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05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박건호 지음

2020,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야도서관

SB144661

 

 

911

박14ㅋ  c. 2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근현대사

 

 

 

 

박건호

 

196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서 기록학을 공부했다. 명덕외국어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지금은 강남 대성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답사를 가서 우연히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운 것을 계기로 30여 년간 역사 자료를 모으며 컬렉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수집’이란 최고의 즐거움이자 휴식이다. 그동안 모은 수집품의 양을 자신도 정확히 모를 만큼 방대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며 《국사 수업자료집》, 《주제별 슬라이드 수업자료집》,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 등 다양한 역사 교육 자료를 만들어 역사 교사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집품 하나하나에 담긴 깊고 오랜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역사 컬렉터’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수집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와 역사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

 

 

 

 

 

 

 

 

차례

 

책을 펴내며

 


MY COLLECTION 1 |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독립문과 세 번의 독립



MY COLLECTION 2 |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정미의병과 사라진 통역관



MY COLLECTION 3 | 조선의 영어 교재,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

정약용과 지석영이 《아학편》을 논하다



MY COLLECTION 4 |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오시오, 경성자동차학교로!



MY COLLECTION 5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나는 ‘기테이 손’이 아니라 손기정이다



MY COLLECTION 6 |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사진 한 장에 담긴 전쟁과 평화



MY COLLECTION 7 |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피로 쓴 사직서에 담긴 반탁운동 이야기



MY COLLECTION 8 |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호열자, 1946년 해방 조선을 덮치다



MY COLLECTION 9 |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난중일기, 치열한 고지전의 비극을 담다



MY COLLECTION 10 |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되었나?



MY COLLECTION 11 |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전쟁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삶에 대하여



MY COLLECTION 12 |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MY COLLECTION 13 |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대통령 생일이 뭣이 그리 중헌디!



MY COLLECTION 14 |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MY COLLECTION 1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독립문과

세 번의 독립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1897년, 영수증 12.3×18.0cm, 봉투 7.7×18.8cm, 박건호 소장.

 

밀양 도사를 역임했던 안효응(安孝膺)이 독립문 건립 성금을 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영수증은 건양(建陽) 2년(1897) 2월 23일 독립협회 회계장 안경수(安駉壽)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다. 1897년 발행한 독립문 건립 성금 영수증? 독립문은 과연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일까?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 <독립가(獨立歌)>의 후렴 부분

 

 

 

(1절)    일천팔백구십륙년 / 건양 원년 십일월에

          아세아주 독립 조선 / 독립문을 새로 세우네

 

(2절)    영은문이 독립(문)이니 / 모화관이 공원이라

          이백여 년 병자지치(丙子之恥) / 오늘이야 씻는구나

- <독립가(獨立歌)>

 

 

 

 

 

 

광복 후의 독립문 도안  1955년에 발행된 광복 10주년 기념우표(왼쪽)와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주화(오른쪽)에 독립문이 그려져 있다. (박건호 소장)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이를테면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 · 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

 

 

 

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보고 삼 년 전까지 끌어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대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 ······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영은문의 다른 이름]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시기[士氣]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려면 다만 그 문만 헐러버릴 뿐이 아니라 그 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논설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서재필은 이날 논설을 통해 독립문 건립을 제안했다. (박건호 소장)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유럽]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세계 역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이완용, 독립협회 사무위원장,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자

 

 

 

건립 직후의 독립문 모습을 담은 스테레오뷰 사진  현판석에 새겨 넣은 태극기와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 앞으로 옛 영은문 주춧돌이 남아 잇다. 사진 속 땔감을 실어나르는 모습처럼 당시 사람들은 이 문을 빈번히 지나다녔다. (박건호 소장)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脣齒)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 <2 · 8독립선언서>,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표

 

 

 

일제강점기 경성 명소로 엽서에 소개된 독립문 왼쪽 엽서는 사진 옆에 "독립문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석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문의 의미를 전혀 불온시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대였다면 이런 엽서를 금지하거나 아니면 독립문을 철거했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를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 싸우러 나아가세

- <독립군가>

 

 

 

대한민력에 그려진 독립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달력(1920년 대한민력)에 실린 그림(아래)이다. 독립군이 광복 후 독립문을 통과해 서울로 들어오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문이 건립된 지 30년이 지난 1920년 무렵에는 이미 독립문의 의미가 변화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독립문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大韓民國獨立一週年記念)'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는 독립문. 어느 가족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독립문 옆을 지나는 전차 선로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건호 소장)

 

 

 

MY COLLECTION 2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정미의병과

사라진 통역관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령

1907년, 34.5×28.0cm, 박건호 소장.

 

청주 군수 윤태흥(尹泰興)이 산내이상 면장 송영수(宋榮洙)애개 내린 훈령이다. 내용은 제천군에서 '폭도'에게 잡혀간 통역관 조용익(趙容益)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철저히 수색해서 보고하라는 것이다. 한지에 등사한 문서로 군수 이름과 면 이름, 면장 이름만 직접 붓으로 적었다. '폭도'는 누구이며, 조용익은 왜 납치된 것일까?

 

 

 

산내이상(山內二上) 면장(面長) 송영수(宋榮洙) 좌하(座下)

금일간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 통역 조용익(趙容益)은 본래 경성 서린동 63통 4호 사람으로 올해 9월 9일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제천군에 출장왔다가 동월 22일에 폭도에게 포박(捕縛)되어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未詳)하기로······.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 순종, 1907년 7월 31일에 내린 군대 해산 조칙

 

 

 

서양 언론에 보도된 대한제국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양위식을 보도한 이탈리아 화보 신문(왼쪽)과 군대 해산 직후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을 보도한 프랑스 화보신문(오른쪽)이다. (박건호 소장)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해주고 있습니다. ······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1908)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매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린 의병 사진이다. (출처 : 위키백과)

 

 

 

다른 여러 도시도 파괴되어 있었지만, 제천의 대파괴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제천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 나는 말에서 내려 길을 따라가며 잿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북적대고 풍요롭던 마을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 조각과 회색 잿더미, 타다 남은 찌꺼기만 널려 있었다. 멀쩡한 벽도, 대들보도, 깨지지 않은 옹기조차 하나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1908)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된 제천 일대  이 역시 매켄지가 찍은 사진으로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렸다. (출처 : 아시아뉴스통신)

 

 

 

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호패에는 사진이 없는 대신 신체 특징을 기재해 개인을 구별했다. 사진은 조선시대에 살았던 '윤재흡'의 호패 앞면과 뒷면이다. 뒷면에 '적면(赤面, 얼굴이 붉다)'이라고 윤재흡의 신체 특징을 밝혀놓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시대 호패는 대부분 이런 신체 특징이 생략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 (조용익이 폭도들에게)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하기로 해인(該人, 그 사람)의 용모를 좌개하여 훈령을 내리니 훈령 도착 즉시 본 면내에 상세 조사하여 생사간(生死間) 수색 보고하되 없으면 없다고 보고할 것.

 

                                                                                                     융희 원년 11월 13일 본(本) 군수 윤태홍

 

 

 

훈령의 '좌개(左開)' 내용  항목을 나누어 조용익의 용모를 꼼꼼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키가 5척 3~4촌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단발을 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좌개(左開)>

조용익 용모
· 나이: 23세
· 신장: 5척 3∼4촌9약 160~164센티미터)
· 머리: 비교적 크고 머리 뒤통수가 조금 튀어나옴
· 얼굴: 보통이고 작은 편
· 눈: 둥글고 큰편
· 코: 큰 편
· 입: 큰 편
· 입술: 윗입술은 보통이고, 아랫입술은 두툼한 편
· 치아: 희고 고르게 배열
· 눈썹: 보통
· 수염: 없음
· 머리카락: 단발
· 두흔(痘痕; 마마자국): 없음
· 기타특징: 머리 오른쪽 뒤에 길이 1촌되는 신일형(新日形; 갓 해가 떠오른 모양)의 흉터가 있음. 신체 건장하고 비만. 일본어를 잘하고 발음이 좋음

 

 

 

MY COLLECTION 3

조선의 영어 교재,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

 

정약용과 지석영이

《아학편》을

논하다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兒學編)》 1908년, 15.2×22.3cm, 박건호 소장.

 

송촌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은 조선의 첫 영어 교재라 할 수 잇다. 누군가 새로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제목도 '大韓國文(대한국문)'으로 써놓아 처음에는 표지만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한편, 1804년 다산 정약용이 쓴 같은 제목의 책이 있는데, 이 두 《아학편》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지으신 것이다. ······ 돌아보건대 요즈음 개항이 되고서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 교역을 하는데, 다른 나라의 우수한 점을 취하여 자기 나라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며 열강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다투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학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글자를 중국과 서양 및 일본의 음과 뜻으로 풀어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소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해준다.

- 지석영

 

 

 

다산 정약용(1762~1836, 위)과 송촌 지석영(1855~1935, 아래)  두 사람의 생애는 약 100년의 시차가 있지만 관심 분야가 겹치는 부분이 꽤 있다. (다산박물관 소장 / 출처 : 전통문화포털)

 

 

 

정약용의 《아학편》과 지석영의 《아학편》  정양용의 《아학편》(필사본, 위)은 각 한자에 우리 말뜻과 음을 붙인 간단한 구조이다. 지석영의 《아학편》(아래)은 한자를 중심에 두고 좌우와 하단에 우리 말뜻과 음, 중국어 발음, 그리고 일본어와 영어를 표기하고 그 음을 한글로 표기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박건호 소장)

 

 

 

영어학교 도강기  대한제국기 영어 교육 전문 기관이었던 관립영어학교에서 1896년에 발행한 '이원기(李源綺)' 학생의 '도강기(都講記)'로, 일종의 성적표이다. 당시 영어학교에서 영어 독해, 문법, 번역, 작문, 받아쓰기, 회화, 산술 등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교관이 쓴 학생 평도 재미있다. "在家不甚做工 做工甚惰 品行端正"(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이 매우 게으르다. 그러나 품행은 단정하다.) 우리나라 초창기 영어 교육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미군정기에 영어 공용화와 함께 처음으로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영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사진은 1945년 10월 어느 중학교의 영어 수업 장면이다.(출처 : NEWSIS)

 

 

 

MY COLLECTION 4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오시오,

경성자동차학교로!

 

 

 

 

정읍 청년 김남두가 고향에 보낸 엽서

1923년. 9.0×14.0cm, 박건호 소장.

 

경성자동차학교에 다니던 김남두(金南斗)가 고향에 있는 김계순(金桂淳)에게 보낸 엽서이다. 뒷면에 "한강을 서너 차례 갔다 차마 그리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 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라고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쓴 대목이 보인다. 인기 직업이던 자동차 운전사를 꿈꾸는 김남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

- 영국 화보잡지 《그래픽(Graphic)》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삽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의 설명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  영국 화보잡지 《그래픽》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그림으로, 조선 사람들이 자동차라는 괴물을 처음 본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혼비백산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초창기 운전사의 모습  자동차를 타고 있는 (뒷줄 오른쪽부터) 영친왕과 다케히토왕, 이토히로부미. 1900년대에 촬영된

사진으로, 초창기 운전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운전사 최인선  1919년 전주 출신의 최인선이 23세의 나이로 면허를 얻어 조선 최초의 여성 운전사가 되었다. 《매일신보》는 1919년 12월 6일자 기사에서 조선에서 여성 운전사는 '여자계의 신기록'이라며 여성 운전사의 탄생을 보도했다.

 

 

 

최초의 택시, '경성탁시'  1919년 말 일본인 노무라 겐조(野村賢三)가 일본에서 크라이슬러 닷지 차량 두 대를 들여와 택시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요금은 시간당으로 계산했는데, 경성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 3원이었다.

 

 

 

일차 상별 이후로 소식이 구조(久阻, 오래 막힘)하여 정의(情誼)가 박약하와 ······ 극염(極炎)에 그동안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자동차학교 입학 후 [집에서] 금전을 불송(不送)하야 1개월 식비를 주지 못하고 졸업은 맞게 되었으나 주인이 매일 학교까지 와서 식비 달라 함으로 안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한강을 서너 차례 갔다 차마 그리 못하고 돌아와 눈물로 면(面, 얼굴)을 가려 인형(仁兄)께 내 수명을 부탁하오니 심량(心諒)하시고 심량하시와 식비는 우인(友人)에게 빌리고 졸업 후 전북 도청으로 면허시험을 보고자 하노니 차비 5량[50전]만 구변하여 7월 25일 내로 송부하여 주시면 면허를 마쳐 형님의 은혜를 갚겠사오니 동생을 구원하여주시기를 거저 바라나이다. 차비만 부송하시면 즉시 내려가겠습니다.

- 김남두

 

 

 

손님을 싣고 가는 인력거꾼  1910~192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인력거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손님과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바짓단까지 걷어붙인 인력거꾼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인력거꾼의 옷차림에서 그의 고된 노동을 짐작하게 된다. 한국에서 인력거는 1890년대 처음 등장해 해방 직후에 거의 자취를 감춘다.

 

 

 

미터기 택시 영업 허가  1925년 6월 24일자 《시대일보》는 미터기를 단 택시의 영업을 곧 허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경성 시가에서 이런 택시가 영업을 하면 인력거꾼에게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북 정읍 인력거친목회에서는 지난 24일에 긴급회의를 연 후 그날 오후 일곱 시부터 대총조(大塚組) 인력거꾼 30명이 돌연 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는데. ······ 수월 전부터는 정읍 읍내로부터 역전까지 매일 기차 도착할 때 ······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는 승객이 전혀 없어 [수입이] 하루에 담배 8갑도 못 됨으로 [사납금] 50전을 30전으로 감(減)해달라고 누차 교섭하였으나 절대로 거절할 뿐 [아니라] 외려 폭언을 발함으로 그와 같이 동맹 파업을 한 것이라고.

- 《시대일보》 1926년 5월 29일

 

 

 

탁시-에 타격받은 수천 인력거꾼의 슬픈 처지.

최근의 경성 시내에는 각처에 값싸고 신속한 탁시-회사가 생기어, 시내에는 어데를 가든지 '일원 균일(一圓 均一)'이라는 표어 아래. 날로 그 세력이 번창하여······.

- 《조선일보》 1928년 3월 4일

 

 

 

MY COLLECTION 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나는 '기테이 손'이

아니라 손기정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1936년. 10.0×3.5cm, 박건호 소장.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의 손기정 사인이다. 사인지 앞면(위)에 손기정의 한글 이름('손긔졍')과 영어 이름('Kichung Son')이 적혀 있다. 이름 밑에는 'KOREAN'이라고 썼다. '고개 숙인 챔피언' 손기정은 이 작은 종이에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올림픽 마라톤 제패 기념우표  1992년 체신부(오늘날 정보통신부의 전신)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라톤 제패를 기리는 기념우표 2종을 동시에 발행해 손기정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출처 : 거창박물관)

 

 

 

반환점을 도는 손기정  우여곡절을 겪으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손기정은 반환점(Wendepunkt)을 돌 때까지는 영국 선수 하퍼와 2~3위를 다투었다.

 

 

 

한국 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이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달렸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보기도 싫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영광의 1착 테이프를 끊고 시상대에 섰을 때, 우리는 <애국가>가 연주되지 않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월계관을 쓰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쏟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 손기정, 회고록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학마을B&M, 2012)에서

 

 

 

고개 숙인 챔피언  마라톤 우승 후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과 남승룡의 모습. 손기정은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지만, 남승룡은 가릴 게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출처 : 연합뉴스)

 

 

 

남 형과 내가 이긴 것은 다행이요.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가슴에 북받쳐 오르며 울음만이 나옵니다. 남 형도 역시 나와 같은 모양입니다. 우승했다고 반겨하는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 시상식 후 《조선일보》 김동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1936)

 

 

 

슬푸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 나주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만큼 손기정의 심정을 압축해서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엽서에 단 세 글자만 적었다. '슬푸다!!?'

 

 

 

손 선수는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수많은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응하면서 'KOREA 손기정'이라고 적는 등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두 선수는 일반 조선인의 접근을 쉽게 만들려는 듯 선수 대열의 마지막에 자리 잡으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의 뜻에 영합하려는 것 같은 행동이 있었다.

- 손기정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 고등계 형사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

 

 

 

실제 크기의 손기정 사인지  가로 10.0cm, 세로 3.5cm의 이 작은 사인지에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다. (위) 사인지 앞면, (아래) 사인지 뒷면.

 

 

 

······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개막식,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조그마한 소녀 마라토너의 손에서 성화를 넘겨받은 사람이 바로 그날 몹시도 슬프고 부끄러웠던 마라톤 우승자 '손'[손기정]이었다. 성화를 손에 든 백발이 성성한 이 슬픈 마라토너는 마치 세 살배기 아이처럼 기뻐하며 달렸다! 연출자의 지시는 없었지만 이 이야기는 이처럼 기쁘기 그지없는 장면을 연출해냈다.

- 손기정의 이야기를 알게 된 슈테판 뮐러(Stefan Müller)라는 독일인은 2001년 독일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남긴 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를 봉송하는 손기정  손기정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성화봉송 주자로 참여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 비운의 마라토너는 성화를 번쩍 들고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기쁘게 달렸다.

 

 

 

MY COLLECTION 6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사진 한 장에

담긴

전쟁과 평화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1941년, 15.5×11.0cm, 박건호 소장

 

아홉 명의 청년이 같이 찍은 기념사진으로,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아래에는 '10년 후에 다시 만날 동무'라는 글귀와 '1951. 1. 5.'라고 적혀 있다. 이 날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재회를 약속한 이 청년들은 과연 10년 후 다시 만났을까?

 

뒷줄 왼쪽부터 정휘진, 오주영, 김국현, 현중건, 이성우

앞줄 왼쪽부터 황성환, 이병무, 박병석, 신혁○(마지막 한 글자는 해독 불가)

 

 

 

청년들의 이름이 적힌 사진 뒷면  사진 뒷면에 청년들의 이름과 그 밖의 다른 정보들이 적혀 있다. 맨 왼쪽에 세로로 '昭和 十六年 一月 五日 寫(소화 16년 1월 5일 찍음)'이라고 쓴 부분도 보인다.

 

 

 

일제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신민의 서사'

 

 

 

궁성 요배 홍보 전단

 

 

 

'아침마다 궁성 요배'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매일 아침 일본 궁성을 향해 허리 숙여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 입소  1938년 《동맹뉴스(同盟ニュ―ス)》에 실린 조선인 육군지원병의 훈련 개시를 알리는 기사.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하는 조선인 지원병들의 모습이다.

 

 

 

육군특별지원병명예지가(陸軍特別志願兵名譽之家) 명패  육군특별지원병이 있는 집 대문에 달아두었던 것으로, 측면에 '증(贈) 애국부인회조선본부(愛國婦人會朝鮮本部)'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7.0×16.0cm.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소화 19년(1944) 10월에 찍은 지원병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반도 특지(半島 特志)'란 글자가 보이는데, '특지'는 '특별지원병'을 줄여 쓴 표현이다. (박건호 소장)

 

 

 

입대 전 형제의 작별 기념사진  아홉 명의 청년이 그랬듯이 당시 전쟁터에 나가는 이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1943년 10월 경북 안동에서 형은 일본 관동군에, 동생은 일본 해군에 입대하기 전 작별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 아래에는 형이 1944년 전사한 것으로 적혀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MY COLLECTION 7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피로 쓴

사직서에 담긴

반탁운동 이야기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쓴 사직서

1946년, 20.0×28.5cm, 박건호 소장.

 

전라북도 익산 군청 삼림계 주사로 일하던 전우경(全祐慶)이 1946년 1월 1일에 쓴 사직서다. 왼쪽이 사직서의 첫 면이고, 오른쪽이 사직서의 두 번째 면이다. 두 번째 면에 '전우경'의 이름이 보인다. 사직서 뒤에는 '신탁반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혈서가 붙어 있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한 새해 첫 날 피로 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우경이 사직서 뒤에 붙인 두 장의 혈서  한 장에는 '신탁반대', 또 한 장에는 '조선독입만세'라고 썼다. ' '독입'은 '독립'의 의미로 쓴 것인데, 당시에는 '독립'을 '독입'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박건호 소장)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 발표  1945년 12월 29일, 한반도를 연합국이 신탁통치하기로 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내용이 담긴 벽보를 서울 시민들이 보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우익의 반탁운동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전단은 당시 '자살동맹(自殺同盟)'이라는 이름으로 뿌려졌다. 전단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하야 정히 그대들이 독립을 허용치 아니하거든 우리 손으로 모두 무찔러서 이 땅을 황무지로 인적 하나 없는 광야로 만들고 우리도 모두 죽어버리자꾸나. 길이길이 노예가 되어버리느니보다는"으로 끝맺고 있다. (박건호 소장) 아래 사진은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 집회 장면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절대 지지를 주장하는 좌익 집회 모습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한 연합국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군정(軍政)이 독립을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믿었기 때문에 협조한바 뜻밖에 신탁통치안이 실시되어 그 기관으로 전환하려 하는 오늘날 더 협력할 수 없는 고로 이에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기에 사직함.

 

                                                                                                                              단기 4279년 1월 1일

                                                                                                                      익산군청 삼림 주사 전우경
                                                                                                                           전라북도 도지사 전(殿)

 

 

 

관공서 방면에서도 신탁이라는 굴욕을 용인할 수 없다 하여 각 직원들은 시무를 중지한 상태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뿐이요, 그중에는 분연히 퇴청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리하여 모든 사무는 중단되고 말았다.

- 《민중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총동원위원회 주관 반탁시위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탁시위에서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이날 수만 명의 시민이 참가해 반탁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백범김구기념관 소장)

 

 

 

MY COLLECTION 8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호열자, 1946년

해방 조선을

덮치다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1946년, 17.2×27.2cm, 박건호 소장.

 

1946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전남의 무안 공립농잠학교에서 학생 장상기(張祥氣)에게 발급한 귀향 명령 증명서이다. 등사한 문서에 학생의 집 주소와 이름, 생년월일만 직접 손으로 적어 넣었다. 콜레라 창궐 당시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있다.

 

 

 

신이시여! 모든 사람의 몰골이 어떻게 저럴 수 있습니까! 거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온통 죽음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도심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이 버려진 재난 지역 같습니다.

                                                                                                       – 새무엘 피프스의 《일기》(1660~1669)

 

 

 

콜레라의 창궐  프랑스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12년 12월 1일자에 실린 화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을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거대한 낫으로 사람들을 풀 베듯이 베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콜레라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도시 방역 활동  1946년 5월 서울시 위생소의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서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이 유행하여 구토와 설사를 하고 관격(關格, 급하게 체해 인사불성이 됨)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열흘 동안에 자그마치 1,000여 명이나 됩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 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확산될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 21년 8월 13일 기사

 

 

 

 

《호열랄병예방주의서(虎列剌病豫防注意書)》  1902년(광무 6) 대한제국 의학교에서 편찬한 콜레라 예방서다. 《호열랄병예방주의서》라는 책 이름처럼 당시에는 콜레라를 '호열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랄(剌)' 자가 '자(刺)' 자와 비슷해 '호열자'로 잘못 알려지면서 이후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무서운 괴질의 아가리에 물리운 경성'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자에 실린 삽화이다. 콜레라는 호열자 혹은 호역으로 불렸으므로 콜레라에 대한 공포를 '호랑이'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조선인들은 쥐 귀신이라는 악귀가 몸 안으로 들어와 콜레라에 걸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발을 통해 들어와 몸 위쪽으로 올라와서 복부에 이르게 되는데, 귀신이 들어오면서 근육에 쥐가 난다고 믿었다. 시내를 걷다보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이 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는 쥐 귀신을 잡기 위함이다. 어디를 가나 이러한 어리석은 예를 볼 수 있었다.

                                                        -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 《Memories of life in Korea》 (1893~1895)

 

 

 

콜레라 예방 접종 1920년 인천의 한 동네에서 위생경찰과 한 조를 이룬 의사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콜레라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 1919년~1920년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1만 1,084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다이쇼(大正) 9년 호열자병 방역지》에 실린 사진이다.

 

 

 

'40호 부락이 전멸 상태'  콜레라의 참화를 보도한 《영남일보》 1946년 8월 4일자 기사. 경북 달성군 논공면 하동의 40가구뿐인 어느 부락에서 30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의 다른 이름인 '호역(虎疫)'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우울한 소식 호역 사망자 2,000명 돌파'라는 기사도 보인다.

 

 

 

성공적인 콜레라 방역 표창장  1963년 11월 25일 보건사회부 장관이 콜레라 방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기리고자 부산의 한 의사에게 수여한 표창장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콜레라는 연례행사처럼 찾아왔고, 그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박건호 소장)

 

 

 

증명서


주소: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월암리 86번지
씨명: 장상기(張祥氣) (1929년 8월 23일생)
우인(右人)은 본교 제1학년 재학중인바 금번 본교 소재지 부근에 호열자 창궐로 인하야 임시 조치로 무기 휴교하야 귀향을 명령하였음을 이에 증명함

 

서기 1946년 8월 29일
무안공립농잠학교장

 

 

 

MY COLLECTION 9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난중일기,

치열한 고지전의

비극을 담다

 

 

 

한국전쟁 중 차영근의 전시 수첩

1951년, 6.5×12.3cm, 박건호 소장.

 

전북 김제 출신의 20대 청년이었던 차영근 소대장이 한국전쟁 중 남긴 전시 수첩이다. 1951년 3월부터 약 11개월에 걸쳐 쓴 일기로, 전쟁 상황과 부대 생활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치열한 고지전의 참상뿐 아니라, 전쟁 중에도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된 유품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에서 박재권, 남궁선 이등중사에 이어 세 번째로 김기봉 이등중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김기봉 이등중사는 27세였던 1951년 12월에 참전해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제4차 전투에서 전사햇다. 휴전협정 체결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위) 김기봉 이등중사의 철모와 소총 등 소지품. (아래) 고인의 생전 모습.

 

 

 

작별 인사  고지전에서 죽어간 군인들은 익명의 존재로 묻혀 있지만, 박재권과 차영근처럼 저마다 이름과 사연을 가진 개인들이었다. 사진은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에서 입대하는 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1951년 3월 2일

오전 4시 적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평창군 진부면 진부리에서 중대CP[지휘소]로부터 고지 주력이 있는 데로 이동하여 날이 샜다. 그 후 연락차 대대장에게 갔다. 또다시 연락으로 고지에 왔다. 적에게 포위되어 1300고지에 6시간 몰래 엎드려 있고, 어떤 독립 가옥에서 11시간 몰래 숨어 있다가 아군이 재탈환할 때까지 있었다. 6차례에 걸친 인민군의 수색이 있었으나 천장 속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하여 발에 얼음이 박히며, 천장에서 소변을 보았다. 아! 잊지 못할 대관령······ 아 나의 생명!

 

8월 12일 일 비

오늘도 비가 온다. 나의 호에서 ○○[우물?]을 판다. 물이 난다. 이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8월 23일

오늘은 우리 부대가 이동하는 날이다. 오늘 이동하는데 벌써 비가 내린 지 1주일, 비가 와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산악 80리가 넘는 이 험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강원도 고성군 고수동면 984고지에 밤 8시 30분에 도착. 비를 맞고 산 위에서 떨면서 날을 새웠다. 어찌나 인민군이 많이 죽었는지 냄새에 코를 들 수 없다. 호(壕) 속에 사체, 그 위에 앉았다. 아······ 인간의 일생 험하다.

 

8월 24일 금 맑음

오늘부터 교전이 개시. 중대는 부상자 8명 발생함. 전투는 치열함.

 

8월 25일 토 맑음

924고지로부터 751고지로 전진. 계속 전투가 치열함. 중대장 부상당함.

 

8월 26일 일 맑음

계속 전투. 적의 포탄이 심히 떨어진다. 눈코 뜰 새 없다.

 

8월 28일 화 비

비는 계속하여 내린다. 11사단 20연대는 884고지를 점령하였다. 오늘도 포탄은 계속 떨어진다. 호가 무너져서 2명 부상을 당하였다. 중대장이 없어 다른 날보다 더 바쁘다.

 

8월 29일 수 흐림

오들도 적은 끊임없이 포를 쏟아 포진지에 두 방이 떨어져 2명이나 전상(戰傷)당하였다. 전투는 계속된다. 6중대 공격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였다.

 

8월 30일 목 맑음

오늘은 비행기 보급품을 많이 떨어뜨렸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였으며 일부 병사가 가서 주워 왔다. 계속 포를 쏘며 떨어진다.

 

 

 

전시 수첩 1  차영근은 손바닥만 한 작은 전시수첩에 매일의 사건과 단상을 기록했다. 짧은 글 속에 한국전쟁의 참상이 담겨 있다. (박건호 소장)

 

 

 

 

9월 18일 화 맑음

오늘도 전진. 약 2.4키로 진격하였다. 지뢰에 2명 부상당하였다. 지긋지긋하다.

 

9월 20일 목 맑음

175고지에서 대강리로 이동. 밤과 감자를 삶아 먹었다. 보급이 되지 않았다. 아······배가고프다.그러나군심(軍心)으로버틸뿐이다.

 

 

9월 22일 토 맑음

적의 반격. 야간 포사격을 실시함. 그리하여 미명(未明)에 적을 완전 격퇴함.

 

10월 3일 수 맑음

○○ 호를 완전히 구축하였다. 손바닥이 부러텄다.

 

10월 12일 금

월미산 공격이다. 중대는 포로 6명, 장총2정, 88포판 1대를 노획하였다. 금일은 1, 2목표를 점령하였다.

 

10월 14일 일 비

오늘은 어제의 공격을 계속하여 월미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성공이다.

 

11월 1일 수 비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호가 샌다. 모두 골치를 앓는다.

 

11월 2일 목 흐림

오늘은 어제 비가 내린 것이 개의치 않고 계속 오나. 먼 산에는 눈이 하얗게 왔다. 백설이 날린다. 나는 공격준비의 포진지를 구축하였다.

 

11월 12일 일 비

적의 기습이다. 약 1개 연대가 기습하여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적은 완전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나는 OP에 나온 후 적 기습으로는 처음이다.

 

 

 

고지의 병사들  1953년 철원 서부 지역 고지에서 병사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1951년 7월 30일 월요일 흐림

오늘 사단 3첩장과 경향신문사 기자단이 중대 일선 생활을 시찰하였다. 오늘도 집에서 편지가 아니 오는구나. 그리운 남쪽을 바라본다.

 

8월 20일 월 비

오늘은 전사(戰死)를 대비하여 ○○을 만들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 나는 이것을 만들 적에 문득 고향이 그리웠으며 모성(母性) 등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9월 15일 토 맑음

오늘은 추석이다. 둥근 달을 바라보니 고향 산천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며 오늘도 소금을 찍어서 저녁을 먹었다. 탄식······

 

9월 16일 일 맑음

오늘도 저 달은 둥글다. 어머니 아버님은 더 달을 바라보시겠지. 아······ 산악의 추석.

 

10월 20일 토 비

형님과 동생의 서신을 받았다. 정근의 사진과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 또한 받았다. 사진을 손에 드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 어머니······.

 

12월 17일 일 흐림

다시 금산 방면으로 출발하여 금산 40리를 앞두고 하차하여 조식함. 고지 1개 배치되었다. 나는 백부 집 앞을 지나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편지만 써서 떨어뜨렸다. 임실을 지나면서도 편지만 떨어뜨렸다. 그 심중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고향을 지날 때의 심중이야말로······.

 

 

 

 

전시 수첩 2  차영근의 일기 중 1월 7일과 8일 부분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직후여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글씨체가 매우 거칠고 흐트러져 있다. 글씨도 울고 있다. "아······ 子息이 않이다. 不孝子다"로 시작해서 "아······ 아버지······"로 끝나고 있다. (박건호 소장)

 

 

 

1952년 1월 7일 일 맑음

아······ 자식이 아니다. 불효자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접하고 가지 못한 신세. 나는 한없이 상부(上部)를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고향을 향하여 아버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1월 8일

군인 생활이란 이런 것인가. 아······ 아버지······.

 

1월 9일 화 맑음

산청에서 진주, 하동을 거쳐 신흥에 도착 방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사죄하면 좋을지······. 솔직히 말하면 자식은 부모를 생각지 않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셔도 가보지 못한 이 불효자······.

 

 

 

MY COLLECTION 10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되었나?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1952년, 20.2×22.9cm, 박건호 소장.

 

1952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 권봉출(權鳳出)이 예천에 있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다.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절절한 내용을 연필로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경북 예천 출신의 청년 권봉출은 어떻게 북한군 포로가 된 것일까?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이우근, 한국전쟁 중 포항전투에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으로 싸우다 전사한 동성중학교 3학년 일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북한군에게 뿌린 선전 삐라(앞뒷면)

 

 

 

북한군 포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잡힌 북한군들이 몸수색을 받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임시 수용된 전쟁포로  1950년 9월 23일, 포로들이 철조망이 둘러쳐진 집결지에 임시로 수용되어 있다.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팻말이 전쟁포로가 된 이들의 처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공산포로와 반공포로

(위) 북한군 소년 포로는 처음에는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수용되었다. 몇 개월 후 이 소년이 공산포로 수용동으로 옮기겠다고 요청하자 반공포로 수용동에서는 이 소년을 처형하는 대신 보내기 전 몸에 태극기 그림과 '멸공', '애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아래) 북한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 반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태극기를 흔들면서 기뻐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부모님 전상서

시세가 복잡하고 추운 겨울이 닥친 이때 부모님께서는 몸 성히 계시옵나이까?

그리고 팔십이 가까운 할머니는 어떠신지, 단 세 식구의 가족일지라도 누구 한 분 벅차게 일할 분 없이 가사에 얽매어 때에 따라서는 갖은 풍파와 고통과 고생은 얼마나 계시며, 또한 불효 이 자식이래야 단 하나 있는 것 집을 떠난 뒤 부모 된 죄로 하루하루에 닥치는 걱정과 생각은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집 떠난 이후 아무 몸에 탈 없이 내 고향에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툭툭한 이불에 적당한 식사의 유엔의 원조로서 몸 건강히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장난과 상호 간의 정으로서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가까워오는 석방의 기일을 고대하고 있을 따름이니 부모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세 식구 둘러앉아 웃음으로 지내는 가정을 이룬다면 타향에 있는 이 불효자식일지라도 손꼽아 비나이다.

그리고 큰집의 가족들은 몸 편히들 계시고 작은 형님은 집에 계시는지 걱정이 되며 정다운 큰아버지, 큰어머니, 큰 형님은 몸 편히 잘 계십니까? 부디 저의 걱정은 마시고 몸 편히 계십시오. 작년 겨울은 몸 편히 부산에서 지냈고, 올 봄에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동 올 때 부산 계시는 고모와 고모부를 만났을 때 뜻밖의 일이라 무한히 울던 그 얼굴이 지금도 사무칩니다. 피난 내려온 누나도 어떻게 해서 고모네 집에 와 있다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자식의 부탁은 몸 성히들 계시다가 제가 돌아 갈 때는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화락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혼자 있는 아주머니가 그 나어린 여식애를 데리고 얼마나 고생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다운 동리 사람들에게 안부 드리며 이만 그칩니다. 몸 편히 계십시오.

1951년(4284) 12월 13일 자식 봉출 씀

 

 

 

MY COLLECTION 11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전쟁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삶에 대하여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1952년, 14.0×10.5cm, 박건호 소장

 

한국전쟁 중 촬영한 '영동학도 육상경기대회 기념 (우승)' 사진이다. 사진 뒷면에는 '영동지구 올림피아 대회 때 우승을 획득하면서'라고 쓰여 있다. 전시에 열린 육상대회라니 의아하지만, 전쟁 중에도 일상을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일을 시작하는 수선공  가게가 있던 건물은 포격으로 무너져버렸지만 다시 그 자리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는 어느 수선공의 모습이다. 그는 첫 일거리로 국군 보병의 구두 수선을 맡았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소장)

 

 

 

삼척공고의 교표  삼척공고의 교표는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한국전쟁 때는 맨 오른쪽 것을 사용했다.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 속 학생들의 운동복에 이 교표가 새겨져 있다.

 

교장과 육상부 주장(아래)  뒷줄 가운데 앉은 이가 심호열 교장. 교장 앞에 앉은 학생은 육상부 주장으로 보인다. 운동복 상의에 새겨진 교표가 다른 학생들의 것과 다르다.

 

 

 

군경원호 포스터  사진의 오른쪽에 서 있는 교사 뒤로 포스터와 표어가 붙어 있다.

 

 

 

<군경원호의 노래>

 

(1절) 아들은 일선군경 우리의 용사 / 구름떼 달려가듯 쌈터로 가고
       아버지 혼자 남아 도롱옷을 입고 / 아들이 하던 농사 맡아하시네

 

(2절) 아들을 보내놓고 혼자 남아서 / 터밭에서 김매는 늙은 어머니
       그 아들 그 얼굴도 모두 잊고서 / 오늘은 신명 앞에 승리를 비네.

 

(후렴) 이 나라 위한 그 정성 거룩한 그 마음 / 그를 도와주게 다같이
        그를 도와주세

 

 

 

상이용사 전역식  1951년 진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상이용사 전역식이 열렸다. (유엔기록보존소 소장 / 출처 : 국가기록원)

 

 

 

전쟁의 흔적  학교 건물의 현관 왼쪽, 깨진 유리창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근계(謹啓) 시하(時下) 초춘지제(初春之際)에 존체만중(尊体萬重) 하심을 앙축(仰祝)하오며, 본교 정서 교육 현실에 감하여 아동의 흥미와 아동의 심미적인 정의도야(情意陶冶)와 감상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교육에 중요한 부면(部面)을 차지하고 있는 음악 교육에 지장이 극심하던 차에 금번 다행히 군내 각 초중등학교에서 풍금을 공동구입케 된 바 본교 매월 500원의 사친회비를 징수하여서는 운영난으로 도저히 풍금을 구입할 도리가 없어 재삼(再三) 방법을 강구한 결과 아동 1인당 2,000원씩 징수키로 되었으니 3월 15일까지 납부하여주심을 앙망하나이다.

 

4285년 3월 2일

삼성국민학교 사친회장 정시헌

 

 

 

MY COLLECTION 12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태극기가 걸린 결혼 기념사진

1950년대, 박건호 소장.

 

태극기가 걸린 결혼식을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결혼식을 시작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언제부터 왜 결혼식장에 태극기가 등장했을까? 결혼 기념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이오시프 비사리노비치 스탈린 동지께서 어젯밤 돌아가셨다. 당 위원회에서는 앞으로 7일 동안을 국제 애도기간으로 공포하는 바이다. 앞으로 이 기간에 애도 집회 이외의 모든 집회는 절대 불허한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누구든 반역죄로 처단할 것이다. 위대한 인민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흩뜨리는 어떠한 행동도 절대 불허한다. 웃음도 안 되고 축구 경기, 결혼식은 물론 장례식도 안 된다.

 

 

 

영화 <사일런트 웨딩>의 포스터  2009년 개봉된 이 영화는 비극적인 결혼식 이야기를 통해 옛 소련의 강압적인 통치를 풍자하고 있다.

 

 

 

문화혁명기 중국의 결혼식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의 한 장면으로, 문화혁명기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혁명화된 결혼식'이 강요되었다.

 

 

 

서울동부서는 15일 서 모 군(20. 서울 성동구 하일동)을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즉심에 넘겼는데. 장갑 행상인 서 군은 14일 하오 5시쯤 천호동 문화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국가가 울려 나올 때 그대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것. 서군은 지날 1일부터 시작된 <애국가> 연주 시 지켜야할 기립 예의를 어긴 첫 케이스가 된 것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예의를 모두 지켜야.

- 1971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의 <돋보기>

 

 

 

태극기가 걸린 결혼식장  (왼쪽) 대형 태극기가 정면 한가운데에 걸려 있는 결혼식장의 모습. 태극기가 워낙 커서 자칫 공공기관 행사 기념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다. (오른쪽)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런 피로연장에도 태극기가 필수품처럼 걸려 있다. (박건호 소장)

 

 

 

국기 하강식  오후 6시(동절기에는 오후 5시), <애국가>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국민은 하던 일도, 가던 길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이러한 전 국민의 '일시 멈춤'은 1976년 10월부터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경향신문)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일제강점기 수신 교과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통해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양성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왼쪽, 박건호 소장)

 

일제강점기 말의 결혼 사진  당시 신식 결혼식장에는 일장기나 만국기를 거는 것이 의례였던 모양이다. 만국기 중에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도 보인다. (오른쪽, 박건호 소장)

 

 

 

'국기 배례'가 행해진 결혼식  이 역시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결혼식장 기념사진이다. 사진의 왼쪽(붉은 테두리 부분)에 결혼식 식순이 게시되어 있는데 '국기 배례'가 포함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1960년대 결혼 기념사진  결혼식장에서 태극기가 왼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박건호 소장)

 

 

 

MY COLLECTION 13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대통령 생일이

뭣이 그리

중헌디!

 

 

 

경기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

1956~1957년, 19.8×25.0cm, 박건호 소장.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김장환의 일기장에는 1956년 초부터 1957년 4월까지 쓴 일기가 기록되어 잇다. 김장환은 비록 10대였지만, 일기를 보건대 세상일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소소한 일상 말고도 정치 ·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관찰하고 소감을 기록했다.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 기념 송수탑(왼쪽)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남한산성에 세워진 송수탑 앞에서 찍은 어느 가족의 기념사진이다. 송수탑 위에 장식된 동물은 최고 권력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다. 이 송수탑은 4 · 19혁명 후 4미터가량의 탑 본체와 청동 봉황상을 분리하여 탑 부분은 기단 앞 땅속에 묻었고, 청동 조각은 남한산성 공원 측이 보관하던 중 유실되었다. (박건호 소장)

 

이승만 대통령 84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 상장(오른쪽)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맞아 실시된 글짓기 대회에서 이재유 학생이 가작으로 받은 상장이다. (박건호 소장)

 

 

 

제3대 정 · 부통령 선거 홍보물  민주당이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에 많은 국민이 호응하자 여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는 구호로 응수했다. (위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장 / 가운데 - 박건호 소장 / 아래 - 국가기록원 소장)

 

 

 

3월 15일 목요일

현재 정치상으로 보면 이 대통령이 무슨 이유인지 3선 출마를 안 한다고 자유당 회의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공무원 요원들은 국민을 시켜 이 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나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민을 억지로 시켜 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으니 이것은 민주국가에 위반된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동회에서는 강제로 대통령 재출마의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 둥, 안하면 재미적다는 등과 같은 일이 발생하여 말이 많다. 그리고 매일 경무대에 대통령 재출마 요청인들이 무려 4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이 정직히 원하는 바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무원의 조정으로 끌려온 사람인가?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대통령께서 가끔 우리나라 경제 상태를 아시려고 동화 백화점에 오셔서 물건을 사신다. 그런데 그 비서들이 그 전날 상점에 가서 이 대통령에겐 싸게 팔기를 정해 놓는다. 그들은 참된 대통령을 참되게 모시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대통령에 장점만 뵈려는 원숭이의 극(劇)이니 만치 이것이 쭉 계속된다면 후일의 우리 세계는 어떻게 될는지 의문이다.

 

 

 

3월 25일 일요일 비, 눈

저녁부터 젖은 강산을 내려퍼붓는 눈은 아직 늦겨울을 다시 상징하는 듯 지천 없이 떨어지는 양은 내일의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함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지루하게 만듦인지······.

 

3월 26일 월요일 갬, 흐림

오늘은 대통령 생신이었건만 날이 질고 해서 우리들은 행사가 없었으나 육해공군의 사관생들의 사열 등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수업은커녕 학교에서 바로 집에 돌아오다.

 

3월 29일 목요일 갬

오늘은 연기한 대통령 생일 축하식이다. 동무들은 생일도 연기할 수 있나 하고 말하였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연세가 세계적으로 많으신 대통령의 축하만은 일기 관계로 연기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4월 28일 토요일 갬

요즘은 전기도 24시간 준다. 그리고 판잣집 철거 문제를 취소했다. 그것뿐이랴. 세금도 잘 안 받는다. 그것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매우 큰 계획인 것 같다. 이러고 보니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에 한 번씩 있었으면 그 얼마나 좋은 그리고 살기 편리한 나라와 도시가 될까.

 

5월 5일 토요일 비

이번 입후보자 중 이승만 대통령에 제일 강적으로 대항하던 신익희씨가 이리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는 좀 그를 투표해줄 가망이 있었고, 더욱이 이번엔 어떻게 된 셈인지 민심이 그리로 많이 쏠렸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전주로 정견 발표 차 떠났는데 기차 안에서 발병되어 이리에 도착하여 호남병원에 입원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15분 후인 오전 5시 45분에 임종하셨다는 것이다.

 

5월 6일 일요일 갬

민족을 울려놓고 돌아가신 고 신익희씨의 시체를 담은 엠브란스[앰뷸런스]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의 아우성 소리. 그중에는 대학생을 비롯한 고등학생이 많았다. 그 행렬이 서울역을 지나 중앙청에 이르자 국민의 흥분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 신익희씨의 시체가 다 안치되자 그 무리들은 경무대로 데모, 경찰을 막 두드리면서 팔매질로 말미암아 경찰과 헌병에서 뿜는 총에 겨우 진압. 한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총에 쓰러진 자는 수십 명에 되는 듯하나 다 끌고 가서 잘 알 수 없다는 것······.

 

5월 15일 화요일 갬

오늘은 장차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통령 그리고 부통령 선거일이다. 대통령엔 해공 신익희 선생의 빈 자리를 둔 채, 이승만 박사와 조봉암씨의 결전이고, 부통령 후보에선 8인 중 박기출씨와 이종태씨가 탈퇴했다. 우리 집에선 아버지 주장에 대통령엔 조봉암, 부통령엔 장면씨로 투표했다. 여지껏 선전 방해라든가 폭력을 사용한 것은 자유당의 짓이 매우 많았다 한다. 그리고 지금 계산으로는 대통령에는 틀림없이 이승만 씨일 테고, 부통령엔 장면 씨일 것이라고 추측되나 뒤에 자유 분위기를 폭발하거나 또는 무더기투표를 하면 부통령엔 변동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매스게임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80세 생일 잔치를 대규모로 치르고서도 이후 매년 성대한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84세 생일이었던 1959년 3월 26일에도 80세 생일과 마찬가지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경축식이 있었고, 학생들도 여전히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매스게임을 펼쳤다. (국가기록원 소장)

 

 

 

3월 24일 일요일 흐림

오늘은 의사가 더 한번 왕진을 왔었는데, 온 이유는 어머니가 매우 약하시므로 링그루[링거] 주사를 놓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핏줄이 어찌나 가는지 그만 못 놓고 다른 주사만 놓고 갔다. 어머니는 병 시초보다도 더 매우 야위셨다. 요새는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형편이다.

 

3월 26일 화요일

오늘은 대통령 82세 생일날이다. 요즘같이 경제가 핍박하고 절양궁민이 많은 이때 그렇게 화려하게 연다 하니 좀 엉터리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도 어제까지 마스게임 연습을 했었으나 연기했음으로 실제로 활동은 어렵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양자로 이기붕의 맏아들을 정해서 새 부자식(父子式)도 오늘 거행했다.

 

3월 28일 목요일 눈. 흐림

어머니의 병환은 자꾸 더해 가시는 것만 같다. 요새는 진지 잡수시는 족족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다시 죽을 끓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양꿀을 사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꿀물이라도 끓여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달걀 잡수셨으나 여위실대로 여위시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웃음도 즐거움도 없이 그저 슬픔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번 어머님을 이별하고 그 슬픔과 아울러 어머님이 살아 계신 동안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무엇을 남겨주셨으며 우리의 장래는 어머니의 과거 지도로써 어떻게 나가야 어머님의 그 애쓰신 보람이 조금이나마 부끄럼 없이 나타내야 하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명상하면서 글을 쓰고자 한다. 나는 지금 나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철거된 동상들  4 · 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이승만 동상도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졌다. 서울 남산(위)과 탑골공원(아래 오른쪽)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된 직후의 사진으로, 우상 정치의 허망함을 증언해주는 장면이다. 당시 85세의 노(老)대통령은 매년 자신의 생일을 찬양해 마지않던 자신의 신민(臣民)들이 왜 이토록 분노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그의 신민들은 4 · 19혁명을 통해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MY COLLECTION 14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이

되었나?

 

 

 

김유신 장군 기록화 전시장 사진

1970년대로 추정, 11.2×8.3cm, 박건호 소장.

 

한 남성이 '김유신 장군 일대기 기록화전'을 보기 위해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있는 사진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 지지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위, 가운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였던 박정희와 김대중의 선거 벽보.(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장 / 김대중평화센터 소장)

(아래)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이 본인이 출마하는 마지막 선거임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개표 결과 영남 지역에서 몰표를 받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식은 1971년 7월 1일 2,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 앞에서 거행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 정상화시킨다.

 

 

 

비상계엄 선포  《경향신문》은 1972년 10월 18일자 1면에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제목 아래 박정희의 특별선언을 보도했다. 박정희 사진 왼쪽에 세로로 '평화통일(平和統一) 지향 위해 결단(決斷)'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박정희는 이렇게 남북 대화를 집권 연장에 악용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홍보물  국민투표를 앞두고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유신헌법에 찬성하면 번영과 통일이 오고, 반대하면 혼란과 분열과 파멸이 온다는 이분법을 들이대며 찬성을 강요하고 있다. (박건호 소장)

 

 

유신 홍보용 가사

 

십일칠(10. 17) 유신은 /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하듯이 / 남북통일 되고요
근대화에 목말라 / 바가지에 물 떠서
목마른 자 물주는 / 바가지를 믿어요.

 

 

 

구국의 영웅 이순신  (위) 1968년 4월 이순신 성웅화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이 건립되었다. (아래) 어느 학교의 기념사진으로 현관 위에 '충무정신 바탕 삼아 민족중흥 앞장서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삼국통일의 기수 김유신  경주에 있는 김유신의 무덤과 동상이다. 이순신에 이어 김유신도 박정희 정권을 이념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바라는 그 마음으로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비상조치를 지지할 것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앞에서 밝힌 제반 개혁이, 공약한 시일 내에 모두 순조로이 완결될 것으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으로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 국민들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 10월 17일 특별선언(유신선언)

 

 

 

유신헌법 국민투표 홍보 표어  왼쪽의 표어 3종은 1972년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당시의 홍보 표어들이다. 유신헌법에 찬성을 해야 평화통일과 민족번영,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가 토착화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맨 오른쪽 표어는 문화공보부에서 제작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에는 반공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1972년 유신을 선포하면서 갑자기 평화통일을 위해 독재(물론 자신은 이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했지만)가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반공’과 ‘평화통일’ 두 구호 모두 박정희에게는 자신의 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매우 어색한 이런 조합의 구호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반공'과 '평화통일’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구호였으나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과감히 활용했다. '반공으로 평화통일'이 가당하기나 한가? (박건호 소장)

 

 

 

“나는 사람들의 삶을 모으고,
역사의 흔적들과 대화하는 일에 빠져 있다”

역사를 수집하는 컬렉터의 특별하고 가슴 뛰는 수집 일기

30여 년 전,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우연히 찾은 토기 파편 하나가 열정적인 역사 수집의 시작이었다. 사진 한 장에서부터 일기장, 편지, 영수증, 사인, 사직서, 온갖 증명서까지 개개인의 삶과 일상이 담긴 물건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자료에 숨겨진 역사적 코드들을 하나둘씩 추적하고, 그날을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면서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시간은 희열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컬렉터를 사로잡은 수집과 역사 읽기의 흥미로운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이 책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다."

- 김육훈(서울공업고등학교 역사 교사)

 

"그는 열정적인 수집가이며 진지한 탐구자이며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 윤종배(명일중학교 역사 교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소소한 자료들에 쌓인 먼지를 떨어내고 온기 어린 글로 역사적 의미를 불어넣는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 정요근(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내가 읽은 책들 > 202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13 화순이 좋다  (0) 2021.03.20
2021-006 신안  (0) 2021.01.24
2021-003 춘천  (0) 2021.01.10
2021-002 태고의 시간들  (0) 2021.01.02
2021-001 목포  (0) 2021.01.02
Posted by 드무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