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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13

 

 

수출 1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까지

 

우리나라는 1964년 1억 달러를 수출한 후 불과 13년 만인 1977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했고, 외신들은 "한국은 그냥 발전한 것이 아니라 로켓처럼 치솟았다"라고 극찬햇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나라 중 가장 먼저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출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관계 공무원 그리고 기업과 근로자들이 밤낮없이 땀 흘려 일한 결과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중동건설

 

1973년 전 세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중동전쟁을 빌미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대폭 인상하였다.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던 우리나라는 당시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던 중에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타개책의 일환으로 태권도 교관 파견 및 최규하 국무총리를 특사로 파견하는 등 중동과의 교섭과 관계형성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내기업들이 중동에 진출, 중동의 토건공사부터 항만축조와 플랜드 건설분야까지 각종 공사 수주에 나서면서 중동건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75~1979년까지 중동건설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 205억 달러,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근로자 수도 급증하여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하였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국가적 위기였던 석유파동을 기회로 바뀌었고 또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1970년대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 추진현황(중간보고) 1977. 10.

 

주 사우디 대사의 대통령 회담이후 내려온 '대(對) 중동진출의 정착화를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 구축' 지시에 따라 추진된 대(對) 사우디 협력사업의 추진현황 보고서

 

모든 기업인은 자기가 운영하는 기업체가

                      단순히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국가와 민족의 기업체를 자기가 맡아서 경영하고 있다는 소위 기업의 윤리성,

           기업의 사회성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1970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치사

 

경제개발과

방위산업을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

 

중화학공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수출진흥의 핵심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주로 경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에 주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처럼 잘 살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자주국방 면에서도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등으로 인한 안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 더욱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후 정부는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공업을 중화학공업 6대 전략업종으로 선정하고, 각 업종별로 적합한 지역에 산업기지를 건설하여 추진하였다.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기계공고, 시범공고 등을 설립하여 양질의 기술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그 결과 정부는 1981년 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중화학공업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예상 연도보다 앞당겨진 1977년 수출 100억 달러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참여 기관 및 각 부처 임무

 

구분 역할 및 임무 주무 책임
청와대 경제 제2비서실 중화학공업 추진 사령탑 대통령 직접 주관
국무총리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중화학공업 추진 집행 실무기구 국무총리
경제기획원 기본계획 수립 경제기획원 장관
상공부 부문별 투자 사업계획 상공부장관
건설부 공장용지 건설 각 장관
과학기술처 · 문교부 ·보건사회부 인력개발 각 장관
경제기획원 · 과학기술처 기술 및 연구개발 계획 부총리 · 과기처 장관
경제기획원 · 재무부 재정조달 계획 부총리 · 과기처장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신화,

포항제철소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던 우리나라는 안정적인 철강공급을 위해 제철소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대한 국내외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려는 나라도 없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확보된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용하여 건설비용에 충당함으로써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포항제철소는 1973년 6월 9일 최초의 쇳물을 토해낸 데 이어서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갖추게 되었으며, 10년 만에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함으로써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후에도 2기, 3기, 4기 설비를 준공하면서 지속적인 설비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였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2002년 포스코로 명칭을 변경하고 오늘날 세계5위권의 조강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제1철강 : 포항제철 2, 3, 4기 확장

◆ 연산 1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늘리는 확장공사

제2철강 : 남해안 또는 서해안에 제철소 건설

산업기지 : 포항, 광양

 

종합제철 사업 추진 현황 1968. 4. 19

 

1968. 4. 8~1968. 4. 15까지의 종합제철 사업의 항만일지, 철도, 도로, 전기, 토지 매입 등의 현황을 정리한 보고서

 

 

 

 

- 계속

 

 

www.youtube.com/watch?v=ol2ZscEYA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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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개요) 1962년 1월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계획 수립 단계부터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중점과제로는 식량자급, 산림녹화, 수산개발과 화학 · 철강 · 기계공업 등을 건설하여 공업고도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용을 증대하며, 가족계획의 추진으로 인구팽창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와 영농다각화를 통한 농가소득 향상에 주력하며,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을 배양하여 기술수준과 생산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원래 계획의 목표치인 7%를 훨씬 상회하는 11.4%를 달성하였고 석유화학 공업의 비중이 증대되면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였다.

 

제1, 2차 5개년 계획과 실적대비 일람표 1969.3.31 작성

 

제 1, 2차 경제개발 계획은 경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적으로 발달시켰다.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과 함께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부강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번영의 70년대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발전단계를 추진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은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인 증대,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두었다. 중점목표로는 식량증산과 주곡의 자급, 농어민 소득증대, 경지정리 및 영농의 농기계화, 농어촌 보건 · 문화시설 · 전기 · 도로망확충 · 수출 35억 달러 달성, 중화학공업 건설과 공업의 고도화, 사회간접시설(전력 · 교통 · 보건 · 하역 · 통신)의 균형적 발전, 국토자원의 효율적 개발, 주택 · 위생시설 확충, 근로환경 개선 등이 있었다. 그 결과 국제통화질서가 붕괴되고,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위기에도 우리나라는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였고, 수출 78억 1천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5년 동안 7배의 수출 증가를 기록하였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구성 비율을 한층 높이고, 자본재의 대외의존도를 경감시켰다.

 

3차 5개년 계획(안) 1971.2.1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은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역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 ·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 결과로 사회개발의 필요성과 형평의 문제가 부각되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력성장구조의 실현, 사회 개발을 통한 형평의 증진, 기술혁신과 능률의 향상에 목표를 두었다. 기본방향은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농어촌 생활환경개선의 지속적 실시, 신기술 도입 및 토착화, 산업구조의 고도화, 연구개발 투자증대, 노사협조체제 강화, 수입자유화 촉진, 기업 경영합리화 등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화학공업화로 수출액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 1인당 GNP 944달러 달성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76.6.15

 

성장, 능률, 형평의 기조 아래 자립경제를 달성하고 기술혁신과 능률향상을 기한다는 기본목표로 추진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주적 경제개발 의지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혼란과 사상적 혼란, 6 · 25전쟁으로 경제적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말까지 국민들은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며 가난에 허덕였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1년 국가재정의 대미위존도는 39.2%에 이르렀고, 국방비는 무려 95.1%에 달하였다. 미국의 원조없이는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엇다. 자원과 자본은 한정되어 있고, 빈곤 속에 실업률은 늘어만 갔다. 국가의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계획이 유일한 돌파구였으며, 이에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장기적으로 낙후된 우리 경제를 의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고, 빈곤에 대한 숙명론이나 체념에서 벗어나 자율적 의지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1962 - 196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irst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경제 기반 조성

 

· 전력,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 농가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 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 고용의 증가와 국토의 보전 및 개발

· 수출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

· 기술의 진흥

- 베트남 파병

- 발전소 설치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Secon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산업구조 근대화 / 자립경제 확립

 

· 식량자급

· 공업구조 고도화의 기틀마련

· 7억 달러 수출달성, 획기적인 국제수지 개선의 기반확립

· 고용증대, 인구팽창 억제

·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

·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 배양

- 공업단지 건설

- 농촌 근대화 10개년 계획 발표

- 1971년 :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IBRD 차관 협정 체결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Thir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적 경제구조 달성 / 지역 개발의 균형

 

· 주곡 자급, 농어민 소득 증대

·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 공업의 고도화

· 과학기술의 향상과 인력개발

· 사회기초시설의 균형발전

· 지역개발 촉진, 공업과 인구를 적정하게 분산

· 국민의 복지와 생활향상을 기함

· 수출 35억 달러 달성

- 1971년 10억 달러 수출달성

- 1974년 44억 달러 수출달성

- 1973년 : 1차 오일쇼크

- 중동건설 근로자 파견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ourth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력성장구조 확립 /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 국제수지의 균형

· 산업구조의 고도

· 농어촌 생활환경개선 사업지속

· 새로운 기술도입과 토착화 촉진

· 연구개발 투자 증대

· 노사협조체제 강화,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

· 수입자유화 추진

· 기업의 경영합리화

- 1977년 100억 달러 수출달성

- 의료보험제도 실시

- 1979년 : 2차 오일쇼크

 

 

독일의 일터로

To West Germany to Work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가난과 심각한 실업난, 그리고 경제개발 정책에 따른 외화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당시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세를 보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현상을 함께 겪고 있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서독과 '한독근로자채용협정韓獨勤勞者採用協定'을 체결하고 서독정부로부터 1억 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가족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가며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근면정신으로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땀흘려 일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은 물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Glück auf

"글뤽 아우프"

 

위험한 지하에서 무사히 돌아오시오

 

함보른의 눈물바다

Sea of Tears in Hamborn

 

1964년 12월 10일, 함보른 광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만났다.

350여 명의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통령을 맞이하였다. 강당 내 애국가가 연주되었고 대통령의 선창으로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광부와 간호사들은 목이 메여 눈물을 흘렸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이 타국에 와 고생하는 현장을 본 대통령도 이어 부르지 못했다. 눈물을 닦아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萬里他鄕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 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異域萬里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모국母國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때문에 이 먼 이국異國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가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장내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대통령도 울고 영부인도 울고, 광부와 간호사도 울며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 계속

 

 

www.youtube.com/watch?v=5-8XbDV-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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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3

 

 

문경공립보통학교 현판

 

대구사범학교 성적표

대구사범학교 재학 당시(1932~1937) 성적표로서 체육과 교련과목 외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대구사범학교 교모

 

대구사범학교 교복

 

금강산의 추억

 

1934년 5월 대구사범학교 3학년이었던 박정희는 70여 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금강산까지는 철원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금강산의 절경에 감동하여 각자 글들을 남겼는데 박정희는 민족의 아픈 현실과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쓸 정도로 남다른 열일곱 청년이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수통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모의소총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교련수업 때 사용하던 철모 그리고 나팔

 

사진은 대구사범대학 4기생 나팔수 때의 박정희(오른쪽 끝이 박정희)

 

나팔의 1인자 The Trumpet Player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팔을 좋아하였다. 동급생들은 그를 '나팔의 1인자'라고 불렀고 고향에 내려갈 때도 나팔을 가지고 다니며 불곤하였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는 '박 선생'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될 정도였다. 때로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악단을 만든 뒤 출장 공연까지 다니기도 하였다. 나팔은 박정희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였고 퍼져나가는 나팔소리와 함께 가슴속 깊이 품고 있던 군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어머니와 박정희

 

계란

어려운 가정형편에 박정희의 학교 수업료를 내기 위해 어머니는 계란을 모아 팔기도 하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문경공립보통학교는 1912년 4월 12일 4년제 학교로 개교하였다. 1950년 8월 1일 문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1996년 4월 1일 지금의 문경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2018년 2월 9일 104회 졸업식을 맞으면서 그동안 13,93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4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간 근무하였다. 교사 박정희는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고, 태극기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는 학비까지 챙겨주는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부임 시절1937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박정희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박정희 오른쪽에 있는 강신분은 "선생님은 워낙 착실하여 일본인 교사들과도 원만한 사이였다."고 회상하였다.

 

동료 교사들과의 악기 연주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어 종종 동료교사들과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위 사진 가운데가 박정희)

 

 

- 계속

 

 

www.youtube.com/watch?v=1xZC9pJ_K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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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2

 

 

생가 모형 앞에서 설명문을 읽고 있는 승부

 

대구사범학교

 

박정희 대통령 가계도

 

구미의 명산 금오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상모리는 1910년대 당시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가난한 농촌 마을 중 하나였다. 박정희는 아버지 박성빈朴成彬1871~1938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1872~1949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박정희를 임신한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과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해 뱃속에 아기를 지우려고 애썼지만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보냇다. 20리8km나 되는 등굣길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겨울이면 빙판길에 수없이 넘어졌고 늑대까지 나타낼 땐 힘든 등굣길이 되기도 하였다. 가끔 어머니가 보리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주던 비빔밥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년 박정희를 깨우는 어머니

 

탈곡기

 

보통학교 자연과학 교과서(初等理科書)

1931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 자연과학 교과서

 

소설 《이순신》

구미보통학교 시절 즐겨 읽었던 춘원(春園)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

첫 장에는 직접 작성한 감상문이 쓰여 있다.

 

구미보통학교 성적표

구미보통학교 시절 성적표(역사, 지리, 산술, 조선어 성적이 우수하였고 6학년 때에는 13개 과목 중 체조와 가사실습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이었다.

 

李舜臣 實記

 

이순신 실기를 읽고 있는 소년 박정희

 

대추방망이 소년시절

 

소년시절 박정희는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야무지고 통솔력있는 당찬 소년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1등을 차지하였고, 3학년부터는 반장을 도맡았다. 책읽기를 좋아하였던 박정희는 그중에서도 위인들에 대한 전기를 즐겨 읽었다. 5학년 때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쓴 소설 《이순신》을 읽었고,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는 어린 박정희가 영웅의 꿈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일 일제강점기 당시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대구에 설림된 학교이다. 설립 당시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출발하였으며, 1929년에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다시 신설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사범학교제도 개편에 따라 전문학교 수준의 사범학교가 되었고, 1946년 10월 15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62년 2월 경북대학교 병설교육대학으로 개편, 1963년 2월 2일 제12회 본과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현재는 대구교육대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사범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 정도로 경쟁률이 높고 우수한 학교였다. 특히 평양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 경성사범학교는 전국 3대 명문학교로 손꼽혔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

 

1932년 4월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개교이래 최초로 대구사범학교(제4기생)에 입학하였다. 입학 정원 100명(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 중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한 잦은 결석에 고학년으로 갈수록 학교성적은 최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사격, 육상, 나팔 등에는 남달리 뛰어났다.

누나인 박재희朴在熙는 "동생 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진학은 쉽지만은 않았다.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응시는 하였지만 학비를 지원해 줄 형편이 되지 못한 부모님은 차라리 시험에서 떨어지길 바라셨다."고 하였다. 사범학교 5년 동안의 배움은 청년 박정희의 포부를 키우는 시기였다.

 

대구사범학교 마크

 

 

- 계속

 

 

 

 

www.youtube.com/watch?v=FMESsRCIu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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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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