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지하 정원

 

 

 

 

 

조선경 지음

2011, 보림출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71411

 

 

813.8

조5419지

 

 

 

날이 저물고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옵니다.

모스 아저씨는 그제야 나갈 채비를 합니다.

창문을 꼭꼭 닫고, 햇볕을 쬐라고 내놓은 화분도

안으로 들여놓습니다.

비좁은 화분에 심어 놓은 작은 나무는

뒷산에 쓰레기와 함께 버려졌던 것입니다.

'적당한 곳에다 옮겨 줘야 할 텐데······.'

아저씨는 구두끈을 당겨 매고 거리로 나섭니다.

골목을 나와 동네를 가로질러 사거리까지

내려가면, 지하철역이 보입니다.

 

 

 

아저씨는 이 지하철역에서 청소부로 일합니다.

지하철역은 사람들이 이 도시로 모여들던 시절에

지어졌습니다. 빙글빙글 돌아 오르내리게 되어 있는

나선 계단은 이 역의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계단일 뿐입니다.

아저씨는 깨끗이 빨아서 물기를 꼭 짠 걸레로

계단을 한 칸 한 칸 닦습니다. 그러고 나면 낡은

계단도 잠시나마 옛 모습을 되찾는 것 같습니다.

긴 승강장은 쓰레기가 철길로 떨어지지 않도록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조심스레 비질을 합니다.

 

 

 

아저씨가 승강장을 걸레로 닦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맞아, 지하철이 들어올 때면 더한 것 같아."

막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때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윙윙 들려왔습니다.

지하철이 떠난 뒤에도 사람들이 했던 말은

아저씨 귓가에 남아 윙윙거렸습니다.

 

 

 

아저씨는 멀어져 가는 지하철을 멍하니 바라보다

터널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고약한 냄새가 훅 끼쳐 왔습니다.

아저씨는 우두커니 서서

텅 빈 터널을 바라보았습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달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여느 때처럼 새벽 첫차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습니다.

저녁에 다시 일을 나가려면 낮에 잠을

자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터널에서 나는 냄새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잠을 설친 아저씨는 다른 날보다 일찍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청소를 마친 뒤,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저씨는 바닥에 고인 물을 훔쳐 내고,

벽에 덕지덕지 앉은 검은 때와

곰팡이를 벗겨 냈습니다.

물비누를 풀어 벽을 닦자, 까만 비누 거품 사이로

파란 벽이 드러났습니다.

 

 

 

아저씨는 날마다 조금씩 시간을 내서

터널 안을 청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터널 벽에서

땅 위로 통하는 환기구를 발견했습니다.

환기구에 가득 찬 쓰레기를 치워 내자

은은한 달빛과 서늘한 밤바람이 밀려들었습니다.

밤바람에 실려 오는 자동차 소리마저

상쾌하게 들렸습니다.

아저씨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저씨는 환기구 안쪽 하늘이 보이는 곳에

흙을 가져다 두둑이 쌓았습니다.

그리고 집 화분에 심어 두었던 작은 나무를

옮겨 심었습니다. 작은 나무 혼자는 외로울 것 같아

늘 푸른 넝쿨도 함께 심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시멘트 터널 안에

아저씨만의 아담한 정원이 생겼습니다.

 

 

 

아저씨는 그 뒤로도 날마다 조금씩 시간을 내어

터널 안을 청소했습니다.

터널에서 나오기 전에 지하 정원에 들러

작은 나무에 물 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흙을 돋우고

거름도 보태 주었습니다.

이제 터널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은

풋풋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기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

것을 보면, 아저씨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환기구 틈새로 햇빛이 들어오고,

이따금씩 빗방울도 떨어집니다.

저벅, 저벅, 저벅······.

작은 나무는 아저씨의 발소리를 들으며

부지런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어느 봄날, 작은 나무는 땅 위로 살짝

가지를 내밀었습니다.

"엄마, 엄마, 이것 좀 봐요!"

지나가던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습니다.

언제부턴가 환기구 덮개 위로 솟아난 나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지하철역 환기구에서 나무가 자란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건너

온 도시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느 날은 신문사에서 사진을 찍어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방송국에서 역무원들을 찾아와

나무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지하철역은 나무를 보러 온 사람들로

날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북새통도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은 하루하루 뜸해져서,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저벅, 저벅, 저벅······.

나무는 아저씨의 발소리를 들으며

탁 트인 하늘로 가지를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 누군가 나무 둘레 딱딱한

바닥을 걷어 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었습니다.

풀씨가 날아와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봄에도, 그 이듬해 봄에도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었습니다.

나무들은 쑥쑥 자라,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고운 빛으로 도시를 물들였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사람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작은 쉼터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풀 냄새 가득한 정원이 있습니다.

저벅, 저벅, 저벅······.

모스 아저씨는 오늘도 승강장 청소를 마치고,

지하 정원으로 익숙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지은이

조선경

 

1990년 뉴욕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시절, 나는 맨해튼과 호보켄 사이 홀랜드 지하철 터널을 청소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모스를 만났다.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책장 가득 꽂혀 있는 다양한 책들, 미술 교육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가 그린 800여점의 그림들, 틈나는 대로 작곡에 몰두한다는 그의 피아노를 볼 수 있었다. 늦은 밤 고된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도, 일 외에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어 가는 청소부 모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현실의 모스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달빛이 새어 드는 널찍한 환기구를 발견했다면, 틀림없이 그곳에 나무를 심었을 거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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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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