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를 평가한다 <2>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24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11화>


이승만 대통령의 개전 초 전쟁지도 72시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3년차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당해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여부를 놓고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몰렸다. 6.25전쟁은 그의 재임기간에 발생해 정전으로 마감됐기에 전쟁지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시업적에 대해 평가는 관심이 없거나 무시됐고, 그의 과오만을 부각(浮刻)했다. 소위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개전 초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몰래 피난을 간 비겁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 폭파해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고생을 시킨 무책임한 대통령으로 매도(罵倒)되는 점은 진실을 비켜간 과도한 평가절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승만의 3일, 72시간의 행적을 전쟁지도 차원에서 추적 · 고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개전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한 상황을 최초 경찰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09시 30분경 창덕궁 비원에서 산책 중 10시경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 남침’상황을 보고받자 바로 경무대로 돌아왔다. 그 당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10시에 북한의 기습도발이 ‘전면공격’임을 판단했다고 한다. 이어서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남침 상황을 보고한 시간은 공식적으로 10시 30분으로 확인된다. 보고내용에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춘천근교에 접근한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불안해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22쪽에 증언돼있다. 당시 신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니 참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경찰의 정보는 신 장관의 보고와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정확히 보고됐고, 이 대통령은 전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전면전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은 후 국무회의(國務會議)의 소집을 지시했다. 11시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관했으나 특별한 대책 없이 12시에 산회했고, 오후 2시에 다시 대통령 주재 하에 국무회의가 개최됐다. 그 직전에 오전 11시 35분부터 13시까지 무쵸 주한 미 대사를 경무대로 불러서 미 측이 파악한 전황을 보고받고 논의했다. 또한 무쵸 대사와 회담을 마친 후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연결시켜서 장면(張勉) 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정일권 장군손원일 제독을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정일권 장군을 중용해 전쟁지휘를 맡기고자하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장면대사는 25일 01시(워싱턴시간)에 미 국무부를 방문해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해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요구 했다”고 알림으로써 미군의 개입이 예상되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하와이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해 귀국중인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최단시간 내 귀국하라고 지시를 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대통령(76). (제공: 장순휘박사) ⓒ천지일보 2020.7.24

 

 

 

6월 25일 10시에 북한남침의 전쟁 상황을 보고받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전쟁이 돌입했다는 위기상황을 인식했고,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결심하는 ‘전쟁지도’의 구상을 본능적으로 나타냈다. 이어서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났을 때부터 이 대통령의 전쟁지도가 시작됐다. 즉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통보했던 것이다. 개전 초 72시간동안 이승만대통령의 전쟁지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에 대해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이에 무쵸 미 대사는 15시에 국무장관에게 전문보고를 했으며, 이 전문보고는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탄약 10일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라(to ship ten days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라는 지시로 실행됐다. 이 요청은 국군의 취약점을 대통령이 평소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민했고,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육군 지휘부에 부담을 주는 계엄령 선포를 자제했던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초기 이 대통령의 과오로 부각되는 것은 대국민 홍보인데 25일 07시에 국방부에서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했고, 12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했다.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 해주 돌입’과 ‘국군 의정부 탈환 북진 중’이라는 오보(誤報)로 인해 국민들이 심각한 혼란을 겪게 만든 것이었다. 이 실책은 이 대통령의 책임보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책임과 무능함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총력전을 이미 구상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런 대통령의 전쟁지도는 군과 경찰,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이 총동원된 전쟁으로 패망을 막았던 것이다.

넷째,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를 구상했다. 즉 이 대통령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38도선이 무너진 점을 이용해 미국의 힘을 빌려 북진통일을 해야겠다는 전쟁지도의 궁극적 목표를 구상한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통해 미 극동사령부(FECOM)에서 F-51전투기를 요청해 공군력을 보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맥아더 장군은 즉각 지원을 지시해 26일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를 발표해 한국공군이 역사상 첫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여섯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 책임론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26일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에서 이 대통령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중략)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무섭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당시 미국에서 맥아더 소령과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로 두 사람의 오랜 교분이 맥아더 장군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지원의 배경도 됐다고 한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에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전쟁지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26일 04시 30분 무쵸 미 대사에게도 다시 전화를 걸어서 대포와 전투기를 추가 요청했다.

일곱째, 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사경력자 회의’를 26일 10시 소집해 자문을 구했다. 군사경력자 회의에서는 전황을 보고받고 토의를 주관했으나 ‘서울사수’와 ‘한강방어선전투’가 맞서서 신 장관과 채 총장의 주장대로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폐회했으나 이 결정은 국군에게 치명적인 전투력 와해가 되는 과오가 됐다. 서울 사수론으로 후방에 있었던 육군 제2 · 3 · 5사단이 강북으로 투입됐다가 28일 02시 40분 한강대교가 조기 폭파되면서 퇴로가 막혀 중장비를 버리고 지리멸렬 철수하는 국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서울사수 실패는 국방부를 신뢰했던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라고 보는 것은 과장된 점이 있다.

여덟째, 제6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서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26일 11시에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초당적인 협조를 구하고, 유엔총회에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국회의 의결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본회의에서는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홉째, 미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설득한 구국의 군사외교를 통해 긴급 군사원조와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27일 01시에 장면 주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면 대사는 26일 15시(워싱턴 시각)에 트루먼을 회동해 이 대통령의 요청을 전달했고,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적인 한국 지원을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인 대상과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판단할 수 있었던 이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감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국의 외교활동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직후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침식을 거르면서 전쟁을 지도했던 전쟁지도는 매우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외교를 통해 미국의 정치지도자 트루먼 대통령과 군사지도자 맥아더 장군을 설득해 미국의 군사지원과 조기 참전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의 신(神)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는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개전 초 3일간 전쟁지도의 업적에서 탁월했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군사지원을 극비리에 추진해 전쟁을 준비한 군사외교적 행위와 체제내부의 전시 전환과 군부대 추가 창설 및 각 제대별 공격준비훈련 등 치밀한 전쟁지도는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전쟁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은 전쟁초기 전투력의 우세가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지속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착오를 범했으며, 철수한 미군의 조기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그리고 한국군을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무시한 점도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특히 춘천방면의 북한군 제2군단과 국군 제6사단의 용전분투로 돈좌된 상황을 보고받고 속전속결을 구상했던 제1단계 전쟁지도에 차질을 빚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전쟁준비단계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미군의 조기 개입으로 실패하기 시작해, 이후 전쟁기간 중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된다.



<1부 마침>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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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를 평가한다 <1>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16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10화>


6.25전쟁의 민족사적 재정의와 국제법상 전쟁범죄적 재론(再論)

올해는 6.25전쟁 발발 제70주년이 되는 해로서 남다른 감회가 드는 것은 최근 구국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대장이 향년 100세로 서거(逝去)하셨기 때문이다. 고인이 북한공산군의 불법남침에 맞서 셀 수도 없는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이제 영원한 신화가 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정치모리배들에 의해 친일 프레임에 시달린 점은 구국의 영웅에 대한 감히 있을 수 없는 결례(缺禮)라는 점을 역사의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6.25전쟁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정의돼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책임소재에 관한 진실에 벗어난 정의이기 때문에 ‘잘못 됐다’고 할 것이다. 민족사적 의미로 정확한 정의는 “김일성이라는 희대의 공산주의자가 해방 후 북조선을 해방구로 전쟁을 준비해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의 권력욕을 숨긴 채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겠다는 망상에서 저지른 민족사 최악의 동족상잔”이라 해야 맞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방 후에 누구도 전쟁을 꿈꾼 지도자는 없었다는 점과 김일성(당시 38세)의 6.25전쟁 전후 전쟁지도(戰爭指導)의 행적을 추적해 숨겨진 전쟁범죄적 진실을 밝혀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6.25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발생한 민족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참혹한 비극이었으며, 수백만 인명의 살상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전쟁범죄(war crimes)’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조차 없이 전범 김일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유감스럽다. 평화통일 후 그자의 범죄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더라도 재론할 과제일 수도 있다.

추가적으로 6.25전쟁의 유념해야 할 관점은 국제법상 종전(cease fire)이 아니라 정전(armistice)이라는 현 상황이 언제라도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없이 북한의 기습으로 개전(open war)이 가능한 전쟁 중(on war)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북한이 다시는 전쟁을 안할 것이고 평화를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로 국가안보의 긴장을 스스로 해체하는 것은 자멸(自滅)의 길이니 항재전장(恒在戰場)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자세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한다.

6.25전쟁의 요건과 원인으로 본 전쟁의 성격

‘전쟁의 요건’에 관해 서상문 박사는 ①개전의 의지를 가진 국가지도자의 전쟁개시 명령의 유무 ②동원된 무장병력의 수가 정규군 연대급 이상의 유무 ③상대방의 무장행위가 2주 이상 충돌이 지속되고, 1명이상 사상자의 발생유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점에서 6.25전쟁은 전쟁의 요건이 충족된다. 멜빈 스몰(Melvin Small), 데이비드 싱어(David Singer)의 주장은 ▲전투의 지속성(sustained combat) ▲조직화된 무장세력(국가)의 개입 ▲12개월 기간 중 전투와 관련해 최소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전투가 있어야 전쟁으로 인정한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전쟁의 원인’ 측면에서는 ①국가지도자의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에 따른 상관성 ②대외무력행위를 국가 위세의 지도력 장악으로 보는 관점 ③사회적으로 국가사회가 처한 실정에 따른 ‘식민지 상태에서의 민족해방전선, 노예해방에 대한 남북전쟁, 분단극복을 위한 국가통일 전쟁 등’ 다양한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 측면에서는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글로벌 이니셔티브(주도권主導權) 쟁탈전이 원인이 된다. 따라서 6.25전쟁은 이 모든 전쟁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동시 작용한 내전 ‘civil war(시빌 워)’와 국제전 ‘world war(월드 워)’의 ‘복합형전쟁’이었다.

6.25전쟁과 전쟁지도자의 비교평가

‘전쟁지도(戰爭指導)’라는 용어는 부재적인 개념이나 전쟁리더십(war leadership),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ing),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를 함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쟁지도’라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 의미로써 통합된 전쟁수행역량과 기술을 의미하는 포괄적 개념으로서 전략(strategy)의 입안-실행-수정-새로운 계획입안-실행-수정의 지속적 반복되는 전쟁행위와 구상(thoughts and concept of action in war)인 것이다.

따라서 6.25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접근 방법은 전쟁지도자의 언행(의지, 구상, 발언, 정책, 전략, 결정, 지시, 조치, 수행 등)과 그 모든 것을 망라한 전쟁지도(conduct of war)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과 민주진영의 전쟁지도자 이승만, 트루먼, 맥아더의 전쟁지도를 비교평가는 것 자체가 매우 유의미하다.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

김일성은 해방 후 소련군의 후원으로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34세)로 정치지도자로서 정권(政權)을 잡았고,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 최고통수권자(37세)에 취임해 군사지도자로서 군권(軍權)을 장악했다. 그 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37세)에 등극해 정치군사지도자로서 전쟁지도의 주체가 됐다.

김일성은 해방이전에 통일 조국에 대한 개인적인 구상을 했으며, 평화통일을 결코 믿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력수단을 통한 ‘조국통일구상’을 주장했다고 유성철(전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참가자)씨의 1992년 4월 12일의 회고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민족진영출신이 아닌 소련군에 편승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세력이 취약해 ‘무력’에 의존했으며 남한에 대한 정치적 통일도 ‘무력지상주의적 관념’을 소유했다는 박갑동(책‘한국전쟁과 김일성’, 1990년)의 증언이 있다. 또한 김일성은 1946년 6월 전후로 지도급 인민군 군간부들에게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겠다며 군사력 건설사업에 관해 중점적인 발언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러한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은 해방 후 남북분단의 현실을 ‘자주적 민족해방’이라는 민족통일국가에 대한 망상(妄想)으로 형성되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을 염두에 둔 통일구상이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 김일성(39)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6


 

김일성의 전쟁지도와 대소(對蘇) · 대중(對中) 군사지원 외교행위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망상’이 전쟁지도로 실행된 것은 적극적인 대소(對蘇)군사지원 외교 행보였다. 김일성은 제1차 소련 방문(1949년 2월 22일~3월 24일) 중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북 · 소회담(3월 5일, 7일, 14일)에서 대남 무력통일 구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준이 부족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즉각 개입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미 · 소간 얄타협정(1945년 2월)이 유효하다는 점을 들어 선제남침공격을 반대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략하라는 식의 전쟁지도 발언을 통해 김일성의 무력통일구상을 조건부 동의해줬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조건부 동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반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 공산사회주의 혁명노선’과 일치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남침논의는 철저히 은폐했으며, 대북 군사지원 규모가 확대되는 결정적인 전쟁지도를 해준 것이다.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을 획득한 김일성은 귀국 후 본격적인 남침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제2차 방소(1950년 3월 30일~4월 25일)는 비밀리에 추진됐으며, 스탈린은 4월 10일 21시 10분부터 23시까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남침전쟁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미군의 한반도 철수(1949년 6월 30일)로 변화했고, 중공의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대륙을 통일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공산화(共産化)’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이 비밀 회담에서 스탈린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염전분위기이고, 북한군이 신속히 전개해 전쟁을 3일안에 승리로 끝낼 수 있다. 남조선 노동당 당원 20만 명이 남한에서 봉기를 해 참여할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김성호, ‘조선전쟁의 비밀과 진실’, 2001년)

그리고 이 회담에서 스탈린김일성에게 전쟁지도를 해줬는데 먼저 철저한 전쟁준비를 위해 부대를 추가적으로 창설할 것과, 정예공격사단을 편성하고 더 많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특히 남한의 공격을 유도해서 그것을 빌미로 반격하면서 전쟁을 확대하라는 구체적인 기만전술(欺瞞戰術)을 지도해줬고, 남침작전을 3단계로 구획해 38도선에서 남해안까지 작전종심 350㎞를 한달 만에 점령해 작전을 완료하라는 지도를 해줬다. 둘째로 위장평화전술로써 남한에 평화통일 제안을 해 ‘전투와 군사행동’은 철저히 은폐하도록 지도했으며, 셋째 공격작전은 속전속결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넷째 중공과의 군사지원을 연대해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으라는 조건부 승인을 하면서 “중공을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고, 소련은 직접 개입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따라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교사에 의한 김일성의 전쟁범죄라는 연관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전쟁개입 공범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김일성은 대중(對中)군사지원 외교행보에도 집요한 노력을 했다. 제1차 방중(1949년 4월 28일)에는 김일성을 대신해 북한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이 방문해 방소회담 결과를 보고했고, 마오쩌둥스탈린이 남침전쟁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남침전쟁이 시기상조라는 불가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전쟁지도에 관해 속전속결의 중요성과 지구전의 불리한 점을 언급했고, 중공군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모호한 언질을 줬으며,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3개 한인사단 중 2개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하도록 승인해 줬다.

제2차 방중(1950년 5월 15일)에서 김일성마오쩌둥은 5월 14일 스탈린의 특급전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대남전쟁 도발에 동의했으며, 북한의 무력침공 기본구상을 지지하면서 전쟁지도를 해줬다. 마오쩌둥의 전쟁지도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중공은 군대를 파견해 북한 지원을 약속 ▲중공의 군사대응전략으로 동북 3성 근처 압록강변에 3개 군단을 배치 ▲미군이 38도선을 넘어오지 않으면 관여하지 않겠지만 일단 38도선을 넘으면 반드시 인민지원군을 투입 등이었다. 이처럼 6.25전쟁은 단순히 북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군사도발이 아니라 공산진영 소련과 중공의 군사적 지원 공모 하에서 자행된 ‘범죄전쟁(criminal war)’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김일성은 민족사에 비극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war criminal)’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11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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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유엔사의 창설과 국군의 재편성 및 미 지상군 투입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1950년 7월13일 유엔기를 인계받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9>


유엔군사령부의 창설과 초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한반도의 전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른 7월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7일 제3차 결의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and)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의 주요내용은 유엔이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권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체제 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당일 유엔 주재 미국 오스틴 대사에게 유엔기를 전달했고, 미 합동참모본부(미 합참)는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cArthur) 극동군사령관을 추천해 8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공표했으며, 10일에는 정식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발송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우선 극동군사령부(FECOM)를 통해 유엔군의 작전통제권( Operational Authority)을 행사했으며, 초기에는 극동군사령부의 참모들이 유엔사령부의 임무를 이중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구성군인 미 제8군사령부(지상군), 미 극동해군사령부, 미 극동공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육군 · 해군 · 공군의 작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맥아더 원수는 7월 12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중장에게 ‘7월 13일부로 주한 미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라’는 구두 명령을 하달해 대구(현 Camp Walker)로 지휘소(CP)를 개소시켰다.

그리고 1950년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作戰指揮權)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공한(公翰)으로 이양(移讓)되면서, 17일 제8군사령관과 미 극동 해 · 공군사령관에게 그 권한을 위임해 지휘체계가 수립됐다.

이 대통령은 공한에서 “본인은 현재와 같은 적전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이에 준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한국 내 또한 한국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하며, 기타 사항도 사령관이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이양의사를 전했으며, 이에 맥아더 유엔군사령관“본관은 용감무쌍한 대한민국 국군을 본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두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라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의 전환(transfer)을 공식화했다. 이 결정은 현재의 전시 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과도 연계된 역사적인 결정으로 한미동맹의 뿌리가 돼 한반도 전쟁억지력과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 ⓒ천지일보 2020.7.10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7월 17일 워커 장군에게 한국군(ROKA)의 작전지휘권도 행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개전초 전투력과 전투경험이 부족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포기하고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휘통일(Unity of Co㎜and)’을 구축한 것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도(戰爭指導)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총참모장 겸 육 · 해 · 공군 3군총사령관 정일권 소장은 주요 지휘관(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 / 제2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참모들에게 미군의 참전에 따른 연합작전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고, 이를 각 사단장들에게 하달해 무리 없이 지휘통일을 확립한 것은 최고의 지휘판단이었다. 그러나 실제 작전에 있어서는 미 8군사령관의 작전통제가 요청되면 한국군 육군본부의 지휘계통으로 예하부대에 명령과 지시가 하달돼 작전지휘권을 연합차원에서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육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구성군 부대로 편입한 한국 육군을 지휘했다. 그리고 미 극동해군사령관은 한국해군을 포함한 유엔사해군구성군을, 미 극동공군사령관은 한국 공군을 포함한 유엔사공군구성군을 지휘하는 연합작전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영국의 애틀리 수상은 6월 28일 일본 수역에 있는 영국해군함정을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권에 통합시켰고, 호주 · 뉴질랜드 · 캐나다 정부가 영국정부의 결정에 합류하면서 연합군 지휘부의 필요성이 대두됐으며,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돼 7월 24일 동경(東京)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and)가 발족된 것이다.


 

<Tip>초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누구인가?

맥아더(1880.1.26~1964.4.5)는 미국 아칸소주의 리틀록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계였다. 1899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입학해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해 공병대에 배치됐다. 1918년 제42보병사단 예하부대인 제84여단의 여단장으로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해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됐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됐으며 그해 11월 3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1937년 퇴역해 예비역 대장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군사고문에서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해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해 미 극동군사령관(FECOM)이 됐다. 1944년 원수가 됐고,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는 각별한 친분관계로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등 한국군을 지원하고,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해임됐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천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월미도를 바라보고 서 있다.

 

 

국군의 재편성과 군단 증편

유엔사령부가 창설될 시기를 전후로 국군 내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일권 총참모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 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서울을 실함하고 사분오열한 장병을 수습해 한강방어선전투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국군은 건제를 편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먼저 7월 7일 제3사단, 제5사단, 제7사단을 재건했으며, 중동부전선의 제6사단과 제8사단에 대한 원활한 작전통제를 위해 7월 12일 함창에서 제2군단사령부(군단장 김백일 준장)를 창설했다.

국군은 제1군단 · 제2군단 체제로 증편해 패퇴했던 개전 초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미 육군 제24사단과 추가로 전개한 미 제25사단과 제1기병사단과의 연합작전을 준비했다.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 추풍령을 중심으로 차량과 장비가 많은 미군은 서쪽지역의 평야지대를 책임지고, 한국군은 상주-영동지역의 중동부지역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는 것으로 전선을 조정했다. 7월 24일에는 다시 육군의 지휘체계를 재조정해 제1군단이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해 영주-안동축선을, 제2군단은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지휘해 문경-함양-상주축선을 방어하도록 하고, 태백산맥으로 지휘통제가 어려운 제3사단은 육군본부 직할로 편성했다.

스미스 TF의 죽미령 전투 패배와 미 제24사단의 천안전투 연패와 설욕(雪辱)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7월 1일이었다. 미 스미스특임부대(Smith TF)는 7월 5일 03시에 죽미령에 도착했다. 미 제24사단의 선발대로서 미 지상군부대의 최초의 부대로 제52야전포병대대 A포대(105㎜ 곡사포 6문)와 함께 오산 북쪽의 죽미령(竹美嶺)에 전개했다.

죽미령은 오산 북방 약5㎞ 지점의 경부축선상의 조그마한 횡격실 능선으로서 중앙에 주봉인 반월봉(117m), 서측에 무명고지(90m), 동측에 92고지로 3개 고지군으로 형성돼있다.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비가 내리는 새벽의 어둠속에서 즉각 진지구축에 들어갔지만 해 뜰 무렵까지도 완료하지 못해 전투준비가 미흡한 상태였다.


7월 3일 오산 죽미령전투(5일)에 투입하기 위해 대전역 도착하는 스미스특임부대(Smith TF).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5일 07시경 수원부근에서는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7전차연대가 제1제대로 공격해 1번 경부국도를 따라 남진하는 것이 관측됐다. 8대의 전차를 선두로 죽미령 1.8㎞까지 접근하자 미군은 수청리에 배치한 105㎜ 곡사포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전차의 돌진은 계속됐고, 보병진지 630m까지 들어왔을 때 75㎜ 무반동총으로 전차를 공격했으나 적 전차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어서 지근거리에서 2.36in 로켓포 공격을 실시했으나 별효과가 없었고, 북한국은 08시 30분경 죽미령방어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보포협동공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전차는 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면서 4대씩 33대가 모두 죽미령을 통과해 A포대쪽으로 접근했다. 전차가 통과한 후에 보병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스미스대대는 비가 오는 가운데도 계속 호를 깊이 파는 등 진지강화를 했다. 11시경 전차 3대를 선두로 적이 보전협동 공격을 해왔기에 반월봉을 중심으로 전면방어로 전환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동측방의 C중대가 위험하게 되자 14시 30분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철수를 결심했다.

스미스대대는 죽미령전투에서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엄청난 전투손실을 입었다. 스미스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총 150여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제52포병대대 A포대는 화포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치욕을 당했다. 반면에 북한군의 손실은 사망 42명, 부상 85명, 전차 파손 4대였다. 비록 죽미령 전투가 미군과 북한군과의 첫 교전이었으나 북한군이 미군의 참전을 확인한 전투로서 북한군 수뇌부를 놀래게 만든 전투였다. 스미스특임부대가 패배한 원인을 볼 때 제2차 대전이후 안일에 빠진 미국의 군대는 장비와 훈련 면에서 기강해이의 길을 걷는 시기였으며, 미군엔 북한군을 우습게 생각한 자만(自慢)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산 죽미령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미 제24사단 제34연대가 평택-안성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노도와 같이 전차를 앞세우고 제34연대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전차공격에 압도된 제34연대 장병들은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6일 아침 1시간 만에 평택-안성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철수를 강요당하는 패전이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제34연대를 공주방면으로 철수시키고, 제21연대를 조치원 북방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또 7일 아침 패배를 당했고, 충격 속에서 딘 소장은 제34연대 3대대를 천안으로 철수시켜서 방어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적 제4사단의 보전협동공격에 돌파돼 천안 시가전까지 벌였다. 이후 8일 오전에는 공주를 따라 금강으로 철수시켰다.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24사단은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철수하던 중 7월 9일 20시경에 북한군의 대규모 남진하는 대열을 발견하고, 공중공격으로 평택과 조치원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100여대의 북한군 차량을 파괴했다. 10일 오후에는 평택부근에서 파괴된 교량 앞에서 길게 늘어선 북한군 전차와 차량 대열은 미 제5공군이 대규모 공중공격으로 적 T-34 전차 38대, SU-76 자주포 7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고, 다수의 병력을 살상하는 설욕을 했다.

오산 죽미령 전투와 평택-안성 방어선에서 북한군에게 패배를 당한 미 제24사단은 충격에 빠졌으며,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첫 대패(大敗)였다. 그리고 미군 지휘부 생각을 크게 바꾼 첫 전투였다. 미 제24사단장도 천안전투에서 패퇴하면서 105㎜ 대전차포탄과 3.5in 로켓포를 긴급 요청해 북한군의 대전차무기를 보강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군은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해 북한군의 공격속도를 둔화시켰고, 병력을 살상해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으로 작전개념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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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지리멸렬 도하하는 국군을 수습해 한강방어선 전투를 준비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한강방어선을 혈전으로 지킨 국군용사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8>


한강방어선 전투를 이끈 구국의 명장 김홍일 소장

한강(Han River)은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국에서 가장 큰 강이다. 서울 부근의 강폭이 700m에서 1500m이고, 수심이 평균 3m이상에 달해 도하장비 없이 중장비가 도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한국군에게 있어 가장 유리한 천혜의 방어지형이었다. 육군지휘부는 한강선을 방어선으로 이용한다는 작전구상조차 없이 막연하게 자연장애물로써 북한군의 진출이 지연될 것이라는 정도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미 극동군사령부(FECOM) 전방지휘소(ADCOM)의 처치 준장의 조언으로 서울 실함직전에 총참모장 채병덕은 한강을 이용한 방어선으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본을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강선 방어임무의 전권을 부여했다.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소장은 당시 중국 국민군에 가담해 사단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로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자 즉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 제7사단장’으로,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 수도사단장’으로,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 제2사단장’에 임명하고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 정면의 방어선 편성에 들어갔다. ‘혼성사단’이란 이름만 사단이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 불과했고, 공용화기란 연대 당 고작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는 소총부대에 불과했다.

우선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도하해 집결하는 병력을 500명 단위로 채워지면 ‘혼성 제0대대’로 명명해 한강방어선으로 투입하는 한편 한강방어지역별 혼성사단으로 도하하는 병력을 수습해 자체병력으로 편성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김홍일 장군의 노련한 부대지휘로 6월 29일 임기응변식으로나마 병력이 배치돼 한강방어선이 형성됐다.

이 시기에 북한군 수뇌부가 서울에서 3일(6월 28~30일) 가까이 지체한 것은 기습을 당한 한국군에게는 한강을 도강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해서 지연전을 전개할 시간을 벌 기회였다. 북한군이 그 당시 즉각 한강도하공격을 하지 못한 것은 도하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북한군 전선사령부 공병부 부부장 주영복이 회고록에서 “공병의 원시적 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북한군은 개전 초 보병 · 포병 · 전차에 집중하다보니 공병과 통신 등 전투기술병과에 대한 준비가 소홀한 채 남침했고, 그 문제점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북한군의 결정적인 전투력 결함으로 나타났다. 즉 주요 전투국면에서 통신이 두절돼 부대 간 전투협조가 부족했으며, 남한강, 금강, 영산강 등 한반도의 횡으로 형성된 큰 강 앞에서 공병도하장비의 부족으로 공격중단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한강방어선을 사수한 6일간의 전투는 나라를 구한 국군의 혈전


김홍일 소장.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한강방어선 전투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김홍일 소장) 예하 3개 혼성사단(수도, 제2, 제7)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해 북한군 제1군단(김웅 중장) 예하 3개 사단(제3, 제4, 제6)및 전차 1개 여단(105전차여단)의 공격을 6일간 방어한 전투이다. 북한군은 29일 밤부터 한강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혔다. 다시 북한군은 국군 진지에 포격을 실시하면서 제4사단을 여의도와 영등포 방면으로, 제3사단을 흑석동과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 공격했으나 국군의 필사적인 방어로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영등포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는 7월 3일까지 5회에 걸친 북한군의 도하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사수해냈다. 이때 미 극동공군의 항공기(B-26, B-29폭격기와 F-80, F-82전투기)가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폭격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처지 준장의 ADCOM을 통해 한국군을 지원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조치였다.

29일에는 북한군 제6사단이 김포방면으로 기습도하를 해 김포비행장에서 영등포방면으로 진출하면서 한강방어선의 서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30일 아침에는 북한군 제3사단이 포병과 전차포의 지원 하에 서울 동남방 서빙고나루터에 도하를 개시했다. 7월 1일에는 미명부터 적 제4사단이 도하공격을 했다. 경부선 철교를 확보할 목적으로 아군복장을 한 편의대 1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의 소화기와 수류탄 집중공격으로 돌파기도가 분쇄됐다. 1일 밤 북한군 공병은 철도선로반원과 시민을 강제동원해 은밀하게 경부선 철교복구작업을 실시했다.

7월 2일 전날에 이어 치열한 쌍방교전이 있었고, 노량진 대안의 적 제3사단이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병력부족으로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고, 반면 여의도 대안의 북한군 제4사단은 다시 국군 제8연대를 돌파 시도했으나, 수차례의 혈전 끝에 국군은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7월 3일 북한군 제4사단이 경부선 철교를 은밀히 복구완료하고 04시경 최초로 전차 4대(T-34)를 도하시킴으로서 한강방어선이 돌파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후속병력이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진출하고, 뒤이어 열차를 이용해 전차 13대와 병력을 진출함으로써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성수도사단 장병들은 시내의 공장과 건물 등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면서 결사적으로 시가전을 전개했다. 참고로 3일 저녁 북한군 제6사단은 6대의 전차를 선두로 인천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강방어선전투는 열세한 장비와 병력을 가지고 한강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6일간 막아낸 성공적인 방어전투였다. 이 시간을 이용해 국군은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을 할 수 있었으며, 29일 오후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김홍일 사령관의 안내로 이뤄졌고, 30일에는 미지상군 지원이 결정됐고, 미 지상군이 지원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이런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준 중요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김홍일 사령관은 “앞으로 3일 동안 한강선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3일간을 더 버텼다는 것은 국군의 애국투혼과 자신감의 회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강방어선의 돌파상황을 파악하던 김홍일 사령관은 예하부대들에게 즉시 안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해 병력과 장비를 보호했다. 그 후 수원-장호원-제천선을 연하는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반면에 한강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 제4사단은 전사 227명, 부상1822명, 실종 107명으로 총2156명의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 피해는 개전이후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4일간의 손실 1112명에 비교할 때 거의 2배에 이르는 것에 비춰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알 수 있다.

 <Tip> 구국의 명장 오성장군 김홍일은 누구인가?

김홍일(1898.9.23.~1980.8.8.)은 평북 용천출생으로 중화민국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군인 겸 정치가이다. 오산학교 교사로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 1921년 육군군관학교 졸업, 1923년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광복이후 국민혁명군에 복귀해 중장(2성)으로 진급했다. 귀국 후 1948년 12월 이승만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육군준장에 임관해 육사교장을 역임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돼 와해된 국군을 수습해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간 한강방어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이 방어전투에서 지휘능력을 발휘해 맥아더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과 미 지상군의 전개시간을 보장하는 전공을 세웠다. 7월 5일 육군의 개편시 초대 제1군단장(3성)으로 임명됐다. 일명 5성장군이라는 것은 중국군과 한국군에서 별의 수를 더한 의미이다. 전쟁 중 예편해 주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노환으로 83세에 타계했다.

 

정일권 신임 총참모장의 임명과 한미연합 작전체제 구축

동시에 7월 1일 이승만 대통령채병덕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 총참모장 겸 육 · 해 · 공 3군 총사령관에 전격 임명했다. 정 총참모장은 임명 당일 대전에 위치한 ADCOM를 방문해 처지 준장과 국군의 재정비, 탄약과 장비의 재보충, 한미 양군의 작전지역 분담, 장차전의 작전구상 등 향후 대응책에 대해 협의를 했다. 특히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상황에 대해 미 24사단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서부지역 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경부국도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중부와 동부전선을 담당하기로 지역분담을 했다. 이 회의는 역사상 최초로 한미연합작전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전쟁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됐다.

한편 7월 2일 주일 미 육군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도착 즉시 북상했고, 이 대대를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부대’ 또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Smith TF)’로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들은 북한군에 대해 자만심을 갖는 분위기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다. 같은 날 미 제24사단 예하 제34연대가 도착했고, 4일에는 제21연대와 제19연대가 축차적으로 한반도로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은 한강방어선 전투가 치열하게 교전하던 때였다. 그리고 미 제25사단은 7월 10일 부산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18일 포항으로, 미 제7사단은 증원부대로 인천으로 인천상륙작전 시 투입돼서 주일 미군 4개 사단의 투입이 완료됐다.

 

한강방어선전투의 국군부대 전투요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3

 

 

국군의 전시 재편성과 미 지상군의 투입전개

국군은 7월 5일 평택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모태로 제1군단사령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한강방어선전투에서 혼성으로 편성돼있던 6개 사단(혼성 수도 · 제1 · 2 · 3 · 5 · 7)을 3개 사단(수도 · 제1 · 2)으로 재편성해 제1군단사령부의 예하부대가 됐다. 국군은 1개 군단, 5개 사단(수도 · 제1 · 2 · 6 · 8), 3개 연대(기갑연대 · 제23연대 · 17연대)로 개편됐다. 초대 제1군단장은 김홍일 소장이 임명됐다. 육군의 과감한 전시개편은 신임 정일권 총참모장의 결단으로 이뤄졌으며, 야전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체계적인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편성과 체계를 갖췄으나 미군으로부터 무기와 장비의 보급이 안 된 상태에서 전투력은 여전히 약한 상태였다.

7월 5일 미 제24사단의 제34연대가 오산으로 진출한 스미스부대의 후속부대로 평택-안성에 전개했고, 국군 제1군단도 재배치명령을 받고 미 제24사단의 ‘전투협조점’에서 중동부전선 쪽으로 긴급히 배치됐다. 7월 6일 수도군단이 진천으로, 제1사단을 음성으로 전개해 제6사단 제19연대와 제6연대를 작전통제하고, 제2사단을 증평으로 이동해 군단예비부대로 집결 보유했다. 이 시기에 한미연합 방어전선이 골격을 갖추게 됐는데 이러한 시간은 한강방어선 전투의 6일간의 성공적 방어가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유엔사령부의 창설이 7월 7일 거행됐으며, 8일에는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돼 대한민국은 전시체제로 전환됐다.



▶️9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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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맥아더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7>

 

처지 준장의 전황파악의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 및 신속한 보고

북한 김일성이 기습남침계획을 세울 때 고려한 여러 변수 중 가장 중요시한 것은 미국의 개입(engagement)이었다. 남침 세부계획을 작성하는데 군사고문단의 입장에서 북한군을 지도한 소련은 미국의 대응이 있겠지만 군사적인 개입은 상당히 지연될 것으로 판단했고, 그 사이에 남한 전역을 신속하게 석권(席卷)하면 된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참전했고, 애치슨라인은 고려하지도 않은 기적 같은 일이 미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신속하게 진행됐다.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 하달된 ‘지령 제1호’에 따라 처지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전방지휘연락단(ADCOM)을 조직(13명), 27일 19시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주한 미 고문단의 지휘와 한국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전격적으로 수행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미 지상군 지원’이라고 대서특필해 전선에서 패퇴하는 국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의지를 고양하는 것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8일 04시 미 군사고문단 하쓰렛쓰 대령이 ADCOM에서 처치 준장을 만나서 전반적인 전황(戰況)과 서울에 진입하기 시작한 북한군의 공세 등 상세한 보고를 했다. 곧바로 처치 준장채병덕 총참모장을 찾아가서 미 해 · 공군이 직접 한국군을 지원하게 됐다는 맥아더 장군의 신속한 조치를 알렸다. 또 방어능력을 상실한 한국군에 대해 우선 서울에서 시가전(市街戰)을 계속해 시간을 벌 것과 패주해온 병력을 수습해 부대를 재편성하고, 이 부대를 한강이남선에 배치해 한강선을 사수(死守)할 것을 지도했다. 이에 국군 지휘부는 패잔병을 집합시켜서 28일 하루 만에 장교 1000명과 사병 8000명을 수개의 대대로 재편성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처지 장군의 적시 적절한 전쟁지도는 당시 ‘신(神)의 한 수’였다.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이승만 대통령맥아더 장군이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24


 

미 공군과 해군의 신속한 지원

맥아더 장군의 극동군사령부 예하 미 극동공군은 ‘지령 제2호’에 따라 28일부터 본격적인 한반도 작전을 개시해 29일에는 무려 172회의 출격을 했다. 지상군 참전이전에 선 조치된 매우 중요한 지원전투력이었다. 당시 주일 미 제5공군은 9개 비행단으로 편성돼 있었고, 규모는 1172대였지만 가용대수는 350대로 가동률 30%수준이었다. 주력기들이 일본 북부지역에 전개돼있었기에 출격가용편대는 4개 편대에 불과했다. 미 합참의 특별조치로 전투기 F-51 145대를 탑재한 항공모함 ‘보크샤호’를 급파해 전력을 보강했으며, 보크샤호가 태평양을 8일 7시간 만에 횡단한 것(통상 14~16일 소요)은 신기록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미 극동해군은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순양함 ‘츄나우호’를 28일 출동시켰다. 29일부터 강릉-삼척간의 200㎜ 함포로 동해안 7번도로 상에 산사태를 일으켜서 도로를 차단해 남진을 막았다. 이러한 미 해 · 공군의 신속한 한반도 전장 투입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맥아더 장군이 25일 21시 35분(한국시간) 제출한 상황보고서와 트루먼 대통령이 참여한 26일 21시(워싱턴 현지시간) 제2차 미 국가안보회의(NSC)의 결정이 매우 빠르게 이뤄졌기 때문인데 이 일은 거듭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


처치 준장의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전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기상조건의 악화와 적으로부터의 공격위험성이 있음에도 직접 전선시찰을 결심했다. 해공군의 개입과 지상군의 개입은 같은 무력개입이라 하더라도 그 본질이 다르다. 미 지상군의 개입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라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드디어 6월 29일 06시 10분 비가 오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전용기 ‘바탄(Bataan)호(C-54)’로 한국을 향했다. 맥아더 장군 일행이 탄 ‘바탄호’는 4대의 무스탕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한국으로 이동 중 1대의 북한공군 야크(Yak)전투기의 추격을 당했으나 무사히 10시 39분 수원비행장에 도착했다. 수원비행장에는 이승만 대통령무초 주한 미 대사가 정찰기편으로 대전에서 수원으로 도착해 맥아더 장군 일행을 맞이했다. 이승만 대통령맥아더 장군일행은 처치장군의 전방지휘소(당시 수원농업시험장)와 한국군 육군본부가 있는 임시지휘소(학교)에서 브리핑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낡은 구형 포드승용차를 타고 영등포 동쪽에 있는 한강변의 고지(당시 동양맥주공장의 언덕으로 추정)로 달려갔다. 북한군에 점령당한 강북의 서울과 파괴된 한강교가 눈 아래 보였고, 한강제방을 따라 장비도 제대로 없는 한국군이 적의 공격을 무릅쓰고 열심히 호를 파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맥아더 장군은 혼성 수도사단 제8연대 제1대대 진지로 가서 20여분가량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가 서있던 언덕 근처 진지에서 한국군 한 병사를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눴다. 이때 한국군 병사의 죽음을 초월한 전투정신과 애국심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맥아더는 돌아오면서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국군에 대한 신뢰를 했다고 한다.

‘맥아더 회고록’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날 한강전선을 시찰하면서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반격작전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Tip> 한강방어선 시찰 중 맥아더 장군과 한국군 병사와의 실제대화

맥아더 :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
국군병사 : 옛!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 그 명령이 없을 땐 어떻게 할 것인가?
국군병사 :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 오! 장하군! 자네 말고 다른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국군병사 : 옛! 그렇습니다. 장군님!
맥아더 : 참으로 훌륭하다! 여기서 자네와 같은 병사를 만날 줄을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군군병사 :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 통역장교!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잘 싸우라고.

※필자는 당시 국군병사였던 신동수 옹을 2004년 부산에서 육군군수사령부 장병초빙 강연 시 만나서 직접 이 실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지는 신길동(현 영등포공원)으로 추정된다. (제공: 장순휘 박사)ⓒ천지일보 2020.6.24


 

미 지상군의 신속한 투입결정은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의 합작품

한강방어선 시찰을 마친 후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는 29일 18시 15분 수원비행장을 이륙해 일본으로 행했다. 한국이 처한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맥아더 장군은 수첩을 꺼내 워싱턴에 보낼 정세보고와 건의사항을 메모했다.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는 29일 22시 15분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 복귀했다. 한편 29일 워싱턴에서 ‘지령 제3호’가 하달돼 미 해 · 공군을 북한군 공격저지에 사용해도 좋다는 승인이 나왔으나 지상군의 사용지시가 없었다. 30일 03시경 맥아더 장군은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미 합참에 보고했다. 그리고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에게 “시간이 중요하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명쾌한 결정을 내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긴급 건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30일 04시 57분에 맥아더 장군이 건의한 1개 연대전투단(RCT)의 전투참가를 즉각 승인하고, 추가로 2개 사단의 투입과 북한 해상봉쇄를 승인하는 동시에 전 세계에 미 육군 투입을 발표했다.

30일 오후에는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결정사항을 보고했고, 유엔 회원국 59개국 중에 33개국이 안보리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훗날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결정을 내리고 난 후 그동안 보낸 7일은 지금까지 재직해오면서 경험한 가장 힘들었던 일주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6.25전쟁 참전결정은 개전 6일 만에 기적처럼 신속하게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미국 내의 정치적 분위기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미군의 신속한 참전은 국제평화의 유지와 안전이라는 유엔의 목적과 목표에 기여하고, 안보리 결의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이렇게 미 지상군 참전의 역사적 결정은 30일에 결정됐고, 7월 1일 미 지상군이 한반도에 개입했다.

무엇보다도 맥아더 장군의 한국 전황에 대한 현명한 상황파악은 한국의 패망을 막은 결정적인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미군의 참전 결정은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에게 충격적인 사실이었으며, 과거 소련 · 중공과의 전쟁모의과정에서 스탈린이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우려하자 김일성이 “미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며, 있더라고 전쟁을 조기에 끝냄으로써 미군의 개입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미군의 개입으로 개전 5일 만에 평양에 대규모 공습이 단행됐고, 6일 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돼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김일성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자 지체 없이 미 제8군사령관 워커(Richard L. Walker) 중장에게 미 제24사단을 파견하도록 명령했고, 제8군사령관은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에게 선견대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B, C중대를 중심으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F Smith)를 편성했다. 스미스부대는 일본 이다츠케 비행장을 이륙해 7월 1일 08시 45분 부산에 도착했으며, 부산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날 저녁인 20시에 부산에서 기차로 출발해 7월 2일 08시에 대전에 도착했고, 처치 장군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들은 후에 오산 북방 죽미령을 지형정찰을 했다. 바로 죽미령에서 7월 5일 07시 30분 북한군과 미군과의 역사적인 첫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죽미령전투’다. 75㎜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해 T-34전차를 공격했으나 북한군은 그대로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보병이 신속히 좌우로 전개하는 보전(步戰)협동공격으로 스미스대대를 포위했다. 이 순간 당황한 미군들은 진지를 이탈해 퇴각했으며 병력 440명중 15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했고, 야포를 포함한 모든 중화기를 피탈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 적 제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李學九) 대좌는 후에 낙동강전선에서 포로가 된 후에 “그때 미군이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들은 바도 없었으며, 오산에 미군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하나의 충격이었다”고 증언했다.

 


▶️8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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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미국과 UN안보리의 신속한 전황파악·대응조치가 이뤄진 것은 기적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6> 


미국의 신속한 대응(The speedy actions of USA)과 트루먼 대통령

북한군의 남침소식은 주한 외교사절이나 특파원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미국으로 주한 미 대사관 및 무관, 군사고문단, 외신기자의 전문을 통해 전쟁발발 5시간 후인 6월 25일 09시 30분(미국 워싱턴 현지시간 24일 20시 30분)에 전달됐고, 주한 미국대사관 무쵸(John J. Muccio) 대사의 보고서는 워싱턴 현지시간 24일 21시 26분(한국시간 25일 10시 26분)에 국무성에 도착했다. 이 보고서에는 “북한의 공격은 그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공격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는 내용과 개성지역이 피탈됐다는 한국의 위기상황을 신속정확하게 보고함으로써 미국의 조치가 긴급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무쵸대사의 신속한 상황보고는 무방비상태로 기습을 당한 한국과 한국군에게 소중한 도움이 됐다는 것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긴급한 보고에 접한 미 국무성은 즉각 국방성 관계자와 협의를 거쳐 유엔(UN)에 제소키로 방침을 정하고 유엔사무총장 리(Trygve Lie)에게 통고하는 한편,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은 25일 13시 20분 (현지시간 24일 23시 20분)에 주말 휴가 중인 트루먼(Harry S. Truman)대통령에게 보고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UNSC: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를 소집요청을 했다. 당시 미국의 주요 정계지도자들은 북한의 기습남침이 유엔과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보존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위상에 대한 공산진영의 첫 도전이라고 판단해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남침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침을 제지하지 않는다면 과거 독일의 체코와 폴란드 침공을 방관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사례와 유사한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이므로 제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미국 주도의 단호한 조치를 결심했다.

 

유엔안전보장회의 2차 결의안 채택장면(1950.6.27).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8


또한 유엔도 세계평화를 파괴한 공산세력의 침략행위에 대해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이 한낱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25일이 ‘일요일’임에도 14시(한국시간 26일 03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해 북한에게 한국에 대한 침공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제82호)을 가결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한국대사 장면박사가 참관인(observer)으로 참석했다. 이 결의안이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됐음에도 공격행위를 계속하자 유엔 안보리는 27일 다시 한국이 북한의 군사행동을 격퇴하고 한반도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유엔회원국들에게 권고하는 결의안(제83호)을 가결시켜 유엔이 북한에 대한 범세계적 응징에 나선 것이다.

그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조치가 없었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발발 10시간이 경과중인 6월 25일(일) 14시(한국시간 26일(월) 04시)에 긴급히 개최될 수가 없었다. 이날 안보리(UNSC)는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제82호)을 채택해 북한에 대해 응징할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안보리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5개 상임이사국 등 총11개 국가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소련 대표가 불참해 결정적인 거부권(veto)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의안이 ‘찬성 9, 반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로 가결(可決)될 수 있었다. 5개 상임이사국 중 1개국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수결의 결과와 무관하게 부결(否決)처리되는 원칙이 있다. 만일 그 자리에 소련이 참석해 반대 1표만 행사했더라면 결의안은 부결되는 것이고, 신생국 대한민국의 운명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패망의 길로 갈 뻔했다. 다행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소련이 불참했다고 본다면 아찔한 역사적 시간이었다. 그날 소련이 불참한 것은 1950년 1월부터 자유중국(Republic of China)이 중국의 대표권과 거부권을 보유한데 대한 항의로써 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사건 가운데 있었다. 이 결의안은 유엔이 창설(1945년 10월 24일)된 후 침략전쟁을 일으킨 국가를 응징하고, 평화의 회복이라는 유엔의 첫 번째 집단안전보장 조치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결의통보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6월 27일 창동-미아리 방어선까지 진출해 수도서울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제식민지로부터 1945년 독립해 이제 5년차의 신생국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구원은 기적(miracle)과 같은 조치였다. 미국 정부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주관하는 안전보장회의(NSC)가 25일 심야인 23시(한국시간 26일 12시경)에 열려서 ‘미국이 즉각 실시해야 할 행동’을 결정했고, 이미 미 합동참모본부에 준비명령으로 하달 된 ‘제한적 군사조치’로써 “사태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반을 파견하고 탄약지원과 자국민의 철수를 보호할 목적으로 해·공군을 운영하라는 지시”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이 결과가 정식명령으로 맥아더(Douglus McArthur) 극동군사령관(FECOM)에게 하달됐다. 그런데 이 명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오기 전에 26일 03시경 맥아더 장군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달라는 항의 섞인 전화를 받았고, 맥아더 장군은 적극적인 군사조치를 약속했다는 후문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날 회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전원이 ‘한국을 구원해야한다’는 방침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미국이 ‘애치슨라인’이라는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사실과 모순됨에도 이것이 토의의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처한 전쟁 상황을 모르는 가운데 지원방법상의 이견이 있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신생국 한국이 처한 상황이 중대하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만일 그 회의에 참석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자신의 제안 선포한 ‘애치슨라인’을 고집했다면 미국의 참전은 불가할 수도 있었다.

 

<Tip>‘한국 지원’을 즉각 결심한 대한민국의 은인(Savior) 트루만 미 대통령은 누구인가?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은 미국의 제32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1945.4.12)으로 승계해 제33대 대통령(61세)이 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884년 5월 8일, 미주리주 러마에서 태어났으며, 부농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 시력이 나빠서 사관학교에 못 갔지만 시력검사표를 외워서 주 방위군에 선발된 얘기는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프랑스에 근무하다가 포병 대위로 제대했다. 6.25전쟁 발발의 보고를 최초로 받은 곳은 고향 미주리 캔사스시티에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6.25전쟁 발발 후 그의 결심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의 은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동상은 현재 임진각 공원에 세워져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원자탄투하를 결정했으며, 맥아더 장군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퇴임 후 재선을 포기했으며, 별칭으로 서방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작은 거인’이라는 의미의 “Little Big Man”이란 애칭을 얻었다. 1972년 12월 26일 서거해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만도서관 묘지에 안장돼 영면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초대주미대사의 외교적 활약

한편 서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25일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나 전쟁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이 대통령은 “국군이 보유한 탄약은 10일 이내에 다 떨어질 것이다.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에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남녀노소가 다 일어나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서라도 싸울 것이다. 충분한 탄약이 있다면 우리 국민과 군의 사기는 더욱 오를 것”이라고 탄약지원을 특별히 요청했다. 면담 후 25일 13시경 곧 바로 워싱턴에 있는 주미대사관 장면 대사를 호출해 자력으로 북한 남침을 저지하기가 어렵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미국 정부의 원조를 요청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조치는 탁월한 판단으로 미국에서의 독립활동에서 쌓은 국제적 인식이 빛나는 지도력이었다. 이에 장면 대사는 미국의 상 · 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했고, 이때 미국정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요청 소식을 통보받았으며, 곧 바로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6월 26일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했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해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초대 주미대사 장면의 역할은 놀라운 구국의 외교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서울 주재 유엔한국위원단(UNCOK :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도 25일 14시~18시에 회의를 갖고 대응방책을 논의 후에 21시 중앙방송을 통해 북한군의 즉각적인 군사행동 중지와 38도선으로 철수를 요구하고,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25일 24시경(워싱턴 현지시간 25일 11시)에 리 사무총장에게 도착했다.

한편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25일 09시 25분에 주한 미 대사관 무관 및 연락장교단으로부터 기습남침보고를 받았으며, 21시 35분(워싱턴 현지시간 25일 10시 35분) 한반도 전황을 상세히 요약한 상황보고서에 “한국으로 탄약수송이 우선 조치돼야 하며, 예비조치로써 제7함대를 한국해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건의한다”고 미 육군성에 접수시켰다. 맥아더 장군은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어떠한 작전에 관한 임무도 부여받지 않았던 상태로서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이것은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에 잘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과 친분이 작용한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북한이 6월 26일 ‘유엔안보리 결의(제82호)’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하자 26일 오후 9시(한국시간 27일 오전 10시)에 2차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어서 미 해공군에게 38도선 이남의 북한군 부대 · 전차 · 포병에 대한 공격을 허가하고, 한국군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제공한다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미국은 ‘유엔안보리 결의(제83호)’에 따라 ‘7월 1일’ 미 지상군을 참전시켰다. 그리고 유엔군(전투부대 파견 16개국, 의료부대 파견 5개국)도 이 결의안에 근거해 지원됐다. 드디어 유엔군사령부(UNC : United Nations Command)가 결성된 것이다.


주미 초대대사 장면이 유엔사무총장 리(Lie)를 만나고 있다. 1950년 6월26일 장면대사는 유엔안보리에 참석해 남침상황과 한국에 대한 유엔의 지원을 호소했다. (제공: UPI) ⓒ천지일보 2020.6.18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신속한 한국 전황 파악조치

그 당시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비전투요원(noncombatant)들의 철수작전 시행과 더불어 해공군의 지원 하에 한국군에 대한 탄약지원을 우선적으로 서둘렀다. 실시간으로 전투상황을 파악해 지휘조치를 하기 위해서 6월 27일 처치(John H. Church)준장을 단장으로하는 조사반(Survey Party)구성했는데, 이날 하달된 명령에 의해 이 조직을 전방지휘연락단(ADCOM : Advance Command and Liaison Group in Korea)로 명명해 수원으로 전개했다. 처치 준장은 수원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을 만나 방어 작전을 조언하는 등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지원 사항을 파악하고 복귀했다. 그리고 처치 준장은 전반적인 전황을 판단한 결과 미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신속히 보고했다. 처치 준장의 판단은 한반도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맥아더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고였기에 한국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훗날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른 아침, 나의 침실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당직장교가 ‘장군님! 오늘 아침 04시에 대규모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해 왔습니다….’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9년 전 일요일 아침, 같은 시각에 나는 마닐라에서 똑같은 전화벨 때문에 일어나야했다….(중략)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똑같은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 리가 없다. 그런데 이때 알몬드 참모장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지시하실 사항은…(후략).”

이것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됐던 ‘맥아더 회고록’의 일부이다. 맥아더장군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전쟁이 현실적으로 발발한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미국의 한국에서의 고의적인 ‘전쟁유발설’에 대한 명백한 반증(反證)이 되기도 하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아직도 사회일부에서 ‘6.25전쟁이 북한의 명백한 불법남침이 아니라 미국의 책동이었다’는 등의 억지주장을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7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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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한강교 조기폭파는 국군의 와해자멸과 피난민의 희생을 초래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5>

한강교의 폭파작전(The explosion Operations of Han River Bridge)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4사단이 서울을 향해 신속하게 진격하던 27일 서울 북방에서의 국군의 창동방어선이 무너지고, 28일 01시경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돌파하자 서울의 최후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군 제4사단 제18연대를 지원하던 제105탱크여단의 서울시내 진입은 당시 군 지휘부가 ‘수도 서울 철수’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이었다.

이 무렵 28일 02시경 채병덕 총참모장은 육본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 전차가 미아리를 넘어서 서울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급보를 받고,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즉시 한강에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가서 실시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육본(당시엔 현 삼각지, 전쟁기념관 자리)을 이탈했다.

그 시간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한강교 폭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서 김백일 대령(육본 참모부장)에게 최후방어선 병력과 시가지 방어부대가 후퇴명령이 없어서 아직 철수를 못했으니 다리를 먼저 끊으면 안 된다, 병력이 철수한 다음에 폭파하자고 요청했고 김백일 대령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즉시 가서 한강교 폭파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육본과 폭파지휘소간에 통신선이 가설돼 있지 않아서 작전국장 장 대령이 직접 노량진에 위치한 남한강파출소로 갔지만 차량과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막혔고, 중지도 부근에 도달했을 때 한강대교는 폭파되고 말았다. 이 시간이 28일 02시 40분경이었다.

그 당시 ‘한강교의 폭파작전’은 27일 11시에 채병덕 총참모장이 육군본부 참모 및 재경부대장회의를 긴급히 열어서 육본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인도교와 철교의 폭파계획을 발표하면서 거론됐다. 27일 12시경부터 육군본부를 시흥의 육군보병학교로 이동했다가 맥아더 원수의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연락단(ADCOM)이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미군 고문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다시 16시에 육군본부를 시흥에서 용산(삼각지)으로 이동시켜서 서울 최후방어선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처럼 군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었으니 전후방 각급 부대들에 대한 적시적절한 지휘결심과 상황조치 등 일련의 체계적인 군지휘가 이뤄질 수 없었으며, 사단장급 현지 지휘관들에 의한 독자적 판단으로 국군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군지휘부가 마비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국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지 않았던 것만도 그나마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수 있었던 비참한 패전상황의 3일간 이었다.

 

6월 28일 02시에 폭파된 한강인도교.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6.25전쟁 초기 전투국면에서 최악의 실책은 바로 ‘한강교 조기폭파’였으며, 이 오판으로 국군 전투부대의 약 50%가 와해(瓦解)돼 한강도하를 해야 했다. 따라서 전쟁초기 국가위기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헛소리와 우유부단한 채병덕 총참모장의 무능이 저지른 직무유기(職務遺棄)의 범죄(犯罪)라고 할 수 있다.

한강교량의 폭파준비는 이미 26일 저녁에 의정부가 점령되고 창동과 미아리로 철수하던 26일 야간에 채 총장최 공병감에게 “임진강교의 폭파실패를 상기시키면서 한강교 폭파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착수가 됐다.

최 공병감은 지시를 받고 27일 09시에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한강교 폭파준비명령을 하달했고, 12시~15시 30분까지 한강교의 5개 교량에 7000파운드의 폭약설치를 완료했다.

최 공병감채 총참모장으로부터 적의 서울시내 진입 2시간 전에 파괴하도록 지시받았으며, 이때 상황으로는 27일 16시를 폭파예정시간으로 계획해 폭파준비를 했던 것인데, 16시경 시흥으로 철수했던 육군본부가 다시 용산(삼각지)으로 복귀하면서 폭파장치를 제거했고 비상대기를 시켰다.

그러나 창동-미아리방어선 전투가 악화일로를 치닫는 상황 하에서 28일 02시경 다시 폭파 준비하라는 채 총장의 전화명령을 받게 되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제거한 폭약을 재장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28일 02시 40분경 최 공병감엄 공병학교장에게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강교상에는 밀려드는 피난인 인파와 차량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며, 마침 이시영 부통령이 탄 차량일행이 지나고 있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작전명령이 떨어진 이상 지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현장에 있었던 엄홍섭 공병학교장은 장약점화를 지시했다. 당시 육본과 폭파지휘소간에 통신선이 가설돼 있지 않아서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직접 노량진에 위치한 남한강파출소로 갔지만 차량과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막혀서 그가 중지도 부근에 도달했을 때 한강대교는 폭파되고 말았다.

비극적인 상황은 당시 한강(인도)교 상에는 500~800명 가량의 피난민이 있었으며, 차량은 50여대가 있던 채로 폭파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작전의 지휘계통은 총참모장(채병덕 소장)-참모부장(김백일 대령)-공병감(최창식 대령)-공병학교장(엄홍섭 중령)으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Tip>한강교 조기폭파 책임자는 누구인가?

당시 한강에는 한강(인도)교, 광진교,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5개 교량이 전부였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에 의해 28일 02시 40분경에 한강교를 폭파했다. 전쟁 중에도 한강교 조기폭파에 따른 국민적 비판여론이 들끓자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1950년 9월15일 최 공병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후 9월 21일 총살 처형됐다. 이 사고의 책임은 폭파명령을 하달한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있음이 명확하나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최창식 공병감을 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한 국가범죄로 종결됐다.

그 후 14년 만에 최 대령 부인의 재심청구로 1964년 10월 23일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재심을 했고, 최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해 명예를 회복시켰다. 실질적인 지휘책임자로 볼 수 있는 채 총참모장은 재판이 있기 전에 1950년 7월 27일 진주 하동전투에서 적에게 기습을 받아 향년 36세로 죽었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던 9월 21일에 왜 서둘러 군법회의를 열어 무리한 사유로 최 공병감을 처형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한강교 조기폭파로 강북 투입 5개 사단의 와해


채병덕 총참모장의 조급한 한강교 폭파결정으로 인해 강북에 투입된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돼 국군 총병력의 46%인 4만 4000여명(제1, 7사단, 예비 제2, 3, 5사단 포함)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정부와 군지휘부는 전면전을 대비하지 않았으며, 전시 철수계획 등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로 북한군의 남침을 받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철수와 국민에 대한 소개령(疏開令)이 불가했다.

특히 ‘서울 사수론’에 집착했던 채 총참모장의 어리석은 과욕은 후방의 제2, 제3, 제5사단까지 육군 작전명령 제93호(1950년 6월 26일 08시) 및 제98호(1950년 6월 27일 17시)에 서울로 이동을 명령했다. 이 명령으로 국군의 주력부대가 한강이북지역에 집결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철수명령도 없이 육군본부가 철수와 복귀를 반복하는 등 그 혼란상은 죽음을 무릅쓰고 방어하는 최후방어선의 국군장병을 비교하면 군법회부감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전투장비면에서 열악한 국군부대의 전투부대와 전투지원부대의 중장비와 공용화기의 70%를 버리고 패주해야했다.

이처럼 무능한 한 명의 장군(채병덕 총참모장)이 저지르는 오판(誤判)이 때로는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서울함락’과 ‘한강교 조기폭파사건’은 말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이 군의 호언장담을 믿고 피난의 시기를 놓쳐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간 공산 치하에서 온갖 고초와 죽임을 당하며 견뎌야 했었고, 정부와 군지휘부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극(極)에 달했다.


 

뗏목(raft)으로 한강을 도하하는 국군장병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11


 

이후 이촌동 한강대교 입구에 북한군 전차가 출현한 것은 한강교가 폭파한지 9시간이 지난 28일 밤 10시경 이었다니 조금만 더 군지휘부(채병덕 총참모장)가 침착했어도 국군의 철수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어서 28일 04시경에 광진교도 폭파됐고,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가 불발로 그쳐서 다시 점화했으나 철교의 일부분만 손상됐을 뿐 절단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이 다리는 북한군의 도하공격에 이용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반격이 개시되고 한강도하 북진공격 시에는 끊어진 한강교 옆으로 미 공병부대가 부교와 도보교를 설치해 군사작전을 도왔고, 1951년 1.4 후퇴 시에는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부교와 도보교를 통해서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1951년 6월 미 공병부대가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복구해 정상화시켰다.

지금도 한강철교를 지나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교각에 6.25전시 피탄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반면에 6.25전쟁기간 중 북한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 시 대동강교를 시기적절하게 폭파함으로써 공격을 지연시켰고, 북한군의 부대와 장비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6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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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수도 서울의 함락은 결코 국군이 손쉽게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4>

 

서울의 함락(Fall in Seoul)

한 나라가 개전한 이래로 3일 만에 수도가 함락됐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 전투에서 국군의 방어실책이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되면서 당시 군의 용전분투(勇戰奮鬪)가 불명예스럽게 비하(卑下)되고 있는데 국군은 결코 쉽게 수도 서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04시에 38도선에서 일제히 기습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 자체가 당시 국군의 전력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군의 전투력이 산술적인 수치대비로 측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북한군 대비 병력면에서 국군 10만 5752명 대 북한군 19만 8380명으로 약 1대 2의 절대 열세였고, 주요장비 보유수에서도 국군은 전차가 없는 반면에 북한군 242대를 보유했다. 국군은 곡사포 91문에 불과한데 북한군은 SU-76 자주포를 포함한 곡사포가 728문으로 1대 8의 절대 열세였으니 초기 기습을 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한 것이다.

병력의 전투 경험 면에서도 북한군은 중국 내전에 참전한 동북의용군 3만여명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전선에서 싸운 한인계 소련군 5000여명을 편입시켜서 실전경험을 쌓은 전투원이 무려 1/3이상을 보유한 정예군이었다. 반면에 국군의 정규전 경험 장병은 극소수의 일본군 출신자들뿐이고, 대부분 병력들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비정규전 경험 정도였으니 훈련수준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훈련수준 면에서도 북한군은 소련 측 별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기초적인 전투훈련부터 사단단위 야외기동훈련을 포함한 보·전·포 협동훈련과 대부대 합동훈련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반면에 국군은 북한군이 남파한 공비토벌작전에 장기간 투입돼 계획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할 틈도 없었고, 소부대 전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현저한 전투력의 차이는 결국 현대 전장사상 최단기간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긴 불명예를 갖게 됐으나, 전사기록을 고찰해본다면 국군의 방어전투는 죽음을 무릅쓰고 처절할 정도로 용감하게 최선의 방어전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정부의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의 함락이 곧 전쟁의 승패이상의 국가흥망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수(死守)를 해서라도 지키고자했었다.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의지를 수용해야했던 국군 지휘부는 전략적인 대응보다는 임기응변적인 전술로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 초기 큰 실책이었다. 결국은 군 지휘부가 전투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우왕좌왕하다가 속수무책 북한군의 초기의 막강한 전력에 서울을 개전 3일 만에 내준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국군은 그 불리한 상황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고자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의정부가 함락된 1950년 6월 26일 저녁 무렵,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을 통합해 서울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서울북방지역에서의 패전에 당황한 국군은 제2사단과 제5사단 및 수도사단을 투입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대를 투입해도 대전차무기가 없었고, 적보다 우세한 포병도 없었으며, 부대의 훈련수준이나 준비된 진지도 없었기 때문에 ‘파죽지세(破竹之勢)’의 북한군을 저지할 능력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Tip>수도 서울 함락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능력이 없는 자가 국방장관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리에 앉으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가 가장 책임이 크다고 전사는 평가한다. 그는 1910년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신채호아래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3년 오송상선학교 항해과를 수료 후 중국군 해군소위로 임명돼 중국 해군본부에서 근무했다.

그 후 1923년 독립자금전달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25년 영국으로 건너가 해양대학에서 수학 후 1등 항해사가 됐다. 해방 후 1948년 귀국해 1949년 제2대 내무장관을 거쳐 1949년 3월 21일 제2대 국방장관에 임명돼 6.25전쟁을 맞게 됐다. 그의 경력으로는 군을 통솔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가 1950년 4월 21일 국무총리 서리까지 겸하게 됐으니 기가 막힌 관운(官運)이다. 육군참모총장에 채병덕 소장을 재임명했고, 내무장관에 천거한 김효석은 훗날 ‘위장된 공산주의자’였다고 중앙정보부에서 파악됐다. 결국 반정부 발언으로 1950년 2월 해임됐으니 그동안 장관자리에 앉아서 수많은 비밀정보를 북한으로 넘겼다고 추정되는 자이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됐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는 허언(虛言)은 유명하다.

그리고 1950년 5월 10일 그의 외신기자회견에서 호언장담한 것은 더 유명한 일화다. “북한이 군사력강화에 힘쓰고 있고, 3만명 모집했으며, 비행기와 탱크도 증강하고 있다. 그리고 38선으로 이동 중에 있다. 우리는 잘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국군을 신뢰하기 바란다.”고 큰 소리를 쳤으나 결과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만약에 그가 북한군의 동향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관점에서 대비책을 정확히 지시·감독했다면 국군의 초기전투대비태세가 달랐을 것이다.

바로 신성모가 6.25전쟁 초기 전투패배와 서울함락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무능하고 무책임한 자를 중용한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 부산 태종대 산책로에 있는 신성모에 대한 추모조형물과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이 지난 2009년 ‘해기사명예의 전당’에 둔 신성모의 흉상 조형물도 6.25전쟁 초기대비부실책임을 물어서 철거를 검토해야 한다.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북한군의 기습공격이후로 1950년 6월 25일 14시에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했고, 채병덕 총참모장의 격퇴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믿고 촌각을 다투는 비상상황 하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 정부의 또 하나의 큰 실책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에서는 국민과 시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거짓된 전황을 보도함으로써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방송에서는 “옹진의 제17연대가 해주시를 점령했다(이때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해 상륙 중에 있었다)” “국군의 일부는 38선에서 20㎞까지 북진했다”는 등의 무책임한 전황보도를 했다. 여기에 북한공군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서 “국군이 북침했기 때문에 보복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에 서울시민들은 혼란을 더 했다. 6.25전쟁의 책임론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론’에 바로 이 허위방송이 이용되는 자충수가 됐다. 더욱이 6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중앙방송을 통해서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총반격전을 개시했는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라고 생방송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국민들은 이것을 진짜로 믿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신 나간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아닐 수가 없다.

1950년 6월 26일 심야에 소집된 국방수뇌연석회의에서 정부는 ‘결사항전’을 결의했고, 27일 01시 중앙청에서는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돼 정부의 수원 천도(遷都)를 결정했지만 서울시민에 대한 적절한 소개대책 논의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27일 심야에 개최된 비상국회(01시)에서는 ‘수도사수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27일 03시경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그 후 06시에 정부가 수도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위기를 알게 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서울을 떠나야한다는 보고를 받고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라고 했으나 국가원수의 안위(安危)가 곧 국가의 안위라는 설득을 해서 남하를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각료들의 과잉경호로 27일 04시 서울역을 출발해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했으나 수원이 아닌 사실을 알고 즉시 돌리라고 지시해 16시 30분에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집무하던 이 대통령은 29일 무초 주한미대사의 승용차로 수원에 올라와 전선시찰을 위해 방한한 맥아더 원수를 영접하고 대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7일 05시에 열렸던 국방수뇌회의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이 전황이 불리하다는 전황을 보고하고 서울포기를 언급했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고수를 결심했으나 전방으로부터 27일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27일 06시경 공식적으로 정부의 수원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시민들과 국민들이 비로소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게 했으나 이때는 너무 늦어서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게 됐다. 그리고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기습효과의 극대화를 달성한 것이었다.


<Tip> 북한군은 서울을 언제 진입했는가?

이 문제는 어느 방어선까지가 서울방어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미아리 삼거리를 지나 길음교를 좌우로 잇는 방어선을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간주할 때 1950년 6월 28일 01시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각에 북한군 전차 2대가 고개를 넘자 미아리 방어선은 무너졌으며, 일제히 한강 이남으로 철수를 했다. 또한 국군은 서울사수를 포기하고 02시30분경 마침내 한강교를 폭파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6월25일 04시 기습공격해 6월28일 01시까지 만 2일 21시간 만에 서울에 진입한 것이다.

 

 

창동 방어선 전투

6월 26일 저녁 의정부의 함락으로 후퇴한 국군은 창동일대를 중심으로 도봉산(우의동)-수락산(상계동)선을 연하는 방어선을 형성하고 철수하는 부대를 수습했다. 의정부 남쪽 백석천일대에 배치된 엄호부대인 국군 제2사단 25연대가 밀고 내려오는 적 제3사단 예하 전차 1대를 2.36㏑(인치)로켓포로 격파하고, 이날 밤 제25연대 제11중대 전차특공조가 적 전차 2대를 파괴하는 등 강력히 저지했다. 이런 저항에 적은 공격을 중단하고 퇴각했다가 다음날(6월 27일) 새벽에 공격을 재개했다.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는 제7사단 제1,제3,제9연대와 제2사단 제5,제16,제25연대 및 제3사단 제22연대의 잔여병력을 수습해 총 6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우측방 태능지역 불암산에는 제9연대 철수 병력이,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92고지에는 내촌에서 물러난 생도대대가 배치돼서 결전을 준비했다. 92고지전투는 육사생도 1기와 2기가 육군본부 출동명령에 따라 전투부대로 급편 돼 포천전투에 투입됐다가 26일 18시경 북한군 전차출현으로 진지가 돌파돼 후퇴, 육사 내 92고지 지역에서 방어전투를 치루고 86명의 생도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생도들이 철수를 거부하고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활동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들은 생도1기(10명), 생도2기(3명), 7사단 소속병사(7명)로 구성돼 ‘불암산호랑이’라고 불리며 맹활약을 하다가 1명 외 전원 전사했다.

27일 10시경 각 부대가 창동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40여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공격을 받아 실탄이 고갈 될 때까지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적의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미아리로 후퇴하게 됐다.


 

서울시청 앞을 지나는 북한군 T-34전차와 놀라는 서울시민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6.4

 

 

 

미아리 방어선 전투


6월 27일 10시에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제20연대 제1대대를 171고지 동쪽, 제1연대(대대규모 수준)를 길음교 북쪽 공동묘지, 제15연대 제2대대를 미아리고개 132고지에 배치했다. 그리고 27일 12시에 의정부에서 철수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혼성연대를 164고지 북동쪽, 제8연대 제2대대를 회기동 143고지 및 중랑교 남쪽 106고지에 배치하고 제16연대(대대규모 수준)를 예비로 돈암초교에 배비했다.

이와 같이 27일 오후까지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이 배치됐고,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해 재경 각 부대, 육사생도대대 등 서울 사수를 위한 비장한 각오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서울 사수를 위해 싸웠다. 북한군은 공격기세를 몰아 27일 19시에 폭우 속에서 수유리 방면에서 미아리고개로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는 사력을 다해 분전했으나 적 전차를 저지할 수가 없었지만, 105미리 곡사포 6문과 57㎜ 대전차포 8문의 지원화력을 집중운영해 적 선두전차를 격퇴했다. 그러나 24시경 다시 폭우 속에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기습적으로 북한군 제105탱크사단의 전차들이 진입하면서 국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는 서울방어의 최후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김순 대위(제15연대 제5중대장)가 지휘하는 결사대가 전차에 육탄공격을 감행해 전원 전사했고, 육박전에서도 국군은 분전을 다해 적을 저지했다. 그러나 중과부족으로 북한군에 밀리면서 최초 적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돌파한 시간은 28일 01시경 이었고, 서울의 중심부에 돌입한 것은 10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30분경 이었다. 이렇게 지연이 된 것은 수도경비사령부와 제1공병단의 일부 병력의 죽음을 무릅쓴 시가전이 있었고, 국군 제18연대 1대대와 제5연대 제3대대의 전차특공대가 벌인 육탄공격, 남산으로 집결한 국군장병들로 구성된 일명 ‘백호부대(부대장 이용문 대령)’의 유격전, 동숭동 서울대병원에 침입한 북한군을 저지하다가 1개 경비소대와 입원부상병 80명이 전원 전사하고 학살당하는 비통한 전투가 산발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8일 한밤중이 돼서야 북한은 서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도 서울은 개전 이래 3일 만에 적의 수중에 점령이 됐지만 결코 국군이 쉽게 내어준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적을 저지했으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무모한 저항이었다. 무모한 줄 알면서도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장병이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구치소에 구금된 정치범을 물론 죄수들까지 모두 석방했다. 김일성은 28일 서울점령의 축하연설을 했고, 인민위원회를 설치해 이승엽을 임명했다. 북한군은 당초 남침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국군 제6사단의 ‘춘천대첩’으로 국군 주력부대 대 포위 기동에 실패했고, 남로당원들의 인민봉기도 없었으며 국군과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초기단계의 차질을 빚었다.

 


▶️5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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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국군 제6사단의 춘천지역 전투는 軍·警·學·民의 제2의 행주대첩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3>

구국의 춘천대첩(春川大捷)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제7연대를 춘천,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사단이 책임지는 광정면의 방어정면은 적목리(현 경기도 가평군 북면)-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까지 84㎞에 이르렀다.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조공으로 예상되는 양구-춘천방면에 1개 대대를, 그리고 화천-가평 접근로에 2개 중대를 배치해 진지를 강화했다. 이 강원도 중동부 공격로를 택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임무는 춘천과 가평을 신속히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에서 조공으로 진출해 서울 남부와 수원방면으로 대우회포위기동작전(大迂廻包圍機動作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Tip>대첩(大捷)의 의미는?

대첩은 국어사전적 의미가 ‘크게 이김. 대승(大勝)’으로 영어로는 ‘A sweeping victory’로 표기한다. 전쟁 중 전투에서 아군이 적을 크게 이겼을 때 쓰는 명칭으로 지역 명에 붙여 쓴다. 대첩은 국가의 운명과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전투의 대승을 칭한다. 6.25전쟁 개전일 ‘춘천대첩(春川大捷)’은 백척간두의 국가의 운명을 구한 구국의 대승이었다. 춘천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패망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대첩으로 명명된 전투는 살수대첩(612년), 귀주대첩(1019년),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대첩(1592년), 행주대첩(1593년), 명량대첩(1597), 일제시대-청산리대첩(1920년)이 있었다.


이 작전의 입증은 인민군 총사령부로부터 하달된 정찰명령 제1호(1950.6.18.)와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서 확인된다. 정찰명령 제1호의 내용에는 “공격이 개시되면…(중략)…서울-춘천 철로와 도로상의 이동상황을 파악한다…. (중략)…정찰을 통해 서울-수원-이천 도로상의 이동과 곡수, 수원, 이천부근의 적 활동을 파악한다”고 명령이 하달돼 있었다. 제2사단 전투명령 제1호에도 “사단은 최후임무로 춘천을 당일 내로 점령한 후 가평, 강촌방향으로 진출한다”고 명시해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임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국군은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육군본부가 포로가 돼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후평가이기도하다. 그런데 이런 북한군의 전략전술기도를 초전에 격파한 것이 국군 제6사단이 버텨준 춘천지역전투의 5일의 기적이었다.


6.25전쟁 개전 당시 국군 제6사단 주요지휘관.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개전 당일 25일 소양강을 도하해 춘천을 점령하고자 했던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축선으로, 제12사단을 인제에서 신남-홍천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했다. 화천-춘천 접근로에는 모진교(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됨)가 있었는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사전 폭파에 실패해 SU-76자주대전차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봉의산과 우두산일대를 주저항선으로 구축했다. 이 무렵 제7연대 본부소속 5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沈鎰)중위가 옥산포로 접근하는 적 SU-76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 이 전과가 전파되자 제7연대 장병들은 적 T-34전차와 SU-76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지점에는 심일 중위(후에 소령 추서/육사8기)의 전승기념비가 제막돼있어 그 날의 영웅적인 전투를 추모하고 있다. 육사교정에도 심일 소령 기념비가 있다.

춘천을 점령하려고 공격하던 북한군 제2사단은 소양강 백사장을 집결대형으로 공격해오다가 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105㎜ 견인포)의 집중포격으로 소양강이 피로 물들 정도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은 이야기는 북한군이 아군의 포격에 대량살상이 되면서도 부대별로 오와 열을 맞춰서 백사장 개활지를 정면으로 무모한 공격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역골로 퇴각했다. 이 전투를 봉의산 전술지휘소에서 지켜보던 국군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적의 작전지휘능력과 전투기량의 수준을 갈파하고 춘천을 사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아군의 105㎜견인포 훈련장면. (출처: 국방일보) ⓒ천지일보 2020.5.28

 

한마디로 이 혈전은 포병전투였다. 병력의 부족으로 포탄을 공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춘천방직공장 여직공들과 춘천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손에 포탄을 들고, 시민들이 지게에 지고 포탄을 운반해 주는 군(軍)·경(警)·민(民)·학(學)의 총력전으로 싸운 춘천전투는 구국(救國)의 도시라는 명예를 남겼다.

특히 강원도 경찰의 참전과 군경합동작전은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졌던 점도 춘천전투의 비사(秘史)이다. 경찰국 경비계장 손계천 경감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는 선후배간으로 평소에 친밀한 유대를 가졌으며, 춘천역 뒤 소양강 제방에 춘천서 병력과 강원경찰학교 교육 중인 신임순경 중대가 배치됐다. 후평동으로 우회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경찰 9대대를 배치했고 전투에 참가해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처럼 춘천전투는 6.25전쟁에서 첫 군경합동작전의 승리로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전투가 중동부전선의 결전장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예비연대 제19연대를 춘천으로 이동 배치했다. 26일 아침 북한군이 재공격을 위해 역골-옥산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파쇄(破碎)공격을 해 격퇴시켰고, 14시경에는 북한군 제6연대가 초월(超越)공격으로 옥산포-마전리-춘천방면으로 투입했으나 전날 아군 제19연대가 증원된 사실을 모르는 북한군은 포병의 집중포화에 걸려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그럼에도 적은 제2, 제3제대를 같은 방향으로 병력투입을 했으나 아군의 집중포격에 소양강 도하는 좌절됐다.

27일 아침 북한군 제2군단장은 제2사단의 돈좌(頓挫)상황에 따라 제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춘천지역으로 증원시켰다. 10시부터 T-34전차와 SU-76자주포를 앞세워 봉의산 방면으로 집중공격을 재개했으나 국군 제7연대가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다. 이 무렵 그동안 두절됐던 육군본부와 유선망이 소통됐다. 육본은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遲延戰)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됐다. 이때서야 김종오 사단장은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오후에 북한군이 전차로 소양교를 돌파하면서 춘천 동북방 원진나루터 쪽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국군 제7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7시 30분경 춘천을 포기하고 원창고개 방향으로 철수했고, 18시경 북한군이 춘천시내를 진입했다.

28일에는 춘천에서 철수한 제7연대는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하고, 연대주력은 홍천북쪽 사현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제7연대는 격전의 와중에서도 건제를 유지한 채 질서 있게 계획된 철수작전을 완료해 전투력을 보존했다. 국군 제6사단은 비록 춘천을 상실했지만 제7연대와 제2연대의 원창고개-말고개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투에서도 성공했다.

29일 오전 북한군은 오전 2개 연대규모로 원창고개를 재공격했다. 제7연대 제2대대가 격퇴했으나 11시경 백기를 든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서 철수를 했고, 홍천북쪽 사현에 있는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오후에는 홍천-원주방향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하게 됐다.

춘천지역 전투에서 압도적인 북한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장교 8명을 포함한 200여명 전사와 전상 353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인 반면에 북한군은 제2사단 포병사령관을 포함한 6572명의 전사상자를 내었고, 122명의 포로가 잡혔으며 7대의 SU-76자주포와 18대의 전차가 손실되는 대패를 당했다.

北, 춘천 통해 가평·강촌 진출 계획
SU-76자주대전차포 앞세워 진격
심일 소령, 자주포 격파로 사기 올려
 
포병대대, 소양강 백사장서 큰 승리
방직공장 여공·학생·시민들 나서 
손에 들고 지게 지고, 포탄 공급 도와 

제6사단, 5일간 춘천 철옹성 방어  
‘한강방어선’ 형성 시간적 여유 벌어


북한군의 ‘선제타격계획’의 제1단계는 제2군단은 25일 내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방면으로 신속기동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위망 내의 국군주력을 섬멸하는 ‘대우회포위기동작전’으로 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전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의 춘천지역전투는 서부전선과 달리 국군 제6사단이 철옹성같이 춘천지역을 방어하고 북한군 제2사단을 궤멸시킬 정도의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살아있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신(神)이 내린 명장이었다.

반면에 서울을 28일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가 3일간 지체하는 전략적 과오를 한 것은 동부전선의 춘천전투의 결과가 한강도하라는 작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춘천전투의 성공으로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초기 1단계 작전이 실패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국군 제6사단의 전승이었으며, 당시 북한군에게도 국군이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일침(一鍼)을 주었다. 지난 2000년도에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춘천시 입구 소양강변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건립돼 그날의 구국투혼을 기념하고 있다. 특히 조형물에는 장병과 함께 싸운 경찰, 학생, 여직공, 시민이 표현된 민관군경의 총력전이었던 춘천대첩(春川大捷)을 담아 호국안보의 중요성을 보였고, 이에 이곳은 구국의 도시 춘천의 명소가 돼있다.

춘천대첩기념 주모형물과 춘천대첩 헌정시.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8


동해안지역전투

국군 제8사단이 방어책임진 동해안지역은 제10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집결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의 책임지역은 제6사단과 협조점인 진흑동(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서 동해안 기사문리(현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는 26㎞로 비교적 작았지만 해안선을 따라 종심으로 강릉까지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6월 중순에 침투한 북한의 무장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차출해 오대산과 계방산 지역에 투입했기 때문에 유사시 동원병력은 4개 대대에 불과했다.

국군 제8사단 정면의 북한군은 제5사단 제10연대를 제1경비여단에 배속시켜 주력으로 동해가도(7번국도) 북쪽에서 국군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게 하고,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로 국군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는 가운데 일부 병력을 북진시켜서 강릉 연곡천 일대에서 국군 제10연대의 후방을 협공하려고 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 제10연대는 주저항선을 화상천에서 연곡천으로 물렸고, 제21연대는 게릴라 소탕작전을 위해 광활한 지역에 분산 배치됐다가 동해안에 상륙한 북한군을 색출 격멸했다.

국군 제8사단은 연곡천과 사천일대에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방어해 북한군의 초기전투 작전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27일 오후에 대관령으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재편성(再編成)을 마치고 28일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을 감행해 강릉부근까지 진출하던 중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반격을 중단하고 대관령을 철수한 후 대화를 거쳐 제천으로 이동했다.

동해안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입장에선 국군 제8사단이 인접 제6사단으로 증원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강릉이남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국군 제8사단을 양분하고 전술적으로 혼란을 주기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용전분투하는 저항으로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효과가 있었다.

▶️4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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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야기]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는 국군의 처절한 지연전이었다

 

올해(2020년)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2> 

선전포고 없는 기습(surprise attack)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8도선에서의 초기 전투를 고찰해 봐야한다. 6월 25일부터 30일까지의 전투를 통상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라고 구분한다.초기전투를 서부지역 옹진반도와 개성·문산지역전투, 중서부지역인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전투 그리고 동부지역인 동해안(양양)지역전투로 5개 지역전투로 구분한다. 따라서 개전초기 기습을 당한 국군은 전 전선에서 결사적인 방어전투를 전개해 지연전을 했다.

북한군은 제1단계 작전목표인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을 달성하기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이 협조된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의 경기도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공격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에 공격을 집중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양양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따라서 6.25전쟁의 38도선 전선 상의 초기전투는 옹진반도, 개성-문산지역전투,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춘천-홍천지역전투, 동해안지역전투를 중심으로 5개 축선에서 동시다발 기습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우선 북한군은 선전포고가 없이 ‘폭풍’이라는 암호명으로 기습을 했고,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8.15광복절 전까지 남한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은 허구이고, 사전에 계획된 기습공격이었으며, 서부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38도선 전 전전에서 공격한 전면전(total war)이었다. 북한군은 남침작전 계획에 참여한 당과 군부의 고위급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군관과 인민군 전사들은 통상적인 부대이동과 훈련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극비리에 전쟁이 준비됐던 것이다.

반면에 국군은 초기 38도선 방어에 실패한 원인이 북한군의 동향파악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군의 적정 파악과 대처에 혼선과 태만이 혼재된 안일한 대비태세가 문제가 됐고, 장병의 훈련미흡, 경계소홀, 부적절한 인사이동명령 등 군의 총체적인 대비 실패였다. 특히 비상경계령을 유지해오다가 북한군의 남침개시 이틀 전 6월 23일 자정부터 45일간 지속해오던 ‘경계강화령’을 해제했다. 해제한 다음 날이 24일 토요일이었고, 전군에서 사병들이 농번기 휴가에다가 외출, 외박으로 병력의 3분의 1이 병영을 비운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25일 새벽 04시에 남침(南侵)을 맞은 것이다.

초기전투에서 기습을 당한 국군은 병력수와 무기장비면에서 절대 열세였었고, T-34 전차 150대와 장갑차 54대를 앞세우고 우세한 포병화력으로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에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결국은 3일 만에 서울까지 뚫리게 된 이유는 북한군의 T-34전차의 위력 때문이라고 해도 된다.

 

6.25전쟁 발발을 보도한 내외신 언론.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옹진반도 지역전투

황해도 옹진반도는 인천에서 90㎞ 거리에 있고, 동·서·남 3면이 모두 바다에 접해있는 반도지역이다. 38도선이 지나는 전투정면이 45㎞라는 광정면은 육본직할 1개 연대(독립 제17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옹진부근에 배치해 후방으로 바다에 연하는 7~8㎞의 종심을 가진 배수지진(背水之陣)의 전투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의 기습을 받고 주저항선이 오후 1시경 동서로 양분되자 지연전을 전개했지만 결국 26일 오전 해군 제1정대와 민간선박편으로 강요된 철수를 했다.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국군 제17연대는 27~28일 사이에 인천을 경유, 수원으로 집결해 육군본부의 예비부대가 됐다.


암호명 ‘폭풍’ 북한군 기습 공격

5개 축선서 동시다발적 공격

8.15 전에 남한 무력 점령 목표

초기 기습에 국군 결사적 방어전

 

국군, 北 동향파악 실패가 결정적

남침 2일 전 경계강화령 해제

휴가·외출·외박에 병력 1/3 부재

T-34전차에 3일 만에 서울 뺏겨


 

북한군 전면남침도 및 국군 방어배치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개성-문산 지역전투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접근로에는 국군 제1사단이 청단에서부터 고랑포까지 약94㎞의 광정면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1사단은 제12연대와 제13연대가 전방에 배치됐고, 예비인 제11연대가 수색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개성-문산지역으로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공격해 왔다.

국군 제1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전방 2개 연대가 각개 격파됐고, 패퇴하는 부대를 수습해 임진강 남쪽 주저항선에 배치하는 한편, 예비연대인 제11연대를 수색에서 급히 문산지구로 진출시켜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 지역 일대에 종심으로 배치해 방어를 했다.

북한군은 6월 26일 임진강 철교를 통해 5대의 전차를 선두로 보·전·포 협동공격으로 제13연대 동측방으로 우회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제11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가 불가피했으나 반격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사단 주력부대는 금곡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27일 아침까지 봉일천 북쪽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저항선으로 재배치했다. 국군 제1사단은 봉일천 일대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28일 오전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진지를 사수하고자 싸웠으나 패배가 불가피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본부중대 소속 박래봉 상병(예비역 대위전역)의 “6.25전쟁 참전일지”를 통해 실제 상황을 확인해보니 “새벽4시경,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며 북괴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남진 중이라고 전달됐다. 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명령이라고 완전무장을 하고 사단 연병장에 집합명령이 내려 배낭과 보자기에 서류를 쌓아 짊어지고 일보계 담당자와 본부중대에 비치된 M 기관포 총열과 몸통을 각자 어깨에 메고 연병장에 나가보니 연대병력이 집합이 돼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비가 오는 그 시간에 우비를 입고 단상에 올라서서 “북한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동반해 임진강을 도하했고 서울을 향해 남진 중”이라고 전황을 병사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수색역에서 화물차를 타고 문산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려줬다는 기록에서 긴박한 당시 전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새벽 04시에 전방의 전투상황이 실시간으로 후방부대에 비상상황전파가 됐다는 것은 국군의 초기 통신망 상태가 비교적 잘 유지됐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워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전투

국군 제7사단 정면에는 북한군의 주공부대인 제3사단이 운천에서 포천방면으로, 제4사단이 연천에서 동두천방면으로 각각 제109·107전차연대와 협동해 남진을 했다. 서부전선을 책임진 북한군 제1군단의 작전목표는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는 것으로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대대를, 포천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각각 투입하고, 제13·15사단을 제2제대로 운용했다. 이 서부전선에서 북한군 공격부대의 전투력은 국군(4500명)보다 병력면에서 7배(3만 2,000명), 화력면에서 18배나 우세하게 투입된 국면이었으니 방어라는 것은 불가한 것이었다.

북한군의 공격개시를 알고 국군 제7사단은 전방에 배치된 경계부대로 북한군의 선두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면서 의정부에서 교육훈련 중이던 제1연대와 제9연대를 북한군의 접근로 상 주진지인 감악산-마차산-소요산-가랑산-천주산을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하기 위해 철수했다. 동두천 북방 제1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4사단은 전곡-초성리-동두천 축선에 전차2개 대대로 증강된 제16연대를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봉암리 축선에 제18연대를 조공으로 투입해 병진공격을 했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집중공격은 전곡에서 한탄강을 돌파해 초성리를 거쳐 동두천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시간이 25일 오전 상황이었다. 국군 제1연대는 정오 무렵에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6연대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오후 3시경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으로 소요산 일대로 철수했다. 결국은 해질 무렵에는 북한군이 동두천 시내를 진입했고 국군 제1연대는 밤10시경 덕정지역으로 철수했다.

포천지역에서는 국군 제7사단 지9연대가 방어를 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에 배속된 기계화부대가 신속하게 공격해 25일 오전11시경 포천을 진입했고, 전차의 엄호 하에 오후2시경 천주산과 가랑산을 연하는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해 오후4시경 포천 읍내까지 점령했다. 국군 제9연대는 주저항선이 조기 붕괴되자 야간을 이용해 광릉지역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3사단이 25일 오전 중 포천을 점령하고, 병진 공격하는 제4사단이 동두천을 점령해 의정부지역으로 협공할 수 있는 공격기세를 유지했다.

국군 제7사단은 26일 아침 제1연대와 증원된 제18연대를 역습에 투입해 동두천을 탈환했다. 그러나 국군 제2사단의 포천 반격이 실패하고, 북한군 제3사단에 의해 의정부가 점령당하자 아군은 동두천과 의정부 사이에서 혼란과 동시에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국군 제1연대는 창동지역으로, 제18연대는 고양을 경유해 28일 김포반도지역으로 분산 철수했다. 패전이었다.


▶️3회에 계속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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