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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1.04.17 2021-015 해남 가는 길
  4. 2021.03.27 2021-014 법(THE LAW)
  5. 2021.03.20 2021-013 화순이 좋다
  6. 2021.01.24 2021-006 신안
  7. 2021.01.22 2021-005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8. 2021.01.10 2021-003 춘천
  9. 2021.01.02 2021-002 태고의 시간들
  10. 2021.01.02 2021-001 목포

2021-019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2018, 시인생각

 

 

시흥시중앙도서관

SA270264

 

 

811.62

유86ㅅ

 

 

한국대표 명시선 100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시인. 아호 청마靑馬. 경남 통영 출생.

동래고교 졸업. 연희전문 본과 1년 중퇴.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 ·

1936년 ≪조선문단≫에 시 「깃발」 발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 한국시인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서울시문화상 · 예술원공로상 · 부산시문화상 등 수상.

시집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

『청마시집』 등.

 

 

 

■ 차례

 

 

서序

 

 

1

그리움

행복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생명의 서 일장

바위

깃발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뉘가 이 기를 들어 높이 퍼득이게 할 것이냐

낙화

수선화

 

 

2

산 1

울릉도

복사꽃 피는 날

청령가蜻蛉歌 - 정향丁香에게

마지막 항구

모란꽃 이우는 날

봄바다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동해안에서

정적靜寂

 

 

 

3

춘신春信

문을 바르며

가마귀의 노래

점겅點景에서

병처

일월日月

새에게

출생기

매화나무

 

 

 

4

북방추색

인간의 나무

세월

북두北斗

황혼

밤비소리

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미사의 종

고독

 

 

 

5

치자梔子꽃

항가새꽃

너에게

바다

선善한 나무

비새

주사

부활

석굴암대불

 

 

유치환 연보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이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병처

 

 

아픈가 물으면 가만히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가다

이 앞에서는 전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骨肉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하며

요료遙寥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無色 음풍陰風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의 푸른 나무려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짐승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증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에

너도 말 없고 나도 말 없고

마지막 이별을 견디던 그날 밤

옆 개울물에 무심히 빛나던 별 하나!

 

 

그 별 하나이

젊음도 가고 정열도 다 간 이제

뜻않이도 또렷이

또렷이 살아나ㅡ

 

 

세월은 흘러가도

머리칼은 희어가도

말끄러미 말끄러미

무덤가까지 따라올 그 별 하나!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 가고 밀려 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 치 환

연    보

 

1908(  1세)  7. 14(음력) 경남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유생인 진주 유씨 준수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又守 사이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1918(11세)  외가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0세에

                통영보통학교 입학.

 

1922(15세)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

                가 풍산豊山중학교 입학.

 

1923(16세)  가형 동랑 유치진이 주도하는 <토성> 지에 고

                향 문우들과 시를 발표.

 

1925(18세)  풍산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귀국. 동래고증보

                통학교 5학년 편입학.

 

1927(20세)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졸업(제4회).

 

1928(21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중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님.

 

1929(22세)  4월, 안동 권씨 재순 여사와 결혼.

 

1930(23세)  9월, 가형 동랑과 함께 간행한 회람지 <소제

                부>에 시 「축복」 등 26편 발표.

 

1931(24세)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1937(30세)  문예동인지 <생리>를 장응두, 최상규 등과 함

                께 발간.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 취임.

 

1939(32세)  12월, 『청마시초』(청색지사) 간행.

 

1940(33세)  3월, 통영협성고등학교 교사 사임. 만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 농장 관리 및 정미소 경영.

 

1945(38세)  6월 말 귀국. 부인이 통영문화유치원을 경영.

                9월,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 역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 이후 교

                직에 종사.

 

1946(39세)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 동인지 『죽순』

                창간호에 시 「6년 후」 「동정冬庭」 발표.

 

1947(40세)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6월, 시집 『생명의 서』(행문사) 간행.

                청년문학가협회 2대 회장.

 

1948(41세)  4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9월, 시집 『울릉도』(행문사) 간행.

 

1949(42세)  5월, 시집 『청령일기』(행문사) 간행.

                제2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50(43세)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문인구국대를

                조직, 국군 제3사단에 소속 종군함.

 

1951(44세)  9월, 시집 『보병과 더불어』(문예사) 간행.

 

1953(46세)  4월, 통영으로 이주.

                시집 『예루살렘의 닭』(산호장) 간행.

 

1954(47세)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

                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호인 『청마시집』(문성당) 간행.

 

1955(48세)  2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취임.

 

1956(49세)  3월, 제1회 경북문화상 수상.

 

1957(50세)  3월,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에 피선.

                12월, 시집 『제9시집』(한국출판사) 간행.

 

1958(51세)  제5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59(52세)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재피선.

                수상록 『동방의 느티』(신구문화사) 간행.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12월, 자작시 해설총서 『구름에 그린다』(신흥

                사) 간행.

 

1960(53세)  12월,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동서

                문화사) 간행.

 

1961(54세)  5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 취임.

 

1962(55세)  3월,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 취임.

                7월, 제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63(56세)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 피선.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 취임.

                12월,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평화사) 간행.

 

1964(57세)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평화사) 간행.

                12월, 부산시문화상 수상.

 

1965(58년)  4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취임.

                11월,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평화사)

                간행.

 

1967(60세)  2월 13일 오후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타계.

                경남 거제시 방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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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1-016 군산

 

 

 

 

 

 

 

 

 

 

배지영 지음

2020, 21세기북스

 

 

소래빛도서관

SC126177

 

 

981.19302

배78ㄱ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7

 

 

 

군산의 시간은 꿈틀거린다

근대가 남긴 이 도시의 유산들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배지영

버스가 하루에 세 번 다니는 산골에서 자랐다. 스무 살에 전남 영광에서 군산으로 왔다. 결혼하고, 밥벌이를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쓴다. 『우리, 독립청춘』, 『소년의 레시피』,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 동화 『내 꿈은 조퇴』를 썼다.

 

 

 

 

 

 

 

 

 

 

 

 

 

 

 

차례

 

 

시작하며 · ‘군산 도슨트’ 배지영
군산의 짧은 역사 · 변화를 포용할 줄 아는 열정의 도시

 


01 시간여행마을 - 반듯한 도로 위 다시 기억하는 역사
02 옛 군산세관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대한민국 세관
03 경암동 철길마을 - 동네 골목을 지나는 시속 10km 기차
04 키티의상실 - 군산 패션을 이끄는 70대 디자이너
05 초원사진관 - 다시 추억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06 이성당 - 76년을 지켜온 우리나라 최초의 빵집
07 신흥동 일본식 가옥 -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적산가옥
08 동국사 - 소녀상이 세워진 일본식 사찰
09 근대역사박물관 - 매년 100만 명이 찾는 군산의 자랑
10 이영춘 가옥 - 한국의 슈바이처, 국내 1호 의학박사의 꿈
11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
12 빈해원 - 문화재에서 즐기는 군산 짬뽕 투어
13 일도당 - 기술이 자부심, 78년 전통의 도장집
14 항도호텔 - 근대의 풍경을 간직한 군산 1호 호텔
15 신토불이통닭 - 촌스럽고 다정한 군산의 참새방앗간
16 한길문고 - 문화를 만드는 군산 터줏대감
17 수송동 - 수수했던 도시의 화려한 환골탈태
18 군산상고 - 9회 말 투아웃의 역전 신화
19 월명공원 - 벚꽃 절경부터 빼어난 설경까지 다 가진 동산
20 나포 십자뜰 - 전 세계 오직 하나뿐인 철새 군무
21 대야시장 - 군산 유일 오일장, 시골 장터의 살아 있는 맛
22 임피역 - 일제 수탈의 통로에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 간이역으로
23 오산상회 - 옛 포구를 사랑한 섬 소년의 카페
24 신시도 - 섬을 육지로 만든 새만금 방조제
25 선유도 - 도시에서 섬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26 옥구저수지 - 눈물의 역사가 서린 천만 톤 간척저수지
27 청암산 - 사람 손길 타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28 은파호수공원 - 수백 년 역사가 흐르는 은빛 물결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연표
참고 자료

 

 

 

군산 구불길(비단강길, 햇빛길, 큰들길, 미소길, 구슬뫼길, 달밝음길, 물빛길, 탁류길, 새만금길, 고군산길, 금강하굿둑길), 채원병 고택(민속문화재 제24호), 진남정, 발산초등학교, 근대역사박물관, 해망굴,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 동국사, 영동(군산의 명동), 진포해양테마공원, 짬뽕시대로, 이성당, 째보선창, 군산 째보스토리 1899, 군산시간여행축제, 여미랑, 군산항쟁관, 옛 군산세관(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5호, 호남 관세 전시관), 일본 거류민회, 우체국, 경찰서, 일본부청, 미곡검사소, 나가사키 18은행, 조선은행, 인문학 카페 '정담', 경암동 철길마을, 초원사진관, 월명동, 군산야행, 동국사(대일본 조선 전라북도 군산부 월명산 금강선사), 창사문비, 소녀상, 근대역사박물관, 이영춘 가옥, 군산 3 · 1운동 100주년 기념관, 빈해원, 일도당, 항도호텔(항도장), 항도목욕탕, 신토불이통닭, 한길문고, 수송동, 군산상고, 월명공원, 바다조각공원, 나포 십자뜰, 대야시장, 임피역(국가등록문화재 제208호), 오산상회, 서래포구, 신시도, 고군산군도, 고군산대교, 선유대교,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선유도(군산도), 야미도, 명사십리해수욕장, 옥구저수지(마산방죽), 청암산, 옥산저수지(군산호수), 은파호수공원(미제지, 미제방죽, 절메방죽, 미제저수지, 미룡저수지, 은파뽀드장, 은파유원지, 은파관광지), 

 

 

 

고군산군도와 고군산대교  푸른 바다 위 여러 개의 섬이 산처럼 솟아 있다. 돛 모양을 형상화한 다리는 신도시와 무녀도를 잇는 고군산대교로 2016년에 완공했다. 군산(群山)은 수십 개의 섬이 산처럼 솟아 있다고 붙은 이름이었다. 육지에 이름을 내어준 지금은 옛군산이라는 뜻의 고군산군도로 불린다.

 

 

 

시마타니 금고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놓인 금고는 학교 건물만큼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콘크리트로 지은 금고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운 흔적 없이 건재하다. 반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녹슨 오랜 세월을 가늠케 한다. 시마타니 금고는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했다.

 

 

 

01 시간여행마을

반듯한 도로 위 다시 기억하는 역사

 

 

 

일본사람들이 자꾸 밀려들면서 군산은 더 분주해지고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인력거를 부르는 일본말이 이쪽저쪽에서 울려대고, 큰길이며 골목마다 게다짝 끌리는 소리들이 무슨 장단을 맞추듯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집들을 지어대느라고 사방이 떠들썩한 공사판이었다.

 

-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2권에 나오는 군산 모습

 

 

 

1910년 원도심 모습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닦인 격자형 도로는 일본인이 터전을 잡으며 계획적으로 만든 도시의 모습이다. 군산진 자리에 일본 영사관을 두고 종으로는 1조통에서 9조통까지, 횡으로는 전주통(현재 영화동), 본전통(현재 해망로) 등의 일본 도시 가로명을 붙여 도시를 형성했다.

 

 

 

시간여행축제 퍼레이드  시간여행축제는 근대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창의적인 축제로 꼽히며 전국의 많은 관람객에게 사랑받고 있다.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잊혀가던 원도심은 이 축제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군산항쟁관  2층의 작은 목조건물로 지어진 적산가옥을 고쳐 만든 군산항쟁관은 직선 형태의 일본식 가옥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임피장터 3 · 1운동부터 옛 군산경찰서 앞 항쟁운동까지 군산 항쟁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02 옛 군산세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대한민국 세관

 

 

 

일제강점기의 군산세관  군산세관 건물 앞에 쌀가마가 가득 쌓여 있다. 왼쪽이 군산세관 본관 건물, 오른쪽이 부속 건물이다. 세관은 군산에서 많은 쌀을 실어 가던 일본 상인들의 요구로 지어졌다. 가져가던 쌀이 한 번에 실을 수 없는 양이라 세관 근처에 쌀 창고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군산세관의 현재  독일인이 설계하여 유럽 양식으로 지은 군산세관은 당시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5호로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우리 군산시는 안중근 의사의 고향도, 의거 장소도, 순국 장소도 아니지만, 근대역사교육의 도시라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작은 공간이나마 안중근 의사의 희생정신과 대한독립에의 열망을 전하고자 이(뤼순감옥) 전시장을 조성하였습니다.

 

 

03 경암동 철길마을

동네 골목을 지나는 시속 10km 기차

 

 

 

마을을 지나는 기차  하루 두 번 지나는 기차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마을을 찾았다. 멀리 기차가 보일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람들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잠깐 비켰다가 기차의 뒷모습을 촬영하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철길마을에 조성된 추억의 거리 마을을 지나는 기차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늘면서 생활이 불편해진 사람들은 하나둘 철길마을을 떠났다. 그 후 마을에 모형 기차를 두어 옛 풍경을 재현했고, 주민들이 살던 마을에는 옛 문방구, 옛 교복 대여점 등의 가게가 들어서며 시간여행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04 키티의상실

군산 패션을 이끄는 70대 디자이너

 

 

 

키티의상실 주인 유인덕 씨  전라북도 여성 최초로 파리에 갔을 만큼 열정 많은 디자이너는 지금도 키티의상실을 지키며 옷을 만들고 있다.

 

 

 

파리에서 사 온 패턴들  의상실 곳곳엔 유인덕 씨가 40년간 파리를 오가며 사 온 패턴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세계 패션 시장의 흐름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도전해 유행을 타지 않고 세련된 키티만의 의상을 만들기로 소문이 났다.

 

 

 

키티의 현재 모습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키티는 현재 단골손님들에게 여전한 맞춤옷 가게이자, 며느리에겐 디자인 수업 교실이 되고 있다.

 

 

 

05 초원사진관

다시 추억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초원사진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였던 사진관 건물 옆에는 여자 주인공이 타고 다녔던 주차단속 차량까지 전시해 전시해 영화의 추억을 한층을 한층 더 풍성히 되살리고 잇다. 원래 차고였던 것을 허물고 지은 사진관은 가끔 진짜로 착각해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초원사진관 내부 모습  다시 복원한 초원사진관 내부의 한 벽면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명장면과 명대사로 꾸며져 있다.

 

 

 

06 이성당

76년 지켜온 우리나라 최초의 빵집

 

 

 

이성당 조식세트  샌드위치와 샐러드, 스프, 커피 등 미국식 아침 식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성당 조식세트는 알찬 구성에 저렴한 가격, 빠지지 않는 맛으로 꾸준히 사랑받으며 군산시민과 여행자들의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있다.

 

 

 

이성당의 옛 모습(위)과 현재 모습(아래)  건물 벽에 '이즈모야 본점(出雲屋本店)'이라는 간판을 걸고 1910년 문을 연 이즈모야 과자점은 화과자 전문점으로 시작해, 돈가스 등의 식사까지 팔며 성황을 누렸다. 이석우 씨가 같은 자리에 '이성당'을 차린 것은 해방 후인 1945년. 이성당만의 역사가 올해로 76년에 이른다.

 

 

 

이성당 단팥빵  매장에 들어서면 가득 쌓인 단팥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빵에 꽉 찬 팥앙금이 매력인 이성당 단팥빵은 70년간 이성당을 지킨 대표 메뉴이자 최고 인기 메뉴다.

 

 

 

07 신흥동 일본식 가옥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적산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  당시 초가집의 둥근 지붕과 곡선 형태의 처마를 가졌던 우리나라 집들과 다르게 일본식 가옥은 전체적으로 직선 형태를 띠고 있어 한눈에 구분되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내부  일본식 가옥의 특징대로 다다미를 깐 바닥에 벽장인 오시이레와 장식장인 도코노마가 보인다. 창문 역할을 하는 고창도 일본식 가옥의 특징 중 하나다.

 

 

 

08 동국사

소녀상이 세워진 일본식 사찰

 

 

 

동국사 대웅전 에도시대 건축양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동국사의 원래 이름은 금강선사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 대웅전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로 등록돼 있다.

 

 

 

일본 불교는 국가권력에 영합해 태평양 전쟁에 가담하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인권침해, 문화 멸시, 일본 문화 강요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점을 참회하면서 사죄드린다.

 

- 참사문비

 

 

 

참사문비 앞 소녀상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군산시민과 일본 조동종 스님이 함께 세운 동국사 평화의 소녀상 모습. 뒤로 보이는 검은 비석이 한글과 일본어로 된 참사문비다. 이 소녀상은 참사문비 앞에 선 것도 유일, 사찰에 세운 소녀상으로도 유일하다.

 

 

 

동국사 대나무 숲  동국사 뒤편에는 사찰의 100년 역사와 함께한 100년 된 대나무 숲이 있다. 작은 숲이지만 관광객에게 또 하나의 관광 명소로 소문나 있다.

 

 

 

09 근대역사박물관

매년 100만 명이 찾는 군산의 자랑

 

 

 

근대역사박물관  2011년 처음 문을 연 근대역사박물관은 해양물류역사관, 어린이박물관, 근대생활관과 기획전시실 등 다양한 주제로 군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 사료를 전시하는 본관 외 다양한 문화 공연 시설과 문화 놀이 공간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근대역사박물관  근대생활관  근대생활관은 학교, 쌀가게, 고무신가게 등 1930년대의 영동 거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관람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전시관이다.

 

 

 

근대역사박물관 벽면의 감사 편지  근대생활관에 재현해 놓은 영명학교 교실 한쪽 벽면은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감사 편지로 가득 차 있다. 영명학교는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3 · 5운동의 출발점이 된 곳이다.

 

 

 

10 이영춘 가옥

한국의 슈바이처, 국내 1호 의학박사의 꿈

 

 

 

이영춘 가옥  이영춘 기옥은 도쿄에 사는 구마모토 리헤이가 약탈한 군산 쌀을 거두러올 때 묵었던 별장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맞먹는 건축비를 들여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영춘 가옥 내부  화려한 샹들리에와 헤링본 스타일 티크 나무 바닥, 세련된 붙박이식 책장까지, 서양식으로 꾸민 이영춘 가옥의 응접실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이영춘 박사  국내 의학박사 1호인 이영춘 박사가 아이를 진료하고 있다.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의료보험의 효시인 의료조합사업을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 의료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11 군산 3 · 1운동 100주년 기념관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

 

 

 

영명학교의 옛 모습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영명학교는 3 · 5만세운동의 역사가 쓰인 곳이다.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 시인들은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3,500매를 복사하고 태극기 수백 장을 그려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학상덜이 앞장 스고 부두 지꾼덜이 따라나섰는디, 그 기세가 아조 무섭드만이라, 왜놈덜이 살짝만 견디려도 확불이 불을 기세든디요."

 

-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6권 중

 

 

 

군산 3 · 1운동 100주년 기념관  한강 이남 최초로 만세운동을 했던 구암 동산에 세워진 기념관은 옛 군산 영명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

 

 

 

태극기 탁본 체험  군산 3 · 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는 체험교육관이 따로 마련돼 있어 탁본, 게임, 기념촬영 등 독립운동과 관련한 디양한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다.

 

 

 

12 빈해원

문화재에서 즐기는 군산 짬뽕 투어

 

 

 

2층에서 내려 본 빈해원 내부  벽과 기둥부터 난간과 조명까지 모두 중국식으로 정성껏 지었다. 중국 객잔을 닮은 내부는 테이블이 놓인 1층의 홀과 20여 개의 룸이 있는 2층으로 나뉘어 있다.

 

 

 

빈해원의 별미청탕면  뽀얀 국물에 홍합, 오징어, 새우 등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별미청탕면은 '하얀 해물 짬뽕', '백짬뽕'으로도 불린다. 흔히 알려진 짬뽕과 달리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인기다.

 

 

 

1950년대 초부터 화교인 왕근석 씨에 의해 창업되어 대를 이어온 중국 음식점으로서 1~2층이 개방된 내부공간이 특징적이다. 근대기 군산에 정착했던 화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가치를 갖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빈해원의 현재 모습  올해로 개업 70주년의 빈해원은 196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건물은 화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역사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되었다.

 

 

 

13 일도당

기술이 자부심, 78년 전통의 도장집

 

 

 

일도당의 주인 손남석 씨  일도당을 처음 연 손인기 씨의 셋째 아들 남석 씨가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건 1976년이었다.

 

 

 

일도당의 현재  1943년 처음 문을 연 일도당은 7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았다. 아버지 손인기 씨에서 아들 손남석 씨, 다시 그의 아들 손정배 씨까지 3대째 기업을 잇고 있다.

 

 

 

손도장을 깎는 손(위)과 도장 깎는 칼(아래)  손인기 씨가 가업을 잇기 시작한 지 4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손도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기계가 아닌 사람 손끝에서 한 자 한 자 완성되는 수제도장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14 항도호텔

근대의 풍경을 간직한 군산 1호 호텔

 

 

 

항도호텔의 현재 모습  호텔이라기에 아담해 보이는 항도호텔의 3층 건물은 1960년대 처음 지을 당시 군산 1호 호텔로 큰 화제가 되었다. 옛 모습은 그대로 살리고 깔끔함은 높인 리모델링으로 최근 특별한 테마의 숙소로 각광받고 있다.

 

 

 

항도목욕탕의 현재 모습  항도호텔 목욕탕은 고급 호텔 사우나보다는 동네 놀이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지금도 투숙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동네 목욕탕으로 자주 찾는다. 항도호텔 투숙객은 목욕탕을 무료로 쓸 수 있다.

 

 

 

15 신토불이통닭

촌스럽고 다정한 군산의 참새방앗간

 

 

 

신토불이통닭 주인 손균홍, 양근옥 씨 부부  1995년 신토불이이통닭을 개업한 부부는 26년째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하루 평균 매출 5만 원이었던 통닭집은 부부의 노력과 끊임없는 도전으로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성장했다.

 

 

 

신토불이통닭의 양념똥집튀김  신토불이만의 별미로 꼽히는 '별미양념똥집'은 부부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아 개발한 메뉴다. 바삭하게 튀긴 닭통집을 비법 간장소스로 버무려 맛과 느끼함을 모두 잡았다.

 

 

 

신토불이통닭집의 전기구이통닭  가게 입구 바로 옆 전기구이오븐에서 전기구이통닭이 노릇노릇 익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훤히 볼 수 있는 이 광경은 신토불이통닭을 찾는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맛을 약속함과 동시에 지나는 많은 사람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16 한길문고

문화를 만드는 군산 터줏대감

 

 

 

한길문고에 진열된 작가 사인  한길문고의 벽면서가 한편에는 서점을 방문한 유명작가의 사인이 책과 함께 진열돼 있다. 한길문고는 강연회, 작가와의 만남 등 다양한 작가 초빙 행사를 통해 시민이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100인의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모습  선착순 100명의 도전자와 함께 진행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는 1시간 동안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읽으면 최저시급을 제공하는 이색 이벤트다. 한길문고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시민과 함께하고 있다.

 

 

 

17 수송동

수수했던 도시의 화려한 환골탈태

 

 

 

18 군산상고

9회 말 투아웃의 역전 신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한 군산상고 야구부  1972년 군산상고는 마지막 공격에서 역전을 따내며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당시 군산에는 수많은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최관수 감독과 야구부원  군산상고 야구부원들과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은 최관수 감독. 1970년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최관수 감독은 전국 대회 우승 6회, 준우승 5회를 이끌며 군산 야구의 영웅이 되었다.

 

 

 

군산상고(위)와 야구의 거리(아래)  군산상고의 운동장을 내려 보면 야구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붉은 흙과 잔디로 덮인 필드가 야구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학교 정문부터 군산상고 네거리까지 이어진 '야구의 거리'는 야구스타 사진과 다양한 조형물, 군산 야구 역사 현판 등을 통해 군산 야구의 특별한 추억을 만날 수 있다.

 

 

 

19 월명공원

벚꽃 절경부터 빼어난 설경까지 다 가진 동산

 

 

 

월명공원의 벚꽃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월명공원의 상징인 수시탑이 보인다. 월명공원의 벚꽃 절경은 군산으로 관광을 오는 첫 번째 이유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월명호수  1912년 식수 공급을 위해 만든 수원지였으나 공급을 중단하면서 호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 속 산 위에 위치한 호수로, 호수를 둘러 놓인 산책로는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할 수 있는 산책길로 인기를 끌고 있다.

 

 

 

월명호수의 겨울  눈 쌓인 월명호수 위로 나무 데크로 만든 산책로가 멀리 보인다. 월명공원의 설경은 벚꽃 풍경만큼 아름답다고 소문나 있다. 특히 호수와 눈 덮인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기 위해 산책로를 찾는 사람이 많다.

 

 

 

20 나포 십자뜰

전 세계 오직 하나뿐인 철새 군무

 

 

 

물 위에 떠 있는 가창오리 떼  밤에 먹이 활동을 시작하는 가창오리는 낮에 주로 물 위에서 잠을 잔다. 물 위에 빼곡히 모인 가창오리 떼는 강 위의 검은 섬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창오리 군무  어스름 지는 해를 배경으로 날아오른 가창오리 떼가 군무를 펼치며 장관을 연출한다. BBC에서는 이 장면을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 자연의 경이로운 순간'으로 선정했다.

 

 

 

21 대야시장

군산 유일 오일장, 시골 장터의 살아 있는 맛

 

 

 

대야전통시장 모습  군산 유일한 오일장인 대야시장은 1965년에 처음 서기 시작했다. 손님을 찾아 도로 양편에 물건을 펼쳐 장사를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입구에 커다란 간판까지 생겼다. 매월 장이 서는 날도 간판에 쓰여 있다.

 

 

 

대야시장 국수  대야시장의 국숫집들은 이미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 있다. 국수 한 그릇에 3,000~3,500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 감탄을 부르는 맛으로 일부러 찾아 오는 사람도 많다.

 

 

 

22 임피역

일제 수탈의 통로에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 간이역으로

 

 

 

임피역  한때 임피 지역의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학생, 직장인, 농부, 장사꾼 등 다양한 사람으로 북적였던 임피역은 2008년 모든 열차 운행을 중단한 후, 고즈넉한 간이역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임피역 내부  운행이 멈춘 임피역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채만식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바탕으로 만든 조형물로 1930년대 임피역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임피역사 재래식 화장실  임피역의 재래식 화장실은 1936년 간이역이었던 임피역이 보통역으로 승격하며 지어졌다. 칸막이 없는 소병 시설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이곳은 임피역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23 오산상회

옛 포구를 사랑한 섬 소년의 카페

 

 

 

카페 오산상회  오산상회는 버려져 있던 선구점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콘셉트 카페다. 섬에서 태어나 선구점에서 일했던 최동민 씨가 처음 이곳에 카페를 열겠다고 했을 때 모두는 실패를 예상했다.

 

 

 

오산상회 내부  오산상회 내부는 패션에서 해체돼 버려진 선구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해 꾸몄다. 카운터 가운데 보이는 닻은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무게가 1톤에 이른다.

 

 

 

24 신시도

섬을 육지로 만든 새만금 방조제

 

 

 

 

대각산에서 바라본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등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를 함께 일컫는다. 특히 최치원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대각산 정상은 서해 다도해의 비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새만금 방조제  군산시와 고군산군도, 부안군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착공 후 19년이 지난 2010년 준공하였다. 길이 33.9km로 세계 최장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새만금방조제의 건설로 신시도는 고군산군도 중 처음으로 육지와 여결되었다.

 

 

 

25 선유도

도시에서 섬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선유도에는 숭산행궁이라는 관청과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객사건물 그리고 군산정이라는 정자와 관청건물 10여 칸이 있었으며 자복사라는 절과 함께 오룡묘라는 사당이 있었다. 군산정이라는 정자는 두 봉우리를 의지하고 있는 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 『선화봉사 고려도경』

 

 

 

망주봉에서 바라본 선유낙조  서해의 눈부신 비경 중 하나로 꼽힌다는 고군산군도의 중심에는 선유도가 있다.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놀았다고 알려진 선유도 망주봉은 낙조가 특히 아름다워 서해 낙조 중 으뜸으로 꼽힌다.

 

 

 

선유도에 물들다 전경  선유도에서 나고 자란 임동준 씨는 할머니가 사시던 40년 된 한옥을 리모델링해 펜션과 카페를 만들었다. 세련된 분위기로 재탄생한 한옥 마당에서는 바라를 배경으로 한 음악회와 선유도 역사 강의 등이 열리기도 한다.

 

 

 

26 옥구저수지

눈물의 역사가 서린 천만 톤 간척저수지

 

 

 

옥구저수지  수평선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진 옥구저수지. 제방 길이 6km가 넘는 저수지는 담수된 물이 무려 1,250만 톤에 이른다. 날이 좋은 날 옥구저수지는 하늘을 그대로 반영해 장관을 연출한다.

 

 

 

옥구저수지 옆 기찻길  저수지 옆 선로는 1953년 UN군이 군산비행장 보급품 수송을 위해 만들었으나, 2년 후부터 여객열차인 옥구선을 운행했다. 70년대부터 화물열차만 다니다 2006년부터는 모든 열차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27 청암산

사람 손길 타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청암산 옥산저수지  이제는 군산호수가 된 옥산저수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벼농사를 위해 논을 수장시켜 만들었다. 이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통행이 금지되고 본연의 모습으로 보호되었다.

 

 

 

왕버들 나무 군락지  왕버들 나무가 너른 호수를 다 가릴 만큼 웅장하게 뻗어 있다. 왕버들 나무는 물을 좋아해 물 가까이 서식하는 경우가 많다. 청암산에는 특히 호수에 잠기거나 물속에서 자라는 왕버들 나무도 있어 이색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등산객의 마음을 사로잡느다.

 

 

 

28 은파호수공원

수백 년 역사가 흐르는 은빛 물결

 

 

 

은파호수공원의 미제저수지  은파호수공원은 '미제지'라는 이름으로 490년 전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구불구불한 지형이 도드라지는 독특한 모양의 미제저수지는 모양에 관련한 설화도 많다.

 

 

 

물빛다리  길이 370m의 물빛다리는 다리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따로 찾을 만큼 은파호구공원의 상징이 되었다. 조명이 커지면 호수와 어우러져 멋진 야경을 선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파호수공원의 벚꽃길  봄이면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6km에 달하는 산책로에 벚꽃이 만개한다. 만개한 벚꽃과 호수의 반영이 어우러져 장관을 선물하는 은파호수공원은 군산 벚꽃 명소이자 국내 벚꽃 여행지로 손꼽힌다.

 

 

 

 

 

 

 

 

 

 

 

 

 

 

 

 

 

100년 된 건물들과

그보다 더 오래된 군산 땅에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군산 도슨트 배지영

 

 

시간여행마을, 동국사, 옛 군산세관

항도호텔, 이성당, 은파호수공원 등

 

 

군산의 치열한 삶과 역사를 찾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28개 공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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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1-015 해남 가는 길

 

 

 

 

 

 

 

 

 

송언 지음 | 김의규 그림

2009, 우리교육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6952

 

 

818

송64ㅎ

 

 

고3 아들과 쉰 살 아버지가 함께한 9일간의 도보여행

 

 

 

지은이 송언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여름의 초상>이 당선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소설 쓰는 일을 접고 동화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소설 《인간은 별에 갈 수 없다》 《천궁거사》 등과, 동화 《슬픈 종소리》 《멋지다 썩은 떡》 《김 구천구백이》 《잘한다 오광명》 《마법사 똥맨》 등이 있으며, 《단군의 조선》 《고구려》 《아, 발해》등 우리 역사 이야기를 풀어쓰기도 했다. 여행에세이 《해남 가는 길》을 쓴 것을 나이 들어서 모처럼 잘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린이 김의규

미국 Academy of Art University를 졸업한 후 계원조형예술대학과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샌프란시스코 AAC Spring Show 그랑프리와 우경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과 미국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그림 작업뿐 아니라 미니픽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양들의 낙원, 늑대벌판 한가운데 있다》 등의 책을 펴냈다.

 

 

 

 

 

 

 

 

 

 

 

오늘 밤 오경시五更時를 함지咸池에 머무르고

내일 아침 돋는 해를 부상扶桑에다 매달으면

불쌍하신 우리 부친을 일시라도 더 모시련마는

우리 부녀 이별이야 내가 영영 죽어 놓으면

부친의 얼굴을 언제나 다시 보리.

천지가 사정이 없어 이윽고 닭이 꼬끼오 우니

닭아, 닭아, 닭아 울지 마라.

닭아, 닭아, 닭아 울지를 말아라.

반야진관半夜秦關의 맹상군孟嘗君이 아니로다.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설치 않으나 앞 못 보는 우리 아버지를

어이 잊고 가더란 말이냐.

닭아, 닭아, 닭아 울지를 마라.

닭아, 닭아, 닭아······!

 

-판소리 「심청가」 중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라

백빈주白瀕洲 갈매기는 홍요안紅蓼岸으로 날아들고

삼강三江의 기러기는 한수漢水로 돌아온다.

 

-판소리 「심청가」 중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목숨을 걸고>

 

 

 

원교의 글씨체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화강암의 골기骨氣를 느끼게 하는데, 추사의 글씨는 획이 살지고 윤기가 나는 상반된 마감을 보여 준다. 쉽게 말해서 원교체는 손칼국수의 국숫발 같고, 추사체는 탕수육이나 난자완스를 연상케 하는 그런 맛과 멋이 있는 것이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북적대던 사람들 다 떠나 버린

바닷가에 게 발자국만 어지럽다

지난여름 이글거리던 햇볕 아래서

푸른 갈기를 세우고 온몸으로 달려들던

달려들다 부서지며 포효하던 그 파도들

이제는 순한 짐승처럼 발치에 누웠다

생각하면 내 살아온 날들도 게걸음 같은 것이었나

거품 물고 끌고 온 내 안의 길들

벼랑 앞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저물도록 육자배기 가락으로 우는 파도에 기대어

홀로 거니는 발아래 몽돌들만 자글자글 울고

먼 물마루에 붉은 노을이 찢어진 기폭처럼 걸렸다

 

- 김경윤, <땅끝을 거닐다>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가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었던가를.

늙어 가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효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는 세월이 갈수록 값지고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배낭을 짊어지고 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훌훌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떠나 보면 알게 된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 땅의 아버지와 아들에게

도보순례보다 더 행복한 여행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 여는 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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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4 법(THE LAW)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 지음 / 김정호 옮김

2016, 자유기업원

 

 

자유주의시리즈 22

 

 

THE LAW

by Frederic Bastiat

 

 

우리는 법적인 강제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박애만을 인정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박애는 있을 수 없다. 법으로 박애를 선포하는 것은 박애를 절멸시키는 것이다. 법이 인간에게 정의로움을 강요할 수 있지만, 자기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제2장  법

제3장  재산권과 법

제4장  정의와 박애

제5장  국가

 

 

 

프레데릭 바스티아 Frederic Bastiat

1801년 프랑스 남서부의 베이요느에서 출생, 당시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세이Jean Baptist Say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1830년 고향인 무그론Mugron에서 판사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지방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844년에는 보호관세의 부당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845년 논문모음집 『경제적 궤변Sophisme Economique』을 출간했고, 같은 해 프랑스와 벨기에간의 자유무역을 주창하기 위해 자유무역협회 창립에 관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1850년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정호 Chung-Ho Kim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수료)을 거쳐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숭실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지문제와 회사법 등에 대한 자유주의적, 법경제학적 분석에 매진해왔다. 자유기업원 원장과 연세대학교 특임교수를 역임했다. 주요저서로는 〈왜 우리는 비싼 땅에서 비좁게 살까〉, 〈토지세의 경제학: 미신과 현실〉, 〈한국의 토지이용규제〉, 〈대한민국 기업의 탄생〉, 〈갈등하는 본능〉 등이 있다.

 

 

 

차  례

 

 

영역판 서문

서문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 깨어진 창

 2. 동원해제

 3. 조세

 4. 극장과 예술

 5. 공공사업

 6. 중간상

 7. 무역에 대한 규제

 8. 기계

 9. 신용

10. 알제리아 문제

11. 절약과 사치

12. 노동의 권리와 이윤에 대한 권리

 

제2장 법

법의 타락

인간의 본성

재산과 약탈

부세

페넬론

몽테스키외

루소

레이날

마블리

콩디악

 

제3장 재산권과 법

 

제4장  정의와 박애

 

제5장 국  가

 

바스티아의 일생

역자후기

색인

 

 

 

제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역사에는 두 종류의 결과가 있다. 하나는 즉시 인식될 수 있는 즉각적인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당장은 잘 안 보이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나타나는 장기적 결과이다. 이 두 가지의 결과는 서로 상출될 경우가 많다. 전자는 인간의 단기적 지혜로부터 나오고 후자는 장기적인 지혜로부터 나온다.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끝난 후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라진 뒤에 나타난다. 신의 지혜를 거부하고 싶다면 거부하라. 신의 역사와 그의 말씀을 믿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라. 보통사람들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들이 환경의 작용이니 이성의 작용이니 하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일이 끝난 후에 돌이켜본다면,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계획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샤토브리앙 Vicomte Francois de Chateaubriand, 『무덤에서의 회상』

 

 

 

 

 

www.youtube.com/watch?v=hhPhokE9TG8

 

www.youtube.com/watch?v=Bjed9GQPf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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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 화순이 좋다

 

 

 

 

 

 

 

 

 

 

문기주 지음

2020, 주변인의길

 

 

대야도서관

SB145010

 

 

911.97

문18ㅎ

 

 

고향의 품 같은 화순으로 떠나는 여행

전라도의 중심권에 있는 화순은 70% 이상이 산이다 보니 산세가 수려하고,

지석천, 화순천, 동복천을 끼고 각각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화순으로 여행을 떠나자!

 

 

 

전통이 살아있고, 신이 빚어놓은 자연과 문화와 역사의 땅 화순은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공룡발자국 화석, CNN이 선정한 세량지, 굽이굽이 절경을 만들어낸 화순적벽, 절경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수많은 정자,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사찰,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자연의 절경과 역사의 현장을 지켜오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천불천탑의 사찰인 운주사와 쌍봉사가 있고,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공룡발자국화석이 발견되면서 화순으로 답사오는 방문객이 많아졌다.

 

 

화순의 곳곳을 되짚어 보니 이 작은 도시에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문화재와 절경과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다.

 


공룡이 살았던 흔적, 언덕마다 펼쳐진 고인돌, 기암절벽에 병풍처럼 수놓은 적벽, 천불천탑과 와불, 고단함을 풀어주는 온천, 사람들이 왁자지껄 흥정하는 전통시장 등 화순에 가면 모두 만날 수 있는 곳들이다. 이제 화순으로 힐링 여행을 떠나보자.

 

 

- 머리말 중에서

 

 

 

 

 

문기주

 

화순 출신. 도곡중학교 8회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세량지와 세상의 시름을 멈추게 하는 화순적벽의 아름다움과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지와 천불천탑과 와불, 민초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운주사 등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유산의 고장인 화순(도곡면 덕곡리(덕산마을))에서 태어난 저자는 1991년 한국문인협회 동인지에 「소리」라는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중견 기업의 CEO이고, 평론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린피아 홈쇼핑 대표와 세파월드 운영 기획(주) 회장, 디에스 산업 개발(주) 회장, 그리고 무등 피엔씨(주)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유림 AMC(주) 회장, 우근 AMC(주) 회장, 희합 AMC(주) 회장, (주)크로앙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일간경기 회장, 한국기자연합회 총재, 시사랑 회장, 사회 야구 블로버드 초대 회장, 이스턴 프라임대학교 명예박사 및 동문회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상으로는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경제발전 부분), 한국을 빛낸 사회봉사 대상, 소비자 연맹 쇼핑부분 대상, 대한민국 환경부 장관상, 아태 평화 봉사 대상, 국제평화공헌대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문인협회 동인지 발표(소리ㆍ인생)』, 『우리 함께 가자 이 길을!』, 『문기주의 경제 이야기』, 『인생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등이 있다.

 

 

 

| 차례 |

 

 

- 머리말


1
화순으로 가는 길은 아늑하다

- 사람이 살아 숨쉬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나다 / 화순 전통시장
황금들녁의 아늑함을 품고 있다 / 덕산마을
호남 의병 활동의 거점지 / 쌍산항일의병 유적지
5.18 민주항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다 / 너릿재옛길, 화순역
동화나라, 작은 숲속 마을에 가다 / 소아르갤러리
살아 있는 화석으로 홍수를 이겨내다 / 야사리 은행나무



2
화순으로 가는 길은 유구하다

- 전설이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다

화순에 공룡들이 뛰어다닌다 / 공룡발자국화석산지
천불천탑에 담은 기도를 듣고 와불이여, 일어나소서 / 운주사
목탑의 집에 부처님을 모시다 / 쌍봉사
해맑은 미소로 마음을 위로하다 / 벽나리 민불
단풍나무숲 깊숙이 전설이 전해져 온다 / 유마사
세계 고인돌의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다 /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간절한 기도를 함께하는 배롱나무가 붉게 물들다 / 만연사



3
화순으로 가는 길은 간절하다

- 그곳에 역사를 움직인 인물이 있다

관을 두껍게 만들지 말라. 먼 길 가기 어렵다 / 조광조 적려 유허비
방랑 시인의 삶을 마무리하다 / 김삿갓종명지
양심적인 지식인, 화순에서 학문을 쌓다 / 정약용유적지(만연사, 동림사, 정약용선생독서비)
능주의 교육을 담당하다 / 능주향교
뜻을 함께한 두 벗을 기리다 / 죽수서원
임진왜란에서 화순을 구하다 / 충의사
벼슬은 잃었지만 자연을 가슴에 품다 / 학포당



4
화순으로 가는 길은 힐링이다

- 산과 계곡의 조화가 화폭에 담기다

신이 붓을 휘둘러 절경을 그리다 / 화순적벽
CNN이 선정한 저수지 사시사철 모습을 바꾸다 / 세량지
철쭉공원으로 이름을 떨치다 / 수만리 철쭉공원
무등산을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두르다 / 무등산(이서 규봉암, 지공너덜, 입석대)
숲멍으로 마음을 치유하다 / 연둔리 숲정이
온천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다 / 도곡온천, 화순온천
경전선 철로와 시대를 함께하는 시를 읊는다 / 영벽정
세속의 때를 벗어던지다 / 물염정
마을 속에 한국의 전통정원이 자리하다 / 임대정원림
호수 안 작은 섬, 정자에 앉으니 무릉도원이다 / 환산정
힐링과 웰빙의 도시, 화순이 좋다 / 화순(화순군청)

 

 

 

화순고인돌전통시장

 

 

 

의병성의 일부

 

 

 

의병 막사가 있던 장소

 

 

 

만세바위와 유황굴의 모습

 

 

 

화순역

 

 

 

화순역 광장 옆에 5 . 18민중항쟁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소아르갤러리

 

 

 

마당에 설치된 조형물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왠지 친근감을 준다.

 

 

 

돼지를 끌고 기분 좋게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활기차 보인다.

 

 

 

야사리 은행나무

 

 

 

야사리 은행나무의 뿌리 중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오랜 세월 조금씩 조금씩 자라면서 나무는 여러 모양을 만들어낸다.

 

 

 

 

야사리 은행나무는 계절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화순에서 뛰어놀았을 공룡들의 모습이 귀여워보인다.

 

 

 

공룡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온천을 발굴하려던 채석장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유네스코에서 지질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운주사 와불 - 천불천탑에 담은 기도를 듣고 와불이여, 일어나소서

 

 

 

운주사는 배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9층 석탑이 돛대 역할을 한다.

 

 

 

불상이 꽉 들어찬 석조불감.

 

 

 

운주사 입구인 일주문과 대웅전 모습.

 

 

 

운주사 곳곳에 탑과 불상이 놓여있다. 천불천탑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호떡탑이라는 별명이 붙은 원형다층석탑과 항아리리탑이라는 별명이 붙은 원구형석탑.

 

 

 

쌍봉사

 

 

 

사천왕의 모습.

 

 

 

3층 목탑처럼 생긴 대웅전.

 

 

 

철감선사탑비로 철감선사에 대한 내용이 적힌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이 모양의 귀부와 용 모습을 한 이수만 남아 있다.

 

 

 

철감선사탑

 

 

 

벽나리 민불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용대 선수의 이름을 붙인 이용대체육관.

 

 

 

미소 짓고 있는 벽나리 민불

 

 

 

유마사

 

 

 

 

유마사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

 

 

 

'모후산유마사'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

 

 

 

유마사 해련부도

 

 

 

유마사의 대웅전을 대신하고 있는 관음전

 

 

 

일주문 옆에 계곡이 흐르고 그곳에 유마사 보안교가 있다.

 

 

 

관청바위 고인돌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 바위로 알려진 핑매바위

 

 

 

만연사 동종과 나한전의 모습

 

 

 

일렬로 늘어선 만연사 장독대의 모습이 정갈하다.

 

 

 

조광조 적려 유허비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 정문

 

 

 

조광조의 넋을 위로하고 뜻을 알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

 

 

 

조광조가 살았던 초가집

 

 

 

유허비의 모습으로, 조광조의 처음과 끝이 모두 담겨 있다.

 

 

 

조광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영정각 안에 있는 조광조의 영정, 아래는 정홍래가 그린 조광조의 영정이다.

 

 

 

김삿갓종명지

 

 

 

김삿갓공원

 

 

 

김삿갓공원에 있는 김삿갓의 시비

 

 

 

김삿갓공원에는 김삿갓 동상과 돌에 시를 써서 전시하고 있다.

 

 

 

김삿갓공원에는 김삿갓이 쓴 시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있다.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제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그림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날 따르는데도 고마워 않으니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어 언덕에 누우면 도깨비 모습이 되고

밝은 대낯 뜨락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으면 만나지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종내 말이 없다가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네.

 

 

죽 한 그릇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주막에서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요강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여닫지 않아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술 취한 사내는 너를 가져다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네는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연상케 하네.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스무나무 아래(二十樹下)

스무(二十, 시무)나무 아래에 앉은

서른(三十, 서러운) 나그네가

마흔(四十, 망할) 놈의 집안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서 어찌 일흔(七十, 이런)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서른(三十, 설익은) 밥을 먹으리라.

 

 

 

정약용이 동림사에서 글을 읽으며 오갔던 만연사 모습

 

 

 

동림사가 있었던 곳에 동림사지 표지석이 남아 있다.

 

 

 

동림사지 표지석 앞에 있는 도로 건너편에 정약용의 독서비가 세워져 있다.

 

 

 

능주향교

 

 

 

능주향교 앞마당 주차장 한쪽에 늘어서 있는 비석들

 

 

 

능주향교의 모습

 

 

 

능주향교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과 그 뒤로 향교 정문이 보인다.

 

 

 

죽수서원

 

 

 

죽수서원은 산 기슭에 있으며 위에서 정문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죽수서원의 모습

 

 

 

죽수서원에 남아 있는 건물

 

 

 

도학을 숭상하여(崇道學)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人心)

성인과 현자를 본받아(法聖賢)

지극한 정치를 일으키도록 하세(興至治)

 

- 양팽손이 조광조의 초상화 밑에 적어놓은 글

 

 

 

서원이 원래 있던 땅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인 '죽수서원원지복원비'

 

 

 

충의사

 

 

 

논개부인 영정각

 

 

 

촉석루 위에 있는 세 장사는

한 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의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도도히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혼은 죽지 않으리라.

 

- 최경회(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읊은 시)

 

 

 

충의공 최경회 장군 동상

 

 

 

논개부인 영정각과 사당으로 가는 의열문인데 '전라문'이라고 쓰여 있다.

 

 

 

충의사의 모습

 

 

 

학포당

 

 

 

학포당 현판

 

 

 

學圃讚山水圖(학포찬 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학포 양팽손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가 지금은 작자 미상으로 연구중인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글을 쓰고 학포(양팽손)가 쓰다라는 뜻의 '학포사(學圃寫)'라는 글씨가 써 있고, 인장에는 '양팽손장(梁彭孫藏)'이라고 쓰여 있다.

 

 

 

화순적벽

 

 

 

환산정 앞에 펼쳐진 서성적벽

 

 

 

화순적벽

 

 

 

가을 강 모래밭에 오솔길 또렷하고

계곡 어구 비취빛 산에서는 구름이 일듯

새벽녘 시냇물에는 연지 빛이 잠기고

맑은 날 바위벽에는 비단 무늬 흔들흔들

수령의 한가한 놀이에선 누가 흥겨운가

시골 사람 무리지어 밭 갈고 낚시하네

외진 곳 안온한 산수가 사랑스러워라

이름 흘려 알리려 하지 않기에

 

- 다산 정약용, '적벽 정자에서 노닐며'

 

 

 

몰염정 근처에 있는 창랑적벽의 모습

 

 

 

세량지

 

 

 

아름다운 저수지로 외국에까지 소문난 세량지

 

 

 

물길 따라 올라가면 세량지에 닿는다.

 

 

 

제방 위에 있는 원두막에서 바라본 세량지의 모습과 세량지 밑에 만들어 놓은 연못의 가을 풍경 모습

 

 

 

CNN이 선정한 50곳에 뽑힌 세량지는 사시사철 옷을 바꿔입느다.

 

 

 

수만리 철쭉공원

 

 

 

수만리 철쭉공원 인근에 숲길을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만연산 오감연결길이 있다.

 

 

 

이서 규봉암

 

 

 

무등산 일대에 펼쳐진 주상절리

 

 

 

이상한 모양의 돌들은 이름 붙이기가 어렵더니

올라와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공평하구나

바위 모양은 비단을 잘라 세운 득하고

봉우리 모습은 옥을 다듬어 세운 듯하다

명승을 밟으니 세상 티끌이 사라지고

그윽한 곳에 이르니 도의 참뜻 더해지네

어떻게 세상 인연 털어버릴까

가부좌로 앉아 영생의 길을 배운다.

 

- 김극기, '한시 규봉암'

 

 

 

무등산 일대에 펼쳐진 주상절리

 

 

 

주상절리를 잘 보여주고 있는 기암절벽

 

 

 

연둔리 숲정이

 

 

 

화순 온천

 

 

 

도고온천

 

 

 

 

화순온천이 있는 화순금호리조트

 

 

 

영벽정 강가에 있는 비석

 

 

 

지금도 이곳에는 시인들이 모여 함께 시를 이야기한다.

 

 

 

물염정 옆에 있는 물염적벽

 

 

 

물염정에는 김삿갓 시비가 있다.

 

 

 

물염정 옆에 펼쳐져 있는 물염적벽

 

 

 

임대정원림

 

 

 

원림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임대정에 다다른다.

 

 

 

사애 선생이 지팡이 짚고 자주 들르던 곳이라는 뜻의 '사애선생장구지소'라 새겨진 돌이 있다. 사애 선생은 민주현을 말한다.

 

 

 

 

임대정 정자

 

 

 

환산정

 

 

 

환산정에서 본 서암적벽

 

 

 

환산정 앞에 문은 있으나 담이나 울타리가 없다.

 

 

 

환산정으로 들어가는 다리와 환산정의 기둥의 주련 모습

 

 

 

환산정의 정면 모습

 

 

 

화순군청 표지석

 

 

 

화순군청

 

 

 

화순군 마스코트는 국화를 자유롭고 발랄하게 표현하였고, 보조마스코트1은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을 소재로 하였다. 보조마스코트2는 운주사의 와불을 소재로 하여 친근하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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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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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6 신안

 

 

 

 

 

 

 

강제윤 지음

2020, 21세기북스

 

 

배곧도서관

SM023814

 

 

981.19802

강74ㅅ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5

 

 

 

 

 

 

 

 

신안은 102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 왕국이자

이야기의 제국이다

 

 

 

다도해의 중심, 섬 답사 1번지,

한국 섬의 3분의 1을 품은

신안의 영역은 광대하다.

 

신안 도슨트 강제윤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하의도

섬 속의 작은 사막 산태를 품은 우이도

동해보다 고래가 많이 잡혔던 흑산도

700년 전 신안 보물선이 발견된 증도

세계 최강 몽골군을 물리친 압해도

 

섬 연구자가 발로 뛰며 기록한

신안의 섬과 섬사람들의 삶

그리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이야기들

 

 

 

 

 

 

 

강제윤

 

태생적 섬사람이며 섬 활동가다. 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 위원, 경상남도 ‘섬 발전 자문 위원회’ 자문 위원. 20여 년 동안 400여 개의 섬을 탐방하고 기록해 왔으며 난개발로 파괴되어 가는 섬들과 소외와 차별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섬 주민들의 기본권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동안 멸실 위기에 처한 보길도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자연 하천, 여서도 300년 돌담, 백령도 사곶해변, 관매도 폐교 등 여러 섬들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섬 정책 연구, 여객선 공영제와 섬 주민 교통권 보장, 섬 응급 의료 체계 도입, 섬 주민 연합 조직 설립 등에 주력하고 있다. 또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으로 9년째 매월 한 차례씩 섬 답사를 이끌고 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 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신안 도슨트’ 강제윤
신안의 짧은 역사 ㆍ 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01 암태도 - 벽화 속 노부부의 동백 파마머리
02 자은도 - 걷기 좋은 섬길에서 만나는 여인송
03 안좌도 -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의 생가
04 박지·반월도 - 두 스님의 사랑으로 이어진 징검다리
05 장산도 - 꽃보다 아름다운 들노래 전수관
06 하의도 - 333년 항쟁의 역사가 서린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07 신도 - ‘한국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는 섶섬
08 옥도 - 근대 최초의 기상관측소
09 도초도 - 육지처럼 드넓은 고란평야
10 비금도 - 호남 천일염전의 시작, 시조염전
11 수치도 - 원조 섬초를 키우는 시금치밭
12 우이도 - 섬 속에 펼쳐진 사막, 산태
13 흑산도 - 홍어, 고래 그리고 자산어보의 섬
14 장도 - 자연생태의 보고 람사르습지
15 홍도 - 한 편의 명작 같은 기암괴석과 동백꽃
16 영산도 - 고유의 가치를 지켜가는 섬 속의 섬
17 다물도 - 물 반 고기 반이던 서해의 해금강
18 대둔도 - 시대를 앞서갔던 세 명의 섬사람
19 태도군도 -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섬 해녀들
20 가거도 - 중국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국경의 섬
21 선도 - 할머니가 만든 꽃섬과 수선화의 집
22 기점·소악도 - 열두 예배당과 순례자의 길
23 증도 - 보물선과 태평염전을 품은 슬로시티
24 임자도 - 튤립 축제가 열리는 한국 속 네덜란드
25 압해도 - 세계 최강 몽골군을 이긴 섬사람들

대한민국 도슨트 ㆍ 신안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신안 연표
참고 자료

 

 

 

천사대교, 암태도, 동백파마벽화,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지은도, 안좌도, 구대리 씹바우, 한운리 보지바우와 좆등, 대리마을의 보지바우와 좆바우, 백제식 석실고분, 청동기시대 고인돌, 칠성바위, 방월리 고인돌, 박지 · 반월도, 장산도, 장병준 생가, 하의도, 김대중 대통령 생가,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 양세바위, 사자바위(큰바위 얼굴), 신도, 도초도, 서남문대교, 도초도 염전, 고란리돌담길, 고란리석장승, 비금도, 이세돌바둑기념관, 하누넘해변, 고운정, 시조염전, 대동염전, 박삼만동상, 수치도, 우이도, 산태, 띠밭너머해변, 우이선창, 흑산도, 고래공원, 자산문화관, 예리선착장, 고래판장, 홍어, 사촌서당, 상라산성 터, 무심사선원 터,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최익현 유허비, 진리 처녀당, 대둔도, 유배문화공원, 칠락산, 장도, 홍도(홍의도, 대풍도, 홍어도), 내망덕도, 외망덕도, 쥐머리 섬, 장도습지, 홍도10경(33경), 홍도 깃대봉 동백터널, 홍도 성황당, 정숙숯굴, 죽항제당, 영산도, 다물도(장구섬, 앞목동굴, 풍년학바위, 칠성바위, 고래섬, 낙타섬, 촛대바위, 도승바위, 물개바위, 슬픈여, 해골바위, 홍어동굴), 태도군도(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가거도(용바위, 돛단바위, 달밭밑, 기둥바위, 신녀빠진여, 석순이빠진데, 진무덕, 오구멍, 선주바위, 하늘개취, 낭여, 현철이밭밑, 목난개, 큰턱거리, 작은턱거리, 동굴여, 오동여, 망부석, 큰굴앞, 집개바위, 납닥여, 방죽개, 큰깨밭밑, 작은깨밭밑, 맨밑, 바둑방위, 볼락개, 가무락지, 칼바위, 누에머리, 개린여, 젖개린여, 높담, 평상내리, 새새골, 진무덕, 초소밑, 서바여, 편한넙, 간대취, 빈지박, 하늘개, 오리똥산데, 변주바위절벽, 산태무너진곳, 청석바위, 복여, 아홉골내미, 자갈밭, 솔퉁이, 장갓살, 망향바위, 해상터널, 동대문, 아랫물등개, 윗물등개, 고래물뿜는곳, 거북바위, 진둥개, 남문, 채석장, 큰납닥여, 장군바위, 똥개···), 큰 녹섬, 작은 녹섬, 회룡산, 협계산, 독실산, 김부련 하늘길, 섬둥반도, 가거도 백년등대, 선도, 수선화의 집, 기점도, 소악도, 병풍도,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노두길, 기적의 순례길, 증도(앞시루섬, 뒷시루섬, 우전도), 솔무등공원, 짱둥어다리, 우전해수욕장, 보물선, 태평염전, 광암염전, 효막동염전, 곡도염전, 돌마지염전, 덕정염전, 장고염전, 대초도, 소금박물관, 임자도(대둔산, 삼학산, 불갑산, 조무산, 고ㅐ길도), 대광해수욕장, 튤립축제, 전장포항, 낙월도, 멍텅구리배, 압해도, 송공산성, 송씨굴(솔구지), 압해대교, 김대중대교, 새천년대교

 

 

 

장산도 석실고분  장산도 도창리 백제식 석실고분은 해상 세력이 주둔한 흔적을 보여준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흑산)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 고려에서는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자들이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 서긍, 고려 탐방 정세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

 

 

 

낭장 윤춘이 몽골군으로부터 돌아왔다. 윤춘이 몽골에 들어간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이때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을 거느려 깃발을 늘어세우고 압해를 치는데 저와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드디어 수공(水功)의 장비를 파하였습니다."

- 『고려사절요』

 

 

 

임자도 공영버스  신안군은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완전버스공영제를 시행하였다.

 

 

 

01 암태도

벽화 속 노부부의 동백 파마머리

 

 

 

동백 파마 벽화  동백 파마머리를 한 노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난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암태도 농부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났던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왜선 9척이 연일 암태도를 도둑질하니,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 등 20여 인이 혈전을 벌여 적의 머리 3급을 베고, 잡혀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이 곧 물러갔다.

- 『조선왕조실록』중 태종실록

 

 

 

02 자은도

걷기 좋은 섬길에서 만나는 여인송

 

 

 

분계리 여인송  여인송에 얽힌 슬픈 전설은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는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03 안좌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의 생가

 

 

 

김환기의 「요코하마 풍경」  김환기 생가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이 복사본뿐이다. 이 작품은 김환기가 사촌 동생에게 선물했던 것이라고 한다.

 

 

 

김환기 생가  구조와 재료 등을 자세히 살필수록 집주인의 배려와 안목을 느낄 수 있는 한옥이다.

 

 

 

대리마을 남근석  들녘 한복판을 지키고 서 있는 남근석은 후동산 여근바위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방월리 고인돌  방원리 고인돌군은 남방식 고인돌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방월리 곳곳에 고인돌 수십 기가 산재해 있다.

 

 

 

04 박지 · 반월도

두 스님의 사랑으로 이어진 징검다리

 

 

 

05 장산도

꽃보다 아름다운 들노래 전수관

 

 

 

장병준 생가  구한말 만석꾼으로 유명했던 장진섭의 장남인 장병준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다. 장산도 대리마을에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06 하의도

333년 항쟁의 역사가 서린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김대중 대통령(위)과 생가(아래)  하의도 원 후광마을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는 마늘밭으로 변했다가 복원된 것이다. 목재까지 원래 생가에 있던 것을 공수해 복원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진정한 정치가 할 일은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하던 자와 빼앗던 자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대열에 참여케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치는 예술이 된다."

- 김대중, 『옥중서신』, 시대의창, 2009.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  전시관은 역사의 땅, 항쟁의 땅, 평화의 땅 등 3구역으로 나눠져 농민항쟁의 역사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큰 바위 얼굴  바위에 얽힌 전설에는 세상을 구할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07 신도

'한국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는 섶섬

 

 

 

신도해수욕장  국토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해수욕장 15'에 뽑힐 정도로 풍광이 빼어난 해수욕장은 목포에서 43km나 떨어져 있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다.

 

 

 

09 도초도

육지처럼 드넓은 고란평야

 

 

 

도초도 염전  이웃 섬인 비금도의 영향으로 도초도에서도 제염업이 발달하여 큰 염전들이 많다.

 

 

 

고란리 토담  고란리 돌담은 섬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토담 형태이고, 3~400년 된 오래된 담까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높다.

 

 

 

고란리 석장승  석장승은 키가 290cm나 되는 거인이다. 마치 마을의 수문장이나 수호신처럼 우뚝하다.

 

 

 

10 비금도

호남 천일염전의 시작, 시조염전

 

 

 

비금도 하누넘해변  10여 개의 아름다운 해수욕장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연인이나 부부가 많이 찾는다.

 

 

 

이날 오후 7시가 다 되어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은 푸르고 무성하였다. 그곳 역시 주민들이 있고 우두머리가 있었다. 산 앞에는 흰돌로 된 암초 수백 덩어리가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이 흡사 쌓아놓은 옥과 같았다. 귀로에 사신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추석 보름달이 떠올랐다. 밤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한데 밝은 노을이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길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배와 물건들이 온통 금빛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춤추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따르고 피리를 부니 마음과 눈이 즐거워서 앞에 먼바다가 놓여 있는 사실도 잊을 정도였다.

- 서긍 등 송나라 사신단 200여 명은 중국과 고려의 개경을 오가는 도중에 죽도(비금도)에 정박해서 유숙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박삼만 동상

 

 

 

11 수치도

원조 섬초를 키우는 시금치밭

 

 

 

12 우이도

섬 속에 펼쳐진 사막, 산태

 

 

 

섬 속의 사막 산태  잡풀과 잡목이 자라는 것을 제거해주고 나니 산태는 다시 원형을 찾아가고 있다.

 

 

 

띠밭너머해변(위)과 우이선창(아래)  인공 구조물 하나 없이 야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띠밭너머해변과 1745년 축조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이선창은 모두 우이도의 소중한 보물이다.

 

 

 

문순득의 표류 경로  문순득은 1801년 오키나와에 표류한 것을 시작으로 필리핀, 마카오, 난징, 베이징 등을 거쳐 1805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13 흑산도

홍어, 고래 그리고 자산어보의 섬

 

 

 

흑산도 바다  흑산도 인근의 바다에서는 대형 고래가 잡혔다. 수십 년 지속된 고래 집단 학살로 이제는 고래를 만나기 어렵다.

 

 

 

고래 해체 작업  일제가 시작한 흑산도 고래 남획은 1986년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흑산)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자들이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서긍,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송나라 사신

 

 

 

서리마을 사촌서당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지었던 서당으로 「자산어보」의 산실 역할을 했다.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  정약전, 최익현 등 흑산도에 유배를 왔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살필 수 있다.

 

 

 

14 장도

자연생태의 보고 람사르습지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나고 싶은 섬이었음을

아무에게도 무게지움이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떠 있고 싶은 섬이었음을

 

- 김선태 「이름 없는 섬이었음을」 중에서, 김선태, 『간이역』, 문학세계사, 1997.

 

 

 

장도습지  용천수가 흐르고, 벼가 자라고, 소가 노닐던 장도습지의 풍경은 환경부의 습지보호구역 지정 이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초원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15 홍도

한 편의 명작 같은 기암괴석과 동백꽃

 

 

 

홍도 33경

 

남문바위(1경, 구명바위), 도승바위(충견바위), 탕건바위, 병풍바위, 실금리굴(2경, 가야금굴), 흔들바위, 칼바위, 무지개바위, 제비바위, 돔바위, 기둥바위, 삼돗대바위, 원숭이바위, 시루떡바위, 용소바위, 대문바위, 좌불상, 해수욕장, 거북바위(9경), 만물상(5경), 자연탑, 부부탑바위(7경, 남근바위, 서방바위), 석화굴(3경, 꽃동굴), 등대, 독립문바위(8경), 탑섬(4경), 대풍금, 종바위, 두루미바위, 슬픈여(6경, 칠형제바위), 공작새바위(10경), 홍어굴, 노적산

 

 

 

홍도 동백터널  3월 말부터 4월 한 달 동안 홍도 분교에서 시작돼 깃대봉 산정에 이르는 숲길은 그대로 동백터널이다.

 

 

 

홍도 남문바위  홍도 10경 중 제1경인 이 바위문을 통과하면 재앙이 사라지고 소원이 성취되며 만선을 한다고 전해진다.

 

 

 

16 영산도

고유의 가치를 지켜가는 섬 속의 섬

 

 

 

영산도 마을 식당  영산도의 숙소와 식당은 모두 마을 주민이 운영하고, 입도와 숙식은 예약제로 운영하며 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산도 당산의 소저 아가씨  흑산도 진리 당의 영험한 처녀 신을 모셔온 것이다.

 

 

 

영산도 앞바다 푸르고 투명한 빛의 이국적인 바다가 있는 영산도는 명품 섬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도 제법 찾는 섬이 됐지만 여전히 섬에는 노인들이 태반이다.

 

 

 

17 다물도

물 반 고기 반이던 서해의 해금강

 

 

 

다물도 앞바다의 풍년학바위  누가 그려놓은 것처럼 학의 자태가 선명한 이 바위에는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일하는 섬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전설이 깃들어 있다.

 

 

 

18 대둔도

시대를 앞서갔던 세 명의 섬사람

 

 

 

나는 어보를 만들려는 생각으로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대(장덕순)라는 소년을 만났다. 창대는 늘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들을 거절하면서 고서를 탐독했다. 나는 마침내 이 소년을 맞아들여 함께 묵으며 물고기 연구를 시작했다.

 

- 정약전 『자산어보』 서문에서

 

 

 

나주 바다 서쪽에 한 선비가 기이하니

평생 본 적 없지만 서로 마음을 알았네

엄능처럼 인간사 초개같이 여겨

동강에 물러나 낚시줄이나 손질하네

 

- 손암이 창대에게 써준 시, 다산 정약용의 저서 『여유당집』에

 

 

 

19 태도군도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섬 해녀들

 

 

 

하태도의 해녀  태도 섬에 사는 여자들의 본업은 대부분 물질이다. 이들 해녀를 태도 인근에서는 물에꾼이라 부른다.

 

 

 

이용석 열사의 흉상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한 열사의 흉상은 상태도 선착장을 지키고 있다.

 

 

 

20 가거도

중국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국경의 섬

 

 

 

가게산 무너져 평지나 되라

강물이나 몰라져서 육로나 되라

 

백년을 살자고 기약한 그 사람

금년도 못 살고 이별이 들었네

 

가거도라 앞강에 일중선이 뜨고

정든 님 술잔에 잔 버끔 떴네

 

오는 새 가는 새 듬불 속에서 놀고

임재 없는 이내 몸은 어데로 갈지 모린다

 

- 「가거도 산다이」에서

 

 

 

가거도항의 이정표  420km 떨어진 서울보다 중국이 더 가까운 국제적인 항구 가거도의 위치를 보여주는 이정표다.

 

 

 

항리마을 섬둥반도  가거도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곳으로 영화나 TV 프로그램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1 선도

할머니가 만든 꽃섬과 수선화의 집

 

 

 

선도 수선화의 집(위)과 수선화 할머니(아래)  수선화 할머니는 해마다 더 심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꽃을 심었다. 30년 넘게 꽃만 가꾸었다. 할머니가 꽃을 심는 것은 스스로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라는 뜻도 있다.

 

 

 

22 기점 · 소악도

열두 예배당과 순례자의 길

 

 

 

기점 · 소악도의 노두길 섬과 섬 사이를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갯벌에 넓적한 징검돌을 놓아 만든 길을 노두라 한다.

 

 

 

순례자의 길 1번 기도처  원래 대합실이었던 건물이 산토리니 건물을 닮은 기도처로 변신하였다. 순례자는 기도처의 작은 종을 치면서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자의 길 11번 기도처  바다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11번 기도처에서 순례자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23 증도

보물선과 태평염전을 품은 슬로시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아득하게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데 이때 실바람이 불어와 향기가 코끝에 풍겨왔다. 벽지 바닷가 섬에 있어 널리 드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 오횡묵의 정무일기인 『지도군 총쇄록』에 증도 우전리 해변에 핀 해당화 이야기

 

 

 

신안 보물선 발굴 작업  증도에서 발굴된 보물선은 현재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있다. 720여 편으로 쪼개진 선체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전시 중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태평염전  태평염전은 여의도 2배 크기의 거대 염전으로 한 해 소금 생산량만 1만 5000톤 규모다.

 

 

 

24 임자도

튤립 축제가 열리는 한국 속 네덜란드

 

 

 

임자도 대광해변과 튤립공원  흡사 네덜란드의 풍경인 듯 느껴지는 임자도 4월 풍경이다. 해마다 평균 5만 명이 이 풍경을 즐기기 위해 임자도를 방문한다.

 

 

 

"타리어장이 개시된 지 300년이 넘었다. 민어어장으로는 타리어장이 가장 크고 다음은 굴업어장 농가 한 채뿐이던 섬 타리에 파시가 서면 가건물이 수백 개 생기고 어부만 수천 명, 눌러오는 사람들만 매일 50~60여 명 왕래. 가건물 160호 중 병원 1곳, 음식점 90호, 요리점 15호, 잡화상 6곳, 이발관 3곳 등. 요리점에는 일본 조선 합해서 130여 명의 창기가 있다.

 

- 임봉순, 『도서순례 하의도방면(6)』, <동아일보>, 1928. 8. 18.

 

 

 

"파시는 선술집, 여관(遊女屋), 요릿집, 잡화가게, 이발소, 선구점, 소금가게, 목욕탕 등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모두 타지 어부들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이동부락은 영광군 우도(위도)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 우도 근해에서는 4월부터 5월 하순에 걸쳐 조기가 잡힌다. 파시 때에 이곳에서 장사하던 사람 중의 한 패는 어장을 쫓아서 6월에 연평도로 간다. 나머지 장사꾼들은 우도 뒤쪽에서 7월 내내 머문다. 이 기간 동안 우도 뒤쪽에서 갈치와 삼치가 잡힌다.

우도 뒤쪽에 머물던 사람들은 이 생선들을 가지고 타리섬으로 이동한다. 연평도에 갔던 패 중에서도 어획기를 끝내면 곧바로 타리섬으로 오는 사람도 잇다. 또 천년동이라는 곳에서 잠시 돈벌이를 하고 나서 타리섬으로 합류하는 사람도 있다.

타리섬에는 7~8월 내내 체류하며, 다시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나뉘어서 한 패는 종자도로, 다른 패는 어란진으로 간다. 그리고 군산, 목포, 우도 뒤쪽 등 근거지로 철수하는 사람도 있다. 겨울에는 흑산도에서 고래잡이를 하기 위하여 그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파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은 집을 접어서 배에 싣고 간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도 접어서 가져가기 때문에 운임을 받고 실어 보내는 사람도 있고, 배를 특별히 마련하여 가족 모두와 함께 이동하는 사람도 있다. 파시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출생지는 일정하지 않다. 목포 부근 출신, 영광군 출신, 그중에는 내지인(일본인)도 이 무리에 참여했다."

 

- 에틱 박물관, 『일본 민속학자가 본 1930년대 서해도서 민속』 (최길성 역), 민속원, 2004.

 

 

 

25 압해도

세계 최강 몽골군을 이긴 섬사람들

 

 

 

낭장 윤춘이 몽골군으로부터 돌아왔다. 윤춘이 몽골에 들어간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이때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을 거느려 깃발을 늘어세우고 압해를 치는데 저와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드디어 수의 장비를 파하였습니다."

 

- 『고려사절요』 제17권

 

 

 

정덕성의 무덤  압해 정씨의 시조인 정덕성은 당나라 대승상이었다가 유배되어 압해도로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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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5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박건호 지음

2020,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야도서관

SB144661

 

 

911

박14ㅋ  c. 2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근현대사

 

 

 

 

박건호

 

196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서 기록학을 공부했다. 명덕외국어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지금은 강남 대성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답사를 가서 우연히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운 것을 계기로 30여 년간 역사 자료를 모으며 컬렉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수집’이란 최고의 즐거움이자 휴식이다. 그동안 모은 수집품의 양을 자신도 정확히 모를 만큼 방대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며 《국사 수업자료집》, 《주제별 슬라이드 수업자료집》,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 등 다양한 역사 교육 자료를 만들어 역사 교사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집품 하나하나에 담긴 깊고 오랜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역사 컬렉터’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수집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와 역사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

 

 

 

 

 

 

 

 

차례

 

책을 펴내며

 


MY COLLECTION 1 |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독립문과 세 번의 독립



MY COLLECTION 2 |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정미의병과 사라진 통역관



MY COLLECTION 3 | 조선의 영어 교재,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

정약용과 지석영이 《아학편》을 논하다



MY COLLECTION 4 |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오시오, 경성자동차학교로!



MY COLLECTION 5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나는 ‘기테이 손’이 아니라 손기정이다



MY COLLECTION 6 |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사진 한 장에 담긴 전쟁과 평화



MY COLLECTION 7 |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피로 쓴 사직서에 담긴 반탁운동 이야기



MY COLLECTION 8 |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호열자, 1946년 해방 조선을 덮치다



MY COLLECTION 9 |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난중일기, 치열한 고지전의 비극을 담다



MY COLLECTION 10 |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되었나?



MY COLLECTION 11 |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전쟁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삶에 대하여



MY COLLECTION 12 |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MY COLLECTION 13 |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대통령 생일이 뭣이 그리 중헌디!



MY COLLECTION 14 |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MY COLLECTION 1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독립문과

세 번의 독립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1897년, 영수증 12.3×18.0cm, 봉투 7.7×18.8cm, 박건호 소장.

 

밀양 도사를 역임했던 안효응(安孝膺)이 독립문 건립 성금을 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영수증은 건양(建陽) 2년(1897) 2월 23일 독립협회 회계장 안경수(安駉壽)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다. 1897년 발행한 독립문 건립 성금 영수증? 독립문은 과연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일까?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 <독립가(獨立歌)>의 후렴 부분

 

 

 

(1절)    일천팔백구십륙년 / 건양 원년 십일월에

          아세아주 독립 조선 / 독립문을 새로 세우네

 

(2절)    영은문이 독립(문)이니 / 모화관이 공원이라

          이백여 년 병자지치(丙子之恥) / 오늘이야 씻는구나

- <독립가(獨立歌)>

 

 

 

 

 

 

광복 후의 독립문 도안  1955년에 발행된 광복 10주년 기념우표(왼쪽)와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주화(오른쪽)에 독립문이 그려져 있다. (박건호 소장)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이를테면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 · 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

 

 

 

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보고 삼 년 전까지 끌어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대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 ······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영은문의 다른 이름]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시기[士氣]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려면 다만 그 문만 헐러버릴 뿐이 아니라 그 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논설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서재필은 이날 논설을 통해 독립문 건립을 제안했다. (박건호 소장)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유럽]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세계 역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이완용, 독립협회 사무위원장,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자

 

 

 

건립 직후의 독립문 모습을 담은 스테레오뷰 사진  현판석에 새겨 넣은 태극기와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 앞으로 옛 영은문 주춧돌이 남아 잇다. 사진 속 땔감을 실어나르는 모습처럼 당시 사람들은 이 문을 빈번히 지나다녔다. (박건호 소장)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脣齒)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 <2 · 8독립선언서>,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표

 

 

 

일제강점기 경성 명소로 엽서에 소개된 독립문 왼쪽 엽서는 사진 옆에 "독립문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석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문의 의미를 전혀 불온시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대였다면 이런 엽서를 금지하거나 아니면 독립문을 철거했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를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 싸우러 나아가세

- <독립군가>

 

 

 

대한민력에 그려진 독립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달력(1920년 대한민력)에 실린 그림(아래)이다. 독립군이 광복 후 독립문을 통과해 서울로 들어오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문이 건립된 지 30년이 지난 1920년 무렵에는 이미 독립문의 의미가 변화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독립문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大韓民國獨立一週年記念)'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는 독립문. 어느 가족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독립문 옆을 지나는 전차 선로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건호 소장)

 

 

 

MY COLLECTION 2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정미의병과

사라진 통역관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1907년, 34.5×28.0cm, 박건호 소장.

 

청주 군수 윤태흥(尹泰興)이 산내이상 면장 송영수(宋榮洙)애개 내린 훈령이다. 내용은 제천군에서 '폭도'에게 잡혀간 통역관 조용익(趙容益)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철저히 수색해서 보고하라는 것이다. 한지에 등사한 문서로 군수 이름과 면 이름, 면장 이름만 직접 붓으로 적었다. '폭도'는 누구이며, 조용익은 왜 납치된 것일까?

 

 

 

산내이상(山內二上) 면장(面長) 송영수(宋榮洙) 좌하(座下)

금일간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 통역 조용익(趙容益)은 본래 경성 서린동 63통 4호 사람으로 올해 9월 9일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제천군에 출장왔다가 동월 22일에 폭도에게 포박(捕縛)되어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未詳)하기로······.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 순종, 1907년 7월 31일에 내린 군대 해산 조칙

 

 

 

서양 언론에 보도된 대한제국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양위식을 보도한 이탈리아 화보 신문(왼쪽)과 군대 해산 직후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을 보도한 프랑스 화보신문(오른쪽)이다. (박건호 소장)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해주고 있습니다. ······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1908)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매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린 의병 사진이다. (출처 : 위키백과)

 

 

 

다른 여러 도시도 파괴되어 있었지만, 제천의 대파괴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제천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 나는 말에서 내려 길을 따라가며 잿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북적대고 풍요롭던 마을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 조각과 회색 잿더미, 타다 남은 찌꺼기만 널려 있었다. 멀쩡한 벽도, 대들보도, 깨지지 않은 옹기조차 하나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1908)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된 제천 일대  이 역시 매켄지가 찍은 사진으로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렸다. (출처 : 아시아뉴스통신)

 

 

 

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호패에는 사진이 없는 대신 신체 특징을 기재해 개인을 구별했다. 사진은 조선시대에 살았던 '윤재흡'의 호패 앞면과 뒷면이다. 뒷면에 '적면(赤面, 얼굴이 붉다)'이라고 윤재흡의 신체 특징을 밝혀놓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시대 호패는 대부분 이런 신체 특징이 생략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 (조용익이 폭도들에게)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하기로 해인(該人, 그 사람)의 용모를 좌개하여 훈령을 내리니 훈령 도착 즉시 본 면내에 상세 조사하여 생사간(生死間) 수색 보고하되 없으면 없다고 보고할 것.

 

                                                                                                     융희 원년 11월 13일 본(本) 군수 윤태홍

 

 

 

훈령의 '좌개(左開)' 내용  항목을 나누어 조용익의 용모를 꼼꼼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키가 5척 3~4촌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단발을 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좌개(左開)>

조용익 용모
· 나이: 23세
· 신장: 5척 3∼4촌9약 160~164센티미터)
· 머리: 비교적 크고 머리 뒤통수가 조금 튀어나옴
· 얼굴: 보통이고 작은 편
· 눈: 둥글고 큰편
· 코: 큰 편
· 입: 큰 편
· 입술: 윗입술은 보통이고, 아랫입술은 두툼한 편
· 치아: 희고 고르게 배열
· 눈썹: 보통
· 수염: 없음
· 머리카락: 단발
· 두흔(痘痕; 마마자국): 없음
· 기타특징: 머리 오른쪽 뒤에 길이 1촌되는 신일형(新日形; 갓 해가 떠오른 모양)의 흉터가 있음. 신체 건장하고 비만. 일본어를 잘하고 발음이 좋음

 

 

 

MY COLLECTION 3

조선의 영어 교재,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

 

정약용과 지석영이

《아학편》을

논하다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兒學編)》 1908년, 15.2×22.3cm, 박건호 소장.

 

송촌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은 조선의 첫 영어 교재라 할 수 잇다. 누군가 새로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제목도 '大韓國文(대한국문)'으로 써놓아 처음에는 표지만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한편, 1804년 다산 정약용이 쓴 같은 제목의 책이 있는데, 이 두 《아학편》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지으신 것이다. ······ 돌아보건대 요즈음 개항이 되고서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 교역을 하는데, 다른 나라의 우수한 점을 취하여 자기 나라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며 열강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다투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학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글자를 중국과 서양 및 일본의 음과 뜻으로 풀어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소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해준다.

- 지석영

 

 

 

다산 정약용(1762~1836, 위)과 송촌 지석영(1855~1935, 아래)  두 사람의 생애는 약 100년의 시차가 있지만 관심 분야가 겹치는 부분이 꽤 있다. (다산박물관 소장 / 출처 : 전통문화포털)

 

 

 

정약용의 《아학편》과 지석영의 《아학편》  정양용의 《아학편》(필사본, 위)은 각 한자에 우리 말뜻과 음을 붙인 간단한 구조이다. 지석영의 《아학편》(아래)은 한자를 중심에 두고 좌우와 하단에 우리 말뜻과 음, 중국어 발음, 그리고 일본어와 영어를 표기하고 그 음을 한글로 표기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박건호 소장)

 

 

 

영어학교 도강기  대한제국기 영어 교육 전문 기관이었던 관립영어학교에서 1896년에 발행한 '이원기(李源綺)' 학생의 '도강기(都講記)'로, 일종의 성적표이다. 당시 영어학교에서 영어 독해, 문법, 번역, 작문, 받아쓰기, 회화, 산술 등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교관이 쓴 학생 평도 재미있다. "在家不甚做工 做工甚惰 品行端正"(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이 매우 게으르다. 그러나 품행은 단정하다.) 우리나라 초창기 영어 교육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미군정기에 영어 공용화와 함께 처음으로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영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사진은 1945년 10월 어느 중학교의 영어 수업 장면이다.(출처 : NEWSIS)

 

 

 

MY COLLECTION 4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오시오,

경성자동차학교로!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1923년. 9.0×14.0cm, 박건호 소장.

 

경성자동차학교에 다니던 김남두(金南斗)가 고향에 있는 김계순(金桂淳)에게 보낸 엽서이다. 뒷면에 "한강을 서너 차례 갔다 차마 그리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 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라고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쓴 대목이 보인다. 인기 직업이던 자동차 운전사를 꿈꾸는 김남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

- 영국 화보잡지 《그래픽(Graphic)》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삽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의 설명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  영국 화보잡지 《그래픽》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그림으로, 조선 사람들이 자동차라는 괴물을 처음 본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혼비백산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초창기 운전사의 모습  자동차를 타고 있는 (뒷줄 오른쪽부터) 영친왕과 다케히토왕, 이토히로부미. 1900년대에 촬영된

사진으로, 초창기 운전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운전사 최인선  1919년 전주 출신의 최인선이 23세의 나이로 면허를 얻어 조선 최초의 여성 운전사가 되었다. 《매일신보》는 1919년 12월 6일자 기사에서 조선에서 여성 운전사는 '여자계의 신기록'이라며 여성 운전사의 탄생을 보도했다.

 

 

 

최초의 택시, '경성탁시'  1919년 말 일본인 노무라 겐조(野村賢三)가 일본에서 크라이슬러 닷지 차량 두 대를 들여와 택시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요금은 시간당으로 계산했는데, 경성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 3원이었다.

 

 

 

일차 상별 이후로 소식이 구조(久阻, 오래 막힘)하여 정의(情誼)가 박약하와 ······ 극염(極炎)에 그동안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자동차학교 입학 후 [집에서] 금전을 불송(不送)하야 1개월 식비를 주지 못하고 졸업은 맞게 되었으나 주인이 매일 학교까지 와서 식비 달라 함으로 안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한강을 서너 차례 갔다 차마 그리 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 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 심량(心諒)하시고 심량하시와 식비는 우인(友人)에게 빌리고 졸업 후 전북 도청으로 면허시험을 보고자 하노니 차비 5량[50전]만 구변하여 7월 25일 내로 송부하여 주시면 면허를 마쳐 형님의 은혜를 갚겠사오니 동생을 구원하여주시기를 거저 바라나이다. 차비만 부송하시면 즉시 내려가겠습니다.

- 김남두

 

 

 

손님을 싣고 가는 인력거꾼  1910~192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인력거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손님과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바짓단까지 걷어붙인 인력거꾼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인력거꾼의 옷차림에서 그의 고된 노동을 짐작하게 된다. 한국에서 인력거는 1890년대 처음 등장해 해방 직후에 거의 자취를 감춘다.

 

 

 

미터기 택시 영업 허가  1925년 6월 24일자 《시대일보》는 미터기를 단 택시의 영업을 곧 허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경성 시가에서 이런 택시가 영업을 하면 인력거꾼에게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북 정읍 인력거친목회에서는 지난 24일에 긴급회의를 연 후 그날 오후 일곱 시부터 대총조(大塚組) 인력거꾼 30명이 돌연 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는데. ······ 수월 전부터는 정읍 읍내로부터 역전까지 매일 기차 도착할 때 ······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는 승객이 전혀 없어 [수입이] 하루에 담배 8갑도 못 됨으로 [사납금] 50전을 30전으로 감(減)해달라고 누차 교섭하였으나 절대로 거절할 뿐 [아니라] 외려 폭언을 발함으로 그와 같이 동맹 파업을 한 것이라고.

- 《시대일보》 1926년 5월 29일

 

 

 

탁시-에 타격받은 수천 인력거꾼의 슬픈 처지.

최근의 경성 시내에는 각처에 값싸고 신속한 탁시-회사가 생기어, 시내에는 어데를 가든지 '일원 균일(一圓 均一)'이라는 표어 아래. 날로 그 세력이 번창하여······.

- 《조선일보》 1928년 3월 4일

 

 

 

MY COLLECTION 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나는 '기테이 손'이

아니라 손기정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1936년. 10.0×3.5cm, 박건호 소장.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의 손기정 사인이다. 사인지 앞면(위)에 손기정의 한글 이름('손긔졍')과 영어 이름('Kichung Son')이 적혀 있다. 이름 밑에는 'KOREAN'이라고 썼다. '고개 숙인 챔피언' 손기정은 이 작은 종이에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올림픽 마라톤 제패 기념우표  1992년 체신부(오늘날 정보통신부의 전신)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라톤 제패를 기리는 기념우표 2종을 동시에 발행해 손기정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출처 : 거창박물관)

 

 

 

반환점을 도는 손기정  우여곡절을 겪으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손기정은 반환점(Wendepunkt)을 돌 때까지는 영국 선수 하퍼와 2~3위를 다투었다.

 

 

 

한국 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이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달렸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보기도 싫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영광의 1착 테이프를 끊고 시상대에 섰을 때, 우리는 <애국가>가 연주되지 않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월계관을 쓰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쏟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 손기정, 회고록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학마을B&M, 2012)에서

 

 

 

고개 숙인 챔피언  마라톤 우승 후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과 남승룡의 모습. 손기정은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지만, 남승룡은 가릴 게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출처 : 연합뉴스)

 

 

 

남 형과 내가 이긴 것은 다행이요.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가슴에 북받쳐 오르며 울음만이 나옵니다. 남 형도 역시 나와 같은 모양입니다. 우승했다고 반겨하는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 시상식 후 《조선일보》 김동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1936)

 

 

 

슬푸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 나주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만큼 손기정의 심정을 압축해서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엽서에 단 세 글자만 적었다. '슬푸다!!?'

 

 

 

손 선수는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수많은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응하면서 'KOREA 손기정'이라고 적는 등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두 선수는 일반 조선인의 접근을 쉽게 만들려는 듯 선수 대열의 마지막에 자리 잡으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의 뜻에 영합하려는 것 같은 행동이 있었다.

- 손기정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 고등계 형사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

 

 

 

실제 크기의 손기정 사인지  가로 10.0cm, 세로 3.5cm의 이 작은 사인지에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다. (위) 사인지 앞면, (아래) 사인지 뒷면.

 

 

 

······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개막식,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조그마한 소녀 마라토너의 손에서 성화를 넘겨받은 사람이 바로 그날 몹시도 슬프고 부끄러웠던 마라톤 우승자 '손'[손기정]이었다. 성화를 손에 든 백발이 성성한 이 슬픈 마라토너는 마치 세 살배기 아이처럼 기뻐하며 달렸다! 연출자의 지시는 없었지만 이 이야기는 이처럼 기쁘기 그지없는 장면을 연출해냈다.

- 손기정의 이야기를 알게 된 슈테판 뮐러(Stefan Müller)라는 독일인은 2001년 독일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남긴 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를 봉송하는 손기정  손기정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성화봉송 주자로 참여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 비운의 마라토너는 성화를 번쩍 들고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기쁘게 달렸다.

 

 

 

MY COLLECTION 6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사진 한 장에

담긴

전쟁과 평화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1941년, 15.5×11.0cm, 박건호 소장

 

아홉 명의 청년이 같이 찍은 기념사진으로,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아래에는 '10년 후에 다시 만날 동무'라는 글귀와 '1951. 1. 5.'라고 적혀 있다. 이 날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재회를 약속한 이 청년들은 과연 10년 후 다시 만났을까?

 

뒷줄 왼쪽부터 정휘진, 오주영, 김국현, 현중건, 이성우

앞줄 왼쪽부터 황성환, 이병무, 박병석, 신혁○(마지막 한 글자는 해독 불가)

 

 

 

청년들의 이름이 적힌 사진 뒷면  사진 뒷면에 청년들의 이름과 그 밖의 다른 정보들이 적혀 있다. 맨 왼쪽에 세로로 '昭和 十六年 一月 五日 寫(소화 16년 1월 5일 찍음)'이라고 쓴 부분도 보인다.

 

 

 

일제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신민의 서사'

 

 

 

궁성 요배 홍보 전단

 

 

 

'아침마다 궁성 요배'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매일 아침 일본 궁성을 향해 허리 숙여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 입소  1938년 《동맹뉴스(同盟ニュ―ス)》에 실린 조선인 육군지원병의 훈련 개시를 알리는 기사.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하는 조선인 지원병들의 모습이다.

 

 

 

육군특별지원병명예지가(陸軍特別志願兵名譽之家) 명패  육군특별지원병이 있는 집 대문에 달아두었던 것으로, 측면에 '증(贈) 애국부인회조선본부(愛國婦人會朝鮮本部)'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7.0×16.0cm.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소화 19년(1944) 10월에 찍은 지원병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반도 특지(半島 特志)'란 글자가 보이는데, '특지'는 '특별지원병'을 줄여 쓴 표현이다. (박건호 소장)

 

 

 

입대 전 형제의 작별 기념사진  아홉 명의 청년이 그랬듯이 당시 전쟁터에 나가는 이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1943년 10월 경북 안동에서 형은 일본 관동군에, 동생은 일본 해군에 입대하기 전 작별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 아래에는 형이 1944년 전사한 것으로 적혀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MY COLLECTION 7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피로 쓴

사직서에 담긴

반탁운동 이야기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1946년, 20.0×28.5cm, 박건호 소장.

 

전라북도 익산 군청 삼림계 주사로 일하던 전우경(全祐慶)이 1946년 1월 1일에 쓴 사직서다. 왼쪽이 사직서의 첫 면이고, 오른쪽이 사직서의 두 번째 면이다. 두 번째 면에 '전우경'의 이름이 보인다. 사직서 뒤에는 '신탁반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혈서가 붙어 있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한 새해 첫 날 피로 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우경이 사직서 뒤에 붙인 두 장의 혈서  한 장에는 '신탁반대', 또 한 장에는 '조선독입만세'라고 썼다. ' '독입'은 '독립'의 의미로 쓴 것인데, 당시에는 '독립'을 '독입'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박건호 소장)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 발표  1945년 12월 29일, 한반도를 연합국이 신탁통치하기로 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내용이 담긴 벽보를 서울 시민들이 보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우익의 반탁운동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전단은 당시 '자살동맹(自殺同盟)'이라는 이름으로 뿌려졌다. 전단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하야 정히 그대들이 독립을 허용치 아니하거든 우리 손으로 모두 무찔러서 이 땅을 황무지로 인적 하나 없는 광야로 만들고 우리도 모두 죽어버리자꾸나. 길이길이 노예가 되어버리느니보다는"으로 끝맺고 있다. (박건호 소장) 아래 사진은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 집회 장면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절대 지지를 주장하는 좌익 집회 모습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한 연합국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군정(軍政)이 독립을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믿었기 때문에 협조한바 뜻밖에 신탁통치안이 실시되어 그 기관으로 전환하려 하는 오늘날 더 협력할 수 없는 고로 이에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기에 사직함.

 

                                                                                                                              단기 4279년 1월 1일

                                                                                                                      익산군청 삼림 주사 전우경
                                                                                                                           전라북도 도지사 전(殿)

 

 

 

관공서 방면에서도 신탁이라는 굴욕을 용인할 수 없다 하여 각 직원들은 시무를 중지한 상태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뿐이요, 그중에는 분연히 퇴청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리하여 모든 사무는 중단되고 말았다.

- 《민중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총동원위원회 주관 반탁시위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탁시위에서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이날 수만 명의 시민이 참가해 반탁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백범김구기념관 소장)

 

 

 

MY COLLECTION 8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호열자, 1946년

해방 조선을

덮치다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1946년, 17.2×27.2cm, 박건호 소장.

 

1946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전남의 무안 공립농잠학교에서 학생 장상기(張祥氣)에게 발급한 귀향 명령 증명서이다. 등사한 문서에 학생의 집 주소와 이름, 생년월일만 직접 손으로 적어 넣었다. 콜레라 창궐 당시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있다.

 

 

 

신이시여! 모든 사람의 몰골이 어떻게 저럴 수 있습니까! 거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온통 죽음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도심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이 버려진 재난 지역 같습니다.

                                                                                                       – 새무엘 피프스의 《일기》(1660~1669)

 

 

 

콜레라의 창궐  프랑스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12년 12월 1일자에 실린 화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을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거대한 낫으로 사람들을 풀 베듯이 베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콜레라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도시 방역 활동  1946년 5월 서울시 위생소의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서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이 유행하여 구토와 설사를 하고 관격(關格, 급하게 체해 인사불성이 됨)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열흘 동안에 자그마치 1,000여 명이나 됩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 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확산될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 21년 8월 13일 기사

 

 

 

 

《호열랄병예방주의서(虎列剌病豫防注意書)》  1902년(광무 6) 대한제국 의학교에서 편찬한 콜레라 예방서다. 《호열랄병예방주의서》라는 책 이름처럼 당시에는 콜레라를 '호열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랄(剌)' 자가 '자(刺)' 자와 비슷해 '호열자'로 잘못 알려지면서 이후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무서운 괴질의 아가리에 물리운 경성'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자에 실린 삽화이다. 콜레라는 호열자 혹은 호역으로 불렸으므로 콜레라에 대한 공포를 '호랑이'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조선인들은 쥐 귀신이라는 악귀가 몸 안으로 들어와 콜레라에 걸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발을 통해 들어와 몸 위쪽으로 올라와서 복부에 이르게 되는데, 귀신이 들어오면서 근육에 쥐가 난다고 믿었다. 시내를 걷다보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이 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는 쥐 귀신을 잡기 위함이다. 어디를 가나 이러한 어리석은 예를 볼 수 있었다.

                                                        -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 《Memories of life in Korea》 (1893~1895)

 

 

 

콜레라 예방 접종 1920년 인천의 한 동네에서 위생경찰과 한 조를 이룬 의사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콜레라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 1919년~1920년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1만 1,084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다이쇼(大正) 9년 호열자병 방역지》에 실린 사진이다.

 

 

 

'40호 부락이 전멸 상태'  콜레라의 참화를 보도한 《영남일보》 1946년 8월 4일자 기사. 경북 달성군 논공면 하동의 40가구뿐인 어느 부락에서 30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의 다른 이름인 '호역(虎疫)'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우울한 소식 호역 사망자 2,000명 돌파'라는 기사도 보인다.

 

 

 

성공적인 콜레라 방역 표창장  1963년 11월 25일 보건사회부 장관이 콜레라 방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기리고자 부산의 한 의사에게 수여한 표창장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콜레라는 연례행사처럼 찾아왔고, 그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박건호 소장)

 

 

 

증명서


주소: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월암리 86번지
씨명: 장상기(張祥氣) (1929년 8월 23일생)
우인(右人)은 본교 제1학년 재학중인바 금번 본교 소재지 부근에 호열자 창궐로 인하야 임시 조치로 무기 휴교하야 귀향을 명령하였음을 이에 증명함

 

서기 1946년 8월 29일
무안공립농잠학교장

 

 

 

MY COLLECTION 9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난중일기,

치열한 고지전의

비극을 담다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1951년, 6.5×12.3cm, 박건호 소장.

 

전북 김제 출신의 20대 청년이었던 차영근 소대장이 한국전쟁 중 남긴 전시 수첩이다. 1951년 3월부터 약 11개월에 걸쳐 쓴 일기로, 전쟁 상황과 부대 생활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치열한 고지전의 참상뿐 아니라, 전쟁 중에도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된 유품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에서 박재권, 남궁선 이등중사에 이어 세 번째로 김기봉 이등중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김기봉 이등중사는 27세였던 1951년 12월에 참전해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제4차 전투에서 전사햇다. 휴전협정 체결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위) 김기봉 이등중사의 철모와 소총 등 소지품. (아래) 고인의 생전 모습.

 

 

 

작별 인사  고지전에서 죽어간 군인들은 익명의 존재로 묻혀 있지만, 박재권과 차영근처럼 저마다 이름과 사연을 가진 개인들이었다. 사진은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에서 입대하는 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1951년 3월 2일

오전 4시 적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평창군 진부면 진부리에서 중대CP[지휘소]로부터 고지 주력이 있는 데로 이동하여 날이 샜다. 그 후 연락차 대대장에게 갔다. 또다시 연락으로 고지에 왔다. 적에게 포위되어 1300고지에 6시간 몰래 엎드려 있고, 어떤 독립 가옥에서 11시간 몰래 숨어 있다가 아군이 재탈환할 때까지 있었다. 6차례에 걸친 인민군의 수색이 있었으나 천장 속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하여 발에 얼음이 박히며, 천장에서 소변을 보았다. 아! 잊지 못할 대관령······ 아 나의 생명!

 

8월 12일 일 비

오늘도 비가 온다. 나의 호에서 ○○[우물?]을 판다. 물이 난다. 이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8월 23일

오늘은 우리 부대가 이동하는 날이다. 오늘 이동하는데 벌써 비가 내린 지 1주일, 비가 와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산악 80리가 넘는 이 험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강원도 고성군 고수동면 984고지에 밤 8시 30분에 도착. 비를 맞고 산 위에서 떨면서 날을 새웠다. 어찌나 인민군이 많이 죽었는지 냄새에 코를 들 수 없다. 호(壕) 속에 사체, 그 위에 앉았다. 아······ 인간의 일생 험하다.

 

8월 24일 금 맑음

오늘부터 교전이 개시. 중대는 부상자 8명 발생함. 전투는 치열함.

 

8월 25일 토 맑음

924고지로부터 751고지로 전진. 계속 전투가 치열함. 중대장 부상당함.

 

8월 26일 일 맑음

계속 전투. 적의 포탄이 심히 떨어진다. 눈코 뜰 새 없다.

 

8월 28일 화 비

비는 계속하여 내린다. 11사단 20연대는 884고지를 점령하였다. 오늘도 포탄은 계속 떨어진다. 호가 무너져서 2명 부상을 당하였다. 중대장이 없어 다른 날보다 더 바쁘다.

 

8월 29일 수 흐림

오들도 적은 끊임없이 포를 쏟아 포진지에 두 방이 떨어져 2명이나 전상(戰傷)당하였다. 전투는 계속된다. 6중대 공격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였다.

 

8월 30일 목 맑음

오늘은 비행기 보급품을 많이 떨어뜨렸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였으며 일부 병사가 가서 주워 왔다. 계속 포를 쏘며 떨어진다.

 

 

 

전시 수첩 1  차영근은 손바닥만 한 작은 전시수첩에 매일의 사건과 단상을 기록했다. 짧은 글 속에 한국전쟁의 참상이 담겨 있다. (박건호 소장)

 

 

 

 

9월 18일 화 맑음

오늘도 전진. 약 2.4키로 진격하였다. 지뢰에 2명 부상당하였다. 지긋지긋하다.

 

9월 20일 목 맑음

175고지에서 대강리로 이동. 밤과 감자를 삶아 먹었다. 보급이 되지 않았다. 아······배가고프다.그러나군심(軍心)으로버틸뿐이다.

 

 

9월 22일 토 맑음

적의 반격. 야간 포사격을 실시함. 그리하여 미명(未明)에 적을 완전 격퇴함.

 

10월 3일 수 맑음

○○ 호를 완전히 구축하였다. 손바닥이 부러텄다.

 

10월 12일 금

월미산 공격이다. 중대는 포로 6명, 장총2정, 88포판 1대를 노획하였다. 금일은 1, 2목표를 점령하였다.

 

10월 14일 일 비

오늘은 어제의 공격을 계속하여 월미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성공이다.

 

11월 1일 수 비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호가 샌다. 모두 골치를 앓는다.

 

11월 2일 목 흐림

오늘은 어제 비가 내린 것이 개의치 않고 계속 오나. 먼 산에는 눈이 하얗게 왔다. 백설이 날린다. 나는 공격준비의 포진지를 구축하였다.

 

11월 12일 일 비

적의 기습이다. 약 1개 연대가 기습하여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적은 완전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나는 OP에 나온 후 적 기습으로는 처음이다.

 

 

 

고지의 병사들  1953년 철원 서부 지역 고지에서 병사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1951년 7월 30일 월요일 흐림

오늘 사단 3첩장과 경향신문사 기자단이 중대 일선 생활을 시찰하였다. 오늘도 집에서 편지가 아니 오는구나. 그리운 남쪽을 바라본다.

 

8월 20일 월 비

오늘은 전사(戰死)를 대비하여 ○○을 만들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 나는 이것을 만들 적에 문득 고향이 그리웠으며 모성(母性) 등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9월 15일 토 맑음

오늘은 추석이다. 둥근 달을 바라보니 고향 산천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며 오늘도 소금을 찍어서 저녁을 먹었다. 탄식······

 

9월 16일 일 맑음

오늘도 저 달은 둥글다. 어머니 아버님은 더 달을 바라보시겠지. 아······ 산악의 추석.

 

10월 20일 토 비

형님과 동생의 서신을 받았다. 정근의 사진과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 또한 받았다. 사진을 손에 드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 어머니······.

 

12월 17일 일 흐림

다시 금산 방면으로 출발하여 금산 40리를 앞두고 하차하여 조식함. 고지 1개 배치되었다. 나는 백부 집 앞을 지나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편지만 써서 떨어뜨렸다. 임실을 지나면서도 편지만 떨어뜨렸다. 그 심중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고향을 지날 때의 심중이야말로······.

 

 

 

 

전시 수첩 2  차영근의 일기 중 1월 7일과 8일 부분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직후여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글씨체가 매우 거칠고 흐트러져 있다. 글씨도 울고 있다. "아······ 子息이 않이다. 不孝子다"로 시작해서 "아······ 아버지······"로 끝나고 있다. (박건호 소장)

 

 

 

1952년 1월 7일 일 맑음

아······ 자식이 아니다. 불효자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접하고 가지 못한 신세. 나는 한없이 상부(上部)를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고향을 향하여 아버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1월 8일

군인 생활이란 이런 것인가. 아······ 아버지······.

 

1월 9일 화 맑음

산청에서 진주, 하동을 거쳐 신흥에 도착 방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사죄하면 좋을지······. 솔직히 말하면 자식은 부모를 생각지 않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셔도 가보지 못한 이 불효자······.

 

 

 

MY COLLECTION 10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되었나?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1952년, 20.2×22.9cm, 박건호 소장.

 

1952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 권봉출(權鳳出)이 예천에 있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다.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절절한 내용을 연필로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경북 예천 출신의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된 것일까?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이우근, 한국전쟁 중 포항전투에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으로 싸우다 전사한 동성중학교 3학년 일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북한군에게 뿌린 선전 삐라(앞뒷면)

 

 

 

북한군 포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잡힌 북한군들이 몸수색을 받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임시 수용된 전쟁포로  1950년 9월 23일, 포로들이 철조망이 둘러쳐진 집결지에 임시로 수용되어 있다.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팻말이 전쟁포로가 된 이들의 처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공산포로와 반공포로

(위) 북한군 소년 포로는 처음에는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수용되었다. 몇 개월 후 이 소년이 공산포로 수용동으로 옮기겠다고 요청하자 반공포로 수용동에서는 이 소년을 처형하는 대신 보내기 전 몸에 태극기 그림과 '멸공', '애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아래) 북한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 반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태극기를 흔들면서 기뻐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부모님 전상서

시세가 복잡하고 추운 겨울이 닥친 이때 부모님께서는 몸 성히 계시옵나이까?

그리고 팔십이 가까운 할머니는 어떠신지, 단 세 식구의 가족일지라도 누구 한 분 벅차게 일할 분 없이 가사에 얽매어 때에 따라서는 갖은 풍파와 고통과 고생은 얼마나 계시며, 또한 불효 이 자식이래야 단 하나 있는 것 집을 떠난 뒤 부모 된 죄로 하루하루에 닥치는 걱정과 생각은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집 떠난 이후 아무 몸에 탈 없이 내 고향에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툭툭한 이불에 적당한 식사의 유엔의 원조로서 몸 건강히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장난과 상호 간의 정으로서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가까워오는 석방의 기일을 고대하고 있을 따름이니 부모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세 식구 둘러앉아 웃음으로 지내는 가정을 이룬다면 타향에 있는 이 불효자식일지라도 손꼽아 비나이다.

그리고 큰집의 가족들은 몸 편히들 계시고 작은 형님은 집에 계시는지 걱정이 되며 정다운 큰아버지, 큰어머니, 큰 형님은 몸 편히 잘 계십니까? 부디 저의 걱정은 마시고 몸 편히 계십시오. 작년 겨울은 몸 편히 부산에서 지냈고, 올 봄에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동 올 때 부산 계시는 고모와 고모부를 만났을 때 뜻밖의 일이라 무한히 울던 그 얼굴이 지금도 사무칩니다. 피난 내려온 누나도 어떻게 해서 고모네 집에 와 있다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자식의 부탁은 몸 성히들 계시다가 제가 돌아 갈 때는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화락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혼자 있는 아주머니가 그 나어린 여식애를 데리고 얼마나 고생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다운 동리 사람들에게 안부 드리며 이만 그칩니다. 몸 편히 계십시오.

1951년(4284) 12월 13일 자식 봉출 씀

 

 

 

MY COLLECTION 11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전쟁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삶에 대하여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1952년, 14.0×10.5cm, 박건호 소장

 

한국전쟁 중 촬영한 '영동학도 육상경기대회 기념 (우승)' 사진이다. 사진 뒷면에는 '영동지구 올림피아 대회 때 우승을 획득하면서'라고 쓰여 있다. 전시에 열린 육상대회라니 의아하지만, 전쟁 중에도 일상을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일을 시작하는 수선공  가게가 있던 건물은 포격으로 무너져버렸지만 다시 그 자리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는 어느 수선공의 모습이다. 그는 첫 일거리로 국군 보병의 구두 수선을 맡았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소장)

 

 

 

삼척공고의 교표  삼척공고의 교표는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한국전쟁 때는 맨 오른쪽 것을 사용했다.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 속 학생들의 운동복에 이 교표가 새겨져 있다.

 

교장과 육상부 주장(아래)  뒷줄 가운데 앉은 이가 심호열 교장. 교장 앞에 앉은 학생은 육상부 주장으로 보인다. 운동복 상의에 새겨진 교표가 다른 학생들의 것과 다르다.

 

 

 

군경원호 포스터  사진의 오른쪽에 서 있는 교사 뒤로 포스터와 표어가 붙어 있다.

 

 

 

<군경원호의 노래>

 

(1절) 아들은 일선군경 우리의 용사 / 구름떼 달려가듯 쌈터로 가고
       아버지 혼자 남아 도롱옷을 입고 / 아들이 하던 농사 맡아하시네

 

(2절) 아들을 보내놓고 혼자 남아서 / 터밭에서 김매는 늙은 어머니
       그 아들 그 얼굴도 모두 잊고서 / 오늘은 신명 앞에 승리를 비네.

 

(후렴) 이 나라 위한 그 정성 거룩한 그 마음 / 그를 도와주게 다같이
        그를 도와주세

 

 

 

상이용사 전역식  1951년 진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상이용사 전역식이 열렸다. (유엔기록보존소 소장 / 출처 : 국가기록원)

 

 

 

전쟁의 흔적  학교 건물의 현관 왼쪽, 깨진 유리창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근계(謹啓) 시하(時下) 초춘지제(初春之際)에 존체만중(尊体萬重) 하심을 앙축(仰祝)하오며, 본교 정서 교육 현실에 감하여 아동의 흥미와 아동의 심미적인 정의도야(情意陶冶)와 감상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교육에 중요한 부면(部面)을 차지하고 있는 음악 교육에 지장이 극심하던 차에 금번 다행히 군내 각 초중등학교에서 풍금을 공동구입케 된 바 본교 매월 500원의 사친회비를 징수하여서는 운영난으로 도저히 풍금을 구입할 도리가 없어 재삼(再三) 방법을 강구한 결과 아동 1인당 2,000원씩 징수키로 되었으니 3월 15일까지 납부하여주심을 앙망하나이다.

 

4285년 3월 2일

삼성국민학교 사친회장 정시헌

 

 

 

MY COLLECTION 12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1950년대, 박건호 소장.

 

태극기가 걸린 결혼식을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결혼식을 시작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언제부터 왜 결혼식장에 태극기가 등장했을까? 결혼 기념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이오시프 비사리노비치 스탈린 동지께서 어젯밤 돌아가셨다. 당 위원회에서는 앞으로 7일 동안을 국제 애도기간으로 공포하는 바이다. 앞으로 이 기간에 애도 집회 이외의 모든 집회는 절대 불허한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누구든 반역죄로 처단할 것이다. 위대한 인민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흩뜨리는 어떠한 행동도 절대 불허한다. 웃음도 안 되고 축구 경기, 결혼식은 물론 장례식도 안 된다.

 

 

 

영화 <사일런트 웨딩>의 포스터  2009년 개봉된 이 영화는 비극적인 결혼식 이야기를 통해 옛 소련의 강압적인 통치를 풍자하고 있다.

 

 

 

문화혁명기 중국의 결혼식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의 한 장면으로, 문화혁명기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혁명화된 결혼식'이 강요되었다.

 

 

 

서울동부서는 15일 서 모 군(20. 서울 성동구 하일동)을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즉심에 넘겼는데. 장갑 행상인 서 군은 14일 하오 5시쯤 천호동 문화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국가가 울려 나올 때 그대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것. 서군은 지날 1일부터 시작된 <애국가> 연주 시 지켜야할 기립 예의를 어긴 첫 케이스가 된 것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예의를 모두 지켜야.

- 1971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의 <돋보기>

 

 

 

태극기가 걸린 결혼식장  (왼쪽) 대형 태극기가 정면 한가운데에 걸려 있는 결혼식장의 모습. 태극기가 워낙 커서 자칫 공공기관 행사 기념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다. (오른쪽)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런 피로연장에도 태극기가 필수품처럼 걸려 있다. (박건호 소장)

 

 

 

국기 하강식  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 <애국가>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국민은 하던 일도, 가던 길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이러한 전 국민의 '일시 멈춤'은 1976년 10월부터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경향신문)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일제강점기 수신 교과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통해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양성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왼쪽, 박건호 소장)

 

일제강점기 말의 결혼 사진  당시 신식 결혼식장에는 일장기나 만국기를 거는 것이 의례였던 모양이다. 만국기 중에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도 보인다. (오른쪽, 박건호 소장)

 

 

 

'국기 배례'가 행해진 결혼식  이 역시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결혼식장 기념사진이다. 사진의 왼쪽(붉은 테두리 부분)에 결혼식 식순이 게시되어 있는데 '국기 배례'가 포함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1960년대 결혼 기념사진  결혼식장에서 태극기가 왼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박건호 소장)

 

 

 

MY COLLECTION 13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대통령 생일이

뭣이 그리

중헌디!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1956~1957년, 19.8×25.0cm, 박건호 소장.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김장환의 일기장에는 1956년 초부터 1957년 4월까지 쓴 일기가 기록되어 잇다. 김장환은 비록 10대였지만, 일기를 보건대 세상일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소소한 일상 말고도 정치 ·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관찰하고 소감을 기록했다.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 기념 송수탑(왼쪽)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남한산성에 세워진 송수탑 앞에서 찍은 어느 가족의 기념사진이다. 송수탑 위에 장식된 동물은 최고 권력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다. 이 송수탑은 4 · 19혁명 후 4미터가량의 탑 본체와 청동 봉황상을 분리하여 탑 부분은 기단 앞 땅속에 묻었고, 청동 조각은 남한산성 공원 측이 보관하던 중 유실되었다. (박건호 소장)

 

이승만 대통령 84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 상장(오른쪽)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맞아 실시된 글짓기 대회에서 이재유 학생이 가작으로 받은 상장이다. (박건호 소장)

 

 

 

제3대 정 · 부통령 선거 홍보물  민주당이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에 많은 국민이 호응하자 여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는 구호로 응수했다. (위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장 / 가운데 - 박건호 소장 / 아래 - 국가기록원 소장)

 

 

 

3월 15일 목요일

현재 정치상으로 보면 이 대통령이 무슨 이유인지 3선 출마를 안 한다고 자유당 회의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공무원 요원들은 국민을 시켜 이 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나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민을 억지로 시켜 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으니 이것은 민주국가에 위반된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동회에서는 강제로 대통령 재출마의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 둥, 안하면 재미적다는 등과 같은 일이 발생하여 말이 많다. 그리고 매일 경무대에 대통령 재출마 요청인들이 무려 4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이 정직히 원하는 바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무원의 조정으로 끌려온 사람인가?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대통령께서 가끔 우리나라 경제 상태를 아시려고 동화 백화점에 오셔서 물건을 사신다. 그런데 그 비서들이 그 전날 상점에 가서 이 대통령에겐 싸게 팔기를 정해 놓는다. 그들은 참된 대통령을 참되게 모시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대통령에 장점만 뵈려는 원숭이의 극(劇)이니 만치 이것이 쭉 계속된다면 후일의 우리 세계는 어떻게 될는지 의문이다.

 

 

 

3월 25일 일요일 비, 눈

저녁부터 젖은 강산을 내려퍼붓는 눈은 아직 늦겨울을 다시 상징하는 듯 지천 없이 떨어지는 양은 내일의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함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지루하게 만듦인지······.

 

3월 26일 월요일 갬, 흐림

오늘은 대통령 생신이었건만 날이 질고 해서 우리들은 행사가 없었으나 육해공군의 사관생들의 사열 등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수업은커녕 학교에서 바로 집에 돌아오다.

 

3월 29일 목요일 갬

오늘은 연기한 대통령 생일 축하식이다. 동무들은 생일도 연기할 수 있나 하고 말하였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연세가 세계적으로 많으신 대통령의 축하만은 일기 관계로 연기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4월 28일 토요일 갬

요즘은 전기도 24시간 준다. 그리고 판잣집 철거 문제를 취소했다. 그것뿐이랴. 세금도 잘 안 받는다. 그것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매우 큰 계획인 것 같다. 이러고 보니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에 한 번씩 있었으면 그 얼마나 좋은 그리고 살기 편리한 나라와 도시가 될까.

 

5월 5일 토요일 비

이번 입후보자 중 이승만 대통령에 제일 강적으로 대항하던 신익희씨가 이리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는 좀 그를 투표해줄 가망이 있었고, 더욱이 이번엔 어떻게 된 셈인지 민심이 그리로 많이 쏠렸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전주로 정견 발표 차 떠났는데 기차 안에서 발병되어 이리에 도착하여 호남병원에 입원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15분 후인 오전 5시 45분에 임종하셨다는 것이다.

 

5월 6일 일요일 갬

민족을 울려놓고 돌아가신 고 신익희씨의 시체를 담은 엠브란스[앰뷸런스]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의 아우성 소리. 그중에는 대학생을 비롯한 고등학생이 많았다. 그 행렬이 서울역을 지나 중앙청에 이르자 국민의 흥분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 신익희씨의 시체가 다 안치되자 그 무리들은 경무대로 데모, 경찰을 막 두드리면서 팔매질로 말미암아 경찰과 헌병에서 뿜는 총에 겨우 진압. 한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총에 쓰러진 자는 수십 명에 되는 듯하나 다 끌고 가서 잘 알 수 없다는 것······.

 

5월 15일 화요일 갬

오늘은 장차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통령 그리고 부통령 선거일이다. 대통령엔 해공 신익희 선생의 빈 자리를 둔 채, 이승만 박사와 조봉암씨의 결전이고, 부통령 후보에선 8인 중 박기출씨와 이종태씨가 탈퇴했다. 우리 집에선 아버지 주장에 대통령엔 조봉암, 부통령엔 장면씨로 투표했다. 여지껏 선전 방해라든가 폭력을 사용한 것은 자유당의 짓이 매우 많았다 한다. 그리고 지금 계산으로는 대통령에는 틀림없이 이승만 씨일 테고, 부통령엔 장면 씨일 것이라고 추측되나 뒤에 자유 분위기를 폭발하거나 또는 무더기투표를 하면 부통령엔 변동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매스게임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80세 생일 잔치를 대규모로 치르고서도 이후 매년 성대한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84세 생일이었던 1959년 3월 26일에도 80세 생일과 마찬가지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경축식이 있었고, 학생들도 여전히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매스게임을 펼쳤다. (국가기록원 소장)

 

 

 

3월 24일 일요일 흐림

오늘은 의사가 더 한번 왕진을 왔었는데, 온 이유는 어머니가 매우 약하시므로 링그루[링거] 주사를 놓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핏줄이 어찌나 가는지 그만 못 놓고 다른 주사만 놓고 갔다. 어머니는 병 시초보다도 더 매우 야위셨다. 요새는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형편이다.

 

3월 26일 화요일

오늘은 대통령 82세 생일날이다. 요즘같이 경제가 핍박하고 절양궁민이 많은 이때 그렇게 화려하게 연다 하니 좀 엉터리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도 어제까지 마스게임 연습을 했었으나 연기했음으로 실제로 활동은 어렵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양자로 이기붕의 맏아들을 정해서 새 부자식(父子式)도 오늘 거행했다.

 

3월 28일 목요일 눈. 흐림

어머니의 병환은 자꾸 더해 가시는 것만 같다. 요새는 진지 잡수시는 족족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다시 죽을 끓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양꿀을 사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꿀물이라도 끓여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달걀 잡수셨으나 여위실대로 여위시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웃음도 즐거움도 없이 그저 슬픔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번 어머님을 이별하고 그 슬픔과 아울러 어머님이 살아 계신 동안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무엇을 남겨주셨으며 우리의 장래는 어머니의 과거 지도로써 어떻게 나가야 어머님의 그 애쓰신 보람이 조금이나마 부끄럼 없이 나타내야 하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명상하면서 글을 쓰고자 한다. 나는 지금 나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철거된 동상들  4 · 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이승만 동상도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졌다. 서울 남산(위)과 탑골공원(아래 오른쪽)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된 직후의 사진으로, 우상 정치의 허망함을 증언해주는 장면이다. 당시 85세의 노(老)대통령은 매년 자신의 생일을 찬양해 마지않던 자신의 신민(臣民)들이 왜 이토록 분노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의 신민들은 4 · 19혁명을 통해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MY COLLECTION 14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1970년대로 추정, 11.2×8.3cm, 박건호 소장.

 

한 남성이 '김유신 장군 일대기 기록화전'을 보기 위해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있는 사진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 지지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위, 가운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였던 박정희와 김대중의 선거 벽보.(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장 / 김대중평화센터 소장)

(아래)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이 본인이 출마하는 마지막 선거임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개표 결과 영남 지역에서 몰표를 받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식은 1971년 7월 1일 2,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 앞에서 거행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 정상화시킨다.

 

 

 

비상계엄 선포  《경향신문》은 1972년 10월 18일자 1면에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제목 아래 박정희의 특별선언을 보도했다. 박정희 사진 왼쪽에 세로로 '평화통일(平和統一) 지향 위해 결단(決斷)'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박정희는 이렇게 남북 대화를 집권 연장에 악용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홍보물  국민투표를 앞두고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유신헌법에 찬성하면 번영과 통일이 오고, 반대하면 혼란과 분열과 파멸이 온다는 이분법을 들이대며 찬성을 강요하고 있다. (박건호 소장)

 

 

유신 홍보용 가사

 

십일칠(10. 17) 유신은 /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하듯이 / 남북통일 되고요
근대화에 목말라 / 바가지에 물 떠서
목마른 자 물주는 / 바가지를 믿어요.

 

 

 

구국의 영웅 이순신  (위) 1968년 4월 이순신 성웅화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이 건립되었다. (아래) 어느 학교의 기념사진으로 현관 위에 '충무정신 바탕 삼아 민족중흥 앞장서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삼국통일의 기수 김유신  경주에 있는 김유신의 무덤과 동상이다. 이순신에 이어 김유신도 박정희 정권을 이념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바라는 그 마음으로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비상조치를 지지할 것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앞에서 밝힌 제반 개혁이, 공약한 시일 내에 모두 순조로이 완결될 것으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으로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 국민들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 10월 17일 특별선언(유신선언)

 

 

 

유신헌법 국민투표 홍보 표어  왼쪽의 표어 3종은 1972년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당시의 홍보 표어들이다. 유신헌법에 찬성을 해야 평화통일과 민족번영,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가 토착화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맨 오른쪽 표어는 문화공보부에서 제작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에는 반공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1972년 유신을 선포하면서 갑자기 평화통일을 위해 독재(물론 자신은 이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했지만)가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반공’과 ‘평화통일’ 두 구호 모두 박정희에게는 자신의 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매우 어색한 이런 조합의 구호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반공'과 '평화통일’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구호였으나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과감히 활용했다. '반공으로 평화통일'이 가당하기나 한가? (박건호 소장)

 

 

 

“나는 사람들의 삶을 모으고,
역사의 흔적들과 대화하는 일에 빠져 있다”

역사를 수집하는 컬렉터의 특별하고 가슴 뛰는 수집 일기

30여 년 전,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우연히 찾은 토기 파편 하나가 열정적인 역사 수집의 시작이었다. 사진 한 장에서부터 일기장, 편지, 영수증, 사인, 사직서, 온갖 증명서까지 개개인의 삶과 일상이 담긴 물건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자료에 숨겨진 역사적 코드들을 하나둘씩 추적하고, 그날을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면서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시간은 희열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컬렉터를 사로잡은 수집과 역사 읽기의 흥미로운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이 책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다."

- 김육훈(서울공업고등학교 역사 교사)

 

"그는 열정적인 수집가이며 진지한 탐구자이며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 윤종배(명일중학교 역사 교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소소한 자료들에 쌓인 먼지를 떨어내고 온기 어린 글로 역사적 의미를 불어넣는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 정요근(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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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

2021-003 춘천

 

 

 

 

 

 

전석순 지음

2020, 21세기북스

 

 

배곧도서관

SM023813

 

 

981.14702

전54ㅊ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4

 

 

 

낭만과 청춘을

오롯이 품은 춘천은

새로운 무늬를 조각하고 있다

 

 

 

 

세 개의 댐이 생기면서

육로로 뱃길이 되었고,

섬으로 남은 마을도 많았다.

산과 호수가 만든 풍경에 사람들이 몰렸다.

 

춘천 도슨트 전석순

 

 

낭만의 도시 춘천 속

우리가 몰랐던 역사와 일상을 마주하다.

 

소양강댐, 닭갈비골목, 청평사,

육림고개, 우두온수지, 캠프페이지 등

여행객이 바라보는 풍경 이면의

진짜 춘천을 보여주는 25곳의 이야기

 

 

 

 

 

전석순

1983년 춘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전의자」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1년 장편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장편소설로 『거의 모든 거짓말』, 중편소설로 『밤이 아홉이라도』가 있다. 여전히 춘천에 머물며 글을 쓰고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춘천 도슨트’ 전석순
춘천의 짧은 역사 ㆍ 낭만과 청춘으로 읽히는 봄내

01 소양강댐 - 호반의 도시 춘천 여행의 첫걸음
02 소양강 처녀상 - 소양강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
03 명동 - 가장 활발하고 뜨거운 번화가
04 닭갈비골목 - 싸고 푸짐한 춘천의 대표 음식
05 청구서적 - 춘천시민들의 만남의 장소
06 경춘서점 - 헌책을 팔지 않는 헌책방
07 피카디리 - 춘천 최초의 현대식 극장
08 육림극장 - 춘천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름 ‘육림’
09 육림고개 -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한 뉴트로 고갯길
10 낭만시장 -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
11 죽림동성당 - 100년 된 한국 가톨릭 미술의 보고
12 망대골목 - 90년 동안 춘천을 내려다본 망대를 품은 미로골목
13 축제극장 몸짓 - 세계 3대 마임축제의 현장
14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 국내 최초 원두커피가 춘천에서 시작된 사연
15 상상마당 춘천 - 어린이회관에서 모두를 위한 놀이터로
16 중도 - 레고랜드와 선사유적지
17 우두온수지 - 소양강 냉수를 햇빛으로 데우는 독특한 저수지
18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 지금 막 눌러서 내놓는 국수
19 옥광산 - 세계에 단 하나뿐인 옥 캐는 광산
20 청평사 - 천년을 지나온 ‘섬 속의 절’
21 후평동 버스 종점 - 춘천 시내버스의 종점이자 기점
22 봉의산 - 춘천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
23 춘천혈거유지 - 신석기시대 한 가족이 살았던 동굴
24 김유정 문학촌 - 마을 전체가 소설의 배경이 되다
25 캠프페이지 - 춘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미군기지

대한민국 도슨트 ㆍ 춘천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춘천 연표
참고 자료

 

 

 

충렬탑, 에티오피아참전기념비,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촌천지구전적기념관, 춘천리코더페스티벌, 춘천 고(古)음악제, 김유정문화제, 봄내예술제, 춘천영화제, 축제극장 몸짓, 춘천인형극장,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춘천칠층석탑, 탑거리길, 위봉문, 봉황길, 낭만시장, 망대골목, 역사인물길, 춘천 문화유적 사색의 길, 물레길, 봄내길, 삼악산로프웨이, 소양강댐, 춘천댐, 의암댐, 기와집골, 근화동 당간지주, 소양강 처녀상, 소양강 스카이워크, 곰보다리, 자연의 생명(쏘가리상), 소양정, 소양로비석군, 명동, 닭갈비골목, 육림고개, 캠프페이지, 청구서적, 책방마실(전원길), 서툰책방(향교 옆길), 있는 그대로(동내면), 실레책방(김유정 문학촌), 파피루스(고양이책방), 경춘서점, 피카디리(소양극장), 육림극장, 육림고개, 약사리문화마을, 카페 더 피플, 중앙시장, 낭만FM 라디오, 춘천풍물시장, 샘밭장터, 번개시장, 죽림동성당, 공지천, 약사리고개, 망대골목, 효자동 낭만골목, 반짝반짝 힐링 골목길, 춘천마임축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이디오피아집, 공지천, 근화동396 청년창업공간 P6, 상상마당 춘천, 춘천예술마당, 중도, 의암호, 위도, 육림랜드, 강원도립화목원, 서면 박사마을, 우두온수지,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옥광산, 옥동굴체험장, 장난감박물관, 달아실(근대사박물관), 달아실정원, 청평사(영지), 구성폭포, 등선폭포(삼악산), 구곡폭포(문배마을), 문수원정원, 회전문, 공주탑(강원도문화재 제8호), 와룡담폭포, 와룡담(공주탕), 후평동 버스 종점, 봉의산, 춘천이궁, 문소각, 조양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위봉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호), 춘천혈거유지(강원도기념물 1호), 봉의산성(강원도기념물 제26호), 봉의산순의비, 김유정우첵국, 김유정역, 김유정문학촌, 김유정기념전시관, 실레마을, 김유정기적비, 김유정문인비, 공지천 조각공원, 춘천문학공원, 강촌레일바이크, 책과 인쇄 박물관, 캠프페이지, 낙원문화공원, 춘천역사박물관, 시민커뮤니케이션센터, 음악분수, 꿈자람어린이공원, 봄내체육관, 꿈자람물정원

 

 

 

월남전 참전 용사 환송 장면  기차를 타고 떠나는 장병들에게 가족, 연인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춘천역은 월남전 참전 용사뿐만 아니라 102보충대로 향하는 장병들이 거치는 곳이기도 했다.

 

 

 

01 소양강댐

호반의 도시 춘천 여행의 첫걸음

 

 

 

소양강댐  춘천댐, 의암댐, 소양강댐이 만들어낸 크고 잔잔한 호수는 춘천다운 풍경들 중 하나다. 춘천에서는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져도 소양강댐 수문이 열리지 않으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02 소양강 처녀상

소양강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

 

 

 

춘천댁 사공

                                   - 이미자(1967년)

 

 

실안개 소리없이 풀리는 소양강에
조각배 뛰워 놓고 미련을 싣고
춘천댁 사공이 꽃각시 사공이
한사코 오마던 그 님을 기다리네
떠나간 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춘천댁 사공

흰구름 정처없이 떠도는 호수 위에
꽃잎을 뿌려놓고 사연을 싣고
춘천댁 사공이 꽃각시 사공이
사십리 물길에 추억을 새겨보네
떠나간 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춘천댁 사공

 

 

 

소양강 처녀

 

                                    - 김태희(1969)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 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작사 : 반야월, 작곡 : 이호

 

 

 

소양강 처녀상  동상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쥐고 있고, 왼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손에 쥔 것이 갈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노래 속 이미지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03 명동

가장 활발하고 뜨거운 번화가

 

 

 

 

04 닭갈비골목

싸고 푸짐한 춘천의 대표 음식

 

 

 

춘천닭갈비  숯불구이로 시작된 춘천닭갈비는 여러 형태를 거쳐 뼈 없는 닭고기에 야채를 많이 넣고 철판에서 볶는 현재의 요리법으로 정착했다.

 

 

 

05 청구서적

춘천시민들의 만남의 장소

 

 

 

청구서적  춘천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던 청구서적은 서점을 찾는 발길이 줄면서2006년 문을 닫았다.

 

 

 

 

춘천으로

 

                                                - 모던 다락방

 

 

 

모던다락방 아홉 번째 싱글앨범 [춘천으로]

 

"봄 바람이 좋은 곳,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 특별하지 않아 특별한 춘천에 대한 노래."

 

여느때와 같이 기타를 잡고 곡 작업을 하던 보통날.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문득 춘천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순간 기분좋은 상쾌함에 매료되어 단숨에 써내려간 곡. 

 

어렴풋이 스케치를 끝내고 우리는 모든 작업을 춘천에서 완성하기로 했다.

호수가 보이는 녹음실, 잔디밭 위로 거니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 영감을 받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노래에 담아 내었다. 

 

-추천글-

 

모던다락방의 [춘천으로]를 듣고

이 외 수 (소설가)

 

춘천이 안개로 유명한 도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쿠스틱 듀오 [모던다락방]은 춘천 출신으로 알려진 뮤지션들이다.

그들의 음성에는 안개가 녹아 있다. 그냥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감미롭게 녹아 있다.

그들의 노래를 흡입하면 옅은 꿀물이 분무된 안개를 흡입하는 듯한 감미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의 화음은 모든 세포들을 혼곤하게 적실뿐만 아니라 모든 혈관들을 청량하게 적시기도 한다.

가사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춘천으로 오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일단 무슨 이유로든 춘천에 오게 되면, 그리고 모던다락방의 노래를 듣게 되면 그대는 영원히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던다락방이 추천하는 [춘천으로]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꿀팁!

1. 무작정 춘천행 열차에 올라 노래를 듣는다. 반드시 창가자리에 앉아야 한다. 

2. 춘천에 도착해 관광지가 아닌 내 발이 이끄는 곳을 누비벼 듣는다. 

3. 오랜만에 자동차 창문을 열고 춘천의 청정공기를 맞으며 노래를 듣는다. 

 

[Credit]

Executive Produced by 모던다락방

Lyrics by 정병걸

Composed by 정병걸

 

Vocals by 김윤철, 정병걸

Acoustic Guitar by 정병걸

Bass Guitar by 정병걸

Piano by 유주영

Drum programming by 정병걸

 

Mixed by 이동희 (KT&G 상상마당 춘천)

Mastered by 도정회 (@사운드맥스)

Recorded at KT&G 상상마당 춘천 레코딩스튜디오

 

Album artwork by 변영근 

Album cover design by 이동섭

제작지원 춘천시문화재단

 

*이 앨범은 2019 춘천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사업 지원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ternal links]

www.facebook.com/moderndarakbang

www.instagram.com/moderdarakbang_officia

                                                                                 (출처 : genie)

 

 

 

06 경춘서점

헌책을 팔지 않는 헌책방

 

 

 

옛 경춘서점(위)과 현재 경춘서적(아래)  헌책이 빼곡하던 경춘서점은 2018년 문을 닫았다. 현재 경춘서점은 같은 자리에서 조금 달라진 간판을 걸고 덮밥이나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 되었다.

 

 

 

07 피카디리

춘천 최초의 현대식 극장

 

 

 

소양극장의 옛 모습  춘천 최초의 현대식 극장이었던 소양극장은 주한미군부대 영화관 자리에 들어서는 바람에 건물 모양도 미국 영화관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 닫은 피카디리  2011년 폐관한 피카디리는 풀지 못한 숙제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08 육림극장

춘천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름 '육림'

 

 

 

육림극장의 현재 모습  2006년 폐관 후 방치되었던 극장은 육림아울렛이 되었다. 오른쪽으로는 육림극장의 이름을 딴 육림고개가 이어진다.

 

 

 

09 육림고개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한 뉴트로 고갯길

 

 

 

10 낭만시장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

 

 

 

 

낭만시장의 오늘  춘천에서 가장 큰 중앙시장(위)은 2010년 낭만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시장을 정비하며, 매일 오후 5시에 상인들이 진행하는 낭만FM 라디오(아래)도 개국했다.

 

 

 

새벽을 여는 번개시장(벽화문화거리)

 

 

 

11 죽림동성당

100년 된 한국 가톨릭 미술의 보고

 

 

 

죽림동 성당(위)과 예수성심상(아래)  한국 가톨릭 미술의 보고로 불리는 죽림동성당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수성심상이 있다. 2014년에 세워진 이 예수성심상은 춘천 전체를 품에 안을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12 망대골목

90년 동안 춘천을 내려다본 망대를 품은 미로골목

 

 

 

망대(위)와 망대골목(아래)  망대는 눈에 잘 띄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좁고 사방이 막힌 것처럼 보이는 망대골목의 미로 끝에 있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힐링 골목길

 

 

 

13 축제극장 몸짓

세계 3대 마임축제의 현장

 

 

 

도깨비난장 공연  춘천마임축제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도깨비난장은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이어진다.

 

 

 

축제극장 몸짓  2010년 개관한 소규모 공연 전문 극장인 축제극장 몸짓은 마임을 비롯해 매달 새로운 공연으로 춘천을 물들이고 있다.

 

 

 

14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국내 최초 원두커피가 춘천에서 시작된 사연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2007년에 세워진 기념관의 외형은 에티오피아 전통가옥을 본 따 만든 것이다. 이 기념관은 춘천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세웠기에 그 의미가 더 깊다.

 

 

 

이디오피아집(위)과 원두커피(아래)  한국 최초 로스터리카페 이디오피아집은 한때 음악다방으로 운영되어 가수 박인희와 양희은이 디제이를 하고 소설가 이외수가 매일 찾아와 글을 쓰기도 했다.

 

 

 

공지천

 

 

 

15 상상마당 춘천

어린이회관에서 모두를 위한 놀이터로

 

 

 

상상마당 춘천의 야외원형극장  어린이회관이었을 때 조성한 강원도 최초의 야외원형극장은 변함이 없다. 1,300석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주변 자연환경과 유연하게 어울린다.

 

 

 

"처음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 어린이와의 공간이라니 좋은 테마구나 싶어 재미있게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났죠. 왜냐면 나 자신도 어린이와 마찬가지니까요.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아늑하게 숨어 있다 나오면 햇빛이 옆으로 비쳐 들어오다가 지붕에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 오면 탁 트여 구름다리 같은 데서 호수와 산이 보이는 공간상의 해프닝을 테마로 삼았어요. 어린이는 바로 노는 사람이란 개념이고, 그런 어린이 본질을 세련시킬 문화적 공간으로 이 건축물의 개념을 살렸지요."

- 김수근, <경향신문>, 1980년 7월 11일.

 

 

 

상상마당 춘천  옛 어린이회관의 빨간 벽돌을 그대로 살린 것이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16 중도

레고랜드와 선사유적지

 

 

 

중도  1993년 중도의 모습이다. 섬 위쪽의 초록색 부분이 중도유원지다.

 

 

 

이 섬에서는 신석기 말기와 철기시대 초기의 유물과 주거지가 대량 발굴되어 북한강에 형성된 철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 2001년부터 중도 운영을 맡은 강원도개발공사가 선착장에 세운 안내판에 적힌 내용

 

 

 

17 우두온수지

소양강 냉수를 햇빛으로 데우는 독특한 저수지

 

 

 

18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지금 막 눌러서 내놓는 국수

 

 

 

춘천막국수박물관  국수틀과 가마솥을 본뜬 외관이 인상적이다. 막국수와 메밀에 대해 알 수 있고 2층에서는 막국수를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다.

 

 

 

춘천막국수  담백한 맛을 위해 파와 마늘을 안 쓰는 막국수는 육수, 설탕, 참기름, 식초, 겨자를 어떻게 양념해서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19 옥광산

세계에 단 하나뿐인 옥 캐는 광산

 

 

 

옥산가  옥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과 찜질방이 있다.

 

 

 

옥동굴체험장  옥동굴체험장은 18도 내외를 유지하여 더운 여름 피서지로도 인기다.

 

 

 

20 청평사

천년을 지나온 '섬 속의 절'

 

 

 

구성폭포  청평사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폭포로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 하여 구성폭포라고 불린다.

 

 

 

청평사의 영지와 주변 풍경  풀숲이 우거져 있고 가을에는 낙엽까지 더해져 시야가 좁지만 영지에는 오봉산이 비친다. 그제야 청평사에서는 오봉산이 두 개가 된다는 의미도, 이자현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연못을 지은 이유도 이해가 된다.

 

 

 

청평사 회전문  실제로 돌아가는 회전문이 아니다. 회전문이라는 이름에 대해 윤장대와 관련이 있다는 설과 윤회전생의 줄임말이라는 설이 있다.

 

 

 

21 후평동 버스 종점

춘천 시내버스의 종점이자 기점

 

 

 

주변 농촌의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여서 이곳의 공업을 크게 일으켜 보려고 춘천시에서 1967년 후평동에 십오만 평을 마련해서 경공업 단지를 만들어 공장을 끌어들이기 시작햇다. 이곳에는 1980년까지 자잘한 공장이 스물두 개가 들어섰는데 그중에서 메리야스를 만드는 평안 섬유 주식회사와 라면을 만드는 삼양 식품 주식회사를 빼면 모두 종사원이 백 명도 채 못 되는 규모이고 또 생산품의 양도 적다.

- 춘천공업단지에 대해, 『한국의 발견 - 강원도』, 뿌리 깊은 나무, 1983.

 

 

 

22 봉의산

춘천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

 

 

 

의암호에서 바라본 봉의산  춘천 사람들은 계절을 짐작할 때 달력을 보는 대신 봉의산으로 시선을 돌린다.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봉의산은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조양루  고종이 유사시 피신하여 임시로 머물기 위해 만든 춘천이궁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아침 햇살이 드는 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23 춘천혈거유지

신석기시대 한 가족이 살았던 동굴

 

 

 

춘천혈거유지의 입구(위)와 내부(아래)의 모습  춘천혈거유지는 직경 4m 크기의 원형으로 반원형 천장의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1m다. 이 크기를 바탕으로 4~6명이 함께 살았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춘천부 지도 속 봉의산  1872년에 제작된 춘천부 지도에서 오랜 세월 춘천을 지켜온 봉의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4 김유정 문학촌

마을 전체가 소설의 배경이 되다

 

 

 

과거 김유정역  예전에는 통일호와 무궁화호가 김유정역으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지금은 근처에 새로 생긴 김유정역에 ITX-청춘열차와 경춘선 전철이 다닌다. 현재 ITX-청춘열차는 정차하지 않아 전철만 이용할 수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 산천의 풍경으로 따지면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귀여운 전원이다."

- 『김유정 전집(하)』, 김유정기념사업회, 1994.

 

 

 

소설 「봄봄」의 등장인물 동상  김봉필은 욕필이영감으로 불리던 실레마을의 실존 인물이다. 금병산 산림감시원이었던 욕필이영감은 딸만 여럿이라 데릴사위를 집에 들여 부려 먹었다고 전해진다. 술에 취해 백두고개를 넘던 김유정이 점순이와 맺어주지 않아 장인과 다투던 데릴사위를 보고 쓴 소설이 「봄봄」이다.

 

 

 

25 켐프페이지

춘천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미군기지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1983년에 있었던 중국 민항기의 불시착은 한국과 중국의 외교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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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2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장편소설, 최성은 옮김

2019, 은행나무

 

 

군자도서관

SE075544

 

 

892.95

토872ㅌ

 

 

 

 

 

창공처럼 무겁고 무한한 연민의 서사

인류 보편적 가치의 보고(寶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폴란드의 한 신화적인 마을 '태고'. 허구와 현실이 절묘하게 중첩되는 공간인 이 가상의 마을은 기이하면서 원형적인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세계의 소우주인 이 마을에서 20세기의 야만적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시간을 기록한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분할 점령당했던 시기, 1 ·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동,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마을 주민의 신화적 삶과 어우러져 장엄한 우화를 빚어낸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삶의 한 형태를 충만한 열정으로 그려낸 서사적 상상력,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최고의 소설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_노벨문학상 수상 이유

 

 

“토카르축은 말과 꿈의 화가이다. 독자들에게 신, 이야기, 인물의 영혼의 층위를 질문/발견하라고 도전한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과 동식물이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 안에서 지속과 변형을 되풀이한다.

‘태고’의 이야기는 인류의 이야기다.” _마리아 엔티스(문학평론가)

 

“작가는 역사 속에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인 개인의 무게를 부각한다.

미시 서사 기법을 활용하여 거대 서사를 축소하면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담론을 끌어낸다.” _모니카 시비에르코스(문학평론가)

 

 

 

"그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지속적이며 고귀한 것,

인간보다는 시간에게 더욱 익숙한 것을 원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시간 속에서 그녀를 영영 멈추게 하는 것을 바랐다.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_본문에서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

 

 

 

현재 폴란드에서 가장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로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문화인류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칼 융의 사상과 불교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신화와 전설, 외전(外典), 비망록 등 다양한 장르를 차용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 소통의 부재, 이율배반적인 욕망 등을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한다.
등단 초부터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고른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등단작 《책의 인물들의 여정》(1993)은 폴란드 출판인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세 번째 장편소설 《태고의 시간들》(1996)은 40대 이전의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인 코시치엘스키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폴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니케 문학상의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었고, 폴란드 시사 잡지 〈폴리티카〉가 선정한 ‘올해의 추천도서’로도 뽑혔다. 니케 문학상 대상 수상작 《방랑자들》(2007)은 영어판 《Flights》로 2018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을 수상했다.
그 외 작품으로 《E. E.》(1995) 《낮의 집, 밤의 집》(1998) 《세상의 무덤 속 안나 인》(2006) 《망자의 뼈에 쟁기를 휘둘러라》(2009) 니케 문학상 대상 수상작 《야고보서》(2014) 등이 있다.

 

 

 

옮긴이 최성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폴란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거리 곳곳에서 문인의 동상과 기념관을 만날 수 있는 나라, 오랜 외세의 점령 속에서도 문학을 구심점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고, 그래서 문학을 뜨겁게 사랑하는 나라인 폴란드를 ‘제2의 모국’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2년 폴란드 정부로부터 십자 기사 훈장을 받았다.
옮긴 책으로 《쿠오 바디스》 《코스모스》 《끝과 시작》 《충분하다》 《읽거나 말거나》 《흑단》 《헤로도토스와의 여행》 등이 있으며,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3인 시선집》 《흡혈귀: 김영하 단편선》 《마당을 나온 암탉》 등을 폴란드어로 번역했다.

 

 

 

태고의 시간

제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제노베파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예슈코틀레 성모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

교구신부의 시간

엘리의 시간

플로렌틴카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보스키 영감의 시간

파베우 보스키의 시간

게임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플로렌틴카의 시간

집의 시간

파푸가 부인의 시간

미시아의 수호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루타의 시간

신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쿠르트의 시간

게노베파의 시간

셴베르트 가족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이반 무크타의 시간

루타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게임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게노베파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게임의 시간

파베우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루타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아델카의 시간

파베우의 시간

루타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파베우의 시간

죽은 자들의 시간

루타의 시간

게임의 시간

릴라와 마야의 시간

보리수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파푸가 부인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게임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랄카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손주들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게임의 시간

파푸가 부인의 시간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파베우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게임의 시간

아델카의 시간

 

옮긴이의 말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세계

 

 

  "내게 소설 쓰기는 나 자신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어른스러운 방법으로 변형된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예날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처럼."

- 올가 토카르추크

 

 

"프로이트를 읽고 난 이후로 세상을 더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었다. 내 인식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세상을 일대일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봤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를 접한 뒤부터는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었다."

- Olga Tokarczuk, "Palec w soli, czyli Krorka historia mojego czytania", [in :] Swiaty Tokarczuk(ed. M. Rabizo-Birek, M. Pocalun-Dydycz, A. Bienias), Rzeszow, 2013, p. 22.

 

 

"내가 지금까지 본 색깔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국 스님들이 입는 승복의 회색빛이다. 그것은 염료를 푼 물에 캔버스 천을 담가서 만들어진다. (···) 서울이나 홍콩에서 여성들의 옷차림을 본 순간, 나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유럽, 특히 중부 유럽 여자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과는 근본적으로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정적인 방식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려 애쓰는 경향을 찾기가 힘들었다."

- 토카르추크, 한 폴란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해 언급한 내용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는 시간을 붙들고, 한 발자국 떨어져 그 시간을 바라보는 듯한 느낀을 받는다. 그리고 소멸이나 혼돈에 맞서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글로 적지 않았다면 영원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속에는 통상 수많은 패러독스와 불가항력적인 운명, 신비한 우연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우리를 둘러싼 질서나 순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순간을 붙잡고 싶다는 바람 외에도 내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내가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들, 의아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 올가 토카르추크,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작가 정영문 선생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태고 :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공간

 

"토카르추크는 '태고'라는 소세계의 창조자로서 이 세계에 자신만의 질서와 인과율을 부여하였다. 그 세계는 완전한 허구도 아니고, 실재의 재현물도 아닌, 경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 피오트르 마르치슈크(문학평론가)*

 

* P. Marciszuk, "Prawiek Olgi Tokarczuk, czyli literackie stwarzanie swiata", Literatura, filozofia, mit, Warszawa, 2008, p. 68.

 

 

태고 : 신화적 상상력의 보고(寶庫)

 

"예술은 신화적 언어의 수호자이다. 내게 신화는 기억이다. 신화는 우리가 종으로서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세상을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 융의 견해처럼 나도 신화가 종의 기억을 구성하는 주각이라고 생각한다. 신화는 학습할 필요가 없으며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그의 사상을 나는 믿는다."

-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 :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접점

 

 

"문학에는 불멸의 변치 않는 뿌리, 원형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 원형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 원형을 바탕으로 뭔가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서술해나가려 애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짓는다는 건, 내 생각으로는 영원한 작업인 것 같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과 그 변화의 과정 - 집단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 간에 - 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강한 필요성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결국 '언어'만큼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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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1 목포

 

 

 

 

 

 

최성환 지음

2020, 21세기북스

 

 

배곧도서관

SM023815

 

 

981.19802

최54ㅁ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03

 

 

 

목포는 스스로의 힘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목포는 별칭이 많다.

낭만 항구, 예향, 섬의 수도,

전남 근대문화 1번지.

 

다채롭고 역동적인 이 도시는

언제나 사람 사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목포 도슨트 최성환

 

 

목포 토박이 역사학자가 안내하는

깊이 있는 인문 기행

 

 

목포항, 유달산, 삼학도에서

근대역사문화공간과 연희네슈퍼까지

바다가 만들고 사람이 완성한 31곳의 이야기

 

 

 

최성환

한국지방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이다. 국립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섬 전문 연구소인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목포 남교동 큰 시장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도 목포 원도심에 살면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목포와 관련하여 「목포의 해항성과 개항장 형성과정의 특징」, 「목포 고하도 일제강점기 역사유적의 내력과 그 성격에 대한 고찰」, 「1919년 목포 4 · 8독립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주요인물」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문순득 표류 연구』, 『천사섬 신안, 섬사람 이야기』 등이 있다.

 

 

 

차례

 

 

시작하며 ㆍ ‘목포 도슨트’ 최성환
목포의 짧은 역사 ㆍ 다도해를 품은 서남권의 거점 도시

01 목포역 - 남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대륙횡단열차의 출발역으로
02 김우진 거리 - 목포 1세대 모던보이가 살던 문학 동네
03 동명동 77계단 - 송도신사로 향하던 계단과 미로 마을
04 구 일본영사관 - 원형 그대로 보존된 120년 전 건축물
05 목포진 역사공원 -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항구도시의 시작점
06 노적봉 - 이순신의 전설이 깃든 목포의 자부심
07 연희네슈퍼 - 목포의 레트로 1번지 서산동 시화골목
08 창성장 - 도시재생의 상징이 된 목포 까사 1호
09 목포항 - 목포의 상징이자 신명 나는 항구축제의 현장
10 민어의 거리 - 바다의 맛과 목포 9미(味)
11 유달산 -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다도해 전망대
12 불종대 - 근대 소방시설의 기억이 담긴 원도심의 상징
13 삼학도 - 세 섬의 전설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14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 시민운동으로 지킨 일제 수탈의 상징
15 목포의 눈물 노래비 - 유달산에 세운 국내 최초 대중가요 노래비
16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 - 이순신의 제사를 지낸 고하도 사람들
17 달성사 - 목포8경에 속하는 유달산의 전통 사찰
18 갑자옥 모자점 - 목포 멋쟁이들이 찾는 93년 역사의 모자 가게
19 고하도 감하원 터 - 아름다운 섬에 세운 소년감옥
20 갓바위 - 갓을 쓴 사람 모양의 신비로운 쌍둥이 바위
21 호남은행 - 민족자본으로 세운 목포 유일의 근대 은행
22 공생원 - 한일교류의 상징이 된 목포 최초 사회복지시설
23 보광사 미륵불 - 유달산 바위에 새긴 불상과 그 아래 신비의 샘
24 만인계 터 - 복권의 원조, 만인계가 열리던 곳
25 양동교회 - 근대문화 1번지가 된 최초의 교회
26 목포청년회관 - 근대 탐방의 필수 코스, 전남 노동운동의 성지
27 국제서림 - 서점 명가의 70여 년 역사
28 해양유물전시관 - 세계를 놀라게 한 해양유물의 보물창고
29 목포시사 - 목포 지식인들이 꾸린 문학결사
30 오거리문화센터 - 일본 사찰이 중학교와 교회가 된 사연
31 이훈동정원 - 호남 최대의 비밀 정원

대한민국 도슨트 ㆍ 목포 인문 지도
대한민국 도슨트 ㆍ 목포 연표
참고 자료

 

 

 

목포역, 김우진 거리, 동명동 77계단, 송도신사, 구 일본영사관, 국도 1 · 2호선 기점, 목포진 역사공원, 목포진 객사, 신광익 선정비, 약사사, 노적봉 예술공원, 시민의 종, 다산목, 연희네슈퍼, 서산동 시화마을, 보리마당, 다순구미 마을, 조선내화 공장, 창성장, 구 송촌 문구점(현 종일슈퍼), 목포항, 목포항구축제, 세계마당페스티벌, 문화재야행, 목포건맥축제, 북항노을축제, 크리스마스트리축제, 민어의 거리(영란횟집, 포도원, 유달, 중앙, 유림, 청자), 목포종합수산시장, 건어물상가, 백반골목, 북항, 선창가 성식당, 목원동 영암갈비, 곰집갈비, 나무포, 중화루, 태동반점, 코롬방제과점, 유달산, 이충무공 동상, 유선각, 흥법대사상, 유달산조각공원, 관음사(觀音寺), 난 공원, 자생식물원, 달성공원, 철거민탑, 유달산 어민동산, 해상케이블카, 불종대, 북교초등학교, 남교 중앙식료시장, 광생의원, 삼학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어린이바다과학관, 이난영수목장공원, 용해동 갓바위, 경북도민의 숲,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팔굉일우비(八紘一宇碑), 강제징용노동자상, 김우진 책방, 목포부립병원 관사(등록문화재 제718-5호),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등록문화재 제718-6호),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등록문화재 제30호), 목포의 눈물 노래비,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목포의료원, 목포극장, 평화관,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 조선육지면발상지비, 고하도 대형방공호, 고하도 탕건바위, 달성사, 유달산 미륵불, 빈야사, 관음사, 해봉사, 갑자옥모자점, 김은주 공방,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구 동아약국 전시관, 구 목포화신연쇄점, 고하도 감화원 터, 평화공원, 목포문화원(구 호남은행), 공생원, 보광사 미륵불, 짓샘, 만인계 터, 만인계공원, 노라노미술관, 남농화실, 안저자거리, 양동교회, 박승희 열사 흉상, 가톨릭 목포 성지, 목포청년회관, 무안감리서 터, 구종명비, 국제서림, 해양유물전시관, 목포문화예술회관, 자연사박물관, 목포문예역사관, 남농기념관, 생활도자박물관, 목포문화관, 전통옥공예전시관, 목포시사, 오거리문화센터, 동본원사, 이훈동정원, 성옥기념관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 데 부두에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서름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은 영산강을 아느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 데 어찌다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작곡 : 손목인 작사 : 문일석 노래 : 이난영

 

당시 오케(Okeh)레코드에서 전국 10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향토찬가' 공모작으로 선정되어 발표된 곡.

 

 

 

옛 목포의 모습  1930년대 목포항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1897년 개항과 함께 목포는 남도의 거점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등록문화재 718호로 등록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선과 면을 중심으로 한 공간 단위 등록문화재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근대 문화유산이 밀집해 있고, 1897년 개항 후 조성된 신시가지의 경관이 보존된 공간이다.

 

 

 

목포 해상케이블카  2019년 유달산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어 해양관광 거점 도시 목포의 활기를 더하고 있다.

 

 

 

01 목포역

남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대륙횡단열차의 출발역으로

 

 

 

02 김우진 거리

목포 1세대 모던보이가 살던 문학 동네

 

 

 

일본 유학시절 김우진  농업학교 재학 시절부터 김우진은 문학을 꿈꿨다.

 

 

 

목포문학관에 전시된 김우진의 육필 원고  1925년에 쓴 희곡 『두덕이 시인의 환멸』 육필 원고를 김우진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 올케를 따라 감자를 캐러 가면서 작은 대궐 같은 김장성 집 앞을 지나 성(城) 같은 담을 돌아갔다. 감자밭은 바로 산 중턱 그 집 뒤에 있었다. 장성 원님을 지냈대서 김장성이라고 호칭 되는 그의 장남이 연극계의 선구자인 김우진 씨로 훗날(1924년) 여기에서 먼 양동 꼭대기에까지 눈 속에 빗속에 꼬박꼬박 걸어 다섯 달 동안이나 내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

- 박화성, 성취원과 김우진에 대해

 

* 박화성, 『나의 삶과 문학의 여적』, 한라문화, 2005년, 142쪽

 

 

 

김우진 거리의 조형물  김우진이 집필 활동을 했던 북교동 성취원 터 인근에 조성된 김우진 거리에서는 그의 작품, 평론, 3형제 이야기 등을 조형물로 만날 수 있다.

 

 

 

03 동명동 77계단

송도신사로 향하던 계단과 미로 마을

 

 

 

사진으로 남은 송도신사의 모습  1921년 목포 안내 책자에 들어 있던 송도신사의 전경(위)과 송도신사 앞 77계단 앞에서 찍은 노행순 할머니의 기념사진(아래). 일제강점기 목포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야 했다.

 

 

 

77계단의 현재 모습  중앙의 보행보조시설과 우측의 77계단 기념비는 2007년 정비 사업 때 설치되었다.

 

 

 

04 구 일본영사관

원형 그대로 보존된 120년 전 건축물

 

 

 

근대역사관으로 재탄생한 구 일본영사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로 아직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지로 영행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구 일본영사관의 외관 장식  1932년 목포사진첩에 실린 목포부청 건물(위)을 보면 2층 중앙에 일본 천왕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있다. 해방 후 목포시청으로 사용할 당시에는 국화가 있던 자리에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지고 원형의 틀만 남아 있다. 또한 창트(아래) 위에 붉은 벽돌과 흰 벽돌을 이용해 원형으로 장식한 모습도 눈에 띈다. 마치 욱일승천기를 연상하게 한다.

 

 

 

국도 1 · 2호선 기점

 

 

 

05 목포진 역사공원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항구도시의 시작점.

 

 

 

복원된 목포진 객사  객사는 조선 시대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건물로 조선 지방 관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건물이었다.

 

 

 

신광익 선정비  목포진 역사공원 내 객사 마당에 있는 선정비로 머릿돌에 새겨진 문양에서 목포사람들의 소박함과 예술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약사사

 

 

 

하늘에서 본 목포진 주변 풍경  개항 후 목포진 주변에 신시가지가 형성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유달산 자락과 연결된 목포진과 선창 주변에는 근대문화유산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삼학도가 보인다.

 

 

 

06 노적봉

이순신의 전설이 깃든 목포의 자부심

 

 

 

무안현목포진지도  수군 기지인 목포진과 주변의 형세를 추상적으로 표현해 놓은 지도로, 노적봉이 크고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위에 노인암이 있고 가운데에는 노적암이 있다. 아래에는 도적암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인이 적으로부터 노적을 지키고 있는 형상이라 한다."

- 오횡묵,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鎖錄)』에서

 

 

 

목포시민의 자부심 노적봉  유달산 등산로 정문 앞에 호국 전설이 담긴 노적봉이 자리하고 있다. 맨 위쪽의 바위를 자세히 보면 마치 사람의 얼굴과 닮았다. 이를 두고 목포사람들은 이순신의 모습이 노적봉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07 연희네슈퍼

목포의 레트로 1번지 서산동 시화마을

 

 

 

서산동 마을 전경  목포의 옛 모습과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골목길 일부가 목포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생활상이 담긴 독특한 경관유적으로서 특징적이다.

 

 

 

영화 '1987'의 촬영지  서산동 시화마을의 인기를 높여준 연희네슈퍼 모습. 제작진은 평범한 소시민의 주인공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을 찾으러 전국을 다냈는데, 1980년대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목포 서산동의 풍경이 영화와 가장 잘 어울렸다고 한다.

 

 

 

조선내화 목포공장의 지붕 철거 전 모습  1947년에 회사를 설립한 후 만든 공장시설이다. 공장의 철골구조와 벽돌을 굽던 가마, 공장 굴뚝 등 해방 후 산업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지붕을 철거한 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의 활용을 고민 중이다.

 

 

 

08 창성장

도시재생의 상징이 된 목포 까사 1호

 

 

 

창성장 2층 테라스와 별채  옛 건물을 살려 건물 구조를 만들었다. 도심 속의 붉은색 건물이 강렬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구 송촌 문구점  창성장 앞 교차로에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종일슈퍼로 사용되고 있는 송촌 문구점도 그증 하나다.

 

 

 

09 목포항

목포의 상징이자 신명 나는 항구축제의 현장

 

 

 

목포항 전경  현재 목포 여객터미널에서는 많은 항로가 운영되고 있고, 신안, 진도, 완도 등의 주변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마친 고깃배들이 모여든다. 목포항의 또 다른 자랑은 이곳에서 목포의 대표축제인 '목포항구축제'가 열린다는 점이다.

 

 

 

목포항구축제의 파시 경매  목포항구축제는 2006년부터 열린 목포의 대표적인 축제다. 축제 기간 동안 배 위에서 열리는 생선 경매를 체험할 수 있다.

 

 

 

세계마당페스티벌의 풍경  세계마당페스티벌이 열리면 목포 구도심은 활기가 넘친다. 최근 이 축제의 스타로 떠오른 '옥단이' 복장을 한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10 민어의 거리

바다의 맛과 목포 9미(味)

 

 

 

목포 9미(味)

 

홍어삼합, 세발낙지,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림, 우럭간국, 병어회(찜), 아구탕(찜), 준치무침

 

 

 

민어회  일반 생선은 알을 밴 암컷이 더 맛있는데, 민어는 반대로 수컷이 더 찰지고 고소하다.

 

 

 

홍어삼합  홍어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돼지고기, 김치와 함께 '삼합'으로 먹는 것이다. 홍어를 처음 먹어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삼합으로 먹으면 비교적 쉽게 홍어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육회탕탕이(위)와 연포탕(아래)  붉은색의 소고기와 흰색 낙지가 어울려 비주얼도 좋고, 식감이 다소 질긴 낙지와 부드러운 육회가 조화를 이룬다. 생으로 먹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연포탕을 추천한다.

 

 

 

쑥꿀레  목원동 빛의 거리에는 '쑥꿀레'를 간판으로 내건 유명식당이 있고, 이 집 외에도 원도심의 여러 죽집에서 쑥꿀레를 판매하고 있다.

 

 

 

11 유달산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다도해 전망대

 

 

 

유달산 안내도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과 역사가 있는 문화유적이 유달산 곳곳에 분포해 있다.

 

 

 

 

유달산 이충무공 동상  이 동상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많은 이충무공 동상 가운데 문화부(문공부)에 등록된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유달산 오포대  현재 오포대는 유달산을 찾는 관광객과 이 지방 후손들의 역사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유달산 유선각  유선각의 볼거리 중 하나는 누각의 정면에 걸려 있는 유선각 현판이다. 이는 해공(海公) 신익회의 글씨다. 이 글씨는 1951년 신익희 선생이 목포를 방문하는 길에 유달산에 들렸다가 남긴 것이다.

 

 

 

"흰 구름이 쉬어 가는 곳입니다. 세 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푸른 바다의 속삭임을 새벽 별과 함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 유선각 표비(標碑), 다목동 차재석(車載錫)이 쓴 글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흥법대사가 새겨진 바위  마당바위에 오르면 흥법대사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마당바위 아래로 내려가 일등봉 등산로 방향으로 가면 바로 앞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목포 해상케이블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55m의 콘크리트 지주 타워의 모습(위)과 금빛 낙조가 눈부신 해 질 무렵 해상케이블카의 풍경(아래)이다.

 

 

 

12 불종대

근대 소방시설의 기억이 담긴 원도심의 상징

 

 

 

불종대 공원의 모습  불종대의 옛 모습을 재현해 화재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위)와 초기 소방조에서 사용한 수동 펌프(아래)를 설치해 놓았다.

 

 

 

13 삼학도

세 섬의 전설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유달산에 한 청년이 수련하고 있었는데, 유달산 아래에 사는  세 처녀가 유달산에 있는 샘으로 물을 길러오면서 이 청년을 보았다. 이후 세 처녀가 함께 이 청년을 사모하게 되었다. 세 처녀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아버린 청년은 수도에 방해가 되므로 하루는 세 처녀를 불러 이르기를 "내 수련이 끝날 때까지 바다 건너 섬으로 건너가 살고 있으면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세 처녀는 이 약속을 믿고 배를 타고 바다 건너로 떠나는데, 뒤늦게 청년이 자신도 세 처녀를 매우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청년이 신호를 보내기 위해 활을 쏘았는데, 그만 이 활이 세 처녀가 탄 배에 명중했다. 배에 구멍이 뚫렸고,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자 세 처녀는 학으로 변하여 솟아오르다가 지금의 삼학도 자리에 내린 뒤 세 개의 섬으로 변했다.

- 삼학도의 전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화합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 김대중, 2009년 1월 6일 일기

 

 

 

노벨평화상 기념관(위)과 김대중 전 대통령(아래)  노벨평화상 기념관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인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여 2013년에 개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지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4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시민운동으로 지킨 일제 수탈의 상징

 

 

 

1932년 『목포사진첩』에 실린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그동안 1920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혼란이 있었으나, 당시 <매일신보>(1921년 11월 5일 기사)에 '오는 7일에 낙성식 피로연을 개최한다'는 기사가 남아 있어 설립 시기는 1921년임이 명확하다.

 

 

 

목포 근대역사관 2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현재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4년 구 일본영사관에 본관이 새로 조성되면서 이곳은 현재 2관(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5 목포의 눈물 노래비

유달산에 세운 국내 최초 대중가요 노래비

 

 

 

이난영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전국민에게 목포를 알린 목포의 예술인이다.

 

 

 

"나의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든지 그렇지만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겨하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 하늘을 우러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나의 노래를 싣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 항구, 저 항구에서 또 다른 항구, 이렇게 전 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 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

- 이난영, 1939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향에 대한 추억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 데

부두에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 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 「목포의 눈물」

 

 

 

유달산 중턱에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  노래비 상단에 「목포의 눈물」가사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 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심습니다. 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식 가사 손목인 작곡으로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습니다'라는 추모의 글귀가 있다.

 

 

 

 

16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

이순신의 제사를 지낸 고하도 사람들

 

 

 

옛 이충무공기념비(위)와 현재의 이충무공기념비(아래) 사진  일본인이 총을 쏴 훼손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충무공비를 모신 모충각  모충각은 이충무공을 기린다는 의미로, 서예가 김정재의 글씨로 된 편액이 걸려 있다. 현재 모충각 내부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4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대부분 1960년대에 조성된 것으로 기념비와 비각의 건립 연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7 달성사

목포8경에 속하는 유달산의 전통 사찰

 

 

 

목포 8경

 

유산기암(儒山奇巖) 용당귀범(龍塘歸帆) 아산춘우(牙山春雨) 학도청람(鶴島晴嵐)

금강추월(錦江秋月) 입암반조(笠岩返照) 고도설송(高島雪松) 달사모종(達寺暮鐘)

 

 

 

달성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범종  현재 달성사 경내에 별도의 종각이 조성되어 있어, 그것을 목포8경에 나오는 종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주인공은 극락보전 내에 보관된 작은 범종이다.

 

 

 

달성사 목조 지장보살상  달성사의 지장보살상은 우측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좌측 다리만 가부좌한 반가 상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 말로 추정되는 광양 중흥사 석조 지장보살상 등의 몇몇 예에서만 볼 수 있는 드문 경우다.

 

 

 

달성사 인근의 미륵불  달성사의 창건 주지인 노대련이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달성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과 같은 구성이다.

 

 

 

18 갑자옥 모자점

목포 멋쟁이들이 찾는 93년 역사의 모자 가게

 

 

 

설립자 문공언 씨의 사진이 실린 갑자옥모자점 개업 10주년 기사  상호가 '갑자옥'이어서 갑자년인 1924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1937년 <동아일보>에 개업한 지 10년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27년 무렵 개점한 것으로 짐작된다.

 

 

 

1932년의 갑자옥 거리(위)와 현재의 갑자옥 모자점(아래)  갑자옥 모자점은 9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목포의 대표적인 근대 문화 공간이다.

 

 

 

갑자옥 모자점 종이 가방  갑자옥 모자점(대전지점)에서 판매하는 모자를 담아주던 가방이다. 중절모를 쓴 남성의 모습과 가게 이름, 주소 등이 인쇄되어 있다.

 

 

 

구 동아약국 전시관  예전 사진을 근거로 당시의 간판 모습을 재현하고, 안철 장로가 약사이자 민주화 운동 투사였다는 점을  반영한 인물 캐릭터를 그려서 전시관을 꾸렸다.

 

 

 

구 목포화신연쇄점  목포 근대 상점 중 가장 화려한 건물로 방송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목포 편에 백화점 건물로 소개되어 더 유명해졌다. 원래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현재는 외벽에 색깔이 덧칠된 상태이다.

 

 

 

19 고하도 감화원 터

아름다운 섬에 세운 소년감옥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원생들이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2년 동안 10명이나 된다. 배가 고파 아무 풀이나 먹은 탓에 위염,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아이가 많았다. 폐결핵 환자도 10명이나 됐다. 도망치다 잡혀 온 아이는 손을 뒤로 묶은 뒤 죽도로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등과 허벅지 엉덩이에서 쏟아진 피가 순식간에 마당에 있는 돌을 적셨다. 마침내 (매를 참지 못해)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은 아이도 있었다.

- 이하라 히로미쓰, 『아 선감도』(김양식 역), 행림출판사, 1995.

 

 

 

20 갓바위

갓을 쓴 사람 모양의 신비로운 쌍둥이 바위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 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 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로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후회하며 하늘을 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불렀다.

- 갓바위전설

 

 

 

목포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자 지질자원인 갓바위  아름다운 갓바위는 풍화와 해식 작용의 영향으로 암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지질학적 가치도 크다.

 

 

 

갓바위의 야경  해상보행교가 설치되고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밤에도 신비로운 분위기의 갓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21 호남은행

민족자본으로 세운 목포 유일의 근대 은행

 

 

 

호남은행의 과거(위)와 현재(아래)  위는 1932년 발간된 『목포사진첩』에 실린 호남은행 목포지점의 모습이다. 이 건물은 현재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22 공생원

한일교류의 상징이 된 목포 최초 사회복지시설

 

 

 

윤학자와 윤치호의 결혼 기념 사진  공생원의 두 주역인 윤학자와 윤치호는 1938년 10월 15일 목포공회당(현 상공회의소)에서 결혼하였다.

 

 

 

공생원 사랑의 샘  공생원 앞마당에는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각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윤치호 선생과 윤학자 여사의 흉상이 조각된 '사랑의 샘'이라는 기념비도 그중 하나다.

 

 

 

23 보광사 미륵불

유달산 바위에 새긴 불상과 그 아래 신비의 샘

 

 

 

"4월부터 5월 중 전남 죽동 보광사의 돌로 6척 높이의 미륵 좌상을 만들다. 주지는 만성스님이고 화주는 차보살이며 석공은 2인이다."

- 금용 일섭의 일기 형식의 『연보』

 

 

 

보광사 석조 미륵불  이 불상은 외부에서 만들어서 법당에 안치한 것이 아니라 유달산의 바위 줄기에 불상을 새긴 것이라 법당과 미륵불의 건축 순서와 방법 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해동 조선 전라도 목포 ○○동 모씨의 남녀 산신님께서 굽어살피사 젖을 태워주시고 수명 장수하게 하시고 두루두루 살피시어 많은 복을 내려주소서"

- 짓샘에 올렸던 축원문

 

 

 

24 만인계 터

복권의 원조, 만인계가 열리던 곳

 

 

 

복권 추첨기  옛 복권 추첨기의 모양을 복원하여 만든 조형물로 만인계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마을 축제로 부활한 만인계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에 만인계 복권추첨 행사를 하고, 공연, 벼룩시장, 문화체험 등을 곁들여 지역민들이 함께 가꾸어나가는 작지만 소중한 문화 축제를 지속하고 있다.

 

 

 

25 양동교회

근대문화 1번지가 된 최초의 교회

 

 

 

양동교회 전경  전면부 구조가 일부 변형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잇고, 건물에 담긴 역사적 가치가 커 2004년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14호로 등록되었다.

 

 

 

저희집이 완성되면 이 집은 하나의 예배실로 변할 것입니다. 침실은 남자들이, 식당은 여자들이 들어갈 공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많은 여자를 포함해 큰 회중이 모여 저는 대단히 고무되었습니다.

- 유진벨, 1898년 5월의 편지에서

 

 

 

양동교회에 적힌 마지막 연호와 태극 문양  융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사용한 연호다. '대한융희사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사 마지막 연호라 할 수 있다.

 

 

 

26 목포청년회관

근대 탐방의 필수 코스, 전남 노동운동의 성지

 

 

 

목포청년화관의 현재 모습  해방 이후 목포청년회관 건물은 엠마누엘 제일교회로 오랫동안 이용되다가 목포시에서 매입하여 현재는 소극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집 속에서는 날로 때로 열리는 각종 합법단체의 삶을 요구하고 해방을 부르짖는 외침이 얼마나 힘 있게 흘러나왔든가? 각 단체 주최의 학술강연이나 사회문제 강의는 얼마나 자주 잇었든가? 청년들의 공동의 집이요. 그들을 가장 옳은 길로 인도하며 가르치든 위대한 사명을 가졌던 이 집의 오늘의 헐어진 이 몰골의 비참함이여"

- 박화성, 목포청년화관의 가치에 대해

 

 

 

27 국제서림

서점 명가의 70여 년 역사

 

 

 

원래 위치로 돌아온 국제서림  모든 목포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국제서림은 목포사람들에게 책을 사는 서점 이상의 의미가 있다.

 

 

 

28 해양유물전시관

세계를 놀라게 한 해양유물의 보물창고

 

 

 

29 목포시사

목포 지식인들이 꾸린 문학결사

 

 

 

 

목포시사 건물  목포시사는 목포 예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유명 예술인의 업적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었던 곳이 목포시사다. 그 역대 구성원의 면모를 보더라도 근현대기 목포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망라되어 있다.

 

 

 

30 오거리문화센터

일본 사찰이 중학교와 교회가 된 사연

 

 

 

동본원사 목포별원의 현재 모습  1930년대 초반 신축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붕에는 일본 기와가 사용되었고, 건물 출입구 포치는 마치 일본 사무라이의 투구 형태를 띠고 있다.

 

 

 

목포중앙교회로 사용되던 동본원사의 모습  해방 이후 교회 설립이 화발해지면서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 건물이 교회 건물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목포제일교회, 성산교회, 시온교회 등이 일본 불교 사찰 건물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31 이훈동정원

호남 최대의 비밀 정원

 

 

 

이훈동 정원  다양한 수종과 함께 일본 정원 양식과 후대에 가미된 한국 정원 양식이 복합되어 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구경하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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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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