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기념관] 18

 

 

전력난 해소

8 · 15광복 당시 남한의 전력 설비는 소규모의 수력발전과 낡은 화력발전 시설이 전부였다. 따라서 한반도 발전시설의 88.5%가 집중되어 있는 북한의 전력을 빌려 써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정치적인 이유를 거론하며 1948년 5월 일방적으로 송전을 중단하였다. 6 · 25전쟁의 발발로 기존의 전력 생산 시설마저 파괴되면서 우리나라는 사상 최악의 전력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절전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력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전력 생산시설 확보에 힘쓴 결과 1964년 제한 송전 조치를 해제할 수 있었다.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전력 수요의 급증으로 저가의 전력생산과 전력공급의 다원화를 위해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중 15개의 화력발전소와 19개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고리 · 월성 · 영광 · 울진에 원자력발전소 10개를 건설 또는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전력의 자급자족을 이루었다.

 

첨두출력 100만 KW 돌파기념(왼쪽)

해방이후 19년 동안 되풀이 됐던 제한송전이 해제되고 급속한 산업발전으로 전력수요가 해마다 늘어 1968년 최대출력 100만 KW를 돌파하였다. 1968. 10. 17.

 

전력수요 200KW 돌파기념(오른쪽)

4대강 유역의 다목적 댐건설로 전력수요 200만 KW 돌파 기념패. 1972. 11. 7.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계획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을 위한 현황파악 및 계획을 정리한 보고서. 1973. 5. 22.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

1960년대 우리나라 농어촌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호롱불을 밝혀 생활하곤 하였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특별대책으로 성과를 거둔 것이 바로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이다. 농어촌 전화 사업은 1965년 12월 30일 '농어촌 전화 촉진법' 제정을 시작으로 새마을 운동 성과가 우수한 마을부터 전기를 공급해 준다는 원칙아래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65년 농어촌 12%, 도시 51%에 불과하던 전화 사용률을 1979년 전국 평균 96.7%까지 끌어 올리며 우리 국토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천지역 전화(電化) 사업 기공식 1965

 

민둥산의 기적, 산림녹화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6 · 25전쟁을 거치면서 산림의 50%가 민둥산이 되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땔감용 나무를 구하기 위한 산림훼손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법과 사방사업법을 제정하여 산림녹화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였다. 총 12개의 국립공원을 지정하여 자연환경의 훼손을 막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였으며,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막기 위해 그린벨트도 지정하였다. 1973년, 10년 동안 남한의 산림면적 1/6에 나무를 심고, 2/3를 가꾸겠다는 목표 아래 추진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1978년, 그 목표를 4년이나 앞당겨 달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둥산이었던 전국의 산들은 푸른 산으로 바뀌었고 우리나라 산림녹화사업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발전보다 오히려 더 값진 평가를 받았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하나의 역작이자,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산림강국으로 만들어낸 인간승리의 역사였다.

 

양택식 경북도지사에게 보낸 친서

 

사방공사와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께서 양택식 경북도지사에게 보낸 친서

 

「귀도 월성군 입실역에서 울산으로 가는 기차로 약 1㎞쯤 가면 동측에 사방상태가 지극히 불량한 산이 보일 것입니다.

원래 산의 경사가 급하고 암석지대임으로 보통방법으로서는 사방을 하드래도 강우시에는 유실되고 초목의 활착이 잘 안되는 지형임으로 여기에 사방을 하자면 특수공법으로 기술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저 형편없는 산이 저처럼 훌륭하게 사방이 잘 되었구나 하는 소리가 나오겠금 연내라도 즉시 착수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을 희망합니다.」

 

"4대강이라는 것은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한강과 낙동강, 금강 그리고 호남지방을 흘러가는 영산강입니다. 이 4대강 유역의 농경지는 우리 남한에 있는 전 농경지의 약 7% 정도가 됩니다.

4대강 유역을 잘 개발하면 홍수를 조절할 수 있고, 이 유역에 새로운 공업지대를 개발할 수 있게 되며, 근대적인 영농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됩니다."

 

1972년 11월 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식에서

 

다목적 수자원 개발

 

우리나라는 연도별 · 지역별 강수량의 편차가 심하고 하절기에 집중된 강수량으로 인해 매년 가뭄과 홍수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여 수자원 관리가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특히 1970년대 발생한 전국의 홍수와 가뭄 피해의 60% 이상이 4대강(한강 · 낙동강 · 금강 · 영산강) 유역에 발생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4대강 유역에 다목적댐을 집중적으로 건설함으로써 가뭄과 홍수피해 방지는 물론 수력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하고 식량증산을 위한 농업용수와 생활 및 공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활용하였다. 특히 아산만 방조제를 건설하여 1억4천만 톤의 농업용수를 담은 동양 최대의 인공 담수호인 아산호를 조성하였고 연인원 33만 6,000명이 동원되어 완공된 삽교천 방조제는 홍수와 가뭄의 피해가 극심했던 충남지역의 농수를 해결하였다.

 

다목적 및 4대강 댐 건설

구분 댐 이름
다목적댐 소양강댐,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섬진강댐, 남강댐
생활 · 공업용수 전용댐 영천댐, 수어댐, 사연댐, 안계댐, 회야댐, 대암댐, 공산댐, 선암댐, 연초댐
농업용수댐 장성댐, 담양댐, 광주댐, 나주댐
하구둑 영산강, 안성천, 삽교천
4



북한강 소양강댐, 춘천댐, 의암댐, 팔당댐
남한강 충주댐
금강 대청댐, 아산만 방조제
낙동강 남강댐, 영천댐, 안동댐
영산강 장성댐, 담양댐, 광주댐, 나주댐

 

홍수 및 한해 방지용 방조제 건설

구분 장소 공사기간 비고
아산만 방조제 충남 아산시 인주면과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을 잇는 방조제
1972.2~1974.5 1억4천만 톤의 농업용수 담은 동양 최대의 인공 담수호
아산호
삽교천 방조제 아산만 삽교천 하구인 충남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와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를 잇는 방조제
1976.12~1979.10 충남 당진, 아산, 예산, 홍성 4개 군과 22개 읍면 지역의 농수 해결

 

만일 우리가 오늘 하루를 허송하여 과학기술진흥을 소홀히 한다면 남보다 1년 뒤떨어지게 될 것이며, 1년을 아무 노력 없이 보낸다면 10년, 또는 20년 이상의 후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 4월 21일

과학의 날 담화문

 

국제기능올림픽 첫 종합우승

 

기술인력 양성과 국제기능올림픽

 

1970년대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추진 중에 있었지만 기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자와 기술자의 연구와 발명만이 국가산업과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민족의 역량을 과사할 수 있는 국력의 척도가 된다는 신념에 따라 기술인력 양성에 힘썼다. 이에 따라 각 도별 기계공업고등학교와 공업전문대를 설립, 특성화 공대제도를 도입하고 초정밀기계 가공능력을 갖춘 전문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정밀기능사를 양성하였다. 또한 지방 출장 때마다 기계공고의 실습실을 들러 학생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었다. 그 결과 매년 5만 명의 우수한 기능공이 사회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1977년 국제기능올림픽 종합우승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총 19번의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워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20  (0) 2021.03.14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9  (0) 2021.03.12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7  (1)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0)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0) 2021.01.03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7

 

새마을 모자(왼쪽)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용했던 새마을 모자. 1970.

 

새마을 노래 LP판(오른쪽)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로 새마을 운동 당시 전국에 널리 불려졌다. 1972.

 

한국신문협회 창립 10주년 기념패(왼쪽)

한국신문협회 창립 10주년 기념패로 새마을 운동 노래 악보와 가사가 쓰여 있다. 1972. 10. 13.

 

새마을 교재 / 정신교육특별과정(오른쪽)

새마을 운동에 대한 교육용 교재로 새마을 운동 정신계발, 정책방향, 성공사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새마을운동

새마을 운동은 근면 · 자조 · 협동 정신을 생활화하는 국민의식 개혁과 사회구조 개선을 지향하는 운동으로서 대통령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책적 지원, 새마을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어우러진 범국민운동이었다. 정부는 1970년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사업추진 성과가 뚜렷한 1만 6,600개 마을에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공급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내세워 자발적인 협동 노력을 장려하였다. 새마을 운동은 공장과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 운동으로 확대 · 발전되었고 농가부업장려, 영농의 과학화, 새마을금고 육성 등 소득증대사업으로까지 넓혀 갔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1970년대 경제 발전을 이루는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 오늘날 새마을운동은 개발도상국의 국가발전 모델로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개도국의 공무원과 학생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아와 교육을 받고, 자국의 실정에 맞게 도입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의 기본방향

대통령 비서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새마을 운동의 기본방향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1972. 4.

 

새마을운동 취지문

새마을운동의 개념과 추진방법이 담긴 박정희 대통령 친필 원고. 1972. 4. 28.

 

67년도 대농어촌 지원계획

국가 차원의 농지 확대 개발 정책을 수립 시행하면서 농어촌에 대한 재정 및 금융 지원 계획.

 

주곡의 자급자족,

통일벼 개발

 

한국의 녹색혁명

벼 신품종의 개발과 보급. 1978. 5. 10.

 

성공한 한국의 녹색혁명(국제미작연구소)

필리핀 소재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발행한 "국제미작연구보고서"(1976 추계호)에 우리나라 농업혁명에 관한 보고서가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 1967. 11. 3.

 

주곡의 자급자족,

통일벼 개발

1960년대 우리나라는 국민 대다수가 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보릿고개'는 배고픔의 대명사였다.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의 고통을 해결하고 식량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매년 겪어야 했던 식량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주식인 쌀의 신품종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단위당 생산량이 다른 품종들보다 30%나 높은 통일벼였다. 통일벼는 1971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희 교수에 의해 개발된 품종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일반벼는 이삭 당 낱알이 80~90개인데 비해 통일벼는 40%가 더 많은 120~130개가 생산되었다. 통일벼는 '주곡의 자급달성과 녹색혁명 성취'라는 오랜 집념의 결실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1975년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었다.

 

벼 신품종 육성결과 보고(제384호)

농림부에서 경제장관회의에 벼 우량품종의 육성경위와 보급 방안을 보고한 문서. 1969. 9

 

한강유역개발

 

여의도 개발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1968.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8. 6. 1.

 

한강유역개발

1960년대 이전까지 수도 서울의 중심은 한강 이북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문제와 주택난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서울 외곽지역의 개발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강개발계획을 추진하였다. 먼저 한강의 홍수 피해를 막고 도심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강변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때 건설된 강변도로가 오늘날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이다. 또한 강남개발로 인한 교통량 급증을 해결하기 위해 1979년까지 한강을 건너는 총 9개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시내 교통체증을 원활히 하기 위해 남산터널과 지하보도, 육교도 건설되었다. 한편, 한강변의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반포 · 압구정 · 잠실 등 총 19개 지구, 약 396㎢의 택지를 조성하였다. 오늘날 여의도공원도 원래는 1967년 한강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된 5 · 16광장이었다. 이렇듯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합개발은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960~70년대 한강의 교량건설

교량명 제2한강교
(양화대교)
제3한강교
(한남대교)
서울대교
(마포대교)
잠실대교 영동대교 천호대교 잠수교 성수대교 잠실철교
위치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서울시 마포구 마포동~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완공일자 1965.1.25 1969.12.25 1970.5.16 1972.7.1 1973.11.8 1976.7.5 1976.7.15 1979.10.15 1979.10.30

 

도시계획

서울도시계획 보고서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의 및 지시사항을 적은 문서. 1969. 01. 26.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9  (0) 2021.03.12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8  (0) 2021.01.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0)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0) 2021.01.03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0) 2020.12.20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Kaiser,

Hardtop Jeep CJ5

지프 CJ5 모델은 1954년부터 86년까지 생산된 차량이다.

4륜 구동으로 군용차량으로 널리 쓰이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성능이 대폭 개선되어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이용한 차량으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차량이기도 하다.

 

기증 | 박지만 2014.4.9

 

경부고속도로 도로 단면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당시 왕복 4차선에 편도 2차선으로 건설되었다.

차도와 배수로를 포함하여 도로가 점유하고 있는 전체의 폭은 40m이고, 차도의 폭은 22.4m이다. 중앙분리대를 기준으로 차도 한쪽의 폭은 7.2m로 차량 1대가 다닐 수 잇는 차선 폭은 3.6m이다. 부수 시설로는 중앙분리대 3m, 측대 0.25m, 갓길 2.5m이며 기초 지반은 노체, 노상, 보조기층, 기층, 표층의 5개층으로 이루어져 잇다. 도로포장은 보조기층에서 표층까지의 6.25m에 대해 실시하고, 그 밑에는 흙과 자갈로 다졌다.

 

1968년 2월 1일

대동맥의 중추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첫 발파 소리

 

매일의 삶이 모여

기적과 열정이 모여

 

경부고속도로에는 전 구간이 완공된 1970년에 총 368만 9,000대의 차량이 몰려들었다. 이후 이용량이 꾸준히 늘어나 1985년에 3천 400만 대를 넘기면서 개통 당시에 비해 10배의 통행량을 보였고, 2017년에는 100배가 넘는 약 4억 9,000만 대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고 항만과 주요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산업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고속도로 인근 지역의 소득향상은 물론 도로건설 기술의 축적으로 해외건설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 사람의 굳은 의지와

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이 합쳐

절망에서 희망을

희망이 곧 현실로

우리는 오늘도

그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역사를 만든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농민은 하늘도 도와 주는 법입니다. 그러자 자조정신이 강하지 못한 농민은 하늘도 도울 수 없고 정부도 도울 수 없고 이웃도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70년 6월 10일

                                                                                               권농일 치사

 

새마을 운동 선포 1970년 04월 22일

 

근면 DILIGENCE  자조 SELF-HELP  협동 COOPERATION

 

"잘 살 수 있는 길은 남에게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에서 우러나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할 때 자연히 트이는 법입니다."

                                                               1962년 5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농민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 중

 

새마을가꾸기 사업 추진현황 보고(2차)

1970년 7월 24일에 기보고된 새마을가꾸기 사업, 씨멘트 지원의 수송, 비축, 관리 등 추진상황 보고

 

 

 

 

- 계속

 

 

 

www.youtube.com/watch?v=rT3F_rhETT4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8  (0) 2021.01.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7  (1)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0) 2021.01.03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0)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2) 2020.12.20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기적의 역사 경부고속도로

 

1970년 7월 7일, 대한민국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1960년대 정부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최대 당면과제였던 산업화를 위한 육로수송체계의 전면적 개혁의 일환으로 시작된 '국토 중단의 대동맥'이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대 속에 불가능하게 보였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통령과 건설노동자들의 끈질긴 집념과 노력으로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였고, 이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성공적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개통 당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까지 총 428km로 완공되었으나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노선체제에 따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이르는 길이 416km, 너비 22.4m, 왕복 4~8차선의 고속도로가 되었다.

1968년 2월 1일에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왕복4차선 도로로 준공되었으며 개통된 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을 서울 - 부산 간 고속도로로 지정하였다. 총 429억 원이 투입된 경부고속도로는 16개의 업체와 3개의 건설 공병단이 시공에 참여하여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규모 국가사업이었다.

 

Kaiser, Hardtop Jeep CJ5

 

1950년대 빈곤의 극복과 6 · 25전쟁 후 복구 중심의 개발

1960년대 국토종합개발계획 기본 구상

1970년대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

1980년대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82~1991)

1990년대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92~2001)

2000년대 제4차 국토종합개발계획(2002~2020)

 

국토종합개발계획

1972~1981

 

국토는 국민의 자산이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생존 및 경제발전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제공해 주는 자원의 보고이다. 1966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국토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기본목표는 국토이용관리 효율화, 사회간접자본 확충, 국토자연개발과 자연보전, 국민생활환경의 개선에 두었다.

전국을 4대권, 8중권, 17소권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중에서 8중권을 중심으로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울산 · 포항 · 마산 · 창원 · 여수 등이 신공업단지로 개발되었고,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고속도로와 다목적댐들이 전국에 걸쳐 건설되었다. 이후에도 2, 3, 4차에 걸쳐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됨은 물론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토종합개발계획(부도)

 

국토의 효용가치를 높이기 위한 개발 계획. 1971. 10. 7

 

고속도로 건설공사 추진 현황 보고서  1968. 11. 4

 

국가기간 고속도로 설계 계획

 

1968년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에서 작성한 것으로 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한 사업추진과 계획을 정리한 것이다. 1968.

 

고속도로 건설 실천계획

 

서울 - 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사무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고속도로 건설 실천계획이 담긴 스크랩북.

 

경부고속도로 구간별 건설사 표기 지도

 

경부고속도로 구간 공사 점검 메모(좌)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부진 공구를 독려하기 위해 직접 쓰신 메모.

 

 

고속도로공사 관련 메모(우)

 

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예산, 노폭, 공사기간, 건설장비, 건설 자재 등을 꼼꼼하게 기록한 박정희 대통령 친필 메모.

 

드로잉 수첩(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쓰시던 수첩으로 고속도로 구상 메모가 적혀 있다.

 

고속도로 스케치(우)

 

고속도로 공사로 끊긴 마을을 교량으로 연결한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스케치한 그림.

 

고속도로 안내도

한국도로공사에서 제작 배포한 수첩형 고속도로 안내도. 1977. 10

 

도로사업 현황판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 지도 방문 때 사용했던 지도 현황판

 

망원경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 사찰 당시 사용했던 망원경. 1977. 10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모형

추풍령 휴게소에 위치한 기념탑의 축소형으로, 기단 전면과 후면에 부조 작품인 '고속도로 노래', '사업 개요' 등이 부착되어 있다. 1979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7  (1)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0)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0)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2)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0) 2020.12.18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철강산업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국가 건설에 가장 토대가 되는 산업을 철강산업으로 판단하고 종합제철소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한국은 아직 종합제철소를 세울 여건이 안된다는 국제사회의 회의적인 시각으로 인해 자금과 기술지원이 거절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 결과 포항종합제철이 1970년 4월 1일에 착공되어 1973년 7월 조강 연산 103만 2천톤 규모로 완성되었다. 포항종합제철 건설로 인해 우리나라는 철강제품의 자체공급이 가능해졌고, 조선 · 자동차 · 군수품 등 중공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SHIPBUILDING INDUSTRY

 

현대미포조선(울산) 확장

대우옥포조선(거제) 건설

삼성죽도조선(거제) 건설

 

※ 100만 톤 급 이상 선박 건조

 

산업기지 : 울산, 거제

 

조선공업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 천혜의 입지조건과 항만 그리고 영질의 풍부한 인력을 활용하여 조선공업을 수출 주도 공업으로 육성하였다. 조선공업은 우리나라 공업 구조를 향상 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철강공업과 기계공업 육성에도 목표를 두었으나 자금 확보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착수 2년 만인 1972년 3월 울산의 허허벌판에 2백 만 톤 규모의 현대조선소 기공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대우(목포조선소)와 삼성(죽도조선소)도 100만 톤 급 이상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조선공업 강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여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PETROCHEMICAL INDUSTRY

 

제1석유화학 : 울산 석유화학단지 시설 확장

제2석유화학 : 여천 제2석유화학단지 건설

 

산업기지 : 울산, 여천

 

석유화학공업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섬유 · 플라스틱 · 타이어 · 세제 등 석유화학산업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는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따라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 계획에 착수하였다. 석유화학 제품의 내수는 물론 수출을 목표로, 영세한 시설규모였던 울산의 석유화학단지를 10만 톤에서 15만 톤으로 확장하였다. 특히 1973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기공식을 갖게 된 35만 톤 규모의 '여천석유화학단지' 건설로 우리나라는 세계 일류의 석유화학공업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91년 기준으로 여천석유화학단지에서만 내수에 따른 수입 대체 효과가 연간 약 100억 달러에 달하였다.

 

NONFERROUS INDUSTRY

 

풍산금속, 한이석유 등 14개 업체 건설

 

산업기지 : 온산공업단지 착공

 

기종별 기계공업 진흥 기본 계획을 위한 세부조사 사업

 

기계공업 육성 사업의 구체적인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기계공업 제반 조사 사업계획보고서 1969. 7. 19.

 

MACHINERY INDUSTRY

 

방위산업, 기계류 공업 육성

 

산업기지 : 창원

 

ELECTRONICS INDUSTRY

 

반도체, 컴퓨터 산업, 첨단전자기기 생산

 

산업기지 : 구미전자공업단지 건설

 

비철금속공업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방부터 추진된 공업화로 인해 각종 산업의 기초 소재인 알루미늄, 구리, 아연 등 비철금속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비철금속이 지니는 중요성과 전후방 연관 생산에 미치는 광범위한 산업파급 효과를 고려하여 비철금속을 주요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1974년부터 울산의 온산면에 대규모 비철금속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온산공업단지는 지리적으로 청정지역이며, 항만 · 용수 · 동력 등 지원시설 환경도 유리하여 우리나라 비철금속공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기계공업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은 다른 공업부문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됨에 따라 산업구조를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고도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1967년 3월 기계공업진흥법을 제정하였고 기술향상과 국제 규모의 기계류 생산 단지 조성을 위해 힘썼다.

 

전자산업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미국 방문 당시 재미교포들과의 환담자리에서 세라믹공학의 권위자인 김기형 박사를 만나 한국전자산업의 발전울 위해 일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김기형 박사의 반도체 집적회로를 검토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산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발표하고 19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에 이어 전자공업육성 8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전자공업단지의 최적지로 구미를 1971년 11월 착공을 시작으로 1973년 10월 총 200여 만 평 규모의 구미전자공단을 완공하였다. 구미공단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전략기지로 한국전자공업의 대표기업인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이 구미에서 기반을 다지며 성장하였다. 이들 기업을 통해 우리나라는 전자강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Kaiser, Hardtop Jeep CJ5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6  (0) 2021.01.17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0) 2021.01.03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2)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0) 2020.12.18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수출 1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까지

 

우리나라는 1964년 1억 달러를 수출한 후 불과 13년 만인 1977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했고, 외신들은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것이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라고 극찬햇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출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관계 공무원 그리고 기업과 근로자들이 밤낮없이 땀 흘려 일한 결과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1973년 전 세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중동전쟁을 빌미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대폭 인상하였다.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던 우리나라는 당시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던 중에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타개책의 일환으로 태권도 교관 파견 및 최규하 국무총리를 특사로 파견하는 등 중동과의 교섭과 관계형성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내기업들이 중동에 진출, 중동의 토건공사부터 항만축조와 플랜드 건설분야까지 각종 공사 수주에 나서면서 중동건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75~1979년까지 중동건설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 205억 달러,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근로자 수도 급증하여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하였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국가적 위기였던 석유파동을 기회로 바뀌었고 또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1970년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 추진현황(중간보고) 1977. 10.

 

주 사우디 대사의 대통령 회담이후 내려온 '대(對) 중동진출의 정착화를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 구축' 지시에 따라 추진된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의 추진현황 보고서

 

모든 기업인은 자기가 운영하는 기업체가

                      단순히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국가와 민족의 기업체를 자기가 맡아서 경영하고 있다는 소위 기업의 윤리성,

           기업의 사회성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1970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치사

 

경제개발과

방위산업을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

 

중화학공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수출진흥의 핵심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주로 경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에 주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처럼 잘 살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자주국방 면에서도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등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 더욱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후 정부는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공업을 중화학공업 6대 전략업종으로 선정하고, 각 업종별로 적합한 지역에 산업기지를 건설하여 추진하였다.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기계공고, 시범공고 등을 설립하여 양질의 기술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그 결과 정부는 1981년 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중화학공업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예상 연도보다 앞당겨진 1977년 수출 100억 달러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참여 기관 및 각 부처 임무

 

구분 역할 및 임무 주무 책임
청와대 경제 제2비서실 중화학공업 추진 사령탑 대통령 직접 주관
국무총리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중화학공업 추진 집행 실무기구 국무총리
경제기획원 기본계획 수립 경제기획원 장관
상공부 부문별 투자 사업계획 상공부장관
건설부 공장용지 건설 각 장관
과학기술처 · 문교부 ·보건사회부 인력개발 각 장관
경제기획원 · 과학기술처 기술 및 연구개발 계획 부총리 · 과기처 장관
경제기획원 · 재무부 재정조달 계획 부총리 · 과기처장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신화,

포항제철소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던 우리나라는 안정적인 철강공급을 위해 제철소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려는 나라도 없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확보된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용하여 건설비용에 충당함으로써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1973년 6월 9일 최초의 쇳물을 토해낸 데 이어서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갖추게 되었으며, 10년 만에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함으로써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후에도 2기, 3기, 4기 설비를 준공하면서 지속적인 설비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였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2002년 포스코로 명칭을 변경하고 오늘날 세계5위권의 조강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제1철강 : 포항제철 2, 3, 4기 확장

◆ 연산 1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늘리는 확장공사

제2철강 : 남해안 또는 서해안에 제철소 건설

산업기지 : 포항, 광양

 

종합제철 사업 추진 현황 1968. 4. 19

 

1968. 4. 8~1968. 4. 15까지의 종합제철 사업의 항만일지, 철도, 도로, 전기, 토지 매입 등의 현황을 정리한 보고서

 

 

 

 

- 계속

 

 

www.youtube.com/watch?v=ol2ZscEYA6k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5  (0) 2021.01.03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0)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0) 2020.12.15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수출지원정책

 

우리나라 수출은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경제를 고도성장시킨 주요 원동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정권 초 "불타고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한 것 같다"라고 말하며 나라를 꾸려갈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인재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에서 '수출만이 살길'임을 확신하고 국력을 집중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수출증진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여 경제발전을 위한 수출지원정책들을 수립 및 실현해 나갔다.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62년부터 대통령 주관하에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수출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풀고, 금융 및 세제 혜택과 수출 우수기업들을 우대하는 등 수출지원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1964년 11월 30일 드디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정부는 매년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였다.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4. 11. 30

 

수출진흥확대회의 녹취록

 

TIME : 3' 15"

 

 

··· 중략 ···

정부가 하는 일에 노파심으로 이런 것도 조심해야 된다. 이런데도 차관을 해야 된다. 이런 것도 좀 더 잘해야 된다, 하는 이런 충고같은 것은 좋지만은 전부 폐쇄적으로 안 된다 안 된다 소리···

지금부터 정부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되겠냐···

상공부 브리핑도 여러 가지 치밀한 금년도 계획에 대한 좋은 계획을 했습니다만, 전부 진일보해서 지금하고 있는 일에서 더욱 더 일보 앞으로 쑥쑥 나갈 수 있는 속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뭔가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고 업계에서도 좀 더 그런데에 대해서 좀 더 노력을 많이 하시고, 물론 정부가 지원할 것은 하되 업계가 할 것은 연계가 좀 더 그야말로 소성(작은 성과)에 만족한다고 그러죠. 요정도 되었으니깐 됐다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발전이 안됩니다. 남이 못한 걸 우리가 노력을 해서 뚫고 들어가는 그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개척적인 정신이 있어야지 솔직히 우리 국내에 일부 우리 경제를 아는 사람들이 말하기로 우리나라 10억불 한 것도 무리했고, 무리한 걸 억지로 했고, 밑바닥에 있는 먼지까지 다 쓸어다 팔고··· 밑바닥에 아무 것도 팔아먹을 게 없다고 하니···

이런 상식에 벗어난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정반대로 본 겁니다.

지금까지는 무리했지만 10억불이라는 수출이 나갈 때까지 우리나라 산업에 어느 정도의 기반이 되었다고,

이제부터 쑥쑥 이제 살아나는 바탕이 되어 있지 않냐, 한국의 수출은 지금부터다. 이겁니다.

                                                                                                          1971년

                                                                                   수출진흥확대회의 중에서

 

증산   수출   건설

 

구로공단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경공업의 대명사였던 '구로공단'은 수많은 농촌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안고 모여든 곳이었다. 밤낮없이 땀흘려 일하던 그들은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수출산업의 역군이었다. 1967년 4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식 축사에서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정부는 이 단지를 25개 공장이 더 들어설 수 있도록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단에 입주한 업체 중 최초로 동남전기가 139,893달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TV 수상기를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우리나라는 1971년에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하고 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게 되었는데 이 중 구로공단에서만 11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하는 등 구로공단은 우리나라 수출의 전진기지였다. 이후 정부는 첨단산업을 주도하는 도시형 산업단지로의 전환을 위해 2000년 9월 구로공단이라는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고, 첨단IT업종의 산업단지로 탈바꿈하였다.

 

수출산업공단 건설현황

 

구로산업단지

  1단지 2단지 3단지
착공연도 1965 1967 1970
완공일 1967.4 1968.6 1973.11

소재지 : 서울시 구로구

 

부평산업단지

4단지 착공연도 1965
완공일 1969.10

소재지 : 인천 계양구

 

주안산업단지

  5단지 6단지
착공연도 1969 1973
완공일 1973.7 1974.11

소재지 : 인천 서구 · 남구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을 기념하여 휘호를 쓰는 박정희 대통령 1967. 4. 1(위 왼쪽)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7. 4. 1(위 오른쪽)

구로공단 가발공장 1972(아래 왼쪽)

구로공단 크라운 전자 공장 1972(아래 오른쪽)

 

수출산업공업단지

 

1960년대 우리나라는 수출산업을 촉진하기 위해 해외자본 특히 재일교포들의 투자를 유치하여 국가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먼저 행정적 뒷받침과 수출상품을 생산할 산업단지 조성이 시급하였다. 이에 정부는 1963년 3월 '수출산업촉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964년 6월 14일에는 '수출산업공업단지 개발조성법'을 제정하여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설립하였다. 수출전진기지로써 첫 산업단지는 구로구에 조성되었다. 총면적 14만 평 규모로 1965년 3월에 착공하여 1967년 4월에 완공하였다. 당시 입주실적은 1967년까지 재일교포 기업이 22개 업체, 국내기업이 18개 업체였다. 이후 한국수출공업단지는 개발과 확장을 거듭하여 제2단지(총면적 약 10만 평)와 제3단지(총면적 30만 평)가 추가로 지정되었고 인천의 부평과 주안에 제4, 5, 6단지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 계속

 

 

www.youtube.com/watch?v=-Vcd5UXJo_w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4  (0)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2)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0) 2020.12.15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0) 2020.12.10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세종로 지하도 개통기념 가위 / 태평로 지하도 준공기념 가위 /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삼각지 입체로 개통기념 가위

 

남산 제1호 터널 및 고가도로 개통기념 가위 /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기념 가위 / 북악터널 개통기념 가위

 

남해대교 개통기념 가위 / 호남-남해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서울-강릉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어린이대공원 개원기념 가위

 

천호대교 개통기념 가위 / 남산 제3호터널 준공기념 가위 /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사업 준공기념 가위

 

종합영상관

 

수출진흥확대회의 Expanded Meetings for Export Promotion

 

수출은 원대한 안목을 가지고 착실히 계획하고, 줄기차게 실천해야 한다.

                        목전의 조그만 이익보다는 내일에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을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이나 우리 회사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 전체의 이익을

                       앞세울 줄 아는 참다운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

                                                                1966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치사

 

수출컨트롤타워Control Tower

수출진흥확대회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62년 수출진흥위원회를 시작으로 추진되다가 1965년 2월부터 매월 1회씩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로 개편되었다. 이 회의는 수출의 주무부처인 상공부장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의 관계 장관, 청와대 경제 및 관련 수석, 경제단체장, 금융기관장, 우량 기업체,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범국가적 성격의 경제회의'이었으며, 이 회의를 통해 월별 및 품목별 수출 실적과 계획 그리고 수출 진흥에 따른 문제점을 검토하여 이애 대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또한 매년 수출의 날 행사를 열어 수출 실적에 따라 기업체 별로 등급을 매겨 우수한 수출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포상을 실시하여 기업간 치열한 '수출실적경쟁'을 유도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 회의는 1979년까지 총 152회 중 147회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였으며 수출증대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77. 12. 22

 

수출지원제도 개선에 관한 보고 1969. 6. 2

 

수출목표 7억불 달성을 위한 정부시책에 수반한 건의 1969. 1. 23

 

수출은 국력의 총화

 

부산에서 열린 생산 기업인 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5. 1. 28(위)

 

증산과 수출하는 자 오늘의 애국자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5. 2. 5(아래)

 

11월 30일 수출의 날 THE EXPORT DAY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2) 2020.12.2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0) 2020.12.15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0) 2020.12.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0) 2020.12.10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세계 리더들이 말한

한강의 기적

 

"내 아버지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1960년대 초반에는 케냐의 GDP가 한국보다 높았고, 내가 태어나던 때도 케냐가 한국보다 훨씬 부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 나라 경제 규모가 전혀 비슷하지 않다.

사람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 게 케냐가 한국처럼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사우스코리아"라고 말하고 싶다."

                                  피터 드러커

                                      경영학자 (아래)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생을 바친 리더였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위)

 

"내가 본 대한민국의 지난 70년은

그야말로 한 편의

멋진 드라마였습니다."

               데이비드 콜

                   경제학자 (아래)

 

"폐허의 한국 경제가

60년 만에 일본을 추격하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앤 크루거

        존스홉킨스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위)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 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박정희는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이다."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 (아래)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을 동시에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은 내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다. 한국은 성공사례이고 현대화된 나라다.

한국은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전세계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한국만의 성공스토리를

젊은 세대 및 세계 모두와 공유할 필요가 있다."

                                                기 소르망

                              파리정치학교 초빙 교수 (위)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게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

         한국의 근대사를 지켜본

                     외국기자의 말 (아래)

 

강변1로 개통기념 가위 / 강변4로 개통기념 가위 / 남산 제2호 터널 개통기념 가위 /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삽교호 준공기념 가위 1979. 10. 26.

 

서울대교(現 한강대교) 개통기념 가위 / 중앙국립극장 준공기념 가위 / 산업선(중앙선) 개통기념 가위

 

수원-오산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제3한강교 개통기념 가위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개통기념 가위 / 강변3로 개통기념 가위

 

잠실대교 · 강변6로 · 동부5대간선도로 개통기념 가위 /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가위 / 대전-전주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오산-천안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천안-대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언양-울산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동해고속도로 준공기념 가위 / 대구-마산 간 고속도로 개통기념 가위 / 성수대교 준공기업 가위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2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0) 2020.12.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0) 2020.12.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0) 2020.12.10
Posted by 드무1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간호사

 

서독 파견 간호사는 독일 마인츠 대학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만 226명의 간호인력이 파견되었다.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간호원 중심제'로 간호사들은 의료인으로서의 업무 외에도 환자 옷 갈아입히기, 병실 청소, 식사 보조 등의 일을 하였다. 이러한 고된 일과에도 연장근무와 주말근무까지 자청해 가며 모은 돈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이들의 성실과 친절함에 독일 언론은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등의 내용으로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근로자들이 송금한 돈은 당시 우리나라 연간 총 수출액의 2%에 가까웠으며 국제수지 개선 및 국민소득 향상, 나아가 한국경제성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후 서독파견 근로자들 중 60%가 제3국에 정착하여 재외 한인사회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광부

 

1963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고, 실업자는 전체인구 2,400만 명 중 250만 명이 넘었다. 당시 서독 파견 광부의 평균 임금은 한국 공무원 월급의 7배나 되는 600마르크(160달러)로, 중졸 이상의 광산 경력이 있는 자를 우선시 했지만 심각한 실업난에 광산 경험이 없는 대졸의 고학력자들까지 대거 지원함으로써 광부 500명 모집에 지원자가 무려 4만 6,000여 명에 달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7년까지 7,936명의 광부들이 서독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허리도 제대로 필 수 없는 좁고 깊은 지하갱도에서 8시간 이상 석탄을 캐는 힘든 작업을 하였다. 이를 본 서독 정부와 국민들은 한국인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들이 1,000미터가 넘는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근무조건 1964년경

 

근무시간    · 주 40시간

임      금    · 지상근무 1일 약 20.20마르크(약 1,290원)

              · 지하근무 1일 약 30~39마르크(약 1,920~2,500원)

숙     식    · 광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2~4명이 함께 거주(비용 본인부담)

 

우리들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하고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합시다.

 

                               1967년 1월 17일

 

             박정희대통령 연두교서 중에서

 

革命完遂 1962

政淸人和 1963

官淸民自安 1964

勤勉儉素 1965

自立 1966

跳躍 1967

農工倂進 1968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1969

자조 자립 자위 1970

 

혼란 없는 안정 속에 중단 없는 전진을 1971

總力安保 1972

國力培養 1973

 

勤儉協同 總和維新 1974

勤儉節約 國論統一 1975

增産節約 自助自立 1976

 

自立經濟 自主國防 1977

天下雖安 忘戰必危 1978

總和前進 1979

 

안 된다고 이래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영원이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는 그런 자신과 의욕이 있는 사람만이

         나는 이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1971년 1월 11일

                                                           연두기자회견

 

 

 

 

- 계속

 

 

 

 

'박물관, 기념관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1  (0) 2020.12.18
[박정희대통령기념관] 10  (0) 2020.12.15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0) 2020.12.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0) 2020.12.10
[박정희대통령기념관] 06  (0) 2020.12.05
Posted by 드무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