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수출 1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까지
우리나라는 1964년 1억 달러를 수출한 후 불과 13년 만인 1977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했고, 외신들은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것이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라고 극찬햇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출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관계 공무원 그리고 기업과 근로자들이 밤낮없이 땀 흘려 일한 결과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1973년 전 세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중동전쟁을 빌미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대폭 인상하였다.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던 우리나라는 당시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던 중에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타개책의 일환으로 태권도 교관 파견 및 최규하 국무총리를 특사로 파견하는 등 중동과의 교섭과 관계형성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내기업들이 중동에 진출, 중동의 토건공사부터 항만축조와 플랜드 건설분야까지 각종 공사 수주에 나서면서 중동건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75~1979년까지 중동건설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 205억 달러,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근로자 수도 급증하여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하였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국가적 위기였던 석유파동을 기회로 바뀌었고 또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1970년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 추진현황(중간보고) 1977. 10.
주 사우디 대사의 대통령 회담이후 내려온 '대(對) 중동진출의 정착화를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 구축' 지시에 따라 추진된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의 추진현황 보고서
모든 기업인은 자기가 운영하는 기업체가
단순히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국가와 민족의 기업체를 자기가 맡아서 경영하고 있다는 소위 기업의 윤리성,
기업의 사회성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1970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치사
경제개발과
방위산업을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
중화학공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수출진흥의 핵심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주로 경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에 주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처럼 잘 살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자주국방 면에서도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등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 더욱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후 정부는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공업을 중화학공업 6대 전략업종으로 선정하고, 각 업종별로 적합한 지역에 산업기지를 건설하여 추진하였다.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기계공고, 시범공고 등을 설립하여 양질의 기술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그 결과 정부는 1981년 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중화학공업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예상 연도보다 앞당겨진 1977년 수출 100억 달러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참여 기관 및 각 부처 임무
구분 | 역할 및 임무 | 주무 책임 | |
청와대 | 경제 제2비서실 | 중화학공업 추진 사령탑 | 대통령 직접 주관 |
국무총리실 |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 중화학공업 추진 집행 실무기구 | 국무총리 |
경제기획원 | 기본계획 수립 | 경제기획원 장관 | |
상공부 | 부문별 투자 사업계획 | 상공부장관 | |
건설부 | 공장용지 건설 | 각 장관 | |
과학기술처 · 문교부 ·보건사회부 | 인력개발 | 각 장관 | |
경제기획원 · 과학기술처 | 기술 및 연구개발 계획 | 부총리 · 과기처 장관 | |
경제기획원 · 재무부 | 재정조달 계획 | 부총리 · 과기처장관 |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신화,
포항제철소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던 우리나라는 안정적인 철강공급을 위해 제철소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려는 나라도 없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확보된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용하여 건설비용에 충당함으로써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1973년 6월 9일 최초의 쇳물을 토해낸 데 이어서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갖추게 되었으며, 10년 만에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함으로써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후에도 2기, 3기, 4기 설비를 준공하면서 지속적인 설비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였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2002년 포스코로 명칭을 변경하고 오늘날 세계5위권의 조강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제1철강 : 포항제철 2, 3, 4기 확장
◆ 연산 1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늘리는 확장공사
제2철강 : 남해안 또는 서해안에 제철소 건설
산업기지 : 포항, 광양
종합제철 사업 추진 현황 1968. 4. 19
1968. 4. 8~1968. 4. 15까지의 종합제철 사업의 항만일지, 철도, 도로, 전기, 토지 매입 등의 현황을 정리한 보고서
- 계속
www.youtube.com/watch?v=ol2ZscEYA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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