제적인 공간 변화를 근대공원과 근대도시문화 관련 논문으로 발표했다.
공저로 『오늘, 옛 경관을 다시 읽다』, 『1930~40년대 경성의 도시체험과 도시문제』가 있고, 번역서로 『조경 설계 키워드 52: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이 있다.

 

 

 

 

차례

 

들어가는 글


1부 근대공원 태어나다


1. 외국에서 보고 온 이상 공간, 공원
2. 한국의 최초 공원, 각국공원
3. 민중의 첫 공원, 독립공원
4. 경성의 최초 공원, 파고다공원



2부 근대공원의 성장통

 

1. 조선의 흔적 지우기
2. 그들의 종교, 근대공원이 되다
3. 궁궐의 개방과 테마파크화
4. 일제가 새롭게 제시하다

 


3부 도시문화를 느끼다


1. 인공 자연의 대중 향유 장소
2. 공공과 상업, 소외와 집중의 장소
3. 끽다점에서 맥주를 마시다
4. 근대 교양과 아동이 등장하다

 


4부 공원은 나이테가 없다


1. 사라진 원형, 원형과 복원의 충돌
2. 공공장소의 이념 동상과 기억을 강요하는 기념비
3. 갈 곳 잃은 노년의 공원 이야기



나가는 글

 

 

 

 

 

박물관에 가다. 관내에는 초목 · 조수 · 어별 · 곤충 · 고금의 진귀한 것 등 없는 것이 없다. 학과 공작, 원앙새(중략) 모두 살아 있는데 이것들을 기르고 있다. 가히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수신사일기』)

 

나라 안의 큰 도시마다 도서관, 식물원, 박물관, 공원 등을 개설하는데, 이는 국민의 지식을 실제적으로 돕는 큰 기틀이 되므로 정부가 크게 힘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다. (중략) 나라 안에 이러한 장소가 많으면 자연히 인습을 교도하여 바른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잇고 방탕한 행실이나 사특한 습속을 잘라버리게 되어 악한 일에 빠지는 지가 적어진다. (『서유견문』 2부 6편)

 

누가 도시에 있는 언덕의 위쪽으로 올라간다면, 유럽인들의 거주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공 정원(public garden)은 아름다우며 여행자로 하여금 유럽의 과학과 예술이 헐벗은 섬을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어놓은 방식을 알게 한다. (중략) 유럽인이 자부심을 가져도 당연한 일이리라. (『윤치호 일기』 1896년 12월 24일)

 

오늘 오후에 서대문 밖 모화관에 공원(public park)을 만들기 위한 타당성을 논의할 목적으로 중추원의 사무실에서 조선 관리들의 큰 모임이 있을 예정이다. 이 공원은 '독립공원지' 혹은 'Independence Park'로 불리게 될 것인데, 이곳에는 조선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이 세워질 것이다. 이 공원은 시민들의 개별적인 기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조선인 관리들의 머리 속에 주입된 진보적 정신의 표식이라 여긴다. 우리는 이 운동이 조선에서 공공정신의 발전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그중에서도 공원을 여기저기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간에 (중략) 정신이 피곤하고 기력이 나태해졌을 때에 공원에 들어가 한가한 걸음 걸이로 소요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수목이 우거진 그늘 밑에서 청명한 공기를 호흡하고 아름답고 고운 경치를 감상하면 가슴이 맑아지고 심신이 상쾌하여 고달픈 모습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재산을 들여 공중을 위한 즐거움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실상 부유한 분위기를 가난한 자와 함께 이바지한다는 뜻이므로. (『서유견문』 2부 6편)

 

중식 후 공원에 가다. 녹음이 짙고 (중략) 경치가 새롭다. 청국사람들, 상하 귀천할 것 없이 공원 밖에서 주저하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 (중략) 굉장한 규모의 이 공원은 잘 정돈된 형태로 유지되어 있다. 내가 러시아 공원들에서 좋아하는 점이란 미국에서처럼 촌스럽게 번지르르한 꽃 화단이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로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멋진 도로, 아름다운 산책로, 자연스러운 잔디, 웅장한 나무, 이것들이 러시아의 공원을 구성하고 있다. (『윤치오 일기』 1896년 6월 14일)

 

 

 

 

「대동여지도」에서의 인천과 제물포

 

 

 

 

 

「화도진도(花島鎭圖)」에서의 부내면과 제물포(국립중앙박물관)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의 상세(일본 외무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인천거류지지도」. 『신찬인천사정』. 1898

 

 

 

 

도면에 검은 점으로 표기된 부분이 한국인 거주지

『인천-경성 간 도로시찰보고서』. 1894

 

 

 

 

인천 거류지(위) / 인천 외국공원(아래)

『조선실업시찰단 기념사진첩』. 민우사, 1912

 

 

 

 

인천부, 「대경성부대관」, 1936

 

 

 

 

일제강점기 도상 자료에 등장하는 공원 명칭

 

발행연도 제목 명칭 형태 축적
1893년 「제물포각국조계지도」 Public Garden 지도 non-scale
1912년 「조선실업시찰단」 인천 외국공원 엽서 -
1914년~1918년
(추정)
「인천」 산수공원 측량지도 1:10000
1916년(측량)
1929년(수정)
「인천」 산수공원 군사기밀지도 1:10000
1920년대 후반 「인천명소」 서공원 관광지도 -
1929년 「인천부관내도」 서공원 측량지도 1:10000
1932년 「인천」 산수공원 지도 1:10000
1936년 「대경성부대관」부분 각국공원, 서공원 조감도 -
1930년대 후반 「경승인천」 서공원 관광지도  
일제강점기 엽서 각국공원, 서공원    

 

 

 

 

 

1910년대 각국공원

 

 

 

 

 

존스턴 별장 주변

 

 

 

 

 

「인천지도」 요시다 하츠사브로, 1930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조선시대 간선도로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도로고(道路考)』에서 육대로로 구분했는데, 경성서북저의주로제일(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 경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 경성동저평해로제삼(京城東抵平海路第三), 경성동남저동래로제사(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 경성서남제주로제오(京城西南濟州路第五), 경성서저강화로제육(京城西抵江華路第六)인데 그중 첫 번째로 거론되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는 십대로로 구분했고, 서남지의주일대로(西南至義州一大路), 동북지경흥이대로(東北至慶興二大路), 동남지평해삼대로(東南至平海三大路),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동남지봉화오대로(東南至奉化五大路), 서지강화육대로(西至江華六大路), 남지수원칠대로(南至水原七大路), 남지해남팔대로(南至海南八大路), 서남지충청수영구대로(西南至忠淸水營九大路), 남지통영별로십대로(南至統營別路十大路) 중 첫 번째이다.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행로로 이용되었기때문에 다른 도로처럼 정치적 · 군사적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외교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도 그 의미가 컸다.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행은 조선 전기에는정기사행으로만 1년에 4회를 보냈으며,수시로 임시 사행이 파견되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사절을 조선에 보내왔었다." 김지현, 「18세기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반송방」. 『서울학연구』 제67호, 2016

 

 

 

 

 

 

의주대로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의주대로 일대. 「도성도」. 1788

 

 

 

 

 

영은문 주변 경관. 「경기감영도」. 19세기

 

 

 

 

의주로에 위치한 영은문과 모화관

 

 

 

 

영은문 상세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독립문). We do'nt know as its inscription will be writen in on-mun but we wish tin might. This arch means independence not from china alone but from Japan from Russia and From all European powers. Not that she could stand against them in the brent of war but that she is so situated that the interests of peace, of progress demand for the and will seeura to her the enjoyment of an integral position among the powers of the East(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구지(舊址)에 새롭게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의 건립 결정한 사실을 기뻐한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새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과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중요하여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享有)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독립관에서 찍은 독립문 기공식 사진(왼쪽) / 확대한 사진에서 보이는 녹문 형태(오른쪽)

(서울역사박물관)

 

 

 

 

 

개울은 말끔한 석축으로 정비되고 그 위로 띄엄띄엄 다리가 놓인다. 개울 양쪽 호안을 따라서 버드나무가 일렬로 늘어서고, 그 아래로는 잘 만든 도로가 있으며, 그곳으로 마차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개울 양편의 담은 점차 언덕 쪽으로 높아져서는 부드럽게 언덕으로 이어지고, 이곳저곳에는 낙엽수와 관복들이 식재되며, 산책로와 도로가 구불구불 들락날락한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들은 틀림없이 명실상부한 근사한 공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주된 관심을 끄는 것은 1894년에 헐어버린 영은문 자리에 세워질 독립문일 것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7월 2일)

 

 

 

 

 

독립관과 독립문 주변 경관

 

 

 

 

독립관과 국민연설대

『한국풍속풍경사진첩』. 경성일한서방, 1910

 

 

 

 

'동광사' 광고

「매일신보」 1911. 11. 27

 

 

 

독립관은 처음에 모화루라고 불렀으나 이조 성종 12년 루(樓)를 고쳐 관(館)으로 하였고, 더욱이 무과의 등용시험소로 삼아 무이소(武二所)라고도 불렀다. 관은 지금의 건물을 고치고 또한 증축을 더하여 일진회의 의장으로 충용함으로써 한때는 황황악악(遑遑諤諤)하던 논전(論戰)이 관의 내외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뒤에 명치 43년(즉 1910년)의 4월 1일 통감부중학교가 설립되자마자 일시 가교사(假校舍)로 충당되어 졌으나, 지금은 송병준 자작이 경영하는 동광사가 되어 한창 권련초를 만들고 있다. (『별건곤』제23호,1929년9월27일)

 

 

 

 

독립문에 대한 조선총독부 보물고적지정대장(국립중앙박물관)

 

 

 

 

오랜 역사를 가진 조선 문화의 자랑거리인 고대 건물과 불상 같은 조각품과 탑, 부도, 도자기, 석비 같은 귀중한 고적 명소와 기념물 같은 보물이 수없이 남아 있으나 산일에 방임하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멸하여 가는 상황이므로 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에서 이산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법령을 세우리라고 함은 누보한바어니와 그간 종교과장 이창근씨가 오로지 이 법령을 총나하여 심의실에 넘기어 심의케 하였던 것이 수일 전에 종료되었으므로 일간 법제국에 넘길 터인데 법제국의 심의가 마치는대로 조선고적명소천연물보존령과 보물보존령의 두 가지의 이름으로 제령으로 발포될 터이라 한다. (중략) 이밖에 보존하여야 할 것은 사찰 100개소, 고분 320여 총, 사찰 외의 건물 129개소, 기타가 195점인데 고건물과 탑비, 부도 같은 것은 다음과 같다.

경성부(73) : 경복궁, 광화문, 건춘문, 신무문 동부속무, 동십자각, 근정전, 근정문, 사랑(舍廊),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동부무랑, 수정전, 경회루, 자경전 동부무랑병문, 재수각, 선원각 부무랑급병, 경안궁, 집경당, 향원정, 집옥채, 협길당, 오운각, 규장각, 숭례문, 흥인지문, 창의문, 독립문, 노인정, 장충단, 동포열사, 동양무헌, 동무장당, 기념비전, 종각, 사직단 재실, 흥화문, 천연정, 동묘 (후략) (「동아일보」 1931년 6월 9일)

 

 

 

 

원구단은 보물로 되고, 독립문은 고적으로, 경성성벽과 사직단도 이축에, 보물고적으로 122점 지정되었다.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는 9월 중순경에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로 지정물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고적으로선 대방군태수(帶方郡太守) 장무이(張撫夷)의 고분으로 비롯하야 경성의 성벽, 독립문, 노인정, 사직단, 신라무렬왕릉, 부여의 청마산성 등 49건이 선정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9일)

 

 

 

 

독립문 주변 정비 공사 사진

 

 

 

 

「탑동연첩(塔洞宴帖)」. (서울역사박물관)

 

 

 

 

 

1896년 이전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 경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896년 대원각사비(위) / 1897년 대원각사비(아래)(경성부)

 

 

 

 

 

탑골공원 주변 담장

『꼬레아 에 꼬레아니, 사진 해설판』. 2009

 

 

 

 

짓고 있는 과정의 팔각정

『꼬레아 1903년 가을 러시아 학자 세로세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2006

 

 

 

 

 

팔각정 조성 전 사진

(세키노 다다시, 1904)

 

 

 

 

 

탑골공원 조성 초기 모습

일제강점기 엽서

 

 

 

 

 

「파고다공원문기타신설설계구연와병모양체공사평면도」

 

 

 

 

 

「파고다공원석탑신설배치도」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세키노 타다시, 『조선고적도보』 6권)

 

 

 

 

 

탑골공원에 세운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동상

「매일신보」 1929. 10. 17

 

 

 

 

1930년대 탑골공원 전경

(이순우, 2005))

 

 

 

 

파고다공원 뒷문박 비인터에다 조선물산장려회관을 방금 공사중인데 그 공사를 맛흔 동경토지건물회사에서 기초공사를 하다가 23척 두께 3척되는 초석 한 개를 발견하고 동회사경성지점장 서촌복송(西村福松) 씨는 즉동 학무과(學務課) 가등(加藤) 씨가 3일 오전에 현장에서가 검사한 결과 그 초석은 거금 464년 전 그 터에다 건축하엿든 대원각사 금당의 대초석으로 판명되었다. (중략) 지금 유명한 탑동 공원의 석탑이 초석을 맨들때에 가티 맨든 것이다. 벌서 수백 년이 되야 알지 못하게 된 대원각사의 대웅전 자리가 바로 그것이 든것도. 이 초석으로 말이암아 소개되게 도엇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경성부사적연구의 재료로 보관하기도 하얏다. (1931년 원각사와 관련된 금당 초석이 발굴될 당시 신문기사)

 

 

 

 

'발견된 대원각사 초석'

「매일신보」 1931. 6. 4

 

 

 

 

「남소영도」. 김홍도

 

 

 

 

 

남소영터, 「도성도」, 1860

 

 

 

 

 

「박문사 평면도」 조선건축회. 1932

 

 

 

 

박문사 전경

 

 

 

 

이전되는 경희궁 흥화문(「매일신보」 1932. 10. 14)

 

 

 

 

경복궁 선원전을 이축한 박문사 후면 고리

 

 

 

 

정선, 「사직노송도」

 

 

 

 

1894~1904년의 사직단

(이자벨라 비숍)

 

 

 

 

유휴지화된 사직단

『조선고적도보』 11권

 

 

 

「사직단공원평면도」 1937

 

 

 

 

 

「사직단공원관유림내고손목조사도」, 1937(국가기록원)

 

 

 

 

 

「사직단공원광장이전공사설계도」, 1940(국가기록원)

 

 

 

 

「경조오부도」, 1861

 

 

 

 

의빈성씨의 묘는 효창원 동남쪽의 작은 언덕 위에 있으며, 효창원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중략) 숙의박씨의 묘는 청엽정 2정목 11번지 효창원의 경내에 있다. 일부는 효창공립보통학교의 후면에 있다. (중략) 영온옹주의 묘는 생모인 숙의박씨 묘의 서쪽에서 99m 떨어진 곳의 작은 언덕에 있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효창공원계획도」

「매일신보」 1938. 2. 19

 

 

 

 

효창원 골프장 사진에 등장하는 최초의 캐디(1920년대), 『한국골프 일백년사』, 한국골프협회, 2000

 

 

 

 

 

효창원 골프장 평면도

 

 

 

 

효창원 골프장 각 홀에 대한 설명

 

YDS 별명 설명
1 188 불명(unknown) 180야드 오르막 경사 티 전방 30야드에 깊은 계곡이 있어 어려움.
2 195 낙원(paradise) 오르막이 심하고 그린 옆에 고분이 있음. 플래토 그린(plateau green), 포대(elevated) 그린으로 쉬운 코스가 아님.
3 200 알프스(Alps) 효창원 코스 중 가장 높은 도그래그(doglag)홀. 새와 시냇물 소리가 무성한 나무 사이로 들림. 나무 사이에 남산 성곽도 보임.
4 385 펀치볼(Punch Bowl) 거친 롱 홀. 5타로 홀 아웃(hole out)하면 다행이라는 평.
5 260 고개(Toge) 중간에 높은 봉우리가 잇어 고개라는 별명.
6 263 푸른잎(Green Leaves) 숲이 깊어 롱 드라이브가 아니면 어프로치 때도 핀이 전혀 안 보임.
7 250 레슬링선수(Wresler) 티는 높은 곳에 있고, 핀은 내리막길에 있어 호쾌한 샷 요구함.
8 220 북한산(Pukhan) 9번 홀과 나란히 있으며 북한산이 잘 보인다 하여 별명이 북한산임.
9 361 F.D.A(free for all) 양쪽에 깊은 솔숲이 있고 그린 주변에 계곡이 흘러 물소리가 낭랑함. 이 소리는 흥에 겨워 모두들 한잔 마시자라고 하는 것처럼 들림.
T 2,322    

 

 

 

 

 

 

 

삼열사 국민장 행렬

「동아일보」 1946. 7. 7

 

 

 

 

 

훈련원 마당의 YMCA 야구단과 청사

 

 

 

 

 

1919년 고종 황제 장례식에 등장하는 훈련원 청사

 

 

 

 

 

1900년경 「한성부지도」

 

 

 

 

훈련원은 지면이 평탄하고 또 면적이 넓어서 시민의 운동장으로 장래에 크게 필요한 지점임으로 당국에서도 역시 운동장으로 필요한 설비를 할 터라는데, 장차 훈련원에 큰 연못을 파서 스켓트 경기장도 설비할 터이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8일)

 

3군데의 공원은 착수할 터이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금년에도 다소간 공사를 하얏으나 아직까지도 공원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얏기 때문에 내년도에는 공사를 시작하야 부근에 수목도 많이 심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1921년 12월 26일)

 

 

 

 

 

훈련원공원 구성요소, 스케이트 타는 모습, 「동아일보」 1921. 12.26

 

 

 

 

 

 

훈련원공원의 위치 「대경성지도」, 1936

 

 

 

 

경성부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대정 12년, 13년, 14년도의 계속사업으로 15만 5천 원이라는 많은 돈을 들여 훈련원에 만들려던 부립 그라운드는 경비상 관계로 12년도에 착수치 못하고 이제부터 설계에 착수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에서 돈이 없다는 핑계로 계획하였던 모든 사업을 축소하여 혹은 중지한 때에 한갓 그라운드에만 전력을 다하는 데 대하여 그 내막을 알아보면 역시 정실에 관계되어 正大치 못한 사실이 잠재하였다는데 부청 당국자의 말에는 황태자 전하 어성혼(御成婚) 기념 사업으로 다른 것보다 먼저 한다고 하며 장소를 훈련원으로 택한 것은 교통의 편리와 이미 넓은 마당이 있는 관계라고 하나 다 발림소리에 불과하나 훈련원으로 말하면 경성도시개조 계획이 완정되지 못하여 그 부근은 장래 경성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인즉 위치상으로 보아 합당치 못하여 또 지금과 같이 재정이 궁핍한 때에 한 평에 10원씩이나 주고 5천여 평을 더 사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중략) 경성부에서 부득 부득 훈련원을 취한 까닭은 새로 사들여야만 할 5천여 평 땅은 고아(古我)라는 일본 사람이 사장인 조선산업무역주식회사의 소유 토지로 (중략) 처음 교섭에는 엉터리도 없는 매평에 15원이라는 비싼 값을 불렀던 것을 10원에 우물주물 하여 버릴 모양이라는데 아직 계약은 성립되지 않앗으나 만일 성립된다면 경성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리라더라. (「동아일보」 1924년 10월 26일)

 

 

 

 

 

「경성부공원계획지도」, 1920년대 후반

 

 

 

 

 

훈련원공원의 운동 시설

순서대로 정구장 / 경성운동장 / 경성풀장

 

 

 

 

왜성대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거류민회가 주도한 신사 창건과 관련이 있다. 경성에 일본인이 거류하기 시작한 이후 유지들 사이에서는 황대신궁(皇大神宮) 봉안건이 제창되었으며(1892년) (중략) 결국 신사는 왜성대공원 일대에 조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중략) 본래 일본거리(日本街)는 남산 북면 산기슭에서 시작되었다. 그 지세의 이로움이나 과거 역사 속의 감회를 살펴보더라도, 왜성대 일대는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유락(遊樂)을 즐길 수 있는 영지(靈地)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일본인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최적지로 떠올랐다. (『경성부사』 제2권, 1936)

 

 

 

 

 

1900년의 일본 공사관(후 통감 관저)

 

 

 

 

 

왜성대공원의 구성 요소와 조망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 입지

 

 

 

 

한양공원 개원식

 

 

 

 

 

현재 한양공원 석비

 

 

 

 

 

경성신사 주변 변화 1911년 이후

 

 

 

 

 

 

달성공원 내 요배전

 

 

 

 

이토 공작(이등박문)이 궁중의 숙청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궁전의 조영(造營)과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을 신설할 것을 진언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진언을 들은 이왕 전하는 크게 만족하시며 이를 허락하셨다. (중략)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909년 봄 마침내 준공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동양 건축물의 정수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정전과 경성 40만 시민이 꽃구경인 단풍놀이와 같이 봄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설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창경원과 조선 2000년 예술을 볼 수 있는 박물관 및 경성에 단 하나뿐인 민중의 오락장이라 할 수 있는 식물원이다. 살풍경하던 경성에 이와 같은 문화적 정취를 만들어주신 것은 모두 왕 전하의 은혜로 시민들은 이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창덕궁을 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담긴 물체에서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외의 손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하며 궁전이든 후원이든 그 희망에 따라 관람할 수 있게 개방하여 왕가의 근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면서 이왕가의 현재를 알리려 힘을 기울였다. 이로써 이왕가에 대해 우리나라(일본)가 얼마나 후하게 예우하고 있으며, 이왕가가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오해를 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이왕직에서 어떻게 하면 두 분 전하를 위로해드릴 수 있을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당히 고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식물원에 있는 연못 옆에 일본식 정취가 흐르는 정자를 지어 달맞이 연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후략) (『이왕궁비사』,1926)

 

 

 

박물관(博物館), 동물원(動物園), 식물원(植物園)을 지금부터 창경원(昌慶苑)으로 통칭한다. 그것은 창경궁(昌慶宮)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달 11일에는 원(苑)의 명칭을 동원(東苑)이라 하였다가 이번에 또 개정한 것이다. (『순종실록』1911년4월26일)

 

 

 

 

 

 

「창경궁급비원평면도」, 1908

 

 

 

 

 

순서대로 식물본관과 수정 / 춘당지와 수정 / 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경운궁과 상림원

『서울지도』, 2006(서울역사박물관)

 

 

 

 

 

 

돈덕전과 경운궁 동선

『덕수궁사』, 1938

 

 

 

 

 

일제강점기 엽서의 덕수궁

 

 

 

 

 

이왕가미술관과 석조전 정원 전경

『유리건판으로 본 궁궐』, 2008

 

 

 

 

 

 

조선시대 용산 일대

 

 

 

 

 

일제강점기 용산역

 

 

 

 

 

만철운동장의 류학생야구단 선수

「동아일보」 1930. 4. 13

 

 

 

 

 

수목 식재 전과 후의 경성부청 앞 '수원1'

 

 

 

 

 

순서대로 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18세기 중엽 /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花)」, 1786 /

정선, 「장동춘색(壯洞春色)」, 1751

 

 

 

 

 

 

30만 경성 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든 밤의 환락장 창경원의 금년 야행대회는 오는 20일 밤부터 개방하고자 하였으나, 따뜻한 봄빛에 예정보다 꽃이 일찍 피어 벚꽃(사쿠라)은 벌써 반이나 웃게 되었음으로 창경원 당국에서는 예정보다 앞서 금 18일 밤부터 개방(입장권 십전)하게 되었는데, 시간은 매일 야 오후 7시부터 10시 반까지요, 기간은 18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간이라는 바, 창경원에는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휘황찬란한 전등 조명 장치를 한 이외에 박물관 앞 광장에는 음악당을 설치하야 여흥으로 이왕가의 조선아악과 양악을 연주할 터이며 또 동물원 앞 광장에는 여러 가지 활동사진을 영사도 하고 휴식소에는 '라디오'의 설비까지 하는데, 금년에도 역시 밤마다 만경 인파로 대혼잡을 이룰 것이 지금부터 예상된다. (「조선일보」 1926년 4월 25일)

 

 

 

 

 

밤벚꽃을 보기 위해 몰려든 창경원 인파, 「매일신보」 1933. 4. 26

 

 

 

 

 

 

만문만화 '일일일화(一日一畵)'

순서대로 꽃구경이 사람구경, 「조선일보」 1930. 4. 12 /

야앵 기간 레뷰쇼, 「조선일보」 1930. 4. 15

 

 

 

 

서울 풍경, 이마동(李馬銅). 공원을 말하는 것은 한 개의 우울이다. 왜그러냐 하면 이것은 숨이 막힐 듯이 헐덕거리는 근대 도회 생활자의 궁여지책으로 산출된 것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근대 도회인의 심정에 무슨 량미(凉味)를 주랴고 하다가 도리어 울적한 기분을 더해줄 뿐이다. 보라, 우리의 이 유서 깊은 탑동공원을. 오붓한 듯, 아담한 듯, 가끔 우리 발길이 돌아서는 이곳은 서울의 별천지를 그려내고 있다. 점쟁이, 관상쟁이, 천양만양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군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는 곳이다. 말막음으로 뚜엄뚜엄 울긋붉읏 피어 있는 화초도 초라하거니와 뭉그러지고 일그러져가는 창연한 팔각정의 석대도 이 더운 여름을 몸부림하는 듯, 육중한 철문을 들어서서 녹음을 넘어 바라보이는 북악만이 홀로 시원한 숨을 내뿜게 할 뿐이다. 공원, 그곳은 위조된 자연이 심오로부터 인간의 '소세공(小細工)'을 모멸하는 곳이다. 몬지를 뒤집어쓰고 실증에 떠는 그 가엾은 녹음을 보라. 우리의 이 탑골공원에서 우리의 루소의 '루비앙 · 아 · 라 · 나룸(자연으로 도라가라)' 이 얼마나 욕을 먹고 잇나 보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의 잊지 못할 곳이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

 

 

 

 

 

 

성벽을 격한 별세계, 장충단공원관 신당리 화장장. 장충단의 츈흥, 봄의 설움, 봄의 기쁨. 볏 잘드는 남산마루에 긔여올을 듯이 발도듬하는 장충단 노리터에도 새봄을 실은 신풍의 멍에가 이른지 오래였다. 그리하야 생명의 갑주로 알맛게 취한 진달레는 바야흐로 붉엇다. 벌일 듯이 담은 '벗지'의 입솔에 도움키면 잡힐 듯한 신춘의 미소가 흘럿다. 찰찰 넘쳐 졸졸 흐르는 개천가에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 구름다리의 그늘밋헤서 조으는 듯이 지저괴는 오리떼의 합창 비단물결에 꼬리치는 금붕어와 푸른 잔듸에 나물 캐는 어린처녀가 한테 어우르는 활화(活畵)의 한폭은 한 조각봄이라 하려니와 굽이진 언덕마다 만발한 개나리의 요염한 우슴가 가벼운 바람에 휘늘어진 버들이 애교 많은 춤에 소리 없는 노래와 냄새 없는 향긔를 탐하야 모아드는 수천명 인생의 질탕한 놀음노리는 진실로 천년만년의 봄을 한곳에 모힌 듯 하얏다. 송림 사이로 들리는 청춘의 속살거림이나 주점과 다점에 랑자한 술상은 모다 봄을 마지한 청춘의 자랑이니 방금 죽은 고기를 태어버리는 화장터와 성벽의 사이로 한 장충단 노리터는 실로 구십춘광의 독무대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

 

 

 

 

 

 

이 효창원은 순조황제 형님 문효세자의 원소입니다. 홍살문 밧게 잔디밧 넓고 또 솔나무 그늘이 조키때문에 이맘때는 놀러오는 사람이 만슴니다. 원소인 효창원을 가르침이 아니라 효창원 해자 안에 사람 만히 모혀드는 솔아래 잔디밧을 명물이라 한 것이겠지요. 내동리명물이란 말입니다. 한동리에서 명몰 노릇하는 명물이 알뜰은 하지요마는 세상이 다 아는 명물을 가진 동리라야 참 기운잇게 명물자랑을 할 것 아닙니까. 빨래하는 녀인데, 작란하는 아이들까지 효창원이라면 누가 몰으겟습니까. 여그와 노느 이들이 갓금 소낙비에 경겁을 하면서도 그래도 또 모혀드는 이 효창원이랍니다. 달밤에 솔밧속 경치는 참으로 형용할 수 업시 좃습니다. 그런데 으슥한 곳이 엿마는 자살하는 사람은 하나도 아니오고, 죽으랴다가도 오장까지 서늘한 솔바람에 잡렴이 사러진답니다. 한강철교가튼 사위스러운 명물과는 항여나 비교하지 마십시오. (「동아일보」 1924년 7월 20일)

 

 

 

 

 

 

온양온천, 소요산, 관악산, 우이동, 모도가 머럿습니다. (중략) 온양온천에를 간대도 토요일에는 왕복 려비가 반액이 되고 소요산을 가도 경원선 동두천에서 나리면 구비구비 선경가튼 산곡을 뜰코 드러가는 긔이한 풍경을 대하게 됩니다. (중략) 아츰에 일즉 가면 종일 놀고 저녁에 도라오게 됩니다. 절에는 술 과자의 준비까지 잇고 오십전만 내면 진수성찬을 배설하야 내놋습니다. 관악산도 경부선 안양정거장에서 나려 산길노 십리입니다. (중략) 우이동은 벗꼿의 명승이요 련도 교주 고손 의암 선생의 별장이 잇습니다. 꼿그늘 사히로 삼각산이 놉히 소사 잇고 산곡간에 흐르는 물결 우에는 꼿닙이 수를 노화 하로동안 놀기는 너모나 과만한 승지입니다. 경원선 창동까지 긔차 우이동까지 자동차 십원 돈 가지고는 넉넉히 놀너 갈 곳입니다. (『별건곤』 제51호 1932년 5월 1일)

 

 

 

 

 

1929년 「경성전차안내도」

 

 

 

 

 

탑동 까페, 근일에 신지(新池)가 조성하야 (중략) 원변(園邊)에 적당한 음식점이 무(無)하야 가경(佳景)을 견(見)하고, 청량(淸凉)을 취하고 다과를 즐길 수 없었어라 (중략) 일편 희소식이 들리는데, 원내에 적절한 '끽다점'이 명일 8일부터 개업한다더라. 끽다점은 다년 양요리의 경험이 있는 구보타(久保田) 군이 '청목당'을 봄에 건축을 시행하여 일전에 공사를 마치었다. 일명 '탑다원(까페-파고다)'라 명하였다. (「매일신보」 1914년 6월 7일)

 

 

 

 

 

 

 

'무시당한 삼십만 경성시민',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삼십만 시민의 유일한 놀이터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어라, 이 곳은 공원이 아니라 술집의 정원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그전부터 '청목당'이라 하는 술집이 있었거니와, 근일에 이르러 다시 청목당의 별명인지 '승리'라는 요리집을 또 새로히 지었다. 돈짝만한 터전에 술집만 지어놓고, 일반의 불평이 있는 뒷문은 닫아두면서도 따로 담을 트고 문을 내는 꼴은 정말 화가 나서 볼 수가 없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3일)

 

 

 

 

 

 

 

종래 경성의 공원은 억더한 경우던지 사용료 또는 차대료를 내이지 아니하면 사용할 수가 업는 고로 부자유한 일이 적지안턴 바 미리전부터 부청에서 신청하이던 공원사용료 조례 제3조의 개정이 지난 익월 20일로부터 허가되는고로 금후로는 교육 또는 체육상여 기타의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한것과 영리에 이비자하고할 경우는 물론이오. 개님비와 동자 등을 건설하는 경우라도 무료도 사용할 수가 잇게 되엿는데. 요컨대 부의 공원을 공공덕으로 개방된 것이다. 제3조의 개정은 '영리의 목적에 이바지 하지안는 경우와 또 공로 또는 위적(偉蹟)을 적하여 바라지 안이하고. 전해나러 가고자 하는 목적으로써 기념비 등을 세우는 경우에는 사용료를 면제할 수가 있다고 하얏는고로 새로히 설치되는 두 공원도 활용하게 된 것은 시민을 위하서도 가장 깃거워할만 할일이겟더라. (「매일신보」 1920년 2월 6일)

 

 

 

 

 

일본 맥주 광고 「매일신보」 1915. 5. 4

 

 

 

 

 

 

 

한참동안 이곳에서 즐겁게 노다가 샘물을 다시 한박아치식 마신 뒤에 길을 서편을 택하야 녯 성을 끼고 나리면 장충단 송림 사히에 도달합니다. 여긔까지의 로정이면이야 그리 왼만한 자근 아씨이면 대개 다리병은 나지 안을 것이올시다. 길도 매우 순탄하고 길찾기도 쉬운 덤에 잇서 아모라도 갈 수 잇습니다. 장충단까지 나려스면 아해들이 치룽에 사이다, 라무네, 껍삐루 등을 지고 사랑의 청춘들을 차자 다닙니다. 다리 압흔 김에 십전 주고 돗자리를 사서 깔고 안습니다. 아해는 짓굿게 엽해서 물건을 사라고 조름니다. 사지를 안으면 어느 때까지든지 서서 졸느니 단 두 사람의 세게를 찻는 청춘들노 엇지 견대어 참습니까. 하는 수 업시 남은 돈 삼십전에서 이십전을 분발하야 라무네 두 병을 사서 목을 춥입니다. 여긔서는 배가 곱흘 때까지 놀아도 좃습니다. 십전이 아즉도 남앗스니까 장충단 압헤만 나려스면 던차가 기다리고 잇지 안습니까. (『별건곤』 1932년 51호)

 

 

 

 

 

장충단공원 연못 주변의 상업 시설(일제강점기 엽서)

 

 

 

 

 

 

거긔에는 근 이백이나 되는 무리가 움주거리고 잇다. 원내의 기분은 몹시도 침체하고 혼란하야서 맛치 5, 6월 똥물에 구덱이가 논는 것 갓흐다. 갓쓰고 흔옷입은 노인, 색옷 입은 애들, 중학생, 노동자, 걸인, 지게꾼, '못지' 장수 양복쟁이 왜 친구 각종각층의 인간들이 구석구석이 안자서 또는 서서 몃달이라도 조타는 듯이 줄큿하니 어물어물한다. (중략) 정문 갓가운데는 분바른 중년게집 두엇이 담배를 픠고 안저서 출입하는 사람을 뜻잇시 흘터보는 품이 심상치 안흔 눈치엿다. 시골서 갓올나 온듯한 여학생이 대원각사비를 구경하는데 '도리우찌'를 눌러 쓴 부랑자가태 뵈는 청년이 흘금흘금 눈짓을 하는 것도 탈날 징조가 안일가. 요리점 '승리'에 '죠쥬'와 하인은 자미잇게 갈감질을 한다. ('기자 대출동 1시간 탐방 대경성 백주 암행기, 3월 29일 오후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별건곤』 제20호, 1929년 4월)

 

 

 

 

 

 

봄날 신세한탄 하는 룸펜, 「조선일보」 1934. 4. 23

 

 

 

 

 

덕수궁 동물원 원숭이 신입원(新入苑), 덕수궁 석조전 수풀에 소동물원을 신설중이든바 거의 준비가 완성되었으므로 동경에서 새로 사들여다가 창경원 동물공실에서 기르든 일본산원숭이, 대만종 레사스 백공작, 진공작, 봉황공작 외에 2백사십여종의 동물이 일요일까지는 덕수궁 수풀로 옮겨진다고 함. (「동아일보」 1935년 5월 16일)

 

 

 

 

 

'시련의 독립문. 72년 전 오늘 기공, 이젠 고가차도 밑 신세, 치욕의 영은문을 누르고, 세웠던 독립 의지, 옮길 것인가, 말 건인가 확정 없이 엉거주춤'. 독립문은 그 자리에 그냥 놓아두어도 좋을 것인가. (중략) 독립문의 장한 모습도 이젠 팽창하는 서울의 도시계획에 따라 고가차도가 머리 위에 새로 생겨나면서 '다리 밑에 웅크린 몰골이 되어간다'는 서울 시민들의 걱정들이다. 독립문이 이같은 시련을 겪게 된 것은 지난해 4월 서울시가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남가좌동-성산대교-시흥으로 이어지는 성산대로 개설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직터널과 금화터널 중간 지점에 위치, 도로계획선에 들어가게 된 독립문을 놓고 서울시 측은 현 위치에서 북쪽인 옛 영은문 쪽으로 옮겨 앉히자고 제의한데 반해 문화재 위원들은 소중한 문화재를 옮길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 팽팽하게 맞섰다. (중략) 비록 3m의 거리를 둔다고는 하지만 오는 연말이면 폭 15m 길이 528m의 고가차도가 독립문 1m 위를 동서로 가로질러 나게 돼 있다. (「동아일보」 1978년 11월 2일)

 

 

 

 

 

독립문지 동판 알리지 않고 묻힐 뻔.  서울시가 15일 유서 깊은 독립문 옛자리를 먼 후세까지 알리기 위한 동판을 묻으면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보도진에도 일체 알리지 않아 서울시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를 천하에 과시. 서울시는 이날 하오 5시 건설국 산하 직원들만을 입회시킨 가운데 노면으로부터 40cm 깊이에 독립문지라고 새겨진 동판을 묻고 16일 새벽 5시 그 위에 1t 무게의 원형 무쇠 뚜껑을 엎어버렸던 것.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사진기자들이 현장에 몰려들자 뚜껑을 다시 여는 등 법석을 떨어 생각 않는 서울시 공무원의 진면목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평. 이에 대해 문화재 관리 및 보존의 주무국인 서울시공보 관계자는 "우리도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이날 보신각 중건과 성산대로 개통 등 큰 행사가 겹쳐 미처 신경쓸 뜸이 없었다"고 옹색하게 변명했다. (「동아일보」 1979년 8월 17일)

 

 

 

 

 

순서대로

1979년 도로 밑에 묻힌 독립문지 동판 /

1979년 독립문 이전 공사 현장(서울사진아카이브)

 

 

 

 

 

성산대로와 독립문

 

 

 

 

 

한자로 쓰인 독립관 현판

협동 측량조합소 제2회 졸업 기념사진

(1909년 또는 1910년 추정)

 

 

 

 

 

1897년 독립관 후면

 

 

 

 

 

독립관 현재 모습

 

 

 

 

 

 

순서대로 2007년 서대문독립공원 재조성 사업 조감도 / 현재 독립공원 안내판

 

 

 

 

 

 

미군 공병에 의해서 올려지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의 상륜부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미군의 진주로 옛 모습으로 다시 쌓아올리기는 하였지만, 왜정 말기의 전화로 쇠창살 등이 철거되고 벽이 파손되는 등 우리의 국보를 보존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상태에 있어 보는 사람들의 한숨거리였다. 그것이 다행히 이중화 씨라는 독지가의 정성으로 자재를 던져 탑 근방을 수리하고 쇠창살을 재건하여 보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다. (「독립신문」 1946년 11월 16일)

 

 

 

 

 

 

1953년 탑골공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2년에서 1953년에 사용된 한국은행 신 천원 권의 탑골공원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967년 9월 20일

1969년 3월 26일

1983년 5월 17일

1983년 아케이드 철거 후

탑골공원 경계부의 변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정문이 된 탑골공원 정문

 

 

 

 

 

2001년 독립후손에 의해서

떼어진 삼일문 현판

 

 

 

 

 

 

'문화재 깔고 가는 도시계획'. 서울시 도시계획과 문화재 보존의 마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5 · 16 직후 덕수궁 담을 헐면서 후퇴시켜 투시 철책으로 대신한 데서 표면화한 말썽은 도로 확장을 위한 경복궁 담의 일부를 철거 후퇴, 사직단 정문의 도로변 노출, 고가도로 건설에 따른 수구문 철거 시비, 파고다공원 주변의 상가화, 효자동-세검정 간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한 칠궁의 일부 철거 이전, 종묘담의 철거 후퇴에 의한 도로 신설 등의 큰 문제를 제기해왔었다. (중략) '이국에서는 문화재가 있으면 길도 피해 건설한다'고 각국의 문화재 보호 의욕을 밝히는 손보기 교수(연세대)는 '근대화가 결코 과거의 문화 전통이나 유산을 없애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시당국의 성급한 의욕을 나무란다. (「동아일보」 1968년 2월 1일)

 

 

 

 

 

1960년 12월 장충체육관 공사

(서울사진아카이브)

 

 

 

 

 

 

1959년 장충단공원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1967년 4월 29일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공화당 박정희 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장충단공원 재정비 사업 조감도

 

 

 

 

 

1960년 10월 12일 효창운동장 개장식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4권, 1559-1960

 

 

 

 

 

 

 

1960년 효창운동장 항공 사진(국가기록원)

 

 

 

 

 

 

1960년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국가기록원)

 

 

 

 

 

1964년 세종로 중앙분리대에 도입된 애국선현 37인 석고상

(국가기록원)

 

 

 

 

 

사직공원의 율곡 이이 동상

(e영상역사관)

 

 

 

 

 

 

탑공공원의 손병희 동상

(서울사진아카이브)

 

 

 

 

 

효창공원의 원효대사 동상

 

 

 

 

 

장충단공원의 사명대사 동상 제막식

(e영상역사관)

 

 

 

 

 

장충단공원의 이준 열사 동상 제막식

(서울사진아카이브)

 

 

 

 

 

현재 탑골공원에 남은 기념물 현황

(「중앙일보」 디지털스페셜 '120년의 타임슬립, 탑골공원' 페이지)

 

 

 

 

 

북한반공투사위령탑

 

 

 

 

 

육영수여사송덕비

 

 

 

 

 

 

효창공원 내 기념물

 

 

 

 

 

 

현 장충단비

 

 

 

 

 

 

노인 문제와 관련된 시리즈 기사(「아시아경제」 2013년 기획기사)

 

신문 날짜 기사 제목 신문 날짜 기사 제목
11월 4일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다 11월 18일 외로움, 그 허기도 달랜다
원각사 무료급식소
11월 4일 시간이 멈춘 그곳, 차라리 섬이었어라 11월 18일 주린 그분들 행복 없이는
원각사 존재 이유 없죠
11월 6일 자식 전화 안 기다려, 얘가 내 애인이야 11월 19일 탑골공원 편의점 막걸리가 다른 곳의
5배나 더 팔리는 까닭
11월 6일 2000원 국밥에 반주 한 잔,
인생을 해장한다
11월 19일 음악 DJ가 있는 낙원상가 '추억 더하기'
11월 6일 파고다 출근자들이 꼽은 낙원동 맛집 11월 20일 커피 한 잔 200원의 파고다 '노천카페'
11월 6일 45년간 한 평 쪽방서 사는 70세 할아버지 11월 20일 '대인춘풍 천객만리' 파고다 슈사인
할아버지
11월 7일 윤락녀 소탕 나비작전 후 쪽방이 채워졌다 11월 21일 갈 때 가더라도 깨끗하게 하고 가려고
11월 8일 도시 투명인간으로 14년······
무표정의 또 하루
11월 21일 '찍기는 찍어야하는데······'
풀기힘든 숙제 영정사진
11월 8일 윤 할아버지 '자식 얘긴, 묻지 말랬잖아' 11월 22일 '우리 안의 섬 그곳,'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11월 11일 박카스 아줌마 400명 활동, 주름진 性,
은밀한 거래
11월 25일 '노인 존경 못 받아', '존경 받아'보다
7배 많아
11월 11일 박카스와 동양제약에 보내는 사과문 11월 25일 박카스 아줌마 해결책 묻자······
'ㅗ인도 성상담 받아야'
11월 12일 정신지체 박카스 아줌마
남편은 알고도······
11월 25일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혜택 축소 찬성
60% 이상
11월 12일 여성 가난과 노인 성욕의 일그러진 결합 11월 26일 홍보관 · 약장수 · 사기꾼 그래도 자식보다
살가워 알고도 속는 거지
11월 13일 그림자 인생도, 손 쥐어보면
다 36.5º더라고요
11월 27일 그가 남긴 건 '사인미상-고독사'뿐이었다
11월 13일 파고다 파수꾼 종로2가 파출소 11월 27일 죽음의 흔적을 지워드립니다
11월 14일 종로 한복판서 매일 벌어지는 수백 개의
전투
11월 28일 60세 이상만 근무하는 성남 카페-
12인의 일자리 찬가
11월 14일 장기만큼 볼만한 '구경꾼 스타일' 11월 28일 노인 고용증가 청년층 일자리 뺏는다는
건 오해
11월 15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분들이 뽑은
파고다 명소는
   

 

 

 

 

 

 

탑골공원 주변 먹거리

「아시아경제」 2013. 11. 4

 

 

 

 

 

 

 

탑골공원 인근 쪽방촌

「아시아경제」 2013. 11. 7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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