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기념관] 08

 

 

 

서독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 2

 

박정희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와 단독회담에서 독일의 경제지원을 당부하였다.

 

이에 에르하르트 총리는 "각하,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42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총리가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면서 이웃나라끼리 손을 잡았지요.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 우리는 일본과 단 한 번도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 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그래요? 일본이 사과는 해야지요.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진적이 없지만 전쟁에서는 독일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나의 전임자인 아데나워 총리는 참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데, 그 분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공산국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이렇게 눌려 싸웠는데도 말이오?"

"예,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발전을 이루세요. 우리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심해서 살아갑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1시간이 넘게 진행된 회담이 끝난 뒤, 에르하르트 총리는 담보가 없는 차관 2억 5천만 마르크(약 4,770만 달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독의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 1

 

서독의 에르하르트 총리는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경제발전에는 도로, 항만 등 기간基幹시설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나는 평소 아우토반에 진입할 때, 그리고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 나올 때 마음 속으로 아우토반에 경례를 합니다. 1958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만 도로 사정이 썩 좋지 못한 걸로 압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고속도로 건설이란 엄두도 못 낼 사업이지만 독일국민은 한국민이 겪은 그런 시기에 산업동맥 건설을 성취한 자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하, 분단국으로서는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입니다."

 

Lotus - Blume

"로투스 블루메"

 

동양에서 온 연꽃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수(1963~1977)

                         7,936명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 수(1966~1976)

                       10,226명

 

결혼서약서(왼쪽, 1970.5.30.)

파독 간호사가 서독에서 결혼할 당시 작성했던 결혼서약서

 

결혼증명서(가운데, 1971.5.19.)

파독 간호사가 서독정부로부터 발급받은 결혼증명서

 

자녀출생신고서(오른쪽, 1970.8.28.)

파독 간호사 시절 자녀의 출생신고를 위한 서류

 

간호사 자격증(왼쪽, 1969.7.31)

서독에서 발급해 준 간호사 자격증

 

영한 사전(가운데, 1968.11)

파독 간호사가 사용했던 영한 사전

 

개인용 수첩(오른쪽, 1970)

파독 간호사가 사용했던 수첩으로 한국으로 송금한 내역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파독 간호사 엽서(왼쪽)

파독 간호사가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로, 서독 생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독일에서 온 편지(오른쪽, 1986.6.25.)

파독 간호사로 근무할 당시 환자로 있었던 Prinz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받은 감사 편지

 

급여통장 / 저축통장(왼쪽)

파독 간호사로 근무할 당시 사용했던 서독은행 통장

 

단수여권(오른쪽, 1975.6.19.)

파독 간호사가 귀국할 당시 사용한 단수여권

 

독일어 타자기(왼쪽, 1970)

파독 간호사가 독일어 공부를 위해 사용하던 독일어 타자기

 

파독 간호사 퇴직기념패(오른쪽, 1966)

파독 간호사 퇴직을 기념하여 병원 동료들이 선물해 준 기념패

 

사진기(왼쪽, 1985)

파독 간호사가 사용했던 사진기

 

의료용 기구(오른쪽)

파독 간호사가 사용한 의료용 기구

 

간호사

 

서독 파견 간호사는 독일 마인츠 대학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만 226명의 간호인력이 파견되었다.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간호원 중심제'로 간호사들은 의료인으로서의 업무 외에도 환자 옷 갈아입히기, 병실 청소, 식사 보조 등의 일을 하였다. 이러한 고된 일과에도 연장근무와 주말근무까지 자청해 가며 모은 돈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이들의 성실과 친절함에 독일 언론은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등의 내용으로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근로자들이 송금한 돈은 당시 우리나라 연간 총 수출액의 2%에 가까웠으며 국제수지 개선 및 국민소득 향상, 나아가 한국경제성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후 서독파견 근로자들 중 60%가 제3국에 정착하여 재외 한인사회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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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개요) 1962년 1월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계획 수립 단계부터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중점과제로는 식량자급, 산림녹화, 수산개발과 화학 · 철강 · 기계공업 등을 건설하여 공업고도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용을 증대하며, 가족계획의 추진으로 인구팽창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와 영농다각화를 통한 농가소득 향상에 주력하며,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을 배양하여 기술수준과 생산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원래 계획의 목표치인 7%를 훨씬 상회하는 11.4%를 달성하였고 석유화학 공업의 비중이 증대되면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였다.

 

제1, 2차 5개년 계획과 실적대비 일람표 1969.3.31 작성

 

제 1, 2차 경제개발 계획은 경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적으로 발달시켰다.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과 함께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부강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번영의 70년대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발전단계를 추진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은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인 증대,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두었다. 중점목표로는 식량증산과 주곡의 자급, 농어민 소득증대, 경지정리 및 영농의 농기계화, 농어촌 보건 · 문화시설 · 전기 · 도로망확충 · 수출 35억 달러 달성, 중화학공업 건설과 공업의 고도화, 사회간접시설(전력 · 교통 · 보건 · 하역 · 통신)의 균형적 발전, 국토자원의 효율적 개발, 주택 · 위생시설 확충, 근로환경 개선 등이 있었다. 그 결과 국제통화질서가 붕괴되고,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위기에도 우리나라는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였고, 수출 78억 1천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5년 동안 7배의 수출 증가를 기록하였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구성 비율을 한층 높이고, 자본재의 대외의존도를 경감시켰다.

 

3차 5개년 계획(안) 1971.2.1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은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역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 ·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 결과로 사회개발의 필요성과 형평의 문제가 부각되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력성장구조의 실현, 사회 개발을 통한 형평의 증진, 기술혁신과 능률의 향상에 목표를 두었다. 기본방향은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농어촌 생활환경개선의 지속적 실시, 신기술 도입 및 토착화, 산업구조의 고도화, 연구개발 투자증대, 노사협조체제 강화, 수입자유화 촉진, 기업 경영합리화 등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화학공업화로 수출액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 1인당 GNP 944달러 달성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76.6.15

 

성장, 능률, 형평의 기조 아래 자립경제를 달성하고 기술혁신과 능률향상을 기한다는 기본목표로 추진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주적 경제개발 의지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혼란과 사상적 혼란, 6 · 25전쟁으로 경제적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말까지 국민들은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며 가난에 허덕였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1년 국가재정의 대미위존도는 39.2%에 이르렀고, 국방비는 무려 95.1%에 달하였다. 미국의 원조없이는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엇다. 자원과 자본은 한정되어 있고, 빈곤 속에 실업률은 늘어만 갔다. 국가의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계획이 유일한 돌파구였으며, 이에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장기적으로 낙후된 우리 경제를 의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고, 빈곤에 대한 숙명론이나 체념에서 벗어나 자율적 의지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1962 - 196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irst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경제 기반 조성

 

· 전력,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 농가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 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 고용의 증가와 국토의 보전 및 개발

· 수출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

· 기술의 진흥

- 베트남 파병

- 발전소 설치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Secon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산업구조 근대화 / 자립경제 확립

 

· 식량자급

· 공업구조 고도화의 기틀마련

· 7억 달러 수출달성, 획기적인 국제수지 개선의 기반확립

· 고용증대, 인구팽창 억제

·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

·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 배양

- 공업단지 건설

- 농촌 근대화 10개년 계획 발표

- 1971년 :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IBRD 차관 협정 체결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Thir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적 경제구조 달성 / 지역 개발의 균형

 

· 주곡 자급, 농어민 소득 증대

·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 공업의 고도화

· 과학기술의 향상과 인력개발

· 사회기초시설의 균형발전

· 지역개발 촉진, 공업과 인구를 적정하게 분산

· 국민의 복지와 생활향상을 기함

· 수출 35억 달러 달성

- 1971년 10억 달러 수출달성

- 1974년 44억 달러 수출달성

- 1973년 : 1차 오일쇼크

- 중동건설 근로자 파견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ourth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력성장구조 확립 /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 국제수지의 균형

· 산업구조의 고도

· 농어촌 생활환경개선 사업지속

· 새로운 기술도입과 토착화 촉진

· 연구개발 투자 증대

· 노사협조체제 강화,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

· 수입자유화 추진

· 기업의 경영합리화

- 1977년 100억 달러 수출달성

- 의료보험제도 실시

- 1979년 : 2차 오일쇼크

 

 

독일의 일터로

To West Germany to Work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가난과 심각한 실업난, 그리고 경제개발 정책에 따른 외화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당시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세를 보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현상을 함께 겪고 있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서독과 '한독근로자채용협정韓獨勤勞者採用協定'을 체결하고 서독정부로부터 1억 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가족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가며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근면정신으로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땀흘려 일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은 물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Glück auf

"글뤽 아우프"

 

위험한 지하에서 무사히 돌아오시오

 

함보른의 눈물바다

Sea of Tears in Hamborn

 

1964년 12월 10일, 함보른 광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만났다.

350여 명의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통령을 맞이하였다. 강당 내 애국가가 연주되었고 대통령의 선창으로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광부와 간호사들은 목이 메여 눈물을 흘렸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이 타국에 와 고생하는 현장을 본 대통령도 이어 부르지 못했다. 눈물을 닦아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萬里他鄕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 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異域萬里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모국母國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때문에 이 먼 이국異國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가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장내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대통령도 울고 영부인도 울고, 광부와 간호사도 울며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 계속

 

 

www.youtube.com/watch?v=5-8XbDV-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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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6

 

 

 

5월 혁명은 단순한 변혁도, 외형적 질서정비도, 새로운 계층형성도 아닙니다. 상극相剋과 파쟁派箏, 낭비와 혼란, 무위無爲와 부실의 유산을 조상과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우리 불운의 세대가 이 오염된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고 자주와 자립으로 번영된 내일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우리 혁명의 궁극적 지표인 것입니다.

 

1963년 8월 30일

전역사

                                                

민족중흥의 길에 나서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주의, 사상, 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맞추어서

우리에게알맞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서양사람들이 입는 양복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다.

저고리 소매도 잘라내고 품도 줄여야 입을 수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도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실정에 맞추어야 한다.

 

1963년 9월 23일

제5대 대통령 선거 서울유세

 

취임 선서하는 박정희 대통령 1963.12.17

 

대통령 당선 확정 소식에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1963.10.17

 

무궁화 대훈장

제5대 대통령 취임 당시 수여받은 무궁화 대훈장 1963.12.17.

 

제5대 대통령선거 후보 홍보물(왼쪽) / 제5대 대통령선거 개표현황 일람표(오른쪽)

 

5대 대통령 당선 관련 신문기사(경향신문 1963.12.17.)

 

 

제5대 대통령 취임 선서문 1963.12.17.

 

宣      誓

 

나는 國憲을 遵守하고 國家를 保衛하며      

國民의 自由와 福利의 增進에 努力하여      

大統領으로서의 職責을 誠實히 遂行할 것을

國民 앞에 嚴肅히 宣誓합니다.                   

 

一九六三年 十二月 十七日

大統領 朴正熙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제 5 대 대통령 박정희

 

 

단군 성조가 천혜의 이 강토 위에 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 연면히 이어 온 역사와 전통 위에, 이제 새 공화국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 나의 신명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겨레가 쌓은 이 성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


나는 오늘 영예로운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 중한 시기에 나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보람있는 이 날의 조국을 보전하기에 생명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지켜 온 충용스러운 전몰장병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적인 사월혁명의 영령 앞에 나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한편 나는 국내외로 매우 중요한 이 시기에 대통령의 중책을 맡게 됨에, 그 사명과 책무가 한없이 무거움을 깊이 통감하고, 자주와 자립과 번영의 내일로 향하는 민족의 우렁찬 전진의 대오 앞에 겨레의 충성스러운 공복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아시아의 동녘에 금수강산이라 불리우는 한반도에, 선조의 거룩한 창국의 뜻을 받아,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배달의 겨레가 5천년의 역사를 지켜 온 이 땅이 우리들의 조국입니다.

한 핏줄기 이 민족의 가슴속에 붉은 피 용솟음 치는 분발의 고동과 약진은 결코 멈추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반세기의 고된 역정은 밞았으되,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독립정신은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동란에서 공산 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하였으며, 열화 같은 민주적 신념은 4월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이어 5월 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결코 목적지 도달의 안도가 아니며, 준험한 노정에의 새 출발인 것입니다.

4월 혁명으로부터 비롯되어, 5월 혁명을 거쳐 발전된 1960년대 우리 세대의 한국이 겪어야만 할 역사적 필연의 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조국의 근대화를 촉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조성된 계기를 일실함이 없이 성공적으로 이 과업을 성취시키는 데 범국민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3.1정신을 받들어 4.19와 5.16의 혁명이념을 계승하고 당위적으로 제기된 바 민족적인 제과제를 수행할 것을 목표로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 일대 혁신운동을 제창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에 범국민적 혁명 대열에의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 있기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피땀 어린 노력의 지불 없는 진보와 번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시대, 전환의 시점에 서서, 치욕과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세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덮은 퇴영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 안정을 목표로 대혁신 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립, 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이 땅의 민주와 번영, 복지사회를 건설하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 의식 그리고 강인한 노력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배격하며, 부정부패의 소인을 국민 스스로가 절개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탁월한 지도자의 정치역량이나 그의 유능한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대중의 전진적 의욕과 건설적 협조없이는 국가 사회의 안정도 진보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들의 최대의 적은 선거과정에서의 상대 정적이나 대립 정당도 아니며, 바로 비협조와 파쟁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대혁신 운동의 정치적 목표의 일환으로 정치적 정화운동을 통한 새로운 차원의 정치활동 양상을 시현하고 국가공동 목적을 위한 협조의 전통을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중단도 후퇴도 지체의 여유도 없습니다. 방관과 안일, 요행과 기적을 바라며 공론과 파쟁으로 끝끝내 국가를 쇠잔케 한 곤욕의 과거를 되풀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 운용의 역사가 얕다거나,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부담과 희생을 지불한 우리들이기에, 여기에 또다시 강력정치를 빙자한 독재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도용한 무능, 부패의 재현도 단연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하한 이유로써도 성서를 읽는다는 명목 아래 촛불을 훔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는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함이 아니요,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시달리고 피곤에 지쳐 가는 동포를 일깨워 용기를 돋우며, 정의 깊은 대중의 벗으로 격려와 의논과 설득으로 분열과 낙오 없는 대오의 향도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이 지워 준 멍에를 성실히 메고 이끌어, 고난의 가시밭을 헤쳐, 새 공화국의 진로를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를 보호하는데 더욱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평면적 종다수 의결방식을 근거로 만능, 우월 의식에서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며, 소수의 의사를 유린할 때, 이 나라 민주주의 전도에는 또 다른 비극의 씨가 배래될 것입니다. 또 일방진부한 관록이나 허망한 권위 의식에서, 대국을 망각한 소아병적 도발로 정쟁을 벌이고, 정국을 어지럽히며, 사회를 혼란시킨다면, 이 나라는 또 다시 역사의 뒤로 후퇴하는 슬픈 결말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제와 책임을 수반하는 민주적 정치질서를 확립해 가면서, 대중의 이익에 벗어나는 시책이나, 투명치 못한 정치적 처사에 대하여는 정당한 비판과 당당히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인과 새 정부는 정치적 행동방식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윤리규범을 정립하여, 극렬한 중압감과 극단적 대립의식을 불식하고, 여야의 협조를 통해 의정의 질서와 헌정의 상궤를 바로잡을 것이며, 유혈보복으로 점철된 역사적 악유산을 청산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복수정당의 발랄한 경쟁과 신사적 정책 대결의 정치 풍토 조성에 선도적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이 세기의 초로부터 시작된 험난한 역정과 살벌한 시류 일제에의 병탄과 40년의 식민지 통치, 종전과 더불어 밀려 온 퇴폐한 외래풍조의 급격한 침투, 6 · 25전란과 혼돈, 궁핍 속에 두 차례의 혁명, 이 오욕된 반세기는 이 나라 사회의 전통적 미풍과 양속을 짓밟아 도의는 타락되고, 사상분열과 정치적 대립, 그리고 사치와 낭비, 허영과 안일, 반목과 질시 속에 사회는 만성적으로 불안하며 민심은 각박해지기만 했습니다. 이제 대혁신운동은 대중사회의 저변으로부터 사회적 청조운동의 새 물결을 이끌어 들여, 이 모든 오염과 악풍을 세척하고 선대가 평화 속에 이루었던 전원적 향토를 되찾아 선린과 융화의 새 사회 건설을 촉진시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의와 ´건전한 상식´이 지배하며, 노력과 대가가 상동하는 형평의 사회, 성실한 근로만이 영예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할 것입니다.

민주정치는 몇 사람의 지도자나 특수계층의 교양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각과 책임, 그리고 상호의 타협과 관용을 통한 사회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민은 질서 속에 살며, 정부로부터의 시혜를 기대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며 때늦은 후회이전에 현명하고 용감하게 권리의 자위를 도모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대국적 안목과 이성적 통제로서 ´초가삼간의 소실´을 초래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질서와 번영 있는 사회의 영광된 새 공화국건설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시는 퇴영과 빈곤이 없는 내일의 조국을 기약하면서, 나는 오늘 사랑하는 동포 앞에 다시 한번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막중한 과업을 앞에 두고, 불화와 정장과 분열로 정대와 쇠잔을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친화와 협조와 단합으로 민족적인 공동의 광장에서 새로 대아를 정비할 것인가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또한 한 핏줄기의 겨레, 우리는 이미 운명을 함께 한 ´같은 배´에 탄 것입니다. 파쟁과 혼란으로 표류와 난파를 초래하는 것도, 협조와 용기로써 희망의 피안에 닻을 내리는 것도 오로지 우리들 스스로의 결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과 용맹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오늘 역사적인 새 공화국 탄생의 성전에 임해, 이 날의 환희를 함께 하지 못하며, 자칫 우리의 자리에서 소원해 가기 쉬운 북한 1천만 동포의 노예 상태에 대해, 이 땅에 자유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경각을 높이고자 합니다.

본인과 새 정부는 안으로는 조속히 견실한 경제, 사회적 도태를 이룩하고, 현군사력의 유지와 발전을 포함한 단합된 민족의 힘을 결속할 것이며, 밖으로는 유엔과 자유우방, 그리고 전 세계자유애호 인민들과의 유대를 공공히 하여 여하한 상황과 조건 하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항, 승리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과 민족진영의 내실을 기하여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길로 매진할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제 문제를 일일이 논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를 비롯한 난국타개의 숙제는, 이미 공약을 통해 자청한 바 있으며, 신정부는 이를 위하여 능률적 태세로써 문제 해결에 임할 것입니다.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그리고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합리적 추진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로서 여야협조와 정부 국민간의 일치 단합된 노력으로써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하여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 나가는 근로정신의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한 낙망이 상접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의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은 밝았습니다.

침체와 우울, 혼돈과 방황에서 우리 모든 국민은 결연히 벗어나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재기합시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써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나갑시다.

끝으로 하느님의 가호속에 탄생되는 새 공화국의 전도에 영광있기를 빌며, 이 식전에 참석하신 우방친우들에게 감사의 뜻할 표함과 아울러 동포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 있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박 정 희

 

 

제5대 대통령 당선 사례문 1963

'정국안정, 민생안정, 민심안정'이러는 제3공화국의 3대 과업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제5대 대통령 당선축하 전보 1963.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받은 당선 축하 전보

 

경제개발 ECONOMIC DEVELOPMENT

 

1962 ~ 196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는 모든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고, 소비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공업화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당시 세계적으로 수용되던, 그 동안의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에서 수출주도 공업화전략으로 과감히 정책방향을 전환하면서 각종 수출진흥대책을 수립 및 시행하였다.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위해 원화가치를 낮추는 한편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하여 수출기업에 대해 다각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매월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수출총력체제를 구축해 나간다. 그 결과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연평균 44%의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5%를 기록하였고 1인당 국민소득도 1961년 82달러에서 1966년 125달러로 급성장하였다. 국내총생산GDP에서도 농림어업과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되었고 공업화 비중은 1960년 13.8%에서 1966년 18.6%로 크게 높아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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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5

 

 

미국육군포병학교 학생장교 시절의 박정희 준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작은 거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프랑스령의 외딴섬 코르시카 출신이다. 가난과 설움 속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며 30대 초반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긴 인물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란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어릴적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박정희는 책상 앞에 걸어놓은 나폴레옹의 사진을 보며 군인의 꿈을 키웠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나팔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아침 새벽마다 마을 동산에 올라 불었던 나팔

 

보통학교 교과서(書方手本)

일제강점기 당시 보통학교 학생들이 배우던 글씨 교본책

 

책상

대구사범학교 시절 기숙사에서 동기생 2명과 함께 공부한 책상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5 · 16혁명공약

1961년 5월 16일 아침


중앙방속국 라디오(현 KBS 제1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혁명공약 전문

박종세 아나운서 당시 육성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로 혁명의 과정과 공약이행, 국가의 미래 등에 대해 서술한 책

 

라디오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5 · 16혁명에 성공한 군부는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정치 · 경제 · 외교 · 사회 ·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혁명공약을 실천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최고회의는 '4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반공체제의 강화와 사회정화를 위해 용공분자와 정치깡패, 부정부패 연루자 등을 체포하여 사법처리하였고, 농민들에게 농업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고리채高利債'를 해결하였다. 또한 한일 ·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일본과는 국교정상화의 길을 열었고, 미국과는 한미동맹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그 동안 사용해오던 단기檀紀 연호를 폐지하고 서기西紀로 대체하였다.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월부터 제3공화국이 들어선 1963년 12월까지 2년 7개월 동안 경제발전과 산업화 그리고 수출진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임명된 신임장관들과 최고의원들(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박정희 소장) 1961.5.21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 공포 1961.5.25

 

 

혁명군에 의해 체포된 깡패들 1961.5.21

 

 

부산에서 열린 국가재건 범 국민운동 촉진대회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소장 1961.6.19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 1961.11.1

 

 

울산공업단지 부지를 시찰 중인 박정희 의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 1962

 

 

충주비료공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의장 1962.7.20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자!" 기름으로 밝히는 등燈은 오래가지 못한다.

피와 땀과 눈물로 박히는 등만이

우리 민족의 시계視界를 올바르게 밝혀줄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혁명과 나』 중에서

 

 

 

 

-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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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4

 

 

"너희들에게 꼭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공부 잘하여 씩씩하고 굳센

조선 여성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증언 : 문경공립보통학교 제자 정순옥

 

"선생님은 이 담에 뭐가 될낍니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당이 될란다."            

 

증언 : 문경공립보통학교 3학년 담임시절 급장인 주영배와의 대화

 

군인의 길을 걷다 Becoming a Soldier

 

1940년 3월 하순 박정희는 구미에서 만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부터 품어왔던 군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칠순의 어머니는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리 먼 곳을 가려고 하느냐?"하며 박정희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후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할 수 있는 특전을 얻게 되었고 광복 후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46년 12월 14일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해였다. 박정희는 원칙주의와 유연성을 두루 갖추고 장교로서의 탁월한 리더십과 통찰력을 발휘하며 어릴적부터 꿈꾸어 왔던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겨울방학 중 문경공립보통학교를 찾아 정문 앞에서 기념촬영

 

 

(아래)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 생도 때 모습

 

 

미국육군포병학교 학생장교 시절의 박정희 준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귀와 입으로 일하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

                                                                                  다리와 눈으로 일하라.

                                                                  명령은 5%이고 확인과 감독이 95%다.

 

                                                                                            3군단 포병단장 시절 부하 장교들에게 강조했던 말

                                                                                                                       (오정석 예비역 육군 소장의 회고)

 

부패와 무능에 맞서다

Standing Up against Corruption and Incompetence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8 · 15광복을 맞이하였고, 35년 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 각각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후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한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선거를 거부한 북한에서는 소련의 비호 아래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정권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6 · 25전쟁을 일으켰다. 전 국토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황폐화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유엔의 도움으로 겨우 38도선은 회복되었지만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없는 휴전의 상태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자유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맞서 학생들이 궐기하며 4 · 19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뒤이은 민주당 정부마저 무능에 빠지며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이때 뜻있는 젊은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5 · 16혁명이다. 

 

여수 · 순천 사건 진압작전에 나선 박정희 소령 1948

 

 

부대출입증, 국제연합종군기장, 인식표(왼쪽으로부터)

 

장교 군모

 

육군대학 졸업증서

 

졸업증서

 

준장 10166 박정희

 

상기자는 본 대학 제11기

정규과정을 필하였음으로

자에 증서를 수여함

 

단기4289년 11월 8일

 

육군대학 총장

중장 이종찬

 

대장 임명장

 

           陸軍中將 朴正熙

 

         陸軍大將에 任함

 

    檀紀四二九四年 十一月 一日

 

             內閣首班 宋堯讚

 

지휘봉, 육군사관학교 졸업기념 반지, 장군 계급장

 

왼쪽으로부터 이용문 육군본부 작전국장과 함께, 5사단장 시절의 박정희 준장(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육군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

 

 

 

 

- 계속

 

 

 

www.youtube.com/watch?v=SmMGR1Ibl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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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3

 

 

문경공립보통학교 현판

 

대구사범학교 성적표

대구사범학교 재학 당시(1932~1937) 성적표로서 체육과 교련과목 외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대구사범학교 교모

 

대구사범학교 교복

 

금강산의 추억

 

1934년 5월 대구사범학교 3학년이었던 박정희는 70여 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금강산의 절경에 감동하여 각자 글들을 남겼는데 박정희는 민족의 아픈 현실과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쓸 정도로 남다른 열일곱 청년이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수통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모의소총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철모 그리고 나팔

 

사진은 대구사범대학 4기생 나팔수 때의 박정희(오른쪽 끝이 박정희)

 

나팔의 1인자 The Trumpet Player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팔을 좋아하였다. 동급생들은 그를 '나팔의 1인자'라고 불렀고 고향에 내려갈 때도 나팔을 가지고 다니며 불곤하였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는 '박 선생'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될 정도였다. 때로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악단을 만든 뒤 출장 공연까지 다니기도 하였다. 나팔은 박정희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였고 퍼져나가는 나팔소리와 함께 가슴속 깊이 품고 있던 군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어머니와 박정희

 

계란

어려운 가정형편에 박정희의 학교 수업료를 내기 위해 어머니는 계란을 모아 팔기도 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문경공립보통학교는 1912년 4월 12일 4년제 학교로 개교하였다. 1950년 8월 1일 문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1996년 4월 1일 지금의 문경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2018년 2월 9일 104회 졸업식을 맞으면서 그동안 13,93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4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간 근무하였다. 교사 박정희는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고, 태극기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는 학비까지 챙겨주는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부임 시절1937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박정희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박정희 오른쪽에 있는 강신분은 "선생님은 워낙 착실하여 일본인 교사들과도 원만한 사이였다."고 회상하였다.

 

동료 교사들과의 악기 연주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어 종종 동료교사들과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위 사진 가운데가 박정희)

 

 

- 계속

 

 

www.youtube.com/watch?v=1xZC9pJ_K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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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2

 

 

생가 모형 앞에서 설명문을 읽고 있는 승부

 

대구사범학교

 

박정희 대통령 가계도

 

구미의 명산 금오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상모리는 1910년대 당시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 마을 중 하나였다. 박정희는 아버지 박성빈朴成彬1871~1938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1872~1949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박정희를 임신한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과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해 뱃속에 아기를 지우려고 애썼지만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보냇다. 20리8km나 되는 등굣길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겨울이면 빙판길에 수없이 넘어졌고 늑대까지 나타낼 땐 힘든 등굣길이 되기도 하였다. 가끔 어머니가 보리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주던 비빔밥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년 박정희를 깨우는 어머니

 

탈곡기

 

보통학교 자연과학 교과서(初等理科書)

1931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 자연과학 교과서

 

소설 《이순신》

구미보통학교 시절 즐겨 읽었던 춘원(春園)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

첫 장에는 직접 작성한 감상문이 쓰여 있다.

 

구미보통학교 성적표

구미보통학교 시절 성적표(역사, 지리, 산술, 조선어 성적이 우수하였고 6학년 때에는 13개 과목 중 체조와 가사실습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이었다.

 

李舜臣 實記

 

이순신 실기를 읽고 있는 소년 박정희

 

대추방망이 소년시절

 

소년시절 박정희는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야무지고 통솔력있는 당찬 소년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1등을 차지하였고, 3학년부터는 반장을 도맡았다. 책읽기를 좋아하였던 박정희는 그중에서도 위인들에 대한 전기를 즐겨 읽었다. 5학년 때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쓴 소설 《이순신》을 읽었고,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는 어린 박정희가 영웅의 꿈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일 일제강점기 당시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대구에 설림된 학교이다. 설립 당시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출발하였으며, 1929년에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다시 신설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사범학교제도 개편에 따라 전문학교 수준의 사범학교가 되었고, 1946년 10월 15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62년 2월 경북대학교 병설교육대학으로 개편, 1963년 2월 2일 제12회 본과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현재는 대구교육대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사범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 정도로 경쟁률이 높고 우수한 학교였다. 특히 평양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 경성사범학교는 전국 3대 명문학교로 손꼽혔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1932년 4월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개교이래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제4기생)에 입학하였다. 입학 정원 100명(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 중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한 잦은 결석에 고학년으로 갈수록 학교성적은 최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사격, 육상, 나팔 등에는 남달리 뛰어났다.

누나인 박재희朴在熙는 "동생 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진학은 쉽지만은 않았다.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응시는 하였지만 학비를 지원해 줄 형편이 되지 못한 부모님은 차라리 시험에서 떨어지길 바라셨다."고 하였다. 사범학교 5년 동안의 배움은 청년 박정희의 포부를 키우는 시기였다.

 

대구사범학교 마크

 

 

- 계속

 

 

 

 

www.youtube.com/watch?v=FMESsRCIu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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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1

 

1. 탐방일 : 2020년 12월 3일(목)

 

2. 누구와 함께 : 승부와 건이

 

3. 만난 장소 :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2번 출입구

 

목요Trail로 하늘공원을 탐방하고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쪽으로 가다 발견해서 관람하게 됨.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의 명산 금오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상모리에서 1917년 11월 14일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최빈국 중 하나로 정치와 경제는 혼돈의 상태였다. 1961년 5월 16일 당시 박정희 장군은 부패와 무능에 빠진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젊은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 민족중흥의 길에 나섰다.

제5대 대통령을 시작으로 제9대 대통령까지 18년 재임기간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 · 새마을운동 · 자급자족 · 산림녹화 · 전력난 해소 · 댐 건설 · 원자력 발전 · 과학기술 · 중화학공업 · 의료보험제도 등 경제 · 외교 · 국방 · 과학 · 사회 · 문화 · 교육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통찰력과 추진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다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였다.(출처 :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안내 팜플렛)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경

 

박정희대통령기념관                              PARK CHUNG HEE PRESIDENTIAL MUSEUM

박정희도서관                                      PARK CHUNG HEE PRESIDENTIAL LIBRARY

어깨동무STORYUM 어깨동무도서관          EOKKAEDONGMU STORYUM & LIBRARY

 

 

기념관 대형 태극기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박정희도서관

 

Park Chung Hee Presidential Library & Museum

 

기념관 입구

 

국가와 혁명과 나                                    The Nation, the Revolution and I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Poverty is my mentor and my benefactor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That is why my 24 hours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Are devoted to the tasks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Of this mentor, this benefactor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I was born, I was raised, and I have worked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Among poor ordinary folks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And I yearn to finish my days

                                                                                In their care and sympathy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위하여!                                My life, for the nation and the people!

 

로비 / 1전시실

 

로비는 "국가와 혁명과 나"를 주제로 한 상장조형물(미러폰드)과 대통령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대형스크린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잇다. 제1전시실은 5 · 16혁명 직전의 혼돈했던 시대상을 대표하는 단어들과 5 · 16혁명존을 시작으로 대통령의 구미 상모리 생가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설, 군인시절을 거쳐 제 5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각종 모형과 디오라마, 유물 등으로 구성하였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국가와 혁명과 나」 중에서

대통령 박정희

 

'The Creation of a Self Reliant Independent Korea'

based on a society led by ordinary folks who are simple,

hard-working, honest and earnest, that is all I wish for.

 

From The Nation, the Revolution ana I

President Park Chung Hee

 

혼돈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분단되었고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인해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100만여 명의 인명피해도 가져왔다. 전쟁의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였고, 국제사회의 원조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정치는 무능과 부패로 만연하였고, 사회는 점점 혼란만 가중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일부 대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은 무분별한 통일론을 앞세워 사회혼란을 더욱 부추겼고,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궁핍한 삶, 끝없는 절망 속에 그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없는 암흑같은 현실, 그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혁명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상모리 :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마을

 

 

- 계속

 

 

www.youtube.com/watch?v=2BiSVDa5a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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