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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12.05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3
  3. 2020.12.04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2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Kaiser,

Hardtop Jeep CJ5

지프 CJ5 모델은 1954년부터 86년까지 생산된 차량이다.

4륜 구동으로 군용차량으로 널리 쓰이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성능이 대폭 개선되어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이용한 차량으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차량이기도 하다.

 

기증 | 박지만 2014.4.9

 

경부고속도로 도로 단면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당시 왕복 4차선에 편도 2차선으로 건설되었다.

차도와 배수로를 포함하여 도로가 점유하고 있는 전체의 폭은 40m이고, 차도의 폭은 22.4m이다. 중앙분리대를 기준으로 차도 한쪽의 폭은 7.2m로 차량 1대가 다닐 수 잇는 차선 폭은 3.6m이다. 부수 시설로는 중앙분리대 3m, 측대 0.25m, 갓길 2.5m이며 기초 지반은 노체, 노상, 보조기층, 기층, 표층의 5개층으로 이루어져 잇다. 도로포장은 보조기층에서 표층까지의 6.25m에 대해 실시하고, 그 밑에는 흙과 자갈로 다졌다.

 

1968년 2월 1일

대동맥의 중추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첫 발파 소리

 

매일의 삶이 모여

기적과 열정이 모여

 

경부고속도로에는 전 구간이 완공된 1970년에 총 368만 9,000대의 차량이 몰려들었다. 이후 이용량이 꾸준히 늘어나 1985년에 3천 400만 대를 넘기면서 개통 당시에 비해 10배의 통행량을 보였고, 2017년에는 100배가 넘는 약 4억 9,000만 대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고 항만과 주요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산업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고속도로 인근 지역의 소득향상은 물론 도로건설 기술의 축적으로 해외건설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 사람의 굳은 의지와

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이 합쳐

절망에서 희망을

희망이 곧 현실로

우리는 오늘도

그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역사를 만든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농민은 하늘도 도와 주는 법입니다. 그러자 자조정신이 강하지 못한 농민은 하늘도 도울 수 없고 정부도 도울 수 없고 이웃도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70년 6월 10일

                                                                                               권농일 치사

 

새마을 운동 선포 1970년 04월 22일

 

근면 DILIGENCE  자조 SELF-HELP  협동 COOPERATION

 

"잘 살 수 있는 길은 남에게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에서 우러나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할 때 자연히 트이는 법입니다."

                                                               1962년 5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농민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 중

 

새마을가꾸기 사업 추진현황 보고(2차)

1970년 7월 24일에 기보고된 새마을가꾸기 사업, 씨멘트 지원의 수송, 비축, 관리 등 추진상황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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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rT3F_rhET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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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3

 

 

문경공립보통학교 현판

 

대구사범학교 성적표

대구사범학교 재학 당시(1932~1937) 성적표로서 체육과 교련과목 외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대구사범학교 교모

 

대구사범학교 교복

 

금강산의 추억

 

1934년 5월 대구사범학교 3학년이었던 박정희는 70여 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금강산의 절경에 감동하여 각자 글들을 남겼는데 박정희는 민족의 아픈 현실과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쓸 정도로 남다른 열일곱 청년이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수통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모의소총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철모 그리고 나팔

 

사진은 대구사범대학 4기생 나팔수 때의 박정희(오른쪽 끝이 박정희)

 

나팔의 1인자 The Trumpet Player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팔을 좋아하였다. 동급생들은 그를 '나팔의 1인자'라고 불렀고 고향에 내려갈 때도 나팔을 가지고 다니며 불곤하였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는 '박 선생'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될 정도였다. 때로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악단을 만든 뒤 출장 공연까지 다니기도 하였다. 나팔은 박정희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였고 퍼져나가는 나팔소리와 함께 가슴속 깊이 품고 있던 군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어머니와 박정희

 

계란

어려운 가정형편에 박정희의 학교 수업료를 내기 위해 어머니는 계란을 모아 팔기도 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문경공립보통학교는 1912년 4월 12일 4년제 학교로 개교하였다. 1950년 8월 1일 문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1996년 4월 1일 지금의 문경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2018년 2월 9일 104회 졸업식을 맞으면서 그동안 13,93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4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간 근무하였다. 교사 박정희는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고, 태극기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는 학비까지 챙겨주는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부임 시절1937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박정희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박정희 오른쪽에 있는 강신분은 "선생님은 워낙 착실하여 일본인 교사들과도 원만한 사이였다."고 회상하였다.

 

동료 교사들과의 악기 연주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어 종종 동료교사들과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위 사진 가운데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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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1xZC9pJ_K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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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2

 

 

생가 모형 앞에서 설명문을 읽고 있는 승부

 

대구사범학교

 

박정희 대통령 가계도

 

구미의 명산 금오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상모리는 1910년대 당시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 마을 중 하나였다. 박정희는 아버지 박성빈朴成彬1871~1938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1872~1949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박정희를 임신한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과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해 뱃속에 아기를 지우려고 애썼지만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보냇다. 20리8km나 되는 등굣길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겨울이면 빙판길에 수없이 넘어졌고 늑대까지 나타낼 땐 힘든 등굣길이 되기도 하였다. 가끔 어머니가 보리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주던 비빔밥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년 박정희를 깨우는 어머니

 

탈곡기

 

보통학교 자연과학 교과서(初等理科書)

1931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 자연과학 교과서

 

소설 《이순신》

구미보통학교 시절 즐겨 읽었던 춘원(春園)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

첫 장에는 직접 작성한 감상문이 쓰여 있다.

 

구미보통학교 성적표

구미보통학교 시절 성적표(역사, 지리, 산술, 조선어 성적이 우수하였고 6학년 때에는 13개 과목 중 체조와 가사실습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이었다.

 

李舜臣 實記

 

이순신 실기를 읽고 있는 소년 박정희

 

대추방망이 소년시절

 

소년시절 박정희는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야무지고 통솔력있는 당찬 소년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1등을 차지하였고, 3학년부터는 반장을 도맡았다. 책읽기를 좋아하였던 박정희는 그중에서도 위인들에 대한 전기를 즐겨 읽었다. 5학년 때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쓴 소설 《이순신》을 읽었고,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는 어린 박정희가 영웅의 꿈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일 일제강점기 당시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대구에 설림된 학교이다. 설립 당시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출발하였으며, 1929년에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다시 신설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사범학교제도 개편에 따라 전문학교 수준의 사범학교가 되었고, 1946년 10월 15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62년 2월 경북대학교 병설교육대학으로 개편, 1963년 2월 2일 제12회 본과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현재는 대구교육대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사범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 정도로 경쟁률이 높고 우수한 학교였다. 특히 평양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 경성사범학교는 전국 3대 명문학교로 손꼽혔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1932년 4월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개교이래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제4기생)에 입학하였다. 입학 정원 100명(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 중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한 잦은 결석에 고학년으로 갈수록 학교성적은 최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사격, 육상, 나팔 등에는 남달리 뛰어났다.

누나인 박재희朴在熙는 "동생 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진학은 쉽지만은 않았다.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응시는 하였지만 학비를 지원해 줄 형편이 되지 못한 부모님은 차라리 시험에서 떨어지길 바라셨다."고 하였다. 사범학교 5년 동안의 배움은 청년 박정희의 포부를 키우는 시기였다.

 

대구사범학교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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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FMESsRCIu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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