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기념관] 09
간호사
서독 파견 간호사는 독일 마인츠 대학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만 226명의 간호인력이 파견되었다.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간호원 중심제'로 간호사들은 의료인으로서의 업무 외에도 환자 옷 갈아입히기, 병실 청소, 식사 보조 등의 일을 하였다. 이러한 고된 일과에도 연장근무와 주말근무까지 자청해 가며 모은 돈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이들의 성실과 친절함에 독일 언론은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등의 내용으로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근로자들이 송금한 돈은 당시 우리나라 연간 총 수출액의 2%에 가까웠으며 국제수지 개선 및 국민소득 향상, 나아가 한국경제성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후 서독파견 근로자들 중 60%가 제3국에 정착하여 재외 한인사회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광부
1963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고, 실업자는 전체인구 2,400만 명 중 250만 명이 넘었다. 당시 서독 파견 광부의 평균 임금은 한국 공무원 월급의 7배나 되는 600마르크(160달러)로, 중졸 이상의 광산 경력이 있는 자를 우선시 했지만 심각한 실업난에 광산 경험이 없는 대졸의 고학력자들까지 대거 지원함으로써 광부 500명 모집에 지원자가 무려 4만 6,000여 명에 달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7년까지 7,936명의 광부들이 서독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허리도 제대로 필 수 없는 좁고 깊은 지하갱도에서 8시간 이상 석탄을 캐는 힘든 작업을 하였다. 이를 본 서독 정부와 국민들은 한국인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들이 1,000미터가 넘는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근무조건 1964년경
근무시간 · 주 40시간
임 금 · 지상근무 1일 약 20.20마르크(약 1,290원)
· 지하근무 1일 약 30~39마르크(약 1,920~2,500원)
숙 식 · 광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2~4명이 함께 거주(비용 본인부담)
우리들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하고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합시다.
1967년 1월 17일
박정희대통령 연두교서 중에서
革命完遂 1962
政淸人和 1963
官淸民自安 1964
勤勉儉素 1965
自立 1966
跳躍 1967
農工倂進 1968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1969
자조 자립 자위 1970
혼란 없는 안정 속에 중단 없는 전진을 1971
總力安保 1972
國力培養 1973
勤儉協同 總和維新 1974
勤儉節約 國論統一 1975
增産節約 自助自立 1976
自立經濟 自主國防 1977
天下雖安 忘戰必危 1978
總和前進 1979
안 된다고 이래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영원이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는 그런 자신과 의욕이 있는 사람만이
나는 이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1971년 1월 11일
연두기자회견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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