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24사단 장병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가 1964년 미 제8군, 제24사단, 육군동지회, 재향군인회 등에서 보수공사를 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C중대 2소대장이었던
빌 위릭의 1998년 7월 5일 연설문>
전우 여러분, 우리가 이곳 언덕에서 전투를 겪은 지 48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우리는 남한사람들의 자유방어를 위해 파견된 유엔군의 선발대였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역사적인 남침경로인 이곳에서 북한군 주력부대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 오늘, 이곳 전투에서 53명의 전우가 전사하였고, 5명이 아직도 실종상태이며, 남과 북의 전장에서 포로가 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34명이 사망했습니다. ··· (중략) ···
오늘 이곳에는 본인을 비롯한 그 당시의 전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전에 이곳을 다녀간 이후, 한국인들의 발전과정을 보며 경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희생이 한국인들의 자유방어를 위한 주된 역할을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 참석하신 한국분들께서 내 전우들을 명예롭게 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1950년 7월 5일의 이곳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우리는 혈맹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자녀에게 자유의 의미를 설명할 때,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스미스 전투부대 기념비는 1954년 아래 기관과 유지들의 협력으로 보수되었다.
미 제24보병사단 장병 일동, 미 제24보병사단 동지회,
미 제8군 장병 일동, 미 육군 동지회 한국지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한국 신문 편집인 협회,
UN군 자유수호 참전기념비 건립위원회
현대건설주식회사
유희훈 씨 백승근 씨
1950년 7월 5일 이 자리에서 미 제24보병사단 소속 제21보병연대 및 제52야포대대 A중대로 구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미 합중국 군대와 공산침략군 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 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상징 마크
구舊 유엔군 초전기념비
Old UN Forces First Battle Monument
'구舊'자를 붙여 신新 유엔군 초전비와 구별하여 불린다. 본래 오산 죽미령 전투 당시 보병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되었던 1번국도 건너편의 99고지에 위치했으나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기단부는 이전하면서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이후인 195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다시 돌아와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며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오산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소위 'UN탑'이라 불렸다.
무장애 데크길에서 바라본 평화공원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약 134천㎡에 유엔군 초전기념비와 전시관, 전망대 및 조형시설물과 자연이 어우러져 시민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950년 7월 5일 죽미령전투의 기억과 체험을 통해 우리 미래 세대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미령 전망대로 올라가는 무장애 데크길
죽미령 전망대
화성, 수원까지 바라볼 수 있는 반월봉 정상의 죽미령 전망대
스미스 부대의 방어진지 선정
Task Force Smith's Selection of Jukmiryeong as its Line of Defense
개발되기 이전의 죽미령은 경부국도와 경부철로를 직교하는 능선으로 북쪽의 저지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북방 10km의 수원까지도 관측이 가능해 방어진지로서는 손색이 없는 최적의 지형이었다. 스미스 부대의 방어진지로 평택-안성선도 논의가 되었으나 북한군의 남하를 가능한 한 북쪽에서 지연시키기 위해 오산 죽미령 일대를 선정하였다.
이 조형물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 파병되었던 스미스 부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때 타고 온 더글라스 C-54 수송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스미스 부대는 6대를 나눠 타고 일본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C-54 수송기는 6 · 25전쟁 당시 전쟁고아를 피난시키기도 하였다.
평화공원 상징물
6시간 15분간의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을 향한 추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
죽미령 평화공원 상징 조형물
Symbolic Sculpture
한국전쟁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가 벌어진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5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치열했던 6시간 15분간의 오산 죽미령 전투를 상징적인 형상으로 나타내고, 유엔군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루어낸 오늘날의 평화를 밝은 이미지의 다채로운 색감으로 표현하였다. "감사"의 꽃말을 가진 다알리아(Dahlia) 꽃을 가운데에 배치하여 참전용사의 숭고한 호국 정신을 추모하는 상징 조형물이다.
올해의 작은 전시는 오산 죽미령 전투를 기억하는 최초의 기념물인 구舊 초전 기념비에 대해 마련하였습니다. 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원래의 자리에서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내로 이전하게 된 구 초전비는 죽미령에 공원도, 기념관도, 거대한 신新 초전비도 없던 시절, 홀로 죽미령에서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였습니다. 매년 7월 5일이면 추도식이 거행된 장소였고, 오산 주민들의 나들이 장소이자 쉼터였습니다. 스러다 1960년대에 건립계기가 쓰인 동판(국 · 영문)이 도난당했던 적 있습니다. 전쟁 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처럼, 하와이까지 갔던 동판은 돌고 돌아 51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구 초전비는 새롭게 마련된 보금자리인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가장 아늑한 자리에 호젓하게 앉아 죽미령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구 초전비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관람객 여러분과 공유하여, 기념비가 옛날차럼 지역 주민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랍니다.
여기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이위치하고 있는 죽미령은 1950년 7월 5일 유엔군 지상군이 첫 전투를 벌인 격전지입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은 남하하는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6시간 15분 동안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렇듯 이곳은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스며든 장소입니다.
이러한 죽미령에는 치열했던 전투를 기념하는 두 개의 기념비, 구 초전기념비와 신 초전기념비가 있습니다. 두 기념비는 건립이래 오산지역의 주민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 초전비는 공원도, 기념관도, 거대한 신 초전비도 없던 시절, 홀로 죽미령에 서서 희생자들을 기억하였습니다. '유엔탑', '충혼탑' 등으로 불리며, 신 초전비가 생기기 전까지 매년 7월 5일이면 추도식이 거행된 장소였고, 오산 주민들의 나들이 장소이자 쉼터였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기단부에 끼워져 있던 동판이 누군가에게 도난 당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2014년에 다시 오산 죽미령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하와이까지 갔던 동판은 돌고돌아 51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1970년대까지 홀로 죽미령을 지키던 구 초전비 주위에는 1982년의 신 초전비, 2013년의 유엔군 초전기념관, 2019년의 죽미령 평화공원과 스미스 평화관 등의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공원 내로 이전하게 되어 공원의 가장 아늑한 자리에 호젓하게 앉아 죽미령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작은 전시는 이러한 구 초전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관련 사진들을 관람객 여러분과 공유하고, 소중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나아가 아픔을 간직한 구 초전비가 옛날처럼 지역 주민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랍니다.
▷ 구舊 초전기념비 연혁
1950. 7. 5 오산 죽미령 전투
1955 미 제24사단이 건립
1963 기단부의 동판 도난
1964 정부가 동판을 되찾아와 미 8군에 전달,
다시 미 8군 내에서 분실,
구 초전비 보수공사(미 8군, 재향군인회 등)
1977 지갑종 회장(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미국 하와이
골동품점에서 500달러에 구입
1978. 7 미 25사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들여온 후
지갑종 회장 자택에 보관
1982. 4. 6 신 초전기념비 건립, 추도식 장소 이관
2014. 7 지갑종 회장 오산시에 동판 전달
유엔군 초전기념관(2013년 개관)으로 이관
2019. 11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2019년 개장)으로
구 초전비 이전
2020. 7. 5 구 초전비에서 추도식 진행
2020. 12 유엔군 초전기념관 상설전시실에 동판 전시(예정)
▷ 건립과 유엔군참전기념사업회
구 초전기념비는 죽미령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제24사단 장병들이 희생된 전우들을 기리며 1955년에 건립하였다. 그러다 24사단이 유럽으로 옮겨져 관리주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독산성 세마대 고척중건위원회를 결성하고 세마대 재건공사를 추진했던 고(故) 유희훈 선생이 1957년 7월 5일 추도식을 주관하였다. 나아가 그 해 7월 19일 유엔군참전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어 유엔군 초전기념식 및 스미스부대 추도식을 주관하게 되었다.
기념사업을 시행함으로써 유엔군 참전국에 도의적인 감사를 다하고 국제친선을 도모한다는 취지였다. 이로써 미군에서 간소하게 치르던 추도식이 지역의 큰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엔군참전기념사업회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관리재단 없이는 지속적인 관리가 불가능했기에 1964년 유엔군 사령관에 통보하여 미8군 인사처장 주관으로 사업을 정비하였다.
▷ 오산 주민과 함께하다
매년 7월 5일 추도식 날이 되면 주민들은 유엔탑의 신기하고도 성대한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나온 아낙, 논일을 잠시 쉬고 나온 촌부, 나무에 올라가 구경하는 아이의 눈에는 외국인도, 악단도, 기도하는 목사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특히 1959년 추도식에는 삼미초등학교, 광성국민학교를 비롯하여 오산여상, 수원 삼일고등학교 등 인근의 5개 학교가 행사에 참여하고 유엔가를 불렀다. 그리고 행사 일이 다가오면 인근 학교 아이들이 동원되어 환경사업을 펼쳤다.
1957년 10월 24일에는 유엔데이(유엔 참전의 날)를 기념하여 유엔군참전기념사업회의 주최로 유엔탑 앞의 국도에서 마라톤대회가 개최돠었다. 참가선수단은 초전비에 헌화하였으며, 주민들은 대회 개최를 함께 축하하였다.
▷ 없어진 동판과 석판으로의 교체
구 초전비에 있던 동판은 1963년의 어느 날 도난 당했다. 1963년 4월 30일에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수원과 화성에 있는 충혼탑의 연혁판과 유엔군초전기념탑의 부대 표지를 비록하여 수원시내 소화국민학교의 간판, 그 밖에 4개지의 동판으로 된 간판 등이 감쪽같이 없어졌다"라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따라서 구 초전비를 비롯한 인근에서도 비슷한 도난사건이 잇었던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및 경향신문 1963년 4월 30일자 기사).
이후 구 초전비는 1964년에 보수되었는데, 동판은 도난을 방지할 수 있는 석제(石製)로 대체되었다. 1965년에는 미8군 인사처장이 본국으로 전속되어 유희훈 선생이 개인 자격으로 추도식을 거행하다가, 선생이 초대 화성문화원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1966년부터는 화성문화원 주관으로 추도식이 이루어졌다.
▷ 51년 만의 귀향, 돌아온 동판
구 초전비의 동판은 이후 정부가 되찾아와 미8군에 전달했으나 다시 미8군 내에서 분실되었다. 그러다 1977년 지갑종 회장(현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미국 하와이 골동품점에서 500달러에 구입하게 되었다. 이후 1978년 팀 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하는 미 25사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 땅에 들여온 후 지갑종 회장 자택에 보관하다가 2014년 오산시에 동판 전달, 유엔군초전기념관으로 이관되었다(경향신문 1978년 3월 20일자 기사). 현재 동판은 보존처리를 완료하여 보관중이며, 준비 기간을 거쳐 오는 12월 유엔군초전기념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될 예정이다.
▷ 신新 초전비의 건립과 이어지는 전통
1982년 신 초전비가 건립되면서 추도식 장소는 자연스레 공간이 넓은 신 초전비로 옮겨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행사 광경은 변해갔다. 미국에서 머나먼 한국까지 올 수 있는 참전용사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대신 그들의 자녀와 손자 손녀가 참석햇다. 또한 참석하는 사람들이 바뀌고 그 사람들의 복장이 바뀌었다. 하지만 매년 7월 5일 즈음에는 초전비를 청소하고, 추도식 당일에는 화환과 헌화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죽미령의 넋을 기리는 마음은 7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었다.
▷ 새로운 보금자리,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전쟁의 상처가 새겨진 죽미령이 다양한 평화가 회자되는 곳, 일상에 지친 마음을 치유하며 모두의 행복한 공존 공간이 되길 바라는 뜻으로 조성되었다. 구 초전비는 이러한 평화의 장소에 원래 있던 자리(스미스 부대가 B중대 1개 소대를 배치했던 99고지)에서 옮겨와 함께하게 되었다. 구 초전비는 공원 가장 안쪽 자리에 호젓하게 앉아서 공원에서 오가는 미래지향적인 평화이야기를 들으며 오산 주민과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엔군 참전 원호국의 도의적인 감사를 다하며
기념사업을 시행함으로써
국제친선을 도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상기 삼대사업에
무언의 노력과 실천으로
십여년간 시종일관으로 노력하면 된다는
신조하에 분골쇄신하야 왔음니다.
천우신조로 착착 진행 되어감에 희망을 가지고
유종의 미를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음니다.
단기 4290년 8월 15일
독산성 세마대 고적중건위원장
농촌협진회 추진인대표
유엔군 참전기념사업회 이사장
유희훈
죽미령 전투의 영웅들
The Heroes and Battle of Jukmiryeong
죽미령 전투에 참가한 참전국의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의미를 담은 수경시설로서, 전면부에는 오산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540명의 이름과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새겨놓앗다.
후면부에는 철판을 타공하여 전쟁의 탄흔을 표현하였고 죽미령 전투 당시 비가 내렸던 상황을 분수(워터커튼)로 연출하였다.
1. 대한민국은 건국된 적이 없다(건국 기념일을 지웠다.) 2. 2019년을 대한민국 100주년으로 기리겠다.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2017년 8.15 기념사) 3. 2019년 3.1절을 남북공동 행사로 기념하겠다. 4.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00명 이상이 죽었다. 5. 김정은이 핵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6. 나는 남쪽 대통령이고 김정은은 국무위원장이다. 7.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재천명하였다. 8.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문건 작성은 촛불시위를 진압하려는 것으로, 시대착오적이고, 있을 수 없는, 불법적 일탈 행위이다(대변인 발언 포함). 9. 대한민국은 친일부역배가 건국하였다. 10. 日帝 때부터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11. 김정은이 2018년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12. 한국전은 내전이다. 13. 한국은 외부가 아닌 우리 힘으로써만 해방되었다. "광복은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석 자까지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지켜낸 삼천만이 되찾은 것입니다." 14.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 시대를 열었다. 15. 문재인 정부는 3대 민주정부이다. ////////////////////////////////////////////////////////////// 2017년 8.15 경축사의 오류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리고 첫 번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오늘, 그 의미가 유달리 깊게 다가옵니다.> -대통령이 혁명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쓴다. 혁명은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촛불혁명이든 민중혁명이든 군사혁명이든 불법이다. 이는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서약하였던 대통령이 스스로 직무를 위배한 것이다. 우리 헌법에 ‘혁명’을 정당화하는 조항이 있는지?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습니다.> -광복, 즉 해방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기여가 더 컸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이겼으므로 해방이 온 것이다.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건국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건국한 것이다. 그래서 건국이 광복보다 優位이다. <위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은 민주화와 경제 발전으로 되살아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하고 땀 흘린 모든 분들, 그 한 분 한 분 모두가 오늘 이 나라를 세운 공헌자입니다.> -"반공투쟁"이 빠졌다. 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軍官民의 노력을 애써 무시하였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북이 공동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 실태조사를 하는 것도 검토할 것입니다.> -남북한 공조의 反日운동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 지금은 北核문제에 공조해야 할 한국과 일본이다. <정부의 원칙은 확고합니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최우선이고 정의입니다.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은 안 됩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입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핵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도발적 군사행동을 하는 것도 대한민국이 막을 힘과 의지가 있나? 없다면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하거나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군사작전을 펼 때만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인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하니 군사적 방법이 거론된다. 실패한 것이 증명된 평화적 해결을 이 마당에 또 다시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시험을 유예하거나 핵실험 중단을 천명했던 시기는 예외 없이 남북관계가 좋은 시기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북미, 북일 간 대화도 촉진되었고, 동북아 다자외교도 활발했습니다.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 이명박 정부 때인가? 2002년 북한정권은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우라늄 농축 방식에 의한 불법적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때는 김대중 정권 시절이다. 좌파정권 10년간 북한에 퍼준 약100억 달러의 금품이 반역집단의 핵미사일 개발에 쓰인 사실을 덮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인가? 사실과 어긋난다. <북핵문제 해결은 핵 동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핵동결은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겠다는 패배주의이다. 북핵 문제 해결은 핵폐기 약속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흡수통일을 추진하지도 않을 것이고 인위적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평화적,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한이 기존의 남북합의의 상호이행을 약속한다면, 우리는 정부가 바뀌어도 대북정책이 달라지지 않도록, 국회의 의결을 거쳐 그 합의를 제도화할 것입니다.> -이는 헌법 위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인위적 통일 정책을 명령한 것이다. 통일의 대원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방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에서 자유의 원칙을 무시하였다. 정책을 법으로 가두는 것은 위험하다. 정책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유연하게 해야 한다. 법으로 정책을 규제하면 외교 안보 전략은 기능적 수단으로 전락한다. <북미, 북일 간 대화도 촉진되었고, 동북아 다자외교도 활발했습니다.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북미’라는 표현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동맹국인 미국보다 우대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미북, 일북이 맞다. <한일관계도 이제 양자관계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와 역사문제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발목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셔틀외교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를 확대해 갈 것입니다. 당면한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양국 간의 협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사 문제를 계속 따지되 북핵에 공동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일관계를 협력적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이야기는 잘한 것이다.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 -2019년이 건국 100주년이란 말은 너무 심한 억지이다. 임시정부가 국가라는 뜻이 된다. 독립도 하지 않았는데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니! 정부수립은 건국의 내용이다. 국민이 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가 헌법을 만들어 수립한 정부가 곧 국가이다. 그런데 완전한 정부가 수립된 날을 무시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을 건국이라니? 국어사전과 모든 정치학 교과서를 없애지 않고는 불가능한 주장을 한 것이다.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이 많습니다. 재일동포의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향 방문을 정상화할 것입니다. 지금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 곳곳에 강제이주와 동원이 남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 분들과도 동포의 정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는 이미 한국을 마음대로 방문한다. 조총련 소속 재일동포는 북한국적이다. 북한정권은 反국가단체이다. 북한정권의 하부 조직인 조총련도 反국가단체이다. 즉, 反국가단체 구성원의 한국 방문을 허용한다면 이는 적화공작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악용될 것이다. 조총련 소속자는 전성기의 10분의 1로 줄어 3만 여 명 정도이다. 이들은 북한 공작원으로 간주해야 한다.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등이 있으며,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꼭 저녁 같습니다. 시인이 만들어낸 시의 경계를 두고 하는 은유입니다.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을 때 펼쳐지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나의 쓰기는 말하지 않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시인의 말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2019년 12월
김민정
차례
시인의 말
1월1일 일요일
사발이 떴어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
꿈에 나는 스리랑카 여자였다
나는 뒤끝 짱 있음
그니깐 여름이 부르지 마요
쾰른성당
실마리
이제니가사람된다
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니고
나의 까짐 덕분이랄까
네 삽이냐? 내 삽이지!
어느 날 저기는 자기가 되고 어느 날 자기는 저기가 되어
기적은 왜 기적을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마 들어봤나 마
하여간에 선수인 것 같은, 끝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둘
열하고도 하루쯤 전일 거다
수경의 점 점 점
모르긴 몰라도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철규의 감자
준이의 양파
그 들통
다른 이상함은 있다
베이다오北島
감삼甘三 사는 제이크
제이크의 문자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저녁녘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끝물과 꿀물
깨지, 깨
귀가 귀 가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
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난데요
삼세번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발문 우리도 폴짝 · 박준
사발이 떴어
- 곡두 2
일곱 살 때 집 마당에서 키우던 개의목덜미를 쓸고 있는데 난데없이 옆집 기승이 아줌마네 집 안방에서 흰 사발이 뒤집혀 허공중에 뜨는 것을 보았지. 국 먹을 때 흰 사발을 내려다만 보았지, 뒤집힌 흰 사발을 올려다보기는 처음이라 내 머리 어디쯤 젖지 않게 그 흰 사발을 우산으로 쓰자면 쓸 수도 있겠구나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눈이, 희지도 않게 뿌옇게 쏟아지는 함박 눈이 너무 더러워서 내 입은 차마 못 벌리겠고 눈을 떠서 눈이나 피하는데 연탄집게로 연탄 대신 쥐를 집어갖고 광에서 나오는 엄마에게 사발이야 사발이 떴어 사발 맞다니까, 사발 타령이나 하는데 그 낮에 기승이 아줌마 혼자 떡국 한 그릇 자시고 주무시다 주무시던 그대로 상여 타고 나갔다는 거지. 그 상여 꽃상여 되게 예뻤는데 상여나갈 때 광목으로 된 어깨끈이 느슨해지면 추어올리던 아빠의 폼이 꼭 코 훌쩍대는 아이 같았는데 여직도 침대 매트리스 고를 때마다 그 상여의 두께가 이만큼이었나 저만큼이었나 재게 된다는 거 뭐 내가 가늠하는 깊은 수면의 질은 언제나 속곳 그 속속곳인데 상여 같은 침대면 수면제 없이도 술 없이도 잠이려나. 돈이겠지. 개뿔 돈일거야, 아마 혼자 드신 점심상이었으니 고명은 안 해 올렸을 거야. 깨끗했거든 흰 사발. 불어 흰 사발에 붙은 떡은 잘 떨어지지도 않으니 누가 알겠어, 그 흰 사발의 속사정. 근데 그 흰 사발에 목숨 수壽 자 같은 거 퍼런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을까. 그랬을까. 그날로부터 20년도 더 지나 한국은행 취직해서 배 한 상자 들고 집에 인사 온 기승이 오빠에게 아무리 물어도 흰 사발은 뉘 집 사발이냐 하는 표정으로 얘 왜 이래요 어머니 하고 우리 엄마나 쳐다보는데 요즘 얘가 사발 모으잖니 요즘 얘 사발에 미쳤잖니, 엄마는 왜 사발도 모르면서 사발 안다는 뉘앙스를 풍기냔 말이지. 포인트는 사발이 아니고 상여고 소창인데 두 필 사서 그 한 필은 황현산 선생님 1주기 추모식 때 밟고들 들어오시라고 2층에서 입구까지 층층 나무 계단 물 흘리듯 깔았고 남은 한 필은 옷장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결혼한답시고 함 띠로 두를 것도 아니고 애 있어 기저귀 오릴 것도 아니고 행주로나 들들 박아야지 하는데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니까 그치 그 흰 사발, 리틀엔젤스예술단 어린이합창단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캐럴 부를 때 쓰던 모자 같은 그 흰 사발. 뒤집혀 있음으로 이날 입대껏 살아 있나 그거 뒤집을 작심에 그거 뒤집어 떡국 담아 먹을 욕심에 사들인 흰 사발이 얼마 전 부엌 찬장 세 칸을 넘겼다는 얘기지.
썼다 지웠다 그러다 없다
- 곡두 4
눈도 예쁜데 눈이 예쁜데 눈은 예쁜데 눈만 예쁜데 눈도 안 예쁘네. 마음이라는 거. 변한다는 거. 안 변하는 게 또한 마음이겠냐는 거. 미련 같은 거 치우면 또 연두 같은 게 들어찬다는 거. 그 연둣빛 청개구리 한 마리. 1층 살던 어느 여름 고양이 무구가 어디선가 청개구리를 물어 와 내 앞에 툭 뱉어냈지. 먹지도 않아 물지도 않아 그러다 청개구리 뒷가리 중 하나만을 작정하고 팼지. 다다다 때렸지. 그 다리 하나가 펴지고 펴져서 쭉 편 실 같아졌지. 이유를 아나. 아나, 모르지. 다리가 그리 늘어진 청개구리와 그 다리를 그리 늘인 고양이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 숨죽임 같은 거. 아직 안 죽었으니까 아직 안 죽었으니까 누가 먼저 튈까 누가 먼저 튈래 방어와 공격의 그 타이밍을 보는 서로 간의 집중, 그 무아의 무한 팽창 같은 거. 4층에 사니 고양이 무구가 여름이라고 어디선가 귀뚜라미를 물어 와 저 혼자 씹어 먹기에 바쁘지. 먹지 말라고 씹지 말라고, 뱉어 무구야 뱉으라고 무구야. 검은 곤충 한 마리의 있다 없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선 내 앞에 홀린 듯 고양이가 흘려준 귀뚜라미 앞다리 하나. 킁킁 냄새 맡더니 다시 제 입에 넣지를 않나 내 몫으로 남은 귀뚜라미 앞다리 하나. 이거 어쩌기 어렵지. 이거 어쩌기 어려운 한 이거 어쩌기 쉬울 때까지는 앙심과 양심 사이에서 계속 두루마리 휴지 풀겠지. 그치, 그런데 그거 본 적 있어? 1977년도 <10대가수가요제>에서 혜은이가 「당신만을 사랑해」 노래하는데 옆에서 길옥윤이 색소폰을 불지. 예쁘게 웃으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양 볼 오지게 깨가면서 불지. 혜은이 목소리는 알아도 길옥윤 목소리는 모르지. 제 목소리 뽐내는 것도 아닌데 길옥윤은 그때 왜 그렇게 열심히 색소폰을 불었을까. 그렇게 불더니 지금은 어디 가서 무엇을 볼까. 모르지, 모르니까 썼다 지웠다 그러다가 없을 것이란 얘기지.
실마리
- 곡두 9
아랍에미리트 갔을 적에
거기가
아부다비였나 두바이였나
황금을 잘 개서 잘 처바른
거기가
왕의 두번째였나 세번째였나
왕의 부인네 궁전 앞뜰
노니는 공작을 봤을 적에
뭐라도 더 가질 게 없으니까
느려터지기나 하는 공작이
어떤 두리번거림도 없이
손 없이도 뒷짐 질 줄 아는
허세 당당한 포즈로
나니까
나나 빤히 보고 섰는데
아주 정면으로다가
보면 마주하는 거지
무슨 용건이 더 있겠냐마는
짙은 공작의 쌍꺼풀이
다만 흉내 내고 싶은 아이셰도라
그 배색이나 커닝하는 주제가
나니까
공작이나 빤히 보고 섰는데
내가 봐도 그 타이밍에 나는 꽤
기차서 거 참 기차다 하였는데
동선이라나
동선이라니
그려져서 그려본 것을
말이야
말이라
기실
그 실 찾으려니
실패는 커녕
휴대용 미니 재봉 키트 하나 없고
그런 건 또
편의점에서 판다 하니
문발CU점에 가 사고 앉았는데
꼭 그래
영수증에 찍힌 문발씨유점에서
그 발씨를 씨발로 읽은 거
그 동네 작은 부엌 반찬 전문점 앞에서
셰프 박찬일에게 안부 메시지 보낸 거
춘천 가는 기차 아니고
순천 가는 기차 타고
최정진 시인이 하는 서점
'생각구름'에 갔을 적에
또오르는 글 하나 적어보라 해서
내 글 새긴 접시 하나
후에 보내준다 하였는데
여적 그 접시가 안 오고 있는
기실
그 실 찾으려니
실패는커녕
족히 2년은 풀려
있는 채로
잇는,
이제니가사람된다
- 곡두 10
살아가는 사람이 먼저일까, 죽어 있는 사람이 먼저일까. 시는 나일까, 내가 시일까. 시란 나는 누구이기에 "이제니가사람된다"라고 누군가가 갈긴 메모를 "이제 니가 사람된다"라고 누군가가 갈긴 메모를 "이제 니가 사람 된다"와 "이제니가 사람 된다"로 갈라 읽으며 낄낄대고 앉았나. 웃긴 걸 좋아하는 나. 웃긴 사람을 편애하는 나. 누군가 더럽게 웃긴 년이라 할 때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먹는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친구가 닭집을 개업했을 때 애들은 그런 데 가는 거 아니다 하는데도 시루떡 쪄서 가는 엄마 손 모자라다며 엄마 지갑 들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거길 졸졸 따라간 데는 체인점 홍보대사가 코미디언 엄용수라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였다. 그때 그 시절 코미디와 개그의 차이를 아는 정의로 엄용수는 연기란 걸 했을까. 알았던들 우리에게 설명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겠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김형곤과 함께여야만 무대가 무대였겟지. 코미디언 엄용수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앉아 사진을 찍은 엄마와 아줌마는 1952년생 용띠. 사진 뒷장에 엄용수 아저씨와 함께라는 메모는 둘 중 누가 쓰신 거라니. 이제 와 검색해보니 엄용수는 1953년생 뱀띠. 그러고 보면 1988년 10월 17일에 찍힌 이 사진은 어쩌다 31년이나 흘러 파주 사는 내 집 건넌방 서랍에서 내가 다닌 인천남부국민학교 졸업 앨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게된 걸까.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 곡두 18
미주알이 빠져 미주알을 넣어주는 병원에 가니 의사 이름이 김태형인 거라. 아랫도리 까는 게 끝이 아니고 아랫도리 까는 게 시작인 데다 모로 누워 무릎을 턱에까지 붙이고 공이 될 요량으로 콩처럼 몸을 마는데 느낌 좀 이상할 겁니다. 쑥 하고 들어가요, 자자 숨 참으시고, 금방 끝납니다. 네, 끝났어요 하시는데 순식간에 오므린 입처럼 쫀쫀한 아랫도리인 거라. 소의 볼깃살이라 할 그 살점이 대체 뭐라고 앉으면 풍선처럼 터질세라 서면 바지 밖으로 삐져나올세라 어찌어찌 모범택시 불러 서교동 SC제일은행이 1층에 자리한 병원 건물에 내리기는 하였으나 새삼 내가 여기 왜 왔나 이제 와 능청이나 떨고 싶은 거라. 개업한 친구 남편 병원에 뭐 책잡을 비뚤어진 액자라도 없나 째진 눈의 아내 친구처럼 사정없이 두리번거리기나 하는데 책상 위에 피케티 얼굴을 띠지로 두른 『21세기 자본』이 놓여 있는 거라. 어머 이 책 읽으시나 보네요. 저 다니는 회사의 계열사에서 나온 거거든요, 참 저희 사장님도 이름이 태형인데 성이 달라서 성이 강이긴 한데, 누가 물어봤나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저 혼자 계속 씨부려대는 가운데 시 쓰는 김태형 선배도 불러냈다가 희곡 쓰는 김태형 출판사 제철소 대표도 불러냈다가 프랑스에서 조향 공부하고 온 김소진 소설가와 함정임 소설가의 아들도 김태형이라며 그 조카의 이름도 불러냈다가 엊그제 일산 백병원 응급실에 위경련으로 실려 갔는데 유난히 친절했던 당직 의사 이름도 김태형이라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세상 아는 이름 태형은 죄다 불러들이기에 바빴던 나는 대장항문과 담당의 김태형 씨가 보라는 대로 정지된 화면 속에 시선을 두기나 하는데 그 안 가득 너무 붉음이고 그 한가득 죄다 붉음이라 빨간 토마토 반 갈라 숟가락으로 속 퍼내서 모으면 딱 이 색이라는 등 믹서에 빨간 피망 넣고 갈다 잘 갈렸나 들여다보면 딱 이 색이라는 등 딴청에 능청이나 부리는데 있죠.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마세요, 과로하면 이거 또 빠집니다 하시는 대장항문과 담당의 김태형 씨에게 일순 얻어먹은 게 일명 감동이라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또 올게요, 곧 올게요, 단골인 철원양평해장국집 나설 때처럼 그리 말하는데 이리 살짝 덧붙여주시기를, 다행히 치질은 없으세요.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하나
- 곡두 19
드라마 보다 자막에 밑줄 그은 이야기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김영옥 할머니가
다리 저는 아들이 밤낮 결혼시켜달라고 조르니까
이렇게 말했다.
야, 이 미친놈아,
밭일은 안 하고 밤일만 생각하는 새끼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이순재 할아버지가
택시로 함께 드라이브 나선 강부자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밖 사람 구경혀.
어차피 평생 모르고 살다 갈 사람들이야.
수경의 점 점 점
- 곡두 22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그래주니 대낮에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요······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어······ 내 집 아닌 누구의 집도 아닌 그 먼 집에서 누구세요? 아 누구네 집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지겹다는 느낌이 슬픔인 걸 알아버린 오늘······ 언니가 멀리 있어 언니에게 부릴 수 있는 엄살······ 언니가 가까이 있으면 내게만 부리고 말았을 몸살······ 언니는 왜 내게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 딱히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봄이어서 봄인 탓에 언니에게 부렸을 투정······ 봄이 전부여서일까 봄만 빼고 전부여서 그랬을 것도 같은데 그건 다 언니가 가르쳐줘서 내 안에 허용하게 된 말줄임표 때문이라고 떼를 쓴 적도 그러고 보면 있었다 언니야······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에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교과서대로라면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안찍는다 언니야······ 점 하나에 추억과 점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쓸쓸함과 점 하나에 동경과 점 하나에 시와 점 하나에 언니, 언니 언니야······ 혼자 갔을 먼 집에서 검은 바둑돌로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놓아가며 먼저 놀고 있어라 언니야······ 그거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리다 만 얼굴로 배지 만들어 내 오늘 가슴에 달았으니 뾰족하여라 배지의 핀이여 넘어지면 찔려버릴 심장이기에 꼿꼿하게 직립하게도 만드는구나 언니야······ 나는 귤 박스를 앞에 놓고 귤껍질을 벗기는데 한 번에 열두 알도 족히 먹었던 귤인데 나는 먹지 못하고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는 먹을 수도 없어 귤의 껍질을 벗겨 한 짝만 남은 한 짝의 커피색 스타킹에다가 귤껍질이나 모으는데······ 향이네 언니야······ 향이라서 피워 나누고 향이니까 피워 가진다 언니야······ 사람들의 수다스러운 음성 무엇 하나 접시에 담아다 줄 수 없으니 나 혼자 가진다 언니야······ 욕조를 채워가는 뜨거운 물속에 던진 망 귤 망 퍼져가는 땅 맺히지 않는 망 잡히지 않는 땅의 망 속 물을 낚아채는 손 물도 꿰맬 수 있는 어리둥절한 사기······ 밤새도록 여린 짐승 하나가 창밖에서 서성거리기에 성냥에 불을 붙였는데 커져서는······ 번져서는······ 더는 쓸 수가 없겠다 언니야······ 침침해서······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 곡두 24
민정아 하셨다.
네 하였다.
보리다 하셨다.
네 하였다.
고양이다 하셨다.
네 하였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겪은 것들을 좀 생각해라.
시간 나면 여 와서
며칠 잇다 가거라.
아무 생각 안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숨 쉬어가면서.
뭐 드러 급하게 하냐.
한 박자 늦춰가면서.
봄이니까.
꽃 피잖아.
바람도 불고.
세도 울어.
민정아 천천히 일해라.
성질대로 하지 말고.
서둘 것은 없다.
대략 알면 된다.
책이 중헌 게 아니다.
알았쟈?
거미줄만 보러 다닌다 하셨다.
네 하였다.
김용택 선생님은 전화를 끊고
거미줄을 보러 또 나갈 거라 하셨다.
네 하였다.
철규의 감자
- 곡두 25
철규가 거창에서 감자를 보냈다 했고
내가 인천에서 감자를 받았다 했다
그 감자의 신묘함이라 하면
철규가 보냈다는 그 감자를
철규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받았다는 그 감자를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서로 그 감자를 두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맞던데 뭐
아는 척을 마구마구 한 일
먹어봤니?
아니
만져봤어요?
아니
하여튼 간에 시인들이란
말이 앞서
말만 앞서
그래 감자 심는 거나 아나?
아니 모르지
농사 안 짓는 인천의 우리 엄마가
찌니 아주 포슬포슬 맛 좋다고
까만 비닐봉지에 나눠 보내며
농사 안 짓는 파주의 내게
맛봐라
거창의 철규 어머니가 농사지어 보낸 감자라
세어보니 열세 알
어머니 둘은 아는 이 감자
나는 이제 보는 이 감자
어머니들은 다 아는 이 감자
철규는 아직 못 봤을 이 감자
열세 알 감자가 든
까만 비닐봉지 배를 반 갈라
조리대 위에 훤히 벌려놓고
파를 썰다가도 힐끔
컵을 씻다가도 흘끔
마른손이거나 젖은 손일 때도 꾹
눌러보는 관심사는 단단하기가
플라스틱 지우개라
연둣빛 감자의 싹수가
두어 달 지나니까 움을 터
군데군데 움튼 이 감자의 쓰임을 두고
철규와 얘기나 해볼까 하는데 문득
철규는 다리에 털이 많을까
그게 왜 궁금해지더냐 말이지
엄마, 철규 다리에 털이 많을까
그걸 철규 씨한테 묻지 왜 나한테 묻냐
아침부터 털털거리지 말고
털이고 자시고 간에
더 썩히지 말고 싹 다 파내서
된장에 남은 감자나 썰어 넣으라고
국으로나 끓여 먹으라더니
엄마는 전화를 뚝 끊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철규에게 물어나 봐야지 않을까
여하튼 간에 시인들인데
다리에 털 많은가 털 없는가
그걸 묻는 게 죄라면
단박에 나는 수갑 차고 말 누나라지만
준이의 양파
- 곡두 26
준이가 트렁크에 양파를 싣고 왔다는 말. 나누자는 양파라는 말. 나눈다는 양파라는 말. 트렁크를 열어 함께 양파를 모았다는 말. 연준이도 머리를 숙여 함께 양파를 보았다는 말. 큼지막한 신고배 같은 양파라는 말. 상자 그득그득 빼곡한 양파라는 말. 나는 다섯 알만이라 하던 연준이의 말. 더 갖고 가 이것아 하던 나의 말. 뒀다 장 제부 먹여 하던 나의 말. 트렁크를 열었을 때 생각보다 덜했던 매운 내가 뒷좌석에 앉았을 때 생각보다 더한 매운 내여서 바람이 불어 그런가 하는데 언니 파주가 너무 좋은 게 파주는 나무들이 짐승처럼 자라요, 하던 연준이의 말. 커 알이 좀 컸어 크더라고 들어보니 무겁고 고른 사이즈야 전화로 양파 얘기를 하니까 파주 롯데아웃렛에서 쇼핑하다 전화받고는 양파는 안 싣고 쇼핑백만 싣고 가며 너 또 썩힐 텐데 썩혀 버릴 텐데 하는 엄마의 말.
누나 이 중에 한 개의 무름이 있어요. 한 개의 무름은 모두를 무르게 하는 무름. 무름은 부름. 흰색 발가락 양말을 신은 퀵 서비스 아저씨 샌들 보다 웃음이 나 양파 박스 떨어뜨릴 뻔한 부름. 저는 만수동이 집이니까 학익동 가까워서 싣고 가는 기분이가 아주 좋습니다. 하시니 나도 내가 좋아지는 부름. 금요일 퇴근 시간대라 막힐 거니 너무 서둘지는 마세요 착한 안주인 코스프레로 나 아는 사람은 눈 흘길 게 빤한 내 말의 부름. 한 시간 두 시간 파주에서 인천까지 출발한 지 세 시간 반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영문 모를 양파의 부름.
아저씨 어디세요? 수원 가는 길인데요. 인천 가시는 거 아니세요? 아 맞다, 양파! 수원 가는 큰 콜이 들어와서 인천에 당장은 못 간다는 지경. 인천이 집이라더니 집에 안 가실 거냐니까 내일 가도 된다는 지경. 그럼 내 양파는 어쩌란 말이냐니까 내일 밤에 갖다 주면 안 되겠냐는 지경. 무르기 시작한 한 개의 양파가 잇어 나는 절대로 안 된다는 지경. 양파가 싸니 양파값을 물어주면 될 거 아니냐는 지경. 양파가 싸도 그 양파는 그냥 양파가 아니라는 지경. 그건 준이가 사 준 양파라는 지경. 난데없이 준이가 누구냐는 지경. 박준이라는 시인이 이고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양파라는 지경. 듣고 듣다 세상에 없는 양파가 있다는 얘기는 도통 들어본 적이 없다며 되레 성을 내는 지경. 퀵 서비스 센터에 항의하고 나 그런 몰상식한 여자는 아닌데 화나면 나도 날 몰라요 입을 다물어버리는 지경. 나는 집 안에서 아저씨는 도로 위에서 침묵의 양 끝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 지경. 나 그렇게 양파 떼어먹고 그러는 사람 아니라는 지경. 알아요 아는데 양파 박스 안에 한 개의 무른 양파가 있다는 지경. 어쩐지 양파 냄새가 솔솔 나긴 했었다는 지경. 다마스 안에 페브리즈 있냐고 묻고 있는 지경. 좌우지간 자정 넘어 도착일 텐데 새벽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엄포의 지경. 어처구니없지만 오기를 부리게 하는 지경. 양파 값이 얼마인데 기름값도 안 나오겠다며 툴툴대는 지경.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적반하장의 지경. 알았다더니 끝내 내일이 아니라 반드시 오늘일 필요가 있겠냐고 한 번 더 묻는 지경.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만 오늘이라고 끝내 한 번 더 답하는 지경.
퀵 비 기본 4만 원에 팁 5천 원 얹어서 4만5천 원이었는데 양파 한 상자의 값을 알지를 못하니까 더없이 당당해지니 요지경. 준이의 양파 한 알에 퀵 비에 전화비를 비율 대비로 계산하려니까 그 계산이 사라지는 요지경.암마가 준이의 양파고 우리 집 양파고 있는 양파 다 썰어서 양파장아찌를 담글 참이라는데 준이도 좀 줘야 되지 않겠냐고 해서 나는 연준이도 줘야 한다니까 그럼 과실청 담글 때 쓰는 락앤락 숨 쉬는 밀폐 유리병 0.5리터짜리 한 열 개 사서 집으로 보내라니 배보다 배꼽인 요지경. 일단 맥주 한 잔은 마시고 나야 조갈증 달래고 주문도 하게 생겨서 냉장고를 여는데 준이가 전북 임실 절호수 농원에서 주문해 보내준 1리터짜리 고추장과 1리터짜리 된장이 바로 보여 나는 고추장 뚜껑을 열고 맥주 안주로 집어든 김부각을 거기 푹 찍어 씹는데 바삭하니 준이의 양파장아찌도 아삭하겠지 싶어 미리부터 청양고추도 장바구니에 담아두는데 왜 엄마는 새벽 2시가 넘어 양파 써느라 울면서 웃는 째진 눈으로 콧물 흘리는 요지경 속에 있나. 이거 봐요 민정 엄마 콧물 닦아요. 전화 너머로 엄마 코에 휴지 대주고 있다는 아빠는 뭐 하냐니까 이 오밤 중에 칼을 갈고 있다는 요지경. 엄마 손 말고 양파 속 잘 썰리라고!
그 들통
- 곡두 27
장석남 시인이 형과 둘이 나무를 해다
산속에 작은 집 하나 지었다 해서
슬렁슬렁 가보게 된 셈이다.
닿고 보니 컴컴하고도 깜깜함이
무인지경만 같았는데
개가 있었던 것도 같고
그 개가 없었으면 하는 데는
아무려나 들통
그 들통이
내 손에 들려 있기도 했거니와
푹푹 고더라고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들통에다
엄마가 새벽부터 내내 끓이더라고 그
들통
여럿이들 밤부터 아침까지 퍼 먹더라고 그
들통
아무려나 들통
그 빈 통을 가져간다니까
웬만하면 놓고 가라 하고
왜 안 갖고 왔냐 해서
놓고 가라 했다니까
별나라 그 못난 걸 어따 쓴다니 하고
10년도 더 지난 얘기임서도
들통 안 준대?
여적 되묻는 것이 강화도 여자인 엄마고
그 들통 버릴 리는 없고
어디 골동품이 되어 있으려나?
여적 답하는 것이 덕적도 남자인 시인이고
그 들통을 섭처럼 드문 멀리에 두고
안부를 묻는 새로운 방식이다 할 적에
인천 섬것이나 꼭 인천의 섬것만은 아니다 하는
두 사람의 말본새는 용케도 닮은 데가 있다.
다른 이상함은 있다
- 곡두 28
"개새끼 못 잊어"라 하셨는데 나는
"못 잊어 개새끼"를 제목으로 올려 붙였다.
저녁참으로 만둣국을 끓여 먹고
개수통에 담아둔 놋대접 위로
수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그러했는데 그대로 놔둔 참이었다.
저 스스로는 도저히 소리를 못 내는
물방울
작금의 내 저간에서 들을 방도는
수전을 덜 잠그는 일 말고는 없어서
객기일지언정 그 헐거움의 미덕
써보면 알리라 가만히 지켜보던 참이엇다.
책상 위 스탠드를 끄지 못한 채로
책상 아래 스탠스를 1도 두지 못한 채로
잠이 들어서는 두 다리가 저려서는 그래서는
김민정 씨, 나 최승잔데요.
나 최승자라고요.
내가요, 책을 읽고 잇었는데요······
전화기를 들고 벌떡 깨어나서는
쌀뜨물같이 뿌옇던 유리창을 바라보고서는
개수통 밖으로 넘쳐흐르던 개숫물
수전부터 왜 잠갔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는
베이다오北島
-곡두 29
그의 시집 한 권을 챙겨 온 것이
그에 대한 앎의 전부였다.
"비겁은 비겁한 자들의 통행증이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들의 묘비이다"로 시작하는
그의 시 「대답」 군데군데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그의 시집 『한밤의 가수』에서
"꿈이 거짓임을 나는 믿지 않는다
죽으면 보답이 없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에
또다시 밑줄을 긋는 내가 그를 맞는 전부였다.
중국 푸젠성 샤먼의 섬 구랑위
2016 International Poetry Festival에 그가 섰다.
무대 위에 선 그에게 조명이 쏠리자
무인도도 아닌데
일순 그 말고는 숨 쉬는 이가
이 섬에 하나 없는 듯했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가
이제는 홍콩에서 산다는 그가
간만에 중국으로 왔다는 그가
시를 읽는다,
제 시를.
자막에 그의 시는 없었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그의 전부를 다하였다.
나는 못 알아먹었는데
내 두 손은 알아먹은 듯
오른손과 왼손이 절로 깍지를 끼는 합함으로
기도하는 한 손이 되는 연유.
그 이유를 설명할 길 없는 나는
공연히 하늘이나 올려다보는 여유.
들리는 저 시가 읽히는 이 시가 아닌들
"새로운 조짐과 반짝이는 별들이
훤히 트인 하늘을 수놓고 있다" 하니
당연히 별을 세는 데서 깊어지는 사유.
분교가 전부인 마을처럼 우리는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좋아지고 있었다,라고 말하지 못한 건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시집 면지에
'2016년 10월 23일 밤,
내가 혼자 아는 이 작은 큼'이라 써둬서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할 때 이 감정의 분분함.
지극히 없던 상냥함이 쌔고 쌔져서
지극한 상투어라지만 나는 그 밤
셰셰를 얼마나 흘리고 다녔는지
셰셰 하나는 퍽 잘하게 되었다는 말미다.
감삼甘三 사는 제이크
- 곡두 30
1
미국에서 온 시인 제이크는
계명대 문예창작학과의 초임 교수
미국에서 와 한국 시 번역도 하는 제이크와
계명대역에서 지하철을 함께 탔는데
감삼에 산다고 했다
제이크는 감삼역에서 계명대역까지
수업이 있는 날마다 오간다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제이크나
한국에서 태어난 나나
공평한 것이 감삼을 몰라
감삼이라는 네모 받침에 갇혀
맥없이 가나다라 연습이나 해보는데
각삭이라 했다 간산이라 했다
갇삳이라 했다 갈살이라 했다
갑삽이라 했다 갓삿이라 했다
강상이라 했다 갖샂이라 했다
갗샃이라 했다 갘샄이라 했다
같샅이라 했다 갚샆이라 했다
갛샇이라 했다 감 하나 띄고 삼
발음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I don't know
정말이지 너무 피곤한 한국어야
누나 감삼이면
감을 산다는 뜻이야?
달 감에 석 삼
단 감 셋이면
달겠지 달까나? 나는 떫은데
석 삼은 알지?
달 감은 못 쓸거야
나도 한자는 내 이름 석 자나 그린단다
2
미국에서 온 시 쓰고 번역하는 제이크와
파주장단콩축제에 가기로 했다
파주는 콩이니까
파주는 메주니까
홍어 다음으로
제이크는 청국장을 좋아하니까
파주에는 지하철이 없단다
그래도 걱정은 말렴
버스 한 방이거든
파주장단콩축제 현수막 붙인 버스는
죄다 임진각 가거든
임진각에서 북한 보이냐고?
보이겠지 보일까? 보인다던데
나도 임진각은 처음이거든
참, 너 그거 들어봤어?
경상도사투리말하기대회란 게 다 있더라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 곡두 32
의사는 더 진중해지고
여자는 더 자발맞아지고
의사는 모으고
여자는 주각내고
의사는 나아가고
여자는 주저앉고
그래서요
그래서일까요
의사는 궁금한 게 아니라
궁금한 척이고
여자는 오줌 마려운 게 아니라
오붓하고 싶은 척이고
의사는 말하라 하고
여자는 그린다 하고
그려보니
4층 옥상에 심은 공작단풍나무 아래
발가벗은 채로 웅크려 앉은 아이고
네가 사 준다 하더니 안 사 줘서 결국
내가 사 입은 슬립은 어디 갔냐 하면
슈퍼맨 망토처럼 내 목 뒤로 내가 묶은 뒤고
살짝 여유가 잇어 걸면 걸릴 거라
내가 걸릴 데를 내가 찾는 이 배려는
나무야 부러지면 너한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부르짖는 당위가 되고
개미들 기어들어 거기로 내 거기로
떼를 지어 오글오글 내 거기가 따갑다고
씨발 꺼지라니까 이 개미 새끼들!
후지지 참 내가 꼬진 거 다 아는데
이렇게 작은 지랄들이 지지고 더 지져댄다니까
개미들이 뭐라고 근데 그 개미들이
뭐긴 뭐거든 그렇거든 그리고 이젠
내가 먼저 짓밟을 차례거든 더 이상 나는
내 어깨가 니들 엉덩이에 깔리도록
그날처럼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거든
나는 컸어 나는 더는 어리지도 않아
골무를 끼고 내 속을 후비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가 덜 아플 거라고
그럼 니들 손은 더 깨끗할 거라고
때가 탄 골무는 빠나
살 벗겨진 골무는 버리나
일상과 망상 사이
골무만 보면 쭈뼛쭈뼛하다가도
골무만 보면 또 환장을 하는 게,
고우니까
곱다고 색색 그거
길 건너 한복집 언니네 가게에서
꼬깔콘 먹는 시늉하며 훔쳐냈던
색동 입힌 골무도 내게 아직 있지
못버리지
어떻게 버려
기억인데
기념 아니고
기록이어야 해서
통영 나전 반짇고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송방웅 선생 거
사 달라고 그래서 조르는 건데
모이니까
모을 수 있으니까 그럼
꺼내 볼 수 있으니까
안 잊으려고 절대
안 잊히려고
가만두지 않는 게 아니라
가만히 두고 보려고
보면 볼 수 있음으로
이기니까
그 골무와 이 골무는
태생이 다르다는 걸 아는
덤덤함을 덤으로,
이겨왔지
무던함의 무덤
그 둥글넓적한 얼굴로
자랐구나 잘 다 컸구나 너
그럼 니들만 자라고 나는 주냐
말 걸지 마라 입낸새 지독했으니까
쪽가위로 잘라내고 싶은 입이었으니까
죽으로 니들 주동이들 닥치고 있어라
분다 니들 불까 니들
작은 개미여도 낄끼리 날 무니까
날 무는 개미만 찾아 죽이는 집요 속에
내 거기를 물었던 너와
내 거기를 물렸던 나는
그렇다고 불구대천지원수까지 될 건 뭐니
국으로 약이나 타 먹게 된 사이라면
그건 뜻밖의 동지이고 환상의 파트너라
두고두고 남을 관계라는 흐뭇한 결말인데
그래서 그저 약이면 된다는 흔쾌한 결론인데
어차피 줄 거면서 느물느물 쥐고 안 놓으려 하니까
나는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파주 안 가고
거기 어디냐 홍콩이나 마카오 가잘 사람처럼
즉흥이라는 불균형의 식성을 자랑하고 있는 건데
식빵 한 장 위에 태양초 고추장 5백 그램짜리
네모진 통의 반을 펴서 처발라 먹는 맛
별점은 별 하나의 반도 아까워 색 안 칠할 맛
무맛 맹맛 병맛 느낌은 흐느낌
폭식은 누가 가르쳤냐면
내가 깨우친 행동이고
내가 처음으로 취해본 적극성이고
먹어 조질 때의 쾌, 그 쾌라 하면
나는 이쾌대 상쾌환 다음에 꼭
박팽년이 오더라고요 이 선회
급선회 나한테 요 선회라 하면
연희라는 이름의 우리 아빠랑 항렬이 같은
안동 김씨 족조 속 아재일 것인데
그 집 아들 셋 중 둘째를
우리 집 양자로 들인다던 개수작들
종친이랍시고 우르르 몰려와서는
우리 집에서 우리 엄마가 차린 술상들
받아 처먹으면서 씨부리던 말들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엄마를 무릎 꿇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아빠에게 삿대질을 해
네 사주에 아들 없으면
네 각시라도 대신 나가 아들을 낳아 오든가
한쪽이라도 피는 이 집 피 아니겠냐
말이면 다인가 하는데
말이면 다인가 보는데
기어이 내뱉는 거지
밑도 끝도 없는 무지렁이 훈계를
피피거리는데 정작 무슨 형인지 아실까
그 혈액형 모르고 오로지 그 피만 운운인 게
젯밥 너 하나 못 먹어서 끝나는 게 아니야
그 잘난 고추 하나도 못 뽑을 거면서
저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다 어쩔 것이여 살림 들어먹을 년들
시방 혀 차기도 아깝다니까 쯧쯧 하시니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저 곰방대 할배
검은 갓 쓰고 옥색 두루마기 입고 와서
검은 갓 벗고 옥색 두루마기 벗고 나서
졸라 드시는 거죠 촵촵거리면서
저 같잖은 말도 말이라고 저 입에다가
아귀수육하고 민어 살 뜨고 육전 부치고
소갈비 재고 게장 담그고 새우 튀기는
엄마는 미쳤어 엄마는 미친 거야
그래 나 미쳤다 미쳤으니 네 아빠랑 살지
감 깎는데 양자 새끼 이 집에 들이기만 해봐
내가 이걸로 눈 다 후벼버릴 거야
엄마가 아끼던 소반 끄트머리를
갉작갉작 과도로 긁어애는데 소리 좋아
연필도 아니고 지우개도 아니고
도루코 문구도 새마을 칼만 사서 모으던
5학년 6반 63번 김민정 어린이는
발뒤꿈치 벗길 때 말고는 귀찮아서
깎아 먹는 과일은 사지도 않아가며
칼보다 칼집 모으는 마흔넷 김민정 언니로
뭐든 매달고 거는 취미로다가 오믈도 바쁜데
어느 날부터는 하도 징징거려
깨진 징 몇 개를 얻어 걸었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 즉시 고요 너무 완전 고요
징채로 머리통을 맞은 것도 아닌데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지
나는 1인극 배우처럼
그 배우의 유일한 연출자처럼
즉흥인데,
아무도 안 볼 연기를 하는 거지
와이프가 혹시 현악기 안 하세요?
울림통인데 흠흠 나무 냄새 나는데
탄탄한 줄 몇 가닥 터진 굳은살인데
뭐 비올라 전공이기는 합니다만
내게 징을 준 건 김운태 선생님이신데
일명 자반뒤집기의 대가시거든요
자반······ 뭐요?
아 모르시는구나
상모돌리기 보면 완전 지리실 텐데
하루 세 끼를 위해 하루 천 바퀴를 도는
회전의 대가라고나 할까요
사람이 공중회전을 해요
우주 비행사처럼 제 몸을 띄워요
뜸요 아니
그 뜸 말고 그 뜸요
뜸을 뜰 때의 내 기분이란 게 있으니
뜸도 기분이란 게 있겠죠
우리 평생 그 뜸을 알고나 죽을까요
죽으면서 떠봤자 입이 없는 뜸이잖아요
뜸을 뜨고 뜸이 드는 그 두 뜸도 좋은데
앞 뜸이 더 좋다니까 혈액순환장애래요
스물셋에 속발성 무월경으로 근 7개월
피 안 흘려본 달 있었는데
피 나오는데 이 닦고
피 나오는데 맥심에 프림 넣고
피 나오는데 비빔냉면 비비고
피 나오는데 수금하러 신세계백화점 가고
피 나오는데 하이힐 사고
피 나오는데 선 자리에서 빙수 꼳고
피 나오는데 인상이 좋아 보이십니다에 팔 잡히고
피 나오는데 서울역 계단에서 구르고
피 나오는데 지하철에서 졸고
피 나오는데 집에 와 장구 치고
피 나오는데 아빠가 내 발톱을 깎아주고
피 나오는데 얼굴에 요구르트 팩 하고
피 나오는데 일기 쓰다 책 읽고
피 나오는데 통화하다 잠들고
피 나오는데 가위에 또 놀리고
근데 나는 또 뜸을 이렇게나 잘 참는다니까요
배꼽 여기 위에 살색 붉은 거 보이시죠?
다 뜬 뜸 안 건져서 자국으로 남은 뜸요
아 내가 왜 갑자기 여기서 배를 까고 그럴까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일주일 치 약 더 주세요
출장이 열흘이라니까요 정말이라니까요
아껴 먹을게요 한 번에 안 털게요
하도 징징대서 그랫을 거야 안 주고는
못 배길 만큼 연기가 탁월해서 그랬을 거야
차 안에서 보는데 깜짝 놀랐다니까요
큰 베개 하나 품고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누님
약을 큰 품에 안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님
병원까지 날 데려다준 홍보부 이천희 대리가
회사까지 날 데려다주기로 한 이 대리가
그렇게 신이 나세요? 멀리서 봐도 너무 환하셔서요
약이란 게 그렇게나 좋은 겁니까? 묻는데
어,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어어, 하는 거야 내가
멀리서 봐서 그래
멀리서 보면 다정들 하잖아
네?
그러니 잡지를 말아야 해
행여나 닿지를 말아야 해
잡고 싶으면 놓아야 하고
닿고 싶으면 달아나야 해
누님?
나는 벌받을 거고
나는 죄받을 거야
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운전수로 따라왔을 뿐인데
왜 저한테······
네가 오늘 재수에 털 난 날이라 그래
내가 그날 거기에 털 난 날인지 몰랏던 것처럼
있지, 천희야
화는 참아지는데
억울함은 왜 못 참아지는 걸까?
내가 안 참는 걸까?
참으면 병 됩니다, 누님
걱정 마 죽어도 복수는 하고 뒈질 거니
복수가 별거겟어?
끝끝내 죽어라 살아남는 거지
마침내 해내고 마는 거 그거지
가다가 롯데백화점 잠깐 들러주면 고맙고
하이힐 봐둔 거 있거든
내가 모으잖니 그치? 내가 좀 많긴 하지 그치?
귓구멍 같은 데 똥구멍 같은 데 그런
구멍들에다 하이힐 뒷굽 쑤셔 넣고는
쑤셔대는 꿈 나는 왜 그리도 꾸나 몰라
예? 예······
왜 드문히도 난 그렇게 전 부치는 꿈을 꾸어댈까
왜 이렇게 꿈에서 나는 전을 부칠까
전을 어떻게, 좀 사 갈까요?
가자
갈까요?
갈 수 있다면 오죽이야 좋겠니
못 간다고 전해라 근데 그 가수 말이다,
요즘 왜 안 보이는 걸까?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겠죠
연예인 걱정은 할 게 아니래요
그러니까 누님 걱정이나 해요
파주에 목욕탕이라도 파주고서 그런 소리 해라
너 어깻죽지에서 때가 얼마나 나오는지 아니?
날개가 돋을 것도 아닌데
딱 날개 자리인 것은 맞는데 말이지
"난다는 것은 여자의 동작"
이 제목은 정말 멋지지 않니?
왜 나는 이런 제목은 또 짓지를 못할까
「날개」 알지?
날개라 하면 나한테는 가수 허영란이거든
허영란은 <순풍산부인과> 허 간호사 아니가요, 누님?
가수 중에서도 허영란이라고 있어
미국에서 목사가 되었대
"'날개의 허영란'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세요.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도 크고 깊습니다.
복음의 날개를 달고 다시 일어나세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라면 일어날 수 있어요.
희망을 향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믿으면 되나?
일어나면 되나?
되면 나나?
나나?
「검은 나나의 꿈」이 내 등단작인데
봐, 여적 나 못 나는 거
귀가 귀 가
- 곡두 38
여전히 일본의 어떤 남자들은 스모용 선수로 태어나고
여전히 케냐의 칼렌진족은 장거리용 선수로 길러진다.
1973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태어난
여자 체조 선수 스베틀라나 보긴스카야는
소비에트연방, 독립국가연합, 벨라루스
3개 국기를 제각각 유니폼에 새기고서
서울과 바르셀로나와 애틀랜타 세 올림픽에
3회 연속 12년을 대표로 뛴 전적이 있는데
그걸 제가 원했다면 정치인 팔자인 셈인데
미국 텍사스에서 피자집을 운영한다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기에 그 인생 시네,
수첩에 적은 것이 2016년 6월의 일이었는데
2019년 11월 17일 오후 1시 22분에 검색하니
미국 텍사스에서 온라인 체조 의상 소매업과
체조 선수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고 나온다
있다 사라진 시가 잇으되
서로 반짝이는 타이밍이다.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셋
- 곡두 39
교하 중국정통마사지집에서 발마사지하던 내몽골 여인 렁렁이 나 걱정해서 느끼는 그대로 해준 이야기
한국 다시 온 지 넉 달 되었어요. 들어갔다가 또 나왔어요. 한국 좋아서요. 왔다 갔다 10년도 넘었어요. 마사지는 스무 살에 배웠어요. 나 힘이 세서 손님들이 좋아해요.
나는 서른세 살요. 남편은 텐진에서 살아요. 오래 못 봤어요. 보고 싶죠. 몽골 좋은데 가면 심심해요. 별만 있어요. 그래도 몽골 별 같은 거 한국에서 못 봤어요. 몽골 별 사진 보여줄까요? (방 밖으로 나가서 휴대폰을 챙겨 오더니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여주다 다시금 수건에 손을 닦고 마사지를 시작하는 렁렁) 잠깐만요, 물소뿔로 만든 괄사인데 이것 좀 쓸게요. 피멍 들 수 있는데 나중에 없어져요. 안 좋은 데는 색깔 더 울긋불긋해요. 마사지 학교 산생님이 나한테 선물로 준 거예요. 잠깐 여기가 한국말로 뭐지? (휴대폰에 대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뭐라 하니 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로 십이지장! 췌장! 감정의 고저를 모르는 여성 통역의 음성) 들었어요. 거기 안 좋아요. 아주 안 좋아요. 사장님 이 언니 여기 배 속 안 좋아요. (카운터 입구에서였는데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하면서 렁렁의 등짝을 찰싹하고 때리는 주인아줌마였는데 그날로부터 한 달 반쯤 뒤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나니 과정이야 어떠했든 찝찝함보다는 고마움이라 다시 찾아갔더니 렁렁은 없고 렁렁의 욕만 잔뜩 늘어놓는 연변 출신 조선족 주인아줌마의 한층 더 걸쭉해진 구시렁구시렁)
난데요
-곡두 41
인삼을 언제부터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불렀는지 기억에 없지만(그러고 보면 우리가 우리말을 알아서 다 한다는 일이 좀 기적 같지 않은가요) 인삼을 인삼으로 알고 인삼으로 봤을 때 어쩜 이렇게 사람처럼 생겼을 수가 있는지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은 납니다. 어릴 적, 그러니까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랫을 거예요. 외가가 강화도라서 타 지역보다 흔한 것이 그 지역의 특산품인 인삼이기도 하여서 엄마가 얇디얇은 인삼 뿌리나 부서진 인삼 몸통을 어슷어슷 썰어 믹서에 넣고 우유와 꿀을 넣어 윙윙 갈아 등굣길 신발장 앞에 선 내게 한 컵씩 마시게도 했는데요, 그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에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아 아침마다 신문지로 몇 겹을 싸 친정에서 보내 온 인삼을 엄마가 둘둘 말아 펴볼 때면 그 옆에 가만히 가 그걸 구경하기도 했는데요., 그중 멀쩡한 삼 한 뿌리를 흙만 털어서는 살살 찬물에 헹궈서는 아빠 입에 물려드려라 하면 그걸 들고 안방에 가 아빠를 깨우기도 했는데요, 그때 든 생각이라면 왜 인삼이 백일 기념 속 사촌 동생을 닮았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엄마, 왜 인삼이 발가벗은 민석이 닮은 거야?
인어는 왜 하필 몸의 절반이 물고기를 닮았는지 동화책 속 인어공주가 아무리 예뻤어도 인어공주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게 다리가 물고기 지느러미라는 낯섦 때문인지 물속에서 참아야 하는 숨의 답답함 때문인지 지금껏 궁금해도 엄마가 여태 담을 해주지 않아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물음표를 우산처럼 들고 아니는 난데요,
인형은 특히나 바비나 미미라는 이름의 마론 인형은 매일같이 성실하나 매일같이 가난한 우리 집 살림살이에 엄마에게 사 달라는 말 한 번 못 한 채 인형이 내 친구는 될 수 없구나, 일찌감치 옆집 담장을 가위뛰기로 넘는 상상 따위와는 결별을 할 수밖에 없던 게 난데요, 이상하게 또 눈사람에게는 꽂혀서 한겨울에 빨개진 볼을 해가지고는 몸을 공처럼 굴려 만든 눈사람을 데리고 집에 못 들어가는 슬픔에 은색 털 장화에 핑크 목도리에 남색 털장갑까지 죄다 들고 나와 그 옆에 차곡차곡 놔주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일이 일견 사랑이기는 했겠구나, 35년쯤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그 감정에 이름표를 달기도 하는 것이 난데요,
원숭이야 뭐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바나나를 오물오물 입에서 안 떨어뜨리셨던 할머니 얼굴을 쏙 빼닮았으니 달리 이유를 찾으려고도 안 한 것이 난데요, 풀각시는 뭐냐, 막대기나 수수깡의 한쪽 끝에 풀로 색시 머리 땋듯이 곱게 땋아서 만든 인형이라는데 이건 내가 만들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 만든 것을 사본 적도 없으니 이담에 겨울 이불을 풀로 삼을 만큼 무성한 풀의 언덕에 가면 그때나 한번 만들어볼 작정인 것이 난데요, 허수아비야 평생을 배추 농사 어깨 빠지게 짓고는 온동네 집집마다 포대에 담아 배추 돌렸다는 러닝 차림의 수수깡 같은 말라깽이 할아버지가 범벅인 땀을 바람에 식힐 때 겨드랑이 들어 말린 장면을 오버랩시켜본 것이 난데요.
그런데요. 마네킹 있잖아요. 쇼윈도 너머 착착 세워놓을 때는 언제이고 폐점한 옷 가게 맞은편 종량제 쓰레기 봉투 옆에 그물 같은 카디건을 윗옷으로 레인보우 레깅스를 아랫도리로 입은 여성용 마네킹은 왜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내다 버렸을까요. 단정한 앞머리에 그러나 금발에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생머리에 허벅다리 절반쯤 덮는 교복 치마에 목에는 작은 넥타이에 재킷 안에는 조끼에 교복 파격 할인 90퍼센트라 쓴 띠를 어깨에 두른 여성용 마네킹은 왜 땅을 보는 자세로 내다 버렸을까요. 서 있는 마네킹과 누워 있는 마네킹, 공통점이라면 입술은 있는데 입이 없다는 거! 간혹 그 입이 없어 부럽다 싶을 때면 호루라기를 입에 뭅니다. 불지도 않을 거면서 꼭 물고만 있는 호루라기. 그런 호루라기가 필요한 순간이 꽤 있죠. 점점 있고 왕왕 있죠. 자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고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봅니다. 물을 채운 비커에 빨간 잉크가 뚝뚝 떨어져 연기처럼 퍼지는 번짐. 요즘 들어 무엇이든 물어볼까, 그 놀이에 재미 들린 다섯 살배기 조카가 비도 안 오는데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땡땡이 우산을 쓰고 있다 해서요, 그건 한번 물어볼까 하는 참입니다.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 곡두 43
중국 시인 정샤오충이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발표한 산문 「시詩의 문」을 요약한 이야기
나는 18년 전 중국 서남부 사천으로 광등 동관에 이르는 일대에서 공장 생활을 몇 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완구 공장 설치공, 전자 공장 검품 인원, 카세트테이프 공장 설치공과 사출 성형공, 금속 공장 절단공, 피혁 공장 검사 담당, 가구 공장 회계 담당, 플라스틱 공장 물자 관리공 등으로 일하면서 세계의 공장이라 불린 동관의 조립 라인에서 생계를 도모하였다. 나는 그냥 A245였다. 그렇지 않으면 담당 제조 공정이나 포장 담당이라 불렸다. 동료 중에 조립 라인의 업무 강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밤마다 꿈을 꾸며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노라면, 그 외침이 내 몸에서 뿜어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공장 출입문 앞에서 자기 월급을 독촉하는 여성 노동자를 공장 보안 요원이 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끌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공업 단지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는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칼과 나이 든 얼굴을 마주하면, 타향에서 실종된 이가 나인 듯 했다. 동료가 타향의 길거리에서 컨테이너에 치여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죽은 이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따르고 교류했던 무수한 여성 노동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중에 그들이 끝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왔다. 나는 바로 내가 그 무리 속에서 이들 여성 노동자를 구출하여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이자 아내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들 모두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이야기, 그들 이름의 이면에는 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지 무리인 것이 아니다. 나를 신뢰하는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그들의 불운을 서로 기록하였다. 모든 이의 이름은 그녀의 존엄을 뜻한다. 이 말은 조립 라인에서 일하던 시절 깊은 깨달음을 준 구절이다. 나의 이름은 정샤오충이다. 나를 중국의 어느 여성 노동자로 부르지 말기를 바란다.
모자란 모자라
마침내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 곡두 44
교양 시 수업 시간에 광고홍보학과 남달리 학생이 마스크를 쓰고 계시기에 너 감기냐 하였더니 메이크업을 안 해서 그렇다기에 네가 연예인이여 뭐여 웃자고 몇 마디 보태다 그끄제의 의사 선생님이 그제의 나를 보시며 어제와 같은 사람인가 긴가민가하시기에 오늘의 나도 5층 병원으로 직행하기 전 1층 행복한약국에 들러 성인용 특대 사이즈의 흰색 마스크를 사긴 사뒀는데 마스크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그 쓰는 습관이 아직은 들지 않아서 일단 가방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진단명이 대상포진이라 하시니 나는 아프지도 않았고 쑤시지도 않았고 다만 등 언저리가 간지러워죽겠는 것이 등 언저리는 또 저 혼자 속 시원히 긁을 수가 없는 까닭에 어제 위트앤시니컬에서 만난 오은에게 반갑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뒤로 돌아 티셔츠 등을 깐 채로 거기 뭐 물렸는지 좀 긁어봐라 하였더니 하여간 별걸 다 시켜요 김민정은 그러면서도 여기 우툴두툴하고 많이 빨개 병원 가봐야겠다 누나야 하기에 이건 분명 벌레다 중국 샤먼에서 이상 야릇한 벌레에 쏘여 온 것이 확실하다 싶어 다시금 선생님을 찾게 되었다고 하니 이리 보고 저리 보다 일단 처치실로 가 안내를 받으라시니 뭐 간호사 언니가 시키는 대로 상의를 탈의한 채 커튼이 쳐진 침대 위에서 아무리 혼자라지만 정면은 어색하니까 엎드린 채 누워 기다리는데 하의 탈의하시고 침대 위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는 간호사 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러니까 팬티는 안 벗어도 된다는 거죠? 사타구니 언저리 다 퍼졌단 말씀인데 쓸려가지고요 하는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정면인 채로 누워 기다리겠지 싶으니까 제각각 쳐진 하나의 커튼 너머로 앞을 보고 누워 있을 남자와 뒤를 보고 누워 있는 나를 젓가락 두 짝처럼 여기자니 「젖이라는 이름의 좆」 2탄 쓸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게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구나 알겠어서 쉼표 패스하고 마침표 하나 후딱 이쯤 해서 찍고 끝내려는데 찔끔 시작되는 이 조짐은 어럽쇼 생리구나 그 즉시 떠오르는 대로 가방 속에서 그 마스크란 걸 까서 팬티 속 그 아래에 갖다 대니 여자들은 알고 여자들만이 너무 아는 그의 본격 시작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잇어 알코올 적신 솜이 내 등을 차게 스쳐 가도 나는 이맛살 절로 찡그려져 닭살 돋음에도 솜털 안 세우는 나름의 기개인데 의사 선생님은 알까 간호사 언니는 알까 안 아픈 척이 아니라 참는 척이 아니라 순발력 잇게 도구를 사용했다 싶으니까 진짜 어른이라도 되었다 싶으니까 내 질박함을 칭찬하고 싶어 여유 만만인 건데 그러나 저러나 얼마나 다행이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마스크가 아니라 두고두고 빨아 쓰는 면 마스크인 것이 좀 굿이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