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05

 

남 · 북한의 전력차이

Difference in Military Strangth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6 · 25전쟁 직전 남 · 북한의 전력은 미 · 소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의 차이로 인하여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북한은 6 · 25전쟁 전까지 10개의 보병사단, 3개의 해군 위수사령부, 1개의 공군 비행사단 등 강력한 군사력과 무기체계를 갖추었다. 국군에는 단 한대도 없었던 소련제 T-34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던 북한군에 비해 국군은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나 대공 화기를 제대러 갖추고 있지 않았다.

 

6 · 25전쟁 당시 남 · 북한 군사력 비교

Comparison of Military Forces of North and South Korea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구분 부대/병력 주요장비
남한 북한 남한 북한
육군 ● 8개 사단
● 2개 독립연대
● 기타 지원부대 등
   
        94,974명



● 10개 사단
● 4개 경비여단
● 1개 전차여단
● 기타 포병연대,
    고사포연대,
    공병연대 등

         175,200명
● 곡사포 : 91문
● 대전차포 : 140문
● 박격포 : 960문
● 로켓포 : 1,900문
● 장갑차 : 27대



● 야포 : 565문
● 대전차포 : 552문
● 고사포 : 72문
● 박격포 : 875문
● T-34전차 : 242대
● 자주포 : 186문
● 장갑차 : 59대
● 모터사이클 : 500대
해군 6,956명 10,297명 ● 함정 : 36척 ● 함정 : 115척
공군 1,897명 2,800명 ● 연습/연락기 : 22대 ● 전투기/전폭기/
    기타 : 226대
103,827명 188,297명    

 

친구의 죽음

 

-중략-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철수명령을 받았고

나는 폴이 있던 언덕으로 단숨에 달려갔어.

포화 속에서 탈출로를 찾으며 언덕을 올랐을 때

참호 안에서 웃는 모습의 폴을 발견했지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우리는

마지막 남은 필립모리스 담배 하나를 반으로 잘라 나눠 피웠지.

 

진지에 적들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참호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산마루에 보이는 적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할 때

폴은 포탄에 머리와 가슴을 맞았지

끔찍한 고통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전우.

그 죽음 곁을 지키는 나.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시련의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친구의 눈물과 죽어가는 몸부림을 보며 가장 소중한 친구를 끌어안았네.

나의 전우, 나의 둘도 없는 친구, 나의 소중한 벗을···

친구의 창백한 얼굴엔 죽음의 가면이 드리워져 있었어.

나의 소중한 벗이 들이쉬는 마지막 숨소리를 들었네.

 

왜 하필 너여야 하니···· 내 친구야.

왜 내가 아닌거니·· 왜 나 대신에 네가 선택된 거니

아아, 죽음의 순간에도 강인했던 나의 친구 폴··

넌 나의 최고의 친구였어

내 삶도 그 뜨거운 7월에 그 언덕에서 함께 끝났어.

하지만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폴! 내 소중한 친구야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신이 나를 데려가는 그날까지 영원히 너를 위해 기도할 뿐··

 

7월 5일 첫 전투에서 전사한 친구 폴을 생각하며···

 

 

 

The Death of A Friend

 

-Omitted-

 

The Sergeant told us to leave as we could no longer hold

We made a dash to Paul's hill our movements were fast and bold

As we climbed the hill under fire looking for a route to escape

I spied a soldier in a foxhole and he was wearing Paul's smiling face

We smiled and shook hands and in the ribs we gave each other a poke

I had one Phillip Morris cigarette that I broke in half for us to smoke

 

But soon we saw the mortar shells getting closer with each round

We leaped from that foxhole to seek safety on higher ground

We started shooting immediately as we saw the enemy reach the crest

in the head and in the chest

What a nightmare to see my friend dying such a horrible death

 

Oh Father,

Why did I have to suffer through this awful gruesome test

For I was there from the start to his dying and tearful end

I hugged my dearest buddy my companion and closest friend

His ashen face took on the mask of death

I was there when my dearest friend took his final dying breath

 

Why you my friend? and why not I?

Why were you chosen over me to die?

Oh how strong you were when you left with death

You my friend were really one of the best

My life ended too on that hill that hot July day

But I was thankful you had the chance to talk to God and pray

 

Oh Paul, my dearest friend,

if I could sit down with you and drink a toast I would touch your glass

and know that never again to a man would I ever be as close

But one thing I'll do for you that I promised after that fight,

I'll pray for you forever my friend as long as God gives me the nights

 

Written in memory of my dearest friend Paul Larson

Who died in out first combat on july 05, 1950

 

- By : J. A. Langone, June 1995 -

 

 

자유수호자 유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설립된 유엔은 전쟁방지와 평화유지, 국제협력활동을 하기 위해 구성되었어요. 1950년 북한이 불법적으로 남한을 침략하자 유엔은 이를 전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여 즉각적인 참전을 결의하게 됩니다. 유엔의 회원국들은 이에 동참하여 미국을 포함한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지원하고, 스웨덴 등 6개국에서 의료지원부대를 파병, 39여개국이 물자를 지원하였어요. 비록 전쟁은 한반도 안에서 이뤄졌지만 그 모습은 국제전의 모습을 띄면서 냉전시대의 팽팽한 긴장과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자 한 지원국들의 의지를 확인 할 수 있게 되었죠.(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Thanks Task Force Smith

We express our thanks to the brave soldiers of

Task Force Smith who fought for the freedom and peace of this country.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신

스미스 특수부대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부터 온

                        편지

 

Letters

         from Task Force Smith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의

소중한 흔적들

 

Valuable Remains of Task Force Smith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Walton H. Walker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자 미 제8군사령관으로 참전한 후 낙동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킨 공로로 6 · 25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부대를 지휘하던 중 서울 북쪽의 도봉지역에서 국군 쓰리쿼터(군용트럭)와의 충돌로 타고 있던 지프 차량이 전복됨에 따라 전사하였다.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

                     William Frishe Dean

 

미 제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장군은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먼저 투입시켰다. 이후 딘 장군은 사단 본대를 투입시켜 북한을 저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대전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때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딘 장군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 무렵 미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여 영동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에 딘 장군은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메고 대전 시내까지 들어온 북한의 소련제 T-34탱크를 파괴하며 부대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딘 장군은 7월 20일 밤 영동 방향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본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딘 장군은 35일간 신속을 헤매다가 8월에 전북 진안 부근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딘 장군은 3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그 헤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였다.

 

              7월 5일,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죠,

이침 7시였어요.

 

죽미령전투의 의의

Significance of the Tukmiryeong Battle

 

유엔군과 북한군의 전투

First Battle of the UN Force with the North Korea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 지상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북한군은 첫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 개시 10여일 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죽미령전투로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해야 했으며, 미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6시간 15분의 죽미령전투는 미군의 초기 개입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시도하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유엔군의 참전

UN Force's participation

 

죽미령전투는 승패에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전쟁은 자유수호를 위한 유엔의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평화의 파괴자"에 맞서는 집단적 행동으로 평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또한 한반도의 공산화 위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전투 속 이야기 1

Battle Episodes 1

 

월포드Wolford 형제 이야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서 가장 어린 군인

"B중대의 캠프우드에 있었던 미군의 대다수가 월포드 형제를 기억할 것입니다.

버질 월포드Virgil Wolford와 랜섬 월포드Ransome Wolford.

두 형제는 아주 어린 나이였던 14살, 16살에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두 형제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햇습니다. 버질과 랜섬 월포드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두 형제를 아주 좋아하였고 함께 그들의 앞날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할머니는 역시 그들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미국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버질 월포드와 랜섬 월포드는 죽미령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두 형제의 나이는 이제 겨우 16살, 18살이었습니다.

 

 

전투 속 이야기 2

Battle Episodes 2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위생병을 위하여

 

1975년 7월 4일 대한민국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스미스 중령은 그날 저녁 지갑종(유엔참전국협회장)에게 "나는 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명예로운 이 훈장을 당시 이름도 계급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위생병에게 마음으로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당시 위생병은 최후 퇴각 명령을 내렸을 때 "나는 부상병이 있으니 남아서 지켜야 됩니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부상병을 돌보앗다고 한다. 스미스 중령은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군인정신이기에 이 훈장을 위생병에게 바치겠다고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그 위생병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하였다.

 

전투 속이야기 3

Battle Episodes 3

 

죽미령전투에서 부상당한 페리 중령

1950년 7월 5일, 죽미령전투 중 선두전차대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 포병대대장 페리 중령은 연락장교인 나를 시켜 피격된 전차를 향하여 "전차에서 나와서 투쟁하라"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자 페리 중령은 포진지에 즉각 포격명령을 내려 그 전차에 3발을 더 포격하였다. 그러자 포격에 놀란 북한군 2명이 전차에서 뛰어나와 사격하는 바람에 페리 중령은 좌측다리에 총상을 입엇다. 그러나 그는 끝내 거부하고 부대를 지휘하였으며, 나중에 나와 함께 안성으로 철수하였다. 페리 중령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장교였다.

 

[2012. 1. 윤승국 예비역 소장 증언 내용 중]

 

 

전투 속 이야기 4

Battle Episodes 4

 

 

평택역 오폭사건

7월 3일 오전, 평택역에서 제17연대 등 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는 국군에 수송할 탄약을 실은 기차 20량, 일반보급품 7량, 공차 10량 등 보급품의 하역작업을 진행중이었다.그러던 오후 3시경, 호주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조종하는 4대의 무스탕기가 날아와 로켓과 기관총으로 6번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기차는 날아가 버렸고 진지에 투입 중이던 국군 제17연대의 병력과 차량, 남하중인 피난민 등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후 육군본부는 긴급명령을 하달하여 백색 광목천이나 백색 페인트를 사용하여 아군임을 표시토록 하였다.

 

우리의 미션은 적들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좀 더 많은 병사를 사살하는 것이었어요.

 

길에서 탱크 한 대를 본 기억이 나요.

 

젊은 피를 흘린 내 친구, 폴

MY friend Paul, dying young

 

 

나의 친구 Paul에게···

 

일본의 육군 캠프에서 처음으로 Paul을 만났다.

남자라고 하기엔 우린 아직 소년에 불과했었지.

Paul이란 녀석과 나는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무엇을 하든 언제나 의욕이 넘쳐 있었어.

그 무엇도 Paul과 나의 우정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

무더웠던 6월의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부대는 한국으로 향했지.

꿈과 같던 일본은 없어지고,

우리는 어느새 오산 외곽 언덕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오전 8시, 피할 수 없는 전장의 불꽃이 타올랐어.

그때까지 나는 몇 시간 후 나를 비통에 빠뜨릴 죽음을 알 수 없었지.

 

우리 군은 점차 불리해졌고, 결국 퇴각 명령을 듣게 되었다.

나는 Paul이 있던 언덕으로 포화를 뚫고 탈출로를 찾으며 단숨에 달려갔어.

참호 안에서 발견한 Paul은 나에게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답해 주었지.

우린 말없이 힘있게 서로는 부둥켜 앉고는 마지막 남은 필립모리스를

나눠 피웠다.

그러곤 참호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지.

산마루에 보이는 적군을 향해 정신없이 발포를 하며 뛰는데

찰나의 불꽃이 지나가는 걸 보았어.

Paul의 머리와 가슴에 총알이 지나간거야.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전우

그 죽음 곁을 지키는 나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시련으로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친구의 눈물과 죽음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며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시련으로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친구의 눈물과 죽음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며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네.

나의 전우를··· 둘도 없는 친구를··· 소중한 벗을···

친구의 잿빛 얼굴은 마침내 죽음으로 뒤덮이고

나는 내 소중한 벗이 들이쉬는 마지막 숨을 지켜보았네.

 

왜 하필 너여야 하니

쵀 내가 아닌거니. 왜 나 대신 네가 선택된 거니?

 

죽음의 순간에도 강인했던 나의 친구 Paul, 너는 나의 최고의 친구였어.

 

내 삶과 그 무더웠던 7월에 그 언덕에서 함께 끝났지.

하지만 이렇게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Paul, 내 소중한 벗이여

너와 함께 앉아 같이 건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신이 나를 데려가는 그날까지 영원히 너를 위해 기도할 뿐

 

1950년 7월 5일 첫 전투에서 저사한 나의 벗

Paul Larson을 생각하며..

 

- 1995년 6월 Joseph A. Langone -(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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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시사만평] 02

 

출처 :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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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04

 

 

■ 1950.07.05 보병전투과정

                   Sequence of Infantry Battles

 

10 : 00  북한군 전차 3대와 보병 이동 목격

           3 of NKA trucks and Infantry movements were observed

 

11 : 45  아군의 전방 1km에 접근했을 때 사격을 가함

           When the North Korean Forces reached 0.6mile from friendly positions, Task Force Smith started gun fighting

 

12 : 30  북한군 100고지로 진입

           The North Korean Forces crossed a hill at an attitude of 100m

 

14 : 00  북한군 보병진지를 포위

           The North Koreans surrounded friendly the infantry position

 

14 : 30  철수결정으로 전투 종료

           The battle finished as Task Force Smith withdrew

 

죽미령전투 이후의 전투

Battles after Jukmiryeong Battle

 

죽미령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미 제24사단 제34연대가 오산의 후방인 평택-안성에 새롭게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죽미령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한군 전차에 밀려 천안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8일 공주지역까지 철수한 미군은 금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지연전을 펼쳤다. 그 결과 남진 속도가 늦춰진 북한군에 미 공군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북한군의 전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④ 대전차 로켓발사기 RPG-2

    Antitank Grenade Launcher, RPG-2

 

북한군 대전차 화기로 장갑차량이나, 밀집된 부대를 표적으로 사격한다. 중량이 가벼워 휴대가 용이하고, 비교적 근거리에서 사격함으로 명중률이 높아 널리 보급되었다.

 

⑤ 대전차 로켓발사기 RPG-7

    Antitank Grenade Launcher, RPG-7

 

RPG-2의 약점인 짧은 사거리를 연장시키기 위해 개량된 무기로 유효사거리가 300m에 이른다.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무게가 가벼워 휴대에 용이하다. 북한에서는 '7호 발사관'이라고 부르며 보병 분대당 1개씩 편제되어 있다.

 

⑥ 슈파긴 기관단총

    Shpagin Submachine Gun, PPSh-41

 

소련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개발한 화기로 일명 '따발총(多發銃)'이라고 불린다. 탄창 1개에 71발의 총알이 들어있어 짧은 전투에서는 탄창을 교환하지 않고도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연속 반자동 사격이 불가능한 북한군의 주력 소총 모시나간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선 부대에서 대량으로 운용되었다.

 

① 모시나간트 소총

    Mosin - Nagant Rifle M1891/30

 

1981년에 러시아에서 처음 개발된 소총으로 제1 · 2차 세계대전까지 소련군의 주력 소총이었으며, 6 · 25전쟁 때는 북한군의 주력 소총으로 활용되었다. 잔고장이 적으나 연속 반자동 사격이 불가능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슈파긴 기관단총 등과 함께 운용되었다.

 

② 시모노프 소총

    SKS(Samozaryadnyj Karabin Sistemy Simonova, 1945

 

1946년 구 소련군에 보급된 가스작동의 반자동식 소총으로 M-1 카빈과 유사하여 시모노프 카빈이라고도 불린다. 가벼운 반동과 적당한 무게, 빠른 발사 속도 등이 특징이다.

 

③ TT-33 권총    Tokarev Pistol, TT-33

 

1930년 소련군에게 지급된 권총으로 6 · 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장교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북한의 T-34 전차

T-34 NKA Tanks

 

T-34전차는 1940년에서 1958년에 걸쳐 생산된 소련의중전차이다. 북한국은 1950년 남침 당시 242대의 T-34전차를 동원하였다. 북한군은 한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초기엔 화력의 우위를 자랑했지만 이후, M26 중전차, 지상공격기, 3.5인치 슈퍼바주카포 등이 등장하자 우위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105mm 곡사포

Task Force Smith 105mm Howitzers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1920년에 105m 곡사포를 제작하여 사단 포병의 주 화력지원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화포는 견인과 공중 투하가 가능하였고, 정확도, 발사속도 및 화력지원의 신뢰성 면에서 매우 우수한 수준이었다.

 

⑤ 브라우닝 자동소총(M1918A2)

    Browning Automatic Rifle(BAR), M1918A2

 

미국이 1917년에 개발한 소총과 경기관총의 혼합형 자동 소총으로 양각대를 사용하여 명중률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1918년 최초로 미 제7보병사단에 지급되었으며, 국군에서는 1948년 주한미군 철수 시 인수하였다.

 

⑥ M1 소총

    M1 Rifle

 

미국 스프링필드 병기창에서 존 개런드가 개발한 소총으로, 1936년 미 육군에서 사용한 제식용 반자동 소총이다. 국군은 1947년 주한미군으로부터 인수해 6 · 25전쟁 동안 육군의 개인 주력화기로 사용하였다.

 

⑦ 카빈 소총

    M1 Carbine

 

1930년대 후반 미 육군이 개발한 소총으로 M-1 개런드 소총보다 20cm 정도 짧다. 가벼워서 휴대와 조작이 쉬우나 M-1 개런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거리와 관통력은 떨어진다. 국군은 1949년 주한미군에게서 인계받아 장비하였으며, 6 · 25전쟁동안 초급지휘자용 개인화기로 사용하였다.

 

⑧ 콜트 45구경 권총

    Pistol, Caliber, 45, M1911A1

 

미국의 총기 설계사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권총. 파괴력이 뛰어나 권총으로 채택되었다. 국군은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이 권총을 인수하여 지휘 및 호신용으로 사용하였다.

 

 

① 75mm 무반동총

    75mm Recoilless Rifle, M20

 

독일이 1940년 개발하여 대전차 파괴용으로 사용한 화기로 미국에서는 1945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국군에서는 6 · 25전쟁 시 M18 57mm 무반동총과 함께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T-34전차 파괴용으로 운용하였다.

 

② 75mm 무반동총用 고폭탄

    75mm Recoilless Rifle HEAT

 

미국에서 생산한 75mm 무반동총 탄약이다.

 

③ 105mm 곡사포 고폭탄

    105mm Howitzers HEAT

 

폭풍 및 지뢰효과와 파편에 의해서 인마살상과 물자파괴용으로 지상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는 탄약이다.

 

④ 2.36인치 로켓발사기

    2.36″ ROCKET Launcher

 

일명 "바주카포"라고도 불리며 사수와 포탄을 장전하는 조수가 한 조가 되어 어깨에 메고 사격하였다. 국군은 1949년 주한미군 철수시 인수하여 사용하였으나 6 · 25전쟁 초기 북한군의 T-34전차에 대항하기에는 위력이 너무나 미비하여 이후 2.5인치 로켓발사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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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03

 

 

유엔군 첫 전투의 시작, 죽미령전투

First Engagement by the UN Forces, Battle of Jukmiryeong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 지상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 모습이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 지상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스미스 부대의 참전

 

유엔의 확고한 전쟁방지 의지를 처음으로 실천한 나라는 미국이었어요. 죽미령 전투에서 참전했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미8군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와 제52포병대대 A포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부대로 일본 규슈에서 훈련을 받던 중 한국으로 파병되었어요. 7월 1일 부산의 공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2일 대전에 도착하여 5일 새벽 죽미령에 도착하게 된답니다. 현재 기념관에서는 6월 미 지상군이 참전하게 되는 과정과 스미스 부대원의 한국 이동을 시간대별로 전시하고 있답니다.(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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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02

 

 

유엔군 초전기념관 내부 전시

기억의 시작 Beginning of memory

 

이제 우리는 죽미령 전투에 참전하셨던 참전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볼게요. 6 · 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과 국군이 힘을 합쳐 함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였을 때 참전자들은 과연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남겨진 이야기를 들으러 우리는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The moment everything looked like disappear

 

유엔군 참전의 교훈

Lessons from the UN Forces Participation

 

6 · 25전쟁은 유엔 헌장을 위반한 침략의 주범인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해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유엔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응징 차원의 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경제대국, IT강국, 문화대국으로 발돋움하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6 · 25전쟁 때 유엔의 즉각적인 조치와 21개 자유 우방국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낯선 땅 위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4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유엔이 항구적인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국제 평화 기구로서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아울러 유엔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기사회생한 대한민국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으로서 계속 남아 국제 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엔 21개국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6 · 25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 군사원조에 관한 유엔결의문

Resolution by the UN Security Council of Military Assistance to the Republic of Korea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대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북한당국에게 전투를 즉각 중지하고 그들의 군대를 즉시 38도선으로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우리는 유엔 한국위원단으로부터 북한당국이 전투를 중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조처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효과적인 조처를 즉각 취하여 줄 것을 유엔에 호소하였음을 감안하여,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여 줄 것을 유엔 회원국에게 권고한다."

 

미군과 유엔군 참전 결정과정

Decision Process for the Participation of the US and the UN Forces

 

유엔의 한국지원 결의

 

북한군의 침략을 받게 되자 한국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주한미국 대사관에 통보하여 유엔과 미국이 북한의 침략행위를 즉각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유엔은 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유엔의 결의에도 북한군이 침략 행위를 중지하지 않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6 · 27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 · 27 결의안>에 따라 미국의 육 · 해 · 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국가가 52개국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고,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유엔군 참전배경

Background of Participation by the UN Forces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응

 

6 · 25전쟁에서 유엔군의 작전은 병력규모와 무장 정도, 병참지원 능력이 우수했던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50년 7월 14일 트리그브 리 Trygve Lie 유엔사무총장이 상황의 긴박함을 고려해 각국에 지상군 파견을 촉구하면서 참전 회원국의 수는 현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파병의사를 밝힌 회원국의 상당수가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국과 더불어 영연방 국가들이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하였다.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회원국으로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참전한 유엔 회원국들 역시 그들 국가 주변에서 점증하는 공산주의 위협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 공산주의들의 한국 침략을 미래에 있을지 모를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나 침략활동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유엔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

Historic Significance of the UN Forces' Participation

 

유엔군 최초의 전투

 

유엔의 지원결의에 따라 유엔 21개국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6 · 25전쟁에 참전하였다. 유엔군의 6 · 25전쟁 참전은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안전보장의 원칙'을 발동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또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기사회생 시키고, 전세계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재인식 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광복 전후 미 · 소 냉전

The Cold War after Korean Liberation

 

한반도는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주변국들에게 침략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만주, 소련의 연해주와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그리고 서쪽으로는 중국대륙과 각각 인접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상충하는 전략적 교차점에 해당되어 항상 이들 주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한반도는 세계 질서 개편 과정에서 미 · 소를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한반도의 38도선은 남 · 북한뿐만 아니라 극동의 자유 및 공산진영을 포함해 미국과 소련의 힘이 직접적으로 맞선 최전선이 되었다. 국제 냉전이 심화될수록 한반도의 갈등 역시 더욱 고조되어 갔다.

 

광복 이후의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after Liberati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미 · 소 양축으로 냉전구도를 이루고 있었어요. 1948년 남한에 유엔의 감시 하에 이뤄진 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뒤이어 소련의 비호 아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국토의 분단은 현실이 되었지요. 그러한 팽팽한 냉전의 분위기는 1950년 6 · 25전쟁의 발발로 나타나면서 약 3년 1개월 동안 민족간의 전쟁이 벌어졌어요.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의 전 국토가 파괴되고, 군인 뿐 만 아니라 민간인 등 휴전이 성립되기 전까지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쟁피해를 입게 되었답니다.(유엔군 초전기념관 안내책자에서)

 

유엔의 한국문제 논의

UN Discussion on the Korea Issue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한과 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였고,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 · 소 공동위원회를 설치 · 운영하였다. 그러나 소련 측의 무성의와 일방적인 주장으로 인해 결렬되어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는 유엔총회로 이관되었고, 유엔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 · 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가 탄생하였다. 남북통일이 유보된 상태에서 수립된 정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3년간의 군정기간을 거친 매우 어려운 산고의 결과였다. 유엔총회 회원국은 48대 6이란 압도적인 지지로 한국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으며,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북한 정권의 수립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1948년 9월 9일 평양에서 김일성 체제 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소련은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10월 중순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다른 공산국가들의 승인도 뒤따랐다. 이들은 유엔총회의 결정을 거부하며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미 · 소 양대 세력이 상충하는 양극화된 국제분쟁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남 · 북한의 정체

Situation in North and South Korea

 

남 · 북한의 정세는 여러 측면에서 상호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비호 하에 실권을 장악한 공산당이 북한 사회를 철저하게 공산조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국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정국이 좌우로 분열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잇단 폭동사건으로 민심의 동요가 극에 달해 있었다.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면서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와 군사적 증강 요구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남 · 북한의 군사력 불균형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김일성 · 스탈린 · 마오쩌둥의 남침모의

Conspiracy for the Invasion of South Korea by Kim Il-sung, Stalin and Mao Zedong

 

1949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 중국 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환경이 급변하자 1950년 3월 말부터 한 달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전쟁을 승인하였다. 5월 13일 마오쩌둥을 방문한 김일성은 협력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6 · 25전쟁의 아픔과 피해

Pain and Damage of the Korean War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38도선을 침공한 북한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데 이어, 8월 1일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 한다는 전쟁 목표를 수립하였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상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상실하였다.

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반격에 들어가게 되고 전쟁발발 97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양상이 다시 한번 바뀌게 되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 어려워지자 소련의 유엔 대표인 말리크 Yakov Alesandrovich Malik는 휴전을 제의하였고,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6 · 25전쟁의 피해

Damages of the Korean War

 

6 · 25전쟁 기간 동안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한 전쟁피해를 입었다.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고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에 있어 군인은 한국군 63만 명과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하여 78만 명이 전사 · 부상 · 실종되었고, 민간인은 100만 명이 사망 · 부상 · 실종되었다. 결과적으로 휴전이 성립되는 시점까지 전체인구의 1/2이상이 전쟁피해를 입었다.

 

김종태의 6 · 25전쟁 일기(1950)

 

유엔군 참전 주요일지

Key Dates of UN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1950

 

06  25  북한군 남침

     26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차 결의안 가결

     27  미국 해 · 공군 참전

     28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2차 결의안 가결

     29  영국 해군 참전

 

07  01  미국 지상군 참전, 호주 해 · 공군 참전

     05  오산 죽미령 전투

     0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3차 결의안 가결

     14  미 제8군 사령부, 대구에 지휘소 개소

          한국 국군의 작전 지휘권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

     19  네덜란드 해군 참전

     24  유엔군 사령부 창설(일본 동경)

     26  캐나다 공군 참전

     29  프랑스 해군 참전

     30  캐나다 해군 참전, 뉴질랜드 해군 참전

 

08  28  영국 지상군 참전

 

09  15  인천상륙작전

     19  필리핀 지상군 참전

     27  호주 지상군 참전

     28  스웨덴 적십자 병원 파견

 

10  07  유엔 총화, 한국통일 결의

     17  터키 지상군 참전

     25  중공군 개입

 

11  07  태국 지상군 · 해군 참전

     12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참전

     20  인도 야전 병원 파견

     23  네덜란드 지상군 참전

     29  프랑스 지상군 참전

 

12  01  그리스 공군 참전

     09  그리스 지상군 참전

     18  캐나다 지상군 참전

     23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 사망

     26 미 제8군 사령관 취임(신임 리지웨이 대장)

     31 뉴질랜드 지상군 참전

 

1951

 

01  04  1 · 4후퇴

     31  벨기에 참전, 룩셈부르크 지상군 참전

 

03  07  덴마크 적십자 병원선 파견

 

04  11  유엔군 사령관 교대

          (신임 : 리지웨이 대장, 구임 : 맥아더 장군)

     14  미 제8군 사령관 교대

          (신임 : 벤플리트 대장, 구임 : 리지웨이 대장)

 

05  06  에티오피아 지상군 참전

     08  콜롬비아 해군 참전

 

06  15  콜롬비아 지상군 참전

     22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파견

 

07  10  휴전회담 개시

 

11  16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 파견

 

1952

 

05  12  유엔군 사령관 교대

          (신임 : 클라크 대장, 구임 : 리지웨이 대장)

 

1953

 

02  11  미 제8군 사령관 교대

          (신임 : 테일러 대장, 구임 : 벤플리트 대장)

 

07  27  휴전 조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참전과정

Chronological Sequence of Decision on Participation by Task Force Smith in the Korean War

 

1950년 6월 26일  09:00

미국 정부는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에게 한국으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명령

 

1950년 6월 27일

맥아더 장군은 처치 준장을 단장으로 하여 극동사령부 참모장교 14명으로 편성된 조사반을 수원에 파견

 

1950년 6월 27일  08:00

미국 정부는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부여하고 한국군 지원을 위해 미 극동 해 · 공군이 38선 이남의 북한군을 공격할 것을 결정

 

1950년 6월 27일  19:00

처치 준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의 서울 침입과 한강교 폭파, 한국군의 철수 상황을 전하며 38도선을 회복하려면 미 지상군 투입을 서둘러야 한다"라고 보고

 

1950년 6월 29일  06:10

맥아더 장군은 한국시찰을 위해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하여 수원비행장에 도착, 처치 준장의 보고를 받은 후 영등포 지역의 한강변을 시찰

 

1950년 6월 29일  18:15

일본으로 돌아온 맥아더 장군은 미 정부에 "현 전선을 유지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길은 미 지상군을 투입하는 일이다"라며 지상군의 파견을 건의

 

1950년 6월 30일  06:00

미국 정부는 육군 병력의 제한적 투입을 지시하고 미 해 · 공군의 작전범위를 38도선 이북 지역까지 확대

 

1950년 6월 30일  16:00

맥아더 장군의 전문보고서가 미국 국방부에 도착

 

1950년 6월 30일  22:30

미국 백악관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그의 휘하에 있는 병력 사용의 전권'을 부여하고 육군 병력 투입의 제한 조치 해제 및 지상군 투입을 승인함

 

작전명령

미 극동군 사령부의 제24사단 부대이동 지시

CINCFE's Directive for the movement of the 24th INF. Div. from Japan to Korea

 

01  조기 공세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병 제24사단을 즉시 부산으로 공중이동 시킬 것

02  사단은 작전 상황을 고려,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지연전 수행부대를 북쪽으로 전진시키고, 현재 서울에서 수원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는 적과 대치상황을 유지하면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킬 것

03  극동 해 · 공군이 부산으로의 부대이동 및 적과의 작전을 지원할 것임

04  극동 해 · 공군 및 주한 전방지휘소와 직접 접촉을 허가함

05  부산 도착과 동시에 사단장은 본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것

 

철수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산다

We'll continue this death-defying fight here

unless ordered to withdraw!

 

맥아더 장군, 미 지상군 투입결정

 

1950년 6월 29일, 서울 영등포의 한 국군 진지로 전황을 살피러 나온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 것을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귀관은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 것인가?"

그러자 한국군 병사는 단호하게 말햇다.

"상관의 명령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맥아더 장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한국군 병사의 젊은 기백에 감동받아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병력요청 편지

 

6 · 25전쟁 개전 직후인 1950년 7월 8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 친필 편지이다.

 

김일성 친필 서한 번역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대표인 스탈린 동지에게 스탈린 동지께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큰 도움을 주셨기에, 심심한 사의와 경의를 표하는 것을 받아주시길 청합니다.

우리 민족이 미제국주의자에게서 벗어나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는 스탈린 동지의 충심에 감사드리며, 나는 동지께 25~35명 정도의 소비에트 무관을 북한 인민군 사령부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이는 아직 우리 군의 지휘부가 현대적 병력 운용법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충복, 북한 각료회의 대표

김일성. 평양시

 

미 극동군사령부의 제24사단 부대이동지시

 

1950년 6월 30일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즉시 한국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하고, 제24사단장 딘 소장에게 특수임무부대를 공수하여 북한군을 저지할 것을 지시한 작전명령서.

 

스미스 부대 특수임무 시작

Start of the Special Mission of Task Force Smith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결성

1950년 6월 30일 저녁, 캠프우드의 스미스 중령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제21연대장인 리차드 스테판 Richard W. Stephans 대령이였다. 리차드 스테판 대령은 스미스 중령에게 "즉시 CP(command post : 지휘소)에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스테판 대령은 스미스 중령에게 그의 대대를 인솔하여 이타즈케 공군 기지로 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스미스특수임무부대

1950년 7월 5일, 6 · 25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미 제8군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52포병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부대로,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져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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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01

 

    위치 : 경기 오산시 경기대로 742

   

   주요시설 : 유엔군 초전기념관(공립박물관, 전시관), 스미스 평화관(체험관), 신·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공원시설(평화놀이터, 전망대, 대형태극기, 거울연못, 더글러스 모형 게이트, 미러폰드, 잔디마당)

   

    문의 : (유엔군 초전기념관)031-377-1625 / (스미스 평화관)031-378-4145

   

    교통 수원방향 301, 20, 300번 버스 (유엔군 초전기념관 버스정류장)

           세마역 1번 출구 도보 10분

   

    홈페이지 : (정비중)

   

    운영시간

           공원 : 상시개방

           기념관 및 평화관 09:00 ~ 18:00 (입장마감 17:00)
           (매주 월요일, 1.1, 추석 및 설 명절 당일 휴관)

 

 

6·25전쟁 및 유엔군 초전(오산(죽미령) 전투) 70주년이 되는 2020.7.5.에 정식 개장한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6·25 발발 10일만인 1950.7.5. 북한군과 유엔군 지상군(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 첫 교전을 치러 많은 희생을 치렀던 죽미령(현 위치)에 조성된 역사공원이다. 1955년 미 제24사단에 의해 세워진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를 비롯해 1982년 확장개수된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2013년에 건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2020.7.5.에 개관한 스미스 평화관을 아우르는 총면적 134,014.7㎡ 의 공원으로써 전망대, 미러폰드, 잔디마당, 평화놀이터 등 방문객들이 평화로운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전쟁의 시작에서, 평화의 시작으로’를 기치로 유엔군 초전이 한반도 평화와 자유 수호의 첫 번째 역사였음을 가치있게 재조명 하는 한편, 감사와 추모를 넘어 평화적인 미래로 나아갈 때 희생의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라는 비전 아래 평화문화 플랫폼으로써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다.

 

- 출처 : 오산시청 홈페이지

 

 

길 건너에서 바라본 스미스 평화관

 

길 건너에서 바라본 유엔군 초전기념관

 

M48A2C '패튼' 전차(미국)

M48A2C 'Patton' Tank(U.S.A)

 

길이(Length)                                       6.8m

폭(Width)                                           3.6m

중량(Weight)                                      47,565kg

항속거리(Maximum Range)                    260km

승무원(Capacity)                                  4명

무장(Armament)                                  90mm 강선포(T54)(90mm gun T54)

                                                       12.7mm M2 중(重) 기관총(12.7mm M2 heavy machine gun)

                                                       7.62mm M1919A4 기관총(7.62mm M73 machine gun)

 

M48 전차는 1953년부터 미군에 배치된 중(中) 전차로, 총 12,000여 대가 생산되었다. 전시된 M48A2C 전차는 M48 전차를 기반으로 개량한 전차로, 항속거리가 늘어낫으며 성능이 향상된 M17 측거장치를 장착해 전차포의 명중률을 향상시켰다. 우리 군은 1966년 베트남 파병에 따른 전력 보완책으로 M48 전차를 최초 도입하였으며, 1971년 군 현대화 5개년 계획에 따라 M48A2C 전차를 주한미군으로부터 인수하였다. 도입된 M48A2C 전차는 육군 각 군단의 기갑여단에 배치하여 운용되었다. M48A2C 전차는 가솔린 엔진을 장착하고 있어 연비가 좋지 않았고, 개량 또한 이루어지지 않아 처음 생산된 원형을 유지하였다. 1990년대 들어 장비의 노후화에 따라 점차 일선 부대에서 도태되었고, 지난 2007년에는 육군에서 완전히 퇴역하였다. 퇴역한 M48A2C 전차 중 일부는 사격 교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M1 90mm 고사포

M1 90mm Anti Aircraft Gun(U.S.A)

 

길이(Length)                                     5.1m

최대 서거리(Maximum)                       11,500m

중량(Weight)                                    8,550kg

발사속도(Gate of Fire)                        분당 22발(22rpm)

 

1940년부터 1950년대까지 미 육군이 사용한 견인 대공포로, 제2차 세계대전과 6 · 25전쟁 때 사용되었다. 대구경 대공포로 중 · 고 고도로 비행하는 폭격기와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부터 지대공 미사일이 등장하자 점차 퇴역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이더와 연계한 고도의 사격통제장치를 장착해 당시 대공포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였다. 또한 빠른 포구 초속을 자랑해 대전차포로도 사용되었으며, 해안포로도 일부 사용되었다. 우리 군은 지난 1955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였으며 공군기지와 주요 군사 시설에 배치하여 운용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Memorial Facility appointed by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유엔군 초전기념관

UN Forces First Battle Memorial

 

개관     2013년 4월 23일

면적     대지 14,062.6㎡, 건축연면적 933㎡

시설현황   1층 - 도입공간, 사무실

               2층 - 전시관

               3층 - 영상교육실, 체험실, 옥상정원

               야외 - 야외 전시, 신 ·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 죽미령 전투

 

이 곳 죽미령은 6 · 25전쟁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처음으로 전쟁을 벌인 격전지이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우측 고지에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북한군 T-34 전차의 남진을 발견한 스미스부대는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전투를 시작하였다. 치열한 접전으로 북한군의 전차 33대 중 6대가 파괴되었으며, 127명을 사상하였다. 스미스부대 역시 참전한 540명 중 보병 150명, 포병 31명이 사상되었다. 오후 2시 30분 스미스부대의 퇴로가 차단되고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퇴각하게 된다.

이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6 · 25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 유엔군 초전기념관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유엔군과 북한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죽미령고개에 건립되었다. 6 · 25전쟁의 올바른 이해와 참전한 유엔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가치가 전승될 수 있도록 마련된 문화와 교육의 장소이다.

 

KM900 경장갑차(CM6614)

KM900 Light Armored Vehide(R.O.K)

 

길이(Length)                                           5.8m

폭(Width)                                               2.5m

중량(Weight)                                          8.4톤(ton)

최대 속도(Maximum Speed)                       100km/h

항속 거리(Maximum Range)                       700km

승무원(Capacity)                                      9명

무장(Armament)                                      7.62mm M60 기관총(7.62mm M60 machine gun)

 

이탈리아의 피아트사에서 1960년대 말부터 생산된 차륜형 장갑차로, 우리 군은 1970년대 중반 북한의 특작 부대 침투 대비와 수도권 방어를 위해 도입하였다. 당시 독일의 UR416 장갑차도 후보 차종에 속했지만 분쟁지역에 무기 수출을 금하는 독일의 헌법 때문에 CM6614 경장갑차가 선정되었다. 국내에서 면허 생산된 CM6614 경장갑차는 KM900이라는 제식 명칭이 부여되었고, 장애물 제거용 도저를 장착한 KM901도 개발되어 일선 부대에 배치되었다. KM900 경장갑차는 도로에서는 최고 시속 100km의 속력을 낼 수 있었고, 이는 우리 군이 보유한 장갑차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육군과 공군에서 운용했으며, 도심지 작전과 기지방어용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장비 노후화로 점차 퇴역하고 있다.

 

14.5mm 중고사 기관총

14.5mm Heavy Anti Aircraft Machine Gun(U.S.S.R)

 

1949년 소련에서 생산된 기관총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대공용으로 운용하였다.

This heavy anti aircraft machine gun was produced by the USSR in 1949.

It was used by North Korea as an anti aircraft weapon during the Korean War.

 

길이(Length)                                           4.6m

폭(Width)                                               1.7m

최대사거리(Maximum Range)                      7,000m

발사속도(Rate of Fire)                                분당 2,400발(2,400rpm)

 

F-86F '세이버' 전투기

F-86F 'Sabre' Fighter(U.S.A)

 

제원(Dimensions)                                     11.4×11.9×4.5m(길이L×넓이W×높이H)

중량(Weight)                                           6,883kg

성능(Performance)

      - 최대속도(Maximum Speed)                 1,056km/h

      - 항속거리(Maximum Range)                 2,408km

      - 순항거리(Crusing Speed)                    815km/h

      - 상승한도(Operation Ceiling)                14,326m

승무원(Capacity)                                       1명

무장(Armament)                                        기관총(Machine gun)

                                                            로켓(Rocket bomb)

                                                            미사일(Guided missile)

                                                            폭탄(Other bomb)

제작사(Manufacturer)                                 North American(미국)

 

F-86F는 North American사에서 제작한 미국 공군 최초의 후퇴익 제트 전투기로, 애칭은 세이버(Sabre, 끝이 뾰족한 검)이고, 1947년 10월 최초로 비행을 하였다. 한국 공군은 6 · 25전쟁 후 북한의 MiG-15 제트전투기에 대응하기 위해 프로펠러 전투기인 F-51D를 대체하여 1955년 F-86F 5대를 최초로 도입, 제트기 보유시대를 맞이하였으며, 1968년까지 총 201대를 도입하였다. F-86F는 1967년 서해 덕적도에 침투한 무장 간첩선을 격침하였다. 또한 영화 '빨간마후라'(1964년)와 곡예비행팀인 블루세이버(1959년~1966년)를 통하여 필승 공군의 상징으로 그 위용을 떨쳤으며, 1993년 퇴역하였다.

 

탱크를 관찰하는 성기

 

51년 만의 귀향, 돌아온 동판

 

 

- 계속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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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시사만평] 01

 

출처 :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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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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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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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문재인 정부)의 월성 원전 기획살인 사건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원전 중심의 발전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현재 수명을 연장하여 가동 중인 월성 1호기는 가급적 빨리 폐쇄···

- 2017.6.19. 대통령 문재인"

 

 

처음부터 청와대와 산업부는 월성원전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원전 평가 보고서를 조작했다.

청와대 비서관, 산업부에 월성 1호기 즉시 가동중단 요구

-출처 : 감사원 보고서

 

 

 

평가 보고서 조작은 처음부터 정해진 권력형 비리였다.

청와대 → 산업부 → 한수원 → 회계법인으로 연결되는 탈원전 카르텔.

한 밤중에 몰래 400여 개의 문서를 삭제하며 증거인멸 시도

 

 

 

과연 일개 공무원 한 둘의 의지로 가능한 기획인가?

혈세 수 조원이 투입된 원전이 고작 공무원 두 사람의 손에 조작됐다?

지시는 청와대와 장관, 징계는 공무원.

 

 

 

 

월성원전에게 처음부터 기회는 없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국가의 중요 정책이라도 추진 과정에 있어

         적법하고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 감사원장 최재형

 

 

- 녹색원자력학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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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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