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근린공원] 01

공원 2020. 12. 4. 11:20

[문래근린공원] 01

 

1. 탐방일 : 2020년 12월 2일(수)

 

2. 누구와 함께 : 승부와 성기

 

3. 만난 장소 : 지하철 2호선 문래역 1번 출입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五 · 一六革命發祥地 박정희 소장 흉상

 

박정희 소장 흉상 앞에선 성기

 

 경     고

 

박정희 대통령 흉상과 지하 벙커에 대하여 손괴(파괴)하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민 · 형사 처벌함을 경고함.                   

 

박정희대통령흉상보존회 (02)2678-0516

 

문래근린공원의 물레

 

문익점(文益漸)

 

1331(충혜왕 원년) ~ 1398(태조 7년).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에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 ·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에 좌정언(左正言)으로 계품사(啓稟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다.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랐으나, 정천익이 호승(胡僧) · 홍원(弘願)에게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이를 보급시켰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었다.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候)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 면화 시배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삼우당 선생 면화시배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대한 내용이 <목면화가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물레의 각부 명칭

 

목화송이 따기

 

목화송이 따기

 

7월 중순쯤 피기 시작한 목화꽃이 다래(열매)를 맺어 벌어지기 시작하면 새하얀 목화송이를 따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바빠집니다.

다래가 벌어진 것부터 차례로 따며 따는대로 햇볕에 활짝 널어 말립니다.

대개 8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11월에 들어 된서리가 오기전까지 대부분을 수확합니다.

 

씨앗기[씨빼기]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김준근 作)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

 

잘 말린 목화송이를 씨아에 물리고 씨아손을 돌리면 씨는 가락 앞으로 떨어지고 솜은 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뒤로 떨어져 쌓입니다.

 

씨아 : 목화송이에서 목화씨를 빼내는 기구

 

활타기[솜타기]

 

솜을 부풀려 부드럽게 펴는 일(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김준근 作)

 

솜을 부풀려 부드럽게 펴는 일

 

솜활은 대나무를 활 모양으로 휘어서 만듭니다. 씨아로 씨를 분리한 솜을 자리에 놓고 한 손에 활을 들고 반대 손에는 활꼭지(박달나무로 만든 손잡이)로 활줄을 퉁기면 진동에 의해 껍질 등의 잡물이 떨어지고 솜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고치말기 : 활로 탄 솜은 말판에다 놓고 말대(고르고 긴 수수깡)로 비벼 말아 면통을 만드는데, 이것을 고치말기라 합니다.

 

물레잣기[실잣기, 실뽑기]

 

실을 길게 뽑아내는 일

 

고치말기를 통해 얻어진 면통(고치)을 가지고 물레에 걸어 실을 뽑아냅니다.

왼손으로 고치를 풀어낼 때 손끝의 예민한 동작과 감각에 의해 실의 굵기와 품질이 결정되므로 물레잣기는 무영생산에서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과정입니다.

 

물레 : 고치말기를 통해 얻어진 면통(고치)을 가지고 무명실을 뽑는데 쓰이는 기구

 

무명 날기[날뽑기]

무명 매기[베매기]

 

무명매기하는 모습

 

새로 짤 베 길이를 가늠하여 같은 길이로 날실을 준비하여 엉키지 않게 사려 놓은 것을 무명날기라고 합니다.

이것을 바디에 꿰어 도투마리에 고정시키고 좁쌀풀을 먹여 말려서 강도를 높이는 것을 무명매기라고 합니다.

씨실로 쓸 무명 올은 따로 맹물에 푹 삶아 북에 넣어 준비합니다.

 

무명짜기[베짜기]

 

베틀에서 무명천을 만드는 작업

 

무명 올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로 옮겨 무명을 짭니다. 실이 마르면 끊어지므로 수분을 공급해가며 짭니다.

베틀에서 짜낸 무명은 나무나 콩깍지를 태워 만든 잿물에 하룻밤 정도 재운 뒤, 맑은 물에 헹구어 말리는 마전을 여러 번 반복할수록 윤기가 납니다.

 

저녁을 먹은 중국집(신흥각) 앞 벽(울면 4,500원)

 

 

 

- 끝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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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변호사)

 

광주 출생(1974년생)

 

 

 

 

 

 

 

 

2021년 3월 24일 채널A 뉴스TOP 10 댓글 모음

 

박깨비

승훈 너도 변호사냐?

 

야너피난다이승훈 목소리가 덜덜덜 ㅋㅋ

 

민심은천심니가변호사냐?

 

핑크모찌 이승후니 

실타

 

이준용승훈아 또 쉴드질 어떻게 할려고?

 

김광윤승훈아 욕본다~~

 

seon young시끄러워 멍멍

 

앤디아~ 이승훈 쫌 나오지마랏

 

아침이슬저것도 패널이라고

 

장유진뻔뻔한 승훈이 들가

 

금영순이승호 인생불쌍하게 산다

 

노는물이승훈 말씨도 징하네

 

황승 진머리에 안개를 걷어라 숭훈아~~

 

난자유롭게승훈이 뭐야?

 

이재신 이승훈 같은 애들은 5차윈 같으네 ,, 같구요 같구요 확실한 예기를 못하네 ,,,

 

하뚜!하뚜!이승훈 이거는 왜 또 여기나왔어ᆢ??!!!드가 임마!!!

 

이정표이자도 물에 빠지면 입만 뜨겠군

 

김효숙훈씨 시끄러

 

박기쁨이승훈 무슨말ㅋㅋ

 

김미쉘이승훈 저래도 민주당 변호하는 이유가 뭘까?

 

민심은천 심내로남불승훈이

 

이정후 분명 승훈이 변태다...

 

2021년 1월 22일(금) TV CHOSUN 신통방통 댓글모음

 

金榮燉​ 특급머저리 변호사

 

정경애 ​이승훈 본질 흐리지 마라...뭐냐?

 

오솔길​ 이승훈 변호사 마져

 

김지완​ 재변호사 맞나

 

金榮燉 ​승훈아 그럼에도불구하고 니는 아이다

 

외치는자​ 저거 변호사 맞아?

 

냥냥냥이 ​무슨 개소리

 

여노명숙​ 이승훈 이넘 와

 

최미자 ​이승훈 궤변은 그만해라

 

마당쇠​ 이승훈 이 뭔소리하냐?법절차무시가 문제라는데. 엉뚱한소리그만하고 집에가라

 

노가다데모도 ​어이 승훈아 절차도 없이 구속하냐

 

k신뢰 ​변호사의 발언 너무 무책임항

 

배포르코​ 이승훈 김학의가 피의자냐 요ㅐ 법을 어기냐

 

이무형 ​이승훈 이런자가 변호사라니

 

sh kwon ​이승훈이도 본낯을 드러내네요 그동안 젠틀하게 평하더니

 

전진규JK153​ 승훈아 이게 법치국가냐?

 

나비혜연​ 승훈 불법 뜻 아니

 

나라 러브​ 승훈아 너도 기뿜조냐

 

참빛나래 ​승훈이 헛소리 ㅋㅋ

 

컵치킨​ 전라도 사투리....

 

 

2020년 12월 2일(수) TV CHOSUN 신통방통 댓글모음

 

임미애​ 이승훈 짜증스런말투 비호감

 

박승애​ 김남국이도 국회의원 자질 없음. 국민세금이 아깝다.

 

이지은​ 이승훈 집에가라

 

한화수​ 이승훈 아 웃겨! 니들이 존중을 알기나알어?ㅋㅋ

 

오렌지쥬스 ​승훈아 울지말고 말해

 

김정옥​ 이승훈 국민의눈을봐라

 

YG Kim​ 민주당 대변인같애

 

黎明​ 승훈아 말 길다

 

黎明​ 내시같은 자식

 

김현수 ​승훈이 태세전환

 

김형섭​ 이승윤 법과정의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라

 

이지은​ 승훈이목소리 ㅋㅋ

 

Rhyan Khang​ 즐라도 아저씨네

 

이정미​ 이승훈 어쨌던 빠져 나가보시오...딱해

 

rb Shin ​이승훈 절라도 아저씨

 

chiwhan Ahn​ 징계위 자체가 문제다 승훈아

 

이창득​ 이승훈 쟈 이제바른말좀하내

 

이소망 ​이승훈..쉴드 치느라 너도 애쓴다.ㅉㅈㅉㅈ

 

시골농부​ 아니 승훈아 지금 그 얘기 따지는게 아니잖아.

 

김햇살 ​승훈아 징계를 주는거 확정되있니 그게문제다

 

캔디안소니​ 이승훈 안나오게 하세요

 

Charles Kim​ 뭐여 승훈이 전라리언?

 

이지은 ​승훈아넌법도모르냐

 

Thomas Lee​ 이승훈인 뭐냐

 

임성균​ 이인간좀아침부터

 

김정기​ 이승훈 당신변호사맟나

 

몸뚱아리 ​승훈아 드가라~~

 

이창득 ​승훈이 입이삐둘어지도 말은바로해라

 

JS P​ 관옥이 가고 뭐~저런놈이 대타로~~

 

수엔수 ​이승훈 말하는게 비겁해

 

죄인아개밥이다​ 가운데서교육잘받네승훈이

 

오안상​ 이승훈 출연정지시켜라

 

Thomas Lee​ 차라리 관오기 불러와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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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수(시대정신연구소 대표)

 

 

 

2020년 12월 2일(수) TV CHOSUN 뉴스 퍼레이드 댓글모음

 

김수민​ 뭔 역린....말같지도않은소릴..

 

Kyung Shin​ 저인간 뭐여?

 

골드란​ 김두수야 검찰수사를 막으려는 비리정권을 두둔하냐?

 

채송화​ 인간아~인간아 두수

 

Episode #​ 김두수야 치워라.주절주절 뭐하는 짓이냐??

 

김경환​ 김두수 저런게 왜나오나 더러워서 못보겠다

 

닛시 ​김두수 왜 나왔니

 

허리케인​ 시대정신 연구하냐?ㅋㅋ

 

반딧불​ 두수씨 그거이니자나 문서삭재수사지.

 

anne lee​ 김두수 아웃

 

봄탁​ 저분 참 웃기네

 

내로남불 ​김두관 동생 답다

 

문인식​ 두수씨 아들이본다

 

Dark Temple​ 시대정신이 상식이 없네

 

소신처음처럼​ 정신불량 두수

 

Lee 3​ 티조 다 계획이 있구나 저런 놈을 부르는게 ^^

 

김진옥​ 두수야 정신차례

 

김진성 ​안쓰럽다.

 

ᅳ하얀구름ᅳ​ 막 갖다붙힘ㅡ두수ㅋ

 

메신저산타​ 두수씨 무슨말 하는건지....뇌따로 입따로....

 

김윤규 ​두수 저런 애가 왜 나왔냐

 

yh k​ 두수 열받게 하네

 

김형섭​ 김두수 역린이라니 원전이 역린이라니 이런인간이 시대정신대표라니 기가 막힌다

 

김홍승​ 두수야 니 손자들이 보고 있다.

 

귀가지니​ 두수야 ~ 우리집 뽀삐도 아는 사실을 거짓으로 변명하니~ 참 뻔뻔하다

 

임성복​ 시대연구소 뭐하는 곳?~~뭔가 신통찮은 곳아닌가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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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산 한양백서2 (과거 시험 편)

 

 

그 해, 소과 시험은 기일에 맞춰 속행했다.

진사의 벼슬에 응시한 각 고을의 선비들이 제 아비의 지게에,

고삐 쥔 머슴의 우마차에, 혹은 절뚝거리는 제 발 위에

각기 비루한 몸뚱어리를 얹어 성문 앞에 당도했다.

성문 앞은 선비들을 상대로 각종 문필기구와 요깃거리 등을

팔아 치우려는 잡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인근 학당에서는 동문들이 몰려나와 선비들을 응원했다.

선비들은 비척대고 비실대며 근정전 앞에 도열했고,

어전의 위엄을 감내한 그들은 낡고 묵은 지필묵을 펼쳐 앉았다.

과제를 기다리던 중, 전날 과음한 어느 선비가

토악질을 해댔고 곧 관리들에 의해 끌려가 매질을 당했다.

철퍽 철퍼덕 볼기짝을 치대는 곤봉 소리가 요란했고

주변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토사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고약한 냄새를 내뿜었다.

감독관들이 ‘엣헴’ 하며 긴장감을 돋구었고 이내 방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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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시 -

묻노니 논하라.

선거 전, 민주당이 만천하에 이르길

집값을 반드시 내리겠다 확언하였는바,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서울의 집값이 유난히

대폭등한 이유는 무엇인지 논할 것이며,

대폭등한 집값에 서울의 유주택자들이 돈방석에 앉아

앞다퉈 독일제 고급 승용차를 계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도 못 사고 전·월세 역시 폭등해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의 처량한 무주택자들이

아직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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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면을 스치는 붓들이 슥슥 삭삭 제각각의 소리를 내며

할당된 공백을 채웠고 때때로 선비들은,

‘타하’ ‘어허’ ‘췌잇’ 등의 탄식을 내뱉으며 답안에 골몰했다.

“종료 십 분 전이오!” 감독관이 징을 울렸다.

붓을 놀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고 한 선비는 감독관의

도포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답안을 잘못 썼소. 답안지를 바꿔주시오. 부탁이오.”

선비의 읍소에 감독관은 곤봉을 흔들며 답했다.

“국시를 미룬 의원들의 곤궁함도 내치는 게 국법의

지엄함이거늘, 네깟 놈이 무에 그리 대단한 자라고

답안을 둘씩이나 써낸단 말이냐. 여봐라.

이 덜떨어진 작자를 당장 밖으로 끌어내거라.”

문경새재를 넘는 고단함을 읍소하며 버티던 선비는

결국 흙바닥 위로 내던져졌다. ‘살려주시오.’라는 비명은

철퍼덕하는 소리에 묻혔고 먼지가 일어 메케했다.

주변에서 다시 낄낄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초시 종료요!”

감독관이 징을 울려 진사과의 초시가 종료됐음을 알렸고

선비들은 일제히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쳤다.

성균관의 학자들과 육조의 당상관들이 모여들었고

‘엇흠’ ‘촤하’ ‘오호라’ 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답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추려낸 답안을 든 이조판서가 연석 위에 섰다.

북이 울려대며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켰고

이내 징과 박이 맞물려 경박하게 울려댔다.

“차석이오! 안양마을의 김평촌이가

진사과의 초시에 차석으로 합격했소이다!

차석의 답안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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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 하여가-

집값이 오른 들 어떠하고 전·월세에 쫓겨난 들 어떠하리

강남삼구 마·용·성이 황금성이 된 들 어떠하리

우리 같이 기본주택에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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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름답도다!!”

“구구절절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무소유의 정신이로다!!”

육조의 판서들이 앞다퉈 입에서 침을 튀겨 대기 시작했다.

선비들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며 웅성댔지만

격렬한 판서들의 반응에 할 말을 잃고 결국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윽고 이조판서는 수석의 답안을 발표했다.

“수석이오! 양천마을의 나목동이가

진사과의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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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심가(文心歌) -

 

이 집을 팔고 팔아 일백 번 고쳐 팔아

재산세와 양도세에 돈이라도 있고 없고

문(文)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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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힘이 풀린 육조의 판서들이 줄줄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과연 훌륭하도다!!”

“가히 정몽주 선생의 환생을 보는 듯하도다!!”

“눈물, 콧물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리는도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선비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것이 도통 뭣 하는 짓거리들이오! 저자들이 써재낀 것은

하여가와 단심가의 삿된 표절에 지나지 않느냔 말이오!

이다지도 개탄스러울 수가, 그대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

고사장은 선비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들끓는 듯했고

이조판서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심하다 외쳤다.

“아직, 장원급제의 자리가 남았소이다!”

그러자 서로가 장원급제라 여긴 선비들이 일제히

입을 닫아 함구했고, 잔잔한 미소를 억지로 자아내며

갓끈을 조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장원급제요! 강남마을의 최대치가

진사과의 초시에 장원급제하였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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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별곡 -

 

살어리 살어리랏다 호텔에 살어리랏다

룸서비스와 조식 뷔페 먹고 호텔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무주택자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서민이여

폭동한 전월세에 길바닥에 앉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는도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정부 말만 믿고 새 된 자, 신고가 위로 날던 유주택자 본다

피눈물 젖은 임대차 계약서 들고 집주인만 바라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럭저럭 낮은 버텨왔건만 전세도 월세도 없는 밤에,

집주인은 퇴거를 요청하니 어쩔 것인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이 모든 게 이명박, 박근혜 정권 탓이니 맞아서 우는도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호텔에 살어리랏다

고깃배 타고 크루즈 여행 간다 택시 타고 유라시아 횡단 간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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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백성이 체크인 할지어다!!"

"아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육조의 판서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어져 곡을 하며 땅을 쳐댔다.

더러는 바람개비를 돌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더러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뱀처럼 몸을 비틀며 흔들어댔다.

복받치는 감정을 못 이긴 어느 대신은 계단 밑으로 몸을 던졌고

절벽 위의 도토리처럼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며 외쳤다.

“이 모든 것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 탓이라니!

만인이 앙망한 궁극의 해답이며,

이 시대의 올바른 참정신이로다!”

아수라장이 된 고사장 위로 늦가을의 까치가 날며

배설물을 싸질렀고 후드득 떨어진 오물이

대신들의 도포를 적셨다.

그때였다.

답안 뭉치에서 한 장의 글월이 저 스스로 빠져나와

고사장 가운데에 낙엽이 되어 내려앉았다.

한 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형형한 눈을 들어

대신들을 응시했다. 입이 아교로 봉해진 선비는 허공에

붓을 휘둘렀는데, 놀랍게도 흩뿌려진 먹들이 저 스스로

이어 붙고 얽혀들어 문자를 형성했다.

- 표심가(票心歌) -

귀신에 홀린 듯,

이조판서는 그의 답안을 주워들어 단숨에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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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여 아아 이명박 정부여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집값이 폭등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집값이 폭락하니

대명제의 학습효과를 이 땅 위에 공고히 했음에

배운 것 남 주랴, 탐욕에 눈먼 강남 좌파들이

제 집값을 올리려 민주당에 표를 던지고

우매한 무주택자들은 집값 내려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민주당에 표를 던지네

세금을 휩쓴 문 정부는 국토부 장관 뒤에 숨어 음산하고

총선을 휩쓴 민주당은 콘크리트 지지층 뒤에 숨어 음흉한데,

돈방석에 오른 것은 대신들이오, 강남 좌파들이니

죽어나는 것은 서민이오, 무주택자들뿐이로다

아아, 탐욕과 치욕의 수도 서울이여!

깨어나지 못한 자, 영원히 잠들 것이니,

오매불망 술잔에 기대어 억겁의 잠에 빠져드는구나

어이할 거나 아아, 이 일을 어이할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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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더러운 글이로다!!"

이조판서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육조의 판서들과 정승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고

선비의 답안을 받아 돌려 읽기 시작했다.

별안간, 여권의 잠룡 중 하나라 불리던 좌의정 이 대감이

입에서 부글부글 거품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 정신으로 강남권의 아파트를

초고가에 매도해 17억의 시세 차익을 거두고, 연이어

서울 한복판의 17억짜리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갭투자를 시전해 투자의 달인임을 몸소 증명했던

그가 격분해 호통쳤는데, 과연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투기를 하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거늘,

오히려 투기와 갭투자로 시세 차익을 거둬

백성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 아니겠느냐!!

나머지 잠룡 중 하나라 불라우던 경기 관찰사 이 대감 역시

격노해 부들부들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왕이 즉위하기 직전, 10억에 불과했던 그의 부촌 지역

아파트 역시 현재 매매가가 20억에 육박하게 되었는데,

평소 성정이 불같기로 소문 난 그의 입에서

불똥이 일며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를 당장 기본주택에 쳐넣어,

우리와 같은 부를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하라!!

/

포박된 선비가 형조의 관아로 압송되던 날,

선비의 답안에 대한 보고를 받은 형조판서는

격앙된 목소리로 앙칼지게 외쳤다.

"소설 쓰시네!!"

형조판서 역시 한양의 요지에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심어둔

다주택자였는데, 그의 아파트 역시 왕이 즉위한 이래,

약 6억의 시세 차익이 발생했다. 그러나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그에게, 어떤 대신도 감히 집값을 이유로

토를 달지 못했다.

관가에는 호조판서가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두운 대궐 안길을 급히 내달리다가 토사물을 밟고

미끄러졌는데, 어찌나 오지게 넘어졌는지

창자가 다 튀어나왔노라고 내관들이 전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튀어나온 것은 그의

창자가 아니라 돈 꾸러미가 담긴 복대였고,

그 안에는 세입자에게 갖다 바칠 뒷돈이 담겨 있었다고

누군가가 전했다.

선비는 다시 전옥서에 감금됐다. 창살 너머로,

취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전하는 참 영명하신 분일세.

적폐 청산에, 친일 척결에, 남북 평화에,

아 못하는 게 없지 않으신가?!"

누군가가 되물었다.

"실직하더니 많이 취했나 보구먼.

그런데 자네, 전세는 구했는가?"

"아니, 못 구했네."

민촌의 개들이 다시 컹컹 짖어댔고

취객의 목소리는 이내 묻혀 들리지 않았다.

선비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허리가 쑤셔 잠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

.

.

.

.

타인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은 언제나 쉽습니다.

그러나 그 업보가 두려워 가장 아픈 글이기도 합니다.

글의 대상이 된 분들에게는 인간적으로나마

사과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그러나

정치인이자 장관인 그들에게는 재차

경고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헛짓거리를 벌려놔 민생을 망쳤으면 최소한

헛소리라도 금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비판만 있고 대책은 없다는 분들이 계셔

다시 말씀드립니다. 두 번째 상소문,

김현미를 파직하라 편을 보시면 될 듯합니다.

키워드만 말씀드리면 수요와 공급이고 진출과 진입입니다.

이조판서의 말대로 더러운 글입니다.

저열하고 비열한 글이 스스로 보기 역겨워

반성의 의미로 잠시 글을 쉬어갈까 합니다.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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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산 한양백서

 

 

청계천이 범람했다.

오간수문이 막혀 물길을 열어내지

못한 청계천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의

지류를 감당하지 못해 울컥댔다. 준천을 실시해 물길을

넓히고 유속을 보전한 수치 사업은 원점으로 회귀했고

배출구를 잃은 인간의 욕구는 똥 덩어리가 되어 수면 위를 덮었다.

똥 덩어리들은 농밀하게 익어갔고 코를 찌르는 냄새가

동십자각까지 퍼져나갔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똥물에

질척여 인마의 수송이 불가한 듯 보였으나 육조판서들의

가마는 똥 구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제 갈 길을 찾았다.

동십자각 위의 병졸들은 똥물이 두려워 교대를 미뤘다.

꽉 막힌 수문은 ‘어느 누가 막았는가’의 책임론을 넘어서

‘어떻게 열 것인가’의 방법론으로 전개되는 듯했다.

실증론에 입각한 학자들에 의해 오간수문의 파쇄가

논의되었으나 그 해, 좌인은 우인을 압도했고 기가 뻗친

조정 대신들은 똥물 위에 토사물을 덮어 악취를 상쇄하자는

‘토사물 3법’을 발의했다. 사상 초유의 법안에

시류에 정통한 논객들이 앞다퉈 성문에 벽서를 붙여 댔고

민초들은 웅성대고 또는 웅얼대며 벽서를 훑었다.

어느 논객은 ‘조정이 똥물을 안 치우는 이유’라는

제하의 벽서를 통해 조정의 야비함을 폭로했다.

왕권의 배척점에 섰던 어느 대신은 경제학에 능통했고

'토사물 3법’의 부당함을 역설해 조정의 무능함과 정책의

모순성을 비판했다. 성문 앞의 민초들은 질색해

“과연 옳다 뿐인가.” 탄식하며 벽서를 필사해 여기저기

퍼 날랐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똥물 위에 겹친 토사물에

점령되었고 내음은 합쳐 무르익어 더욱 고약했다.

도성 안의 똥물은 해를 넘길 듯 이어졌고 어느 순간,

시대의 변혁에 앞서 감내해야 할 덕목으로 탈바꿈했다.

백성들은 똥물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고약함과 역겨움을

‘본디 그러한 것이다’ 정도의 내면적 합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본디 그러했던 청아한 것들’ 은 잊히게 됐는데

그 과정은 서럽고도 유연했다.

왕권을 노리던 어느 대신이 똥물 걱정 없이 평생 살 수 있는

‘조정의 기본 주택과 기본 소득’을 내세우며 백성들을

다독였는데, 들어찬 똥물에 집을 잃고 치솟는 임대료에

임차인의 신분조차 누리지 못한 백성들은 그의 말에

광적으로 몰두해 빠져들었다.

그의 격문이 반포되던 날, 저잣거리에 모인 백성들은

똥물을 뒤집어쓴 채 감격했고 이제야 어둠을 밝힐

빛이 땅에 내린 것이라며 울부짖었다.

멀찌감치 지켜보던 한 서생이 백성들 앞에 나서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나라의 재정은 그 끝이 정해져 있소.

누군가가 공짜로 밥을 얻어먹는다면 누군가는 곡식을 털어 나라에 바쳐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의 아들딸들이 갚아내야 할 것이외다.

빼앗는 자가 있는데 어찌 빼앗기는 자가 없겠소이까.

여기 자신이 빼앗기지 않고 공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손을 들어 보시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백성이 제 손을 번쩍 들어

치켜세웠고, 서생은 “과연 사람을 홀리는 것은 공짜 밥과

공짜 술뿐이로다. 듣던 대로 그는 뱀처럼 교활한 자로구나.” 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자리를 떴다.

조정의 구휼미는 동이 났고 역병 아래의 소상공인과 노약자,

취약계층의 아동들은 결국 관아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그날 밤, 만백성이 배를 두드리는 태평성대의 날이 도래했다며 취객들은 고성방가했다.

민촌의 개들이 컹컹 짖으며 응수했고 밤새 소란스러워 백성들은 잠을 설쳤다.

토사물 3법은 결국 어느 대신이 예언했던 대로 전세 시세를

바짝 추켜올렸다.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백성들은 폭등한 전세 시세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토사물 3법을 입안했던 호조판서가 가장 먼저 토사물에 갇혀 허우적댔는데

백성들은 이를 두고 자승자박이라며 조롱했다.

 

진정한 지옥 불은 갱신계약권이 소멸한 이후에 펼쳐질 요량으로 낮게 도사려 화기를 억눌렀다.

도성의 밤은 음산했고 깊이 시려 아리었다.

​가을에 이르러, 천정부지로 치솟던 한양의 집값은 결국

신고가를 갱신하고 말았다. 똥물이 닿지 않는 고지대에

거처를 마련했던 어용 대신들과 더불어 지지자들은 큰

시세 차익을 거뒀고 세간살이를 늘려 거처를 옮길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똥물에 젖은 세간살이를 내버릴

처지의 백성은 독주를 털어 넣고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스스로 나서 똥물을 걷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양의 백성들은 이미 타성에 물들었고

똥물에 길들어 순응한 지 오래였다.

갑​주를 걸친 기병들이 환도를 절그럭거리며 성문을

드나들었다. 흙먼지를 추적하던 초병이 적국에 잠입해

정보를 캐던 세작의 복귀를 알렸고 기병들이 이를 호위해

병조 관아 앞에 당도했다. 족하에 꿇어앉은 세작이

거친 숨을 내몰며 겨우 말했다.

 

"급보요. 적국이 열병식을 개최했소. 기름 친 병장기가

거대한 물결을 이뤘고 전마가 앞뒤로 꼬리를 물어

그 끝이 보이지 않았소. 신형 신기전을 앞세웠는데,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 사정거리는

이미 동맹국의 영토를 노린다 하였소이다."

 

​세작의 소상한 보고에 나라는 발칵 뒤집혔고 민심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신무기의 공포보다

적국 왕의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 이라는 언사에 극심히

감격했고, "과연 계몽 군주로다!",

"종전선언만이 답이올시다!" 라며 입에서 침을 튀기고 무릎을 쳐대며 외쳤다.

격심한 그들은 왕명을 받아 조정의 입장문을 작성했는데,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승정원에 모여 앉아 논의한 끝에

결국 '유감을 표명한다.', '자제를 촉구한다.', '엄중히 경고한다.'

는 문구 대신 '주목한다.'라는 표현으로 그 끝을 장식했다.

대신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중의적 표현이니 이는 모두

그대들의 공이오." 라며 술잔을 기울여 서로를 필봉을 추켜세웠다.

왕이 역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쥐구멍의 울음소리로 시작한 소문은 산천의 메아리가 되어 퍼졌다.

의금부는 촉각을 곤두세웠고 소문의 끝을 역추적해 병졸을 풀었다.

곧 소문을 퍼트린 자가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올랐고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종1품의 의금부 판사가 나서 친히 국문에 임했다.

봉두난발을 한 백면의 서생이 포박되어 끌려왔다. 낯이 익었다.

이 자는 필시 며칠 전 저잣거리에서 재정을 운운하던 자가 맞으렷다.

의금부 판사는 복대를 끌어 올려 심기를 다잡았고 이내 하문했다.

"감히 전하를 역병에 걸린 환자로 둔갑시켜 능멸한 것이 네 놈이더냐."

"아니오. 왕은 역병에 걸리지 않았소."

'그렇다면'으로 되받은 판사의 말을 '그러나'로 끊어낸 서생은

살아서 모든 것을 토해내겠다는 듯 길게 말을 이어갔다.

 

"왕은 역병이 아닌 북병(北病)에 걸렸소.

백성이 불에 타 죽어도 北, 적국이 도발해도 北,

신무기를 개발해도 北이니 과연 북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것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병(重病)이오, 나라의

앞날을 망치는 복병(伏兵)이니, 이는 역병(疫病)보다 더한

천하의 몹쓸 병이외다. 내 말이 틀렸소이까."

서생은 이죽대며 빈정거렸다.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판사는 등을 돌려 국청을 빠져나갔고 이내 어명을 담은

교서가 의금부도사를 거쳐 하달되었다.​

서생의 입은 아교로 칠해져 봉인되었고 전옥서로 이송되었다.

투옥되던 날, 짚의 누린내는 코를 찔렀고 그의 옆자리에는

백발의 노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는데,

그의 목을 감은 칼에는 그의 죄상이 낱낱이 적혀있어 낯 뜨거웠다.

 

- 왕은 공산주의자다. 라고 발설한 명예훼손의 죄 -

 

노인의 입 또한 아교로 봉인되어 있었는데, 노인은 겨우

복심으로 꿀렁대 그 뜻을 전해왔다. "나는 아직 2심일세."

서생은 막힌 입 대신 콧구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청천이 바래어 황천이 되었음에 백로는 날아올라

궤적 속에 명확했고, 보름달은 빛을 잃어 기울었는데,

별은 깊어 그 자리에 형형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물은 제 형태와 본질을

수시로 바꿨고 위정자들은 그를 좇아 가면을 뒤집어썼는데,

불변의 가치는 백성들의 눈 안에 담겼으니 그것은

정의인 것이라 누군가가 말했다.

그 해, 정의는 이 땅에 살아 숨 쉼이 버거웠는지

잠시 숨을 골랐는데, 그 사이 조정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형조판서는 관아 곳곳에 제 심복을 깔아 배치했고

관아 명판에 '공정과 정의'를 깊이 새겨 안도했다.

똥물에 갇힌 백성들은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를

'시시때때로 변하는 우리들만의 것' 이라 정의했고,

똥물을 뒤집어 쓴 자와 똥물을 피한 자가 한데 뒤섞여

아우성쳤다.

서생은 고개를 들어 창살 너머를 내다보았다. 달은

기울었음에도 절반의 빛을 오롯이 내뿜고 있었다.

​한양에 비가 내렸다. 그러나 똥내음을 지워내지는 못하였다.

 

[출처] (진인)조은산의 한양백서全文|작성자 전야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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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국군 제6사단의 춘천지역 전투는 軍·警·學·民의 제2의 행주대첩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3>

구국의 춘천대첩(春川大捷)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사단이 책임지는 광정면의 방어정면은 적목리(현 경기도 가평군 북면)-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까지 84㎞에 이르렀다.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조공으로 예상되는 양구-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그리고 화천-가평 접근로에 2개 중대를 배치해 진지를 강화했다. 이 강원도 중동부 공격로를 택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임무는 춘천과 가평을 신속히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에서 조공으로 진출해 서울 남부와 수원방면으로 대우회포위기동작전(大迂廻包圍機動作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Tip>대첩(大捷)의 의미는?

대첩은 국어사전적 의미가 ‘크게 이김. 대승(大勝)’으로 영어로는 ‘A sweeping victory’로 표기한다. 전쟁 중 전투에서 아군이 적을 크게 이겼을 때 쓰는 명칭으로 지역 명에 붙여 쓴다. 대첩은 국가의 운명과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전투의 대승을 칭한다. 6.25전쟁 개전일 ‘춘천대첩(春川大捷)’은 백척간두의 국가의 운명을 구한 구국의 대승이었다. 춘천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패망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대첩으로 명명된 전투는 살수대첩(612년), 귀주대첩(1019년),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대첩(1592년), 행주대첩(1593년), 명량대첩(1597), 일제시대-청산리대첩(1920년)이 있었다.


이 작전의 입증은 인민군 총사령부로부터 하달된 정찰명령 제1호(1950.6.18.)와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서 확인된다. 정찰명령 제1호의 내용에는 “공격이 개시되면…(중략)…서울-춘천 철로와 도로상의 이동상황을 파악한다…. (중략)…정찰을 통해 서울-수원-이천 도로상의 이동과 곡수, 수원, 이천부근의 적 활동을 파악한다”고 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도 “사단은 최후임무로 춘천을 당일 내로 점령한 후 가평, 강촌방향으로 진출한다”고 명시해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임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국군은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육군본부가 포로가 돼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후평가이기도하다. 그런데 이런 북한군의 전략전술기도를 초전에 격파한 것이 국군 제6사단이 버텨준 춘천지역전투의 5일의 기적이었다.


6.25전쟁 개전 당시 국군 제6사단 주요지휘관.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개전 당일 25일 소양강을 도하해 춘천을 점령하고자 했던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축선으로, 제12사단을 인제에서 신남-홍천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했다. 화천-춘천 접근로에는 모진교(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됨)가 있었는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사전 폭파에 실패해 SU-76자주대전차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봉의산과 우두산일대를 주저항선으로 구축했다. 이 무렵 제7연대 본부소속 5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중위가 옥산포로 접근하는 적 SU-76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 이 전과가 전파되자 제7연대 장병들은 적 T-34전차와 SU-76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지점에는 심일 중위(후에 소령 추서/육사8기)의 전승기념비가 제막돼있어 그 날의 영웅적인 전투를 추모하고 있다. 육사교정에도 심일 소령 기념비가 있다.

춘천을 점령하려고 공격하던 북한군 제2사단은 소양강 백사장을 집결대형으로 공격해오다가 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105㎜ 견인포)의 집중포격으로 소양강이 피로 물들 정도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은 이야기는 북한군이 아군의 포격에 대량살상이 되면서도 부대별로 오와 열을 맞춰서 백사장 개활지를 정면으로 무모한 공격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역골로 퇴각했다. 이 전투를 봉의산 전술지휘소에서 지켜보던 국군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적의 작전지휘능력과 전투기량의 수준을 갈파하고 춘천을 사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아군의 105㎜견인포 훈련장면. (출처: 국방일보) ⓒ천지일보 2020.5.28

 

한마디로 이 혈전은 포병전투였다. 병력의 부족으로 포탄을 공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춘천방직공장 여직공들과 춘천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손에 포탄을 들고, 시민들이 지게에 지고 포탄을 운반해 주는 군(軍)·경(警)·민(民)·학(學)의 총력전으로 싸운 춘천전투는 구국(救國)의 도시라는 명예를 남겼다.

특히 강원도 경찰의 참전과 군경합동작전은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졌던 점도 춘천전투의 비사(秘史)이다. 경찰국 경비계장 손계천 경감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는 선후배간으로 평소에 친밀한 유대를 가졌으며, 춘천역 뒤 소양강 제방에 춘천서 병력과 강원경찰학교 교육 중인 신임순경 중대가 배치됐다. 후평동으로 우회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 9대대를 배치했고 전투에 참가해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처럼 춘천전투는 6.25전쟁에서 첫 군경합동작전의 승리로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전투가 중동부전선의 결전장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예비연대 제19연대를 춘천으로 이동 배치했다. 26일 아침 북한군이 재공격을 위해 역골-옥산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파쇄(破碎)공격을 해 격퇴시켰고, 14시경에는 북한군 제6연대가 초월(超越)공격으로 옥산포-마전리-춘천방면으로 투입했으나 전날 아군 제19연대가 증원된 사실을 모르는 북한군은 포병의 집중포화에 걸려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그럼에도 적은 제2, 제3제대를 같은 방향으로 병력투입을 했으나 아군의 집중포격에 소양강 도하는 좌절됐다.

27일 아침 북한군 제2군단장은 제2사단의 돈좌(頓挫)상황에 따라 제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춘천지역으로 증원시켰다. 10시부터 T-34전차와 SU-76자주포를 앞세워 봉의산 방면으로 집중공격을 재개했으나 국군 제7연대가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다. 이 무렵 그동안 두절됐던 육군본부와 유선망이 소통됐다. 육본은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遲延戰)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됐다. 이때서야 김종오 사단장은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오후에 북한군이 전차로 소양교를 돌파하면서 춘천 동북방 원진나루터 쪽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국군 제7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7시 30분경 춘천을 포기하고 원창고개 방향으로 철수했고, 18시경 북한군이 춘천시내를 진입했다.

28일에는 춘천에서 철수한 제7연대는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하고, 연대주력은 홍천북쪽 사현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제7연대는 격전의 와중에서도 건제를 유지한 채 질서 있게 계획된 철수작전을 완료해 전투력을 보존했다. 국군 제6사단은 비록 춘천을 상실했지만 제7연대와 제2연대의 원창고개-말고개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투에서도 성공했다.

29일 오전 북한군은 오전 2개 연대규모로 원창고개를 재공격했다. 제7연대 제2대대가 격퇴했으나 11시경 백기를 든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서 철수를 했고, 홍천북쪽 사현에 있는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오후에는 홍천-원주방향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하게 됐다.

춘천지역 전투에서 압도적인 북한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장교 8명을 포함한 200여명 전사와 전상 353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인 반면에 북한군은 제2사단 포병사령관을 포함한 6572명의 전사상자를 내었고, 122명의 포로가 잡혔으며 7대의 SU-76자주포와 18대의 전차가 손실되는 대패를 당했다.

北, 춘천 통해 가평·강촌 진출 계획
SU-76자주대전차포 앞세워 진격
심일 소령, 자주포 격파로 사기 올려
 
포병대대, 소양강 백사장서 큰 승리
방직공장 여공·학생·시민들 나서 
손에 들고 지게 지고, 포탄 공급 도와 

제6사단, 5일간 춘천 철옹성 방어  
‘한강방어선’ 형성 시간적 여유 벌어


북한군의 ‘선제타격계획’의 제1단계는 제2군단은 25일 내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방면으로 신속기동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위망 내의 국군주력을 섬멸하는 ‘대우회포위기동작전’으로 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전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의 춘천지역전투는 서부전선과 달리 국군 제6사단이 철옹성같이 춘천지역을 방어하고 북한군 제2사단을 궤멸시킬 정도의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살아있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신(神)이 내린 명장이었다.

반면에 서울을 28일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가 3일간 지체하는 전략적 과오를 한 것은 동부전선의 춘천전투의 결과가 한강도하라는 작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춘천전투의 성공으로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초기 1단계 작전이 실패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국군 제6사단의 전승이었으며, 당시 북한군에게도 국군이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일침(一鍼)을 주었다. 지난 2000년도에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춘천시 입구 소양강변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건립돼 그날의 구국투혼을 기념하고 있다. 특히 조형물에는 장병과 함께 싸운 경찰, 학생, 여직공, 시민이 표현된 민관군경의 총력전이었던 춘천대첩(春川大捷)을 담아 호국안보의 중요성을 보였고, 이에 이곳은 구국의 도시 춘천의 명소가 돼있다.

춘천대첩기념 주모형물과 춘천대첩 헌정시.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동해안지역전투

국군 제8사단이 방어책임진 동해안지역은 제10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의 책임지역은 제6사단과 협조점인 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서 동해안 기사문리(현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26㎞로 비교적 작았지만 해안선을 따라 종심으로 강릉까지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6월 중순에 침투한 북한의 무장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차출해 오대산과 계방산 지역에 투입했기 때문에 유사시 동원병력은 4개 대대에 불과했다.

국군 제8사단 정면의 북한군은 제5사단 제10연대를 제1경비여단에 배속시켜 주력으로 동해가도(7번국도) 북쪽에서 국군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게 하고,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로 국군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는 가운데 일부 병력을 북진시켜서 강릉 연곡천 일대에서 국군 제10연대의 후방을 협공하려고 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 제10연대는 주저항선을 화상천에서 연곡천으로 물렸고, 제21연대는 게릴라 소탕작전을 위해 광활한 지역에 분산 배치됐다가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을 색출 격멸했다.

국군 제8사단은 연곡천과 사천일대에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방어해 북한군의 초기전투 작전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27일 오후에 대관령으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재편성(再編成)을 마치고 28일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을 감행해 강릉부근까지 진출하던 중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반격을 중단하고 대관령을 철수한 후 대화를 거쳐 제천으로 이동했다.

동해안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입장에선 국군 제8사단이 인접 제6사단으로 증원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강릉이남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국군 제8사단을 양분하고 전술적으로 혼란을 주기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용전분투하는 저항으로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효과가 있었다.

▶️4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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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18

 

 

에티오피아

Ethiopia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을 파견한 유일한 나라였다. 집단안보라는 신념을 위해 1950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지지를 발표했고, 8월에 물자를 지원하고 파병을 결정하였다. 에티오피아의 각뉴(Kagnew)대대는 1951년 5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계속 운용되었다. 6 · 25전쟁 기간동안 적근산전투, 화천지구전투, 양구부근전투 등 250여 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수행하며 대부분 승리하는 전과를 이루었다.

 

○ 참전기간 : 1951. 5. 6 ~ 1955. 1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 참전연인원 : 3,518

○ 부상자 : 536

○ 전사자 : 122

 

그리스

The Hellenic Republic

 

그리스는 6 · 25전쟁에 참전하여 보병 1개 대대와 7대의 C-47 다코타 항공기로 구성된 공군1개 공수비행대대를 파병하였다. 공수비행대대는 장진호전투를 지원하였으며, 총 2,916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스군은 미 해병 사단을 직접 지원하여 전 · 사상자를 후방지역으로 후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 중 수행한 또 다른 주요 전투는 노리고지전투와 북정령전투이다.

 

○ 참전기간 : 1950. 12. 9 ~ 1955. 12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1개 공수비행대대(1 Transport Squadron)

○ 참전연인원 : 10,255

○ 부상자 : 617

○ 전사자 : 187

 

이탈리아

Italy

 

이탈리아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나 한국에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하였다. 이탈리아는 1950년 8월 국제적십자연맹이 6 · 25전쟁의 전상자 치료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의료지원부대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탈리아 적십자사는 군의관 6명, 행정관 2명, 약제사 1명, 군목 1명, 간호사 6명, 사병 50명으로 구성된 제68적십자병원을 편성하고,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준비하여 1951년 11월 16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150개의 병상규모로 운영되었던 제68적십자병원은 서울 영등포에 주둔하며 유엔군 장병과 민간인에 대한 진료활동을 하였다.

 

○ 참전기간 : 1951. 11. 16 ~ 1955. 1. 2

○ 참전규모 : 제68적십자병원(68th Military Red Cross Hospital)

○ 참전연인원 : 189

○ 부상자 : 0

○ 전사자 : 0

 

네덜란드

Netherland

 

네덜란드는 미국 · 영국 · 호주에 이어 네 번째로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먼저 해군 구축함 1척을 파견하였고, 이후 총 6척의 함정을 파견하여 미 극동 해군과 함께 해상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의 전황이 악화되자 네덜란드는 보병 1개대대를 파병하였다. 보병대대는 1950년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하여 11월말에 전방으로 이동한 후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작전활동에 들어갔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횡성전투와 인제전투이다.

 

○ 참전기간 : 1950. 7. 16 ~ 1955. 1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함정 1척(1 Ship)

○ 참전연인원 : 5,322

○ 부상자 : 645

○ 전사자 : 124

 

노르웨이

Norway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주둔했던 노르매시(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에는 총 623명의 노르웨이 남녀 의료진이 근무하였다. 미 제8군 소속으로 의정부에 세워진 노르매시 부대는 최전선인 동두천으로 이전 후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9만여 명 이상을 치료했으며 10만여 번의 수술을 시행하였다.

 

○ 참전기간 : 1951. 7. 18 ~ 1954. 10. 18

○ 참전규모 : 이동외과병원(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 참전연인원 : 623

○ 부상자 : 0

○ 전사자 : 3

 

남아프리카공화국

Republic of South Africa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로 한국에 공군부대를 파병하였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지상군 파병이 어렵게 되자 공군만을 파병하게 되었다. 1950년 11월 '하늘을 나는 치타'로 불리던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군으로부터 F-51 무스탕전투기 16대를 인수받아 공중작전에 투입되었다. 남아프리카 공군부대는 미 공군에 배속되어 후반차단 작전과 폭격작전을 수행하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스트랭글 폭격작전과 강압작전이다.

 

○ 참전기간 : 1950. 11. 16 ~ 1953. 10

○ 참전규모 : 1개 전투비행대대(1 Fighter Squadron)

○ 참전연인원 : 826

○ 부상자 : 0

○ 전사자 : 37

 

태국

Kingdom of Thailand

 

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유엔의 한국지원에 호응해 지원의사를 표명하였다. 6 · 25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30일 쌀 4만톤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지지를 보냈다. 태국은 1개 대대의 육군 병력 이외에도 프리깃함 3척과 왕립타이공군의 C-47 수송기를 보내는 등 육 · 해 · 공군을 모두 파견했다. 태국군은 포크찹고지 방어에서 3차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으로 격퇴함으로써 '작은 호랑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11. 7 ~ 1957. 2. 6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함정 5척(5 Ships), 1개 수송기편대(1 transport Formation)

○ 참전연인원 : 6,326

○ 부상자 : 1,139

○ 전사자 : 129

 

영국

United Kingdom

 

1950년 6월, 영국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UN 참전국 중 두 번째로 자국의 육 · 해 · 공군 병력을 한국에 파병하였다. 영국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하여 수많은 전투에 전투자산을 투입하였으며, 2개의 영국 유군 여단을 제1영연방 사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전투, 박천전투, 임진강전투, 가평전투, 코만도작전, 해피밸리전투 그리고 후크고지전투 등이 있다.

 

○ 참전기간 : 1950. 6. 29 ~ 1957

○ 참전규모 : 2개 보병여단(2 Infantry Brigades), 1개 특공대(1 Commando Unit), 함정 50척(50 Ships), 11개 비행중대(11 Air Squadrons)

○ 참전연인원 : 81,084

○ 부상자 : 2,674

○ 전사자 : 1,108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Memorial Facility appointed by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新유엔군 초전기념비

New Monument of UN Forces First Battle

 

건립일  1982년 4월 6일

건립자  교통부, 경기도

규   모  16,500m

 

6 · 25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초전비는 북한군에 맞서 유엔군이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나타내는 세 겹의 높은 탑신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에 스미스부대원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매년 7월 5일을 기하여 죽미령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추념식이 거행된다,

 

■ 죽미령 전투 개황

 

07 : 00  북한군 전차 8대 남진 발견

08 : 16  전방 1.8km 접근 시 포병 105mm 곡사포 사격

08 : 30  적 선두 전차 죽미령을 넘어 진격

10 : 00  북한군 전차 3대와 보병이동 목격

10 : 15  본대의 최종 전차 포병진지 통과

12 : 30  북한군 100고지로 진입

14 : 00  북한군 보병진지를 포위

14 : 30  철수 결정으로 전투 종료

 

뒷풀이한 오산오색시장 오산순대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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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17

 

 

룩셈브루크

Luxembourg

 

벨기에와 룩셈브루크는 '벨기에 / 룩셈브루크 전투대대'를 통합으로 구성하여 대한민국에 파병하였다.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도착한 전투대대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에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초기 영국 29여단에 배속된 룩셈브루크 부대는 이후 수원으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최전방 작전에 참가하였다. 룩셈브루크 부대가 참전한 주요 전투는 임진강전투, 학당리전투, 철원전투 등이다.

 

○ 참전기간 : 1951. 1. 31 ~ 1953. 1

○ 참전규모 : 2개 보병소대

○ 참전연인원 : 85

○ 부상자 : 17

○ 전사자 : 2

 

인도

Republic of India

 

인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호응하여 1950년 11월 초 의료지원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의사 14명, 행정관 1명, 위생병 329명으로 구성된 제60 야전병원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제60 야전병원은 인도 공수사단 편제의 부대였던 관계로 공수작전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미 제187 공수연대 전투단이 공정작전을 실시할 때에는 함께 편성되어 공정작전을 지원하였다. 2개 제대로 나누어 본대는 영연방 제27 여단에 배속되었다. 영국군을 직접 지원하였고, 분견대는 대구에 주둔하고 한국 육군병원을 지원하였으며, 한국 민간인을 진료하기도 하였다. 제60 야전 병원은 1951년 7월 영연방 제1사단이 창설되자 사단야전병원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11. 20 ~ 1954. 2

○ 참전규모 : 제60 야전 의무대대

○ 참전연인원 : 627

○ 부상자 : 23

○ 전사자 : 3

 

프랑스

French Republic

 

1950년 7월 29일,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의거하여 한국에 해군 함정을 보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11월 29일 한국에 도착한 프랑스 보병대대는 미 제2사단 23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쌍터널, 지평리, 단장의 능선, 원주, 부채뜰, 인제, 철의 삼각지대, 티-본(T-Bone)고지, 화살머리, 송곳, 충마산전투에 참전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7. 22 ~ 1955. 6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 함정 1척

○ 참전연인원 : 3,421

○ 부상자 : 1,008

○ 전사자 : 289

 

덴마크

Kingdom of Denmark

 

덴마크는 의료지원국 중에서 병원선을 파견한 유일한 국가였다. 8,500톤 규모의 화물선을 병원선으로 개조한 유틀란디아호는 360개의 병상, 4개의 병실, 3개의 수술실, 엑스선 촬영실, 안과와 치과, 그리고 실험실을 갖춘 현대적인 해상 종합병원이었다. 덴마크 병원선은 1951년 3월 초 부산항에 도착한 뒤 부산항을 거점으로 의료지원을 하다가, 1952년 11월부터는 인천항에 정박하여 헬리콥터 데크가 설치된 이후 민간인 부상자를 대상으로 의료지원을 실시하였다. 유틀란디아호는 유엔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24개국에서 온 4,981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6,000명에 달하는 한국 민간인을 진료하였으며, 등록되지 않은 민간인까지 합하면 12,000여 명이 넘는 한국인을 진료하였다.

 

○ 참전기간 : 1951. 3 ~ 1953. 8

○ 참전규모 : 병원선, 유틀란디아호(Red Cross Hospital Ships, Jutlandia)

○ 참전연인원 : 630

○ 부상자 : 0

○ 전사자 : 0

 

캐나다

Canada

 

캐나다는 2만6천여 명 이상의 용사가 유엔의 일원으로 극동지역의 6 · 25전쟁에 참여하였다. 캐나다 군인들은 가평전투, 355고지전투와 후크고지전투 등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왕립캐나다해군의 구축함들은 한반도 해안에서 순찰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왕립캐나다공군은 태평양을 건너며 공수임무를 수행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7. 25 ~ 1957. 6

○ 참전규모 : 1개 보병여단(1 Infantry Brigade), 함정 8척(8 Ships), 1개 공수비행대대(1 Transport Squadron)

○ 참전연인원 : 26,791

○ 부상자 : 1,212

○ 전사자 : 516

 

호주

Australia

 

호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육 · 해 · 공군 모두 참전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한국원조 결의에 따라 곧바로 2척의 함정과 1개 비행대대를 파견하였고, 9월 27일에는 보병 1개 대대를 파병하였다. 전쟁기간 해군은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깃함 1척 수준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해상작전을 실시하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마량산전투, 애플오차드전투, 구진전투, 청주전투, 사미천전투, 박천전투, 가평전투이다.

 

○ 참전기간 : 1950. 6. 29 ~ 1957. 8

○ 참전규모 : 3개 보병대대(3 Infantry Battlalions), 함정 9척(9 Ships), 1개 전투비행대대(1 Fighter Squadron), 1개 기병대대(1 Base Squadron)

○ 참전연인원 : 18,000

○ 부상자 : 1,216

○ 전사자 : 340

 

유엔

United Nations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격퇴'를 위하여 결의안을 승인하였다. 이 결의안에 따라 유엔 회원국은 육 · 해 · 공군을 참전시켜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고,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이외에도 40여개의 나라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물자를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붕괴된 국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계속적으로 병력 재정비와 보충을 통해 군의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육군은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기도 했지만 인적 · 물적인 손실을 보충하면서 병력과 장비의 증강을 도모하고 우방국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개전 당시 8개 사단이었던 육군은 정전협정체결 당시에 18개 사단으로 성장하였으며, 병력도 497,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 참전연인원 : 621,479

○ 부상자 : 450,742

○ 전사자 : 137,899

 

벨기에

Kingdom of Belgium

 

벨기에는 룩셈부르크와 함께 보병대대를 구성하였다.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도착한 전투대대는 미 제3사단 예하의 영국군에 배속되었다. 벨기에 부대는 보급로 확보작전과 최전선 작전에 참가하며 적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금굴산진지를 확보하였다.

 

○ 참전기간 : 1951. 1. 13 ~ 1955. 6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 참전연인원 : 3,498

○ 부상자 : 336

○ 전사자 : 106

 

콜롬비아

Republic of Colombia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육군과 해군을 지원하였다. 콜롬비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프리깃함 1척과 보병 1개 대대를 파병하였다. 1951년 6월 15일 콜롬비아 대대가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콜롬비아 보병대대는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강원도 금성진격전투, 김화400고지전투, 불모고지전투이다.

 

○ 참전기간 : 1951. 5. 8 ~ 1955. 10

○ 참전규모 : 1개 보병대대(1 Infantry Battalion), 함정 1척(1 Ships)

○ 참전연인원 : 5,100

○ 부상자 : 448

○ 전사자 : 213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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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16

 

 

약      사

 

우리 국군이 한강선에서 격전중일 때 유엔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결의와 더불어 자유우방들에게 파병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유엔 지상군의 특수임무부대가 긴급 편성되어 최초로 파한케 되었는 바 그 편성은 미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차알스 비 스미스 중령)의 비 · 시 중대와 동 사단의 제52 포병대대 에이 포대 장병 도합 540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동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으로부터 북상하여 1950년 7월 5일 이곳 죽미공개에 배치 중 전차 33대를 앞세운 북괴군 제4사단의 제5연대를 맞아 첫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 날 아침부터 6시간 15분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아군은 적 살상 127명과 적 전차 파괴 6대의 전과를 올린 반면에 181명의 피해와 중화기를 모두 잃고 철수함으로써 사실상 이 초전은 적을 경시한 결과로 대전의 한 장을 남긴 채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또한 이 때 이 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 출동한 국군 제17연대의 2개 대대가 후방의 갈곳리(오산 남쪽 1키로미터) 부근에서 일전으로 한 · 미 연합 작전의 서막을 장식하기도 했으나 곧 스미스부대와 보조를 같이하고 말았다.

이 초전을 치룬 때부터 국군의 주력은 서무를 유엔군에 넘기고 전장을 중부로 옮겨 낙동강 방위선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고비야말로 전세가 뒤바뀌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新 유엔군 초전기념비에서 바라본 참전국 국기들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며, 유엔군 사령부를 지도하며 한국에 파병된 유엔참전국 부대를 통합 지휘하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오산(죽미령)전투, 대전전투, 낙동강방어작전,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장진호전투, 지평리전투이다.

 

○ 참전기간 : 1950. 6. 27 ~ 1955. 3

○ 참전규모 : 8군(8th Army) 극동해군(Far East Naval Forces),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s)

○ 참전연인원 : 1,789,000

○ 부상자 : 92,134

○ 전사자 : 36,574

 

터키

Republic of Turkey

 

터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따라 한국에 육군 1개 여단을 파병하였다. 여단 내에는 보병을 비롯하여 포병 · 공병 · 수송 · 통신 · 의무 · 병기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어 독립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 편성을 갖추고 있었다. 터키 여단은 자신들의 사상자에 비해 적에게 10배의 사상자를 낸 전과를 올려 유엔군의 사기를 높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 전투는 김량장전투와 네바다 전초전이다.

 

○ 참전기간 : 1950. 10. 18 ~ 1951. 6

○ 참전규모 : 1개 보병여단

○ 참전연인원 : 21,212명

○ 부상자 : 1,155명

○ 전사자 : 891명

 

스웨덴

Kingdom of Sweden

 

스웨덴은 한국에 최초로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였다. 1950년 9월 23일, 스웨덴 의사 10명, 간호사 30명, 기타 행정요원 134명으로 구성된 스웨덴 적십자 지원단을 파견하였고,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미 제8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으며 부산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였다. 200병상 규모의 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그 후 점점 시설을 확대하여 450 병상으로 늘어났다. 전쟁기간 부상군인의 치료를 담당하였으나 전선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는 민간인 환자의 진료와 한국 의료진에게 의료기술을 지원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9. 23 ~ 1957. 4

○ 참전규모 : 적십자병원

○ 참전연인원 : 1,124

○ 부상자 : 0

○ 전사자 : 0

 

필리핀

Philippines

 

필리핀은 미국, 영국에 이어 지상전투부대를 한국에 파병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이다. 1950년 9월 19일 필리핀 전투부대(DEFTOK)의 다섯 전투부대(BCT) 중의 첫 번째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필리핀 병사들은 율동전투, 아스날고지전투, 이리고지전투에서 용감하게 한국을 위해서 싸웠다.

 

○ 참전기간 : 1950. 9. 19 ~ 1955. 5

○ 참전규모 : 1개 대대전투단

○ 참전연인원 : 7,420

○ 부상자 : 313

○ 전사자 : 113

 

뉴질랜드

New Zealand

 

뉴질랜드는 6 · 25전쟁에 영연방 연합군의 일원으로 육군과 해군을 파병하였다. 뉴질랜드는 1950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두 척의 호위함을 급파하였고 같은 해 12月에는 포병, 수송, 공병, 통신부대 병력 약 1,000여 명의 육군을 파견하여 유엔작전에 이바지하였다. 뉴질랜드군은 6 · 25전쟁 당시 가평전투와 고왕산전투 등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 참전기간 : 1950. 8. 1 ~ 1957. 7. 27

○ 참전규모 : 1개 포병연대, 함정 6척

○ 참전연인원 : 6,000

○ 부상자 : 81

○ 전사자 : 45

 

 

 

 

- 계속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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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는 국군의 처절한 지연전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2> 

선전포고 없는 기습(surprise attack)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8도선에서의 초기 전투를 고찰해 봐야한다. 6월 25일부터 30일까지의 전투를 통상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라고 구분한다.초기전투를 서부지역 옹진반도와 개성·문산지역전투, 중서부지역인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전투 그리고 동부지역인 동해안(양양)지역전투로 5개 지역전투로 구분한다. 따라서 개전초기 기습을 당한 국군은 전 전선에서 결사적인 방어전투를 전개해 지연전을 했다.

북한군은 제1단계 작전목표인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을 달성하기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이 협조된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의 경기도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공격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에 공격을 집중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양양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따라서 6.25전쟁의 38도선 전선 상의 초기전투는 옹진반도, 개성-문산지역전투,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춘천-홍천지역전투, 동해안지역전투를 중심으로 5개 축선에서 동시다발 기습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우선 북한군은 선전포고가 없이 ‘폭풍’이라는 암호명으로 기습을 했고,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8.15광복절 전까지 남한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은 허구이고, 사전에 계획된 기습공격이었으며, 서부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38도선 전 전전에서 공격한 전면전(total war)이었다. 북한군은 남침작전 계획에 참여한 당과 군부의 고위급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군관과 인민군 전사들은 통상적인 부대이동과 훈련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극비리에 전쟁이 준비됐던 것이다.

반면에 국군은 초기 38도선 방어에 실패한 원인이 북한군의 동향파악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군의 적정 파악과 대처에 혼선과 태만이 혼재된 안일한 대비태세가 문제가 됐고, 장병의 훈련미흡, 경계소홀, 부적절한 인사이동명령 등 군의 총체적인 대비 실패였다. 특히 비상경계령을 유지해오다가 북한군의 남침개시 이틀 전 6월 23일 자정부터 45일간 지속해오던 ‘경계강화령’을 해제했다. 해제한 다음 날이 24일 토요일이었고, 전군에서 사병들이 농번기 휴가에다가 외출, 외박으로 병력의 3분의 1이 병영을 비운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25일 새벽 04시에 남침(南侵)을 맞은 것이다.

초기전투에서 기습을 당한 국군은 병력수와 무기장비면에서 절대 열세였었고, T-34 전차 150대와 장갑차 54대를 앞세우고 우세한 포병화력으로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에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결국은 3일 만에 서울까지 뚫리게 된 이유는 북한군의 T-34전차의 위력 때문이라고 해도 된다.

 

6.25전쟁 발발을 보도한 내외신 언론.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옹진반도 지역전투

황해도 옹진반도는 인천에서 90㎞ 거리에 있고, 동·서·남 3면이 모두 바다에 접해있는 반도지역이다. 38도선이 지나는 전투정면이 45㎞라는 광정면은 육본직할 1개 연대(독립 제17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옹진부근에 배치해 후방으로 바다에 연하는 7~8㎞의 종심을 가진 배수지진(背水之陣)의 전투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의 기습을 받고 주저항선이 오후 1시경 동서로 양분되자 지연전을 전개했지만 결국 26일 오전 해군 제1정대와 민간선박편으로 강요된 철수를 했다.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국군 제17연대는 27~28일 사이에 인천을 경유, 수원으로 집결해 육군본부의 예비부대가 됐다.


암호명 ‘폭풍’ 북한군 기습 공격

5개 축선서 동시다발적 공격

8.15 전에 남한 무력 점령 목표

초기 기습에 국군 결사적 방어전

 

국군, 北 동향파악 실패가 결정적

남침 2일 전 경계강화령 해제

휴가·외출·외박에 병력 1/3 부재

T-34전차에 3일 만에 서울 뺏겨


 

북한군 전면남침도 및 국군 방어배치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개성-문산 지역전투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접근로에는 국군 제1사단이 청단에서부터 고랑포까지 약94㎞의 광정면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1사단은 제12연대와 제13연대가 전방에 배치됐고, 예비인 제11연대가 수색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개성-문산지역으로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공격해 왔다.

국군 제1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전방 2개 연대가 각개 격파됐고, 패퇴하는 부대를 수습해 임진강 남쪽 주저항선에 배치하는 한편, 예비연대인 제11연대를 수색에서 급히 문산지구로 진출시켜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 지역 일대에 종심으로 배치해 방어를 했다.

북한군은 6월 26일 임진강 철교를 통해 5대의 전차를 선두로 보·전·포 협동공격으로 제13연대 동측방으로 우회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제11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가 불가피했으나 반격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사단 주력부대는 금곡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27일 아침까지 봉일천 북쪽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저항선으로 재배치했다. 국군 제1사단은 봉일천 일대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28일 오전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진지를 사수하고자 싸웠으나 패배가 불가피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본부중대 소속 박래봉 상병(예비역 대위전역)의 “6.25전쟁 참전일지”를 통해 실제 상황을 확인해보니 “새벽4시경,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며 북괴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남진 중이라고 전달됐다. 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명령이라고 완전무장을 하고 사단 연병장에 집합명령이 내려 배낭과 보자기에 서류를 쌓아 짊어지고 일보계 담당자와 본부중대에 비치된 M 기관포 총열과 몸통을 각자 어깨에 메고 연병장에 나가보니 연대병력이 집합이 돼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비가 오는 그 시간에 우비를 입고 단상에 올라서서 “북한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동반해 임진강을 도하했고 서울을 향해 남진 중”이라고 전황을 병사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수색역에서 화물차를 타고 문산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려줬다는 기록에서 긴박한 당시 전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새벽 04시에 전방의 전투상황이 실시간으로 후방부대에 비상상황전파가 됐다는 것은 국군의 초기 통신망 상태가 비교적 잘 유지됐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워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전투

국군 제7사단 정면에는 북한군의 주공부대인 제3사단이 운천에서 포천방면으로, 제4사단이 연천에서 동두천방면으로 각각 제109·107전차연대와 협동해 남진을 했다. 서부전선을 책임진 북한군 제1군단의 작전목표는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는 것으로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대대를, 포천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각각 투입하고, 제13·15사단을 제2제대로 운용했다. 이 서부전선에서 북한군 공격부대의 전투력은 국군(4500명)보다 병력면에서 7배(3만 2,000명), 화력면에서 18배나 우세하게 투입된 국면이었으니 방어라는 것은 불가한 것이었다.

북한군의 공격개시를 알고 국군 제7사단은 전방에 배치된 경계부대로 북한군의 선두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면서 의정부에서 교육훈련 중이던 제1연대와 제9연대를 북한군의 접근로 상 주진지인 감악산-마차산-소요산-가랑산-천주산을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하기 위해 철수했다. 동두천 북방 제1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4사단은 전곡-초성리-동두천 축선에 전차2개 대대로 증강된 제16연대를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봉암리 축선에 제18연대를 조공으로 투입해 병진공격을 했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집중공격은 전곡에서 한탄강을 돌파해 초성리를 거쳐 동두천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시간이 25일 오전 상황이었다. 국군 제1연대는 정오 무렵에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6연대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오후 3시경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으로 소요산 일대로 철수했다. 결국은 해질 무렵에는 북한군이 동두천 시내를 진입했고 국군 제1연대는 밤10시경 덕정지역으로 철수했다.

포천지역에서는 국군 제7사단 지9연대가 방어를 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에 배속된 기계화부대가 신속하게 공격해 25일 오전11시경 포천을 진입했고, 전차의 엄호 하에 오후2시경 천주산과 가랑산을 연하는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해 오후4시경 포천 읍내까지 점령했다. 국군 제9연대는 주저항선이 조기 붕괴되자 야간을 이용해 광릉지역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3사단이 25일 오전 중 포천을 점령하고, 병진 공격하는 제4사단이 동두천을 점령해 의정부지역으로 협공할 수 있는 공격기세를 유지했다.

국군 제7사단은 26일 아침 제1연대와 증원된 제18연대를 역습에 투입해 동두천을 탈환했다. 그러나 국군 제2사단의 포천 반격이 실패하고, 북한군 제3사단에 의해 의정부가 점령당하자 아군은 동두천과 의정부 사이에서 혼란과 동시에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국군 제1연대는 창동지역으로, 제18연대는 고양을 경유해 28일 김포반도지역으로 분산 철수했다. 패전이었다.


▶️3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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