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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0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개요) 1962년 1월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계획 수립 단계부터 국내외 경제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중점과제로는 식량자급, 산림녹화, 수산개발과 화학 · 철강 · 기계공업 등을 건설하여 공업고도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용을 증대하며, 가족계획의 추진으로 인구팽창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와 영농다각화를 통한 농가소득 향상에 주력하며,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을 배양하여 기술수준과 생산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원래 계획의 목표치인 7%를 훨씬 상회하는 11.4%를 달성하였고 석유화학 공업의 비중이 증대되면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였다.

 

제1, 2차 5개년 계획과 실적대비 일람표 1969.3.31 작성

 

제 1, 2차 경제개발 계획은 경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적으로 발달시켰다.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과 함께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부강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번영의 70년대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발전단계를 추진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은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인 증대,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두었다. 중점목표로는 식량증산과 주곡의 자급, 농어민 소득증대, 경지정리 및 영농의 농기계화, 농어촌 보건 · 문화시설 · 전기 · 도로망확충 · 수출 35억 달러 달성, 중화학공업 건설과 공업의 고도화, 사회간접시설(전력 · 교통 · 보건 · 하역 · 통신)의 균형적 발전, 국토자원의 효율적 개발, 주택 · 위생시설 확충, 근로환경 개선 등이 있었다. 그 결과 국제통화질서가 붕괴되고,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위기에도 우리나라는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였고, 수출 78억 1천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5년 동안 7배의 수출 증가를 기록하였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구성 비율을 한층 높이고, 자본재의 대외의존도를 경감시켰다.

 

3차 5개년 계획(안) 1971.2.1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은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역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 · 2 ·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 결과로 사회개발의 필요성과 형평의 문제가 부각되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력성장구조의 실현, 사회 개발을 통한 형평의 증진, 기술혁신과 능률의 향상에 목표를 두었다. 기본방향은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농어촌 생활환경개선의 지속적 실시, 신기술 도입 및 토착화, 산업구조의 고도화, 연구개발 투자증대, 노사협조체제 강화, 수입자유화 촉진, 기업 경영합리화 등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화학공업화로 수출액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 1인당 GNP 944달러 달성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76.6.15

 

성장, 능률, 형평의 기조 아래 자립경제를 달성하고 기술혁신과 능률향상을 기한다는 기본목표로 추진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주적 경제개발 의지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혼란과 사상적 혼란, 6 · 25전쟁으로 경제적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말까지 국민들은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며 가난에 허덕였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1년 국가재정의 대미위존도는 39.2%에 이르렀고, 국방비는 무려 95.1%에 달하였다. 미국의 원조없이는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엇다. 자원과 자본은 한정되어 있고, 빈곤 속에 실업률은 늘어만 갔다. 국가의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계획이 유일한 돌파구였으며, 이에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장기적으로 낙후된 우리 경제를 의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고, 빈곤에 대한 숙명론이나 체념에서 벗어나 자율적 의지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1962 - 196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irst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경제 기반 조성

 

· 전력,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 농가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 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 고용의 증가와 국토의 보전 및 개발

· 수출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

· 기술의 진흥

- 베트남 파병

- 발전소 설치

 

1967 - 197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Secon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산업구조 근대화 / 자립경제 확립

 

· 식량자급

· 공업구조 고도화의 기틀마련

· 7억 달러 수출달성, 획기적인 국제수지 개선의 기반확립

· 고용증대, 인구팽창 억제

· 국민소득의 획기적 증대

· 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 인적자원 배양

- 공업단지 건설

- 농촌 근대화 10개년 계획 발표

- 1971년 :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IBRD 차관 협정 체결

 

1972 - 1976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Third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립적 경제구조 달성 / 지역 개발의 균형

 

· 주곡 자급, 농어민 소득 증대

·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 공업의 고도화

· 과학기술의 향상과 인력개발

· 사회기초시설의 균형발전

· 지역개발 촉진, 공업과 인구를 적정하게 분산

· 국민의 복지와 생활향상을 기함

· 수출 35억 달러 달성

- 1971년 10억 달러 수출달성

- 1974년 44억 달러 수출달성

- 1973년 : 1차 오일쇼크

- 중동건설 근로자 파견

 

1977 - 1981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The Fourth 5-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자력성장구조 확립 /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 투자재원의 자력조달

· 국제수지의 균형

· 산업구조의 고도

· 농어촌 생활환경개선 사업지속

· 새로운 기술도입과 토착화 촉진

· 연구개발 투자 증대

· 노사협조체제 강화,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

· 수입자유화 추진

· 기업의 경영합리화

- 1977년 100억 달러 수출달성

- 의료보험제도 실시

- 1979년 : 2차 오일쇼크

 

 

독일의 일터로

To West Germany to Work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가난과 심각한 실업난, 그리고 경제개발 정책에 따른 외화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당시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세를 보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현상을 함께 겪고 있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서독과 '한독근로자채용협정韓獨勤勞者採用協定'을 체결하고 서독정부로부터 1억 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가족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가며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근면정신으로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땀흘려 일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은 물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Glück auf

"글뤽 아우프"

 

위험한 지하에서 무사히 돌아오시오

 

함보른의 눈물바다

Sea of Tears in Hamborn

 

1964년 12월 10일, 함보른 광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만났다.

350여 명의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통령을 맞이하였다. 강당 내 애국가가 연주되었고 대통령의 선창으로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친 광부와 간호사들은 목이 메여 눈물을 흘렸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이 타국에 와 고생하는 현장을 본 대통령도 이어 부르지 못했다. 눈물을 닦아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萬里他鄕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 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異域萬里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모국母國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때문에 이 먼 이국異國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가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장내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대통령도 울고 영부인도 울고, 광부와 간호사도 울며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 계속

 

 

www.youtube.com/watch?v=5-8XbDV-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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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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